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속‘

죄는 지은 네가 사죄를 해. 엄한 하느님 끌어들이지 말고. 빚내서 짓는 교회는 대체 뭐야. 하느님은 네 안에 있다°는 말. 이리 해달라 기도하지 마라. 지은 죄는 당사자에게 빌라. 신은 바쁘다.

볕뉘. 다시 보기로 한다. 신을 팔고 다니거나 자신의 죄를 감해달라 굽신거리는 자들을. ㆍㆍㆍ ㆍㆍㆍ인간 예수는 그러지 않았다.

° 레프 톨스토이,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박홍규역
° 이문영 Moonyoung Lee, 《톨스토이와 평화》, 모시는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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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포‘



눈에 들어갔나 봐.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어.
눈을 비비게 돼.

눈물이 나.


마음에 들어가나 봐.
마음을 제대로 닫을 수 없어.
마음을 비비게 돼.

눈물이 나.


꿈에 들어오나 봐.
꿈을 멈출 수 없어.
꿈이 보여.

여기저기. 저기여기.



눈물이 와.

발. 사마에게/ 빚어낸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과 잔 술. 잔잔한 이야기들. 하루를 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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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독을 사랑하기


[ ] 니체의 전설인 수퍼맨은 살과 금속의 공생이라는 대담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상징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니체에 대한 이러한 현대적 활용과 남용에 있어서 잊혀지고 지워진 것은 초인에 관한 그의 반복되는 기원이 인간적인 것으로 되돌아가는 우리를 불러낸다는 것이다. 초인의 약속은 그러한 방식들로 묶여져 있지만 인간적인 것에 관한 기억과 더불어서는 거의 탐구된 바도, 이해된 바도 없다. 현대의 기술론적 이론화는 ‘인간의 진정한 문제‘에 관해 우리를 눈멀도록 한다. 36

[ ]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을 주의 깊게 읽으면 그에게 인간적인 것이 영속적인 극복의 자리에 놓이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시원들에 관한 질문, 그리고 자기 투명성을 향하는 데에 수반되는 욕망은 그 책의 시작에서부터 추방된다. ‘우리‘ 인간들은 ‘필연성으로부터 빠져나와‘ 우리 자신을 낯선 사람으로 두어야만 하는 것이다. 특히,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지자가 될 수 없다. 39

[ ] 그는 실존의 희극의 인간 역사의 비극을 전환시킴으로써 도덕의 시원에 대한 진지한 탐구로 인해 기대되는 ‘보상‘을 말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역사가 상위의 ‘영원한‘ 생성에 종속되는 동시에 ‘영혼의 운명‘에 관한 디오니소스적 드라마를 향해 새로운 반전과 성과를 전개해 나간다는 것이다. 이 서문은 인간의 새로운 기억에 호소한다. 이는 한 번 획득되고 나면 우리가 ‘근대인‘이라는 돌림병을 잊어버리게 되는, 바꿔 말해 ‘독해의 기예‘를 망각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예에 이르고서야 다시 배우게 되는 것은 니체의 처방 이전에 있는 ‘어떤 시간‘, 곧 도덕적 과거와 초도덕적 미래에 대한 독해 가능성이다. 이러한 독해의 기억술은 살을 가진 글쓰기로서 우리의 신체 위에 통합되고 새겨져야만 한다. 42

[ ] 니체는 인간의 ‘진정한 문제‘를 작업하는 데에 있어 문화의 ‘실제 도구‘와 문화의 ‘잠재적 담지자들‘을 구분한다. 문화란 단순히 맹수인 인간을 문명화된 동물로 기르고 길들이는 일일 뿐이다. 문화의 기술들은 오로지 무를 의지하는 힘에의 의지를 육성할 따름이다. 즉, 힘에의 의지의 내면화 과정인 수동적 허무주의는 문화가 자기 혐오와 경멸 이외에는 그 병으로부터 빠져나올 어떤 것도 산출해 내지 못하는 지점에 이른다는 것이다...문화의 훈육을 향한 의혹의 태도는 낯설고 근대적인 지배자 혐오주의라는 중대한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49

[ ] 기억은 음악가들과 미술가들의 작품에서 증명되는 대각선적인 운동을 통해 수직적이고 수평적인 것으로부터 자유로워 진다. 모든 창조적 행위는 궁극적으로는 ‘탈역사적‘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그들은 ˝창조란 세계를 재현하는 과업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해 낸 돌연변이적인 추상적 선들로서 이는 정확히 그것들이 분절된 계들 하에서만 다시 포함되거나 다시 자리 잡는 새로운 형식의 역사적 실재를 모아 내기 때문˝이다. 52

[ ] 프루스트에 대한 연구에서 들뢰즈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기억이란 도구로 작동한다 - 우리는 단순히 극복에 대한 복무 하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가적인 종류의 의도적인 조작과 선전에 굴복하지 않는다. 기억의 주체는 이 자기 극복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따라서 그가 프루스트의 작품이 갖는 시원성을 논한다는 것은 과거와 기억의 발견이 아니라, 미래와 배움의 진보인 것이다. 56

[ ] 기억은 시간의, 지나가는 현재의 움직이는 토양을 재현해내긴 하지만 사실 그 바탕이란 능동적 주체의 시간을 빼앗아 버림에 따른 되기의 전유에 도전함으로써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다. 들뢰즈 이를 기억의 심오한 수동적 종합이라고 한다. 기억은 시간의 근본적 종합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과거라는 상태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 현재를 지나가도록 허용한다. 59

[ ] 보들리야르는 ‘인간이란 전갈(엉큼한 사람)‘이라고 쓴다. 살아있는 사물들을 함께 묶는 것은 ‘생태학적인, 생물권적인 연대‘가 아니라 죽음을 향한 또 다른 말인 항상적 평형론 덕분이다. 오히려 선good을 자유롭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악 또한 자유롭게 하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의 진정한 평형론‘과 균형을 만들어 내는 그것들과의 분리 불가능성 때문이다. 73 선과 악은 생명이 부단히 자신을 극복해야만 하는 무기들이자 멀리 울리는 상징이어야만 한다...가장 위대한 악은 가장 위대한 선에 속한다. 곧 , 그러나 이는 창조적인 선이다. 74 인간의 기억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그의 구성물로서 인간에 속하는 기억과 그의 소유가 아닐지도 모르는 기억인 인간적 되기에 대해 이중적으로 말한다는 것이지만, 동시에 어떤 다른 것과 ‘넘어섬‘을 알리는 일이기도 하다. 75


 2. 초인을 향해: 니체적 선별의 기예와 기교에 관하여


[ ] 당신은 모든 가치 판단에 있어서 관점주의적 감각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 전치, 왜곡, 그리고 기껏해야 한계가 명백한 목적론과 관점주의에 항상 들러붙은 뭐든지 간에.....당신은 모든 것을 향한 그리고 반하는 것 하에서의 필연적인 부조리를 이해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것은 삶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서의 부조리이자, 삶 자체가 관점주의적이고 부조리하다는 감각에 의거하여 조건 지어진 것이다 ; 해방의 수수께끼는 스스로의 덕뿐 아니라 스스로의 자기 극복을 정복하는 극기의 과정을 포함한다. 이는 관점주의 하에서의 훈련을 요구한다. 86,87

[ ] 당신은 아마도 탈주선을 그리며 도약을 만들어 낼지도 모르지만 거기에는 여전히 모든 것을 재층화하는 조직화, 기표에 대해 힘을 다시 부여하는 형식화, 오이디푸스의 부활에서부터 파시스트적인 응고물에 이르기까지....주체를 재구성하는 귀속을 다시 마주치게 될 위험이 존재한다./자유로운 영혼은 자신만의 독특하고 유일한 사례를 일반화해 내며(한낮의 경험이라고 하는) 이러한 경험의 기초 위에서 결정하는 법을 배운다. 95

