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눈빛
박솔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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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된 겨울 극장에서


겨울의 눈빛, 박솔뫼, 문학과지성사, 2017-09-25.


  이젠 겨울의 찬기가 가시려는 걸까. 봄 앞에 무력해지는 겨울의 눈빛을 하고 이 한기는 물러갈까. 겨울이란 계절이 지닌 특성이요 정체성임에도 춥다, 춥다, 춥다 외치며 왜 이렇게 추우가 겨울에 진저리 칠 즈음 기온은 달래는 듯 온기를 내었다 다시 얼어붙곤 했다. 벌써 2월의 말이고 3월이 다가오는데 또 한동안은 꽃샘추위가 온기를 잔뜩 덮어버릴 것을 아니까 여전히 겨울 옷 속에 몸을 숨긴다.

  9편의 단편이 담긴 소설집 「겨울의 눈빛」에서 여전히 겨울옷을 둘러쓰고 봄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다. 심리적으로도 아직 봄은 오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봄을 생각하기엔 너무도 어둡고 공허한 공간이 반복되어 나타난다. 특히 부산이란 지명은 반복되어 나타난다. 지리적으로 부산은 겨울에도 온도가 높은 곳임에도 차갑고 매서운 부서지고 무너진 폐허의 공간으로 이 지명은 기억된다. 거듭된 사고를 가진 공간, 사고의 흔적을 머금은 채 새로이 재생되지 않은 공간에서 사람들은 살아간다.

  소설마다 반복적인 사고가 발생하고 그 사고를 보고, 경험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문장 또한 강박적이게 반복되거나 쉼없이 이어진다. 기억을 되살리듯 이야기하듯 이어지는 문장으로 인해 폐허는 정적이지 않은 동력을 지닌 것처럼 느껴진다. 폐허 자체가 생명력을 가진 것처럼. 소설에서 작가가 그리는 사고와 그 사고의 현장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세계는 현실적인 상황과 가상의 상황들이 버무려져 있다. 마치 사물을 눈으로 보고는 있지만 실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사고를 실제와 유리하려는 본능적인 생존인 것도 같다. 

  그럼에도 왜 사람들은 그 사고가 일어난 공간을, 폐허의 공간을 떠나지 않고 그 기억들을 지우지 않고 반복적으로 이야기하고, 그리고 있을까. 「어두운 밤을 향해 흔들흔들」에서는 무너진 부산타워를 그리고 그리고 그리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무너진 무수한 부산타워의 조각들을 보고 또 본다. 「우리는 매일 오후에」에서는 ‘나’는 묻고 ‘남자’는 대답한다. 부산에 있는 고리원전에서 사고가 일어났고 그 이전에 일본에서는 지진이 일어났고 원자력발전소 폭발이 일어났고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시스템도 붕괴되었다는 것인데 ‘나’가 이것들을 아는 이유는 ‘남자’에게 묻고 또 물어 대답을 들었기 때문이고 ‘남자’가 그것을 알고 있는 이유는 ‘나’가 끝없이 묻고 또 물었기 때문이다. 「겨울의 눈빛」에선 이런 사고를 담은 영화를 보는 ‘나’가 있다. 그런 사고가 일어난 공간에 남은 이들과 그들의 기억과 상처를 이야기하는 영화지만 ‘나’는 전혀 강렬함이나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나’는 “그때를 기억하고” “그때의 감각을 기억하고” 있기에 화면을 통해 재연된 그것은 ‘나’에게 모멸감만을 안긴다.


내가 아는 누가 또 누구누구가 지금 무얼 하는지를 말하는 것으로 이토록 모멸감이 드는 이유는 무어야. 우리가 개를 보고 싶다고 말하는 것으로 이렇게 허무해져야 하는 것은 또 무어야. 마치 태어나서 처음 개를 만져본 사람들처럼. 너는 그렇게 살았구나. 너의 친구는 그리고 또 다른 친구는 그렇게 살고 있구나.


