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마시는 이유


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창비, 2016-05-16.


  인생의 그 모든 비극의 끝자락에서 위로의 선봉장은 술밖에 없을 듯이 여겨진 때가있었다. 술기운만이 버텨낼 힘을 줄 것 같은 때. 술이 망각으로 이끌어 줄 것을 기대하지만 막상 망각해야 할 것은 뚜렷하고 자잘한 망각에 부딪칠 때, 술은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술에게도 기만당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더 이상 술에 대한 환희와 찬가는 없어지는 때. 술은 희극의 기쁨의 정점에 맞이하는 동반자가 아니라 늘 비극과 함께 하고 비극속으로 이끄는 길잡이가 된다.

  그런 술의 경험을 모르지 않을 텐데, 끊임없이 술을 마시는 등장인물들이라니. 술에 대한 찬가라고 하기엔 비애가 가득한 인사말, “안녕. 주정뱅이“. 실제의 사람들에게 건네기엔 욕설같기도 하고 비웃음 같기도 한 인사가 소설 제목으로 전달되면서 느낌이 다르다. 그들의 술은 어떤 맛일까. 최초의 기억에서부터 그 나날들 마다의 술과의 만남은 행이었을까 불행이었을까.


그 만남이 행이었는지 불행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떤 불행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만 감지되고 어떤 불행은 지독한 원시의 눈으로만 볼 수 있으며 또 어떤 불행은 어느 각도와 시점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불행은 눈만 돌리면 바로 보이는 곳에 있지만 결코 보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p176


  세 고교 동창의 십여년 후의 만남을 그린 「실내와 한 켤레」의 문장이다. 친구는 치명적인 가스에 가까운 분위기를 남긴다. 그런 친구들은 삶의 어느 곳곳에서 튀어나와 그 치명적인 가스에 질식하게 만든다. 그 모든 술과의 만남 이전에 치명적인 가스로 타인을 질식케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삶은 나 아닌 사람에 의해 파멸할 수 있을 여지를 늘 안고 있다. 그 사람은 가족이기도 배우자기이고 친구이기도 관계없는 타인이기도 하다. 「봄밤」의 영경은 제 남편이었던 이에 의해 제 아이를 빼앗겼고 수환은 아내에게 버림받고 신용불량자마저 되었다. 「이모」속 이모는 제 가족에게서 오랜 동안 피폐해질 정도로 착취당했다. 「카메라」의 관주는 연인의 말 한마디를 품고 그것을 지키려 하다 죽음을 맞이한다.

  생의 곳곳에서 마주하는 이토록 잔인한 운명들은 술을 불러오게 만든다. 그래서 작가의 소설 속 인물들은 술에 의지해 망각하려 하고 비애를 달래려 한다. 그러한들 쉬이 잊어질 리 없는 삶의 비애를 어떻게 떼어버릴 수 있을까. 견딘다는 말이 갖는 무게는, 비애를 꽉 끌어안고 놓아주지도 않으려 한다. 모든 불행을 부여잡고 취한 와중에도 “자신에게 돌아올 행운의 몫이 아직 남아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의아해”하는「봄밤」의 영경처럼, 이 생애에서 행운의 몫은 아직 남아 있을까?


그게…… 내 탓은 아니잖아요? 그렇잖아요? p230


  치명적인 가스를 퍼붓는 누군가와의 만남이, 내게 닥친 불행이 「층」의 외침처럼 내 탓은 아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행은 받아들여야 하고 감당해야 하고 견디어야 할 뿐이다. 온 힘을 다해 불행 가운데 행운을 찾고 싶어도 찾을 수 없는 것은, 누구든 한발짝 물러나 이렇게 말하기 때문 아닐까?


내가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p242


  아니, 사실은 술보다도 바로 당신, 눈앞에 있는 당신의 도움이, 위로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외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도움되지 않으리라 뒷걸음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한, 이 세상살이에 주정뱅이는 넘쳐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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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스파이다

 

고요한 밤의 눈, 박주영. 다산책방. 2016.

 

   스파이 소설이라 이름하는 이 소설에서 스파이에 대한 명확한 정의는 내려지지 않는다. 또한 익히 알고 있는 스파이들이 행하는 첩보 활동도 없다. 등장인물들 스스로가 ‘스파이’라고 칭하고 있지만, 그래서 ‘스파이의 정체는 뭔가?’라는 의문만으로도 끝까지 책을 붙들고 있게 된다.

