책 좋아하는 부모를 갖는다는 건 어떤걸까? 난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환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 책에는 그 환상이 종종 힘들 때도 만든다고 한다. 


저자의 아버지는 딸 아이에게 "삐삐 롱스타킹" 책을 읽어주는데, 아이가 화장실에서 넘어져 눈꺼풀이 찢어져서 안대를 했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속상해했는데 아버지는 이 외눈박이 해적 같은 모습을 위로하기 위해서 해적 아버지를 둔 삐삐 이야기를 읽어준다. 하지만 아이는 의도와는 달리 삐삐에게 압도되어 겁을 집어먹고 만다. 할로윈 땐 옆집의 과한 호러 집 장식에 공포를 느끼는 아이를 이해시키기 위해서 "슬리피 할로의 전설"을 읽어주기도 하는데 이는 아이가 더한 공포를 갖게 했다. 좀더 자란 아이는 하교길에 친구들과 동네의 귀신집으로 소문난 폐가에 들렀다 오곤 했는데 아버지는 그런 아이에게 "안녕, 스카우트, 오늘은 부 래들리 찾았니?" 라고 박자를 맞춰주기도 한다. 


어머니는 자신이 어린 시절 좋아했던 "비밀의 화원"을 아이 침대 옆에 두면서 은근 압력을 넣기도 하고 아이들의 정서에 좋지 않다고 판단한 금박 장정의 (그것도 친척 아주머니의 선물이었던) 양장본 그림동화집을 오랫동안 다락방에 숨겨두었다. 파스타를 좋아해서 식사 때마다 빠뜨리지 않고 자신이 직접 조리하는 아버지는 가끔 엄마가 국수를 삶을 때 제대로 저으라고 계속 잔소리를 한다. 이에 짜증이 난 어머니는 "알았어, 빅 앤서니!" 라고 받아치는데 빅 앤서니는 동화 스트레가 노나 시리즈에 나오는 마녀의 얼뜨기 도제 이름이다. 저자가 4학년 땐 아이에게 어머니는 집 길건너 건물에 실비아 플라스가 살았었다고 얘기도 해준다. 그게 누군지 아이는 몰랐지만. 고등학생 딸아이가 첫사랑이 끝나고 침대에서 울자 그 옆에 슬쩍 "레베카"를 갖다 준다. 


포스팅을 많이 쓰곤 있지만 이 책이 그렇게 아주아주 좋기만 한 건 아니다. 언급한 책들 중 많은 것들을 내가 읽지 않은 책들이어서 샘이 나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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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0-08-21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의 부모님들이 굉장한 애서가였나봐요 모든 양육을 책과 연관 짓는게 신기하네요 아이입장에서는 좀 질릴 것 같기도 해요....

유부만두 2020-08-21 13:58   좋아요 1 | URL
그렇죠? 그래도 저 저자는 책을 좋아하고 문학을 전공했다고 하니 어쩜 독서에는 천성이 필요한지도 모르겠어요.

전 아이들이 책을 그닥 안 읽어서 이젠 포기했어요.

moonnight 2020-08-21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굉장한 부모님이네요 @_@;;;;;; 저런 분들이 제 부모님이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봅니다. 현실감 없지만-_- (지금의) 저라면 좋을 것 같긴 한데 ㅎㅎ

제 조카들도 책을 그렇게 좋아하진 않는 것 같아요. 아기때부터 나름 노력했지만ㅎㅎ;;

사실 책보다 축구를 더 좋아한다는 게 기뻐요 홋홋^^

유부만두 2020-08-22 11:35   좋아요 0 | URL
아이와 같은 책을 읽고 얘기하는 ‘로망‘이 제겐 있었어요. 하지만 그건 이미 예전에 포기했어요. 이젠 아이 숙제로, 아이 핑계로 산 동화, 청소년 도서를 제가 먼저 읽습니다. 요즘 청소년 도서는 제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보여주거든요. 라떼엔 없던 문화죠.

조카들이 축구를 즐긴다니 멋진데요?
울리집 막내도 축구를 좋아해서 맨유 유니폼을 인터넷 쇼핑몰에서 사줬더니 그걸 입고 집에서 방방 뛰고 있어요;;;;
 

영화 '토이스토리'가 나오기 한참 전부터, 우리 집안에서는 장난감들이 우리가 방을 떠나면 살아 움직인다는 것이 상식이었다. (54)


난 엄마에게 삐삐 같은 여자애가 옆집으로 이사 오면 어떨 것 같으냐고 물었다. 엄마는 별로 좋을 것 같지 않다고, 삐삐가 토미와 아니카의 엄마를 (그리고 나를) 그리도 불안하게 만든 이유를 이해한다고 답했다. (69)


그해에 언니에게는 내가 돼지고기를 먹는 것을 볼 때마다 귓가에서 '윌버'( "샬럿의 거미줄" 주인공 돼지)라고 속삭이는 고문 같은 버릇이 생겼다. (103)


"제일 좋아하는 책이 뭐에요?"는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질문 중 하나이다. (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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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화분과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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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가 자기 '인생책'이라고 했다. 학원 숙제로 읽었는데 어떻게 숙제가 재미있을 수 있는지 자신에게 감탄했다고 했다. 아이는 중2 인생을 걸었다. 