  그렇구나. 그들은 그렇게 살고 있구나. 역시 허무해지는 마음으로 재난이 닥친 공간을 그 공간에서 멀어져 있지 않은 이들을 보게 된다. 충격과 상실로 인해 마음 역시 폐허를 만들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너무의 극장」에서 상영되는 연극처럼 기괴스럽다. 제목과 연관되는 내용도 대사도 연기도 없이 그저 관객인줄 알았던 이들이 무대 위로 달려가 배우들을 내리치는 폭력만이 있는 연극. 어느 것이 「너무의 극장」에서 상영되는 이야기가 될까. 무너지고 원전이 터지는 그런 사고들일까, 그 사고의 공간에서 기억을 품고 살아가는 것일까.  「너무의 극장」이 있는 한 그 폭력적인 연극은 계속 상영되는 걸까. ‘나’는 그 기괴한 폭력의 극을 계속 보고 있어야만 할까. 물론 ‘나’는 그것을 기괴하다에서 멈추지 않고 그것에 관해 말하겠다는 의지를 다진다.


부산에는 바다가 있고 부는 바람은 바다 냄새가 나는 바람. 바람에 실려 부산의 목소리가 노랫소리보다 선명하게 들려오는데 부산은 내게 너는 왜 바다 이야기 해운대 이야기 광안리 이야기 그리고 반짝거리는 야경과 그 밖에도 줄줄줄 댈 수 있는 모든 멋진 것들을 말하지 않고 그저 적당한 말들만 그것들을 죽인 이야기만 하는 거야? 왜 나에게 오염된 것들을 버리고 가려는 거야? 부산은 내게 항의하고 나는 알아 알아 다 안다니까 웃으며 부산에 가면 많은 멋진 것들이 있지 바람에 대고 말하며 아직 남은 ‘그저 적당한 말’을 뜯어내 바닥에 내던졌고 그저 적당한 말은 떨어지지 않으려 내 손을 깨물었고 내 손에서는 피가 났고 내 피는 붉었다.


  강박적일 정도로 반복하여 묻고 그리고 기억하는 것은 피폐해진 이들의 마냥 수동적이고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나‘가 이런 다짐을 가지는 순간 그 모든 반복적인 행동들은 폐허를 벗어나기 위한 의지로 기억된다. 누군가는 사고를 잊으라 말하고 누군가는 사고를 잊지 말아달라 말한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로 잊음을 선택할 문제가 아니니 ’사고‘는 반복되지 않도록 기억하고 문제가 된 것은 해결해나가는 일이다. 그런 메시지를 건조한 겨울의 눈빛은 말한다. 멋진 것들이 있는 것도 그것을 얘기하는 것이 더 좋은 것도 안다. 하지만 해야 할 것이 있음을,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피가 날 정도로 아픈 일이 되지만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아직도 겨울, 여전히 「너무한 극장」에서 너무한 이야기들이 상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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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있나요 - 2016 제10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박형서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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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없었다


2016 제10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박형서・윤성희・천운영・한유주・김태용・조해진・최은미・김금희, 은행나무, 2016-.


  문학사에서 김유정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작가의 이름을 건 문학상이 꼭 그 작가의 이미지를 구현해내는 것에 수여하는 것이 아님을 알지만 10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 「거기 있나요」에서는 특히 떠올리기 어려웠다.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내가 소설속에 있기는 한 건가, 나의 시선은 책에 있는데 영혼은 딴곳으로 가버린 경험을 하고 있었다. 이해와는 상관없이 나는 양자물리학을 경험하는 순간이었다고나 할까. 가물치, 제물포라는 물리포기의 정당성을 확장시켜주는 말처럼 일찌감치 물리는 물려온 삶이라 이해하고자 하는 욕구는 쉽사리 소멸되어 과학이론의 세계가 나오자 한발 물러서서 책을 읽다보니 여전히 소설의 내용이 흐리다. 다만 이해하고 이것을 또다른 차원으로 엮어낸 작가에게 놀라움과 부러움의 시선만을 던졌다.