[ ] 충일함으로 고통받는다는 일 98/우리는 오로지 우리 자신을 향한 불신의 태도를 취함으로써만 낭만주의를 ‘넘어서‘ 갈 수 있을 뿐이며, 이에 따라 자신의 가장 깊은 친구로서 가장 위대한 적이 된 스스로에 반하여 다른 쪽으로 데려갈 수 있고, 이러한 방식으로 ˝모든 낭만주의적 허위에 반대하는 용기 있는 염세주의˝에 대한 스스로의 길을 찾을 수 있다. 102/ 즐거운 학문- ˝영혼의 야단법석˝에 대해 말한다. 104 철학은 ‘변형의 기예‘이다. 위대한 건강이란 그것ㅇㄹ 고무하는 병과 이상들에 대한 긍정의 도래라는 필수 부분을 포함한다....우리는 우리의 고통을 통해 생각을 낳아야만 하며, 어머니들처럼, 피, 심장, 열정, 쾌락, 정념, 고통, 의식, 운명 그리고 파국 모두를 유산으로 물려주어야만 한다. 107 극도로 심하고 은밀한 병들로부터 ‘되돌아와‘ ‘새로 태어난다‘108 자신의 시간이 가진 궁극적 가치에 대한 측정에 주목하길 희망하는 ‘초월하는‘ 인간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기 안에서 이 시간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시간을 극복한다는 것은 그에 대한 우리의 앞선 반감, 그로부터 나오는 고통, 그리고 낭만주의를 낳는 고통을 극복하는 일을 포함한다. 다시 한 번 영원회귀는 이러한 시간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닌 오로지 그것의 수수께깨에 대해서만 말할 뿐이다. 110

[ ] 도덕이란 선과 악을 뛰어넘어 가는 일을 불가능하게 만들며 그것 자체가 바깥으로의 횡단이 불가능한 것이다. 112 금욕적 이상은 ˝인간의 총체적 역사˝로 스스로를 새겨 왔으며 그러한 방식에 있어서 양자는 두렵고 망각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지구라는 행성 위에서의 이러한 ‘진정한 파국‘은 또한 진정한 문제를 제기한다. - 단순히 개별성의 초월이나 바깥이 아닌 그것들 아래에 흐르는 어떤 흐름들을 위해서 말이다. 113


 3. 죽었는가 살았는가 ; 영원회귀의 죽음에 관하여


[ ] 유고- 억압적인 것으로서 비생기적인 것으로의 회귀에 대해 생각하기를 중단할 것을 요구한다. 차라리 우리는 죽음에 대한 재해석과 재평가를 통해 스스로를 완전하게 해야만 하며, 따라서 실제적인 것과 더불어, 또한 사후 세게와 더불어 우리 자신과 화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이 세계가 사후 세계로 가로질러 들어가는 것으로부터 연유하여 나아가는 하나의 축제라고 쓴다. 그러한 과업은 감각 가능한 상태이기에 그것을 즐겨라는 코미디로 이해되어야만 하는 일이다. 근본적인 전도를 통해 우리는 죽음을 생명의 대립이 아니라 그것의 진실된 자궁으로 다루어야만 한다. 129 긍정의 힘 즉, 역능과도 같은 영원회귀는 영원성으 계기인 모든 다수성을 긍정한다./어린아이와 같이 각각의 시간과 모든 시간들을 긍정하는 상태로서 변화의 총체를 이룰 때에만 승리할 수 있다. 131

[ ] 영원회귀라는 형식론은 극단적 잉여로의 시험을 밀어붙임으로써 자신의 바탕에서부터 범주적 요청을 패퇴시키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미리 주어진 도덕 법칙에 관한 반복에 관계되는 대신 도덕성을 뛰어넘는 법칙의 형식일 뿐인 반복 자체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블랑쇼가.. 영원회귀는 시간의 찰라성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시간과 존재 바깥에 있는 것으로, 또한 그것 자체를 바깥으로 생각해야만 한다. 이는 그것이 영원한 것, 곧 영원성으로 불릴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라고 한다. 132

[ ] 죽음은 즉자적으로는 무의미하지만 대자적으로는 흐름과 이동성에 접근하기 때문이다. 134 죽음의 삭제가 아닌 그것의 극복. 통합적 변형은 여전히 죽음에 속해 있긴 하지만 이제 소수자적 언어 속에서 드러나며, 그것은 한계로의 이행이 된다. 135 끊임없는 변화에 따라 삶을 해석하는 일은 삶이라는 잠재적 연속체를 전면에 가져다 놓는 일이어야만 하는 것이다./명령어들에 있어서 삶은 죽음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비행하고 창조해 냄으로써 그것에 답해야만 한다. 137

[ ] 바타유는 오로지 뻔뻔함만이, 음탕한 악마성만이, 충분히 행복한 자아의 상실로 이끌 수 있다고 쓴다. 죽음 이전의 유쾌함이란 삶이 뿌리에서부터 정상에 이르기까지 축하받음을 뜻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소멸하는 것에 대한 찬양 그 자체이거나 그것을 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보수를 넘어, 제한을 넘어 그리고 보존을 넘어. 139 세계에 도래하게 된 모든 존재의 유쾌함과 같은 모든 것들의 폭발적인 소진일 뿐이다.....나는 피투성이가 되고 부서졌지만 변화된 나 자신을, 끊임없이 죽이고 끊임없이 죽는 시간의 먹이이자 턱으로서 세계와 일치하는 나 자신을 상상한다. 140 죽음선에 대한 언급에서 신비주의적인 죽음욕동에 호소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의 고원에서 말하는 바에 따르면 욕망 안의 내적인 욕마들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배치들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욕망은 늘 배치의 문제였다. 142

[ ] 차라투스트라의 순수 생성을 도입하는 일에는 역행되는 잉여로서의 죽음을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 이 맥락에서 차라투스트라가 죽었다는 것은 한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이다. 즉, 그는 다시 또 다시 자신이 소멸과 변형의 지속 하에서 수많은 작은 죽음들을 갖는다. 최종적인 열사는 단번에 죽는 일이 불가능함을 증명하게 될 영원회귀의 반엔트로픽한 원리를 침식할 것이다. 154

[ ] 모든 이들은 죽음을 중요한 사건으로 다룬다. 하지만 죽음은 축제가 아니라...우리는 죽기를 배워야만 하며 도한 거기에는 임종을 맞은 이가 살아 있음에 대해 서약을 바치지 않는다고 하는, 그런 축제란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차라투스트라의 자유로운 죽음에 대하여) 나는 차라투스트라의 생성, 니체 철학의 생성을 괴물 같은 불-‘기계‘-로 독해할 것을 제안한다. 160 불-기계는 그것을 요리하고 끓임에 다른 우연성을 긍정하는 기계로서, 결국 작고, 복수적인 조작들에 의해 해방된 막대한 힘들이다./삶 안에서의 단련이자 심지어 초월까지도 넘어서는 살아 있는 동물적 능력의 육성을 요구하는 죽음인 것이다. 161

[ ] 니체가 자신이야말로 역사 속 모든 이름임을 주장했을 때, 그는 어떤 거대하고, 천박하고 우스꽝스러운 정체성을 스스로의 탓으로 돌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이 갖는 통약 불가능성을 긍정하고 영겁적 생성의 거리에서 나온 역사를 확장하는 중에 있다고 볼 수 있다. 163 죽음이란 결코 멈추지 않는 것이자 모든 생성에 있어서 결코 끝나는 일 없이 벌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자체 내에 주름져 있고 강도에 의해 접혀 있다. 죽음은 일어난다. 하지만 ‘생성‘에 따라서만 그러하다 165


