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성(蟲性)스런 나라


저스티스맨 - 2017년 제13회 세계문학상 대상 수상작,  

도선우, 나무옆의자, 2017-06-07.


   이마 위 두 개의 탄알 구멍이 난 채로 발견된 피살자. 이야기는 살인 현장과 피살자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연쇄’살인이라는 말이 붙으니 적어도 한건 이상의 살인 사건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과연 끝은 있을까. 몇 명의 살인에 ‘성공’하게 되는가. 살인의 동기는 무엇이고, 살인자는 누구이며, 살인자는 잡히는가. 살인이 일어날수록 범인이 누군가에 대한 궁금증은 증가될 수밖에 없지만, 이 책은 범인이 누구인가보다 왜 그 일이 일어났는가에 집중되는 책이다.

  살인의 동기는 범인의 입을 통해 드러나지 않는다. 피살자가 사망한 이유는 범인이 드러났을 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터넷이 발달된 이후로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그에 관해 자료를 찾고 분석하고 추측하는 일들은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닉네임 저스티스맨의 추리가 가장 설득력을 얻으며 폭발적 인기를 얻는다. 저스티스맨의 까페는 가입자수 증가와 함께 저스티스맨의 추종자들로 넘쳐난다. 사건이 이어지는 동안 전혀 용의자를 특정치 못하는 경찰들로 인해 저스티스맨의 인기는 더욱 높아가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저스티스맨이 바로 범인이 아닌가라는 의심 또한 얻게 된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 사건이 벌어지고 저스티스맨이 살인 사건의 벌어지게 된 ‘이면’의 사건들을 추리하면 네티즌들이 그에 대해 설전을 벌이는 패턴이 반복된다. 연쇄살인의 동기는 대체로 누군가를 ‘마녀사냥’ 당하게 한 가해자라는 특징을 보인다. 술 취해 노상에서 구토와 배면을 한 직장인의 사진을 인터넷에 올린 이, 성폭력 동영상을 유포한 이,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린 이 등등. 사건들은 독립적인 듯 하면서 맞물려 흘러간다. 연쇄살인의 피해자가 인터넷 폭력의 가해자로 추정하는 만큼, 사람들은 왜 인터넷상에서 이토록 폭력적인 언행을 일삼고 무책임하게 타인의 신상을 게시하는가에 대한 저스티스맨의 분석 또한 유의미하다. 소설은 연쇄살인의 범인을 찾는 것보다 인터넷상에서 벌어지는 이 무분별한 폭력, 마녀사냥이 되어 가는 인터넷 게시글의 세계를 더욱 조명하고 싶어하는 듯 보인다. 


사람들은 가끔 자신이 살아온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삶을 혐오하며 자괴감을 느낄 때가 있는데, 그러한 자의식 과잉이 뒤틀린 욕망으로 발현되는 순간이 바로 부당함으로 피해를 본 타인의 삶을 목격했을 때라고 저스티스맨은 주장했다.

그것은 피해자일 것으로 추정되는 타자의 처지에 밑도 끝도 없이 분개하여 정의감처럼 느껴지는 감정을 불사르고, 그 감정의 정체를 미처 분간하기도 전에 일방적인 옹호를 칼날처럼 내세우며, 가해자의 원인일 것으로 추축되는 대상을 무차별적으로 질타함으로써 자신의 자괴감을 희석하려는 자구책의 전형일 따름이라고, 비열함의 또 다른 얼굴일 뿐이라고 그는 모질게 평가했다.