  진화동기재현연구라는 인류의 진화 과정에 대한 재현 실험이 이 소설의 주축을 이룬다. 인류의 진화, 사회가 형성되어가는 과정에서 실험 연구진이 실험조건을 조절하면서 또한 진화의 속도와 내용은 달라진다. 연구진이 이렇게 조건의 변화를 주면서 연구진이 마치 인류를 쥐고 흔드는 듯이 그의 욕망 또한 거세어지고 실험의 대상인 쿼크가 연구진과 대립하는 것이 소설의 주된 내용이다. 거기 있나요는 실험 대상인 쿼크가 파괴되는 순간까지 외치는 절규다. 글로 한줄 요약을 하다보니 아주 쉬워보이지만 이 한줄의 줄거리를 작성하기까지 수많은 감정과 사고들이 파괴되었다 살아났다 했다. 여전히 과학소설이라는 말로 분류하며 이해함의 폴더와는 먼 곳으로 이 소설을 옮겨 놓는다.


그해 여름 우리가 정말로 자살하고 싶었는지 지금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나는 자살하고 싶었다. 절반의 진심이었다. 다른 세 사람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없었으니 그들이 진심으로 자살을 원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추측컨대 그들 역시 절반쯤 진심으로 자살하고 싶었을 것이다.  - 한유주, 「그해 여름 우리는」


  그해 여름에 우리는 어땠을까. 그해 여름을 겨울처럼 기억하던 시절은 분명 있었다. 한유주 작가는 자살하고픈 이십대 네명의 청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같은 공간에 네 명이 밀집하여 살아가서 그렇지 이 공간을 더욱 확장해보면 이 나라에는 무수히 많은 청춘들이 자살하고픈 욕구를 지니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특정 어느 곳엔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더욱 밀집해 있을 것이고. 왜 죽고픈 이들은 타인과 함께 죽는 것을 택하는 건지, 늘 전혀 모르는 이들이 인터넷에서 만나 동반자살한 기사를 보면 그들은 죽고 싶어서 모인 것이 아니라 단지 죽고싶다는 감정을 나누고서는, 살고 싶어서 만나려 애썼다는 생각을 했다. 여기, 소설의 문장에서도 이렇게 절반은 살고 싶었을 마음을 보았다.

  천운영의 「반에 반의 반」은 기억, 추억에 관한 이야기다. 아니 삶에 관한 이야기인가. 누군가의 삶에 대한 기억은 기억하고픈 대로 흐르는 걸까. 추억이 소환하는 할머니의 생애는 각자의 기억속에서 부딪치며 재창조된다.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애잔한 기운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 소설속에서 만난 것 같다. 

  김금희의 「새보러 간다」를 보면서 직장인의 비애만큼이나 직장인이라는 명명하에 갇혀버린 순응적 삶에 대해서 생각했다. 젊은 작가상 수상작이기도 한 최은미의 「눈으로 만든 사람」은 막 눈사람이 녹아 물로 남은 자취를 보는 것처럼 축축했다. 동화같은 이야기에 푸욱 빠지게 될 줄만 알았건만, 그렇지 않아서 더 놀랐고 답답했다. 이름에 의미를 붙이며 이름 때문에 나름 애를 먹었던 기억이 있어서인지 이름에 의미와 정체성을 붙드는 입양아의 이야기 조해진의 「문주」도 그 이름이 계속 생각나게 했다.

 

이름은 우리의 정체성이랄지 존재감이 거주하는 집이라고 생각해요. 여긴 뭐든지 너무 빨리 잊고, 저는 이름 하나라도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 사라진 세계에 대한 예의라고 믿습니다.  - 조해진, 「문주」

 

  하지만 사람은 이상한 존재인가보다. 책을 덮고 나니까 거기 있나요라는 제목이 가장 크게 맴돌면서, 소설을 읽었던 시간 동안 거기 없었던 나의 영혼을 다시금 붙들어 맬 날을 기다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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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스퀘어에서 우리는 - 창작과비평 창간 50주년 기념 장편소설 특별공모 당선작
금태현 지음 / 창비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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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탱고


망고스퀘어에서 우리는, 금태현, 창비, 2016.11.07.


