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워지기 전에 산책이기도 하다. 상가 임대매물은 늘어나고, 인테리어 하는 가게도 간간이 보인 지가 오래다. 장갑이 얇기도 하고, 산 지가 오래되어 비닐이 벗겨진다. 햇살에 무척이나 약한데 이는 옷이나 가방도 그런 부위는 표시가 나서 오래가지 못한다. 한참지나서야 크기가 맞는 장갑을 골라 산책을 이을 수 있었다. 폰터치 기능도 있는 것을 골라서 샀는데 나쁘지는 않다 싶다.

 

1. 렙틴 - 식욕을 억제하는 호르몬은 그리스어 렙토스, 날씬함을 뜻하는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1994년에 쥐에게 비만 실험을 하는 도중 발견되었다고 한다. 반면 공복감을 나타내는 호르몬은 그렐린으로 2년 뒤에 발견된다. 호르몬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잠자기 전 스마트폰의 과다 사용은 세로토린 호르몬에 영향을 미쳐 수면질에 관여한다.  산책을 하거나 운동을 하면 인슐린 분비를 억제하는 효과가 있어 배고픔을 덜 느끼게 만든다고 한다. 물론 숙면은 체중감량에도 관여한다. 잘자야 많이 빠진다.

 

2. 마음 -  첫 장에 마음을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가라는 논문이 나온다. 뇌와 신체. 양쪽을 편갈라 이야기하지 않는다. 어느쪽에 더 가중치를 두는 것도 아니다. 그래 편하게 마음은 뇌와 신체로 느껴지는 그 사이에 있는 것이라고 한다.

 

 

 

3. 감정 - 감성, 아니 감정이나 느낌, 기분들. 우리는 감정에 이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의미의 구성자이자 설계자라고 한다. 뇌 역시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냄새, 맛, 감촉, 소리 등을 예측하려 한다. 신체의 건강 역시 다기한 느낌의 생성 장소이기도 하다.



레비나스는 '지향성'이라는 개념으로 사람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특성을 표현한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감각을 이용해 주변 변화를 민감하게 느낀다. 그리고 그 경험들은 변화에 새롭게 적응하도록 한다.  감정이나 감성에 대한 다방면의 접근은 미세한 틈의 논쟁의 더 격화시켜야 할 것 같다. 서둘러 맺는 결론이나 주장 역시 많은 것을 볼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몸과 마음, 뫔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나, 감정, 감성의 결을 만들어가는 일, 몸을 소진의 개념이 아니라 활력의 개념으로 챙기는 일 역시 여러 갈래로 자신의 확장시키고 남을 배려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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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짝않구. 종일 집콕. 아 잠깐 음식물쓰레기통을 내다놓았구나. 쓸고 닦고 간단하게 요리해서 공복을 채우며 보내본다. 


1.  - 80년대 이후 저작들은 학교, 병원, 노동 등 제가 낳은 문제점들의 비판이라기 보다는 좀더 근원을 파고든다고 한다. 그 가운데 <<H2O와 망각의 강>>은 물이 영혼을 정화하고 죽은 이를 불러내는 다양한 이력은 사라지고, 상수도와 하수도, 욕실 속의 H2O로 은닉되었는지 살핀다.  냄새와 공간마저도 그렇게 안과 밖 장소성을 갖던 것들과, 아우라를 말해주던 것들이 그 모습들을 잃으면서 평면화되고, 획일화되는지  역사 속에서 짚어낸다.


2. - 책이라기보다는 텍스트. 인쇄혁명은 정작 15-6세기가 아니라 12세기 필사본의 텍스트 탄생과 라틴어의 문자강박에서 벗어나는데서 시작한다고 한다. 그 이전 두루마리 양피지로 갇힌 책은 권력이자 아무나 봐서는 안될 것이다. 책들이 난무하는 시대. 정작 텍스트는 없다. 읽은 나 안에는 우리가 없다. 읽기의 역사가 음독에서 묵독으로 바뀌면서 잃은 것이 많듯이, 말이자, 육화인 성경같은 텍스트의 의미도 변질되고 말아버렸다고 한다. 지혜는 서두른다고 빨리 얻어지는 것이 아닐 것이다. 두 책. 물과 텍스트에서 그는 칼 폴라니가 얘기하듯 발라내어져 무화되고, 그 과정을 보지 못하는 우리들을 안타까워 하는 듯싶다.  



