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에 반대한다

[ ] 운동에 반대한다: 일상적인 운동에 대해 덜 점잖지만 더욱 강력한 정당화는 날씬함이다. 인체 기계의 건강과 그것이 지닌 자본을 유지할 의로운 책임보다는 비열한 의지를 훈련하는 것과 연관된 활동이다. 26/ ˝당신은 저주받았다. 저주받았다. 저주받았다.˝ 요란한 헬스장에서 끝도 없이 계속되는 리듬으로 기계들이 내는 소리다. 한때는 건강의 권위와 우리 몸과 생물학적 과정의 전시가 친절해 보이고 심지어는 해방해주는 것으로 보였다. 우리는 질병을 이겨내고 내숭 떠는 빅토리아 여왕 시대 사람들을 몰아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화살은 과녁에서 돌려지고 일부는 우리 사생활를 관통해버렸다. 33

[ ] 섹스 아이들의 오후: 개혁가들이 성을 삶에서의 중요성이 때문이 아니라 그 사소함 때문에 해방했다면 더 좋은 결과로 이어졌을 것이다. ˝ 성은 생물학적 기능이고, 그 까닭으로 누구를 핍박할 근거가 못 된다. 성은 진리와 무관하니, 기초적이고 생물학적이고 사적인 것으로 사람들에게 압박을 가하면 안 된다. 그렇게 우연적인 근거로 사람을 핍박하면 안 된다. 사람들이 자기 성을 부정하도록 강요하거나, 그것을 밝히도록 강요하지 않고 그들을 내버려 둬야 한다.˝50/섹스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하는 것이다. 60 섹스를 덜 부각하고 젊음을 폄하하는 일이 계획적인 재평가 조치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열의보다는 지성, 모험보다는 자율성, 활력보다는 기품, 순수보다는 세련미, 그리고 어쩌면 참신한 경험들보다는 경험에 대한 확인 또는 반복에 대한 추구처럼 성년기의 가치들을 선호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62

[ 1 ] 삶의 의미 1: 경험이라는 개념; 급진적 방안은 경험의 개념에 대항해 특별한 종류의 경험을 확장시켜 이용하는 것이다. 끝없음과 자발적 개시를 새롭게 보장함으로써 경험의 양에 대한 필사적인 추구를 극복한다. 이 방안들은 특별한 사건의 우연한 발생으로부터 경험을 풀어줄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낸다. 당신이 어디에 있든, 당신이 살고 있는 매 순간에 경험이 일어나도록 노력한다. ‘인생‘이 그냥 발생하는 게 아니라 당신이 원해서 발생하도록 하는 것이다. 현대는 우리에게 유효한 급진적 방안 한 쌍을 남겼다. 바로 심미주의와 완벽주의이다. 131/심미주의는 모든 대상을 예술 작품 대하듯 보라고 요구한다. 예술이 근본적으로 감정과 열정을 각성시키기 위한 기회라고 믿는다. 당신은 예술 작품을 경험한다. 그 속으로 들어간다. 그림 속의 인물들을 상상하고, 내용만큼 형식도 경험의 대상이 되어 그 색채와 형태를 음미한다. 당신은 모든 것을 느끼거나 맛본다. 그것을 갈망하고, 그것에 압도당하고, 자신을 자극시키거나 만족시키거나 역겹게 하기 위해 그것을 증폭시킨다. 캔버스를 끝까지 짜내려고 머릿속에서 그것을 꼭 비튼다. 수련법은 바로 이런 방법으로 나머지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익히는 것이다. 134/심미주의에 숙달된 사람에게 경험은 드물지 않다. 늘 가능하다. 경험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리라. 가장 추한 사물에서도 경험을 가져오는 것이 플로베르식 심미주의의 특징이다. 추한 것을 갖고도 그런 경험을 끌어낼 수 있다면 당신에게는 결단코 경험이 부족할 날이 없을 것이다 . 아름다운 사물이라면 덤이다...˝어떤 추함 속에 발견되는 도덕적 밀도가 있다.˝ 그 누구도 감히 그런 것들을 파괴하거나 바꾸려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이 플로베르식 심미주의자의 독특한 도덕이다. 136 완벽주의 역시 간단한 단계가 있다. 모든 것을 하나의 예인 듯 바라보라. 예라 함은 그저 그것이 구현하는 생활 방식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줄 뿐이다. 이 각각의 예들이 경험하게 되면 당신의 자아를 소환한다는 것을 이해하라....어떠한 예로든 당신 삶을 변화시키라는 부름을 받고 자아가 반응한다면 당신은 삶을 바꿔야 한다. 그리고 일단 변하면 다시 바꿔라.....고로 완벽주의에 완벽은 없다. 경험과 상응의 과정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139/심미주의와 완벽주의는 우리가 경험의 세게에 들어가는 방식을 개발하여 그것에 마음을 쓰게 하고, 알고 있는 불활성 물질에 직접 과도함을 추가하게 한다. 폭넓은 우리 정신에 진정으로 상응하는 것에 이르는 그 너머로 가는 유일한 방도는 위로 높이 떠오르는 게 아니라 그 안으로, 그 바로 위로 가는 것이다.143

