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의 시간


여름을 지나가다, 조해진, 문예중앙, 2015.


  덥다. 달력은 지금을 봄이라 말하고 날씨는 여름이라 말한다. 소나기가 그리워진다. 쩍쩍 갈라진 논을 보면서 여름 속에 들어섰음을 실감한다. 어느덧 여름하면 무더위가 더 생각나는 걸 보면 나잇살이 주는 땀의 무게가 너무 힘들었나 보다. 지난 여름은 너무, 너무 지친 여름이었다. 그래도 겨울엔 봄을, 여름을 기다렸으니 또한번 지나갈 여름을 맞이하는 마음은 아직은 덤덤하다.

  그래, 지나갈 여름이다. 어떠한 삶의 경험이든 여름을 견뎌내는 이들의 감정은 격랑이다. 그리고 그 여름을 지나면 격랑의 자욱들이 또렷이 보일 것이다. 여기 조해진의 <여름을 지나가다>는 그 여름 청춘들에게 남은 자욱들을 보여준다. 민과 수의 교차적 시점으로 서술되는 6, 7, 8월의 이야기가 그들이 함께 마주치는 여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파산으로부터 머물 곳을 찾지 못한 민과 수의 이야기다. 민은 감정의, 수는 재산의 파산으로 인해 여름을 넘기기가 힘들어 여름을 넘길 공간을 찾는다. 그들 마음의 위안을 얻을 장소를 발견했다고 느낀 순간, 그 순간은 여름의 절정이었을까. 여름의 끝이었을까.

  민과 수가 마주친 공간의 주인은 누구라고 해야 할까. 급매로 내놓은 버려진 가구점. 그래서 현재 아무도 머물고 있지 않은 집. 그곳을 민과 수가 찾는다. 그리고 연주, 종우. 여름을 쳐다보는 그들의 얼굴들이 하나같이 닮았다. 민이 가구점 그 공간에서 들여다보는 거울 속의 모습처럼 말이다. 흐릿한.


  민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게 의심될 때마다 이곳으로 거울을 보러 왔다.

  흐릿한 거울 속에서 흐릿한 자신이 흐릿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 흐릿한 생애가 상상됐다. 가령 일정 기간 살다가 미련 없이 죽고 그 죽음에서 빠져나온 뒤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얼굴로 다시 태어나는, 그러니까 일생이란 개념으로는 규정될 수 없는 태어남과 죽음의 끊임없는 반복. 그런 식의 삶은 기차 같은 거라고 민은 생각했다. 수많은 칸들이 연결된 기차처럼 각기 다른 생애들이 길게 이어져 전체 삶을 완성하는 것이다. 어제의 눈물을 기억하지 않고 내일의 포부 따위 갖지 않는.


  불안정한 터전을 삶의 피난처로 삼으며 하루를 버틸만큼, 그들의 삶엔 어떠한 아픔이 가득한 걸까. 부동산중개소에서 일하며 가구점을 드나드는 민에겐 파혼의 아픔이 있다. 그리고 종우와의 파혼의 이유가 되는 노동자의 사망이 있다. 거기에서 민은 마냥 자유로울 수 없다. 아버지의 빚을 떠안으며 신용불량자인 채로 타인의 신분증으로 살고 있는 수. 곧 철거될 옥상 놀이공원에서 열심히, 아주 열심히 일하고 있는 연주. 그들 삶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삶의 힘겨움과 아픔이다.

  그들이 아픔을 이겨내는 방법은, 여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아니, 이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게도 보이지만 그냥 제 아픔속에 매몰되어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같다. 수동적으로 여름을 피하고 있는 것은 아닌듯 보이는 그들의 여름.

