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의 깨달음


디어 랄프 로렌, 손보미, 문학동네, 2017.


  랄프 로렌이 의류 브랜드라는 걸 몰랐다. 당연 창시자도 몰랐기에 디어 랄프 로렌의 “디어” 또한 “dear”인지 몰랐다. 작가의 단편집 『그들에게 린디합을』에 대한 인상으로 이 소설을 잡았을 땐, 오로지 손보미라는 작가에 기댄 선택이었다.

  단편의 느낌과 비슷한 느낌도 있었는데 이국적 이미지였다. 작가의 작품에서 분위기나 서술톤에서 번역투라고 해야 할 지, 외국 작가의 느낌이랄지, 그런 이미지를 더러 느꼈는데 이번 장편 소설은 아예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그곳의 등장인물의 삶을 쫒고 있다. 단지 배경만, 그러니까 장소만 옮긴 한국인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작가가 그리고 있는 랄프 로렌의 이야기는 실존인물과 오버랩되면서 그의 생애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기에 얼마만큼의 진실과 허구가 섞인지 모른 채, 우선은 작가가 찾아가는 랄프 로렌과 조셉 프랭클의 인생사가 진실인 것처럼 여겼다.

  유학생활 9년차의 종수는 지도교수로부터 퇴출 통보를 받고 서랍을 부수던 중 교교시절 같은 반 수영의 청첩장을 발견한다. “디어 종수, 나는 아주 잘 지내. 곧 결혼식을 올릴 거야. 나는 무척 행복해. 너도 잘 지내길 바란다.” 왜 이런 편지를 보냈는지 그들 사이가 어땠는지

지난 기억을 떠올려보니 수영과는 랄프 로렌에게 편지를 쓰는 일로 함께 한 시절이 있었다. 수영은 랄프 로렌에게 시계를 만들어 달라는 편지를 쓰고자 했고 종수에게 영역해 달라 부탁했던 것이다. 그해 수영과 종수는 함께 만나 얘기를 나누었지만 수영이 편지를 부쳤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그해 랄프 로렌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 만났던 그땐 이미 랄프 로렌은 사망한 후였고 종수는 미국에 머물며 랄프 로렌을 찾아나서게 된다. 그와 관련된 자료를 찾는 과정에 랄프 로렌을 아들처럼 키운 시계공이자 권투 선수 조셉 프랭클, 조셉 프랭클의 이웃 백네살 레이첼 잭슨, 레이첼 잭슨의 입주 간호사 새넌 헤이스를 만난다. 그렇게 랄프 로렌의 생애를 쫓으며 그가 왜 시계를 만들지 않았는지, 랄프 로렌과 조셉 프랭클이 숨긴, 수수께끼 같은 고리들을 계속 찾는다.

  타인의 인생을 쫒는 일이 지루한 궤적으로 흘러가리라 생각지 못했다. 어쩌면 큰 ‘사건’을 파헤치고자 하는 일념으로 타인의 생을 까발리는 것이 아니라 그런듯 여겨졌다. 과거와 현재의 기억이 교차되는 수많은 서술의 흐름 속에서 랄프 로렌의 이야기를 뒤쫓는 ‘종수’의 속내가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도 아닐까 했다. 그만큼, 종수는 왜 랄프 로렌의 이야기를 찾으려 하는지, 보다 치밀하고 열성적인 것도 아니면서 그때 그때 생각의 조각들을 맞추어 가면서 그런 행동을 하고 있는가와 같은 질문을 하노라면 어느새 많은 사람들이 ‘종수’처럼 살고 있다는 생각과 종수처럼 살고 있지 못하다라는 상반된 생각이 올라온다.

  전자는 종수에게서 목표한 것에 도달하지 못해 밀려난 느낌을 갖는 이의 방황과 자조적인 모습을 본 것이었다. 후자는 어떤 기억에 의지해 타인의 삶을 탐색하는 여정을 하는 이는 얼마나 많은가란 생각이었다. 그만큼 종수는 나약한 듯 의지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랄프 로렌의 삶을 쫒는 건 종수에게 지난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무력한 상태의 자신을 벗어나기 위한,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나를 찾기 위해 떠나는 여정, 길 위에서의 깨달음 같은. 순례자 같은.

  궁금해 한 랄프 로렌의 삶의 부분을 명확히 알아내지 못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최종적으로 랄프 로렌의 행적을 찾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으니 이 소설에서 수수께끼로 만들어 놓은 것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그 수수께끼가 목적이 아닌, 종수의 이야기.