[ ] 삶의 의미 2: 직감적 법제화 또는 재분배; 프로프리움proprium 진정한 재산은 당신에게 고유한 것이다. 당신이 손을 댄 것, 꼭 당신에게만 고유한 것으로, 다른 사람이 소유한다면 그 상태가 변하는 것을 뜻한다. 당신 옷, 당신 거주지, 당신이 만지고 쓰는 물건들, 당신이 개인적으로 밟는 땅, 소유물은 속성처럼 되어버리는 소유 상태 242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것들에 쓸 수 있는 금액보다 연간 수입이 더 많을 때, 그럴 때 우리는 더 이상 진정한 재산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프로프리움이 아니라 부적절하고 낯선 것을 다루고 있다. 243/부자들이 부자일수록 모두가 형편이 더 나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세상의 딕 체니 같은 이들이 자기 말고 다른 모든 사람들의 저녁을 먹어버리기 때문에 비만한 것이다. 경제 하향 침투설은 부양의 철학이다. 부자들이 먹으면 먹을수록, 입안에 빵 조각을 처넣으면 넣을수록, 그들 밑에 있는 나머지 사람들인 우리에게 이득이 되는 걸 더 많이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것이 효과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이 자격 없는 자들의 위를 통과하고 그들을 먼저 살찌우며 그들에게 과다한 영양분을 전달하는, 이미 소화가 반쯤 되어 있는 거라는 사실은 잊을 수 없다. 우리가 놀라워하는 그들의 기념비들도 노폐물로 구성되어 있다. 왜 배설물로써 세상을 얻는가? 돈이 우리한테 올 때 부자를 거쳐 오지 않아도 된다면 왜 우리가 세상을 원래의 도덕적인 형태로 취하지 못하겠는가? 248

[ ] 삶의 의미 3: 마취적 이데올로기; 에피쿠로스는 쾌락이 삶의 목표지만 그 쾌락을 고통의 끝과 부재로 정의했다. ˝우리는 쾌락이 부재하여 고통스러울 때만 쾌락이 필요하고, 고통스럽지 않으면 더 이상 쾌락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에피쿠로스학파의 이상은 아타락시아, 평정, 즉 태연함과 무심함이었다. 이러한 태연함은 피한다고 이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피할 수 없는 경험에 대해 올바르게 생각하는 방식을 통해서만 이룩할 수 있는 것이었다. 322/금욕주의에서 욕구를 통제하는 방법은 쾌락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쾌락에 대한 느낌을 정신이 경험을 단련하는 뿌리로서 생각한다. 에픽테토스의 금욕주의는 세상을 당신에게 달린 일과 달려 있지 않은 일로 나누라고 한다. 그리고 남의 일, 자신에게 달려 있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결코 욕망도 혐오도 없도록 욕망과 혐오감을 제어해야 한다. 당신은 자기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을 절대로 욕망해서는 안 된다. 명예도, 사건도,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나 행동이나 반응도, 자기 몸이 겪은 모든 좋은 경험들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질병, 죽음, 또는 자기 몸이 겪는 나쁜 경험처럼 자신의 선택 없이 당신에게 닥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정신적 거부감이 없어야 한다. 아파서 신음할 수 있지만, 그것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아야 한다. 사태의 운명은 당신이 아닌 자연에 달려 있다. 324

볕뉘.

1. 맘껏 먹고 건강을 유지하면 안될까. 살을 빼려고 굳이 운동할 시간을 들여야 하는가. 카프카의 단편소설 자신의 몸에 죄목을 새겨 사라지는 인간들. 숫자강박에 시달리는 건강좀비를 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조금 속을 비워 정신을 또렷하게 하려고 두끼를 먹은지 한 달이 지나간다. 마음 껏 먹는다는 점에서. 아무튼, 비건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그 책도 이렇게 시작하는 거라한다. 또렷해지고 싶다.

2. 예술로서의 삶. 완벽주의 함께 설명을 해낸다. 말미 비경험까지 섞어 읽어볼 만하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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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의 정치학

1.

[ ] 가해자에게 질문하는 반성폭력 운동을 제안한다. 우리는 가해자에게 물어야 한다. 왜 여성을 때렸습니까? 아내를 ‘교육시킨다‘면서, 교육만 시키지 왜 죽였습니까? 안 때린다고 공증까지 했으면서 왜 또 때렸습니까? 술을 마셔서 때린게 아니라 때리기 위해 술을 마신 거 아닌가요? 술을 마시고도 아내를 때리지 않는 남성이 훨씬 많습니다! 왜 비서에게 개인적인 심부름을 시키고 돈을 지불하지 않았습니까? 왜 안마를 요구했습니까? 왜 수시로 초과 노동을 시켰습니까? 왜 평소에는 여성 인권 운운했으면서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습니까? 왜 자신의 성폭력 재판에 부인이 나왔죠? 본인이 생각하는 성폭력, 성관계, 사랑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피해자와 사귀지도 않았으면서 왜 불륜이라고 거짓말을 했습니까......97