  “한 발만 잘못 디디면 계획에도 없던 다른 종류의 삶으로 빨려 들어가는 허약한 지점들이 우리의 인생에는 생각보다 많이 숨겨져 있다는 것(p50)”을 알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서로에게 발을 뻗어본다. 타인,인 그들을 미워하지 않고 위로하며 또한 위로 받으며 그렇게 발을 뻗는다. 민이 말하듯 발을 헛딛는 것쯤이야 두려울 게 무엇있으랴. 더는, 발을 뻗는 곳에 디딜 곳이 없는 것에 개의치 않을 것이다. 다만 발을 뻗지 않고 계속 그 상태로 머무는 것이 더욱 힘든 일이라는 것을 그 여름에 느끼기에, 지금 그 관성을 벗어날 수 있을까. 지금 머문 기차 한칸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들이 발을 뻗을 수 있는 것은 그렇게 아픔을 가진 또다른 존재를 확인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들이 뻗는 발을 그대로 받아줄 아픔을 서로 나누는 존재. 피난의 공간을 함께 한 그들의 존재. 결국 아픔은 사람에서 시작되고 사람으로부터 치유받는 모양이다. 민이 수를 돌보는 것이 진짜 삶인 듯, 더 이상 부끄럽지 않게 여기는 것처럼. 그 더운 여름을 지나가기 위해서는 서로가 필요했던 존재들. 또한 타인에 대한 끝없는 애도. 그 여름은 그런 애도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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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방한 망상


망상,어語, 김솔, 문학동네, 2017.


  망상,어(語)를 보고 읽음에도 머릿속에서는 자동으로 망상어(魚)로 전환하고 있다. 망상하는 물고기가 있을 리 없음에도 망상되는 망상이란 물고기. 망상어라는 제목에서 뜻보다 소리에 더 재빠르게 반응한 셈이다. 더구나 이 망상어라 불리는, 아니 생각한 물고기는 글을 읽는 내내 자유자재로 글 속을 뛰놀고 있었다. 망상이란 단어속 그 허황됨을 품고 있음에도 이 글에서 현실이 걷어 올려지는 건 망상이 너무나 잘 뛰노는 탓으로 봐야 하나. 아니, 그보다 작가가 뉴스에서 소재를 건져 올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잘, 접해보기 힘든 사건들이긴 하나 엄연히 존재했던 사건으로서의 뉴스들을.

  여러 이야기가 짧게 끊어 묶어 엮어져 있다. 36편의 이야기는 서사가 있긴 하지만 짧은 글짓기같은 이야기다. 그래도 세상에, 이런 일도라며 진짠가 가짠가 하며 넘길 이야기들이 하나, 둘도 아니고 수두룩한 걸 보면 세상은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고 그만큼의 기이한 일도 다반사인 곳이다.

  익숙한듯 익숙하기 힘든 이야기들의 출처는 있었던 일이고 작가의 상상력과 더해져 뻗어 나가는데 신문기사로 몇단락 남은 이야기들의 이면이 작가가 그려낸 듯한 모습 그대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그런만큼 이 이야기들의 길이는 작가가 만들어놓은 분량만큼, 딱 그만큼이 좋아 보인다. 더 길면 주절주절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니 뉴스라는 실제와 못믿을 뉴스라는 중간 그 어디쯤의 위치인 이 지점이 딱이다. 마치 아주 재밌는 거짓말같은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들려주듯 딱, 그정도로. 맑고 밝은 날 들리는 천둥소리같은 기분도 간간히 느껴지는데 더러 재밌는 문장에 피식 웃음도 나고 만화같은 그림이 더해져 이야기의 재미가 좀 더 망상적으로 흘러간다.

  망상, 망상, 망상. 때론 망상은 유머의 끝에 도달하고 때론 경악의 끝을 향해 달려간다. 망상을 달고 다니는 물고기가 가지 못할 곳은 없어 보인다. 당연하다. 육지라고 가지 못할 이유는 없다. 다만, 일찍 숨이 끊어지겠지, 뭐. 내친 김에 하늘로…? 뭐, 누군가 집어 던지면 하늘로 올라갈 수도 있는 거지, 다시 내려오겠지만.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수용하는 순간부터 비로소 삶을 시작할 수 있다. 유한하고 하찮은 존재라는 사실이 삶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죽음의 권위를 무력화하고 그것을 대체할 대상을 찾아 헤매는 게 인생이다. 삶의 의지는 탄생으로부터 시작된 파동 에너지가 아니라 죽음으로부터 건너오는 암흑 에너지이다. 에너지의 속도나 방향이 변할 때 사건이 일어난다. 그게 사랑이다. 그렇게 하찮기 때문에 인간에겐 너무 중요하다. 인간의 일생이 하찮지 않다면 우주는 그들을 모두 껴안고 있을 수 없을 것이고 결국 예정보다 서둘러서 자살하고 말 테니까. p171, 연꽃


  어쩌면 망상어의 세계는 작가가 누릴 수 있는 행복일 수 있겠다. 어떤 일들은 상상속에선 벌어져도 무방하니까. 뉴스일 때의 그 황망하기 그지없는 마음을 달래는데도 약간의 망상은 필요하기도 하다. 희망의 뉴스도 불운의 뉴스도 끔찍한 뉴스도 뉴스에서 전하는 삶의 희로애락을 더 잘 느끼려면 말이다. 또한 뉴스에서 알게 된 현실이, 벌어진 사건의 참담함이 가져다주는 마음의 상처를 아물게 하기 위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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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계속되어야 한다


이유, 커트, 문학과지성사, 2017.



