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할 것인가? - 그람시를 읽는 두 가지 방식
루이 알튀세르 지음, 배세진 옮김 / 오월의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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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st‘ - 밑줄긋기. 사진을 찍어두고 업로드 자르고 변환하면 바로 . 걱정을 많이 덜 듯.

그렇다. 이데올로기들은, 이데올로기들이 신체에 대한 것24) 인 것과 정말 마찬가지로, 신체(이 신체에서 이 이데올로기들이 발현된다)를 지닌다. 이 신체는 국가 전체와 그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법률 체계, 학교 체계, 정치 체계, 노동조합 체계, 종교 체계,
 가족 체계, 의료 체계, 언론informationnels 체계, 문화 체계 등)보다 상위에존재하는 제도들 institutions‘ 이다. 이 이데올로기적 전체 영역들에 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인) 지배 이데올로기와 피지배 이데올로기들 사이의 거친 이데올로기적 계급투쟁이 벌어진다. ) 32

단순한 관념들‘이 아니라(이러한 ‘관념들‘이라는 형태에서 이데올로기는 존재할 수조차 없다), 대신 항상 실천과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항 상 실천적인 판단과 태도의 특정한 체계를 살아 숨 쉬게 만듦으로inspirent. 우리는 이 이데올로기들을 이 이데올로기들의 신체 내 에서, 그 [신체-편집자]의 활동 내에서, 그러므로 또한 신체들 내 에서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32

 1903년의 레닌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것이다. 그들은 노동자 계급투쟁이 맞닥뜨린 역사적 난관 혹은 이 노동자 계급투쟁의 조직화의 위기를 (어느 정도는) 의식하고 있는 활동가들로서 이 ‘무엇을할 것인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것이다. 그러므로 레닌은 이들의 질문을 듣고, 이 질문을 자신의 것으로 다시 취하고, 이질문에 최대치의 활력relief과 힘, 그리고 개방성 publicité을 제공하고, 또한 이들의 질문에 다음과 같은 구체적 답변들을 제시함으로써 (이들을) 보조한 것 말고는 전혀 다른 것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37

(이 역사적 특징은 마르크스주의 이론 자신이 먼저 자지상에 대한 절대적 진리라는 주장을 가지고서 자신의 대상을 배반하지 못하게해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위험을 경고함으로써 이 대상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있게 해주는 것이기도 하다)을 부여함으로써만이 이 대상을 인식할 수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해된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자기 자신에게자신의 대상에 대한 예방적 특징, 즉 역사적 특징을 부여함으로써만이 이러한 위험을 경고할 수 있게 된다. 자, 바로 이것이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대한 역사주의적 해석이며, 또한 그람시라는 이름이 결부되어 있는 ‘절대적 역사주의‘로서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해석이다.50

역사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진정 En vérité 역사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으며, [위에서 이미 설명했기에] 우리는 왜 그러한지 이미 잘 알고있다. 그람시에게는 역사에 관한 하나의 [대문자] 관념이 존재하기 때문이거나, 혹은 심지어 그에게 역사는 [대문자] 관념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람시에게서 역사는 하나의 [대문자] 종말/목적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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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수업

[ ] 시적 경험으로서의 교양: 교양은 행복의 또 다른 차원을 열어줍니다. 시를 읽을 때, 그림을 바라볼 때, 음악을 들을 때 지금 이 순간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극대화됩니다. 말과 그림과 음률이 주는 명료한 힘은 우리가 문화라고 칭하는, 인간의 다양한 활동이 다층적으로 얽히고설킨 공간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에게만 그 완전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여기서 겉멋만 잔뜩 든 미술 애호가나 음악회 애호가인지, 아니면 예술의 고상함을 진정으로 체험할 줄 아는 사람인지의 차이가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전자는 그냥 교육받은 소시민이고 후자는 교양의 소유자입니다. 40

[ ] 철학에서는 사고의 일치성이, 문학에서는 사건의 투명성을 부여할 수 있는 적절한 은유와 적확한 단어와 문장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철학적 깨어 있음과 언어적 깨어 있음은 서로 간섭할 수 있는 관계여야 합니다. 하나의 이야기는 사고적 일치성을 이루어야 하고, 사고적 분석은 경험의 정확한 묘사에 기댈 수 없을 때 공리공론으로 흐르게 됩니다. 67

