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왜, 왜!


풍경소리 - 2017년 제41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구효서 외, 문학사상


  비가 오는 날 어느 절간 처마에서 울리는 풍경소리를 듣는 게, 잠을 재워줄 소리로 느껴진다. 풍경소리. 풍경에도 소리가 있다면, 이 풍경소리에서 느껴지는 조근조근한 조용함이지 않을까. 이러한 풍경을 너무 좋아하고 그리워하는 때, 빗소리가 만들어내는 화음을 풍경소리인양 대체하며 하늘을 처마인듯 쳐다보며 이 폭풍전야의 시간을 견디고 있다.

 폭풍전야의 시간을 견디고 있다라고 하니, 풍경소리의 한 문장처럼 나도 어딘지 머쓱.


  네, 저, 그런데, 쓰는 데는……촛불이 좋아요. 네. p13


  시작부터 한 구절에 눈이 꽂힌다. 피식 웃음이 난다. 마냥 차분한 듯도 들뜬 듯도 한 이 기분, 종잡을 수 없는 복합적 상태로 책을 읽고 있겠다 했지만, 집중이 될까 말까 한 생각이었는데 <풍경소리>가 주는 차분함에 어느새 긴장의 마음 틈들이 메워져가는 듯했다.

  왜 번뇌하는 자들은 하나같이 절로 들어가는지. 깊숙하고 깊숙하고 조용한 어느 곳, 그곳으로. 갈수록 믿고 의지하기가 힘들어지지만 종교 자체가 내뿜는 힘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에 의탁해 힘을 내는 것, 그것은 사람의 의지인가. 어쨌든, ‘묘음’을 들려주는 이 <풍경소리>가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을 차지하고 있음을 느꼈다. 이것이, 30년 내공의 작가가 가진 힘이라면 마냥 젊은 작가의 동질의 언어에만 반가워하지 않고 이들의 언어의 맛을 계속 느낄 것이다. 이처럼 오랜 인생살이의 삶의 언어를 터득한 세대들의 목소리라면 그들의 소리에도 귀기울일 수 있을 것이다. 나와 같은 소리를 듣고 다른 소리를 내뱉는다 답답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세대 단절의 소리는, ‘왜’라고 묻는데서 시작하는 것일까? 너는, 너희는, 당신은, 당신들은, ‘왜’ 그렇게 하는 건대요?

  

   왜라고 묻고 싶을 땐……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렇군.

   예?

   왜라고 묻는 대신 그렇군, 이요?

   그래요.

   그렇군이라고 말한다고요?

   그래요.


 성불사에서는, “왜라고, 묻지, 않습니다”만 여기, 이 대한민국의 현실의 삶은 성불사가 아니므로 나는 끊임없이 ‘왜’라고 물을 것이다. 왜, 왜, 왜!라고.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해서, 이해하기 싫어서, 이해할 수 없으므로, 이해할 성질이 아니기에.

 성불사에 온 듯 갑작스럽게 “그렇군”이라고 말할 수 없음을 안다. 여기 <풍경소리>에 취해 갑자기 전환할 수 없음을 안다. ‘머쓱’하기도 하고. 하루만 지나고 나면, 어쩌면 그때는 하게 될까. 어쩌면 오늘 밤이 지나고 결정의 순간이 오면, 내가 믿을 수 없는 현실이 오면, 오히려 왜라는 질문보다 “그렇군”이라 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군, 역시 여기는 살만한 데가 못되는군.”


  달라지고 싶어 성불사 풍경소리를 들으러 가는 미와의 성불사에서 머문 날의 이야기는 ‘달라지고 싶다’는 미와의 의지가 만들어낸 것도 같지만 ‘묘음’이 이끌어들인 짧은 여행같기만 하다. 소설인듯 아닌듯 끄적거리는 미와의 이야기와 서술자의 글이 묘하게 만나는 지점에서 이 소설의 매력도 증폭된다.