  자른 머리카락처럼 떨어진 머리통을 보면서도 놀라지 않는다. 이런 이미지에 무덤덤해지는 나이. 아니, 감성. 세월은 감정을 더욱 깊게 하지만 웬만해선 감정의 노출에, 표출에는 민감해지지 않는다. 불행하게도 불행한 시대를 거쳐 오며 표정이 굳어진 채인 지도 모르겠다.  웃지 않는 묘기 대행진 마냥 웃을 거리가 없던 시대의 게임. 오래도록 이 게임의 승자가 되어 승자의 얼굴을 하고 세상을 배회하던 얼굴들인지라 그 얼굴들이 떨어져 나간 것에 무어 그리 놀라겠는가.


 나는 손을 뻗었다. 딸아이가 뭘 또 잘라놓을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

다. 날카롭게 벼려진 가윗날이 허공을 가로지르며 유연하게 휘면서 다가왔다. 매서운 바람 소리와 함께 가건물이 붕 떠올랐다. 가윗날에서 뿜어지는 빛이 눈앞에서 부서졌다. 잘린 머리통 하나가 바닥을 굴렀다. 다름 아닌 내 머리통이었다.

 “엄마 아파?”

 아이가 태연스레 물었다.

 “목이 잘렸는데 안 아프겠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온갖 잡냄새로 시달리던 머리통이 몸에서 분리되자 막혔던 숨이 트였다. 그렇다고 딸아이로 인해 치밀었던 화가 누그러지는 건 아니었다. p221~222, <커트>


  조금은 아플지라도 머리통을 분리할 수 있다면, 일단 굳어진 얼굴의 머리통을 단번에 날려버리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역시나 막혔던 숨통이 트일 수 있을까.

  이 단편집은 곳곳에 멀쩡한 길을 걷다 갑자기 튀어나온 씽크홀을 맞닥뜨리게 한다. 잃어버린 기억처럼, 이제 막 잠에서 깬듯한 몽롱함 속으로 들이민다. 현실인듯하다 갑자기 환타지가 펼쳐져 몸을 어디 두어야 할지 모를 세계. 의식은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어디로 몸을 이끌지를 가늠하는 것만 같다.

  앞으로 더욱 전진하게끔 하는 힘이 꿈꾸는 것이라면, 꿈의 실패는 다시 꿈꾸는 것을 주저하게 한다. 그렇기에 다시 꿈꾸기까지는 현실이 아니라 환타지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야기속 비현실적인 요소는 실패한 꿈꾸기로 멈춤이 아니라 다시 꿈꾸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로 작동하는 것이 아닐까. 반복적으로 꿈꾸고 실패하고 다시 꿈꾸는 이들의 이야기가 동병상련의 느낌을 들게 하는 것도. 그래서 환타지마저도 현실의 느낌이 들게 한다.

  꿈꾸기는 커다란 한덩이를 상상해 내는 것이라 그 한덩이를 이루는 작은 요소들은 꿈꾸는 당시에는 외면해버린다. 그렇게 닥친 작은 덩어리들이 모여서 큰 한덩어리를 구성함을 알 때, 작은 덩어리들에 일일이 대처하는데는 다른 방법을 써야 하기에 우리는 잊고, 잘라내고, 먼 곳으로 이동하고, 눈을 감아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이것은 내가 진정 꿈꾸던 것이 아니었다고,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꿈꾸는 것 자체로 만족하고 그것을 이뤄가는 것은 생각하지 않기도 한다. 그렇기에 여진처럼 이런 생각을 품게 되는 것일 지도 모른다.


   사람들 꿈이 이루어지는 게 좋은 일이 아닌 것 같다고.

   차갑고 무뚝뚝한 말투였다.