4. 다윈에 반하는 니체


[ ] 니체가 다윈주의에 응하는 것이 생물학적 이론이 아니라 사회적 다위주의로서의 사회 이론임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점이다. 178

[ ] 힘에의 의지론은 적응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니체에게 이는 삶에 대한 총체적이고도 반동적인 개념이다. 삶의 능동적 개념은 오로지 그 강세가 적응이 아닌 자발성, 확장 그리고 새로운 방향과 해석을 제시하는 자기 형성적 힘들인 자기조직화가 우선에 놓일 때에만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는 삶의 과정에 있어서의 본질적 현상이 정확히 조형적이고, 형상을 창조해 내는 거대한 힘으로부터 작동하고 그 결과 외적 환경들을 이용하고 개발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181 자연도태는 계통발생학적인 나무의 가지를 쳐내지만 성장을 위한 새로운 가지들을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니체에게 힘에의 의지는 더 거대한 복잡성, 날카로운 차이화, 발전된 기관과 기능들의 우연성의 결과를 낳은 해석과 연결의 무의식적 과정에 따른 복잡한 진화 하에서의 능동성이다. 183

[ ] 니체가 생명의 목표와 목적이라는 관점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대목은 홉스, 스피노자, 애덤 스미스, 다윈류의 자기 보존인 반면, 이러한 극복의 결과인 보존을 동반한 힘을 단지 거두어들일 뿐인 것으로부터 빠져나와 강조하는 것은 바로 살이 있는 것들이 향유하는 것이다. 189 유기체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압도적이고 지배적인 것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적응으로 재해석된 압도성과 지배성, 또한 과거의 의미와 목적의 과정은 필연적으로 애매해지거나 완벽하게 제거된다. 191니체는 기계론적인 생리학과 생물학이 자연과학에 속한 투쟁을 정치화하며, 이는 결국 보다 상위의 힘으로서 지배하길 원하는 모든 것에 대립된다고 말한다....법을 도입한 사회는 힘의 결합체 간의 싸움에 필요한 수단이 아니라 일반화된 투쟁에 반하는 수단이자, 또한 마찬가지로 생명에 대해 적대적일 뿐 아니라 무로 통하는 비밀을 감춤으로써 인간의 미래를 암살하고자 하는 대표적인 것에 불과하다. 193

[ ] 인간이 번창해 온 것은 능동적 유형의 강함이 아니라 반동적 유형의 약함때문이라는 것이다..../생명에 대한 다윈-맬서스적인 관점의 승리가 이를 통해 설명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정확히 그러한 인간과 도덕성의 역사라는 것은 바로 역사와 문화의 수준에서 일 뿐이며..../우리가 그러한 자아라는 개졈을 가정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고립되고 자기 충족적인 고독한 존재가 아니라 구성원들의 연쇄 속에서 복잡한 결합에 따른 것이야만 한다는 것이다.194 니체는 누군가가 천재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차라리 문화는 독특하고 특이한 존재들의 비예측적이고 계산 불가능한 섬광과도 같은 출현을 선화는 조건들 위에 있을 뿐이다. 196

[ ] 승리란 생명이 나약함의 지배하는 방식을 통한 그러한 유형의 인간을 보존함에 따르는 이해관계에 의거하여 설명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니체적인 정의의 범위 하에서 스스로 일어나는 가치들에 대한 재평가의 관점으로부터 내적 가치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여기서 정의란 생명 그 자체를 최고로서 대표하는 것이자 선과 악이라는 협소한 관점들을 뛰어넘는 기능인 파노라마적 힘으로 파악된다. 199

[ ] 자연, 생명, 기술이라는 내재면 위에서는 더 이상 주체나 객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유기체는 경계를 무너뜨려왔다. 참으로 본질적 사물은 더 이상 주체와 객체, 형상과 질료에 관한 물음이 아니라 힘, 밀도, 강도에 관한 물음인 것이다. 이는 힘의 광대무변함이 제어되어 왔다는 기술, 배치 등의 자연과 인공의 대립을 초월하는 거대한 기계권에 도달해야만 하는 일이다. 231

[ ] 니체는 좋은 예술가는 힘이 넘치는 동물들처럼 넘치는 에너지로 꽉 찬 이들이라고 주장한다..../그것은 쾌락 가능한 상태가 획득되고 동물적인 잘 삶과 욕망이라는 섬세한 뉘앙스가 섞일 수 있는 모든 영역에서 흥분을 경험하는 동물성의 부분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지점이다/니체는 줄 수 없는 이들은 받을 수도 없다고 한다. 232, 233


 5. 바이로이드적 생명; 기계들, 기술들 그리고 진화에 관하여


[ ] 철학과 마찬가지로 생물학 분야는 태생적인 플라톤주의자들로 가득 차 있지만 공생은 유전자들, 플라스미드들, 세포들, 유기체들 그리고 게놈드과 같은 유기적 단위들의 탈선화가 결코 절대화되거나 이상화되 모델이 아니라 오히려 연구의 한 양상에 관한 도구임을 보여준다. 그것은 순수하고 자율적인 존재들과 단위들이라는 개념에 도전하는데, 왜냐하면 혈통이 아닌 결연을 통해 이질적인 항들에 의해 만들어진 다양체들인 작동하는 배치들을 통해 기능한다. 배치들 하에서 유일한 단일체는 복수적인 기능을 하는 공생 혹은 공명인 것이다. 258 진화에서 나타나는 유일하게 정당한 되기/생성은 새로운 규모들과 새로운 왕국들을 가져다주는 공생들에 의해 탄생한다. 오로지 관통하고 자유롭게 생성하는 사물들만을 허용하는 절화만이 형성적 블록들에 의한 혈통적 진화와의 관계를 끊어 낸다. 절화는 혈통이나 유전의 질서에 입각한 차이가 아니라 오히려 잉여로서 사유된 것이다. 절화는 진정한 자유이며, 그 리좀은 계보학적인 수목과는 대립된다. 260

[ ] 초인간적 상상력은 기계들에 관한 인간중심적 편견들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 그것들에 대한 비인간적 선언이 쳐놓은 덫을 고안해 내는 방식들을 추구한다. 기계의 철학은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과 더불어 출발하기 때문에, 그것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소외를 통해서만 존쟇다. 추상기게는 자신의 무형식과 더불어 탈층화되고 탈영토화된다. ..지적인 특성은 실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질료에 의해서, 형식에 의해서가 아닌 기능에 의해 작동한다. 266

[ ] 만일 살아있는 계들이 기계들이라면 결국 그것들은 관계들에 따라 이해될 필요가 있는 것이지 구성요소적인 부분들에 따라 그러한 것이 아니다...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관계들과 더불어 사고한 것이지, 구성요소들과 더불어 사고한 것은 아니다.