삶이 축제는 아닐지언정, 그게 자신을 지치게 하더라도, 계속 끌고 나가야 한다고 다짐하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잭슨 여사는 자신의 삶을 할 수 있는 한 ‘오랫동안‘ ‘움직이게‘ 만들었다.


  동화 파랑새처럼 길의 이야기, 여정의 이야기라면 수영의 편지는, 종수에게 무엇이 될까. 오랫동안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 아닐까. 그 기억 속에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미움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좋은 사람이고자 하는 욕망을 기억한 종수의 이야기. 그렇게 사람과 사람을 만나, 제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종수의 이야기. 마침내 기억한 “디어”라는 단어에 깃든 말. 그것이 종수가 찾고자 하는 것, 찾아낸 것이었다.


디어, 는 다정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만 쓸 수 있는 말인 것처럼 느껴져. 아주 친밀하고 따뜻해.


  또하나,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로도 읽혔다. 헤밍웨이가 쓴다는 것이 고독한 삶이라고 한 말을 인용한 프롤로그에서부터 시작하면서 종수가 랄프 로렌의 삶을 뒤쫒는 과정에서 자신을 작가라고 지칭하듯이 이것은 고독한 글쓰기의 과정에 관한 이야기이구나. 매일 불평불만을 늘어놓지만 매일 쓰게 되는 글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그토록 늘어놓는 불평불만은 누군가의 삶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기 위한 서투른 표현이라는 것. 그렇게 글쓰기는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이들을 친밀하고 따스하게 바라보고자 하는, 끊임없는 노력이라는 것을.


살아 있는 사람들은 부고를 통해 죽은 사람에 대한 모든 감정―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을 간결하고 우아하고 진실된 문장으로 ‘공식적으로’ 표현하고 싶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작은 이모가 죽은 후에 어머니가 왜 그토록 그녀에 대한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는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야만, 살아 있는 사람들은 ‘정말로’ 죽은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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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6-14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흥미롭네요.

이방인이 미국에서 랄프 로렌의
흔적을 좇는 이야기가 말이죠.

모시빛 2017-06-16 00:05   좋아요 0 | URL
뜬금없이 사제폭탄을 만든 대학원생이 연상됐어요.....종수도 교수님께 퇴출 통보를 받고 서랍을 부수는 과격(?)한 행동을 했지요. 그리고 기억의 매개물을 쫓아 랄프 로렌을 쫒는 참 서정적인 여행을 하는데.......역시 소설과 현실은 다르구나란 생각이...교수님 꾸지람에 한달전부터 폭탄 계획을 세웠다는 대학원생 때문에 책을 읽은 뒤에 오히려 더 종수가 기억이 나네요.
 

클리셰의 KO승


스파링, 도선우, 문학동네, 2016.12.21.

  문학동네소설상 수장작인 『스파링』은 책을 읽는 중중 익숙한 느낌을 받는다. 가만 보니  클리셰로 가득하다. 그렇기에 충분히 예측이 가능하다. 작가의 서술톤은 클리셰 가득한 일들을 이끌어 가는데 시종일관 담담하고 차분하다. 언뜻 도덕교과서 같은 이야기도 많다. 그런데, 이 익숙한 클리셰를 가만 들여다보니 이 이야기는 결국 그렇게 흘러 갈수밖에 없음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이 『스파링』속 세계, 클리셰는 우리에게 늘 익숙한 권력과 자본이었다. 그러니 그것이 움직임이 예측가능한 것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이가 진부한 것이 아니라 이 세계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그토록 경직되어 있다는 이야기와도 같을 것이다.

  실제, 어떻게 될지 모를 장태주의 삶이 처음부터, 시작부터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까. 공중화장실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달라졌을까. 공중화장실에서 태어났기에 어떤 삶의 궤적인 좀 다를까 했건만, 이것은 이야기이지만 삶이니까. 이 대한민국에서 공중화장실에 버려진 어린 아이의 삶이 전형적인 권력과 자본에 의해 비틀리지 않으리라는 것은 그저 응원이고 바램일 뿐이지, 실상은 그렇지 않으리란 걸 안다. 그러니 우리의 소년 ‘장태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소년’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았다. 이 이야기가 모든 일을 겪은 후에야 서술되는 형태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장태주의 어조는 시종일관 아니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초등학생, 이제 중학생인 소년 장태주의 행동과 언어는 이미 세파에 시달린 어른의 목소리와 같았다. 맞닥뜨리는 일들에 모두, 한단계 초월한 듯한 반응을 보이는 장태주의 목소리는 그렇기에 애잔함이 가득하다.

