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는 아직 걷히지 않았다



 최은영, 쇼코의 미소, 2016


  소설집 『쇼코의 미소』에서 외면적으로 눈에 띈 건 등장인물의 공간적 위치다.  20대의 청년들이 당연하다는 듯 어딘가, 아니 구체적으로 다른 나라에 있거나 가려거나 갔다 왔다. 작가가 교환학생이나 외국 생활의 경험이 있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 정도로 나는 왜 그많은 이야기들을 제쳐두고 이게 제일 눈에 띄었을까.

  소설집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낮게 깔린 안개가 아직 걷히지 않은 상태’처럼 느껴졌다. 정서적인 느낌을 말함인데, 정적인 이 분위기는 배경에도 영향을 미쳐 이국의 지명이 등장함에도 그곳이 국내인지 국외인이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다. 어찌 보면 지명이란 부수적인 것일 뿐, 본질적인 아닐 것이다. 그것이 내용을 압도하는 공간적 배경이 되지 못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제 소설 속 이국은 마냥 낯선 곳이고 먼 곳이라는 이미지가 약해지고 있다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그때만 해도 내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비겁하게도 현실에 안주하려는 사람들을 마음속으로 비웃었다. 그런 이상한 오만으로 지금의 나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렸지만, 그때는 나의 삶이 속물적이고 답답한 쇼코의 삶과는 전혀 다른, 자유롭고 하루하루가 생생한 삶이 되리라고 믿었던 것 같다. p31. 쇼코의 미소 


  또한 우리의 청년들은 한국에서나, 외국에서나 그 삶이 비슷한 일면을 보이고 있다는 얘기일지도. 그들은 희망하거나 절망을 이유로 한국을 벗어나 있지만, 희망이나 절망의 근원은 ‘내적인 것’이 더 주요한 해결책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거리’가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심리적이든, 공간적이든.

  

시간이 지나고 하나의 관계가 끝날 때마다 나는 누가 떠나는 쪽이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생각했다. 어떤 경우 나는 떠났고, 어떤 경우 남겨졌지만 정말 소중한관계가 부서졌을 때는 누가 떠나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알 수 없었다. 양쪽 모두 떠난 경우도 있었고, 양쪽 모두 남겨지는 경우도 있었으며, 떠남과 남겨짐의 경계가 불분명한 경우도 많았다. p89. 신짜오, 신짜오


  또하나, 걷히지 않은 안개의 느낌은 타인에 대한 ‘나’의 태도다. 제 이해의 틀에서 생각하고 타인에 대해 적극적으로 이해하려고 애쓰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굳이 외면하진 않고 있구나, 라는 느낌. 그래서 희미한 안개 속에서 그들은 손을 내밀 수 있을 것이라고.  베트남 전쟁과 세월호, 그리고 민주화 운동을 소재로 하면서 엮어 가는 이야기들이 시대적인 우울을 주면서도 그래서 무거움을 인식시키면서도, 사람에 기대어 희망의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조금씩 아픔을 보아가도록 하면서. 그래서, 이 안개 속을 벗어나기 위한 방법은 서로 의지하는 것일 거라고.

  이것이 우울에 내려앉는 느낌이 들다가도 되살아나도록 이끌어 주는 힘인 모양이다. 최은영의 우울은, 퇴폐적이고 무겁지 않은 우울이라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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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균열의 근원


 나비잠, 최제훈 저, 문학과지성사, 2013.

  

  아이 시절을 지나 나비잠을 잔 날은 얼마나 될까. 형태적인 것을 넘어 정말 달콤하고 편안한 잠의 세계, 개운하게 일어나 아침을 맞는 일은 언제부턴가 요원해졌다. 짧고 불편한 잠과 흉흉한 꿈의 뒷자락으로 뒤숭숭한 하루 하루는 늘 불편하고 불안한 ‘현재’를 만든다.