이야기의 시작은 처음부터 누군가가 스파이임을 알린다. 그리고 세상에 살아있는 존재로 기록되지 않은 쌍둥이 중 한명이 기록되어 살고 있는 언니의 실종을 추적하면서 시작된다. 미스터리와 첩보로 가득하리라 생각했던 이야기는 등장인물들의 스파이 활동과 관련한 스토리가 중심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 각자의 사색이 주가 된다.

   사회 현실에 대한 상당히 익숙한 비판이 줄곧 등장인물에 의해 제기되는데 이러한 철학적이고도 비판적인 사회고발의 내용을 익숙하지 않게 잘 버무린 듯하다. 끝까지 내용에 관한 모호함을 유지하면서도 ‘이 사회가 이렇다’라고 분개하게 되는 내용을 사회학 책처럼 잘 정리하여 제시한다. 등장인물의 몇 이야기를 빼고 나면 자본주의 현실, 경쟁사회의 현실, 조직사회에 대한 것, 사회에서 한 개인으로 살아가는 일에 대한 현실적인 문제점을 직시하는 말들이 줄줄이 열거된다. 이것이 소설의 형태로 제시되면서 이야기를 이끌고 있다.

   등장인물은 미지칭으로 알파벳으로 각 개인의 관점에서 사건이 서술된다. 또한 등장인물 자체가 많지 않다. 이들 몇 안되는 인물들은 ‘스파이’라는 이름으로 연결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스파이’임에도 불구하고 그 스파이라는 역할과 더불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고민하고 있다. 하나 분명한 것은 이 세상에선 많은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스파이들이 존재하는 것과 관련이 되어 있는 걸까.

   무엇이 그들을 스파이로 만드는가. 어쩌면 이 질문이 가장 중요한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을 스파이로 만드는 그 누군가는 누구인가도. 스파이는 사람들을 감시한다. 적어도 등장인물 몇은 그렇게 타인을 감시하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위험이 되기 때문인지도 모르는 사람을 감시하는 일이 그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역할이니까 그렇게 하고 있다.

 

나는 나의 일을 하고 X는 X의 일을 하고 Y는 Y가 해야 할 일을 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스파이이고 각자가 해야 할 일을 한다. 그리고 우리의 목표는 하나이거나 하나가 아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세상, 그 세상의 이면에 우리가 있고, 우리의 이면에 또 누군가가 있다. 누군가 우리를 모른 체하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등 뒤를 모른 체한다. 패자가 되지 않기 위해. 하지만 패자가 되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 결국 우리 모두를 패자로 만든다. p134

 

   자기 일에 직업으로서 최선의 역할을 다하면서 그것 자체로 교묘하게 스파이일을 수행하기도 하는 이들은 왜 스파이가 되었는지, 목적이 무엇인지도 알 길 없다. 그저 그렇게 막연하게 그들은 스파이가 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스파이라는 삶이 가져다 줄 그들의 목적은 과연 무엇인지조차 모호하다. 그런 만큼 그들 각자의 스파이라는 삶에 대해 가지는 끊임없는 회의가 없다면 이 소설은 없을 지도 모르겠다. 마냥 모호한 스파이라는 존재, 그 역할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마치 작가가 말하는 ‘스파이’는 그냥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들인 것만 같아 보인다. 특정한 시스템에 그저 흘러가는. 생각을 잃어버린 채 그렇게 흘러가는. 그러니까 결국 권력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는 자들이 될 수 있겠다.

   어느 사회나 사회가 안정적으로 흘러가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 ‘안정’의 기준이 다르다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처럼 특정한 사회를 위해 수많은 이들이 상처받고 희생되는 사회가 오래도록 흘러가고 있었고 그러한 사회의 변화를, 혁명을 인식한 자들에 의해 기존의 틀들이 조금씩 수정되며 사회가 흘러갔다. 그 과정 속엔 늘 힘과 권력이 있는 이들이 세상을 휘둘렀고 그들에 의해 나아갈 방향을 되돌려야 했던 수많은 이들이 있다. 마치 특정한 권력이 살아가기 위해 존재해야만 하는 것처럼 그들의 필요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는 사람들. 그래서 이 사회에 가장 위험이 되는 것은 ‘사색하는 사람들’이 되고 만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사람들, 나 하나만으로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들. 이 소설은 결국 이 사회가 나아가고 있는 문제와 모순들을 외면한 채 그대로 굳어진 사회로 흘러가는데 일조하고 있는 각 개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원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위안을 주는 환상 속에서 살 수 있다. 거짓된 현실에 속아주기도 하고 본래 의도를 감추려고 그 현실을 이용하기도 하면서. 이 거짓으로 쌓은 도미노가 길고 크고 복잡해질수록 어쩌면 우리는 더더욱 환상을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성공적인 환상을 지키기 위해 거짓된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스파이의 삶이다. p164