[ ] 우리는 기술-기게에 의해서가아니라 무엇이 기술적 요소들을 사용, 확장 그리고 이해하는가라고 하는 어떤 계기 하에서 규정된 사회적 기계에 의해 억압된다. 기술적 기계들은 경제적 범주가 아니라 항상 그것들과 구분되는 사회체 또는 사회적인 기계를 가르킨다. 280


6. 탈인간적 조건에 관한 시대적 고찰; 허무주의, 엔트로피 그리고 그 너머


[ ] 만일 인류가 역사의 목표와 목적을 생성해 내고자 한다면, 그것은 비인간적인 힘(자연)의 결과일 때에만 그러할 것이며, 인간적 의도나 기획에 의해서는 설명되지 않는다. 바꿔 말해, 인류의 궁극적인 인간성은 비인간화의 과정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298

[ ] 근대성의 상상력을 특징지어 온 것은 바로 생명의 힘에 대한 도덕화와 인간화이다. 300

[ ] 기술의 역설적인 조건 하에서 실로 변증법은 자신에게 만족해 왔으며....비판적 사고라는 꿈에서와 마찬가질 부정성이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확실성인 총체성 하에서 취해진 것임을 인식하는 일은 필수적이다. 그것은 더 이상 우리가 자신의 소외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투명성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중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블랑쇼에 따르면 역사는 종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원리, 질문 그리고 정식화가 이해를 멈추게 됨을 뜻한다./기술의 시간은 모든 것의 종말을 뜻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블랑쇼의 지적과 같이 모든 것의 종말은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309 블랑쇼가 견지하는 바와 같이 이제 사유를 향한 모험은 근대기술의 도래와 같은 거대한 변화라는 결과로 드러나며, 철학자는 모호한 과학의 끔찍한 혼합, 교잡된 비전 그리고 의심스러운 신학을 조합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허무주의를 탈인간적 조건의 피할 수 없는 특성으로 인식할 때라야 비로소 종말의 난국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길을 찾기 시작할 수 있다. 우리가 인간중심주읮거인 자만심의 몰락한 자유 경험으로부터 출현하는 능력과 원천을 가지고 있는가 없는가이다.310

[ ] 인간적 가치들이란 인간이 자연과 외부세계를 통제하고 지배하기 위해 기획해 온 실용주의적 관점들의 결과이긴 하지만, 그 과정에서 사물들의 본질을 잘못 투사해 왔다는 것이다./인간에 관한 문제와 그것들의 아픈 상태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은 인간의 비인간중심주의화된 미래의 비전으로서 초인overhuman을 상상하는 일이다. 311

[ ] 탈인간적 조건이란 인간적 상태의 초월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간중심주의적인 탈규범화의 내재적 과정에 있는 비목적론적인생성에 관련된다./ 인간성을 취하거나 유산하는 것이 아닌 비인간 및 탈인간과 필연저으로 묶여있는 미래를 니체가 말하는 중이다./이렇듯 깨지고 부서진 이행의 시간이라는 니체의 본질적 통찰이 지닌 무게를 느낄 수 있다. 결국 우리는 냉혹함과 너무나도 두터운 현실들을 부수고 여는 힘을 갖춘 홈리스들인 것이다.315

[ ] 허무주의라는 사건의 출현과 더불어 현재는 부러진 시간, 쪼개진 시간이 되어 버렸으며, 이는 인간과 인간성의 미래에 관한 질문이 의혹에 처해 있다는 것이며 또한 비판적으로 다루어져 함을 말한다. 315 허무주의는 그것 자체보다는 어떤 도래를 예고함으로써 늘 미래에 대해 말하며, 그러한 사건이 없이는 성장이 불가능하다. 허무주의는 우리가 가정하는 모든 가치들과 나란히 내재해 온 필수적인 학습경험으로서 우리에게 도달한다. 따라서 허무주의가 그렇게 낯선 문제란 말인가? 니체는 근대의 가장 보편적인 신호는 인간이 터무니없는 범위의 것에 대해 자신만의 관점을 가진 채로 위엄을 잃어 왔다.는 사실에 있다고 쓴다. 317

[ ] 역사에 관한 기계적인 철학은 남근중심주의적인 역사의 대상이자 목적인 인간을 제거해 버림으로써, 기계들이 역사를 만드는 인간과 대비된다고 주장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거기에는 역사의 주체나 행위자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계들이 인류의 발명품이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한 이야기이다. 그러한 발명의 시간을 말하기 위해서는 탈인간이 되어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잉여의 논리를 좇는다는 것은 선과 악에 대한 긍정을 포함하여 선과 악을 뛰어넘어 도덕 외적으로 사고하기 시작한다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모든 종류의 자연, 기계 그리고 기술을 넘어서는 총체적인 통제를 향한 편애를 동반한 목적론이라는 파우스트적인 개념화로부터, 기술의 생성의 동반한느 우리의 기계적 노예화와 그에 연루된 지각불가능성과 계산불가능성으로의 이동을 긍정하고 참여시킨다. 318, 319

[ ] 몸체가 없는 정보의 통치는 시간이라는 사건의 종말 이외의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오늘날 철학의 과업은 단지 사건의 비사건성에 대한 공표를 산출하는 데에 있을 뿐이다. 만일 리오타르가 포스트모던의 조건에서 향수와 한탄을 넘어 살고자 한 것이 있다면, 지금 그는 확실히 시간의 잔여를 위해 잃어버린 사건의 시간을 경건하게 애도함으로써 그러한 조건을 확립했을 것이다. 327리오타르의 허구적인 설명에 수반되는 진정한 문제는 그것이 생기론과 목적론을 자본의 탓으로 돌린다는 데에 있다. 331

[ ] 기계들 자체를 취한다는 것은 아무것도 설명하는 것이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늘 기술적인 것만큼이 너무나도 사회적이라고 하는 장치와 배치의 일부이기 때문이다./특정한 에너지의 원천 및 동력원의 활용과 개발은 그러한 역사적 우연성과 속박이 결과로서, 이는 자본주의적 세계 경제라는 사회적 기계의 결정요인이 핵심적이다. 333 발전에 관한 논의는 자연에 관한 논의가 아니라 정치에 관한 논의인 것이다. 334

[ ] 보드리야르, 자본은 사회적 관계를 지닌 악마적 마술로서 도덕성이라고 하는 어떤 탈역사적 기준이나 경제적인 합리성에 따라 고발당하지 않는, 바로 그러한 응답을 필요로 하는 사회에 도전한다. 자본은 영원한 반복이라고 하는 생산논리의 덫에 걸린 잠재적인 기계로 작동한다./마수미에 따르면 자본은 그 해위가 대상에 뿌리를 둔 것이라기 보다는 근본적으로 내적 동력이라고 하는 미래적 과정에 생산물을 변형시킨다는 의미에서 잠재적으로 작동한다./포스트모던 자본주의 하에서 인간의 삶은 잠재적인 양식과 변형적 경향이라는 견지로부터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335 혹은 어떤 단계에서도 스스로를 변형시키는 과정이다. 336 자본주의적 조건인 후자에 있어서 인간 존재는 더 이상 거대한 기계의 구성요소가 아니라, 노예라기보다는 사회적으로 종속되고 중개된 노동자들이자 소비자들인 것이다. 337

[ ] 자본주의 체계의 진화는 그것이 불가피하게 일으키는 총체적인 통제가 착각이라는 기계적 분석을 통해 드러날 때 탈물화될 수 있다. 338 괴물의 손에 있는 불가피하고 비극적인 죽음에 직면하게 됨으로써 기계, 기계적으로 생성하고 능동적으로 참여하게 됨을 긍정하는 문제가 된다. 340

[ ] 윌러스틴은 모순이 단순한 대립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전이의 사례임을 강조하는 입장을 견지한다. 340

[ ] 자본주의적 기게의 분열증적 논리 하에서 산출된 분자적 흐름들과 기계적인 변형들을 단번에 통제함으로써, 통화 공급을 단번에 조절할 수 있는 입장에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343

[ ] 시몽동은 살아있는 계들의 생성을 사유하는 방편으로서 준안정적인 평형상태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353