   이렇게 살고 있는 요섭이다. 아직 꿈에서 깨어나지 않은 듯 이 소설은 요섭의 꿈과 현실사이를 오간다. 꿈은 각본이 있는 것처럼 어릴 적 보던 만화영화나 동화의 내용들과 어우러져 등장한다. 꿈에서는 늘 쫓기고 죽음을 맞이하고 있지만 현실이라고 다를 리 없다. 이 소설이 잡지에 연재된 작품으로 당시 제목은 ‘몰락:전래되지 않은 동화'라는 점에서 이 소설 속 동화가 차지하는 역할은 크다고 할 수 있다. 4부로 나뉘어 소설이 전개되는데 하루, 균열, 몰락, 몰락이 소제목이다. 눈에 띄는 것은 소단락 제목의 반복이다. 바로, '몰락‘. 더할 나위 없는 몰락의 세계를 그리는 것일까. 이미 몰락 속에 있는데도 더 몰락할 거리가 남았다는.

  그럼 요섭의 몰락 세계는 어떻게 이뤄지는가. 요섭은 목사 아들로 고급아파트, 미모의 아내, 야구선수를 꿈꾸는 아들이 있는 로펌 변호사다. 잘나가는 로펌변호사로서 우리가 드라마나 소설 속에서 익히 봐온 로펌변호사의 전형이다. 그러니까 변호인의 정의는 어디다 줘버린, 기업이나 구린 사람들의 변호가 일순위인 그런 조직 속에서 승승장구하는.

  어쨌든 어디든 잘나가면 그만일 수도 있겠다. 계속 그렇게 그 세계 속에서 잘먹고 잘살아가야 하는데 그러다 ‘정의’의 이름으로 쾅 뭉개지는 게 맞는 그림인데… 그렇지가 않다. 그는 꿈속에서 뭘 찾고 있는 것일까. 반복적인 꿈과 그 동화의 세계는 어린 시절의 기억 속으로 그를 이끌어 간다. 역시, 이야기는 잃어버린 기억과 연관이 되는 것이다.

  늘 같은 하루 하루를 보내고 어느 순간 ‘균열’이 일어나는 순간, 그것은 그가 지내오던 하루의 삶에서 비껴간 순간이다. 그런 로펌 변호사라면 그렇게 살았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대리기사를 무료 변론하면서 일은 생겨난다. 이 시대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자들은 당연하지만 진짜와 가짜로 나뉜다. 진짜의 경우에도 여러 가지로 나뉠 수 있지만 ‘있는 자’에 의해 피해를 보는 경우가 상당수다. 이것을 몰랐던 것일까. 라이벌 변호사와는 ‘다르다’는 한순간의 ‘방심, 엉뚱함’이 일으킨 자기 삶의 균열을.

  이 사건을 승소하면서부터 아니 이 사건을 맞은 순간부터 사람들은 자신을 보는 눈을 달리한다. 보는 눈만 달리하면 되는 것을 그의 삶까지도 달리 만든다. 그러한 세력들도 있다. 그가 살아온 삶이 뒤바뀌게 만드는. 촌지 전달한 학부모, 바람피는 아내, 주식 투자 실패, 쫓기며 린치를 당하고 아들은 자살로 생명이 위중한 상황에 놓인 전직 로펌 변호사로 만들어버리는 그런 세력들. 현실의 그는 그들을 향해 한방을 날리려 동분서주하면서도 꿈 속에서 일어나는, 기억나는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도 역시 동분서주한다.

  그의 몰락이 자신이 지켜오던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원칙을 ‘깨고’, ‘선한 일’을 한 대가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옳은’ ‘선의의’ ‘좋은’ 일을 하려는 이들에게 기대하는 바가 여지없이 깨져버릴 때의 참담함. 비록 평소에는 그렇게 살지 않았던 요섭이라고 그런 일의 결과는 좋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선의의 결과가 기대한 바가 아니게 되면 사람들은 다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선의가 선의를 낳을 수 없는 구조라면 선의가 피해를 발생시키고 삶을 무너뜨리는 이유가 된다면, 결과가 된다면 이 세상에서 선의를 바라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종국엔 선의의 실종이 되고 마는 사회가 된다. 이 한번의 선한 행동으로 일어난 요섭의 몰락은 ‘개과천선’의 당위성마저도 허물어버린다. 이 세상은 정말 악의만이 부귀영화를 보장받는 길인가.