  공중화장실에서 태어나 자신을 버리고 간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의 장태주는 참 사랑스러워보였다. 이해를 품고 달리는 아이의 목소리였기에. 열일곱살 미혼모의 행동에서의 아기 버림을 충분히 이해하는 태주는, 소년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자신이 공중화장실에 버려진 것을 흥미롭게 이야기하는 장태주로 인해 어린 장태주에 대한 연민이 깊어진다.

  하지만 보육원과 학교에서의 장태주의 삶은 어떤가. 세상에 대해 ‘이해’를 품으려 해도 세상이 그를 가만두지 않는다. 세상의 모두에게 ‘장태주’라는 한 사람으로서의 인격은 사라지고 보육원 아이라는 이미지로만 장태주를 소비한다. 그것이 이 부정의한 세상이 보육원 아이 ‘장태주’를 대하는 방식이고 클리셰다. 어린 아이를 향한 매서운 세상의 논리, 아이조차도 부모의 논리를 그대로 되뇌며 제 친구를 억압하고 업신여기는 모습을 보면 경악을 하게 되는데, 그러면서 생각한다. 아, 그렇다. 이 나라 대한민국의 부모들의 행태가 그렇더라. 제 아이만 잘나고 멋있는 줄 알고,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이 많다는 것. 아이들을 위한 동화는 없다. 일찍이 어린 왕자가 말했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고.


그게 이곳의 질서다. 질서라는 건 한 번 만들어지면 여간해서는 무너지지 않는다. 종종 그 질서에 불만을 갖고 무너뜨리려는 인간들이 생기기는 해도 질서라는 건 본래 레고 블록처럼 촘촘하게 연결되어 하나를 이룬 거라서, 몇몇 반골들이 자기들 뜻과 맞지 않는다고 지랄들을 떨어봐야 결국 무너지는 건 자기들이지 질서가 아니다.


  불행하게도 장태주의 삶은 어른들의 최악이 행동패턴을 그대로 따르는 또래의 아이들에 의해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제가 살아갈 세상에 어른의 힘과 논리를 가져와 또래들을 억압하고 우위에 선다. 아니, 이 세상의 논리는 그렇다. 돈과 힘. 돈없고 부모없는 아이가 겪을 수밖에 없는 모든 불운을 끌어안고 세상을 헤쳐가던 장태주에게 한줄기 빛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운동 능력과 소년원에서 만난 공선생과 그 가족들이다.

  비참한 삶에서 응원해주고 위로해주는 내 편을 만난다는 것은 새 삶을 얻은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어린 장태주의 삶은 그들로 인해 달라질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여전한 클리셰가 진행중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장태주에게 가족이자 권투를 가르쳐 주는 소년원 담임과, 담임의 부인, 담임의 장인은 이 이야기 속에서 시종일관 ‘도덕 교과서’의 역할을 맡는다. 그들은 장태주가 견뎌온 이 세상의 구조와는 한발짝 떨어진 채로 그 제도와 맞서며 끊임없이 사회정의에 대해 부르짖고 그러한 삶을 실천해가는 이들이다. 그리고 여기서 권투는 상식적이고 공정한 규칙의 세계를 가르키는 방식이 된다. 그들은 권투 기술이라는 실질적인 운동을 가르침과 동시에 그들이 살아온 삶의 방식, 이러한 타당한 규칙의 기술을 장태주에게 전수해 주는 것이다.


살아가며 저돌적으로 인파이팅한 기억을 갖지 못하면, 언젠가 부딪히게 될 현실의 무게에 놀라 도망만 다니게 될 수도 있거든. 그래선 그 현실을 극복할 수도 없고 스스로를 증명할 수도 없으니까 살아가며 한 번쯤은, 모든 걸 다 걸고 정면승부를 겨뤄봐야 할 필요가 있어.


  상식적으로 공정이 불공정하고 맞붙으면 공정이 승리해야 하는 것이 세상 이치고 상식인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바르게 살려고 하면 할수록, 규칙을 지키려 하면 할수록 더욱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드는 게 이 세상이라는 것만 잊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자조를 배우며 살아야 한다는 게 슬프고 어이없지만, 결국 알게 된다. 이 세상은 수많은 일진들이 둘러싼 세계라는 것을. 일진, 그들만의 끈, 그들만의 논리, 그들의 폭력. 그것이 이 세상을 지배한다. 그에 저항하는 이들에게 가해지는 것은….