  코끝을 스치는 알싸한 떨림이 눈가로 스칠듯 말듯. 경건함을 밑바탕에 두고 담백함의 밀도가 꽉 찬 이 느낌이 성불사로 당장 달려가고프게 이끈다. 이미지와 소리 속에서 묘한 근원의 소리를 알아가는, 깨쳐가는 것은 결국 자신의 몫이다. 또한 반복된 소리에 미칠듯한 심경 또한 자신의 탓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무수한 소리들 속 특정한 소리의 강박과 집착에 묶여 있다. 단순한 욕망이라 치부하기엔 억울한 면도 없잖아 있는 그런 소리타래들에서 벗어나고픈, 달라지고픈 우리의 마음은 성불사 <풍경소리>를 들으면 정화가 될 수 있을까.

   

어쨌거나 성불사의 밤은 각자의 방에서 잠든 그들을 달빛과 함께 꼭꼭 품었다. 객실의 미와도 촛불을 끄고 잠든 지 오래. 나만 깨어 그들을 굽어보지만 나는 원래 잠을 모르는 터라 깨어 있는 거라고도 할 수 없었다. 바람이 잦아들고 밤이 깊어 사물이 딱 정지해 고요하고 적막해도 모든 소리의 연원인 나마저 잠들거나 사라지지는 않는 것이다. p79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나를 지켜보는 누군가를 보면 한없이 불편해진다. 개인적인 상황에서든 업무적인 상황에서든 불편과 불쾌를 초래하는 시선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렇듯 성불사에서는, 아니 어느 성소로 들어가게 되면 저 멀리서 지켜보는 ‘시선’에 대한 욕구가 솟아나는 걸까. 태양은 어느 곳이나 뜬다는 말을 진리라 친다면 태양은 어느 곳에나 같은 빛으로 비추지 않는다는 것 역시 진리다. 어느 곳에든 그림자는 있기 마련이니까. 이런 시선에게 왜 그림자를 지웠느냐고 묻고 싶은 것일 게다. 왜 나만 불편하고 불쾌하고 힘들고 근근히, 살아가고 있는 걸까란 물음을. 무언가 정의롭지 않다는 물음을. 한동안 돌려져 있던 시선이 향한 곳이 어디인지를 묻는, 그런 것.

  그러다가도 언제나 시선은 동일했다는 것에 조금의 위안을, 언제나 ‘쳐다보고 있었다’라는 것에 격한 안도와 변화의 의지를 다지는 게 인간이라는 생각을 한다. 의지는 초월적 존재를 상정하며 결국 ‘내’가 행하는 것이란 생각을 하게끔도 된다. 그렇더래도 오늘의 이 <풍경소리>는 한동안 지속되어 마음에 남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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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숨


한명, 김숨 저, 현대문학, 2016.


  김숨 작가가 사회성 짙은 문제를 다룬 소설을 최근 잇달아 출간되는 것 같다. 이한열 열사의 이야기를 다룬 L의 운동화도, 위안부 이야기를 다룬 이 책 「한명」도 그렇고. 두 작품 모두 사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어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하다. 특히 「한명」은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의 느낌이 강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을 대사에, 소설 속에 녹여 넣어 대사 한마디 한마디가 절절함을 넘어 읽는 것을 두렵게 만들게 한다. 소설의 대사만큼이나 각주가 많은 이 책. 그 말들이 모두 생존자들의 증언이라는 점은 소설이 허구라는 기본을 뛰어넘어 현실이 소설보다 더 끔찍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한명」. 작가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모두 돌아가시고 마지막 한명이 남은 시점을 생각하며 이 글을 썼다고 했다. 마지막 한명.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시간은 다가온다. 오늘도 최고령 위안부 피해자, 이순덕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향년99세, 한많은 세월을 마지막까지 한을 쌓으신 채 말이다. 이제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238명 중 생존자는 38명이라 한다. 모두들 연로하시고 병세가 가득하며 가슴에 한이 많이 쌓여 있다. 그리고 정부로 인해 그 풀릴 수 없는 한이 분노가 되어 치솟는 상황을 여전히 겪고 계신 분들이다.

