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완네 집쪽으로” 3부는 이름, 장소, 기억과 변화에 대한 이야기다.
장소의 이름에서 그 곳들의 인상과 날씨, 색깔과 (상상과 기억의) 추억들, 더해서 이름의 철자와 발음에서 피어나는 풍성한 이미지들이 펼쳐진다. 우리에게 여수나 부산이 어떤 특정한 시간의 날씨를 연상시키고 코로나 시기에도 제주도가 특별함을 갖고있는 것처럼.
부활절 방학 때 이탈리아 여행을 계획하다가 그 찬란한 연상작용에 그만 흥분에 겨운 어린이 혹은 청소년 화자는 병이 나 버린다. (1부 침실에서 징징대던 아이보다 조금 자란 화자는 파리 집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다. 민음사에선 열네 살 즈음으로 추정하지만 학교가 파하는 오후 3시에 하녀겸 보호자로 프랑수와즈가 데리러 가고 눈싸움과 술래잡기도 하는 걸 봐서는 더 어린 나이 같다.)햇볕 찬란한 이탈리아 여행은 취소되고 상심이 큰 화자는 보호자겸 감시원 프랑수와즈와 함께 샹젤리제 공원으로 운동 겸 산책에 나선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다른 '이름'으로 흥분하게 되는데 바로 질베르트. 1부 콩브레에서 언뜻 보았던 그 드세보이던 아이다. 질베르트는 스스럼 없이 또래인 화자를 대하고, 실은 아주 친하게 군다. (눈을 뭉쳐서 목덜미에 넣고 막)
질베르트가 자길 좋아한다고 상상하고 그녀의 이름과 주소를 노트에 수십번 수백번 적어보는 아이. 아마 이름 글자 획으로 사랑점을 쳤을지도 모르지. 맞아 질베르트는 날 좋아해! 나한테 마노 구슬도 사줬고! 내가 부탁한 책 (바로 그 베르고트 작가가 쓴 절.판.도.서.)도 구해줬어! 내 앞에선 날 별로 좋아하진 않는다고 했지만, 내일 아니면 모레엔 나한테 고백할거야! 라고 생각해보았자, 맘 속의 조용한 '여자 직조공'은 차분하게 관계의 실을 고르며 이야기 해준다. '응, 아니야. 걘 너한테 관심없음. 그냥 그 앤 용돈이 많고, 네가 그 구슬 앞에서 불쌍해 보였을 뿐임'
프루스트는 2부의 스완이 꿈을 통해 둘로 나뉜 자아를 만들어 현실 파악을 하도록 도운 것처럼 3부에서는 어린 화자 속에 '여자 직조공'을 초대해 관계의 팩트폭격을 담당하게 한다. 그 덕에 어린 화자는 너무 심하게 질베르트에게 집착하지는 .... 않았다고 말하고 싶지만, 이 애가 참 남달라요. 하지만 그 시절을 (어른의 시간에 서서 어른인 화자가) 돌아볼 땐 안타깝고 불안하기만 했지 순간순간의 찬란함을 즐기지는 못했다. 불안과 기대를 번갈아 겪어내느라 그 어린 눈에는 즐거움의 티끌도 보이지 않았다. 질베르트의 고백과 편지를 상상할 시간에 그냥 뛰어놀지 그랬니. 그 아이가 어느 길로 올지 모르고 시간도 어림할 뿐이어서 그 구역 전체가, 그 오후 전체가 설렘으로 가득찬 어린왕자-여우 스러운 그 황금빛 설렘이 아깝기까지 하다.
그래도 이번 이야기는 '이름'이 포인트. 인물들은 지명 뿐 아니라 이름을 아주 능숙하고 감각적으로 다룬다. 질베르트가 화자의 이름을 그 입 속에 넣어 발음해 줬을 때! 자신의 껍질이 벗겨지고 확실히 둘 사이의 뭔가를 확인하는 기분이 들었다. (변태 맞음) 그리고 질베르트의 이름이 그 애 앞으로 날아가 실체를 만나서 긍정해 줬듯이 화자가 그 애 이름을 종이 위에 적으면 어떤 약속을 만드는 것만 같았지. (직조공 언니 다시 왈, 응 아니야) 화자는 질베르트의 이름과 그애가 사는 동네 길 이름을 자꾸만 입에 올린다. 아버지가 (그 눈치 둔하신 양반이) 알아차리실 정도로.
그런데 화자의 진짜 찬양은 실은 질베르트의 '사생활' 즉 그 부모를 향한다. 2부 '스완의 사랑'에서 채 다 펼치지 못한 변태의 모습이려나. 이 어린 화자는 스완씨를 그리고 스완 부인을 길이나 공원에서 기다리느라 불쌍한 프랑수와즈를 끌고 파리를 쏘다닌다. 스완씨를 자꾸 좋아하면서 그의 이름에 집착하고 그가 눈을 비비는 습관을 따라하고 질베르트를 향하는 고심은 스완을 본뜬 면이 완연하다. 아, 심지어 스완의 대머리까지 닮고싶다고 고백하는 화자라니. (너, 잘 생각해봐라)
"그 스완이라는 이름이 [...] 이제 나에게는 전혀 새로운 단어였다."
"내가 그 단어를 분해하여 하나 하나를 읽었고, 나에게는 그 철자가 하나의 놀라운 현상이었다." (펭귄1, 634-5)
스완은 이미 1부에서 화자에게 저녁시간의 고통을 안겨준 인물이지만 이제는 그 별나고 신비로운 사랑이야기와 우아한 차림새와 질베르트까지 더해서 '역사적 위인' 같이 보인다. 스완 부인은 아예 여왕 같다. 화자의 묘사는 어느새 어른의 시선 비중이 커져서 스완 부인 오데트의 과한 복장과 한물간 미모와 추문을 언급하고 있지만 소년이 어색하고 과장된 몸짓으로 인사를 하자 (아직 소년을 알지 못했던 - 하지만 그 예전 알베르트 할아버지 댁에서 스친 적이 있었는데) 스완 부인은 공원의 거위에게 빵 조각을 던지듯 관심과 미소 한 조각을 적선했다.
그리고 불현듯, 컷, 하는 감독의 소리와 함께, '지금'으로 돌아온 작가의 시간. 책을 읽으면서 단락은 넓은 공백으로 바뀌고 조명마저 달라진 기분이 들었다. 그 이름들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다음 볼로뉴 숲을 찾은 화자. 11월 오전, 아직 다가오지 않은 가을을 즐기고 싶었는데 실은 어떤 그리움, 그 장소, 그때 그 사람들에 대한 욕구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우아한 여인들과 신사들의 마차 대신 자동차가, 심플한 모자 대신 과장된 과일 바구니 같은 머리쓰개, 더해서 남자들의 상스러운 민머리가 참담할 따름이다. 이런 변화라니. 내가 너무 늙은건가. 한탄하는 화자의 문장에 겹치는 내 심정, 내 맘 속의 직조공은 꼼꼼하게 알려주겠지, 프루스트가 독자 너님이랑 동갑이었음. 세월은 가고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래도 부질없는 시도라도, 집요하게 기억해내서 하나하나 적어내려가 먼 훗날 독자들이 한줄 한줄 읽어 가는 것이 하나의 답이 아닐까. 그것도 아니라면 어쩌지.
이렇게 갑작스런 장면과 시간 변화는 그 다음 이야기를 예고하고 있다.
책은 준비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