  현실의 그를 어쩌면 지배하기도 하는 요섭의 꿈. 꿈속에 등장하는 온갖 동화들의 세상이 그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또 뭔가. 그의 이 ‘선한’ 행동은 꿈 때문이었을 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의 꿈과 현실이 맞닿아 있는 지점에서 그는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서 잊어버렸던 기억을 찾아 떠난다. 반복된 꿈속의 무성과, 메달이 의미하는 것은 어린 그가 살았던 지명인 무성과 그림을 그려 수상한 메달이다. 기억은 자신이 메달의 주인이 아니고 그렇기에 메달의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가 메달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무언가. 그가 살아온 것처럼 누구에게 빼앗은 것인가, 악의 결과물인가. 기억을 찾아 가면서 묻어 두었던 기억이 그를 괴롭게 한다면, 로펌 변호사였던 그는 정말 직업을 잘 선택한 것이지 않을까. 그러면서도 그가 이 기억을 잃어버린 이유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날이 기억을 까맣게 잊어버린 건, 사소함 때문이 아니라 유해함 때문이었다. 진화는 윤리나 미학과 무관했다. 합리적이지도 체계적이지도 않았다. 오로지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그때그때 하는 땜질일 뿐. 나를 경멸하게 만드는, 내가 해로운 존재라는 자각을 상기시크는 기억은 꼬리뼈처럼 퇴화되기 마련이었다. 살아남는 데 방해가 되니까. 그러다 어느 날 빙판에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는 순간 척추를 관통하는 찌릿한 통증과 함께 떠올리는 것이다. 아, 내게도 꼬리뼈가 있었구나. p355 


  그러나…. 그의 기억은 잘못된 것이다. 보다 기원. 찾아다니며 기억하는 것과 여전히 기억하지 못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았을 때, 진짜 그의 꼬리뼈를 찾았을 때 그의 꿈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연결이 되는가. 모르겠다. 이 끝없는 꿈의 세계. 그에게 몰락을 가져다주었던 ‘선의’. 그 기억 속에 어린 요섭이 있었다. 그것을 기원이라 한다면 그것을 근원이라 한다면 그가 주욱 잊고 잃고 살았던 것은 결국 ‘선의’가 되는 건가. 그의 몰락은 ‘선의’를 해서가 아니라 ‘선의를 져버리고 살았기에’가 되는 건가. 나비잠을 잘 수 없는 이 꿈의 세계는 그런 거였던가. 꿈은, 기억 속의 어린 그의 모습이 찾던 것은 그의 맘속에서 계속 찾고자 했던 것은 결국 선한 세계였던가.

  알 수 없다. 그저, 한 사내가 몰락한 세계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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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 투어(鬪魚)


최선의 삶, 임솔아, 문학동네, 2015.


무서운 것에 익숙해지면 무서움은 사라질 줄 알았다. 익숙해질수록 더 진저리쳐지는 무서움도 있다는 걸 그 때는 몰랐다. p12


  열여섯 아이들의 이름은 강이. 아람. 소영이다. 이들이 각각의 이유로 집을 나와 거리의 상처를 경험하고는 돌아와, 다시 또 떠난다. 이 이야기의 표면은 폭력인가. 거칠게 서로를 헐뜯으며 폭력을 휘두르는 이들의 모습들이 가보지 않은 정글을 떠올리게 한다. 그럼에도 청소년들의 이야기는, 성장소설이라 불리며 늘 그 언저리의 이야기들을 그려낸다. 이제는 일방적인 폭력의 희생자가 그려지지 않고 학교에서 만난 이들이 가하는 폭력의 세계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맞물려 있다. 그저,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자가 이긴 자가 된다. 그때, 이겼다고 말할 땐 그것은 가해자를 말함일까 피해자를 말함일까.

  강이의 세계는 명문고 입학률이 높은 학교로 위장전입한 순간이 될 것이다. 아이들에게 제가 사는 곳을 거짓말로 해야 하는 ‘읍내동’ 출신에 대한 부끄러움, 열등감. 읍내동에선 뭐든 잘하는 집도 잘사는 아이였지만 전민동 학교를 다니는 순간 이도저도 아닌 존재가 되어 선생님으로부터도 멸시를 받는 강이의 꿈은 머나먼 곳으로 떠나는 것이다. 도대체 선생님은 어떤 이유로 “얼굴 보는 게 싫다”는 말을 이제 중학생 아이에게 할 수 있는 것일까.