 

   지금과 같은 경쟁사회, 누군가에 의해 감시하는 역할을 부여받은 이 스파이들의 모습이 지금 현재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각 개인의 모습일 지도 모르겠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헬조선이라는 사람이 인간다운 삶으로 살아가기 힘든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타인을 ‘이겨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의 모습. 우리 모두가 직접적인 지령을 받지 않은 채로 특정한 이들이 원하는 시스템의 안정화를 위해 자신과 같은 소소한 사람들의 일상을 견제하고 살아온 것은 아닌지. 그래서, 우리 모두가 스파이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은 지배하기 더 쉬워졌다. 가난은 극복할 수 없는 것이며 그저 그렇게 살다 죽는 건 억울한 일이 아니며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정해졌다. 원망해야 하는 건 오로지 당신 자신뿐이다. 그래서 자살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이 당연한 일이 당연하게 자꾸 일어나면 세계가 흔들린다. 먹이사슬의 바닥을 장식하는 인간들이 사라지는 것이니까. 최소한의 삶의 조건마저 고려하지 않은 생지옥으로 사람들을 몰아넣으면서도 자신들만의 세계는 굳게 유지되리라고 믿는 근거가 나는 정말 궁금하다. p211

 

   소설 속에서 작가가 외치는 이야기는 고스란히 지금 현재의 사회에 대해 수많은 이들이 느껴왔던 감정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오래도록 패배주로 살아가던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변화의 기점을 맞이하는 순간은, 그들이 두려워하는 대로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이다.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가지며, 목적에 대해 의문을 가질 때 무기력에서 벗어날 발판이 이루어지는 것일 지도 모른다. 그때야말로 정말 ‘스파이’가 될 것이다. 시스템의 스파이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이 사회를 살아가는 주인으로서의 감시자, 스파이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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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애의 크기


상냥한 폭력의 시대, 정이현, 문학과지성사, 2016.


    “이런 시대에 이렇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 나쁘지 않다”고 「미스조와 거북이와 나」속 인물은 말하지만 그럭저럭 살아가야 하는 시대는 환희는 사라지고 온통 폭력이다. 무력을 동원하지 않은 폭력의 외관에 헷갈렸을 수 있겠지만 엄밀한 폭력이다. 그럭저럭 살아가게 만든다는 게, 폭력이 아니고 무엇이라 할 수 있겠는가. 삶에 대한 열의를, 정의를 빼앗겨 버리거나 지속할 생각이 없이 사는 시대. 그것을 드리운 것이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상황이 아니라고, 그러한 테두리가 아니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책의 제목을 단 단편은 없는 정이현의 소설집엔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도시를 바탕으로 한, 현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런데 이전의 정이현 소설 속 인물들과 달리 소심하다고 해야 할까, 미적거리는 인물들의 모습이 눈에 띈다. 그들은 뚜렷하게 선악을 드러내지 않지만, 대놓고 타인에게 삿대질을 한다거나 무엄한 말을 늘어놓지 않지만, 그래서 어쩔 땐 약해보이는 듯도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위해를 가한다. 의식하지 않든 아니든 그들은 결정을 미룸으로써, 책임을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그럭저럭 사는 삶’ 속으로 들어간다.


