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발자국


 L의 운동화

 김숨, 민음사, 2016.


   뜬금없이, 놓인 물건을 보며 감상에 젖을 때가 있다. 그것이 그 장소에 새로이 놓인 것이 아님에도 갑자기 과거의 기억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그것은 밥일 때도, 간단한 필기도구일 때도, 달력이라도, 운동화라도 상관없다. 물건이 상기하는 것은 물건 자체가 아니라, 과거 경험한 사건과 감정들이니까.

  여기 김숨은 소설을 통해 한 사람의 과거가 모두에게 공유되는 매개물을 놓아둔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그 과거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결국 이 소설은 실화라는 이야기다. L의 운동화가 실재하듯 L은 실재하는 사람이었고 그가 살았던 시대가 살아 있고 존재한다. 이야기는 그 과거를, 그 시대를 불러오고 현재는 그 기억으로 들어가기 위해 애를 쓰고 그 기억을 통해, 그 과거로 돌아가 과거의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하게끔 한다.


그러고 보면 그 어떤 존재를 가장 강렬하게 느끼는 때는, 그것이 죽어 갈 때가 아닐까. 희미해져 갈 때, 변질되어 갈 때, 파괴되어 갈 때, 소멸되어 갈 때. p33


  최근 한달여 사이 수많은 운동화가 전국 곳곳에서 한 공간에 발자국을 남기고 있다. 촛불을 들고 움직이는 광장의 발자국과 마찬가지로 1987년의 6월에도 L이 제 신발을 이끌고서 촛불을 들 듯 자신의 신념을 들었다. 청년 이한열. 최루탄이 공식적으로 언제 사라진지는 모르겠으니 적어도 1997년에도 최루탄은 있었다. 그때에도 최루탄을 얼굴에 맞은 사람이 있으니까.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은 끊임없이 발포되었다. 민주항쟁이 일어난 10년 뒤에도 상황은 그랬다. 10년 전 1987년 6월, 최루탄은 이한열의 머리로 날아든다. 2015년 11월에 물대포가 백남기 농민의 머리로 날아든 것처럼. 두 사람은 기인 시간 생명을 붙들기 위해 싸우다 결국 사망한다. 이한열은 당시 22살이었다.

  피격 당시 이한열은 오른쪽 운동화 한짝을 남긴다. 270㎜ 흰색 ‘타이거’ 운동화. 28년이 지나는 동안 밑창은 100여 조각으로 부서졌고 2015년 미술품 복원 전문가인 김겸 박사는 이한열의 운동화를 3개월 동안 복원한다. 이 복원의 과정이 이 소설의 핵심이다.

  하지만 운동화가 어떻게 복원되는지를 그리는 것이 소설의 전부는 아니다. 물건으로서의 운동화의 복원과정과 더불어 ‘왜’ 그것이 복원되어야 하는가를, 그리고 그 운동화가 지닌 물건 이상의 가치를 생각하게끔 이끈다. 운동화를 기억하는 이들의 기억을 모으고 그 시대를, 그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더불어 복원 진행과정을 이야기하면서 다양한 미술품의 복원 이야기를 곁들인다. 마크 퀸의 자화상이 대표작이다. 마크 퀸은 자신의 두상을 모형으로 한 석고 거푸집에 자신의 피를 부어 응고시킨 「셀프」를 제작했다. 그런데 청소부가 작품을 보관한 냉동고의 전원 코드를 실수로 뽑는 바람에 피가 녹아내려 작품이 훼손되었다. 이 작품이 마크 퀸이 죽은 뒤 훼손된다면 어떻게 복원할 것인지, 마크 퀸의 피를 대체할 물질이 있는지, 타인의 피를 넣으면 그것은 마크 퀸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을지를 묻는다.