  선거 때면 찾아가 악수하고 대책 필요성을 강조하며 방안을 강구하겠다는 정치인들은 권력을 휘어잡고 난 이후엔 나 몰라라 하며 그들이 엎드려야 할 대상이 따로 있음을 부끄러움도 없이 보여준다. 얼마 전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해 개인보다 나라 안전이 우선한다며 구속 판결이 내려졌다. 개인보다 나라 안전이 우선이라면, 나라로 인해 나라를 위해 개인의 삶이 피폐된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대우는 왜 그런 것인가.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며 왜 나라의 안전은 제대로 지키지 못했는가. 한일 위안부 협상타결이 나라의 안전을 위한 것인가, 그리하여 나라의 안전이 해결이 되는가, 성조기와 함께 일장기도 들고 휘두르고 있는 상황 아닌가. 아, 이 나라의 안전을 지켰어라고 자랑차게 힘껏 흔들고 있는 것이 보인다.

  이 소설은 작가가 엄청 빨리 썼으리란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아니다 싶기도 했다. 빨리 썼다는 생각이 든 건, 상상의 나래를 펼칠 것 없이 생생한 증언이 너무도 넘쳐 나기에 쓸 것이 많아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다가도 아니다 싶은 건, 그 많은 자료를 읽어나가는데 그리고 그 증언들을 다시 소설로 옮겨 적는데 무척 힘이 들었겠구나 싶어서였다. 그 말이, 글이 가진 내용의 무게가 너무 무겁고 힘에 겨워, 마음도 엄청 무거웠겠다 싶었다. 그러니 작가는 이 글을 쓰면서 얼마나 오래도록 가슴앓이를 했을까.


그녀는 티브이 받침대 서랍을 열고, 그 안에 넣어두었던 백지를 꺼낸다. 반으로 접힌 백지를 펼치자 또박또박 힘을 주어 쓴 글자들이, 억눌려 있던 스프링처럼 앞다투어 튕겨 오른다.

나도 피해자요.

그 한 문장을 쓰기까지 70년이 넘게 걸렸다.

그 문장에 이어서 뭔가 더 쓰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갑자기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는 그럴 수만 있다면 말을 하는 대신, 한쪽으로 돌아간 자궁을 꺼내 보여주고 싶다. p236


  오래도록 전쟁터에서 종군 위안소에서 일본인들이 붙여준 이름으로 불리다가 마침내 끝장에서야 제 이름을 찾은 풍길. 마지막 한명이 남아 힘겹게 생을 이어가고 있는 가운데 제 이름마저 제대로 찾지 못해 끙끙 앓는 세월을 살다가 자신도 피해자라고 이제 외치는 한명. 이 땅에 풍길 할머니 같이 "나도 피해자요“라고 말하지 못하고 돌아가신 할머니들이, 그렇게 살고 있는 할머니들이 더 계실 것이라 생각한다. 전쟁 중에 위안부는 20만 명이 넘는다 했으니, 그리고 그들이 전쟁에 지면서 증거를 없애듯이 무참히 죽여 버렸다 했으나…….

  동네 냇가에서 다슬기를 잡다가 무참히 끌려가버린 풍길. 그런 소녀들이 많았다. 그 수만명의 피해자들 중엔 이유도 없이 어깨를 잡힌 소년들이. 그리고 나라는 앞장서서 소녀들을 팔아 치우기도 했다. 전쟁은 그러했다가 아니라 나라는 그러했다. 그렇게 내버려두었고 지금도 그렇게 내버려두고 있다. 나라는 국민을 위해 존재가치가 있는 나라는 그 가치를 뒤바꿔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

  소녀상 문제에 민감한 일본 정부의 반응에 더 예민한 한국 정부와 그리고 지자체가 더할나위없이 몰상식과 비상식의 표상이지만 아무런, 반응도 관심도 없다. 목적하는 바가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길 없어 선거라는 이 휘황찬란한 분위기 속에 암울과 비참한 기분으로 서 있다. 한 개인으로서 이들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도움을 준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드니까 이런 화도, 분노도 부끄럽게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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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되고 싶은 시간


한 스푼의 시간, 구병모, 예담, 2016.9.5.