  서른 한가지 아이스크림을 고르는 가게에 새로운 아이스크림이 생겨나도 망고탱고를 고른다. 다른 맛은 기억에 남지 않고 망고탱고의 맛만 뚜렷하게 기억하는 건 그곳에서 처음 먹은 아이스크림이기 때문일까. 첫사랑에 대한 기억만큼으로 자리잡은 망고탱고가 아니라 정말로 가장 맛있다. 망고탱고를 먹으면 정말로 입안의 혀가 춤을 추는 듯이 느껴진다. 망고스퀘어가 망고탱고로 보여서 시원하고 맛있는 맛을 떠올렸는데 필리핀 세부에 있는 실제지명 망고스퀘어는 그곳에서 살고 있는 하퍼의 삶의 이야기는 전혀 망고탱고의 그 달콤한 맛과는 멀었다.

  하퍼는 코피노다. 한국에 익숙한 코피노의 이야기라면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아이들일 텐데 하퍼의 아버지는 병으로 사망했고 어머니는 늙은 일본인과 재혼해 일본으로 떠났다. 이쯤되면 하퍼는 엄마에게 버려진 건가. 그래서 하퍼는 일찍부터 소매치기와 불법 동영상 업로드로 돈을 벌며 세상을 살아간다. 하퍼가 올리는 영상의 주내용은 타인들의 실패나 실수담이다. 참으로 웃픈, 그런 영상들을 올리며 방문자를 유도하여 돈을 벌고, 그리고 또한 끊임없이 경고장을 받는다.

  특별히 하퍼가 코피노이기 때문에 그의 삶이 힘들고 어렵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가 마약배달을 하는 상황 역시도 코피노이기 때문은 아니다. 아버지는 없고 어머니는 재혼한 상황에서 홀로이 세상을 살아가는 아이들의 삶을 본 듯할 뿐이다. 그런 아이들을 이용하거나 동정하는 이들이 있어서, 이런 아이들의 삶을 제 마음대로 주무르는 이들이 있어서 하퍼의 삶은 지속되었다. 이제 스무살인 하퍼가 살아왔을 삶에서 하퍼가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질 수 있는 상황이 없기에 하퍼의 삶이 그대로 정해져가는 것이다.

  하퍼가 악랄하다거나 우울의 바다 속에 빠진 성격은 아니고 허세 가득하고 철없어 보이는 모습을 보여주기에 그저 뒤통수 탁 치고싶은 철딱서니없는 애로 보이긴 한다. 불법과 범죄로 얻은 돈으로 삶을 살지만 안정적인 미래에 대한 계획이란 미인대회 출신의 여자를 만나는 것인 스무살 청년 하퍼의 삶이다. 물론 그렇게 살아가는 자신의 삶에 대해 건조히 내뱉는 속에서 힘겨움이 체화된 하퍼의 일상에 애처로움이 느껴진다. 하퍼의 희망, 미인대회 출신의 여인은 베렌이라는 여자로 실현된다. 베렌과의 만남이 하퍼의 인생을 또한번 전환시키게 만드는데 베렌을 잡으러 가는 자에서 베렌과 사랑에 빠져 도망하는 신세가 되기 때문이다. 하퍼에게 베렌을 잡기를 요청이란 형식으로 실은 협박한 이는 박사장, 하퍼에게 마약배달을 시키는 자이다. 이들의 관계는 그렇게 거래관계였지만 헤어날 수 없는 잘못된 관계로 위치지으며 하퍼도 베렌도 박사장과 같은 이들의 악랄함 속에서 쉬이 벗어나지 못한다.

  하퍼는 지금 살아있지 않은 아버지, 기억에 없는 아버지의 나라인 한국을 경유해 살아계신 어머니가 있는 일본으로 간다. 후쿠오카 그 곳에서 어머니와의 시간을 보내며 기억에 없는 아버지에 대해서도 이미지를 찾아내고 베렌과의 관계 또한 견고해진다. 일본여행에서 하퍼가 느낀 것은 ‘가족’이라는 이미지다. 그가 살아오면서 느끼지 못한 가족이란 말이 주는 따스함, 안정감을 구체적으로 그려내며 가족속에서 살고 싶은 꿈을 새롭게 하퍼는 갖게 된다. 가족에게서 분리된 채로 살아내야 했던 하퍼의 삶이 어쩌면 힘겹게 살게 된 근원으로 올라가 이유를 찾아낸 것이라고 봐야 할까. 원인을 찾았고 방법을 찾은 하퍼의 새로운 삶을 기대한다.