내가 복원해야 하는 것은, 28년 전 L의 운동화가 아니다. L이 죽고, 28년이라는 시간을 홀로 버틴 L의 운동화다. 1987년 6월의 L의 운동화가 아니라, 2015년 6월의 L의 운동화인 것이다. 28년 전 L의 발에 신겨 있던 운동화를 되살리는 동시에, 28년이라는 시간을 고스란히 담아내야 하는 것이다. p100~101


  ‘L의 운동화’를 복원하는 복원가 역시 끊임없이 질문한다. ‘L의 운동화’를 복원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를. 운동화가 생산된 때, L이 운동화를 처음 신은 때, 최루탄을 맞을 때, 얼마만큼, 최대한, 최대한, 보존 처리만 할 것인지, 운동화끈을 풀 것인지, 묶을 것인지 등등 운동화를 복원하기 위한 기술적인 것부터 개념적인 것을 고민하며 복원의 의미를 되새긴다.


L의 운동화를 그대로 두는 것이, 운동화를 신화화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L의 운동화는 시위 현장에서가 아니라 보관 과정에서 파손되었다.


    L의 운동화가, L을 넘어서서는 안 된다.

    L을 집어삼켜서는. p110


  L의 운동화가 L을 넘어선다는 의미는 어떤 것일까. L의 운동화가 보관되고 복원되는 것은 그것이 운동화 자체의 가치가 아니라 ‘L’의 운동화이기 때문이라는 말로 이해될 수도 있다. 또한 복원이란 단어를 역사로 대체해도 의미가 된다. 복원은 곧 역사로서 우리가 역사를 기억하는 과정인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것은 반복된 역사를 통해 배우고 미래지향적인 세상을 위해서라고 했던 교과서적 답변이 생각난다. 그날 왜 누군가는 그 사건이 벌어진 현장에 있었고 소중하게 L의 운동화를 줍고 보관하고 있는지, 우리가 그것에서 배우고자 하는 것은, 배울 것은 무언지를 L의 운동화가 보여주고 있다. 또한 미군 장갑차에 의해 사망한 효순이와 미선이 산건, 제주4.3사건, 일본군 위안부 사건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여전히 규명되지 않고 규명할 의지도 없는 사건으로 이를 바라보는 정부와 대비해 독일 정부의 홀로코스트에 대한 대응을 비교한다.

  이러한 내용들을 담고 있어서인지 구성과 이야기의 방식에서 소설보다 약간 르포, 다큐 느낌이 든다. 그래서 역사에 대한 인식 방식이나, 그 역사의 현장에서 늘 정부에 희생되었어도 민주주의를 위해 힘을 쏟은 국민들에 대한 생각들이 더욱 난다. 아마도 현시국과 맞닿아 있어서일 것이다. 불행한 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는 지금도 거짓을 들이미는 정부에 의해 강제로 이뤄지고 있다는 것. 희망은 우리는 또한 여전히 L처럼 운동화를 남기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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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아이러니

 

 살고 싶다

 2014년 제10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이동원,  2014.

 

 

   ‘살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

   그 사람의 말 앞에 “더 잘”이 또는 “죽음을 앞두고”가 생략되어 있다면. 열정없이 그저 살아가는 삶에 대해 반성하게 될까. 어느 누구의 외침인지, 어떤 삶을 살고 있기에 그런지, 그 처한 상황이 무엇인지 강렬한 삶의 의지를 전달받기 위해 그 외침이 울리는 상황을 살펴보게 된다면 더욱 더 그 말의 울림을 잘 느끼게 될까.

   최근에도 폭탄이 터져 많은 군인들이 부상당했다. 폐쇄적이고 권위적인 군대에선 각종 의문사가 많이 발생한다. 이 책 속 장소 역시 군대다. 군대 속 병원이 더 근접하다고도 볼 수 있겠다. 이필립 상병은 의문의 남자로부터 자살 사건 조사를 제안받는다. 남은 군 생활을 편히 지내게 해주리라는 대가를 제시하면서.

   자신이 유격 훈련 중 다쳐서 입원했던 국군병원에 같은 시기 입원했던 친구의 사건을 조사한다는 것에 부담도 느끼지만 어쨌든 이필립 상병은 조사를 진행한다. 어쨌든 이야기가 흘러가야 하니까. 자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이필립 상병의 활약은 조사를 제안하는 이의 의도와 맞게 진행이 되어 갈까. 진실은 무엇일까. 진실을 아는 이필립의 조서는 어떻게 작성될까. 특히나 그 자신이 군대 부적응자로 인식하고 있다면.