  아람은 집이 싫어서, 집에선 상처가 자라나서 집을 떠나지만 집보다 거리에서 더 상처를 받는다. 집에서의 상처가 어린아이의 것이었고 시시하게 여길 수 있는 것이었지만 거리는 아니었다. 그저 밖이 좋아 함께 집을 나간 강이와 아람과 집을 나가면 병신같이 살아야 하기에 어떡하든 집은 나가지 않으리라던 소영은 거리의 아이들이 되지만 어느 순간 집으로 돌아온다. 소영의 “집에 가자”는 말 한마디에 따라서.

  이렇게 거리의 상처를 함께 경험하던 이 세명의 소녀들이 학교에서 더 끈끈해지지 못했던 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이들 셋 사이의 감정의 농도의 문제일까, 관계의 문제일까. 세 아이는 다른 성격과 처한 환경이 달랐다. 소영은 예뻤고, 키도 컸고, 성적도 최상위권이었다. 반면에 아람은 가진 것이 없는 환경에서 살고 있고 여린, 약한 아이다. 그렇다면 강이는 어떤가. 사람에게 충성을 다하는, 친구따라 집을 나가는 강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이 세 아이들이 되돌아와 서로를 끌어안지 못한 이유는 거리에서는 드러나지 않았던 위계가 떠나야 할 이유가 가득한 곳에 있었을 땐 드러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선생들은 우리라는 덩어리를 싫어했지만, 그중 몇몇 선생은 소영이라는 개인을 아꼈다. 몇몇 친구는 소영을 부러워하거나 질투했고, 몇몇 친구는 소영을 무서워했다. 소영은 꼭 필요한 아이였다. 싸움이 났을 때 미지근하게 끝내는 법이 없었다. 아이들과의 싸움은 물론이고 어른들이나 선생과의 문제에도, 소영이 개입하면 최선의 결과를 낳았다. p88


  질투에서든 부러움에서든, 비교가 될 수밖에 없는 소영에 대한 미움을 아람이 표출하면서 그들 사이의 ‘거리의 끈끈함’은 사라졌다. 아람은 제 고치지 못하는 이빨 상태도 소영의 탓으로 돌린다. “이게 다 소영이 때문이야.”

  세상 사람들은 아이고 어른이고 할 것없이 편가르기에 열중한다. 제 편을 만들지 못하면 이 세상을 살아가기 힘들다는 듯이 편을 가른다. “아람이하고 소영이하고 싸우면 누구를 선택할 거야?” 그리고 “소영을 따돌리고 싶다기보다는 아람을 보호하고 싶다는 뜻”에서 아람의 편에 서기로 한다. 그런 이유로 아이들은 잘 뭉쳤고 소영은 왕따가 된다.

  거리를 나가기 전에, 거리에서 소영과 강이가 서로에게 어떤 애정을 가졌든 지금, 강이는 아람의 편에 서 있다. 보호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소영에게 느낀 두려움도 한몫했을 것이다. 강이는, 소영과 가까워지고 있다는데 두려움을 느꼈으니까. 그러나, 소영은 강한 아이였다. 이 모든 상황을 뒤집을 만큼 충분히 폭력적이었다. 곧 상황은 역전한다. 강이는, 가장 최선을 다해 소영에게 복종하는 아이가 되었다.


싸움을 좋아하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싸울 수밖에 없는 순간들이 있을 뿐이었다. 소영도 마찬가지였다. 자기 보호는 치열한 공격이 될 때가 많았다. 치열한 보호가 비열해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p92


  이렇게만 되었다면 소설은 씌어지지 않았을까. 작가는 10년이 넘는 동안의 악몽에서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써야만 했다고. 문득 이 악몽은 작가적 의미일까, 아니면 기억의 하나일까 궁금해졌다. 이 책이 대학소설상을 받은 만큼 작가의 나이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대학생의 나이일꺼라 여겼는데 당시 스물아홉이었다. 소설 속의 아이들처럼 가출을 했고 나중에서야 대학을 갔다고 말한다. 언뜻 생생하기도 가출기는 작가의 경험이 녹여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문득 묻고 싶어졌다. 작가는 강이일까, 아람일까, 소영일까.