[ ] 이야기를 읽는다는 것은 자아상을 시험대 위에 돌리고 그동안 어둠 속에 잠겨 있었던 기억의 복도로 통하는 문을 연다는 뜻입니다. 마테이가 소녀와 엄마를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악용하는 가히 비윤리적 행위를 저지르는 부분을 읽을 때 바로 그 현상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인간의 사고와 감정과 행위가 가진 복합성을 절대로 과소평가하지 말라는 중대한 개념을 지키고 있는 의무를 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72

[ ] 문학적 이야기가 가진 정신은 의구심의 정신이며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하는 정신입니다. 모름에 대한 인정은 이야기의 화자조차도 인물의 깊이를 완전히 알지 못한다는 느낌을 나타낼 정도로 등장인물이 가진 깊이에 대한 존중을 동반합니다. 이런 존중심을 가지고 등장인물들을 전개시키는 사람은 독자가 자신의 상상력을 등장인물들 안에 쏟아부를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을 열어놓습니다. 등장인물을 잊을 수 없는 이유는 결국 그 인물 자체가 아니라 독자 스스로 활짝 열어젖힌 상상의 통로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문학적 이야기하지는 언어적 쓰레기에 대항하는 싸움입니다. 73

[ ] 우리가 자꾸만 감상하고 싶은 것은 색, 구도 그리고 붓의 터치입니다. 문학적 글의 평가 기준 또한 그림을 보는 마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줄거리를 이미 다 아는데도 자꾸만 또 읽고 싶어지는지, 즉 글의 형식 때문에 그 글을 읽고 싶어지는지가 우리가 문학을 선택하는 기준입니다...문학적 글은 음악적 요소를 많이 품고 있습니다. 하나의 글에는 특정한 숨결, 특정한 리듬, 하나의 멜로디가 있습니다. 82, 84 작가는 자기가 쓴 모든 단어에 대해 왜 다른 단어가 아닌 바로 그 단어를 사용했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86

볕뉘. 몇 번을 훑어보게 된다. 장황하지 않게 이렇게 단아하게 정리할 수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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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고, 김이듬시인 낭독회와 부산비엔날레를 다녀오다.
아 그리고 지난 목요일 독서노트 모임도 있었네.

그래 한 친구는 발달장애를 다룬 책을 이야기했고,
이듬시인은 어린시절 진주에서 아기인형을 업고 다니는 미친년이야기를 했지.
그리고 수직식물정원으로 꾸며진 미술관에서 난민과 아프리카청년의 절규를 들었지.

그러다 페소아 이야기를 잠깐 나누었고, 아니 두 번씩이나 나누었네.
브레히트도 에밀리 디킨슨도 만났네.

표류하는 흑발을 다시 보았지. 무척 처절한 내용이었고, 아니나 다를까 시인이 요구한
페미니스트와 파르티잔, 개의 화자에 집중해보았는데
그녀의 진주사투리와 말 밖으로 나타나는 성격, 일련의 삶의 시선에서 여실히 읽을 수 있었지.

비엔날레는 사실 별로였고, 영상과 설치물 위주라 더 더욱....발품을 한참 팔아야했지.
그 가운데 건질 것이라고는 몇 작품이 없었네. 큐레이터의 설명을 일부러 들어도 그 생경함은 줄어들지 않았지.
이민휘&최윤의 영상작품, 나스치우 모스키토의 아프리카선언, 스마다 드레이푸스의 영상 정도였어.
이내 말라버리는 눈물처럼
흝고 지나치는 감정들처럼

흔적이 자욱, 아니 자국으로...아니면 화인으로 번지면 싶었는지도 몰라.
서정시를 쓰기 힘들어지는지도 모르겠어. 자꾸. 번갈아 뭔가 자꾸 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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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편지

[ ] 공명- 그와 같은 난세에 깊은 산속에서 책을 읽고 지내는 인간의 삶이 허락되었다는 것은 나에게 놀라움이다. 현실의 삶의 소용돌이를 자기 정신 속에서 진실하게 반영하면서도 그 소용돌이에서 직접 비켜선 자리나 개인을 허락하는 것, 그것이 문화다.....현실세계를 고도의 반성과 사유를 통해서 체계적으로 정리하려는 개인이 자기 바깥의 어떤 권력이나 권위에 의해서 한낱 동원의 대상으로 내몰리지 않아야 된다....자기의 삶을 자신의 손으로 ‘경작‘할 수 있는 자유! 자기 생활의 독립과 품위를 보장하는 문화! 221