 배터리 폭발로 세계 곳곳에서 폭발 소식을 안겼던 삼성이 새롭게 모델을 출시했다고 그것은 실패한 모델과 달리 진일보한 상품이라며 언론에 하루종일 오르내렸다. 창업주가, 소유주가 구속되면 나라경제에 악영향을 미치고 어쩌고 하던 게 생각났는데, 잘 나가네, 더불어 그래봤자 휴대폰의 세계지, 그런 생각도 들었다. 또한 열심히 수식해댄 문구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공지능. 하긴 이 말도 가전제품이며 전자기기에 수없이 활용되었던 만큼 굳이 놀랄 일은 아니다. 단지 인공지능이라면 로봇을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되는 반사작용 때문이기도, 그래서 휴대폰과 인공지능의 어울림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인공지능=로봇. 이런 도식은 어쩌다 생겨난 것인지. 하지만 오늘의 이 단어로 인해 불완전한 인공지능 로봇 은결이 떠올랐다.


은결의 존재를 신기해하던 동네 주민들은 방송이 나갔을 때 한두 주쯤 반짝 관심을 보이곤 어느덧 익숙해진다. 일상의 일부가 된다. 일반인이 잔일에 부려먹기에는 다소 기능이 과하다 싶은 고가의 로봇보다 중요하거나 피곤한 일들이, 영원히 마르지 않는 빨래처럼 일상 곳곳에 널려 있다. 세상은 한 통의 거대한 세탁기이며 사람들은 그 속에서 젖은 면직물 더미처럼 엉켰다 풀어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닳아간다. 단지 그뿐인 일이다. p29 


  새로 출시된 저 모델도 신기해하고 바짝 관심을 보이다가 어느덧 낡은 모델로 분류될 것이다. 모든 기기들의 운명이란 그렇게 정해져 있다. 제 아무리 인공지능이라도. 하지만 인간이라고 뭐 다를 리 있는가. 늙으면 병들면, 폐기하는 것이 당연한 듯 아니, 애잔함이 남아 있더라도 골치 아픈 대상으로 분류된다.

  이 소설은 모델명 ROBO-a1318b에서 은결이란 이름을 갖게 된 로봇의 한 스푼의 시간의 이야기다. 세탁서 주인 명정은 외국에서 사고로 사망한 아들 이름으로 보내온 택배 상자속에서 17세 소년 정도의 소년 모습을 한 로봇과 만난다. 조그만 동네 세탁소에서 은결은 명정의 가르침을 배우며 세탁소 일을 돕고, 또한 주위의 아이들과 관계하며 세상을 살아간다. 그들 아이들 모두 각각의 아픔과 고난을 겪으며 성장해가고 은결은 고스란히 그들의 모든 삶과 마주한다.

  

아무리 약품을 집중 분사해도 직물과 분리되지 않는 오염이 생기게 마련이듯이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어느 순간에 이르면 제거도 수정도 불가능한 한 점의 얼룩을 살아내야만 한다. 부주의하게 놓아둔 바람에 팽창과 수축을 거쳐 변형된 가죽처럼, 복원 불가능한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여야 한다. p157


 입력된 정보만을 처리하며 단순하게 작동할 것만 같은 은결은 아이가 세상을 배워가듯 은결만의 지능을 가동하며 거기에 감성의 기능을 더해 간다. 그렇게 불쑥불쑥 은결과 함께 하는 이들에게 배움을 또한 위로를 주고받기도 한다. 아이들은 커가고 명정은 더욱 늙어가는 시간의 흐름을 겪는 동안 은결도 시간에 대해, 인간의 삶에 대해 더 많이 알아가고 느끼게 된다.