   아니, 어떤 꿈도 이루어지지 않는 게 이 세상에는 더 좋은 일인 것 같아.

   필은 그녀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p135 <꿈꾸지 않겠습니다>


  우리의 꿈꾸기는 세밀하지 않다. 뒤따를 것에 대한 책임도 상황도 모두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또한 그것 역시도 당면한 현실이 가로막은 것 아니었던가. 좀더 긴 미래를 생각하며 차분한 꿈꾸기로 표정있는 얼굴을 할 겨를도 없는 현실로 인해 마냥 도피와 같은 꿈을 꾸던 시대로 인해, 질적이지 못한 꿈들. 우리의 꿈꾸기의 바탕이 다져지지 않았다면 그 꿈의 질은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좋았을 꿈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이제 조금은 안정된 땅이 다져지는 현실 위에 서 있으니 이제 마냥 잘라내던 조금 길게 보는 꿈들을 그려내도 좋지 않을까. 하나의 머리통이 잘라져 이제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잡냄새도 이제 덜 나는 것 같고. 그러니 꿈은,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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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윤이형, 러브 레플리카, 문학동네, 016.


  대한민국 대통령보다 먼저 선출된 프랑스 대통령의 공식 취임식이 있었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기사와 더불어 영부인에 관한 기사도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77년생 최연소 대통령의 24세 연상 53년생 부인이기에 브리짓 트로뉴에 대한 시선은 여느 영부인에게 쏟아지는 관심을 넘어섰다. 마크롱 대통령이 15세일 때부터 서로 알아온 그들의 관계는 2007년 결혼으로 더욱 단단하게 묶여졌다. 마크롱 부인은 최근 조롱과 성차별에 시달리고 있다 한다. 이전의 대통령 역시도 부인과는 20세 이상의 나이차가 있었는데, 그 때엔 별말없던 언론들도 공격에 가세하고 있다. 미국 대통령도 부인과 나이차가 상당하지 않은가. 그런 부인을 둔 트럼프의 능력을 치하하던 이들은, 남편보다 연상이라는 이유로 마크롱 부인을 공격한다. 하나는 부러움과 시기의 대상이 되고 또다른 하나는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되는 이 어처구니없는 여성혐오의 행태가 소멸되는 의식수준은 언제쯤 오려나. 한편, 이런 일이 대한민국에서 벌어졌다 가정하면, 선거과정에서의 무차별적 공격의 소리들은 상상만해도 끔찍하다.

  프랑스 대통령 부부의 얘기가 길어졌다. 「대니」를 보면서 프랑스 대통령 부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마크롱 부인의 자녀들은 마크롱을 “대디”라 부른다니 호칭도 유사하다. 대니는  24세의 안드로이드 베이비시터다. 아기를 돌보고 거기에서 행복을 느끼는, 그렇게 되어 있는 대니는 자신과 같이 아이를 돌보는 예순아홉살의 할머니를 만난다. 이 두 사람의 만남에서 마치 마크롱처럼 대니는 할머니를 향한 끊임없는 구애를 시작한다. 친절과 배려를 가득 담은 채. “아름다워요.”라고 말한 것은 시작이었다.  

  대니에겐 할머니의 손주를 돌보는 일은 “견디어 내는 것”으로 보였다. 슬개골연골연화증으로 늘 통증에 힘들어하는 할머니에게 딸과 사위는 떠맡기듯 제 아이를 보내며 할머니의 힘듦을 외면하고 있었다. 땀흘리며 힘들어 하며 “나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할머니의 외침은보육이 특정한 누군가의 ‘희생’의 몫임을 보여준다. 그런 할머니를 향한 대니의 친절과 연민을 사랑이라 불러도 좋을까. 멈출 수 없는 감정들로 손을 뻗어가는 할머니의 마음 역시도.


나는 수도 없이 대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짐짓 단호한 척, 명령하는 어조를 골랐던 나를 후회하면서. 그때까지 한 번도 부끄러워한 적 없는 내 늙음을 부끄러워하고, 내게는 없다고 믿었던 감정들이 덩굴손처럼 집요하게 마음을 휘감고 뻗어가는 것에 당황했으나 멈출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p45~46


  사십년이 지나도 할머니와 얘기한 것을 기억하길 원하고, 할머니와 함께 살고 싶다 말하는 이 스물 네 살의 안드로이드에게 필요한 것은 할머니의 농담과 진담 섞인 말에서 튀어나온 ‘돈’. 끝을 짐작케 하는 이 자본주의 사회의 단어가 둘 사이에 놓여 둘의 나이차보다, 안드로이드와 사람이라는 차이보다 더 큰 걸림돌이 되어 버렸다. 사십년이 지나서도 지워지지 않을 기억을 갖겠다던 대니는 사라져갔고, 혼자만 안고 있는 사실에 기대어 할머니는 남은 나날을 견디어 간다.