  그렇기에 저스티스맨은 최근 순식간에 인터넷 세상을 뒤흔든 ‘204번 버스’ 또는 ‘맘충’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특히 첫 번째 연쇄살인의 피해자가 이른바 ‘오물충’ 사건을 일으킨 자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오물충의 만행’이라는 게시물로부터 촉발되어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를 달구고 언론에 나오고 신상이 공개되어 직장을 잃고 가족들에게도 외면당한 ‘오물충’. ‘204번 버스 또는 맘충’은 또 어떤가. 버스기사가 아이만 내렸다며 울부짖는 엄마를 무시하고 내려주지 않고 내달렸다는 게시물 하나로 촉발된 204번 버스기사에서 맘충 사건으로 번져버린 사건. 며칠째 난리부르스였던 이 사건은 마치 누군가에게 화를 전가하는 형태로 이어져 처음엔 버스기사를 향한 날선 분노에서 다음에는 아이 엄마에게로 그 다음에는 허위·과장된 글을 게시한 목격자에게로 옮겨갔다. 순식간에 폭발적으로 벌어진 이 사건 후에 기억되는 것이라곤 냄비처럼 끓어오르는 사람들의 ‘화’를 쏟을 대상을 찾아가는 모습과 어디든 ‘충충’거리는 글들이었다. “피해자일 것으로 추정되는 타자의 처지에 밑도 끝도 없이 분개하여 정의감처럼 느껴지는 감정”이라는 저스티스맨의 분석이 적확하게 느껴진다.

  인터넷을 하지 않는다면 이런 것들도 모를 테지만 현대 사회에서 인터넷을 보지 않고서 무언가를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어떤 형태로든 인터넷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접하게 된다. 어느 순간부터 인터넷상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은 모르는 말들이 더 많아졌고 아무리 뜻을 유추하려 해도 알 수 없는 단어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온갖 비하와 조롱의 언어, 충(蟲).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한 설명조사에 따르면 가장 불쾌한 신조어로 ○○충을 꼽았다. 가장 싫어하면서도 가장 빈번하고 가장 널리 쓰이는 이 단어. 왜 우리는 이토록 인간들에게, 인간들의 행동 하나에 혐오와 멸시 가득한 말들을 붙이고 있는 걸까. 아름답고 살기좋은 나라에서 살고자 하는 희망을 좀먹으며 이 나라는, 참으로 충성(蟲性)스러운 나라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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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호를 보았다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 공지영, 해냄, 2017-04-03.


  작가가 13년 만에 펴내는 단편소설 모음집이라고 하는데 수록된 다섯편의 글을 보면서 소설과 수필 사이에서 갸우뚱했다. 마지막 수록된 「맨발로 글목을 돌다」는 2011년도 이상문학상 수상작일 때 읽었던 것이라 단편소설상을 받은 만큼, 소설로 생각하지만 사실 그때도 수필 느낌을 더 받았다.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외에는 대체로 수필로 느껴졌는데 그건 특히 작가 자신의 이야기라 여겨지는 내용과 작가의 등장 때문일 듯하다. 장르가 글을 읽는데 어떤 영향이 있느냐 할지 모르겠지만 꼬집어 말할 순 없어도 읽을 때의 느낌이나 방법에서 나름 차이가 있다고 여겨진다. 상상의 면에서도 다르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글은 상당히 속도감 있게 읽혔다. 수록된 단편이 적은 분량이긴 했지만 산문집을 보는 듯한 편집의 영향도 있었다.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의 출간 소식을 들었을 땐 고령화시대의 노인들의 연륜을 긍정적으로 이야기하거나 탄핵 사건을 계기로 노인세대에 대한 비판의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작가의 성향을 보건대 후자쪽으로 더 기울었다. 막상 읽어보니, 이 장르를 뭐라고 해야 할까.

 

할머니는 현대 과학을 다 동원해 의사가 예측한 대로 일 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 돌아가시지 않았던 것이다. 할머니는 숯덩이 같은 빛깔의 얼굴로 숨을 몰아쉴 뿐이었다. 할머니의 숨소리는 정신 나간 거위가 꽥꽥거리는 것처럼 커서 가끔 할머니의 용태를 확인하러 집에 들르던 친척들은 할머니 방에 얼씬하지 않고도 거실에서 느긋하게 햄과 치즈 그리고 연어 따위를 안주삼아 위스키를 마시면서 골프 이야기를 했다. 할머니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라곤 아마 “저 양반 참 오래 버티시네…… 당신을 위해서라도 이제 고만 가셔야지.”라고 모든 것이 할머니를 위한 생각이라는 듯, 스스로를 매우 선량하게 여기는 얼굴로 말했던 것뿐이었다.