 

폭력을 제대로 묘사하면 아무도 그것을 따라 하지 않는다. 맞는 자의 아픔뿐 아니라 때리는 자의 아픔까지도 표현되기 때문이다. 반면 폭력이 멋지게 혹은 우스꽝스럽게 그려질 경우 상처와 고통이 있어야 할 자리를 허세와 웃음이 대신한다. 그런 것을 보며 자란 사람은 폭력을 휘두르며 스스로를 멋지다 생각하고 아파하는 사람을 보며 웃게 된다. p87

 

   그가 보는 조직사회 군대는, 그가 조사한 자살 사건 속 군대는 폭력이 만연되었고 또한 죽음을 희화하는데 익숙했다. 그렇기에 자살은 반복되고 폭력은 확장된다. 곳곳에 서열이 존재한다. 계급이 존재한다.

 

나는 가끔 궁금했다. 무릎을 다치지 않았다면 나는 멀쩡한 다리로 어떤 길을 걸어갔을까. 그 길의 끝에서 나 역시 나도 모르던 내 안의 괴물과 마주했을까. 한두 마디 말로 쉽게 그들을 욕하고 침을 뱉지 못하는 건 한때는 선해 보였던 그들의 눈빛을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가장 두려웠던 건 기회가 주어진다면 얼마든지 그들처럼 될 수 있는 나 자신이었다. p66

 

   조직 속의 그들과 같아 질까봐 스스로를 두려워하던 이필립은 그렇기에 한편으론 자신이 부적응자인 것을 다행으로 여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는 우연인지 필연인지 다행인지 운명인지 자살하지 않고 생각을 바꾸고 살아남았다. 그리고 이런 반복된 자살 사건을 조사하는 위치에 선다. 그가 조사한 친구 정성한은 참 따뜻한 시선을 가진 사람이다. 반면 필립은 냉정하다. ‘살고 싶다’는 글을 남기며 자살한 이 시인을 꿈꾸는 친구의 자살을 그가 너무 여리기 때문에 죽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자살이, 그 모든 것이 여린 그 개인의 성격탓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필립은 사건의 진실을 알아간다. 단지 정성한의 자살 사건이 아니라 더 많은 이들이 자살한 이 사건을.

   작가는 사건 조사를 하면서 자신의 내면에 대해 더 깊은 성찰을 하도록 이필립을 이끈다. 자신이 군대의 부적응자가 된 것만큼이나 부적응자가 아니라 가치있는 사람임을 입증하고픈 욕구가 있었던 이필립의 내면은 정성한의 간절함과 처절함을 알아가면서 조금은 변하고 조금은 단단해진다. 삶의 아이러니는, 항상 누군가의 죽음으로부터 내 삶을 돌아본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 내 삶의 희망을 의지를, 살아 있음에 대해 감사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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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ma, Just Killed a Man

    

  보헤미안 랩소디

  2014년 제10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재민, 2014.

 

   

   퀸, 프레디 머큐리의 노래가 소설의 제목이다. 노래속의 처절한 절규가 전이되는 이 소설의 흡입력은 외적인 부분에서도 많이 눈에 띈다. 퀸의 노래 제목, 현직 판사가 쓴 소설,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이야기. 그렇기에 ‘사건’이 무엇인지 이야기가 더욱 궁금해진다.

   “이건 류마티스 관절염 환자의 손가락 모양이 아닌 것 같은데”

   돌아가신 어머니의 사진을 바라본 의사 후배의 한마디에서 의심은 시작된다. 판사 하지환의 어머니는 무려 9년 동안을 류마티스 관절염약을 먹으며 병원치료를 받았고 그로 인해 암으로 돌아가셨다. 이것을 조사하던 중 어머니는 퇴행성 관절염이었을 뿐인데 병원 의사, 우동규에 의해 지속적으로 독한 류마티스 관절염약을 먹게 된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류마티스 유병률이 일 퍼센트 미만임에도 그의 어머니가 살고 있던 신해시의 경우 인구의 10%나 되었다. 신해시에만 우리나라 평균 류마티스 관절염 환자의 수를 뛰어넘은 류마티스 관점열 환자들이 살고 있는 것이다. 이에 고발을 진행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더 확장되어 간다.

