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작인 <환상의 빛> 보다는 덜한 감동이다. 아름다운 표지와 매끄러운 문장으로 짧은 시간에 읽어버려서 조금 아깝기도 한 소설. 부부 사이였던 이 두 사람은 편지로 대화를 나눈다기 보다는 각자의 독백을 써내려간다. 남편이었던 아리마는 다른 여인과의 일화를 은밀한 부분까지 필요이상으로 묘사하기까지 한다. 이들은 상대방 보다는 독자를, 그보다는 자기 자신들을 더 의식한다. 하지만 업보라는 개념은 영 불편했고 그 책임을 아이의 어머니가 짊어지겠다고 (싸워나가겠다고) 결심하는 장면은 답답한 기분 마저 들게 한다.
인형 같은, 아니면 아리마의 꿈 속에 나오는 다섯 살 어린 소녀의 여주인공 아키는 아버지, 남편들, 그리고 불편한 몸으로 태어난 아들까지, 삼종지도를 떠올리게 하는 인간관계 속에 서 있다. (남자 작가라서 그런걸까, 나약하고 아름다운 여성에 대한 판타지가 등장 여자 인물들에 노골적으로 드러나있다) 소설 말미에 어머니 묘소 앞에서 결단을 (아버지와 함께) 내리는 아키, 그녀의 앞길이 쉽지는 않겠지만 이제는 편지로 쓰는 독백 없이 혼자서, 아니 느리지만 성장해 나가는 아들도 함께 씩씩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이제 그녀의 진짜 목소리를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