[ ] 우리에게 이 삶과 죽음의 잔혹극이 낳는 효과는 단순한 감염이 아니라 돌림병 사건과도 같은 잔혹함과 사악함이라고 하는 잠복해 있는 암류로의 외화를 향해 재촉하는 폭로인 것이다. 364


볕뉘

맑스는 알튀세르부터 프레드릭 제임슨, 테리 이글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전유, 확장되어와서 이론의 지반을 풍요롭게 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니체는 드물다 싶었는데, 여러 철학의 흐름과 버무려져서 나왔다 싶다. 천천히 따라가면 의외로 벅차고 흘러내리거나 번지는 것이 있을 것 같다. 음미하는 독서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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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소득의 지각변동


[ ] 자신의 노후를 자녀에게 의탁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장년들은 지금은 흑자 구간에 있더라도 주택과 같은 자산 구입 등 노후를 위한 투자에 병적으로 집착하긷 한다. 현재 적자 구간을 맞은 이들을 위해 기부를 더 하거나 세금을 더 내는 일에는 극도로 부정적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다. 가족 중심 분배 체제의 붕괴는 이런 모든 문제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의 미래에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바로 우리 아이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문제다. 28

[ ] 발명가가 되려면 공부와 연구만으로는 부족하다. 부모의 소득도 높아야 한다. 발명이든 혁신이든 새로운 일은 실패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부모 소득이 높으면 뭐든 시도해 볼 수 있다. 실패하면 부모 품으로 돌아오면 되니 말이다. 그렇게 여러 번 시도를 하다보면 성공할 확률도 높아진다. 31


 2. 세계는 평평해졌지만 삶은 더 울퉁불퉁해졌다

[ ] 서구 지식인과 정치인들은 세계화가 자기 나라 국민 대다수에게 가져올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다....경기둔화로부터 타격을 받은 곳은 고소득 국가들이었다.특히 고소득 국가 중하위층의 소득은 계속해서 제자리걸음이다...개발도상국 지식인들, 선진국의 진보적 지식이들의 예상도 틀렸다. 그들은 개발도상국, 특히 아시아 국가들이 세계화로부터 착취당해 노동 계층의 빈곤이 고착화할 것이라고 분노하며 외쳤다. 그러나 그 아시아 노동 계층 중 상당수는 소득이 빠르게 높아졌고 A지점(코끼리 곡선)에 도달해 세계화의 가장 큰 승자가 됐다. 중국은 빠른 속도로 성장해 1인당 국민소득이 유럽연합 최빈국의 수준을 따라잡고 있다. 중국 중간층은 미국 하층을 따라잡고 있다. 중국 선전이 아니라 미국 오하이오와 미시간과 위스콘신에서 분노의 불이 지펴졌고, 그 분노의 대변자는 진보적 정치세력이 아니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됐다. 55

[ ] 세계화의 2단계는 ‘거대한 수렴‘ 국면인 1990년 이후에 일어났다. 이때의 세계화는 이전과 달리 커뮤니케이션 비용, 즉 지식의 이동 비용이 빠르게 줄어드는 과정이었다. 인터넷과 이메일이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커뮤니케이션 비용이 줄어들자 지식 외주화가 가능해졌다. 더 이상 하나의 공장/산업 지역에서 생산활동을 수행할 필요가 없어졌다. 선진국에 몰려 있던 생산 클러스터는 분해되었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이 줄줄이 엮인 국제가치사슬이 만들어지고, 기존 클러스터에 있던 각 기능은 여러 국가로 흩어졌다. 59


3. 국민소득은 늘었는데 내 소득은 왜 늘지 않을까


[ ] 상위 10퍼센트 집단은 3인 가족, 4인 가족을 혼자 부양할 수 있는 정도의 소득을 벌어들이는 사람들이다. 2019년 기준 3인 가족 표준생계비는 5568만원이다. 상위 10퍼센트 집단 중 상당수는 지난 20여 년 동안 새롭게 등장한 고연봉 직장인, 즉 월급 부자였다. 대기업에서 억대 연봉 직장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공기업과 공공기관의 보수가 눈에 띄게 높아졌으며, 노동조합이 강력한 대기업 제조업 노동자들의 임금이 높아졌다. 이들이 약진하면서 중소기업 노동자들과 자영업자들과 서비스업 종사자들 다수가 뒤처졌다. 그래서 한국의 소득 불평등의 핵심은 임금 불평등이라는 논의가 나왔다. 82

[ ] 한국 경제는 1990년대 중반 이후 선택을 하게 된다. 소득을 더 많은 사람에게 고루 분배하며 내수 경제를 살리는 방식으로 성장할 것인지, 자동화와 협력업체 쥐어짜기를 통해 수출 대기업의 효율성을 최대한 높이며 성자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했다.. 결국 내수 경제를 희생해 수출 부문을 더 빠르게 성장시키는 방향으로 틀을 잡는다. 1997년 찾아온 경제위기와 imf 구제 금융 체제는 이런 방향의 변화를 극단적으로 가속화시킨다. 그 결과가 지금까지 이어진 소득 편중이다. 87


 4. 노동자가 필요없는 기업들


[ ] 헨리포드는 노동자의 임금을 높게 책정해 미국에서 노동 중산층이 탄생하게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1914년 그는 포드 자동차 직원의 임금을 동종업계의 두 배로 깜짝 인상한다. 평균 근속 기간이 3개월에 지나지 않던 노동자들은 그때부터 회사에 붙어있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되었다. 당연히 생산성은 올랐고 품질 경쟁력도 좋아졌다. 뜨내기 노동자만 일하던 이전과는 달리, 취업하겠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줄을 섰다. 95

[ ] 자본은 노동자를 불러모을 필요가 없어졌다. 원래 노동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만들었던 기업 조직이나 사회보험 중심의 복지 제도는 거추장스러운 것이 되었다. 제품의 기획, 생산 및 판매까지 모든 부문에서 완전경쟁시장이 작동된다면 자본은 위계적 기업 구조를 유지할 필요가 없다. 투자 위험이 뒤따르는 실물 자산을 보유할 필요가 없어진다. 한마디로 기업은 점점 더 직접 고용할 필요가 없어지고 있다. 자본은 이제 노동자를 밀어내고 있다. 노동자를 끌어당기려 안간힘을 쓰던 과거와 딴판이다. 거대한 전환이다. 109

[ ] 자본이 노동을 밀어내는 과정에서 엄청나게 비인간적인 일들이 벌어질 수 있다. 노예제에 버금가는 비극적 사건도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그런 노동 없는 생산 체제가 온다는 사실을 미리 예측하고 있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일자리는 없어지더라도 사람은 살아야 하고, 노동자로서의 권리는 사라지더라도 인간으로서의 권리는 더 높아져야 한다는 규범을 갖고 있다면, 미래의 모습은 달라질 것이다. 고용되지 않은 사람들까지 골고루 보호하는 사회정책을 정치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면, 미래의 모습은 훨씬 더 많이 달라질 것이다. 111


5. 정규직, 7.6퍼센트에 진입하기 위한 전쟁


[ ] 2018년 1월 18일 인천공항 제 2터미널이 열린 이날, 터미널 한구석에 다날이 만든 로봇카페가 들어섰다. 스마트폰 앱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면 로봇 팔이 긴 손가락으로 커피잔을 들고 얼음을 먼저 받는다. 다음으로 잔을 커피머신에 놓고 아메리카노 추출 버튼을 누른다. 그리고는 얼음 위에 다른 커피를 주문자에게 전달한다. 116