정의는 오히려 정의를 바라는 사람보다 그렇지 않은 세계를 살아가기 더 편한 인간들에게 훨씬 유용한 가치이자 신념이라는 것을, 그때부터 나는 천천히 깨달아온 셈이었다.


  또한번 이 세상의 클리셰와 맞선, 파이팅하며 끊임없이 스파링하던 이들의 세계가 무너졌다. 위와 같은 말을 내뱉고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갈 장태주를 이 세상은 얼마나 만들어내고 있는가. 그 탁월한 기술과 담임과 스승이 가르쳐 준 규칙으로 멋지게 KO승을 해주기를 바랐건만, 사랑하는 모든 이를 잃은 장태규의 절규만 들려온다. 


  내가 당신들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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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희


공터에서, 김훈, 해냄, 2017.

 

  메말라 운동장이 된 못과 하천을 눈으로 보고 놀랐다. 그 변화의 차가 너무나 커서 제 본래의 이름, 못이나 내라는 치름을 찾을까 싶을 정도였다. 비가 내리니 그 메마른 땅을 적시고 있겠지. 조금 더 세차게 내리기를. 저 달아오른 지붕에도, 폐허같은 저 공터에도.

  폐허의 터인 가정에도 단비가, 내리기를. 192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를 살아간 마씨(馬氏) 집안의 가계도에서 느껴지는 공허와 슬픔, 아픔, 분노의 모든 것들에 내리는 단비. 어쩌면 상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공터에서>는 그 무대가 넓고 역사가 길다. 가장 마동수를 중심으로 한 장남과 차남의 이야기는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살아낸 이들의 이야기다. 그 모든 사건들은 이들에게 배경이 아닌 현실로 나타난다. 그러니, 일제시대 만주의 길림, 장춘, 상해를 오간 마동수로부터 6.25를 지나, 베트남전에 참전한 후 괌에서 돌아오려 하지 않는 장남 마장세, 언론통폐합 사건으로 신문기자 일을 할 수 없게 된 가난한 마차세의 이야기는 남일처럼이 아니라 남일같지가 않은 이야기가 된다. 이 시기의 모든 사건들. 굴곡진 사건들에서 결코  비켜갈 수 없었던 이들은 그 벗어날 수 없는 사건으로 삶의 질곡을 겪으며 인생을 살아나간다. 쉽게 떨쳐 내지 못할 기억을, 상처를 만들며 맴도는 사건들이 개인을 한 가정을 차분하게 피폐함속으로 이끄는 동안, 헤쳐 나갈 수 있는 올곧은 정신은 형성될 수 있는 건가.


너의 아버지라는 사람은 무슨 헛것이 씌었는지 도통 밖으로만 싸지르고 두어 달에 한 번씩 집에 오는데, 왜 오는지 모르겠다. 내가 그 인간하고 살을 섞고 살아서 너희들을 내지른 세월을 생각하면 내 가슴에서 벌레가 끓고 들불이 인다. 너는 힘들고 쓸쓸하면 너보다 더 쓸쓸한 이 어미를 생각해라. 그게 내가 하려는 말의 전부다. p170


  어쩌면 이 모든 굴곡진 이야기의 근원이 누가 만들어내는지 모르는 근현대사의 ‘사건’들인 것처럼 마동수의 가정에 드리운 음산함의 이유는 ‘마동수’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그 사건들을 함께 겪으며 그 역사 속에서 마동수는 끝끝내 제대로 서지 못하고 늘 회오리치기만 한다. 방어막이 되어 주지 못하고, 되려 하지 않은 채 거듭 흔들리고 방황하는 마동수와 함께 하는 삶은 마동수의 아내 이도순에게도 두 아이들에게도 더할 나위 없이 안에서 겪는 ‘사건’이 된다. 그렇게 안팎으로 달려드는 무수한 사건들에 지쳐가는 상황에선 가장 힘든 존재가 ‘가족’이라는 존재다.          