3. 출산 - 하이데거의 오류는 출산을 하는 부모의 입장이나 늘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우리사이가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혼자 살아가게 내버려두는 철학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사회화되지 못하는 유아의 사상일 수밖에 없고 약하거나 약하게 될 자는 안중에도 없고 늘 강한 자가 되려 안간힘을 쓸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내던져진 것이 아니다. 즉자도 아니고 대자도 아니다. 그 이전에  우리는 세계에 이끌어진 것이다. 삶의 선물로 말이다. 다양다기한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존재자인 것이다.


손에 이끌린 책들은 뭔가 다른 곳을 보여줄 듯하다. 지난 과거의 편린들이, 그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느낌들이 이렇게 같이 어울린다 싶다. 사랑도 삶도 책들도 그러하지 않을까. 늘 달라지는 달라질 수밖에 없는 풍요로움 같은 것 말이다. 이반 일리치가 물과 책으로 이렇게 손을 잡아 끌고가는 것도 그 이유이지 않을까 싶다.


꼼짝없이 몸의 무게가 는다. 공기만 마신 줄 알았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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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가 되자 자란 함박눈의 궤적이 좀 느려져. 곱게 쌓인 눈들을 바짝 달려들어 찍을까 하다가 멈춰. 햇살은 곱고 따듯하고 폭 쌓인 눈들이 포근해지자 눈물이 나. 한해가 이렇게 시작되기도 간만인 듯 싶어. 아직 바닷가는 설기척도 없겠지만 이렇게 맛보는 풍경은 더욱 조심스러워져.  마음에만 갖고 있기로 해. 셔터를 아무 곳에서도 누르지 않았어. 


1. 가족 - 황정은의 디디의 우산에서 우리의 관계는 무엇일까. 법으로도 규정짓지 못하고, 혈연으로도 포획되지 않는 관계. 그러면서 책친척이란 말들이 나왔다. 히로키의 2부는 가족으로 출발한다. 아 그러고보니 재-관-언-법조계의 혼맥도가 겹치는 것은 왠일일까? 그의 사유의 출발은 현실과 그 개선의 주체로서 더 이상, 개인도, 공동체도, 계급도 아닌 현실에 대한 무력감에서 이어진 것일 수도 있다. 그 낯선 것을 잡아내어 눈을 꽁꽁 뭉칠 수 있는 어떤 개념으로 사유하고 싶은 것이다. 유사가족일 수도 있고, 그와 유사한 또 다른 어떤 것으로 말이다. 고진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에 대한 스케치도 역설적이지만 다른 틀을 제시해주기도 한다. 


2. 섬세 - 무형문화재 상설전시관이 대전역 인근에 있다. 기차 시간에 앞서 짬이 되어 둘러본다. 앉은 굿의 한지 작업, 단청장,초고장(짚고예)목기장, 악기장, 각색편, 단청장, 국화주 장인. 그리고 소제동 마지막 기억을 담은 <<소제, 도시를 기억하다>>가 전시중이다. 그 손길에서 드러나는 것은 늘 섬세함이라고 할까 아니면 야무짐이라고 할까. 허투루 보이지 않은 깐깐함이 물씬 풍겨온다 싶다. 빠져들기 보다는 튕겨져 나올 듯 싶다. 


3. 노선 - 택시를 탈까하다 버스노선을 검색해본다. 어 왠일일까. 채 오십분이 걸리지 않다니, 정말일까 싶어 버스를 타기로 한다. 그래. 중간 도심환승센터에서 갈아 타면 되는구나 싶다. 중간 기다리는 시간에 노선도를 본다. 송도환승센터, 오천환승센터, 간선과 지선으로 분류되어 한 눈에 알아보기 쉽다. 크게 곤란하지 않을 듯 싶기도 한데, 배차간격이 약간 걸린다싶다. 그래도 큰 버스를 혼자 대절하니 미안스럽기도 하다. 내리는 전 기사님께 감사합니다라고 큰소리로 인사를 건넨다. 구룡포, 감포까지 버스여행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물론 날이 따뜻해져서 이겠지만, 나쁘진 않다.