  가진 것은 돈밖에 없는 할머니의 죽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어쩌면 기다리고 있을 때 할머니는 당신 자신의 자식을, 며느리의 죽음을 겪고 생생하게 살아난다. 이후에도 할머니의 마지막 순간이 왔다고 기다리면 어김없이 다음날 할머니는 생생한 모습으로 살아났고 그 대신 다른 생물들이 어김없이 죽었다. 생생한 몸을 일으키며 미음을, 밥을, 갈비를 뜯어먹는 할머니에게 ‘나’는 경악하지만 ‘나’가 목격한 것은 할머니의 죽음의 순간 강렬하게 내뿜는 할머니의 기운이었다. 그리고 ‘나’는 자신을 옭아매려던 기운에 소리쳐 반항하며 빠져나왔다. 여전히 할머니는 죽을 때가 되었다가 다른 생명의 죽음과 함께 생생히 살아나 밥을, 갈비를 먹고 있다.

  오래도록 병을 앓은 채 이제 죽음이란 문턱에 있던 노쇠한 할머니가 어느날 갑자기 생생해지는 모습은, 그 사이에 ‘다른 것이 (대신) 죽었다’가 삽입된 상황을 맞닥뜨리며 할머니에게서 구미호를 겹쳐보이게 한다. 매일밤 가축들을 잡아먹으며 아침이면 인간의 얼굴을 들이밀었을 구미호. 인간이든 동물이든 다른 것을 죽여 일상을 살아가는 에너지를 얻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도록 당연한 것으로 용인되었고 생명의 본질로 여겨졌다. 용인된 것과 용인되지 않은 것의 차이, 어떤 것이든 이 문명화된 사회에서 항상 문제는 그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쑥 든다.

  오래전 구미호를 보며, 읽으며 구미호에게 연민을 느꼈던가. 인간이 되고자 하나 하루를 착각해 결국 인간이 되지 못한 구미호에게 안타까움을 느꼈던가. 기껏해야 사람을 잡아먹는 여우가 인간이 되고자 하는 발버둥을 가소롭게 여겼던가. 여우가 인간이 됨을 타당하지 않다 여겼던가. 글쎄, 확실히 어린 날엔 전설의 고향 속 구미호가 무서워보기인 했을 지라도 결국 눈물 흘리며 바라는 바를 이루지 못한 구미호에게 마냥 안타까워했다. 지금은, 어떤가.


내가 아는 것은 그 힘이 분명 할머니에게서 왔다는 것뿐이었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그 힘은, 그렇게까지 목숨 바쳐 자신만 생각하는 사람에게서, 가여운 사람을 가엾게 여기지 못하는 사람에게서, 가난해서 마음을 굽혔던 것도 사람의 영혼을 상하게 하는 일이지만 힘으로 남의 것을 빼앗는 일도 사실은 자신의 영혼을 상하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에게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꼭 남을 해칠 필요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것을 믿지 않는 그런 사람에게서 나오는 힘이라는 것을……

  

  할머니가 죽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죽지 않는가, 죽지 못하는가를 생각할 때 무의식중에 쏟아 나오는 기운을 보건대는 분명 죽지 않는 것이다. 그 기운이 여전한 탐욕과 욕망이라 말한다면 자신보다 약한 생명들을 죽임으로써 살아나는 할머니의 생에 대한 욕구는 타당하지 않은 듯 보인다.

  그러다가 할머니가 강자인가라는 질문을 했다. 할머니 대신 죽은 생물들은 약자라는 이 프레임은 어디서 기인하는가. 고양이가, 진돗개가, 까치가 그렇다고 치다. 할머니의 아들이, 며느리가 약자인가? 대체로 우리는 노인들을 사회적 약자로 간주한다. 그래, 분명 할머니는 사회적 약자다. 더구나 할머니는 병들었다. 이보다 더 약자인 경우가 어디 있는가. 그런데도 왜 할머니를 약자라 하지 않는가. 오로지 할머니가 가진 게 ‘돈’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돈’만 가지면 그저 세상의 강자로 바라보는구나. 이 서글프고 씁쓸한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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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개와 늑대의 시간, 김경욱, 문학과지성사, 2016-04-15.