그는 인간의 시간이 흰 도화지에 찍은 검은 점 한 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그 점이 퇴락하여 지워지기 전에 사람은 살아 있는 나날들 동안 힘껏 분노하거나 사랑하는 한편 절망 속에서도 열망을 잊지 않으며 끝없이 무언가를 간구하고 기원해야 한다는 사실도 잘 안다. 그것이 바로, 어느 날 물속에 떨어져 녹아내리던 푸른 세제 한 스푼이 그에게 가르쳐준 모든 것이다. p249


  인간이 성장할수록 퇴화되는 기계로서의 은결을 보게 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인간의 희로애락을 지켜보는 은결의 시선이 가득하다. 은결 또한 그 희로애락을 느낀다. 이런 감정의 반응을 은결 스스로는 오류라 인지하긴 하지만. 세탁소에서 그렇게 명정이 사망해도 아이들이 성장하여 떠나고 돌아오는 것을 지켜보는 오랜 시간이 지난다. 그래봐야 우주 137억년에 비하면 세제 한스푼이 녹는 시간일 뿐이다. 시간이긴 하지만, 은결의 그 시간이 제 가족들을 형성하고 보내는 노년의 부모같은 느낌이다. 아니 그렇다고 한다면 모두 떠나 버린 그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려는 듯한 은결의 모습은……. 여전히 은결은 살아, 있다.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은결의 이름처럼 은은하게 느껴지며 애잔하고 오래도록 슬픈 기분이 든다. 뜨겁고, 끈적하고, 비릿하고…. 삶은 계란에서 느끼는 은결의 느낌처럼 삶은 은결이 느끼는 것처럼 그런 거라고 말하는 명정의 말처럼 이 소설도 뜨겁고, 끈적하고, 비릿하다. 이 느낌을 은결에게 가서, 명정의 세탁소에서 세탁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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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에 깃든 말


파과, 구병모, 자음과 모음, 2013..


  제목을 보고서 폭력적이고 잔인한 내용일 거라 짐작했다. 작가가 시작부터 써놓은 으깨진 과일을 두고서도 전혀, 과일쪽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이미 여성을 꽃과 과일에 빗대어 좋은 이미지로도 나쁜 이미지로도 표현하고 있으니까. 청소년 소설로 등단한 작가지만 그 책에서도 이미 폭력에 관한 판타지소설을 전개했기에 이 제목 아래 실로 적나라한 폭력과 마주하는 것은 아닌가 했다.

  물론, 어느 정도 예상은 적중했다. 폭력은 있었다. 다만, 주인공이 폭력을 당하는 쪽이 아니라 행하는 쪽이었을 뿐. 단순 폭력행사자가 아니라, 킬러다. 그리고 그 일을 벌써 45년이나 해왔다. 이름마저도 각이 반듯하게 진듯한 느낌의 ‘조각’이다. 그녀는 그 일을 방역업이라 불렀다. 조각이 이 일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당연 폭력을 당한 시점부터다. 어린 시절의 그녀가 외국인 병사로부터 당하는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다가 그녀가 가진 ‘힘’이 더 컸던 탓에, 전격 스카웃 제의를 받은 것이다.

  이 소설은 미드에서나 볼 만한 65세의 여성노인이 여전히 현장에서 킬러 활동을 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방역업의 대모로 자리잡은 조각 여사의 일대기라고 할 것이다. 다만 한창 전성기로서의 활동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노쇠해가는 신체로 인해 겪는 심리와 현재의 상황에 더 방점을 둔다. 어쨌든, 외롭고 고단한 삶으로 인해 누군가로부터 부탁받은 이의 목숨을 제거하는 일을 시작하게 되지만 조각의 삶은 늘 외롭고 고단했다. 자신보다 30년이나 어린 의사에게서 연정을 갖게 되는 것까지, 우리나라 소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님엔 분명하다. 45년이라는 시간 동안 조각 여사가 처리한 인물만해도 한둘이 아니다. 더 나아가 이 여인, 몸짱대회에 나가면 우승할만큼의 탄탄한 신체를 가졌다. 비록 이제 늙어가고 있지만.