[ ] 우리가 젠더 사회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결정적인 인식의 차이를 가져온다. 젠더는 ‘여자 문제‘나 ‘여성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모순이며 권력 관계다. 젠더를 이해할 때, 미투 운동의 위상도 가늠할 수 있다. 젠더 체제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의 의미를 고려할 때, 미투 운동은 너무나 갈 길이 먼 첫 걸음이자 동시에 엄청난 사건이다. 미투 운동은 젠더 폭력에 분명한 경고와 타격을 가했다. 게다가 미투 운동은 확실히 대중화되었다. 크고 작은 시행착오를 거치더라도, 여성들의 의식을 과거로 되돌릴 수는 없다. 명분, 법 제도, 현실의 요구에서 미투 운동은 결코 멈출 수 없는 사회 운동이다. 미투 운동은 더 광범위해지고, 더 섬세해지고, 더 강력한 문화 운동으로 발전할 것이다. 인류 문명 초기부터 여성에 대한 폭력과 여성 살해, 피점령 지역의 남성은 살해하고 여성은 강간하는 성별화된 제노사이드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준비해야 한다. 남성들이 이처럼 작은 변화에도 모든 것을 빼앗긴 것처럼 분노하면 곤란하다. 사실, 남성들도 알고 있다. 미투가 계속되리라는 것을. 침묵은 깨졌다. 106/ 이 두려움과 분노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남성 개인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남성도 가부장제 구조의 희생자˝라는 식의 언설은 남성을 자기 변화가 불가능한 미성숙한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다. 공동체의 안전과 성숙을 위해 한국의 남성 문화, 한국 남성에게 가장 요구되는 덕목은 무엇일까. 한국 남성에게 국가 안보나 생게 부양의 책임을 요구하는 시대는 이제 지났다. 사실 역사상 한국 남성은 ‘보호자 남성‘이라는 성 역할을 수행한 적이 없으며,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에는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남녀와 상관없이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인간들이 ‘나대는 ‘ 사회가 가장 위험하다. 그러니 이제 남성들도 ‘거울‘ 앞에 섰으면 한다. 자신을 보라. 자신을 알고, 남에게 폭력과 피해를 주지 말라. ....그들에게 요구되는 새로운 ‘성 역할‘은 스스로 책임지는 것이다. 남성 사회의 변화, 이것이 진정한 미투 혁명이다. 107

2.

[ ] 춘향전리뷰; 어떤 한 인간이 그 사회에서 성적 주체로 존중받는 것은 단지 섹스를 할지 안 할지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려나가는 것이라고. 성폭력은 강제로 섹스를 하는 문제가 아니라 주체적인 삶을 존중하지 않는 폭력이라고. 자신의 이야기를 더는 순결과 정조를 지키려고 한 여인의 감동적인 고난 극복기로 읽지 말아 달라고. 열녀가 되길 원한 적이 없다고. 오히려 아무도 자신처럼 목숨이 위험해질 정도까지 내몰리길 원하지 않는다고. 바라는 것은 여성의 ‘성‘을 지켜주는 사회가 아니라 사람의 ‘삶‘을 지켜주는 사회라고 말이다. 145

3.

[ ] 여성 범주 내에서도 다양한 권력이 작동하고 착취와 억압이 작동한다. 이것은 은폐할 것이 아니라 성찰과 분석의 대상으로 삼을 문제다. 젠더 연구는 젠더, 계급, 인종 등이 교차하는 횡단의 정치로 접근해야 할 뿐만 아니라 젠더 자체의 복잡성을 탐구하는 상호 교차성 연구가 되어야 한다. 젠더를 질문하는 방식 자체를 바꿔야 하다. ‘젠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여성과 남성은 어떻게 다른가?˝라는 질문이 아니다. 후자의 질문은 이미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원 젠더를 당연한 자연 질서로 전제한 것이다. 이 전제는 앞서 두 건의 폭력 사건을 통해 확인했듯, 혐오 폭력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작용한다. 젠더 혹은 섹스와 젠더의 관계를 이미 알고 있다고 가정하지 않아야 한다. 질문해야 할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면 기존의 억압 제도를 반복하게 될 뿐이다. 따라서 섹스와 젠더의 필연성 자체를 질문하는 것으로 젠더 연구를 시작해야 한다. 질문은 다음과 같이 바뀌어야 한다. ˝우리는 이 사회에서 어떤 과정을 통해 적법하고 적절한 젠더로 배치되는가?˝ ˝폭력은 개인의 몸에 젠더를 어떤 식으로 배치하는가?˝172

[ ] 다중억압으로 폭력을 설명하는 방식은 미흡하며, 삶 자체를 설명할 수 없게 만든다. 이것은 젠더를 다중 억압이 아니라 상호 교차로 설명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젠더 범주 그 자체만으로도 복잡한 의미가 생성될 뿐만 아니라 젠더 범주 그 자체만으로도 복잡한 의미가 생성된다. 젠더 논의로서 트랜스젠더퀴어 이슈를 논함은 젠더 자체를 상호 교차 개념으로 독해한다는 뜻이다. 삶을, 젠더를 상호 교차 개념으로 이해하려는 노력 속에서 폭력을 개념화하는 작업은 중요하다...폭력은 인간 주체성을 형성하고 이 사회의 적절하고 적법한 존재로 포착하는 방법이다.... 193, 194

볕뉘.