[ ] 학교의 기간제 교사 논쟁은, 어느 쪽으로 결론이 나도 누군가에게는 지옥이 될 것이다 얼마 남지 않은 정규 자리를 기간제 교사들이 차지하면 임용고사를 준비하는 청년들은 지옥을 맞는다. 학생 수는 빠르게 줄고 있다. 앞으로 교사 자리는 크게 늘어나기 어렵고, 교사만큼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기는 더 어렵다. 청년들에게는 기성세대가 매몰차게 막차 문을 닫고 자신들끼리만 천국을 향해 출발하는 모습으로 보일 것이다. 다른 공공기간들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125

[ ]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는 계약 내용의 차이일 뿐이다. 삶에는 정규적 삶도 비정규직 삶도 없다. 그런데 우리는 계약의 차이를 삶에 대한 차별로 확대하고 있다. 차별은 사람을 비정규로 만든다. 차별이 특권을 만들고, 특권이 정규직에 대한 일그러진 사회 인식을 만든다. 계약에는 죄가 없지만, 차별은 죄다. 7.6퍼센트라는 숫자가 보여주는 것은, ‘안정적 일자리‘는 소수에게만 허락된 특권이라는 명백한 사실이다. 사회는 이제 나머지 92.4퍼센트의 소득과 삶을 보장해주는 방향으로 변화해 가야 한다. 그래서 고용 대신 노동을 지켜야 한다. 직장 대신 직업을 지켜야 한다. 그게 기술과 사람이 같이 사는 길이기도 하다. 128


 10. 왜 어떤 노동은 다른 노동보다 더, 혹은 덜 보호받는가


[ ] 모든 사람에게 소득을 보장하든 고용을 보장하든, ‘정규직과 비정규직‘ 또는 취업과 미취업 사이에 깊게 패인 경계선은 허물어야 한다는 점이다. 결국 최소한이 생계를 위한 소득과 인간다운 삶을 위한 사회보장을 국가가 모든 사람에게 제공하는 것이 미래 노동정책의 핵심이라는 이야기다. 20세기 국가가 경제성장과 복지국가를 동시에 이룬 시스템을 만들어냈듯이, 21세기 국가도 새로운 패러다임에 따라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이야기다. 227


11. 아이폰은 애플이 만들지 않았다.


[ ] 아이팟의 성공은 애플과 스티브 잡스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혁신적 아이디어와 단순한 디자인의 미학에 열광했다. 작고 흰 기기 안에 든 세련된 기술들을 칭송했다. 그러나 그 기술 하나하나에 들어 있는 국가의 지원은 알지 못했다. 아이팟 1세대의 핵심 기술은 뭐니뭐니 해도 마이크로 하드드라이브다. 1천 곡의 음악 파일을 손바닥보다 작고 얇은 아이팟에 모두 넣을 수 있도록 한 기술인 거대자기저항 기술은 미국 연방정부 에너지부로부터 나온 것이다. 233


13. 소득을 어떻게 분배하는가


[ ] 예전과는 달리 일도 삶도 단계를 밟아 올라가는 게 아니라 단속적으로 이어진다. 이런 사회에서 일하려 노력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일할 능력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정확ㅎ 구분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어려운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같은 사람이 끊임없이 변화된 상황을 맞기 때문에 더 그렇다. 266

[ ] 울프는 1929년 낸 저서 자기만의 방에서 이렇게 회고한다. ˝그 당시 쓰라림을 기억하건데, 고정된 수입이 사람의 기질을 엄청나게 변화시킨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더라고요. 이 세상의 어떤 무력도 나에게서 500파운드를 빼앗을 수 없습니다. 음식과 집, 의복은 이제 영원히 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력과 노동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증오심과 쓰라림도 끝나게 됩니다. 나는 누구도 미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도 나에게 해를 끼칠 수 없으니까요. 또 누구에게도 아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나에게 줄 것이 없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하여 나는 스스로 인류의 다른 절반에 대해 아주 미세하나마 새로운 태도를 취하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273


15. 자유로운 노동이라는 기회


[ ] 미국뿐 아니라 유럽의 많은 나라도 긱 경제가 기존 노동시장 질서에 균열을 낸다. 여러 국가가 나서서 이 새로운 노동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고시 중이다. 원래 강력한 복지국가 체제가 존재하던 유럽에서 대안도 더 체계적으로 나오고 있다. 유럽연합은 2019년 6월 ‘투명하고 예측가능한 근로조건에 관한 지침안‘을 채택한다. 여기서는 주문형 노동자, 가내 노동자, 간헐적 노동자 등 긱 경제에서의 노동자들을 보호받아야 하는 노동자로 정의하면서, 고용주가 해고나 작업의 시작과 종료 등을 합리적이고 투명하게 알려야 한다는 점을 명시했다. 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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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공적 감정

[ ] 비극의 정신은 동정심과 상실감을 형성하며, 희극의 정신은 신체적 혐오를 넘어 기쁜 상호 작용의 정신으로 나아갈 길을 알려준다. 320 확장된 동정심에 기초한 훌륭한 기획에 위협이 되는 간과되어온 감정들도 있다. 두려움, 시기심, 수치심이 그것이다. 321 공적 감정이 자유주의적 자유를 제거하지 않고 오히려 자유주의적 자유를 증진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의 역사적 사례들이 회의론자들에게 납득시켜야 하는 것이다. 322

 8. 애국심 교육:사랑과 비판의 자유


[ ] 국기에 대한 맹세의 여파는 강제적 동질성으로 소수의 양심에 고통을 안겨줄 위험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327 동정심은 이타주의의 강력한 원인이지만, 이타주의는 구체적인 서사와 이미지에 뿌리를 두고 있기도 하다. 332 혐오는 위계적 집단들로 국가를 갈라놓기 때문에 공동선을 위한 이타적 희생을 비롯해 국가의 과업을 위태롭게 한다./만일 타자가 상상 속에서 인간 이하여 여겨졌다면, 오직 상상만이 필요한 전환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다. 334 국가의 역사와 현재의 정체성에 대한 서사가 배제적인 성격을 띠지 않고, 민족적 인종적 종교적으로 어떤 한 집단의 기여를 강조함으로써 다른 집단들을 폄하하거나 등한시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338 강압에 의해 이루어진 의견 단일화는 고작 묘지의 만장일치에 이르게 될 뿐이다. 343

[ ] 희미한 동기부여:가족관계를 없애고 모든 시민이 똑같이 보살 필 것을 요구하는 것. 시민들이 어떤 아이에 대해서도 자기 아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기에게 전적으로 책임이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고 또한 그 도시는 너무 많은 하인이 있는 집과 같아서 아무도 어떤 일에서든 책임을 떠맡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결국 그들은 주변에 희미한 관심만 두게 될 것이기기 때문이다. 요컨태, 사람들이 뭔가를 사랑하게 만들려면 그것을 ˝자신만의 것˝으로 보게해야 하고, 또한 되도록 ˝자기가 가진 유일한 것˝으로 보게 해야 한다. 347

[ ] 심리학자 에익 에릭슨은 <<간디의 진리>>라는 책에서 고인이 된 지도자와 놀라울 정도로 구체적인 가상의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그에게 ˝스스로를 잔인하게 괴롭히는 행동을 멈추고 당신 자신의 몸에 비폭력의 방법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한다. 도덕주의적인 거부의 폭력성이 없이 우리 자신의 몸과 그 몸의 성욕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에만 우리느 모든 사회에 도사리고 있는 타인에 대한 폭력적 지배 성향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381