  아주 오래 전에 이 ‘사건’을 접했다. 파리 한 마리에서 시작된 이야기의 결말이 끔찍스러워 잠자는 이를 깨우는 것에 조심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개와 늑대의 시간은 프랑스 사람들이 해질녘을 표현하는 말이다. 해가 지고 점점 어두워지는 시간, 멀리서 보이는 짐승이 내가 기르는 개인지 나를 해치려는 늑대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는다는 데서 유래된 말이라는데, 참 탁월한 표현이다 싶었다. 우리나라엔 아마도 드라마 제목으로 유명해진, 그래서 더 널리 알려진 말로 안다. 이 멋진 표현에 끔찍한 우순경 사건이 겹쳐진다니 안타깝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다시 생각해도 이 사건과는 안 어울리는 말이다. 개와 늑대의 시간에선 서정과 불안의 기분이 얹어지는데 우순경 사건에서와 같은 공포는 덜 느껴지니까. 선과 악이라는 프레임을 얹으려 해도 쓸데없이 꺼려지는 느낌은 악이라는 단어조차도 부족해 보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둠이 깊어져 불빛이 하나둘 꺼지고서야 나는 그 기이한 감정이 실은 서글픔이었음을 깨달았다. 불빛은 너무나 취약했다. 들에 핀 꽃처럼 무심한 한 줄기 바람에도 목이 꺾일 수 있었다. 어쩌면 불가해한 어떤 악의(惡意)에 의해서도. 30여 년 전 ‘남한’의 벽촌에서 하룻밤새 동네 사람 쉰여섯을 총으로 쏴 죽인 순경은 불 켜진 집만 노렸다고 했다. 빛이 어둠을 불러들인 셈이다. 그래서였을까. 새까만 지평선에서 외로이 빛나는 불빛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면 장전된 총을 들고 빛을 찾아가는 하나의 그림자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빛과 그림자 사이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그림자의 실체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나는 두려움 속에 자문하기 시작했다. 이 소설의 윤곽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p330


 작가의 말을 통해 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를 알게 되는데 이것을 보면 왜 제목을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 했는지 알듯하다. 「동화처럼」을 읽은 후에 「개와 늑대의 시간」을 읽은 터라 「동화처럼」의 동화같은 연애 이야기와 실화 사건 이야기의 간극이 더 크게 느껴졌다. 한 사람이 하룻밤새 55명을 총기로 난사하는 이 이야기는 그날의 기록이다. 한마을을 휩쓸고 간 총성이 울리기 전부터의 마을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고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는지를 사실과 상상을 더해 작가가 재창조하고 있다.

  1982년 4월 26일의 사건 속에서 술만 마시면 난폭해지는 성격이자 평소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던 우순경이 있다. 총기난사 사건이 될 수밖에 없었던 건 범인이 총기를 소지할 수 있었던 경찰이었다는 것이다. 낮잠을 자던 우수경의 가슴에 붙은 파리를 잡겠다고 동거녀가 가슴을 때린 것에서 싸움이 시작되고 이후 무기고를 탈취해 시간 간격을 두어 인근 4개 마을 사람들에게 총과 수류탄을 난사해 사망 56명, 부상 34명을 기록한 것이 이날의 공식적인 사건의 전모다. 우순경은 우체국으로 가 전화교환원부터 살해해 외부와 완전히 통신을 차단하게 하고 전깃불이 켜진 집을 찾아다니며 난사했는데, 당시 마을은 집장촌으로 대부분 서로가 친척 관계였다. 우순경 역시 마찬가지였다.  