제조물 책임법이 떠오르기도 한다. 제품 하자로 소비자가 신체나 재산에 손해입은 것을 입증하여야 했으나, 제조물의 결함으로 피해 받은 사실만 입증하면 배상을 받을 수 있는 제도이다. 삶을 짓누르는 숱한 짐들은 보이는 것만이 아닐 것이다. 이제 됐다고 하거나 한숨 쉬었다고 하는 순간. 어김없이 일들은 벌어진다. 당연한 것은 이 세상, 저 세상에도 없을 것이다. 멈추거나 머무르는 순간이 짓누르는 것이 삶들일 것이다. 아무도 남의 삶을 방해하려 해서는 안되지 않을까. 더 명민해지고 더 바꾸어나가는 수밖에 없는....어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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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와 대화

[ ] 현재는 언제나 현재로서의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다네. 시인의 마음속에 날마다 솟아오르는 사상이나 느낌은 그 모두가 표현되기를 원하고 또 표현되어야만 하네. 그러나 보다 큰 작품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머리가 가득 차서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고, 모든 사상을 등지고 생활 자체의 안락함까지 잃어버린느 걸세. 단 하나의 커다란 전체를 정리하고 완성하는 데 필요한 긴장과 정신력의 소모를 생각해 보게. 게다가 그것을 막힘없이 흐르는 시냇물처럼 적절하게 표현하자면 또 얼마만한 정력과 방해받지 않는 조용한 생활환경이 필요하겠는가. 그러나 일단 전체를 잘못 파악하면 모든 노고는 허사가 되고 말지. 더 나아가서 그처럼 규모가 큰 대상의 경우에는 개별적인 부분에서 그 소재를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하면 전체적으로 여기저기 결함투성이가 되고 마네. 그러면 비난을 받게 되겠지. 그리하여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시인에게 돌아오는 것은 많은 노력과 희생에 대한 보상과 기쁨이 아니라 불쾌함과 정력의 쇠퇴일 뿐이네. 반면에 시인이 날마다 현재를 염두에 두면서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을 한결같이 신선한 기분으로 다룬다면 무언가 좋은 걸 만들 수 있고, 때로는 잘 안 된다고 하더라도 그 때문에 모든 것을 잃지는 않는다네. 57, 58

[ ] 세상은 너무나 넓고 풍부하며 인생은 너무도 다양하기때문에 시를 쓸 계기가 모자라는 일은 결코 없어. 하지만 모든 시는 어떤 계기에서 쓰여야 하네. 말하자면 시를 쓰는 동기와 소재가 현실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거지. 그 때마다의 특수한 경우가 보편적이고 시적이 되는 것은 시인의 손길을 거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네. 이런 의미에서 나의 모든 시는 그 어떤 일을 계기로 쓰였으며, 그 모두가 현실에서 자극을 받고 현실에 그 뿌리와 기반을 두고 있어. 그러므로 나는 허공에서 지어낸 시들을 존중하지 않는다네. 59

[ ] 근래의 비극 작가들에게서 심혼과 어느 정도의 문학성마저 부정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경쾌하면서도 생생하게 표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아. 그런데도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추구하는 게 아닌가. 그러한 점을 고려하여 나는 그들을 ‘주제 모르는‘ 작가라 부르고 싶네. 74

[ ] 시와 관련하여 자네에게 두 가지만 말하지. 자네는 지금 개별적인 것을 포착하기 위해 예술 본연의 높이와 무거움으로 돌진해야 하는 그런 지점에 서 있네. 이념으로부터 벗어나자면 반드시 그래야만 해. 자네는 재능도 있고 상당히 발전된 단계에 있으니 이제는 의무적으로 반드시 그래야 하네. 80/특수한 것을 포착하고 표현하는 것 또한 예술 본연의 생명이라네. 보편적인 것에 머무른다면 누구나 우리를 따라할 수가 있어. 하지만 특수한 것은 그 누구도 모방하지 못한다네. 왜냐고?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지. 특수한 것이 공감을 얻지 못할까 염려할 필요는 없어. 모든 특징은 그것이 아무리 고유한 것이라 할지라도 보편성을 가지며, 돌에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표현대상도 마찬가지로 보편성을 가진다네. 왜냐하면 모든 것은 반복되며, 이 세상에 단 한 번만 존재하는 건 없기 때문일세. 81

[ ] 대상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나. 대상이 없는 예술론은 아무것도 아니네. 대상이 적합하지 않다면 그 어떤 재능이라도 허사야. 그리고 현대 화가들에게 품위 있는 대상들이 부족하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현대의 회화가 모두 정체되고 있는 걸세. 우리 모두가 그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 자신도 이 현대성이라는 걸 부정할 수가 없었네. 85

[ ] 이렇게 하시면 안 될까요.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도와주는 겁니다. 마치 그림을 설명하면서 그동안 거쳐왔던 단계들을 보여줌으로써 지금 눈앞에 완성되어 있는 것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방식 말입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하고 괴테가 말했다. 그림의 경우와 사정이 다르다네. 왜냐하면 시라는 것도 역시 말로 되어 있는 이상, 말을 덧붙인다면 다른 말이 죽고 마는 걸세. 89

[ ] 이 시는 전체적으로 독특한 구석이 많아서 선생님의 어떤 시와도 비슷하지가 않습니다. 그러자 괴테가 말했다. 그것은 그런 연유네. 말하자면 나는 한 장의 카드에 거금을 걸 듯이 현재에다가 모든 것을 걸었네. 그러고는 그 현재를 과장 없이 가능한 한 높이려고 한 것일세. 98