말들은 장식이다. 혹은 허상이다. 기억은 사람을 살게 해주지만 대부분 홀로그램에 가깝다. 대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주어진 끝을 받아들였다. 나는 일흔두 살이고, 그를 사랑했고, 죽였다.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모든 것이 희미하게 사라져가지만 그 사실은 변하지 않고, 나는 여전히 살아 그것을 견딘다. p47


  윤이형 소설집 <러브 레플리카>는 어릴적 “공상과학글짓기”라는 주제로 쓴 글을 읽는 기분이다. 명징한 SF라 하기엔 부족한듯하면서도 딱히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 어색한 이 소설속 세계는 현실과 잘 버무려진 SF 세계다. 세련되고 풍족한 물질의 세계, 자동화 시스템이 펼치는 찬란한 세계가 아니라는 점이 공상과학에서 기대한 바를 충족시키지 못할 뿐이다. 여전히 그 세계는 비루하고 비참하다. 그럼에도, 그래서, 관계맺음은 이어지고 단절되고 기억된다.

 「쿤의 여행」과 「루카」처럼 문학상을 받은 대표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제 몸을 지배하는 쿤을 떼어내고 새롭게 세상을 마주할 힘을 얻은 「쿤의 여행」속의 나처럼 이 소설집 속 인물들은 자신의 그림자같은 힘을 지닌 또다른 존재나 기계를 짊어지고 있거나 마주하고 있다. 「러브 레플리카」의 경 역시도 그러하다 생각된다. 이 소설 속에서 공상과학의 세계가 아닌 현실의 배경 속 인물이지만 경과 거식증 이연의 관계에서도 이 모습이 보인다. 결국 ‘경’은 타인의 경험을 제 것인양 하며 살아가고 있으니 실물을 얹고 사는 것은 아니지만 다를 바 없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등장인물들은 제게 붙은 이 복제품의 실물을 떨쳐내려 한다면, ‘경’만은 실물로서의 복제품이 아닌 타인의 삶을 복제하고 있을 뿐.

  작가가 그리는 이 소설의 세계. SF의 세계. 미지의 세계인 것처럼 보이는 이 세계도 결국은 현실세계의 복제품이다. 잠시 외형이 변했다고 착각했을 뿐이다. 그곳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이토록 같을까 싶을 정도의 현실이 가득 채워져 있다. 그렇기에 감정 역시도 다를 리 없다. 관계들에서 오는 슬프고 아릿한 이 감정의 흔적은, 기억은 그 어느 물적 토대 위에서도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변화는 어떤 사람들의 삶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당신은 백 년 전의 어떤 사람들이 느끼던 것과 정확히 똑같은 두통을 느끼며 통속적인 삶에 매달려간다. 모멸감으로 말하자면 천 년도 더 전부터 이 땅을 흘러다니던 종류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당신이 이 도시를 떠나 자유로워지는 날은 아마도 오지 않을 것이다.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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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버둥

 

누운 배

제21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이혁진 저, 한겨레 출판, 2016.07.14.

 

   배가 누웠다. 일으켜 세워야 한다.

   이 소설은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으로 누운 배를 일으켜 세우는 과정을 담았다. 얼핏 ‘세월호’가 연상된다는 리뷰를 본 것 같았는데, 커다란 배가 기울어졌다는 것 외에 세월호 사건을 연관짓자면 누운 배를 일으키는 과정의 이야기들이 제 이익과 이해에 따라 결정되고 중구난방이라는 점일 것이다.

   단지 급박한 시간에 읽었기 때문이라 생각해봤지만 이 소설은 한겨레수상이라는 기대만큼의 충족을 주진 않았다. 가장 많이 든 생각은 경영혁신 사례집으로 유용하다, 라는 것.