나는 우리 네사람이 가족이라는 둘레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했다. 베렌과 엄마가 나란히 주방에서 밥을 짓고, 나는 고등어를 굽는다. 지금처럼 할아버지와 함께 식탁에 둘러앉는다. 음식이 식탁을 구성하는 게 아니다.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이 식탁을 규정한다. 가족 중 누군가 잔소리를 하거나 참견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하퍼의 꿈은 감옥에서 전개된다. 박사장이 끝나지 않을 돈에 대한 욕구 때문에 계략으로 마약운반책으로 붙잡혀 무기징역을 선고받게 되니까. 스무살 청년 하퍼의 삶은 감옥에서 어떻게 이어질까. 이제 진정으로 원하는 목표를 가지고 삶을 살기를 원할 때에 맞닥뜨린 이 현실에서 하퍼는 박사장을 원망하지도 마냥 억울해하지도 않는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아서일까. 꿈꾸듯 여전히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는다. 교도소 댄스 공연에서 춤추며 베렌에게 프로포즈하는 것을 상상하는 하퍼의 삶은 하루 몇 끼를 먹냐는 신부에게 참치맛을 아냐는 식으로 대꾸하던 하퍼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허세가 아니라 진정 웅원하게 된다.


나는 벌써부터 부활절을 기다렸다.

   관례대로 누군가 석방을 맞이할 수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석방자 명단에 내 이름도 들어가길 간절히 희망했다. 잘못 불리지 않은, 진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싶다.


  어쩌면 『망고스퀘어에서 우리는』을 보자마자 망고탱고를 떠올린 건 하퍼의 춤으로 이어질 이야기의 전개를 알았던 것일까. “기다릴 줄만 안다면 불행할 일이 없을 것 같았다.”는 말이 판도라 상자속에 마지막 남아 있던 희망에 대한 두가지 해석을 생각하게 한다. 망고탱고를 입속으로 되뇌며 희망일지 절망일지 모를 하퍼 김의 미래를 생각하는 동안 존재하지도 않는 망고탱고가 이미 입속에서 다 녹아 그것이 가졌던 여운만을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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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의 북극곰...


우리의 남극 탐험기, 김근우, 나무옆의자, 2017-07-10.


  

http://www.ytn.co.kr/_ln/0104_201712261515210315



  얼음 구멍 속으로 얼굴을 내민 물개를 보고 깜짝 놀라 넘어진 새끼곰이 너무 귀여워 눈여겨보다가 『우리의 남극 탐험기』를 떠올렸다. 책을 읽을 당시에는 흥미는 없었고 아쉬움이 많았기에 쉬이 잊고 넘겼는데, 극과 극은 통하는 건가.

  곰을 부를 때면 늘 북극곰이라 부르듯 남극에는 곰이 살지 않고 대표적으로는 펭귄이 산다. 남극은 대륙이고 북극은 바다인데 곰이 바다 북극에서 살고 펭귄이 대륙에서 살고 있다는 게 오랫동안 그렇게 알아 왔으니 익숙할 뿐, 이상해라고 생각하니 더없이 이상하게 생각되기도 한다. 이 소설은 남극탐험기이지만 남극을 탐험하는 내용은 후반부에나 나온다. 전반부는 각각의 등장인물의 만남과 상황 등이 나오는데 사실, 주인공들의 남극탐험에 대한 개연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더구나 남극을 탐험하러 가면서 만난 북극곰도. 놀란 북극곰을 보다가 떠올린 건 이것이었다. 그래 북극곰을 남극에서 만나다니. 뒤늦게 말이다.

  대륙으로 둘러싸인 바다 북극이나 얼음으로 덮인 땅 남극이나 땅과 바다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얼음과 눈이 떠올려져 늘 추운 곳이라고만 생각해 오다가 새삼스럽게 남극과 북극의 차이를 세심하게 살펴보게 되었다. 남극탐험에 관한 이야기는 자주 들어봤어도 북극탐험에 관한 이야기는 들은 기억이 없다는 것도. 이누이트족, 에스키모인들이 살고 있어 탐험이라는 말이 적당하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만 이래저래 북극이든 남극이든 탐험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은근슬쩍 든다.