 9. 비극 축제와 희극 축제: 동정심 형성, 혐오감 극복


[ ] 용감한 자들은 자신의 에너지를 분출하며 기뻐한다. 그들은 자신의 축제를 창조하는 사람들이다. 404

[ ] 공연은 진한 감정을 표출하는 기회였다. 관객에게 강렬한 감정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가 가득했다. 이러한 감정은 숙의와 논의를 기초로 한다는 민주주의 개념에 상반되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 감정들은 정치적 토론을 위한 중요한 정보로 여겨졌다. 408 이런 비극들이야말로 사람들을 자기편이 겪는 일의 실체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저지르는 일의 실체에도 연결시킬 수 있는 감정적 통찰력을 증진시킨다. 409 비극축제는 동정심의 발달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나, 혐오감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파네스식의 희극은 주로 혐오감을 다루지만, 동시에 동료 의식도 함양한다. 410 혐오감은 타인을 이른바 순수하고 탁월한 자아와는 완전히 다른 미천한 동물로 표상하며서 드러내는 감정이다. (필록테테스) 411 비극은 인간 야망의 한계를 알려주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 의지의 마비로 귀결되지도 않고, 또한 책임, 의무, 변화 가능성에 대한 어려운 질문들을 침묵시키지도 않는다. 416 비극은 충돌에 대한 이해를 돕고, 그러한 충돌에 대한 평범한 접근법이 지닌 한계도 인식하게 해준다. 417 명확한 질문에 대한 모든 가능한 답은 최상의 답이라 해도 심각한 도덕적 악행을 포함하기에 그릇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올바른 대답˝이란 없다. 419 한 영역의 가치만 생각하며 다른 사람의 주장을 무시하는 이 인물들은 모두 편협하다.(안티고네) 421 비극은 우리에게 연극 속에서 서로 충돌하는 삶의 영역들이 갖는 중요성을, 그리고 그렇게 부딪치는 것들 사이에서 우리가 선택을 해야만 할 때 초래되는 끔찍한 결과들을 환기시켜준다. /곳곳에서 많은 사람이 종교와 국가 간의 조화로운 합의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아테네 사람들은 그것이 잘못된 생각임을 입증하고자 했다. 423 우리는 관행을 재조정함으로써 비극을 없앨 수 있는가? 비극은 그저 비극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대개 그 음울함 뒤에 어리석음, 이기심, 게으름, 악의 등이 도사리고 있다. 424 소크라테스는 향연의 끝에서 비극 시인가 희극 시인은 본질상 하나라고 주장한다...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은 신체 기능을 끊임없이 솔직하고 즐겁게 묘사하면서, 모든 관찰자에게 그들 자신이 신체적 본성을 한껏 즐기라고 요구한다. 426 천을 짠다는 것은 공동선을 목표로 정치적 논의를 구축하는 것과 비슷하다. 즉, 가닥 하나하나가 모두 고려되어야 하고, 가닥들이 모두 한데 뭉쳐 하나의 전체를 이뤄야 한다. 429

[ ] 베트남전 참전용사 추모비: 이 추모비는 아테네의 비극과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사색적이다.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킴으로써, 동시에, 이러한 감정들과 연결된 사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일상에서 어지러운 마음을 느낄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삶, 과거와 혀재를 검토해보게 한다. 449 시카코 밀레니엄 파크: 동료시민들에게 깃든 다양성에 대한 사랑, 다양성이 근심의 원천이 아니라 즐거움의 원천이라는 생각이 싹틀 것이다....어린이뿐만 아니라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이 물이 뿜어져 나오는 그 분수 앞에 서 있고 싶어하게 함으로써, 다양한 인종 젠더 연령의 시카고 사람들과의 특이한 육감적 교류를 즐기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468



 10. 동정심의 적들: 두려움, 시기심, 수치심


[ ] 세 경우 모두, 손해를 막는 최고의 방법 중 하나는 확장된 동정심 자체를 강화하는 것이다. 491 감정의 뒷받침이 없이는 좋은 법이 나타나기도 어렵고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유지되기도 어렵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법으로 소수자의 권리를 보호할 것인가를 이해하는 동시에, 감정 기류를 좋은 법과 제도를 뒷받침하고 유지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493

[ ] 동정심에 반하는 동정심: 일반화는 위험을 안고 있다. 적대적인 고정관념을 간직할 수 있기 때무니다. 하지만 일반화가 인간 공통의 목표과 취약성에 초점을 맞춘다면 이러한 위험을 피할 수는 있고, 적대적인 고정관념을 실제로 약화시킬 수 있다. 우리는 동정심이 절대 비판받지 않는 정책 기반이 될 수는 없음을 밝혔다. 동정심은 항사 원칙들, 일반적인 도덕규범들과 소통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왕성한 비판적 문화가 수반되어야 일반화는 분파와 공평하지 못한 연민으로 퇴보하지 않을 수 있다. 495 특수한 것과 일반적인 것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는 올바른 감정을 창조하는 것은 어려운 과제이나,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497 만약 좋은 원칙과 제도들이 살아남아야 한다면 대중문화가 미온적이고 냉정해서는 안된다. 대중문화는 폭넓은 사랑의 에피소드가 충분해야 하고, 시와 음악이 충분해야 하며, 감정과 놀이에 충분히 다가가야 한다. 499

[ ] 두려움:편협한 감정 ; 다른 사람들에게로 염려를 확장하는 데는 동정심이 필요한 반면, 두려움은 항상 동정심가 관련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두려움은 종종 사람들 일반에 대한 우리의 동정심을 흩뜨릴 수 있다. 500 두려움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부당하게 이용될 수도 있다. 501 심지어 가장 믿을 만한 두려움인 경우, 즉 어떤 협소한 ‘관심의 원‘에 대한 ‘합당한‘ 두려움이라도 그 두려움은 지나치게 편협할 때가 많다. 강도 높은 근심이 지속되는 한, 자기 자신과 자기와 아주 가까운 사람들 외에는 그 무엇도 생각하기 어렵게 만든다. 502 루스벨트가 대중의 두려움을 가라앉ㅎ고 다독이기 위해 정치적 수사를 활용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두려움을 관리함으로써 동정심의 기반을 만들어내기 위해 델리와 시카고에서 도시적 건축물을 활용한 것이다./두려움은 원심력을 띤다. 두려움은 한데 뭉치는 것이 가능한 사람들의 에너지를 흩어지게 한다. 503 믿음을 가졌고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선조들이 정복할 수 있었던 그 위험에 비하면 그렇게 심각한 것도 아니다라는 밝은 암시를 루스벨트는 더했다. 506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오직 두려움 그 자체뿐임을 나는 굳게 믿습니다. 508 수사법에 능한 사람은 자신의 청중을 철저히알고, 어떤 이미지가 울림이 있으며 어떤 식의 호소가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지를 안다. 510

[ ] 델리와 하이드 파크의 도시 건축: 도시에는 범죄, 고용 불안정, 다양한 집단과 언어 등 항상 두려움의 이유들이 있다. 511 하이드 파크의 두려움(가공된 것이기도 하고 진짜이기도 한)은 유대감으 부정하는 내향적이고 배타적인 태도에 의해 증폭되었다. 두려움과 배제는 서로에게 기대어 자라난다. 그 악순환에서 빠져나와 작은 희망이라도 건지려면 과감한 결정이 필요했다./진보는 하나의 원대한 계획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수많은 작은 실험의 산물인 것 같다. 526