  대체로 킬러를 다룬 많은 이야기들에서 킬러는 남자이고 특정한 ‘여인’으로 인해 감화된다. 그리하여 삶의 변화를 겪거나 죽게 된다. 그 죽음은 자의적 선택이고 그 선택은 마음을 주게 된 여인의 안위를 위해서인데, 여기 소설 속 주인공 조각 여사도 그 길을 그대로 간다. 그리고 조각 여사의 안티는 그녀가 제거했던 이의 아이로 커서 복수를 노리는 뭐 그런. 성별을 바꾸면 익숙하게 영화속에서 보아 온 킬러의, 살인청부업자의 이야기를 따른다.

  소설 속에서 놀랍게 기억되는 장면은 조각 여사의 생사를 알듯 말듯한 사건 이후에 등장한 네일아트를 받는 장면일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손톱을 단장한다. 원장과 직원의 자부심처럼 그것은 케어이고 아트이다. 아무에게도 보여 줄 리는 없지만, 언뜻 누군가 보게 되더라도 노인과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 수군댄다 해도 하등 상관없을 그 손톱. 그 단장을 조각 여사는 마음에 들어한다.

  그녀가 만족스럽게 네일아트를 바라보며 거리를 지날 때 정작 그녀에게 매니큐어를 해준 막내 직원은 훌쩍이고 있다. 그 아트를 무려 반값으로 계산했다고 욕을 먹은 탓에. 막내 직원의 변명이 압권이다. 그 손님, 그러니까 조각 여사의 왼손이 없었다고.

  일단 주인공이 킬러란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니 직업에 대한 도덕적 판단은 제쳐두고서 소설을 보자면. 그래서 왜 파과인가.


  사라진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 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p332~333

 

  소설은 破果의 이미지를 간간히 드러낸다. 소설 속에서 묘사되는 조각이 바라보는 흐물어져 형체를 알기 힘들어진 과일처럼. 이 이미지는 그렇기에 애잔함을 상실을 불러일으킨다. 더구나, 이 단어 속엔 또다른 의미가 깃들어 있으니 빛나는 시절, 순간을 갖는다. 작가는 이 소설의 마지막 단락에서처럼 이 두 가지 의미를 함께 생각하게 한다. 빛나는 순간이란 깨지고 사그라지는 순간에 빗대어 더욱 찬란하기 마련이니까.

  나아가, 단어가 가리키는 의미가 전혀 다르게 적용되는데 놀란다. 같은 한자어로 표기하면서 여자 나이 16세, 남자 나이 64세를 가리킨다는 파과의 사전적 의미를 들여다보면서도 의미의 어원이 형성된 것을 보면서도 의문이 더해진다. “‘瓜’ 자를 파자(破字)하면 ‘八’이 두 개가 되는데” 이를 더하면 16이라 여자는 16세이고 곱하면 64가 되기에 남자는 64세를 가리킨다는 설명이 와 닿지 않기에 더욱 그렇다. 이것의 기준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왜 여자는 더하고 남자는 곱해야 하는지. 빛나는 순간조차도 남자와 여자의 나이가 상이하다는 뭐 그런 말인가. 여자의 빛나는 순간은 16세이고, 남자는 64세라는 말인가. 여자는 16세가 되면, 남자는 나이 64세가 되어야 비로소 으깨어진 나이란 말인가. 옛날 결혼적령기라고 적힌 것에서 피식 웃음마저 나온다. 이렇게도 사용하면서 남자 나이는 왜 64세라고 굳이 만들어내는 것인지.  

  파과의 의미를 破果로 보느냐 破瓜로 보느냐에 소설의 의미를 풍성하게 할 수 있겠지만, 그냥 파과라는 단어에 푹 담겨진, 여성에 대한 이미지를 또한번 그냥 흘려보지 못하는 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단어들에 매여 특정한 나이에 습관적 우울증이 배가되는 것도 같다. 우리나라는 나이에 너무 민감하다. 내가 그런가.