 강이는 또다시 가출을 한다. 아이들의 폭력의 세계는 어른들의 개입이 있어도 쉽사리 끝이나지 않는다. 아니, 폭력의 세계가, 편가르기의 세계가 끝나지 않는다. 마치 아이들은 놀이기구를 타고 있는 것처럼 우르르 한쪽으로 쏠렸다가 또 우르르 다른 쪽으로 쏠린다. 놀이기구는 멈추는 일없이 계속 빙글빙글 돈다.

  어쨌든 고등학교는 가야지?라는 아이들을 달래는 선생님들의 말. 아, 이 아이들이 아직 중학생이였지 생각하며 이 소설을 보면 이들에게서 벌어진 일들이 거듭된 충격을 준다. 강이는 고등학생 시절을 건너뛰고 길에서 홀로 보낸 4년의 시간을 보낸다. 물론 처음엔 혼자가 아니었지만…. 강이는 집에서 강아지 강이를 키웠던 것처럼 물고기 강이를 키운다. 강이는 애완동물들마다 제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 이유는, 강이가 투어가 되어 있기 때문일까.

  

강이가 들어 있는 어항에 다른 물고기를 넣는 상상을 했다. 강이는 운명처럼 싸우고야 말 것이다. 강이가 죽거나, 다른 물고기가 죽거나, 둘 중 하나는 없어져야 할 것이다. 강이에게 거울을 보여주지 않는 상상도 했다. 자신을 볼 수 없다는 것 때문에 강이는 곪아갈 것이다. 곪아가고 곪아가다가 어느 날 물위로 떠오를 것이다. 강이가 원하는 것이 그것일지도 몰랐다. 어항 속에서 혼자 살도록, 평생 거울과 함께 살도록,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정해진 것은 아니다. 투어로 태어난 강이는 원래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야 했던 걸까. p150


  병신이 되지 않는 것이 꿈이었던 강이는 최선을 다했다고 말한다. 자기뿐만 아니라 모두가 다. “망가뜨리거나 망가지거나. 더 나아지기 위해서 우리는 기꺼이 더 나빠졌다”고 그것이 “최선이었다고.”

  결말은 예상한 것처럼 흘러갔지만 그것이 최선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아이들이 집을 떠나고 싶은 이유들이 제 의지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일 때마다 마냥 안타깝지만 그렇다고 또 어른의 나는 무슨 말을 할까. 뭐라 할 말이 없다. 어른의 세계나 아이의 세계나 폭력은 있고 왕따는 있고 가난은 있다. 꿈은 있나. 살아가는데 여전히 어려운 것은 사람과의 관계이고  상처를 받을 때나 상처를 받지 않을 때나 서로에게 위로가 될 때나 아닐 때나 서로가 숨겨둔 칼을 겨눈 상태이다. 지금 우리를 채운 이 어항은 우리 모두를 투어(鬪魚)로 만들고 있다. 최선을 다해도 최악으로 치닫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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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틀린 순간에는 무엇이 없는가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 최진영 저, 실천문학사, 2013.


 단번에 이해되는 진실이 아니라면 그건 가짜야. p102


  단번에 이해되지 않는 세계를 그리고 있으니 이건 가짜인가. 최진영은 스토리보다 독특한 구성방식으로 이야기한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기억을 전개한다. 그리고 잽을 던지듯 짧게 끊어치는 문장과 문단. 한가득 글보다 여백이 더 많은 페이지.

  이렇게 ‘기억’을 붙들고 있는 것은 책 속의 주인공이 ‘죽지 않은 이유’를 찾는 과정인가. 죽어야 하는 이유를 찾는 과정인가. 달리 생각하면,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는 죽어야 할 이유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된다. 죽어야 할 이유와 마찬가지로. 그렇기에 죽어야 할 이유와 죽지 않아야 할 이유가 공존한다면 어느 것에 더 무게가 지워진 채로 이야기가 전개될까가 궁금하다.


왜 사는가.

이것은 원도의 질문이 아니다.

왜 죽지 않았는가.

이것이다. p16


  주인공 원도. 자신이 살아온 하루하루를 모조리 기억해야 죽지 않을 수 있다고 믿는 그의 기억 속에서 원도는 어떤 사람인가.