   우동균은 많은 일반 환자들을 특정 약을 먹어야 하는 류마티스 관절염 환자로 진단함으로써 이익을 얻었다. 그 과정에서 환자들의 인권은 외면하고 자신이 가진 의료정보와 권력으로 환자들을 제 이익을 얻기 위한 도구로 삼았다. 어찌 보면 한 개인의 이기적인 욕심이 비윤리적인 의사의 행동이, 그로 인해 당연히 처벌되어야 하는 우동균의 행동이 발각되고 이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생명과 관계된 일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용서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집단적이고 조직적으로 은폐되는 상황으로 전개된다.

   한 조직, 한 나라가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비리에 얽혀 난리가 나는 상황이 가능할진대 한 도시에서 맞닥뜨리는 이런 상황은 오히려 더 그쯤이야 하게 된다. 이지환 역시 판사임에도, 그가 가진 사회적 권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온갖 압력이 들어오는 것이다.

 

“신해성모병원은 신해시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종합병원이야. 직원들만 천 명이 넘어. 신해시의 정치인들, 종교인들, 지역 유지들과 뿌리 깊게 연결되어 있어. 선배는 단지 의사 한 명이 아니라 그 많은 사람들과 싸워야 하는 거야. 이기기도 어렵고 이긴다 해도 선배가 다칠 거야.”

“그렇다고 엄마의 원수를 눈앞에 두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 네 엄마가 당했다고 생각해봐. 그래도 그렇게 말할 거야?” p80

 

 

   우리는 오로지 ‘정의’와만 싸울 수 없는 것일까. 인간의 생명이 담보로 된 의료사기죄인 이 사건은 언론에서조차 보도되지 않는다. 특히나 지역신문조차 외면하는데, 신해성모병원이 신해시에서 가장 큰 광고주라는 이유 때문이다. 한 사건이 감춰지는데는 그것을 보도하지 않는 언론, 사건을 수사하지 않는 경참, 범죄자를 눈감은 검찰, 법의 정의의 잣대를 엉뚱하게 적용하는 법원이 모두 함께 한다. 여기에 신해병원은 종교단체에서까지 보호한다. 정치, 권력, 종교. 무엇보다 자신과 가까이 있는 사람들로부터 회유와 협박을 거듭 받는다. 판사 이지환은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고발하며 맞서보지만 그 어떤 법적인 처벌이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경험을 통해 판사 이지환은 “검찰의 힘은 사람을 감옥에 보낼 수 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감옥에 가야 할 사람에게 면죄부를 줄 수 있다는 데 있음을 절감”하기까지 한다. 우동규 한명의 비리를 처단하기 위해, 아니 처단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줄줄이 나서야 하는 수많은 연결고리가 있다는 사실이 익숙하면서도 놀랍다. 그 줄줄이 기차 중 어느 한칸도 문제에 대해 지적하고 바꾸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그들이 이 사회에 사회적인 지위와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배운 이들이라는 것도, 온갖 세상의 정의를 다 지켜내는 사람이라 포장하는 것도.

   이 사건은 이렇게 사라지는 것 같았지만 이지환은 허무하게 종결이 난 사건을 안고 지속적인 공황장애를 겪는다. 신해시에서 겪은 사건으로 인해 너무나 큰 충격을 얻은 탓일까. 해결되지 않는 사건의 억울함이 마음에 남아 있기에 어머니의 물건만 보면 공황장애를 겪는 것인지도 모른다. 더구나 그는 판사 아닌가. 결국 후배의 권유로 정신분석을 받으며 하지환은 자신의 내면의 갈등과 정신적인 이 장애의 원인을 찾아내고 상처를 치유해간다. 퀸의 노래 가사처럼 그의 어린 시절엔 홀어머니의 지나친 기대에 휘둘렸던 어린 지환이 있다. 어머니의 바람대로 살아온 자신의 어린 시절의 모습들. 그리고 우동규의 사건을 조사하고 진행하는 과정에서 만난 자신의 어린 시절 친구, 사망한 친구와의 사이에서 있었던 일들… 퀸의 노래 보헤미안 랩소디의 가사처럼, Mama, Just Killed a Man…