[ ] 생각한다는 일이 이렇게 어렵지만 않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모든 생각은 생각 그 자체에게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아. 다만 천성적으로 정직하다는 것이 중요하네. 그래야만 훌륭한 착상들이 마치 신의 아들들이라도 되는 것처럼 언제나 우리들 앞에 나타나서. ‘우리 여기 있네!‘하고 소리쳐 부를 걸세. 119

[ ] 불멸이라는 이념에 몰두하는 것은 고상한 신분의 사람들이나 할 일이며 특히 아무 할 일도 없는 여자들의 일이라네. 그러나 이미 이 세상에서 무언가 제대로 된 것을 이루려고 하면서 날마다 노력하고 투쟁하고 영향을 미쳐야만 하는 유능한 사람은 내세의 세계는 되는대로 내버려 둔 채 이 현세에서 유용한 일을 찾아 활동하는 법이지. 더군다나 불멸성이라는 관념은 현세에서의 행복이라는 점에서 최선을 다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위한 것이네. 내 감히 말하지만 그 선량한 티트게의 운명이 보다 좋았더라면 그는 보다 나은 사상을 가졌을 걸세. 126

볕뉘

니체가 최고의 교양서라고 한 괴테와의 대한 1편을 읽고 있다. 시와 예술에 대한 대목을 읽고 있는데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대목들이 많다싶다. 쭉 읽어나가게 될 듯 싶다. 좋은 참고서이다.

그리고 토마스 만의 중편 베네치아의 죽음도 읽었다. 예술가의 삶. 구스타퍼 말러를 주인공으로 한 내용인데 미세함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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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 감정의 철학

[ ] 차이의 소멸. 이 질서의 위기를 맞아 하나의 숨겨진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전원 일치의 폭력을 위한 공물. 분신처럼 너무도 닮아 버린 구성원들 속에서 알아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미미한 징후를 근거 삼아, 한 사람의 제물(희생양)을 가려낸다. 분신과도 같은 서로를 향하던 악의와 폭력이, 순식간에 이 불행한 제물에 쏠린다. 이렇게 전원 일치의 의지에 따라 공물이 성립한다. 공물을 계기로 집단은 새로이 차이의 체계를 재편하고, 위기를 교묘하게 모면한다. 58

[ ] 현실 사회는 권력 구조로 점철되어 있고, 너희는 이미 그 사실을 깨닫고 무의식적으로 그 예행연습을 하고 있노라고, 교사들이 아이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다.인간은 평등하다느니 기본적 인권이라느니 하는 입바른 소리를 그저 이념에 불과하며 (이념적으로는 훌륭하지만) 현실은 이와는 동떨어진 아수라장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가해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내 몸을 지키고 싶다는 생각에 결국 가해자가 되고 만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가르쳐 주는 것이다.; 열 살쯤 먹었으면 이런 가혹한 권력관계는 알고도 남는다. 60

[ ] 차별 감정으로서의 혐오가 강한 사람은 주어진 상황에 둔감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몹시 민감한 사람들이다. 그중에서 ‘정상으로 보이고 싶은 욕망‘이 강하고, ‘의례적 무관심‘을 가장해 자기 주위에 이상한 사람이 없는지 탐색해서 찾아내고 고발하는 사람이다...... 관련 요소는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차별 감정이 심한 사람도 있다. 이들은 사회적 약자에게 혐오감을 가진 사람들 이상으로 ‘정상으로 보이고 싶은 욕망‘이 강하고, 자신과 타인에 대한 도덕적 욕구가 높고, 그렇기에 타인의 부(비)도덕에 대해 이상하리만치 공격적으로 비난을 가한다. 61

[ ] 차별 감정이 강한 사람이란, 일반적으로 남을 싫어하는 성향이 강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사회적 감정에 따라 남을 미워하는 성향이 강한 사람이라고 하겠다. 또한 관념적으로 사람을 싫어하는 성향이 강한 사람이며, 어떤 사람을 향한 자신의 혐오감에 대한 자기비판 정신이 없는 사람이다./ 선량한 약자들 역시, 약자 특유의 지극히 비열한 방법으로 차별 문제를 흐리고 있다. 그들은 상처 받기 쉽고 약한 자신에게 모든 것을 맞추라고 요구한다. 자신도 가급적 타인을 싫어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이는 오로지 자신이 타인에게 미움 받고 싶지 않아서이다. 이들은 미움을 받으면 더 이상 살아갈 기력도 없을 정도로 침울해진다. 그래서 어떻게든 미움 받고 싶지 않다는 강한 바람을 품고, 자신은 미움 받고 있지 않다고 필사적으로 믿는다. 그래서 이곳에는 자기기만이 꿈틀댄다. 71,72

[ ] 미움 받고 싶지 않다는 바람이 극단적으로 강한 사람은 반성해야 한다. 이는 미덕이 아니라 그저 인간으로서 미성숙할 뿐이며, 오히려 사회에 끊임없이 해악을 끼친다. 인간이란 부조리하게 남을 미워하는 존재이니,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우리는 타인으로부터 (부조리하게) 미움 받는 것에 대한 저항력을 키워야하며, 그러한 저항력이 있는 사람만이 현실적으로 차별 감정에 맞설 수 있다./인간의 위대함은 악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선을 갈구하는 데 있으며, 남을 속이고 상처주고 이용하고 파괴할지언정 ‘상냥함‘과 ‘배려‘를 완전히 버릴 수 없는 데 있다. 이러한 인간의 다이너미즘을 가르쳐야 한다. 72