결정의 순간에 아무런 결단도 내리지 못하는 방식으로 결정해버리고, 전 생애에 걸쳐 그 결정을 지키며 사는 일이 자초한 삶의 방식이라고 양은 탄식했다. p139


  사는 게 중요한지 어떻게 사는 게 중요한지 따진다면 그것을 묻는다는 게 위선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 물음 속에선 이미 대답이 전제한 듯하니까 말이다. 생각해보면 어느 누구도 타인의 삶의 방식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타인에게만 정의를, 배려를 강요하는 것은 또한 폭력일 수 있다. 그러나 면밀히 사회가 삶의 최선의 선, 안전선을 지켜나가는 방식으로 이뤄진다면 개인의 ‘행동’ 하나가 폭력인 시대가 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에게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입 밖에 내는 일에 굉장히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주 무시된다.  p152


  ‘무시’는 타인과의 위계를 설정하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관계치 않으려는 모습이기도 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끊임없이 배우고 가르치고 있음에도 관계맺음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려 하는, 그 관계맺음의 틀을 규정하는 방식을 따로이 설정하며 살아가는 이 시대는 표면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뻔히 드러내고 있다. 그럼에도 번지르르한 말로 포장된 위선의 이 세계. 그 어떤 아름다운 포장을 하고 있더라도 결국은 포장의 아름다움과는 달리 서글픔이 가득한 이 시대, 이 시대의 사람들, 그들의 말과 행동들.


어떤 사람이 제멋대로 나를 침범하고 휘젓는 것을 묵묵히 견디게 하는 건 사랑이지만, 또 그 이유로 떠나가기도 하지.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p31


대화가 없어도, 음악이 없어도, 라디오 소리가 없어도, 사랑이 없어도, 세상 모든 소리와 빛이 사그라진 곳에서도 어색하지 않은 관계였다. p182


  이렇게 삶이 이어진다. 농도 짙은 애정을 확인할 길 없이 흘러가는 시대. 사랑이, 애정마저도 쉽게 폭력으로 치환될 수 있는 시대가 우리를 휘감는다. 예의없음을 상당히 예의있게 내뱉는 이 시대에 삶의 모든 것들에 쉽게 상처받으면서도 상처받지 않은 듯 무심을 가장하는 이들에게 삶은 흘러가고 이어진다.


단단하고 부서지기 쉬운 것들, 부서지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생각하는 동안 해가 완전히 사라졌다. p130 


  그렇게 남은 생애, 지금 드러난 이 모습이 화석화된다면, 이것이 당연한 일들인 양 삶의 표준으로 남는다면, 그때에 사람들은 그것에 적응한 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소설 속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먼 미래가 그려진다. 삶을 살아가는 동안 느끼게 되는 비애의 크기는 위선과 위악 그 중 어디에서 강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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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데없음의 여름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

  한은형, 문학동네, 2015.



   여름이 작가에게 선사한 것은 무엇이기에 작가는 ‘여름’ 이미지 속에서 이야기를 만들까. 장편 소설에서도 계절 느낌이 묻어났는데 단편 역시도 그렇다. 단편집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는 여름을 어떻게 보냈을까. 참 이상하게도 여름과 너구리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동물들에게 사계절은 존재함에도 너구리가 여름 속에 있는 동물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생각하고 보니 이상하지만 계속 그렇게 생각한다. 모든은 아니라 어떤 동물에게는 털이 있는데, 강아지도 고양이도 털이 있지만 여름이라고 특별히 잘 지내지 못한다거나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너구리가 그 털을 몸에 덮고 여름을 어떻게 견디지라는 하릴없는 걱정을 한다. 이거야말로 작가가 말하는 ‘쓸데없음의 헌신일까. 참, 그런데 너구리를 본 적은 있던가.

  작가의 등단작이자 문학동네 신인상 수상작인 「꼽추 미카엘의 일광욕」은 여름에서 시작해서 여름으로 끝난다.

 

이 이야기는 내가 미카엘을 만난 그 짧았던 여름 저녁에 있었던 일이다.

이 이야기는 내가 꼽추 미카엘을 만난 그 길었던 여름 저녁에 있었던 일이다.

 

  여름은 그런 것인가. 짧게도 길~게도 느껴지는. 나 역시도 시작은 짧은 여름날의 이야기로 들어갔다가 되돌아 나올 땐 기인 시간을 보낸 느낌이다. 단편집의 소설 하나하나가 짧은 여름을 겪으리라 생각하며 발을 들여놓았다가 푸욱 여름 속에서 잠기다 나온 듯하다. 여름 속에서 잠기다 나왔다라… 그 느낌이 결코 맑고 경쾌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한여름의 더위에 무료함과 무력함이 겹쳐지는 절정에 있는 것 같다. 무엇에 눈을 돌리려고 하나 열정과는 다른 그 행동의 기저에는 권태가 잔뜩 자리잡아 있다 칙칙함을 한여름의 열기가 말려주는 듯 싶다가도 이내 습기로 흩트려 놓기를 반복하는 기분이다. 현실의 이야기인데 비몽사몽간에 겪은 일인 듯 이야기들이 먼 곳에 있다. 내 주위에서 이러한 이들을 만난다면, 그들과 함께 나는 어떻게 물들어 갈까.