   이지환의 상처는 치유해갈지 모르나 이 글을 읽는 독자의 상처는 어떡해야 하나. 이것이 실화라는 사실을 생각하며 공황장애를 겪을 것만 같다. 이 지독하게도 답답한 사회의 정의라는 것들. 우리 사회에서만 적용되는 정의의 다른 모습들. 사회정의가 바로 세워지지 않을 때면 어떡하든, 개인적으로라도 정의를 실행하려 하는 경우도 많다. 사회정의가 무너진 것을 보고 겪는 것만큼이나 개인적으로 정의를 실행하는 일도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힘든 일이고 위험한 일이다. 허나, 개인적으로 ‘정의’를 실천한다는 말이 가지는 함의는 무엇이겠는가. 우리 사회는 이 정의가 무너짐으로써 정의를 외면하는 무리들의 집합체 속에서 늘 Mama, Just Killed a Man… 보헤미안 랩소디와 같은 노래를 부르는 소년들을, 사람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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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의 공포



 선량한 시민

 2013년 제9회 세계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김서진. 2013.


 그것은 누명임이 분명했다. 평범한 주부이자 교통 법규도 한번 위반해본 일 없는 모범적이고 선량한 시민이었던 

은주가 어느 날 아침 경찰에 의해 체포된 것이다. p7


  이것이 사실이라면 또 한명의 평범한 시민이 공권력에 의해 억울함을 당했다. 그것도 살인 사건 용의자로. 그렇기에 이 ‘선량한’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사건을 더 내밀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결론부터 얘기하자. 그 평범하고 모범적이고 선량한 시민, 은주는 명백히 살인자이다. 더 정확히는 연쇄살인자가 된다. 그녀가 아닌 다른 선량한 시민이 은주에 의해, 은주로 인해 희생된다.  

  시민 강은주. 평범한 40대 전업 주부. 시아버지와 남편, 아들, 딸과 함께 살고 있다. 시아버지는 한때 큰 교복공장을 운영했고 남편은 사업이 망한 후 백수이다. 그렇기에 은주에게서는 그 어떤 살인의 동기를 찾을 수가 없었다. 은주 역시 동네 개천에 만취한 60대 남자가 죽은 사건은 자신과 무관하다고 적극적으로 부인한다. 실족사로 결론 내리려던 사건이 은주가 살인자라는 목격자로 인해 조사가 이뤄지지만 역시 경찰도 다른 증거를 찾지 못한다.

  은주는 고교 동창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개천에서 오줌을 누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고서 등을 밀어버린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사건은 실족사로 처리되었고 자신은 기억을 잊고 일상의 삶을 잘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기에 목격자가 있다는 말에 바짝 긴장한다. 그리고 목격자로부터 살인의 이유를 재촉받자 그의 정체를 알아내어 마시던 막걸리에 농약을 타 넣음으로 그를 제거한다. 이제 다시 은주는 선량한 시민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은주의 오해로 목격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살해된다. 여전히 목격자는 남아 있다.

  목격자는 살인 현장을 보고 두려움과 공포보다 ‘궁금함’이 더 차오른다. 관련없어 보이는 이를 살해하는 이유를 알고 싶은 소설가를 꿈꾸는 논술강사 윤창수. 그는 은주의 모든 것을 목격하고 관찰하며 은주로부터 살인의 동기를 알기 위해 애쓴다.

  알고자 하는 자와 알리고 싶지 않은 자의 싸움이 시작된다. 과연 누가 승리할 것인가? 독자의 입장에선 윤창수의 편에서 은주의 살해동기를 알고 싶다. 그러나 은주 자신도 그것에 대해 뚜렷이 알지 못한다. 심지어는 살인을 하고서도 멀쩡히 일상을 살고 있고 그 자신도 그것에 대해 무심하다.


설명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고 이해하려고 하지 말자. 단지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은주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왜 가공의 연쇄 살인범이 현실로 나타났는지, 자신은 왜 아무런 이유 없이 사람을 죽였는지, 사람을 죽이고도 왜 아무렇지도 않은지 이해하려 하지 말자. 단지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그뿐이다. p195


  생각해보면 선량한 시민을 힘들게 하는 것은 경찰이다. 동네에서 일어난 두 건의 살인에 대해 경찰은 전혀 범인을 밝히지 못하는 것이다. 첫 번째 살인이 동기없이 일어난 것이라면 두 번째 살인은 명백한 동기가 있다. 그러나 두 사건의 관련성을 찾지 못하는 경찰은 여전히 첫 번째 살인 용의자가 아닌 은주에 혐의점을 두지 않는다. 그러기에 은주는 너무나, 평범하다.