[ ] 길에 관한 명상: ‘길들인다‘는 것은 주체가 아닌 것을 주체에게 본질적인 것으로 만든다는 뜻인데, 그 현상을 우리말에서는 ‘길들인다‘고 나타낸다. 밖에 있는 길을 안에 들여놓는다는 표현이다. ‘안‘이란 물론 인간의 안, 인간의 의식, 인간의 감각의 ‘안‘에 ‘들여놓는다‘는 뜻이다. 31 길 ...>길들이기..> 기르기, 이렇게 ‘길‘은 인간의 곁에 가까워지고마침내 인간 자체의 능력, 인간이 자기 안에 갖추게 되는 ‘기술‘이 된다. 이 과정에서 객체였던 것이 주체의 내용이 된다. 32

[ ] 길:하늘에도 길이 있고, 물에도 길이 있고, 땅에도 길이 있고, 짐승들에게도 길이 있으며 짐승과 식물과 사람 사이에도 길이 있게 되었다. 이처럼 ‘길‘이라는 말에는 운동과 규칙성, 객체적인 것과 주체적인 것 그리고 ‘관계‘따위의 - 인간 의식이 세계를 파악하는 중요한 인식 형식이 모두 들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마침내 ‘길‘은 ‘길이‘라는 추상적인 형식에까지 이르는데 이것은 일차적으로 공간적인 개념이면서도 시간적인 개념으로도 사용된다. 그러니까 ‘길‘이라는 말은 실체, 관계, 운동, 시간, 공간, 기술이라는 개념을 모두 가지고 있다. 32, 33

[ ] 길:언어체계란 인간의 경험인 머릿 속의 산과 벌판, 강과 바다를 시간과 공간의 축 위에 표시하기 위한 좌표계이고 낱낱의 단어는 그 지점의 좌표 값이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마음‘이라는 혼돈의 공간에 가로세로 줄을 긋고 그 줄의 교차점마다 이정표를 세우는데 그 이정표의 문면이 우리가 낱말이라 부르는 사물이다. 인간의 마음은 그렇게 해서 길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 길은 마음 속에도 있다. 이 마음속의 길은 비가 와도 허물어지지 않고 지진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말‘이라는 것은 어느 문명에서나 신성하고 신비한 힘을 가진 실체로 오랫동안 믿어왔는데, 그것은 이처럼 ‘말‘이라는 것이 ‘길‘이 내면화된 것으로 인류의 경험의 요약이며, 자신의 지식이기 때문이다. ‘길‘은 ‘진리‘ ‘지식‘ ‘힘‘과 같은 뜻으로 쓰이게 된다. 이렇게 쓰일 때의 ‘길‘이란 곧 ‘말‘이다. ‘길‘ ...> ‘말‘..> ‘진리‘라는 길을 밟는다. 35

[ ] 혁명의 본질: 포석 조명희; 타성을 휘어잡고, 그것의 주인이 되자고 할 때 비로소 인간은 짐승에게서 갈라선다. 마음이 없으면 마음의 아픔도 없다. 마음은 아직, ‘밖‘에는 없는 것을 자기 안에서 꿈꾼다. 이 꿈과 현실을 비교한다. 꿈이 현실이 되게 하려고 행동한다. 그는 성공하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한다. 좌절하더라도 그는 인간이었기 때문에 좌절한 것이다. 그는 인간답게 살았다. 257 노예제도가 나쁘다는 아무런 윤리적 선험 원칙도 없다. 노예들이 싫다고 할 때 비로소 원칙이 생기는 것이다. 노예가 되느냐 자유민이 되느냐, 그것은 취미의 문제다. 적어도 형이상학적인 아무런 근거도 없다. 어느 쪽이 ‘옳다‘는, 다만 노예든 자유민이든 그 속에 있는 자는 계속 그렇게 있고 싶은 타성을 지닌다. 그것을 바꾸려는 시도가 오히려 귀찮음으로 대해지는 경우가 흔히 있다. 316 노예의 달력에는 늘 여름만 있고 자유민의 달력에는 겨울도 있다. 겨울과 폭풍을 두려워하는 자 - 그것이 노예이다. 322 이상 감정이 흐르는 하상에서