이 책은 전엽체 이상으로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타인에게 공감을 할 수 없는 아이 윤재의 이야기다. 자신을 '괴물'이라고 부르는 윤재의 성장기라고 하기엔 비극이 엎치고 덮친 데 또또 끝까지 겹쳐서 읽는 내내 힘들었다. 이제 겨우 고등학생인데. 그리고 얘 주위엔 '정상적'이거나 '보통'인 사람들도 죄다 어딘가 (전엽체가 아니라 하더라도) 망가져서 (그랬길 바란다. 이유가 있으면 고칠 수라도 있겠지) 엉망으로 진창으로 구는 것들만 있다. 다른이를 해하고 상하게 한다. 


즐거운 독서는 아니었다. 몰입해서 한번에 읽었지만 찜찜하다. 두 청소년 윤재와 곤. 이 아이들의 가정은 대칭적으로 보이는데 엄마들이 뭔가를 잘못 했고 아이들이 벌을 받는다, 라는 뉘앙스가 보였다. 그 엄청난 뒷수습은 아무도 하지 못한다. 믿고 의지할 어른이 없다. 오롯이 두 아이들이 온 몸으로 온 인생으로, 그 어리고 아까운 인생으로 받아 넘어지고 다친다. 


가난하고 단란한 집, 부자지만 불안한 집, 책이 좋아, 골목길 집단 폭행과 하필 그 애가, 과거가 있는 박사님, 가출 청소년, 깡패 성님들, 달려라 하니, 아니 도라, 어디선가 봤던 인물들이 우루루 나와서 그 모든 비극을 이 한 권에 부어넣었다. 아이들은 그냥 넘길 행간의 위트가 그나마 어른 독자를 상대해주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쎈 걸, 중고등 학생들에게 읽으라면 어쩝니까. 애들은 더한 폭력도 상대할 수 있다지만 이 책의 '그동안 수고했어, 자, 해피 엔딩'이 앞에서 깔아놓은 칼빵에 맞설 수가 없잖습니까. 어쩜 완득이 보다 더 독해. (애호박 생각났어, 젠장) 


이 책의 음식은 캘리포니아 산 아몬드와 자두맛 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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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곰 2020-09-23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유부만두님 이 리뷰가 너무 좋아요. 저는 안 읽었지만, 왜 이 책이 읽기 싫었는지 알것만 같아요.

초 6학년 아이가 온라인 수업 중에 과제로 이 책을 오디오로 듣는다는데요. 첫 부분을 몇 번 듣고는 너무 재미있다고 했는데, 이후에는 어땠는지 물어보고 싶어졌어요.

유부만두 2020-09-24 19:55   좋아요 0 | URL
제 리뷰를 좋아하신다니 제 기분이 막 좋아요. ^^
직접 책을 읽으신다면 저와는 다른 인상을 받으실지도 모르지만요.

초6이 읽기/듣기에는 이 책은 폭력적 내용이 (묘사도) 많아요. 그렇지만 결말에선 급하게 좋게 좋게 마무리 되지요. 강렬한 인상을 주고 내용 전개가 빨라서 저희집 막내도 재미있게 읽었다는데 전... 좀 그랬어요.
 

정은지 저자의 <내 식탁위의 책들>을 재미있게, 무엇보다 시원하게 읽었기에 (내 오랜 음식 궁금증 '라임 절임'을 해결해줌) 다음 음식책을 찾아보고 있었다. 이 책은 그의 번역서다.


이 책은 현재 뉴욕에서 '푸주한'으로 일하는 카라 니콜레티의 독후 엣세이와 요리법 모음집이다. 저자는 문학 전공자에,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 역시 정육점을 했기에 각별한) 음식 사랑과 함께 성장했다. 어린시절/청소년기/성인기에 맞춰서 소개되는 책이 다양하고 글을 읽는 맛도 있다. 삽화도 맛있음. 실은 이런 음식/맛 주제의 독서록 엣세이를 읽을 땐 소개되는 음식보다는 책들에 더 궁금증이 일곤한다. 라임절임이 궁금한 채로 사십 년을 살았지만 맛있게 소개하는 책을 찾아보지 않고는 일 년, 아니 일 주일도 견디기 어렵다. 


지난 석달 간 많이 샀고 읽거나 훑었고 엄청나게 실망과 감탄도 했다. 하지만 아임 스틸 헝그리. 이 책이 나의 게걸스러운 (원서 제목  Voracious 게걸스러운, 열렬히 탐하는) 독서에 기름을 더 부었다. 음식은 늘 행복하거나 아름다운 상황에서 나오는 건 아니다. 범죄 현장에서, 이별 직후에 혹은 거식증 환자의 이야기에 나오는 음식을 천연덕스레 소개하고 (양들의 침묵에 나오는 간 요리!!!) '자, 함께 만들어 먹어보자고요?!' 라고 말한다. 요리법은 그닥 어려워 보이지는 않.... 지만, (저자는 친구들과 함께 해 먹었다고) 요리법도 찬찬히 읽으면서 향과 맛을 상상해 보았다. 과식, 절식, 금식, 탐식 그 모두가 책 위에서 펼쳐진다. 




책에 대한 감상 (보다는 오마주)과 레서피를 엮었던 <하루키 레서피>보다는 내용도 문장도 훨씬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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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0-08-22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부만두님 글 읽고 나도 사야지 하고 주문하려고 하니 3년전에 이미 샀지 않았냐 한심아-_- 라고 가르쳐주네요 친절한 알라딘-_-;;;

유부만두 2020-08-22 11:36   좋아요 0 | URL
전 인터넷 서점을 다른데도 쓰기 때문에 어쩔 땐 산책 또 사, 산책 안 읽고 또 사, 이런 만행을 저지르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