  사람들은 동네의 연속적 살인에 공포를 느끼지만 은주는 예전처럼 별일없이 산다. 단지, 윤창수와의 밀당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윤창수는 다르다. 그는 삶이란 우연과 충동에 의해 이해할 수 없이 흘러간다는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은주의 살인 동기를 알고 싶어하는 그는 살인 사건으로 조사를 받은 적이 있다. 고교 시절 과학실 수은 중독으로 과학교사가 사망했는데 그날 창수가 수은을 쏟았던 것이다. 과학 교사의 죽음이 창수의 실수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창수에게 그 기억은 오래 남아 있다. 창수는 그 죽음의 이유를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의 그 사건에 대한 이해를 풀고 싶은 욕구이듯 은주에게 집착하는 그로 인해 결국 창수가 두 사건의 용의자가 되어 경찰에 잡혀가게 된다. 그리고 그는 알다시피, 너무나 평범하지 않다.


동기가 정말 중요한 것일까. 창수는 의심스러웠다. 어떤 결과에는 반드시 어떤 이유가 있고, 엄청난 일에는 그만큼 엄청나고 절박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우리의 착각일지 모른다. 사람들은 누구나 때로 절박한 심정이 되곤 하지만, 그 절박함들은 대부분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다. 반대로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이유가 때로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는 것이다.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만드는 것일까. 그것을 동기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p93 

  

  왜? 왜 그랬습니까?

  뉴스를 보아도 드라마를 보아도 무엇을 하는 것에 대한 중요 질문은 항상 “왜”다. 얼굴을 가린 범인들에게 묻는 기자들의 질문은 항상 “왜 죽였습니까?” “미안하지 않습니까?” “사과한마디 하십시오.” 가끔 이런 말들이 너무나 공허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체포되어 경찰서로 이성되는 범인들을 향해 미안하냐고 물은들, 사과하라고 말한들…. 그럼에도 말이라도 그렇게 해야 된다고 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도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같다. 그러면서 범인이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말을 해야 비로소 심신의 안정을 느끼는 듯하다. 그리고 범인이 묵묵부답이면 그것대로 또 비난을 쏟으며 참을 수 없어 한다. 어떤 경우라도 잘못한 사람에게서 그것의 진정성을 떠나 입 밖으로 “잘못했다”는 말을 듣고 싶어하는 ‘선량한’ 시민인 우리.


지극히 평범한 아줌마의 껍질 아래 비인간적인 공격성과 철저한 이중성, 사람을 죽이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무심함이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하니 창수는 거의 전율을 느꼈다. 그 전율은 기막히게 아름다운 여자를 발견했을 때 느끼는 충격과도 유사했다. 평범한 말만 골라 하면 할수록 은주는 더 신비롭게 보였고, 은주 앞에서 자신은 너무나 평범한 인간인 듯한 겸손한 마음이 들었다. p133

 

  선량하게 살고 있고 선량한 이웃과 살고 있고 선량하고 싶은 시민은 ‘선량하지 않은’ 이들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미 몸속에 그러한 기질이 내재되어 있고, 그러한 기질을 드러낼 환경 속에서 살거나 자라 와 ‘선량하지 않은’ 시민이 된다고 생각한다. 결국 이러한 편견이 그 옛날부터 범죄자의 얼굴은 따로 있다, 같은 생각을 만들고 신념화한다. 실체를 알아보기 보다는 외면에 표피에 집착한다. 우리들 살고 있는 곳곳에 속속들이 진실을 감추고 선량함을 가장한 ‘은주’와 같은 시민이 아주 평범하게, 아주 우아하게, 아주 별일없이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들을 바라보는 눈을 키우지 않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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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



 너무 한낮의 연애, 김금희, 문학동네, 2016.