  흠집이 나든 으깨어지든 인생이 흐물어지는 시기든, 어느 한때 빛나는 시절은 있을 것이니 그 시절을 기억하고 기억하며 그러나 그 시절에 집착하지 않는 한때를 살아나가야 하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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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릿한 존재들


아무도 아닌, 황정은 저


 

독자들이 좋아하는, 황정은 작가의 세 번째 단편집이다. 많은 작가들이 고유의 문체와 이미지로 자신만의 세계를 형상화하고 있는데 황정은 작가 역시 단연코 그 독특함에서 빠지지 않는다. 장편이고 단편이고 할 것 없이 느낌상 ‘아, 이것은 황정은의 글이야’라고 알아챌 것 같으니, 작가의 스타일을 견고하게 유지하고 있다는 점, 그 스타일을 지지받고 있다는 점에서 얼마나 축복받은 작가인가 싶다.

  이 단편집에 흐르는 소설의 전반적 분위기는 상당히 부정적이다. 제목이 드러내고 있는 ‘아무도 아닌’이라는 미지칭의 단어처럼 관계의 단절과 고립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존재조차 흐릿해지는 누군가를 보는. 하지만 그들이 흐릿해져가는 과정은 너무도 명확하게 주위에서 보고 들은 일이라, 또한 ‘나’가 겪는 일이라 슬프고 섬뜩해지기까지 하는.

  작가는 단편집이 시작하기 전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무도 아닌을 사람들은 자꾸 아무것도 아닌이라 읽는다고. 아무도면 어떻고 아무것도면 어떻게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작가에게 그것은 너무도 큰 외면이 될 것이고. 말 한마디의 차이가 갖는 놀라움을 의미를 생각한다면, 작가의 이 말로 인해 전체적으로 관통하는 단편집의 분위기로 차곡차곡 걷게 될 것이다. 아무도와 아무것도를 연이어 되새김질하면서.

  그와 함께 각 단편집의 제목들을 곱씹는 맛이 단편을 읽는 것과 한발 먼저 나간다. 가령 「양의 미래」에서 화자는 “그애가 누군데요? 아무도 아니고요, 나한텐 아무도 아니라고요(p53)"라고 외친다. 여기에서 단편집의 제목이 나왔나 생각하게끔 하는데, 그렇다면 이 「양의 미래」는 왜 「양의 미래」인가하는 물음을 갖는다. 「上行」은 왜 「下行」이 아닌가도 마찬가지로. 그런데 뒤늦게야 「명실」의 제목이 처음에는 「아무도 아닌, 명실」이었음을 확인하고 뒤늦게 「양의 미래」속의 아무도 아닌이라는 외침을 제쳐두고 「명실」속의 아무도 아닌이라는 외침을 찾아 간다.

  어쨌든, 누구도 아무도…. 행복해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접하며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누군가 분명 그곳에 있지만 아무도 그곳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는 삶을 사는 세상을 맞닥뜨린 듯하다. 이것은 주체적 삶인가, 객체적 삶인가 헷갈릴 정도다. 선후가 무엇이었는지조차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그냥 지금의 삶은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이 중요하게 보인다.


 다음에 오냐.

 네.

 정말로 오냐.

 네.

 나 죽기 전에 정말로 올 테냐.  -「上行」중


  시골에서 고추를 따고 서울로 다시 가는 이야기,「上行」속의 고추밭 주인의 외침처럼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결코 관계맺음에서 물러나 있겠다는 느낌이 가득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서글픈 울림이 되어 자리잡는다. 이렇게 살아가다 누군가는 사라질 것이고 마침내 아무도 아닌 존재가 되어 버릴 것이다. 그렇더라도 우리들의 미래는 아무일도 없을 것이다. 바로 「양의 미래」 속 화자가 그러하듯이.


나는 여전하다. 여전히 직장에 다니고 사람들 틈에서 크게 염두에 두지 않을 정도의 수치스러운 일을 겪는다. 못 견딜 정도로 수치스러울 때는 그 장소를 떠난 뒤 돌아가지 않는데, 그런 일은 물론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다음에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게 되면 그 동네에도 아카시아나무가 많기를 소망하고 있다. 그러나 아카시아가 단 한 그루도 없는 동네에 살게 되더라도 나는 별 불편 없이 잘 적응해갈 것이다. -「양의 미래」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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