[ ] 나치스가 대중의 마음을 조작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유대인의 의지가 도덕적으로 열등하다고 과대 선전한 덕분이었다. 이는 유대인에 대한 ‘공포‘와 연결된다. 경멸의 배후에는 공포가 있다. 75

[ ] 권위주의적 성격과는 반대되는 요인을 가지면서도 차별의식이 강한 사람이 있다. 차별 문제에 몰두하며 피차별자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듣는 사이에 ‘무슨 수를 써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가해자와 피해자로 양분하는 지극히 단순한 이항 대립을 적용하고 그 생각을 구축해 나간다. 그들 역시 ‘역차별‘이라는 차별 의식이 강한 사람이다. 복수심이 강한 사람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으며, 논리적으로도 실천적으로도 대단히 공격적이다. 80

[ ] 마녀재판에서 찬송가를 부르며 ‘마녀‘를 장작불에 던졌던 사람들, 히틀러 정권 아래에서 유대인 박멸 연설을 들으며 환희로 가득 찼던 사람들, 그들은 극악무도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놀랄 만큼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자기비판 정신‘과 ‘섬세한 정신‘이 철저히 결여된 ‘선량한 시민‘이었다. 81

[ ] 왕따의 구조를 살폈을 때와 마찬가지로 비교적 균질적인 사람들의 집단으로 이루어진 현대 일본에서는, 고상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고상하지 않은 타자를 만들고, 그 사람들과 비교함으로써 자신의 불안정한 고상함을 확고히 하려고 한다. 90

[ ] 자기 안에 깃든 악을 타인에게 투영하는 치밀한 투영이 선행되어 차별하는 이들의 죄책감을 없앰으로써, 차별은 양심의 가책 없이 당당하게 실행도고 한층 가혹해진다. 극악무도한 사람이 아닌, 모든 도덕관념을 송두리째 날려버린 퇴폐주의자가 아닌, 오히려 죄책감이 강하고 소심하고 선량한 시민이기에, 차별 감정으로서의 경멸에 매달린다. 91

[ ] 차별 문제의 어려움은자기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싶고, 우월감을 느끼고 싶고, 더 좋은 집단에 소속되고 싶다는, 즉 ‘보다 나은 존재가 되고 싶다‘는 바람이 단단히 결합되어 있는 것처럼 ‘좋은 점이 나쁜 점을 뒤에서 받치고 있다‘는 데 있다. 차별을 없애려면 악을 없애면 된다는 단순한 구조가 아니다. 차별 문제는 인간의 마음속에 깃든 ‘악‘을 잘 파악해서 퇴치하면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차별 문제는 우리 인간의 발전하고자 하는 마음과 맞닿아 있다. 105

[ ] 칸트는 자신과 타인 안에 있는 ‘인간성‘을 존중하라고 했다. 인간의 동물적 측면을 포함한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그 자체로 존중하라는 말이다.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존중하라는 뜻이 아니라, 이성적 존재이면서 동물이기도 한, 대단히 불안정한 인간 존재를 존중하라는 말이다. 배설이나 성교 같은 동물성이 그대로 노출되는 상황일수록 ‘인간으로서의 자부심‘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 117

[ ] 지적장애인이라면 약자이자 피차별 후보자이기에 현대사회에서는 정중하게 보호 받는다. 그런데 단순히 학습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다. 이러한 부조리 앞에서 어쩔 수 없다며 포기하는 수밖에는 없다. 철학자는 이러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주목해야 한다. 이 거대한 부조리를 건너뛴 채, 장애인 차별이나 여성 차별이나 인종 차별같은 전형적인 차별 문제만을 다루는 한, 그 문제에 아무리 열정을 쏟는다 한들 섬세한 정신을 지녔다고 할 수 없다.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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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 수집가의 여행
[ ] 어머니는 어디든 다시 돌아올 사람처럼 여행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 모든 것을 다 보려고 안달하기 쉬운데 그러면 오히려 아무것도 제대로 볼 수 없다고 했다. <다음에 볼 것을 남겨 둬야 해. 다시 오고 싶게 만드는 무언가를.> 19

[ ] 가끔 평범한 목격자가 정책 분석가보다 더 귀하다. 선입견 없는 아마추어가 진실을 더 제대로 본다. 맞춤 양복에 눈이 멀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21

[ ] 나는 영국에서는 교육이 야망에 떼밀린 필수 활동이 아니라 즐겁게 누리는 사치로 간주되곤 한다는 사실을 한참 뒤에야 깨우쳤다. 계급으로 나뉜 사회에서는 실력주의의 지배력이 미묘하다는 사실을 이전에는 몰랐다. 푹푹 끓인 음식이 왜 그렇게 많은지도 몰랐다. 한 땅에서 수백 년을 이어 노동해 온 집안들이 품는 자신감을 몰랐고, 영국인은 다급한 진심을 반쯤 가리고자 유머를 우아하게 사용하곤 한다는 사실도, 나라 전체가 영속성이라는 든든한 습관을 갖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영국인 친구들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을 읽지 않았다는 데 놀랐고, 나는 친구들이 좋아하는 시인들을 이름도 몰랐다는 데 놀랐다. 우리는 정녕 내 예상보다 공통점이 더 적은 공통의 언어로 나뉜 두 나라였다. 나는 영국의 모든 곳에 스민 위풍당당함을 사랑하게 되었고, 즐거움이 성공만큼 중요하다는 새 신념을 사랑하게 되었다. 뱅크 홀리데이와 오후의 티타임을 좋아하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종교가 심판하는 것이자 늘 재발명되는 것이 아니라 고상하고 의례적인 것이라는 점이 좋았다. 영국인은 미국인보다 훨씬 더 열심히 여행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여행지에 흠뻑 녹아들 줄 아는 영국인의 태도는 나로 하여금 이 책에 기록된 여정을 시작하게 만든 한 요인이었다. 25