명문옥편이 와서 중국어간체자를 살펴본다. 500여자가 더 되었는데, 보는 재미가 있다. 몇 번 더 보면 눈에 익을 듯싶다. 탐색하기 전에 도움이 될 듯도 싶다. 딸이 불쑥 죽음이 뭐냐고 물어본다. 음. 그리 대단한 건 아냐. 잘 모르기도 하고, 살아있다는 것부터 시작해보면 그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기도 하지. 저자가 왜 제목을 저렇게 지었는지 공감이 가기도 한다. 우리는 생각보다 긴 시간을 함께 살아있다. 이삼백년을 품으면서 살고 있고, 그것을 여실이 느낄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빙하의 흔적이 고스란히 물과 그 아래 사는 사람들의 살림살이와 직결되는 것임을 말이다. 새롭게 사유하고 대화해서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긴 시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물꼬를 터 보는 일들을 주저하지 말고 말이다. 코로나가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를 건네주고 있다. 안목들을 겹치면서 살펴보자구 이야기하는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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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자기 자신 밖으로 나가 타자를 만날 수 있는가






||:친한 친구가 죽었다. 사랑하는 너를 더 이상 매만질 수 없다.
 
포탄 소리가 요란하다. 깜깜한 밤. 문은 왈칵 열리고 “당신은 어느 편이야?” 말을 거는 순간, 나의 목숨은 경각에 달린다. “안녕하십니까?”라는 말의 무게도 전장의 상흔보다 더 큰 코로나 시대에 안녕하지 못함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말한다는 것과 인사를 나눈다는 것은 어쩌면 이런 폭력에 노출된 것이자, 그 상황을 감수하며 건네는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한 철학자가 포로수용소에 수감되고 그 가족들은 나치에 학살되었다면, 그는 어떤 사유를 할 수 있을까? 하이데거와 후설에게 학문을 배운 그가 이런 현실에서 『존재에서 존재자로』의 원고를 막 쓰기 시작한다. 대체 철학은 무엇을 한 것이고,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세계-안-존재, 죽음 이전의 삶. 그 존재. 독립된 존재로서 개인. 발라낸 개인으로서 사유는 제도와 생산력 포식의 세상을 만들어냈다. 신은 죽었지만, 그로 탄생한 개인은 어김없이 자신과 동일한 인물을 만들어낸다. 숱한 이론과 지성도 결국 엘리트주의에 감염되어 서로를 적으로 몰아 사멸할 수밖에 없는 지경으로 몰아넣었다. 그는 이런 전체성을 지향하는 오디세우스의 모험과 귀환이 아니라 아들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 타자의 부름에 응답하는 아브라함에게 주목한다. 빚을 진 존재자. 책임을 가질 수밖에 없는 존재. 주체란 무엇인가?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살아가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인사를 건네는 것은 내가 묵살될 수 있다는 것이며, 타자에게 폭로될 수 있는 것이야말로 나인 것이다. 말하기에서 중요한 것은 거기에 결정적 행위가 성취되었다는 사실이다. 의미의 주고 받기가 아니라 그 와중에도 의미의 생성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나와 타자는 동시적으로 생기하는 것이며, 나에 앞서 타자가 있는 것도, 타자에 앞서 내가 있는 것도 아니다. 나와 타자는 사건 속에서, 사건으로 동시에 만들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까지 같아진 것은 아닌가 회의한다. 당신은 정신없이 무대만 보는 실재론자 관객은 아닌가. 아니면 시시해져서 흥미를 잃어버린 회의론자는 아닌가. 연출가로서 너무 몰입하지도 않고 너무 분석적이지도 않고, 주제와 주제 이외의 것을 느끼려고 해야되는 것은 아닐까. 올려다보거나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수시로 시선을 섞는 지향을 가져야 되는 것은 아닌가,하며 후설의 현상학에 기대를 걸어본다. 휴머니즘이라는 이론만 있었지, 인간적인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늘 곁에 둔 적은 있었던가. 도덕과 법과 평등이란 허구에 앞서서 인간적 공정이 먼저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을 놓치지 않으면서 말이다.