비록 파산하여 빈털터리가 되었고, 도망자 신세에, 간경화로 매일 피를 쏟아내고 있으며 가족에게도 버림받았지만, 아니, 가족에게 가장 먼저 버려졌지만, 때문에 당장 내일 죽더라도 이상할 것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상황에 처한 사람 전부가 죽음에 집착하는 것은 아니다. 원도의 머릿속에는 버튼 하나로 원도를 박살 내버릴 시소가 있다. 죽어야겠다는 생각과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라는 생각이 같은 무게로 시소의 양 끝에 앉아있으며, 원도는 어느 쪽으로 몸을 기울일지 선택하지 못한 채 시소의 중간에 위태롭게 서 있다. 죽어야겠다는 생각은 최근 것이고 왜 죽지 않았는가라는 생각은 오래전 것이지만, 최근 것이라고 해서 더 가볍지도, 오래된 것이라고 더 묵직하지도 않다. p41


  이것은 기억이 아니다. 이것은 사실이다. 기억 속엔 모든 열패의 순간이, 찌질한 순간이 기록되어 있다. 차마 기억하지 않은 척하다가 ‘죽음’을 가까이 둔 상황에서야 처절히 드러나는 삶의 기록엔 생각보다 ‘구멍’이 많다. 그 구멍을 메우지 못했기에 현재의 나가 만들어졌고 죽지 않은 나가 만들어진 것인가. 타인이 보기에 왜 죽지 않는지 마냥 의아스러울 뿐인 원도의 현재에는 횡령, 사기, 탈세, 살인 혐의가 전전하며 여관마다 죽음의 징조를 드리우는 원도를 불편해하는 주인들에 의해 감시받거나 쫓기는 상태의.

  기억을 거슬러 죽어야 할 순간을 회상하지만 왜인지 다 ‘아니다, 아니다’가 되어버린다. 그의 기억에 한계가 있기 때문일까. 그의 기억을 되살리다 보면 두 명의 아버지가 있다. 죽은 아버지와 산 아버지. 어머니는 이유없이 울면서 마냥 봉사활동을 다니고 자신은 어렸을 적부터 도둑질에 익숙했고 은행이란 간판을 달고 대부업을 하는 곳에서 횡령을 하면서 열심히 일지만 투기는 실패하고 횡령건이 적발되며 아내와는 서류상 남남이 된 채 한순간에 도망자가 되어 버린 원도.

  기억을 더듬은 곳에 죽은 아버지는 ‘만족스럽다’는 글자와 ‘나를 믿어라’라는 말을 남기고 물을 마시고 죽었다. 그러나 그 사이의 구멍 속엔 죽은 아버지는 물컵을 원도에게도 내밀었으니, 왜, 원도는 죽지 않았는가가 삶의 끊임없는 질문이 되어가는 것인가. 산 아버지는 ‘모든 걸 이해하라’고 하지만 원도는 모든 걸 뒤집어 대책없이 산다.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마침내 그가 기억하는 것은 하나다. 장민석. 그가 사는 게 아니라 죽지 않은 이유.

  기억 속의 열등감. 엄마에게 사랑받고 싶은 아이, 엄마에게 사랑받는 아이, 장민석에 얽힌 기억이 원도의 이유다. 원도의 기억을 따라가다 원도가 죽지 않은 이유를 이해하게 될까.


축복은 드물다. 흔해 빠진 인간에 불과한 원도는, 기억도 학습도 젬병인 원도는, 자기를 뚫어버린 그것을 기억하기보다, 몸에 난 구멍을 기억했다. 뭔가가 나를 뚫고 지나갔어. 그게 뭔지는 모르겠는데 확 지나가버렸는데 여기 구멍이 있어. 여기로 자꾸 아픈 바람이 불어와 엄마, 여기 있어야 할 게 없어 엄마. 내 몸에 이게, 이게 대체 뭐야 엄마, 원도가 운다. 무서워서 운다. 공부를, 싸움을, 축구를, 말을, 그 무엇이든 장민석보다는 잘하고 싶었다. 그래서 따라했다. p64


  여기엔 원도처럼 많은 구멍이 있다. 왜 죽은 아버지는 죽었는가. 금기시되는 그것은 자살인가. 원도와 함께 죽으려고 한 것인가. 원도만 죽이려 한 것인가. 엄마는 왜 울기만 하는가. 산 아버지는 친아버지인가. 모든 의문이 원도에게 들이닥치지만 속시원히 말해주는 이는 없는 채 원도는 어린 날,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과 죽을 수도 있었다는 공포감과 자신을 외면하는 어머니와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장민석’이란 아이에 대한 열등감 속에 허우적이며 살았다. 원도가 원하는 그녀 역시 장민석이니까. 장민석이 원하는 것은 모두 자신이 원하는 것이 되고 마는 삶을 살아온 원도는 사는 것이었을까. 원도에겐 자신이 왜 죽지 않았는가보다 더한 질문들이 많이 있지만 아무도 그 질문에 답해 주지 않는다.