  작가는 기사로는 알 수 없던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설에 담고 있다. 일상의 삶에 들이닥친 우순경이라는 실루엣에 그날그날의 충실한 하루를 살던 사람들의 생애가 어떻게 소멸되었는지를 세밀하게 보여주어 안타까움을 더한다. 이야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비극의 난사가 더 가속화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사회에 자리잡은 관료주의와 권위주의가 따라온다. 살인사건이 발생했음에도 보고 체계를 가지고 따지는가 하면 나 혼자만이 살겠다고 숨어 버리는 책임자들, 반공 이데올로기가 꽉 붙들어 비극을 향해 달려간다. 항상 끔찍한 사건의 뒷배경으로 자리하는 이 모든 구조는 개개인의 삶에서 필요한 순간마다 얼마나 쉽게 내쳐버리는지를 보여준다.

  사건이 발생한 1982년은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2년 후, 당시의 정권은 전두환. 사건 후 민심을 두려워 해 언론 보도 역시 통제했다. 범인 27세의 청년 우순경은 청와대 근무 이력이 있는 자로 청와대에서 좌천되어 의령으로 발령받았다. 이런 좌천에도 우순경의 열등감과 불만이 쌓여 있었는데 이러한 사건이 좌천되기 전에 벌어졌다면 하고 생각하는 나를 발견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게 끔찍하다는 것을 알지만 ‘차라리’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여러 가지로 늑대의 시간을 만든 것, 늑대를 활개치게 한 것이 전두환이라는 이름이 만들어낸 그 모든 탐욕과 구조의 한 요소였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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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나무


동화처럼, 김경욱 저, 민음사, 2010.


  어른의 마음속엔 늘 내면아이가 있다. 「동화처럼」에서 거듭되는 생각은 이것이었다. 누구에게나 인생을 이끌어가는 내면아이의 활약에 따라 삶을 바라보는 자세와 문제에 직면했을 때의 대처방식이 달라진다. 「동화처럼」은 연애담처럼 성장담처럼 이야기되지만 한편으론 지극한 현실같고 또한편으로는 정말 동화같다. 아무리 연애와 결혼이 우연과 필연의 반복이라 하지만 한여자와 한남자가 만나 헤어짐과 만남을 반복하고 두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이혼을 하고, 어쩌면 세 번의 결혼을 하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란 현실적이기보다는 동화같지 않은가. 아, 여기서 두 번의 결혼과 이혼은 각자가 아니라 서로다. 한 사람과 두 번 결혼과 이혼 후 또다시 결혼할 것 같은 관계. 이십대에 시작한 만남은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이어진다. 우연과 오해가 만들어낸 필연이란 환상이 실망으로 이어지는 반복을 맞으며 말이다. 

  여기, 장미와 명제의 결혼과 이혼에 관한 기인 시간의 동화가 시작된다. 동화작가인 장미의 동화는 여러 이야기가 섞인 동화를 만들어낸다. 눈물공주와 개구리가 된 침묵왕자의 이야기는 현실에서 장미와 명제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결혼한 여자는 늘 눈물을 흘리고 결혼한 남자는 늘 입을 다물고 산다. 이것이 단지 그들의 관계에서만 형성된 그들의 ‘특징’이라면 이것을 풀어나가는 것도 그들 서로의 이해가 필요하다. 하지만 인간의 성장에선 무의식이라는 것이, 영향이라는 것이 있어 이들이 동화속 마녀의 주술로 인해 겪은 끝없는 눈물과 침묵은 그들의 가정환경에서, 부모에게서 영향받는 것이다.