주체의 종언과 구조주의가 만연한 그 시류에 거슬러 그는 인간주의와 주체성의 복권을 부르짖는다. 세상을 어떻게 달리 이해할 수 없을까? 준 유아적인 태도에 머무르는 철학과 학문의 습속에 대항한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사랑받는 사람은 그런 감정이 있을 때만 성립할 수 있다. 책이란 텍스트는 무엇일까? 그것 자체가 진리이지는 않다. 끊임없이 읽고 다르게 해석하는 의미만이 실천성과 사용성을 갖는 것은 아닌가? 사물 역시 규정된 무엇이 아니라 그 양태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객관적인 것도 괄호를 치고 판단중지를 해보거나 유보해보는 것이다. 이렇게 세상을 보는 방법을 갖게 되면 분리된 하나가 아니라 서로를 보고 느낄 수밖에 없다. 의미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실재일 것이다. 대상을 소유할 수 없다. 사유할 수 있을 뿐이다. 타자를 이해하는 방식은 이렇게 고정된 것이 아니라 무한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지향하는 것이다. 그 끝을 열어두는 상태이다. 수렴이 아니라 확산. 독백이 아니라 대화로서 앎을 소생시켜야 한다고 말이다.

애당초 내가 지배하고, 파악하고, 통제가능한 것은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나는 약하게 될 자이자, 약하다. 약하다는 자체가 타자를 불러들이고 있다. 사랑하는 일은 타자를 위해 마음 아파하는 일이다. 아직 살아있다는 것은 혼자 설 수 없음을 헤아리는 것이다. 자기 자신만으로 자신을 기초 지울 수 없다는 사실을 느껴야 한다. 그렇게 자신을 되먹임하는 일만이 점점 더 독립된 나를 만들고 나 아닌 나의 출현을 기대할 수 있게 한다. 타자는 빈자, 이방인, 과부, 고아의 모습을 갖는 동시에 스승의 모습을 가지면, 그것이 나에게 자유를 수여하고, 나를 기초 지우는 것이다. 나는 -로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타자를 향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나를 향유하는 기능에서 비로소 나인 것이다. 나 아닌 것을 끊임없이 자기 안에 투입해나가는 운동성이야말로 나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다라고 그는 되새긴다.

레비나스 그는 스승들을 쫓았지만 결국 물구나무 세웠다. 강한 자, 명료한 학문의 방식이 낳는 철학의 말로를 뒤튼다.그것이 낳는 폐해를 반복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약한 자, 의미를 쌓아가고 연결시켜가는 점점 달라지는 사랑의 풍요로움은 결코 이전 사상가들의 사고와 이론에서 나올 수 없다. 곁의 사람에게 말 걸고 점점 달라지고 세밀해지는 곁의 삶에 아파하고 보듬으면서 친밀해지고 시공간의 집에 정주함으로써 자아가 되는 것이다. 나는 타자의 유책성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


볕뉘. 오랜만에 서평을 써본다. 늘 쉬운 일이 아님을 느낀다. 글짓는 이들의 한 땀 한땀을 존중한다. 읽는 순서는 없다. 어디서부터 읽든 반복하시면 글쓴이의 의도를 충분히 감안해주시는 것이다. 감사드리며 새해 복많이 지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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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1-01-01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하는 일은 타자를 위해 마음 아파하는 일이라는 구절이 와닿습니다. 첫눈처럼요.
새해도 좋은 기운으로 왕성한 활동 펼치시길 바랍니다. 여울님.

여울 2021-01-01 21:0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자주 뵐께요^^
 

 영하 10도. 아침 수은주가 가르킨다는 표현은 낡다 싶다. 관용어를 관용할 수 없다. 더구나 지난 밤의 강풍까지 제법 스산한 분위기까지 옮아온다. 하여튼 한해를 마감하지 않았는데 서툴게 짚고 가야겠단 마음에 이리 수선이다.