  제 삶의 주인공은 결국 제 자신이라고 말하지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환경의 영향을 받는 것임을 생각할 때 원도는 어린 시절부터 제 의지와 함께 사람들로부터 내쳐지는 삶을 살았다. 어린 아이가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하는 것에서부터 새아버지가 나타나는 것, 누군지도 모르는 아이가 제 삶에 나타나 어머니의 사랑을 차지하며 살아가는 것까지. 왜 그토록 어머니는 아들에게 사랑을 주지 않고 제 아이를 그렇게 외면해 버렸는지, 끝까지 엄마는 원도를 안아주지 않는다.

  원도의 삶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삶이 어긋난 순간. 분명 그것은 원도 하나만의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든 뒤틀려버린 순간에 무엇이 어그러졌는지는 알듯하다. 원도가 갈구하는 ‘사랑’이 없었다. 원도가 죽지 않은 것은 마지막 한순간이라도 사랑을 위로를 따뜻함을 느끼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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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를 구별해 내는 것


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 김근우 저, 나무옆의자, 2015.


   전 재산이 4,264원밖에 없는 경우라면 눈앞에 주어진 일자리를 거부할 배짱은 없다. 그것이 비록 이상할진대, 비윤리적인 것만 아니라면. 사는데 돈은 필요하니까.

  작가 지망생이라 하고 백수라 칭한다. 황당한 일이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감을 못 잡지만 같이 일하게 된 여자의 도움과 조언으로 적극적으로 일에 뛰어 들게 된 주인공. 그렇다면 그 여자는? 주식으로 완전히 망한 여자.

  이 두 청춘이 구한 알바는 동네 불광천 오리가 자신이 기르던 고양이를 잡아먹었다고 주장하는 할아버지의 의뢰에 따라, 이 망측한 ‘오리’를 찾아내는 것이다. 동네 하천에 떼지어 있는 그 무수히 닮은 얼굴의 오리 중에서 고양이 호순이를 잡아먹은 오리를 판별하기 위한 사진을 찍어대고 일당 오만원을 챙기는 이 일은 찝찝한 면은 있지만 시급 만원도 안되는 이때에 괜찮은 알바자리다.

  이야기는 두 청춘남녀가 열과 성을 다해 오리 사진을 찍어대는 이야기만큼이나 왜 노인이 그 오리를 찾는지에 집중된다. 당연 이들은 엮일 수밖에 없다. 오리가 고양이를 먹었다고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괴이하고 괴팍한 노인은 늘 넓은 아파트 같은 자리에 앉아 있다. 아들과의 불화로 홀로 살지만 돈은 꽤 있어 뵈는 이 노인은 도통 제대로 먹는지 알 수 없게 집안은 오물로 난장판이고 노인의 행색 또한 늘 같은 옷만을 입고 있다. 이곳을 드나들며 두 청춘은 점점 할아버지의 이 모습에 개입한다. 쓰레기를 치우고, 먹을 것을 사서 나눠 먹고, 급기야 노인에게 ‘화’를 내기까지.

  노인은 이런 청춘을 ‘해고’하지 않고 그들과 점점 함께 한다. 게다가 물질만능주의가 되어 버린 노인의 손자까지 합세한 이 조합은 나름 가족인 것처럼 애정을 공유해 간다. 사람이 부대끼다 보면 결국 진심은 나눠지게 되는 것처럼. 가진 것이 없는 이들과 가진 것만 있는 이들의 삶이 엉키어 만들어내는 이야기 속에는 결국 ‘우리가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우리였다”라고 그들이 깨닫게 되는 것처럼.