볕뉘

흔적들을 다시 보면서 많은 느낌들이 생겨난다. 몇 편의 소설 속에서 작가로서 위상보다는 끊임없이 사유하는 모습이 더 감겨오른다. 아포리즘도 그러하다. 어쩌면 그의 흐름들이 온전히 담겨있는 이 책으로 갈증을 목축이고 있다는 느낌. 더 살펴볼 수밖에 없는 아릿함이 배이기도 한다. 아직 옮기지 못한 밑줄들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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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일기.아침의 피아노

1. 애도일기

[ ] 주체는 (이건 점점 분명해지는 사실인데) ˝인정을 받으려는˝ 목적을 따라서 행위를 하는 (애를 쓰는) 존재다. 143

[ ] 애도의 슬픔을 (비참한 마음을) 억지로 누르려 하지 말 것(가장 어리석은 건 시간이 지나면 그것들이 없어질 거라는 생각이다), 그것들을 바꾸고 변형시킬 것, 즉 그것들을 정지 상태(정체, 막힘, 똑같은 것의 반복적인 회귀)에서 유동적인 상태로 유도해서 옮겨갈 것.

[ ] 이 슬픔은 절대적 내면성이 완결된 것이다. 그러나 모든 현명한 사회들은 슬픔이 어떻게 밖으로 드러나야 하는지를 미리 정해서 코드화했다. 우리의 사회가 안고 있는 패악은 그 사회가 슬픔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65

[ ] 영혼을 믿지 않는다는 건, 영혼들의 불멸을 믿지 않는다는 건 얼마나 야만적인 일인가! 유물론은 진리이지만 그러나 그 진리는 또 얼마나 어리석은 진리인지! 169

[ ] 누구나 자기만이 알고 있는 아픔의 리듬이 있다. 172

[ ] 마망은 내게 가르쳐 주었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을 절대로 아프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걸. 179

[ ]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머릿속에서 상상할 수 있는 최상의 유형. 그러니까 우리가 상상으로 눈앞에 떠올리는 어떤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아름다움은 그와는 반대로 우리가 상상해볼 수 없는 어떤 새로운 유형. 그러니까 실제가 직접 우리에게 드러내는 어떤 것이다. 프루스트, 생트-뵈브 193

[ ] 마망의 죽음은, 모든 사람들은 죽는다는, 지금까지는 추상적이기만 했던 사실을 확신으로 바꾸어주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그 어떤 예외도 없으므로, 이 논리를 따라서 나 또한 죽어야만 한다는 확신은 어쩐지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216

[ ] 사진은 어떻게 성스러워지고 모범이 될 수 있는지를 ..> 사진으로 기억되는 건 동일성이 아니다. 그건 그 동일성 안에 들어 있는 믿기 어려운 표현, ˝덕성 virtus˝이다. 230

[ ] 슬픔의 자기순환적인 길 안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한권의 책을 씀으로써 하나의 작별을 마무리짓곤 했었다. 그것이 나의 방식이었다. - 집요함, 은밀함. 241

[ ] 머리가 뛰어나다는 게 무엇이겠는가. 자기와 함께 지내는 사람에게 아무런 거리낌도 느끼지 않게 해주는 것, 그것보다 더 높은 지능이 어디 있을까. 262


2. 아침의 피아노

[ ] 사랑은 한 단계 더 높아져서 정신이 되어야 한다. 정신으로서의 사랑. 사랑은 정신이고 그럴 때 정신은 행동한다. 27

[ ] 사는 건 늘 새로운 삶을 꿈꾸는 것이었다. 남겨진 시간, 흐르는 시간, 새로운 시간, 그 한가운데 지금 나는 또 그렇게 살아 있다. 28

[ ] 누군가는 말했었다. ˝음 하나를 더하면 기쁨이 되고 음 하나를 빼면 슬픔이 되는 것, 그게 인생이야.˝ 33

[ ] 생의 명랑성 - 우렁찬 정신은 야채 장수처럼 목청으로 제 존재를 보여준다. 그 목청의 정신을 배울 때다. 35

[ ] 사진은 마술이다. 찍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사건이 된다. 45

[ ] 물들은 급한 곳에서는 우렁차고 평평한 곳에서는 잠시 머물러 조용히 파문을 만든다. 그러면서도 낮은 곳으로 흐르른 걸 잊지 않는다. 정신이 무엇이고 마음이 무엇인지 알겠다. 정신과 마음이 만나면 아름다움이라는 것도 알겠다. 생이 음악이라는 것도 알겠다. 48 흐르는 것만이 살아 있다. 흘러가는 ‘동안‘의 시간들. 그것이 생의 총량이다. 51