1. 과학 - 집중해서 끝까지 밀고갈 심산이었던 것 같은데, 로저 펜로즈에서 멈추었다. 그는 올해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무척 논쟁적이라 젊으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구순을 바라보고 있다. 무의식중에 노년차별이라니, 이 또한 성차같은 것이게도 하겠다 싶다. 이탈리아의 물리학자의 책은 바닷가 블루하라카페에서 마무리했다. 시간을 사건으로 본 것이 이채로웠는데, 이탈리아 사상가나 철학자들에겐 그런 맥락이 있다 싶다. 타르드나 사건의 정치학을 쓴 친구들도 그러하다. 수학자인 친구는 인문학에 심취한 친구이기도 한데, 수학을 이렇게 일상의 무늬와 버무려 쓸 수 있는지 놀랍기도 하다. 생명이란 무엇인가는 칼세이건의 전부인과 아들의 함께 쓴 책이다. 생화학에 관한 접근이 신기하면서도 빨려들어갈 정도의 충동을 주기도 한다. 생명의 탄생과 더불어 광합성의 과정을 파악하면서 곧 메카니즘을 응용한 발명이나 발견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예상하는 장면이 나온다.  올해 영국에서 잎사귀 한장. 인공광합성 사례가 기억에 남는다. 실리카 베이스의 태양광에너지 역시 똥을 남기니 안전하다고 볼 수도 없다. 뭔가 더 나은 진척이 있길 바래본다.











2. 톨스토이 - 단편, 중편소설, 그의 예술이란 무엇인가와 삶이 끌려 계속 살피게 된다. 파격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 역시 너무도 잠잠하다. 대화와 논쟁의 텍스트로 살피기게 부족함이 없다. 대형교회와 그에 빠져드는 청춘과 잡히지 않는 삶들은 위태로울 지경이다. 신이 아니라 복을 구한다고 솔직해지기나 했으면 그 다음 발을 디딜 수 있을까 싶다. 









3. 21세기 사상 - 브루노 라투르와 도나 해러웨이 후속 저작들이다. 인간이후, 동식물과 사물, 환원하지 않는 사유는 여러가지 가능성을 엿보이게 만든다. 인간을 전제로 한 사유의 한계가 어디인지 거꾸로 되짚어볼 수 있다. 이런 저작들 사이로 가다보면 공통적으로 지시하는 인물들이 그리스의 루크레티우스다. 하지만 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인데, 아무래도 라투르가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인물. 미셀 세르다. 그를 거쳐 조금 더 들어가면 비코의 충실한 해석자 쥘 미슐레가 나온다. 그러고보면 우리의 생각을 뻗어나가는 방식이 얼마나 국한되었는지 짚어봐야 할 것 같다. 미슐레의 저작을 다시 번역하시는 분들도 계신 것 같아 다행이다 싶다. 그레이엄 하먼은 하이데거 전공자이어서인지 좀 낯선 느낌이었는데, 존재의 지도를 쓴 레비 브라이언트는 참고저자를 제대로 짚어내기에 훨씬 수월해보인다.









4. 일본소장학자 - 이런 흐름과 발맞추어 아래 두 책을 살펴보는 것도 좋다. 일본 소장 사상가라고 해야 할까. 아즈마 히로키는 지금까지의 본인 저작을 이 관광객의 철학으로 정리해주고 있다. 전 저작을 읽으면서 놓쳤던 부분을 상기하여 읽으면 좋은 독서가 될 것 같다.










5. 레비나스 - 1995년에 타계한 레비나스의 저작은 많이 나와있지 않다. 최근 본 이 책은 다행스럽게도 그의 논점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마음이란 무엇일까? 뇌와 몸사이에 있는 어떤 것은 아닐까? 감정이란 무엇일까?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자신의 과거를 미래로 어떻게 확장시키는가? 포스트휴먼이 환원하지 않는 사물에서 연결점을 찾는데 뭔가 빠져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런면에서 우리는 인간에 대해서 사유를 제대로 하기나 한 것일까 싶기도 하다. 그렇기에 레비나스의 지향성, 번식성, 사건이라는 개념은 서구의 동일성철학의 문제점을 제대로 짚어내며 최근의 뇌신경학의 출발점하고도 유사한 점이 있어 놀랍기도 하다. 서로 연결짓는 독서가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해가 기다리고 있다. 그 첫문구는 주역의 2021.1.1일자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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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0-12-31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울님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여울 2021-01-01 11:4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카스피님도 좋은 한해되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