침묵에 길들어진 명제는 말을 믿지 않는다. 누군가 그랬다. 인간이 말을 만든 것은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감추기 위해서라고. 그 말만큼은 그럴듯했다. 명제는 눈물도 믿지 않았다. 눈물은 가증스럽고 요망한 것이었다. 진실이 아니라 감정을 강요하니까. p195


  계모라는 생각을 계속 하게 하는 장미의 엄마나 엄마 없이 자란 아이에게 무뚝뚝하고 말 수 없는 명제의 아버지는 성장한 장미와 명제의 무의식 속에 자리잡은 원형이다. 장미와 명제가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하는 동안 그들은 그저, 그들이 서로에게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거나 뭔가 어긋남이 있다고만 생각할 뿐이다. 그리고 사람에게 너무나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은 아련한 ‘첫사랑’이 서로가 아니라는 데서 오는 실망감, 다시 만나게 된 첫사랑에 대한 기대와 설렘, 이 모든 상황은 상대에 대한 단점만이 눈에 띄게 만들고 또한 그래서 상대방을 참을 수 없어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결과는 당연, ‘우린 서로 맞지 않아, 안녕’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동화의 해피엔딩은 늘 결혼에서 끝맺는다고, 그 이후의 삶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진정한 해피엔딩일지 알 수 없다는 말 역시 농담처럼 이어져 왔다. 그들은 결혼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실제 결혼 후의 현실이 얼마나 ‘동화’와는 다른지를 알게 된 후 겪는 좌절과 분노 또한 잔혹 동화처럼 이어져 왔다. 왜, 연애와 결혼은 다른지, 결혼을 하고 나면 그토록 사랑하던 이의 모습이 개구리로 변해버리는 지 우리는 알고 있다. 알고 있으면서도 해결해가는 방법이 서툴거나 ‘나’의 모습을 잘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의사는 말했다. 결혼은 두 사람이 모여 사는 게 아니라 네 사람이 모여 사는 거라고. 신랑과 신부, 그리고 각자의 마음 속 아이. 네 개의 다른 별에 살건 사람들이 한 지붕 아래 사는 거라고. p292


  시간이 또 흐르고 세월이 흐른다고 어른이 되었다 말하지만 어른이란 비단 몸의 성숙과 성장만을 말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어른의 몸속에 어른의 생각과 사고를 담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나’라는 존재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성찰에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은. 더구나 감추어진 저 내면의 모습을 끄집어내는 일은 더더욱 쉽지 않다. 그럴 필요가 없어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될지 모른다. 그저, 그렇게 있다가 힘겨워지고 나도 모르게 답답해지고 무언가를 참을 수 없어 하는 나를 맞닥뜨릴 때. 장미처럼 자신도 모르게 자꾸 개구리 냄새를 맡게 될 때에야 ‘나’를 들여다보게 된다.


누군가 그랬다. 아이들은 동화를 읽지 않아도 용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고. 아이들이 동화를 읽고 알게 되는 것은 용의 존재가 아니라 용도 죽는다는 사실이라고. 엄마를 계모로 의심한 게 동화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동화 속 악독한 계모가 원전에서는 친모였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았으니까. 아이들은 동화를 읽지 않아도 안다. 모든 계모가 친절하지 않다는 것을. 정작 아이들이 동화를 읽고 알게 되는 것은 친모도 계모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이다. p330~331


  눈물공주와 침묵왕자의 마법은 풀린 것일까. 제 안의 용을 무찔렀다면 마법은 풀린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나의 정체성을 찾게 되면 나를 이해하고 그 바탕으로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는 한걸음으로 나아가게 된다. 장미는, 깨닫는다. 누가 마법을 걸었는지도 마녀가 누구인지도 알아버린다. 장미와 명제가 깨닫는 시간은 짧지 않다. 정말로 한 세월이 흘러가버릴 정도로 길다. 한사람이 성장한다는 것은 자신을 이해하는 일은 타인을 이해하는 일보다 어렵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제 속에 웅크려 숨어 있는 내면의 아이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라도 만날 수 있다면 그래서 그또한 행복한 동화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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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의 폭력


2017 제8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임현·최은미·김금희·백수린·최은영·강화길·천희란, 

문학동네, 2017-04-07.


