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의 중요성 만큼이나 '인간'과 '연결'을 중요하게 여기는 단편들이 모여있다. 책은 어느 형태로 존재하든, 종이책, 텍스트, 칩, 정보, 총컬러 영상, 구술되는 이야기, 혹은 4d 인터엑티브 체험까지 곧 인간이라는 등식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니 책이 없다면 인간도 사라질 수 밖에.
인간을 무시하고 책에 담긴 정보/지식만을 챙기려다보면 결국 인간 사냥꾼 혹은 노예상과 다르지 않다고 책-종이-나무 설정부터 구구절절 풀어내는 <금서의 계승자>와 헌책방과 노포에 대한 노스텔지어에 작위적인 연애 이야기를 연결시키는 <켠>은 지리했다. (차라리 그 놈을 죽여버리지)
황정은의 <양의 미래>를 연상시키는 <12월, 길모퉁이 서점>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보다 덜 이상하고 더 따뜻했고 예측을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가혹한 가정 상황, 청소년 '정서' 학대는 고통스럽다. 학대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는 어린이는 <모든 무지개를 넘어서>에도 나온다. 열두 살, 초등 오학년 아이는 2150년의 가혹한 자연환경, 경제환경 속에서 나이든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몇몇 도구나 설정은 미래로 그려졌지만 낡은 종이책에 미련을 가진 모습들과 사람들 생활 모습들이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고 (덜 망했고) 평범해서 (성에 차질 않았단 말입니다) 어떤 반전을 기대하면서 읽었다. 다시 불려오는 <오즈의 마법사>의 황금길. 아이가 혼자 걷는 게 아니길 바란다. 성장소설 분위기만 퐁퐁 뿌리지만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열두 살, 도서관 카드로 뭘 할 수 있을까. 너무 낭만파잖아. 차라리 애한테 급식 카드를 주세요. 부모 재교육을 시키던지. 그 부모와 그 식구들을 그렇게 그냥 놔둔 상태라면 이 아이의 미래는 가시밭길일 게 뻔하다.
이경희의 <바벨의 도서관>은 문목하의 <유령해마>의 작은 버전 같다. 정보체계가 명령을 수행하기를 그만둔 다음의 세상, 중앙장치나 ai가 '창의력'을 가진 세상에서 '낡아서 생명을 다한' 데이터/기기는 누가 구해주는가. 모든 책과 모든 정보가 모인 도서관이 그 방대한 육각형 무한대의 (11차원으로!!!) 건물이 실재한다면. 그저 보르헤스의 뻥이 아니라 그곳에 알레프도 있다면 어쩔건가. 우선 반갑습니다? 악수는 ... 아, 아니요. 어려운 '과학' 이야기에 액션이 더해져서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결국엔 기초가 탄탄해야 합니다. 과학 기기일수록. 컴퓨터 부팅이 늦다면 일단 전원을 껐다가 다시 켭니다.
그 기초 이야기, 책의 성질, '쓴다' 그리고 '읽는다'에 집중해본다. 그 사이에 온갖 첨가와 삭제가 있다. 그 과정에 개입하는 사람과 사람 아닌 것들의 이야기는 이지연의 <역표절자들>에서 어지럽게 꼬여있는데 모르겠으면서도 알듯 말듯 읽게된다. 그리고 과거의 나는 현재의 나와는 다른 존재, 다른 '책'이었다. 그 책은 거대한 정보, 감히 덩어리를 자유로이 포기하거나 새로 만들 수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경전일 수도 있다. 여기서 조심. 이 모든 가능성, 이 온갖 뻥ability. 기억의 문제라고, 슥 넘어가 뭉게버릴 수도 있지만 책인걸. 찢겨나간 곳과 덮어 접어 둔 곳이,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사이에 조금씩 엇나가는 디테일에서 '나'는 결단을 내린다.
다시 책=인간(성??) 공식으로 돌아와서 꼼꼼 따져보는 소설이 <두 세계>다. 책의 세계와 현실, 사람의 육신이 사는 세계. 이 두 세계를 연결해서 인터엑티브 게임 같은 독서 경험 프로그램을 개발한 주인공이 어느 모험서사 '책'의 오류를 만나 두 세계의 본질에 대해, 몇 년 전 자살한 쌍둥이 동생에 대해서 고민한다.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을 열망하며 '정신'을 죽인다면 다른 곳으로 건너갈 수 있다니? <사자왕 형제의 모험>의 낭기열라 낭길리마 같은건가. 두 세계의 교차라는 과격한 설정에 의외로 쉽게 납득되는 나는 소설 속 세계를 잠깐 상상해 본다. 하지만 체험이라도 그곳으로 건너가는 건 겁이 난다. (스테판 킹의 세상도 박완서의 세상도 다 너무 고달프다. 살려준다고해도) 그러니까 '책에 갇히'는 건 누구인가. 등장인물들도 탈출하고 저자는 진즉에 놓아둔 책의 세계는 독자 앞에 와서 슬그머니 문을 열어둔다.
어젠 첫 네 편만 읽고 별로, 라고 생각했는데 끝까지 다 읽어서 다행이다. 네 명(더하기 알파) 분의 사람을 못 만날 뻔 했다. 읽지 않으면 모르니까 (그 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으니까) 갈등하면서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독자의 딜레마. 갇힐만 한가. 발을 들여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