  노인은 고독과 우울한 삶을 살아가는 이 시대의 노인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그 외로움을 채워주는 것은 오로지 반려동물뿐인 삶을 사는 그들. 다만 그들에 비해 너무나 다른 점이라면, 노인이 가진 재력이다. 그것이 노인의 삶을 달라보이게 한다. 그러니, 피고용인으로서 두 명의 청춘이 노인의 ‘업무지시’를 따르는 것이고 돈이 필요한 손자까지 찾아와 이 일에 동참하는 것이다.

  정말로 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가 있는 것인지 점점 궁금해지지만 불어난 불광천에서 목숨이 위태로울 뻔한 데도 오리를 잡으려는 노인을 보면, 정말인가 싶기도 하다. 이 세명이 노인의 몽타쥬를 토대로 비슷한 가짜 오리를 동물병원과 오리 축사를 돌아다니며 구해와 노인에게 내밀었을 때는, 돈에 대한 욕심은 둘째치고 그런 노인에 대한 걱정과 안쓰러움 때문이었다.

 

아, 피쿼드호……. 당신 말은 우리가 다 함께 피쿼드호를 타고 흰고래를 쫓고 있다는 거?

그래요. 그리고 노인은 에이해브 선장.

그 어르신이 에이해브 선장처럼 되게 놔둬선 안 되죠. 우리가 도와야죠.


 과연 오리가 노인의 유일한 가족, 호순이를 잡아먹은 게 맞는가. 맞다면 노인은 원수를 잡아 기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면, 노인은 이제 그동안 자신에게 정을 나눠준 사람들을 떠나보내는 것에 호순이를 잃었을 때보다 더한 상실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작가는 이 시대 외로운 노인의 이미지 외에 또다른 모습을 입힌다. 멜빌의 소설 <모비딕> 속 에이해브 선장이다. 그러니까 허상을 쫓아가던 에이해브 선장의 모습이라면 호순이를 잡아먹은 오리 역시 허상일 수 있다. 하지만 작가는 말한다. “고양이가 있다면 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도 있을 수 있는 거라고.”

  진짜와 가짜가 확실하게 구분된다면 여러모로 편하겠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다. 그것을 판별하는 것을 개개인의 몫으로 남겨두고 그럼으로써 또한 구렁에 빠지게 한다. 스스로를 작가라 부르지 못하고 있는 주인공을 비롯하여….


나는 진짜 소설을 쓰고 싶었다. 남들이 말하는 진짜가 아니라 나의 진짜를 쓰고 싶었다. 나의 진짜로 인정받고 싶었다. 그러나 문학 언저리에서 노니는 사람들일수록 장르소설 따위는 숫제 소설의 범주에도 들어갈 수 없는 잡문인지라 논할 가치도 없다고 주장했다. 나는 그들의 주장에 당당하게 반박하고 싶었고, 실제로 여러 차례 반박 비슷한 것도 시도해보았다. 그러나 무슨 소리를 지껄이든 글을 잘 쓰지 못하면 몽땅 헛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작가란 말로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글로 말하는 사람이니까. p45


  이런 모종의 사건들을 겪으며 사람들은 관계맺음을 하고 또한 상처받기도 하고 상처를 치유하기도 한다. 그렇게 성장해 간다. 나이가 적거나, 많거나 상관없이. 물론 그것과 상관없이 전혀 성장 못하는 인간들도 있긴 하다만. 적어도 이 소설 속 등장인물 중엔 그런 사람은 없다. 외로운 노인은 가족과 화해하고 삶의 자신감을 잃은 이들은 자신감을 되찾고.


우리는 이미 우리였다. 우리가 너와 나로 분열하는 것은 쉽고 간단한 일이지만 너와 나가 우리로 결합하는 건 쉽지도 간단하지도 않았다. 쉽지도 간단하지도 않은 일이 이미 이루어졌는데 그걸 원래대로 되돌린다는 것은 설령 그게 쉽고 간단하다 하더라도 실행하기에는 저어되는 일이었다. p160


  정말 그런 날들이 있었나 싶게 한바탕 헤메이던 오리를 잡던 그 여름날의 시간들은 여기 등장하는 이들 모두에게 미래의 삶에서 한발짝 더 나아가는 힘을 안겨주었다. 그것은 고양이를 잡아 먹은 오리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중요한 게 아님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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