   책을 덮고 나니 강렬하게 인상을 남긴 작품은 생각나지 않았다. 올해의 젊은작가상 작품집에서는 전체적으로 비슷한 느낌과 인상을 받았다. 그럼에도 특정 몇몇의 이미지가 떠올랐는데 「고두」에서의 교무실에서 무릎 꿇는 연주의 모습, 「눈으로 만든 사람」의 녹아버린 눈사람, 「그 여름」 수이의 뒷모습, 「호수-다른 사람」의 호수를 어슬렁이는 불안과 공포의 기운이었다. 또한 이번 작품집에선 동성애를 다룬 작품이 두드러져 보이는 것도 특징이 아닐까 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이경은 수이의 그 말이 단순한 오해에서 비롯한 것만은 아니었으리라고 짐작했다. 수이는 이미 그때 이 연애의 끝을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무너지기 직전의 연애, 겉으로는 누구의 것보다도 견고해 보이던 그 작은 성이 이제 곧 산산조각날 것이라는 예감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랬기에 최선을 다해서 마지막을 준비했는지도 모른다.  - 최은영, 「그 여름」


  「그 여름」이 말하는 수이와 이경의 이야기는 이성애에 기준하여 ‘반대’이자 ‘특수한’, ‘비정상’인 동성애라는 ‘다름’을, 인간의 보편적인 만남과 헤어짐의 사랑 이야기로 만들어내고 있다. 수이와 이경이라는 이름을 바꾼다면 하릴없는, 반복된 연인들의 이야기다. 연인들 자신들에게야 아름답고 슬프고 애잔한 사랑의 기억일지 모르겠으나 누군가에겐 다 그렇고 그런 이야기가 어쩌면 사랑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 사랑이야기가 단지 이름만으로 어떤 이미지를 가지게 하는지, 그렇고 그런 사랑이야기라는 보편성을 획득하면서 특별하게 기억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러니까, 이성애의 시선으로 ‘동성애’를 바라보자면 마냥 다를 것 같은 그들의 연애는 전혀 다르지 않은 이야기이다. 특별할리 없는 보편 인간의 감정을 내세우고 있다. 끊임없이 동성애, 성소수자에 대한 반감과 혐오의 언어를 구사하는 이가 있다면 이토록 다르지 않은 인간의 감정에 구분과 차별을 말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느냐는 말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눈으로 만든 사람」은 매우 산뜻하고 아름다운 동화의 세상이 펼쳐질 줄 알았다. 시작은 그러했으나 역시 세상은 잔혹 동화와 어울리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마냥 서글펐다. 일상을 잘 흘러가듯 살아가는 듯 보이지만 오랜 시간 동안 홀로 견디며, 강박적이도록 자신을 다그칠 수밖에 없었던 강윤희의 지난날의 기억. 잔혹동화의 현장을 보는 듯했다. 이 세상엔 수많은 강윤희가 있을 거라는 생각과 그만큼의 강중식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교차되었다.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잘 살아가는 이 세상의 강중식은,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사건을 맞닥뜨려야만 제 잘못에 대한 반성과 후회를, 어쩌면 사과같지 않은 사과를 건넨다. 그들이 행하는 사과는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르겠다. 제 불행을 비껴달란 하소연으로 보이는 그런 것.

  가만 생각하니 이번 작품집은 전체적으로 세상 속 폭력을 견디어 내는 ‘여성’의 삶의 모습을 많이 보게 되는 듯하다. 가족에게든 학교에서든 연인에게든 낯선 존재이기도 가장 가까운 존재이기도 한 이들로부터 가해지는 폭력들. 세상은 「고두」의 선생이 반복적으로 주장하는 대로 인간은 충분히 이기적이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파노라마 같다. 누가 누가 가장 이기적인가를 실현하며 한없이 폭력적이고 적당히 비윤리적인 세상에서 그런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노라 끝없는 항변을 듣고 있는 것만 같다. 산다는 건, 어쩜 이리도 비릿한 건지.


얘야, 내 말 좀 들어보렴. 인간들이란 게 말이다, 원래 다들 이기적이거든. 태생적으로 그래. 처음부터 그렇게 생겨먹은 거란다. 그게 나라고 뭐 달랐겠니.  - 임현, 「고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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