  

  소설이나 영화 속 인물은 캐릭터의 특성이 어떠한 경우라도, 현실적이지 않다고 비난받지 않는 것일 게다. 현실 가능성을 가늠한다 해도, 우선은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항상 전제하기에 그럴 것이다. 그런데도 김금희 소설에선 이야기는 사라지고, 아니 조금 뒤로 가고 인물이 부각되어 남는다.

  가령, 「너무 한낮의 연애」에서 양희가 어쨌다거나 필용이 어쨌다거나 하는 것 없이 통째로 ‘양희’가 생각나는 것처럼. 굳이 연관성을 짓자면 양희는 캐릭터는 드라마 <연애시대>의 ‘지호’ 캐릭터가 떠오른다. 떠올라 가만 생각하니 드라마 속에서 지호 역시, ‘양희’와 같은 톤으로 사랑을 고백했고 고백을 들은 남자는 필용과 같은 반응을 한다. 그래, 이렇게 유사 캐릭터가 생각났으니 “독특한” 이란 수식어를 빼도 되겠다. “조중균”이나 “세실리아” 역시도 그들의 특징이 너무나 뚜렷하여 현실세계에 없을 듯한 인물인 듯 보였다가 점점 그들의 행동이, 사고가 뭐가 그리 다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반대로 그들을 제외한 다른 이들이 너무나 똑같은 것일 수도 있다. 특별한 ‘다름’은 ‘나’와 같지 않음이 우선하고 ‘내가 아는’ 선에서의 다름이 되니까. 누군가의 다름이 내가 쫓고 싶은 것이라면, 지양하고자 하는 바라면 그 인물의 ‘다름’은 각각 다르게 다가오지 않겠는가.

  누구에게나 여러 가지 모습의 ‘나’가 있다. 그 많은 면면 중에서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을 본다. ‘세실리아’에 대해 수많은 이들이 각자의 시선으로 ‘세실리아’를 기억하며 그것이 ‘세실리아’라고 자신하는 것처럼. 끊임없이 내 기준으로 구별하고 그것에 의지하여 사람을 판단한다. 같지 않음의 이유로 ‘판단’의 대상이 되는 양희의, 조중균의, 세실리아의 다름은, 어떻게 ‘나’의 세계와 가까워질 수 있는가.


양희와 필용의 허무하고 특별한 것 없던 관계가 다른 색채를 띠게 된 건 양희의 느닷없는 사랑 고백 때문이었다. p20



  나와의 거리가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사람과의 관계가 변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타인의 ‘고백’이다. 양희만이 갖는 고백의 특별함이란 그것이 느닷없고, 상대방의 반응에 ‘영향’을 받지 않는 듯해 보인다는 것이다. 사랑 고백임에도 건조하고 무심하고 또한 지극히 일상적인 이 고백의 힘은 오히려 고백받는 이를 당황하게 하며 마침내, 강한 힘을 부여하게 한다.

 

시설들에게는 말이 없고 시설들에게는 응시가 없다. 시설들에게는 관계가 없고 시설들에게는 터치가 없다. p17~18


  시설관리로 인사이동 조치된 ‘필용’이 내뱉는 말을 인간관계로 돌려서 이야기하면 같은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우리는 타인을 이와 같이 ‘시설들’로 바라보다가 고백과 같은 일들, 조금도 명민하게 갖는 관심, 열린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관계의 전이를 이루게 된다는 것. 양희가 독특하며 유일한 캐릭터라 생각하다 이내 비슷한 ‘지호’를 떠올리게 된 것처럼, 결국엔 조금씩의 유사성을 찾아 관계를 맞추어가는 것이라는 것.

  「너무 한낮의 연애」의 연애가 제목처럼 양희의 이름처럼 ‘양’의 기운이 샘솟아 전체적인 서술의 분위기가 같을 줄 알았더니, 그렇진 않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양희의 기운만이 남아 책의 느낌을 지배한다. 서정적인 느낌이 드는, 나도 모르는 새 내 등을 누군가 토닥여 주는 느낌이. 물론 그것은 양희일 거고. 양희의 고백을 받은 듯, 고백한 당사자는 이미 저 멀리에 있는데 뒤늦게 양희를 쫓아가고 있다. 물론, 이때의 양희는 작가 김금희일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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