[ ] 사건은 그런 책들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위기를 만난 마음속에서 태어나는 ‘사건들‘이다. 이 사건들은 놀랍고 귀하다. 정신과 몸이 함께 떨리는 울림. 이 울림은 모호하지 않다. 종소리처럼 번지고 스미지만 피아노 타음처럼 정확하고 자명하다. ....마음의 사건 - 그건 문장과 악보의 만남이기도 하다. 53

[ ] 정확한 때 정확한 곳을 베어야 합니다. 그러면 칼은 춤이 됩니다....나의 삶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타자들의 것이기도 하다. 79 나의 몸은 관계들 속에서 비로소 내 것이기도 하다. 80

[ ] 환자의 주체성은 패러독스의 논리를 필요로 한다. 생의 근원적 덧없음과 생의 절대적 존재성, 그 사이에서 환자의 주체성은 새로운 삶의 영토를 연다. 83 투병이라는 말은 옳지 않다...사랑이 그렇듯 병과도 잘 이별하는 일이 중요하다. 잘 헤어지고 잘 떠나보내는 일이 중요하다. 미워하지는 않지만 함께 살 수는 없는 것이 있다. 그것들과의 불가능한 사랑이 필요하다. 90 환자는 투명한 주체다. 그는 그에게 일어나고 다가오는 모든 것을 통과시킨다. 환자의 주체는 종결을 각오한다. 그러나 그 종결에게 항복하지 않는다. 환자의 주체는 사랑의 주체다. 그는 사랑의 마음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다. 환자의 주체는 미적 주체다. 그는 자기와 세상의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않는다. 101

[ ] 하모니는 관계다. 관계는 모두가 음악이다. 105

[ ] 삶의 향연이다. 너는 초대받은 손님이다. 귀한 손님답게 우아하게 살아가라. 119 생은 과정이지 미리 결정된 시스템이 아니다. 121

[ ] 롤랑바르트의 애도일기: 슬픔의 셀러브레이션이다. 이 텍스트가 말하고자 하는 건 명확하다. 그건 무력한 상실감과 우울의 고통이 아니다. 그건 사랑을 잃고 ‘비로소 나는 귀중한 주체가 되었다‘는 사랑과 존재의 역설이다. 186

[ ] 선한 사람이 된다는 건 온전히 기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선함이 사랑하는 정신의 상태라면 기쁨은 사랑받는 육체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194

[ ] ˝...허리가 아픈데 어떻게 바다 일을 하시나요? ˝늙은 해녀가 말한다.˝물질을 사람 힘으로 하는가. 물 힘으로 하는 거지....˝ 216

[ ] 그래. 나는 사랑의 주체다. 사랑의 마음을 잃지 말 것. 그걸 늘 가슴에 꼭 간직할 것. 268


볕뉘. 철학아카데미 대표의 작고소식을 듣다. 검색하다보니 그가 번역한 롤랑바르트의 애도일기. 그리고 아침의 피아노가 들어왔다. 두 권의 애도일기. 가까운 지인을 보낸지 해 반이 가까워온다. 아직도 여진이 있어 울컥거리기도 하고, 그 시장통을 지나면 못내 그립다. 벗의 말 가에 그가 걸리기라도 하면 그만.... 제목은 김진영고인의 책의 마지막 대목이다. ‘내 마음은 편안하다.˝ 삶은 죽음 부근에서 점점 더 선명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두 편의 일기는 그 자장 속에 있는 슬픔이 삶을 얼마나 애잔하게 하고, 흔히 잊혀지는 삶의 농밀함을 다시 불러낸다. 어머니에 대한 간절함. 아니 분신이기도 했던 아들 바르트 역시 몇 년 뒤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뜨게 된다. 그렇게 죽음은 불쑥불쑥 다가오기도 한다. 마음을 여미며 밑줄을 옮겨본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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