[ ] 희망이란 행복한 유년기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그 수혜자에게 불가피하게 뒤따를 트라우마를 견딜 힘을 갖춰 준다. 그것은 또한 원초적 사랑처럼 경험된다. 이전까지 비교적 비정치적이었던 내 삶은 모스크바에 체류하는 동안 궁지에 몰린 진실성이 갖기 마련인 절박함을 띠게 되었다. ..비록 근거없는 희망이었던 것으로 드러났어도, 그때 그 희망을 느낄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후 내 모든 생각을, 내 모든 그림을, 내 모든 존재를 결정지었어요...32

[ ] 집에서는 하루하루가 경계 없이 흐릿하게 이어지기 쉽지만, 낯선 환경에서는 하루하루가 삶을 또렷하게 만들어 준다. 테니슨의 시 속에서 율리시스는 이렇게 말했다. <여행을 그만둘 수는 없다: 다 마셔 버리리라/삶의 마지막 찌꺼기까지> 나는 여행이 시간을 멈추게 하기 때문에, 나로 하여금 현재에 머물도록 만들기 때문에 좋아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세상은 한 권의 책이다. 여행하지 않는 자는 한 쪽만 읽는 것이다.>라고 말했다는데, 나는 앞표지부터 뒤표지까지 다 읽고 싶었다. 나는 길을 나섰다. 이 세상에 벌어진다면 좋을 것 같은 변화들을 목격하고자. 34

[ ] 나는 개입과 상호성이라는 문제를 갈수록 더 유념하게 되었다. 모든 새로운 관게는 양쪽 모두에게 혼란을 준다. 그것을 피하거나 최소화하려고 애쓰는 대신, 그 혼란에 자신을 더 활짝 열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이례적인 상황에 적응하는 일은 본디 잘하는 편이지만, 그러면서도 그들과 내 차이를 인식해야 했고 그들도 그 차이를 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그들과 같은 척 꾸며서는 그들에게 녹아들 수 없다. 서로의 차이를 이야기할 때, 그리고 우리 삶의 방식이 그들의 방식보다 어떤 면에서든 더 낫다는 가정을 접어 둘 때, 비로소 녹아들 수 있다. 36

[ ] 여행은 자신을 넓히는 연습인 동시에 자신의 한계를 알아보는 연습이다. 여행은 우리를 증류하여, 맥락을 떠난 본질만을 남긴다. 완전히 낯선 장소에 몸을 담갔을 때만큼 자신을 또렷하게 볼 수 있는 경우는 또 없다. 39

[ ] 장소를 알아 가는 것은 사람을 알아 가는 것과 같다. 그것은 심리를 깊이 이해해야 하는 일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과 나눈 소통을 이해하려면, 먼저 상대를 이해해야 한다. 내게는 조리 있는 논리가 상대에게는 부조리할 수 있고 그 역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려면, 겸손함이 있어야 한다. 맥나마라는 말했다. <우리는 전쟁의 언어로 논쟁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보편 언어인 줄 착각했던 거죠.> 42

[ ] 원초적이면서도 진정성이 없기는 쉽지만, 거친 것을 두려워하면서 진정성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빅토리아 시대의 위대한 에세이스트 존 러스킨은 열차 여행의 효율성이 여행의 즐거움을 없앴다고 불평하면서 이렇게 썼다. <열차 여행은 다른 장소로 그냥 <<보내지는 >> 것이다. 짐짝이 되는 것과 별다를 바 없다.> 내가 불편함을 즐기는 취향을 기르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처음에는 불편함을 즐기는 것보다는 모험을 즐기는 편이 좋았지만, 후자라면 멋진 시간을 보내게 되고 전자라면 이야깃거리를 얻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차츰 어느 쪽에든 마음을 열게 되었다. 44, 45

[ ] 자유로운 사회에서는 개인이 각자 야망을 이룰 기회가 있지만 자유롭지 못한 사회에서는 그런 선택지가 없는데, 오히려 그 덕분에 더 거창한 야망이 허락되기도 한다.47 자유가 정체와 연관되는 경우는 드물다. 자유는 거대한 변화의 시기에 단발적으로 등장한다. 자유의 한 구성 요소는 낙관주의인데, 낙관주의는 앞으로 벌어질 일이 지금 벌어지는 일보다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동반한다. 변화는 종종 무모하다. 종종 끔찍하게 잘못된다. 분위기에 짜릿한 자극을 가하지만 종종 그 짜릿함이 실현되지 않고 소실되는 결과만을 낳는다. 민주화의 전제 조건은 모든 구성원들이 의사 결정의 무게를 나눠서 짊어지기로 동의하는 것이다....정부만 바뀌면 되는 것이 아니라 억압에 길들었던 국민들의 마음도 바뀌어야 한다. 이 일에는 한 세대가 걸릴 수도있다. 나는 사람들이 자유를 좇아 구속을 떨치는 모습을 보면서 변화란 참으로 영광스럽지만 참으로 힘들 수도 있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자유를 획득한 뒤에는 자유롭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자유로워진 자신을 되찾고...자유는 배워야 하는 것,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49