  물론 소설속에서처럼 북극곰을 남극에서 만난다거나 하늘을 나는 펭귄을 만난다거나 그런 기대는 하지 않는다. 더더구나 말하는 곰과 펭귄에 대해서도. 극한의 지역을 탐험하며 발가락이 썩어 잘라낸 이야기도 나오지만 소설에서의 남극텀험기는 현실성있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환상같고 장난같다. 오히려 이야기에서 현실성을 획득하고 나름 흥미로운 인물은 섀클턴 박사다. 미숙아로 태어나 망막병증으로 시력을 잃고 살아간 그가 겪는 일련의 일들은 남다르다. 상류층에 재력있는 집안에서 자랐지만 그것과 또한 시력을 이유로 겪는 멸시와 조롱들, 그럼에도 타고난 의지와 특별한 성향으로 어린나이에 박사가 되고 교수가 된다. 늘, 여러 사람들로부터 공격받고 그리고, 동성에 대한 박사의 사랑과 이별이야기가 더해진다.

  병렬식으로 박사와 주인공 나의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그리하여 어느 한 지점에서 그들이 만나 남극탐험을 떠나지만 시종일관 왜 남극인지는 모르겠다. 그저 남극탐험을 떠났던 섀클턴 박사의 목소리가 이끌었다는 이유를 대기엔 부족하게 여겨졌다. 소설이니까 하면서도 너무 말이 안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소설이 무엇인가, 내가 소설에서 기대하는 게 무언가를 생각했던 소설이 되었다. 

  소설의 주인공이 소설가라는 설정이 이 생각을 더하게 했다. 누구나 제 인생에 대해서는 아쉽고 안타까운 점이 있겠지만 주인공 ‘나’의 행동들은 치기어리게 보여서 공감이 덜했다. 이 주인공은 우연히 쓰게 된 글로 연이어 상을 받고 소설가가 되었지만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 스타일이란 게 별건 아니고 정신 나간 놈들이 등장해서 되는대로 사고를 치고 헛소리나 찍찍 내뱉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엉터리이고 헛소리로 일관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래도 내게 문학상을 안겨준 심사위원들은 그런 스타일을 신인 작가의 패기라고 좋게 평가해주었고 독자들의 반응도 괜찮았다. 내 유일무이한 장점이었던 것인데 그게 망가져버린 것이다. 문학 비슷한 거라도 써보겠다는 생각에 초심을 잃고 진지하게 글을 쓰기 시작했더니 내 글은 무척 진지한 헛소리가 되고 말았다. 진지한 헛소리는 헛소리가 될 수 없었다. 재미도 없고 미학적 가치도 없는 쓰레기에 불과했다.


  진지한 헛소리가 무언가에 대해서 생각하며. 적어도 이 소설을 읽고 나서 ‘진지한’은 못느꼈고 소설을 다 읽고 난 후 허무함이 밀려왔던 것만 기억에 남는데, 이렇게도 다시 소설을 떠올리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니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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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농담이다 오늘의 젊은 작가 12
김중혁 지음 / 민음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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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똥별을 찾는 밤에

나는 농담이다, 김중혁 저, 민음사, 2016.8.26.


  별똥별이 떨어진다기에 도시의 불빛을 헤치고 기다렸다. 너무 밝아서, 도시의 밤은 너무 밝아서 별똥별은 보이지 않았다. 소원이 머쓱해져 입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추운 밤의 네온싸인과 아파트 불빛을 보면서 별빛과 불빛은 어떻게 다른가 생각했다. 별똥별은 떨어져 내려도 저 하늘의 삶같기만 하고 네온싸인은 화려하게 빛나도 하늘에 닿지 않을 번쩍임같았다. 닿을 수도 보이지도 않을 별똥별에다가는 온갖 류의 감정을 끌어다가 경외를 표하고 네온싸인은 고작 별빛을 방해하는 무리처럼 취급하는 밤, 내 삶이 저열한 코미디처럼 느껴졌다.