   회사의 이야기다. 직장인이라면 공감갈 직장의 업무처리 과정의 수직관계, 상사와의 관계가 누운 배를 통해 이야기되고 있다. 한마디로 직장생활의 단면을 세밀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공감이 가는 듯도 하지만, 그래서 재미가 덜했다라고 볼 수밖에. 일의 처리 과정에서 겪는 갈등은 너무도 명확하게 보였고 이에 따른 사람들의 반응도 예상 가능한 바라서 소설을 읽는다는 기분이라기보다 어느 회사의 상황을 전해 듣는 것 같았다. 실제 상황이라면 “우리 회사에도 그런 사람 있어.”라는 대꾸가 바로 튀어나갈. 그러니 당연히 어느 회사나 똑같은 인물들이 자리하고 있구나라고 느끼게 되는.

심사위원은 이 소설을 ‘미학’이 아닌 ‘사실’ 소설이라 했지만, 그래서 뭐 어쨌단 말인가. 소설이 사실을 아닌 것으로 바탕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만큼이나 소설은 사실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사실 소설이라는 말 자체가 주는 힘은 압도적이지 않고 오히려 질문을 남긴다. 그래서 수필과 어떻게 다른가, 수기와 어떻게 다른가. 사실을 바탕으로 한 소설은 미학이 배제된 소설이 아니라서, ‘혁신’적이라 말하고픈 건가.

 

임원들이 차례로 일어나 발표를 시작했다. 무엇을 어떻게 혁신하겠다는 것인지 내용은 하나도 없었고 핵심 관리 지표라는 것도 모두 타 회사 자료에서 베꼈는지 회사 실정과 전혀 동떨어져 있었다. 중언부언에 말끝마다 혁신, 혁신, 혁신 모두 그뿐이었다. 말밖에 안 되는 말이 중력 없이 떠돌았고 드러낸 거소다 감춘 것이 더 많은 실적 수치들은 속이 텅 빈 잔망을 쌓아올렸다. 하지만 회장은 아무 불만도,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다. 질문조차 하지 않았다. 수량 넉넉한 호수처럼 관대하게 웃었고, 횡설수설하는 임원들을 지켜보며 이따금 알아듣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는 원만히 이어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p74~75

 

   혁신. 혁신. IMF 이후에 기업은 이 혁신을 부르짖었지만, 혁신이란 개념에 대한 집착은 사랑은 여전히 유효한 듯 보인다. 기업을 나와 개개인에게도 적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 소설 속 회사에 닥친 ‘위기’를 혁신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위의 문구처럼 하나같이 혁신을 외치지만 혁신의 정확한 개념도 성립되지 않은 채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문제를 해결하고 원인을 찾아내는 방식은 항상, 말로만 이루어지는 듯하다. 지난 정권도 혁신을 부르짖었고 변화를 부르짖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구태의연함을 유지했을 뿐이다. 개념이 정립되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말의 난무는 허무함을 끌어올린다.

   <누운 배>는 화자가 일하는 중국의 한국 조선소에서 갑자기 쓰러진 배를 가리킨다. 배는 똑바로 바다 위를 항해하는 것이기에 옆으로 누운 배는 일으켜 세움이 마땅하다. 왜 쓰러지게 되었는지, 어떻게 일으켜 세워야 하는가를 계획하고 진행하기 위해선 무수한 대책회의가 필요하고 담당자의 문책과 변경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극대화하는 것인 ‘이기심’이다. 내 이익이 되는 쪽으로. 그리고 ‘회사의 이익’이 되는 것이 직원의 이익보다 선행한다. 다른 말로 대체하자면 이 이익과 이기를 모든 모순의 총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관료제와 계급구조의 모순들. 배는 쓰러졌고 배가 쓰러졌음이 타당한 문서로 성립하는 과정은 배를 일으켜 세우는 것보다 더 흥미진진하다. 책임회피와 보험을 취득하기 위한 노력들이 결국 최종적으로 배가 완전히 쓰러졌음을 알리는데 일조한다. 도장 쾅. 원인과는 상관없는, 배제된 서류의 낙인이 배의 상태를 알리는 표지가 된다.

   그리고 다시 누운 배를 세우기 위한 회장의 한마디로 모든 직원들은 전전긍긍 배를 세우기 위해 일한다. 합리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판단하고 의견을 제시하고 논의할 겨를 없이 그 말 한마디로 고철같은 배는 세워져야 하는 거고, 월급을 받기 위해서는 배를 세우려는 일련의 작업들을 진행해야 한다.