  한낮인데도 작가의 이야기 속 인물들은 잠들어 있는 듯, 여전히 깨어나지 않고 있는 듯하다. 잠에 취한 것인가, 술에 취한 것인가.

  「꼽추 미카엘의 일광욕」 속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일상성에서 벗어나 있는 듯하고 여기서의 일상성을 일반적인 상태로 바꾸어도 무방하다. 모두 사회에서 가늠하는 지위를 무겁게 걸치고서 그들의 언행은 그 무게에 걸맞지 않다. 아니, 전반적으로 그렇지 않다. 그래, 사회적 지위란, 사회속에서 차지하는 역할이란, 직업이란 나를 이루는 하나의 요소일 뿐 본질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 역시 외피일 뿐이고 온전한 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니까.

  그렇든 어쨌든 사력을 다해서 그것을 이루었을 것인데 사력을 다해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것인가. 상식적이지 않은 행동을 하려는 이유를 생각해 보건대 그것이 권태와 고독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더 우스워진다. 하나같이 정형화된 것처럼 일탈을 향해 뛰어드는 모습이란 성인의 사춘기를 겪고 있는 어른을 보는 것 같다.


미카엘의 집을 뒤로하고 다시 숲 밖으로 걸어나가는 동안 나는 무언가가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총소리 같은 게 나기를.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 기회에 듣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꼽추 미카엘의 일광욕, 34


  많은 이들이 이러한 일들을 겪어서 힘이 들거나 겪을까봐 힘들어 한다면 소설 속의 인물들은 이러한 일들을 겪고 싶어서, 겪지 못해서 힘들어 한다. 그래서 총소리 같은 게 난다면 그들의 삶이 완전한 전환이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총소리를 그들에게 들려줘야 한다고 총소리 같은 것으로 그들의 삶을 바꾸어야 하리라고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누군가를 향해 총은 난사해댈 것만 같은 불길함이 스치기도 한다.

  여름은, 습기 가득 먹은 여름이란 그런 것일까. 작가의 글이 반짝반짝 햇빛을 쪼인 것이 아니라 습기 가득 먹은 여름 날씨 같다. 마냥 그리워하는 일상이 가득한 그들. 그것이 개이거나 로봇이어도, 아니 개와 로봇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 세상이 커다란 꿈같다”(붉은 펠트 모자, 132)고 하지만, 작가의 소설 자체가 꿈같다. 현실이 아닌 꿈, 한여름밤에 꿀 꿈, 그런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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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그 아이는.


  거짓말 

  제2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한은형, 한겨레출판, 2015.


   1996년의 여름엔 어떤 일이 있었을까. 겁 많은 ‘자살 수집가’의 기억은 습관적인 거짓말을 내뱉는 열일곱 살, 최하석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땅의 고등학생들에게 모범생에서 물러나는 일은 성적 때문일까. 공부하는 것이 싫고 성적이 좋지 않아 모범생이 되지 않는 것인지, 모범생이지 않기 때문에 성적이 안 좋은 것인지, 그 선후관계를 명확히 따진들 무엇하랴. 어쨌든 이 땅의 고등학생들에게 성적 순위를 묻는 일 말고는 다른 어떤 물음도 주어지지 않는데. 한발 더 나아가 최하석은, 자신이 정박아가 된 기분이라 말한다. 그리고 퇴학이라고 해도 무방한 자퇴를 한다. 성적이 좋지 않아서라기보다 남학생과 커튼을 덮고 자다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장소가 교실이기도 했고 커튼 속에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는 이유도 중요했다.

  어쨌든 ‘왜’ 그랬는지는 아무도 물어주지 않았고 하석은 전학해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지만 여전히 달라지지 않은 채 학교생활을 한다. 책읽기를 좋아하고, 취미는 자살 수집인 하석으로. 그리고 늘, 반복적으로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하면서. 하석은 진심을 말하는 것보다 거짓을 말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상대방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다. 가장 싫어하는 말이 ‘솔직’이니까.