[ ] 시기심과 공정함: 공동의 과업 ; 시기심은 다른 사람의 행운이나 이익에 초점을 맞추어, 스스로의 상황과 다른 사람의 상황을 비판적으로 비교하는 고통스러운 감정이다./일반적으로 시기심은 운 좋은 경쟁자에 대한 어떤 적대감을 내포한다. 시기하는 사람은 경쟁자가 갖고 있는 것을 원하며, 결과적으로 그 경쟁자에게 악의를 느낀다. 그리하여 시기심은 사회 한복판에 적대감과 긴장감을 끌어들이며, 궁극적으로 사회가 목표한 바를 이루지 못하게 한다. 527 시기심은 질투심과 유사하다. 둘 다 가치 있은 어떤 것의 소유나 향유와 관련해 경쟁자에 대한 적대감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과 가장 소중한 관계들을 보호하는 것과 관련돼 있다. 질투심은 자신에게 위협이 된다고 보이는 경쟁자에게 초점을 맞춘다.(형제간이 경쟁)/이와 대조적으로 시기심은 바라는 상태를 소유했는지 소유하지 못했는지가 중심이 된다. 시기심은 좋은 것의 부재에 초점을 맞추며, 좋은 것을 소유한 사람들에 대한 적대감은 간접적이다. 경쟁자는 좋은 것들 그 자체보다 덜 중요하다. 사실 경쟁자는 시기하는 사람에게 결여된 이점을 누리고 있다는 점 때문에 적대적인 시선을 받는 것이다. 528 오셀로는 어떤 특정한 이점 때문에 경쟁자로서 미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아고라는 존재를 가리며 그의 위로 우뚝 솟아오른 사람으로서 미움을 받는다. 이아고가 주인공이 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래서 그는 그 주인공을 파멸시켜야 한다. / 미래의 우월함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맨 꼭대기˝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시기심에 내몰릴 수 있다. 529

[ ] 구조적으로 시기심의 사촌 격인 세 가지 감정이 있는데, 시기심을 이 감정들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경쟁심은 시기심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상황과 자기보다 형편이 나은 사람의 상황과 비교하는 것에 초점을 둔다....경쟁심을 느낀다면, 일반적으로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열심히 하면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어. 시기심은 다른다. 심리학자들이 흔히 도달하는 결론처럼, 시기심에는 절망과 무력감이 내포돼 있기 때문이다. 530 시기하는 사람은 어떤 형태로든 상대를 적대시할 것이며, 틀림없이 상대를 포괄하는 공익(고등학교 응원단이나 축구팀의 성공 같은)을 소망하지 않을 것이다. /시기심은 또한 불의를 의식하는 도덕적 감정인 분개와도 다르다. 다른 사람들의 이익에 대해 분개하는 사람은 상황이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믿는다./시기심은 주체와 객체 모두에게 해를 끼치는 경향이 있는 원한의 한 형태다.531 경쟁심이나 분개는 둘 다 품위 있는 사회에서는 건강한 감정이다. 전자는 개개인이 더 좋아지도록 촉진하고, 후자는 사회가 더 좋아지도록 촉진한다. 시기심에는 그런 건설적인 기능이 없다. 532

[ ]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상황이 나쁘기보다는 좋기를 소망하며 시기심은 이해에 기여한다. 시기심이 적대적으로 터져나올 만한 조건은 어떤 것일까? 첫째는 심리적인 것으로 자신의 가치관과 가치 있는 일은 무엇이든 이루어내는 능력에 대한 확고한 자신감을 결여한 경우다. 둘째는 사회적인 것이다. 사회생활의 조건들이 시기심을 낳는 차이를 매우 눈에 띄게 만드는 만큼, 그 심리적 조건이 고통스럽고 치욕적인 것으로 경험되는 상황이 많이 발생하는 경우다. 셋째, 시기심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입장엣는 단순한 적대감 말고는 어떤 생산적인 대안도 스스로에게 제공하지 못한다고 여기는 경우다. 533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위안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뿐이다.533

[ ] 학교는 성취에 이르는 폭넓은 건설적 경로들(비경쟁적인 신체 단련 활동, 연극과 기타 창작 예술, 사회봉사)을 제공함으로써, 친구들을 미워하며 앉아 있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좋게 느끼게 해줄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하게끔 학생들을 북돋울 수 있다. 스포츠 올림픽과 나란히 예술 올림픽을 개최하는 것이다. 요가, 필라테스, 신체 단련용 달리기가 대안적 체육으로 제시될 수 있다. 535

[ ] 모든 이가 기본 권리를 안정되게 누릴 수 있도록 해주는 법과 제도,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건설적인 대안들을 가지고 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교육 체제와 경제 체제에 많이 의지해야 할 것이다. 사회의 제도적 구조는 경쟁의 여지를 남겨둠으롰 경쟁을 뒤받침하되, 노력을 마비시킬 수 있는 좌절감과 무력감은 만들어내지 않는다./돈에만 가치를 두지 않고 우정 문학적 예술적 표현, 사회 정의를 추구한다 536

[ ] 시기심은 두 가지 방식으로 동정심을 공격한다. 첫째 관심의 원을 좁게 설정해 자신 또는 자기 집단에 집중하는 행복론적 사고를 장려함으로써 동정심을 공격한다. 둘째, 자기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의식과 동정심에 실질적으로 수반되는 감정이입을 금지해 시기심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타자 또는 적으로 암시함으로써 동정심을 공격한다. 537 그래서 해결책으로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동 운명에 대한 의식, 그리고 혜택 받은 사람들과 덜 혜택 받은 사람들을 공동의 과업을 가진 하나의 집단으로 만드는 우정이다./덜 혜택 받은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는 정책에 대해 좀더 특권을 가진 사람들이 반대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계급 간 시기심이 없는 그 상황이 주로 이 작은 사회(500만 주민)가 가족과 같아서 모든 시민이 서로 얽혀 있다는 생각에 기인한다는 것이다.(핀란드)537

11. 사랑이 정의에 중요한 이유

[ ] 이 연구의 사랑에 대한 요구는 ˝중첩적 합의˝를 달성하기 더 어렵게 만드는 방식으로 정치적 개념에 의해 부과되는 요구들을 조금씩 늘리기보다는, 원칙과 제도에 대한 완전한 의견 일치나, 심지어 이러한 것이 주요 결점이 없다는 의견 일치를 전제하지 않는 감정들을 상상하면서 사실상 그 요구들을 감소시킨다. 두 사람이 종교, 정치적 관점, 궁극적인 삶이 목표가 서로 달라도 친구가 될 수 있고, 심지어 연인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상상하는 사회의 시민들 또는 적어도 그들 중 다수는, 우리가 기술한 이질적 경험들을 공유할 수 있다. 적어도 그러한 경험 중 일부를, 가끔, 공유할 수 있다. 그래서, 이래서 이러한 감정들이 본질적으로 귀중한가 아닌가 하는 물음을 통해 우리가 묻게 되는 바는,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위협적이지 않다. 609


볕뉘. 우리를 아니 스스로를 옭아매는 것은 두려움과 시기심, 수치심이라는 것이다. 곁을 생각지도 못하게 만들고, 자기와 자기집단에 얽매이게 만든다는 것이다. 사회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족만이 살길이라거나 너만은 이겨야 한다라고 말하며, 사육된 아이들은 그 모욕감을 끊임없이 전염시킨다. 사회적 유아기는 여전히 길고 길다. 여유와 자신만의 시간을 갖지 않는 청소년기를 거쳐도 별반 달라질 것이 없다. 자신의 일에 책임져 본 적도 없고, 책임질 수 없다. 이기는 기술만 갖게 된 아이들, 함께 이기는 경험이란 미흡하기 쉽상이지 않을까. 아이들만의 문제일까 어른 역시 어른이일뿐이다. 상상할 수 없고, 아파하지 않고, 아픔의 경계를 자신과 저울질하지 못한다. 사유에 출발은 늘 자신을 빼버리고 간다. 그 나르시시즘. 무한의 되돌이표. 놀지 않으면 달라질 수 없다. 스스로 채울 수 없으면 넘칠 수 없다. 사회의 공모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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