 

매일 똑같은 생활이 이어졌다. 나는 요령을 익혀나갔다. 일이 쌓여도 쌓인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하는 요령, 금방 해도 시간과 공을 많이 들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요령, 일도 아닌 일을 일처럼 보이게 하는 요령, 그리고 적당히 틈만 보이면 혁신이라는 단어를 붙여 넣는 요령. 요령을 익히니 일은 편해지고 회사 생활은 평화로웠다. 퇴근하면 술마시고 여자를 주무르다 집으로 갔고, 잤다. 불편하고 불쾌한 것들, 틀렸지만 틀렸다고 말할 수도, 고치거나 치울 수도 없는 것들은 적응하거나 아예 잊어야 했다. 기쁘고 즐거운 것, 보상을 찾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p125

 

   기업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사람도 물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느덧 표피에만 머무르며 영혼없는 일터를 오간다. 수직적인 기업의 문화가 기업이익에만 매몰하는 행태가 그러한 직원들을 양상하는 것일까. 그럼에도 혁신은 멀고, 혁신 역시도 표피에만 머무른다. 이런 생활이 반복될 때 일하는 인간은 단지 일을 하고 있다고 행복할 수 있을까. 수많은 이들이 출근하고 월말이면 급여를 받지만, 자기성취와 행복감은 알지 못한 채 ‘요령’만을 파악하게끔 하는 기업문화. 그런 구조는 대한민국의 기업의 당연한 문화로 너무나 오래 자리잡았다.

   화자가 맞닥뜨린 일은 <누운 배>에 대한 처리과정이지만 작가는 누운 것은 배만이 아님을 말한다. 일방적으로 매몰되고 마는 기업 속의 개인들. 천편일률적인 기업 조직 속에서 또 그렇게 천편일률적인 직장인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 이들을 가리킨다. 자기도 모르게 까라면 까면서 다 똑같은 사람이 되어가는 사람들. 어쩌면 모두 똑같이 되어가는 것에 안도를 할지 모를. 여기에 작가는 질문을 던진다.

 

정말 중요한 질문은 단 하나였다.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 그것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 돈벌이가 되는지 안 되는지 어떤 질문보다 가장 앞서야 할 질문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 질문을 하고 어떤 답이든 구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모른 채 이대로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는 말에 길들어가며 세월만 보내게 될 것이다. 결국 지금 저 배처럼 다 썪은 채 일어선 것도, 누운 것도 아닌 것은 내가 될 터였다.

다 그렇게 산다고들 말하지만 다 그렇게 죽는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죽기는 싫었다. 적어도 나는, 정말 그렇게 죽기 싫었다. 말도 안 되는 인간들 뒤치다꺼리나 하면서, 그런 것이 회사 생활이라고 스스로 강박하고 세뇌하면서 일생을 보내다 늙고 병든 닭이 돼 죽기는 싫었다. 그렇게 살기에 나는 아직 젊었고 내게 남은 인생은 너무 길었다. 나는 그럴 수 없었다. p306

 

직  장인의 삶이란 늘 현실과 이상 사이의 타협점이긴 하다. 이상을 쫓자면 놓쳐버릴 현실에 울고 현실을 쫓자면 놓쳐버릴 이상에 운다. 어떡하든 조화를 이룰 수 있다면야 좋겠지만,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다음에는 어느덧 회사에서 내쫓겨버릴 상태에 처할 뿐이다. 어쩌면 오래도록 느끼지만, 깨달음은 결정은 한순간일지 모른다. 어디에 발을 더 두느냐에 따라서 여전히 누운 배로 머물 수가 있다. 썩고 썩고 썩은 채 누워 있는 배가.

   소설 속 문대리처럼 사람들은, 개인은 이렇게 조직을 벗어나고 또다른 조직에 들어가기를 반복한다. 더 나은 직장인이 되기 위하여,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개인은 끊임없이 누운 채로 발버둥친다. 그러나 그런 발버둥이 무색하게 희망과 선택과 결정을 가지고 들어가는 곳이 또다시 같은 조직들 속이라면야 얼마나 허무한가. 누운 배이고 싶지 않아 발버둥치는 이 무수한 개인들 면면의 노력만큼이라도 커다란 시스템이 얼른 누워있지 않은 채로 탁 버티고 있는 그림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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