[ ] 부르카를 쓰고 와서 도착하자마자 벗었는데.. 법도 더 이상 여자들을 옭아매지 않았는데..첫 번째 여자는 ˝세상이 바뀌면 당장 벗어던지겠다고 늘 생각했지만, 이제 와서는 변화가 안정적이지 못할까 봐 걱정스러워요. 혹 탈레반이 권력을 되찾게 되면, 난 돌에 맞아 죽을지도 몰라요.˝ 두 번째 여자가 말했다. ˝나도 벗고 싶지만, 사회의 기준이 아직 바뀌지 않았어요. 이걸 쓰지 않고 나갔다가 강간이라도 당하면, 사람들은 다 내 탓이라고 말할 거예요.˝ 세 번째 여자는 말했다. ˝나도 이 쓰개가 싫어요. 탈레반이 물러나자마자 벗겠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시간이 흐르다 보니, 남들에게 나를 내보이지 않는 데 익숙해졌어요. 그게 내가 되어 버렸어요. 다시 남들 눈앞에 드러낼 걸 생각하면 스트레스가 너무 커요.˝ 먼저 개개인으 마음속에서 많은 것이 변해야만 뒤따라 사회가 변하는 것이다. 49

[ ] 위대한 진전이 비극과 함께 벌어질 때도 있다. 그런데도 사회가 새롭게 재탄생하는 기분을 느끼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상시적 불확실성으로 혼란스러운 사회라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변화는 점진적인 침식의 결과가 아니라 빈발하는 부정 출발의 결과일 때가 많다. 실패한 시작이 두 번, 세 번, 혹은 열 번쯤 쌓인 뒤에야 비로소 돌파구가 열리고 변화가 오는 것이다. 거꾸로, 변화에서는 즉각 노스탤지어가 따라 나온다. 현재가 더 낫다고 해서 흠 있는 과거를 지울 수는 없는 법이고, 그 어떤 과거라도 대단히 아름다웠던 요소를 조금은 갖고 있는 법이다. 우리가 이제는 말소된 과거의 정체성을 기억하면서도 현재를 살아가려면, 진정한 용기가 필요하다. 52

[ ] 어떤 것이 변할 수 있는 소수의 것에 속하고 어떤 것이 변하지 않는 많은 것에 속하는지 패턴을 찾아보려고 애썼다. 진단은 덜 내리고, 질문은 더 잘 던지고, 답은 성급히 내지 않으려고 애쓰게 되었다. 과거에는 변혁적 혁명을 믿었지만, 지금도 믿는 것은 개선적 진화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순진했던 듯한 그런 확신 덕분에 내가 다른 문화들을 더 많이 탐구했던 것은 사실이다. 54

[ ] 선의로 의도되었더라도 강요된 통제보다는 공개된 담론이 더 쉽게 정의로 이끈다. 금지된 발언이라는 개념을 거부하는 것은 용기 있는 일이고, 금지된 것을 말하여 그것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바꾸는 것은 대단히 멋진 일이다. 61

[ ] 어릴 때 나는 용기보다 안락을, 안락보다 안전을 우선하라고 배웠지만, 어른이 된 뒤에는 그 위계를 뒤집으려고 애쓰며 살았다. 릴케는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연습할 것은 하나뿐, 서로를 놓아주는 것이다. 서로를 붙잡는 것은 쉽게 되는 일이니 따로 배울 필요가 없다.>....내가 거듭 밖으로 나가 본 뒤에야 집을 온전히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을....작별은 친밀함의 필수조건이다. 71

볕뉘

어떻게 살고 있을까. 생각하는 무엇이 다를까. 일상 가운데...끊임없이 일어나는 것 가운데 변화. 그것은 무엇일까. 지난 겨울 독서를 그 실마리를 조금 마련해주었다싶다. 그렇게 해서 어쩌다 손에 들린 책이다. 경이롭고 놀랍고, 어쨌든 그 놀라움을 추적해 가다보면 저자의 유년에 실마리가 있다. 게이인 저자는 결혼을 했고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 어쩌면 그의 감정의 촉수는 그가 경험한 많은 대륙들의 일상에 끊임없이 접속되어 있는 지도 모르겠다. 아는 것이 괴로움일지도 모르겠지만, 가끔 스스로 무지가 재미도 없고 스스로를 무디게 만든다 여긴다. 좀더 다른 방식으로 삶을 접속하는 이들의 흐름에 녹아 산다는 것. 제법 부러운 일이라는 생각들에 잠겨있다. 당분간..어쩌면 분위기의 톤으로 잠잠히 읽는 독서가 이어질 것 같다. 영국 단편소설 가든파티도 주문을 넣었다. 러시아 단편소설에서 좀더 색다른 맛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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