'거짓이나 숨김이 없이 바르고 곧다‘, 이게 솔직의 뜻이란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거짓말을 즐겼고, 늘 뭔가를 숨겼으며. 바름을 혐오했고, 곧은 건 내 취향과 거리가 멀었다. 나는 불투명한 사람이 좋았다. 어떤 투명함은 하나의 폭력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p34


  자신을 드러내는데 서투르며 거짓말로 그 시절을 견딘 하석. 왜 그토록 하석은 그때에 거짓말로 버터야 했을까.


어떻게 하더라도 나는 이 여자를 이길 수 없는 것이다. 진지하고 모범적인 인생을 살다가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죽은 뛰어난 여자를. 내가 언니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즉 부모의 관심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은, 죽는 것이 유일했다. 언니보다 더 일찍. 그리고 더 애절하게.

나는 죽어서라도 사랑이라는 걸 듬뿍 받고 싶었다. 내가 언니보다 사랑스럽지 않다고 해도 불쌍하게 여겨진다면, 사랑 비슷한 걸 얻을 수 있다.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p184


  그러니까 하석의 거짓말의 이유는 보다 사랑받기 위함이었던가. 부모의 관심을 갈구하는 어린 아이였다. 하석은 스무살이 되기 전에 죽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자신은 겁이 많은 터라, 자신과 함께 죽거나 자신을 죽여줄 사람을 찾으려 한다. 자신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부모님은 자신에 비해선 나이가 너무나 많으셨고, 무엇에도 무덤덤한 분이었다. 그리고 집안에는 한번도 본 적 없는 언니의 그림자가 늘 드리워져 있었다. 60대의 부모님과 스무살이나 나이차가 나는 언니. 아마도 그 부모들의 사랑이 향한 곳은 그렇게 사라져버린 언니였다는 생각이 가득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랑을 자신에게로 향하게 하고 싶은 고교생 하석의, 그 불안한 생각들.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죽는다면 언니를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언니의 첫 자살 시도도 열일곱 살 때였다. 나는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았다. 그때를 넘기면 죽지 못할 거라고 여겼을 거다. 내가 그런 사람이라서 잘 안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멈춰야 한다. 낡기 전에 사라져야 한다. 완결된 이야기에 뭔가를 더 붙이는 건 억지로 늘려놓은 대하소설이나 다름없으니까. p203


  거짓말을 좋아하는 하석이 거짓말의 많은 부분은 자신에 대한 것이다. 타인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위한 거짓말이기에 하석이 소통할 수 있는 이는 없다. 그러나 하석이 유일하게 거짓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진실을 이야기함으로써 만나는 이는 PC통신 속 ‘프로작’일 뿐이다. 전제를 깔고 있어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사실은 제 엄마인 언니를 하석은 그리워하는 것이었다면, 하석이 자신의 출생에 대해 관심과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분위기를 사실은 할아버지, 할머니이지만 부모인 그들이 만들어 준 것이다.

  성장소설의 특징은 항상, 모범생이라 불리는 아이들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일이 벌어져야 하니까. 그 애들은 늘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 시기에 가지게 되는 온갖 의문에 대해 참으로 관조적으로 생각하며 또, 그러면서도 행동력이 끝내준다. 그러니까 성장소설 속에서 늘 ‘문제’가 있는 부모가 있고, ‘문제’가 되는 가정환경이 있고 그 ‘문제’를 문제화하는 아이들이 있다. 도식화하면 항상 아이들은 ‘사랑’과 ‘관심’을 필요로 한다는 것과 ‘성적’에 얽매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문제로 규정되는 행동을 하는 이들이 있고 그렇지 않는 이들이 있다.

  소설이 되기 위해선 언제나 ‘문제’가 되는 이들의 이야기가 필요하겠다만, 소설에서 바라보는 하석과 현실에서 바라보는 하석의 괴리가 참으로 크다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현실에선 ‘사건’만 보고 하석의 내면을 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현실에선 그들의 내면 따위야. 그러면서도 성장소설 속 아이들에게 붙이는 관용구 같은 말, “어른보다 더 어른 같다”는 표현이 참 낯설게 느껴진다. 이 무슨 말장난이란 말인가, 하는 생각도 더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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