  말하지 못한 것이겠지만 소원을 외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은 잠깐, 소원이 있다는 건 욕망이 있음이라는 생각에 이젠 소원마저도 말하지 못한 삶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한밤의 가련한 모노드라마는 일찍 끝났지만 아직 욕망은 남아 별빛과 불빛 사이에서 오래도록 흐르고 있다. 저 먼 우주속을 유영하며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한 남자가 끊임없이 전하는 메시지와 우주를 떠도는 이복형에게 전하는 동생의 메시지에 방해되지 않게, 흐르기를….

  관제 센터, 들리나? 관객 여러분 들리시나요?

  누군가가 듣는지 아닌지도 모른 채 농담, 아니 필사의 말을 던지고 있는 두 남자가 있다. 서로 형제라는 사실은 존재함만으로 알 뿐인 이들의 이야기를 읽었을 때는 아들이 재혼한 엄마와 새아버지 그리고 자신의 이복동생을 살해한 뉴스가 도배되고 있었다. 그렇기에 송우영과 이일영의 말은 너무도 애틋했고 예쁘게 들렸다. 각기 우주와 코미디극장에 서 있지만 안락하게 정착하지 못한 두 형제의 이야기는 어머니가 남긴 편지를 통해 연결고리를 만든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남긴 편지를 전해주려 형 이일영을 찾아가는 스탠드업 코미디언 송우영의 이야기와 모체 우주선과 분리된 우주비행사 이일영이 우주에서 끊임없이 지구로 보내는 메시지가 소설의 서사인데도 소설은 긴박스럽게 느껴지기보다 나른하게 느껴진다. 이 알 수 없는 나른함이 무중력상태에서 시공간을 넘나드는 데 따른 방향상실일까.


서 있을 때만 웃기는 건 아니지만, 서 있을 때 가장 웃긴 건 확실합니다. 앉아서 대화를 나눌 때 이야기가 잘 풀리지 않으면 일어서는 상상을 하는데요. 상상만으로도 이야기가 잘 됩니다. 이야기라는 놈은 직선으로만 움직이는 모양이에요. 그런 면에서 전파를 닮았죠. 우리가 빌어먹을 인공위성들을 만든 이유가 뭡니까? 전파는 무조건 직선으로만 움직이니까 그걸 지구 반대편에 보내기 위해 반사를 시킨 거잖아요. 제가 하는 이야기를 잘 듣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세요. 그러면 여러분이 인공위성의 역할을 대신하는 겁니다. 자, 모두들 인공위성을 하늘로 올려 볼까요?


  모체 우주선에서 분리된 이일영의 현재는 일찌감치 어머니와는 떨어져 살아야 했던 과거의 이일영을 생각하게 한다. 어머니는 버리고 떠난 아들에게 그리움과 죄책감 가득한 편지들을 남기고 아들은 그 마음을 버리지 않고 어떻게든 전하려 애쓰는데, 이야기가 우주라는 공간과 만나면서 칙칙하지 않고 청아하게 맴돈다.

  극한의 상황에서 소멸해가는 산소속에서 농담처럼 말을 던지는 이일영과 연일 농담처럼 진담을 뱉어내는 코미디언 송우영의 말들을 듣고 있노라면 이 두 형제가, 서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더라면 그들의 이야기는 얼마나 농담이 짙었을까 싶었다. 이토록 잘 맞을 수 없을 텐데 생각하면 그들이 만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말을 나누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쉬울 수가 없다. 그리고 참 닮았구나 싶었다.

  삶은 농담이라 말하지만 진담을 잔뜩 뱉어놓고서 스리슬쩍 농담이다, 농담이다 하면서 밀어내버리는 말들이 삶속에서 너무나 많았다는 생각을 한다. 농담. 농담처럼 말하듯 하지 않았다면 살아감이 너무 힘들었을려나. 농담이라 덧붙이면서 삶이 더 위태로웠을라나. 위로같기도 하지만 결국은 더욱 슬퍼지는 농담같은 이야기를 이 소설에서 읽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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