1100고지 매복 진지에서 아버지, 어머니, 형은 멀어서 닿을 수 없는 외계(外界)의 환영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먼 존재들은 군화 속에서, 언 발가락은 아무런 감각도 없이 남의 물건처럼 멀었는데, 그 멀고 먼 발가락의 고통은 불로 지지듯이 달려들었다. 혈연은 1100고지의 발 시려움 같은 것이었는데, 휴가가 다가오면 그 혈연의 끈은 마차세를 더욱 바싹 조여왔다. p16


  마차세는 어린 시절 밖으로 더욱 떠도는 아버지가 오지 않는 이유보다 왜 집에 오는 것인지를 더 궁금해 했다. 마장세는 늘 아버지가 삶의 외곽을 겉돌고 있다 여겼다. 두 아들에게 아버지의 삶은 뚜렷이 슬퍼할 것도 그렇다고 마냥 홀가분해지지도 않을 상흔을 주었다. 그들의 아버지는 그 잔잔한 보잘것없음으로 두 아들의 생을 뒤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나라의 역사는, 정책은 한 가정에 영향을 미치고 그 가정의 가장의 역사는 그 자식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삶의 구조속에서 또 어쩌면, 그토록 틀은 정해져 있었을까. 방황하고 피폐하게 권위만을 내세우는 가장이 있고 가정을 꾸리며 인내하고 또 인내하며 살아내는 모성이 있으며 아버지를 닮지 않으려 하나 결국 닮은 모습으로 생을 살고 있는 자식들이라는 것. 이 벗어날 수 없는 도식, 이 도식을 만드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개인이 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삶이라는 사실은 매우 허망하지만 또 그 구조 속에서 기어코 답을 찾아내기도 한다. 닮은 듯 보이나 다른 마차세와 박상희의 삶이 그렇다. 아버지 마동수와 어머니의 모습에서 가정이라는 것의 허망함과 그 무력을 발견했을 것도 같건만 끝내 ‘결혼’이라는 희망을 붙들려 한 마차세. 그에게 결혼이란 ‘막막한 세상에서 몸 비빌 수 있는 작은 거점’의 의미였다. 그렇게 결혼 속으로 들어간 마차세의 삶은, 마장세의 삶과 달랐나. 결혼이 답이었던가. 그 상대가 ‘박상희’가 아니었다면 마차세에게 결혼이 거점이 될 수 있었을까.

  세상의 모든 막막함과 마차세에게 드리운 이 공허함을 세밀하게 안아준 박상희가 있었기에 마차세는 마동수의 삶도 마장세의 삶도 아닌 박상희와 함께 하는 마차세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마씨네 가계에 발들 들인 박상희의 힘은 경이롭다. 그것은 마냥 마동수의 아내 이도순의 삶처럼 참고 참는 삶과는 조금은 다르다.

  어쩌면 이 ‘조금 다른’ 역할은 마차세가 바라는 ‘이상’으로 보이며 그렇기에 마차세에게는 ‘구원’의 여신과 같은 존재로 그려지는 것 같다. 이것이 아버지·어머니 세대의 ‘이도순’과 아들 세대 ‘박상희’의 결정적인 차이가 아닌가 한다. 비슷한 역할이 주어졌지만 그 역할을 빛나게 하는 것이 마차세의 인정이라는 점이다. 마차세의 재가를 득한 후에 박상희의 역할은 빛나고 있는 것이다. 마차세가 원하는 바에 맞는 이상적인 모습으로 그 힘을 얻는 박상희의 존재. 마차세에게 무엇을 재촉하지도 않으면서 마차세를 이해하는 폭과 깊이의 남다름을 보여주고 있다는 데서, 박상희의 역할이 이 전체의 소설에서 약간 이질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어쨌든 마차세의 입장에서 박상희라는 존재는 단비이다. 또한 마차세와 마장세가 가지는 아버지에 대한 거리감과 죄책감의 내면을 생각해보도록 이끄는 역할이자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역할을 맡았다.  


제가 결혼한 직후에 돌아가신 시아버지가 젊었을 때 찍은 사진을 우연히 봤는데, 그 모습이 그때 태어나지 않은 두 아들과 똑 같았습니다. 그 사진을 보면서 저는 아버지와 두 아들이 모두 가엾어서 눈물겨웠습니다. p262

    

  이 개별적인 것 같으면서도 보편적인 세대의 이야기, 그러한 삶을 살았던 세대에 대한 공감과 연민의 눈이 필요하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는 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박상희’라는 진보적인 성향의 느낌을 지닌 인물의 목소리로, 시선으로.

  읽으면서는 마차세에게 연민을 느꼈는데, 왜 글은 박상희에게로 초점이 가게 되는지 모르겠다. 뒤늦게 들은 작가에 대한 논란 때문인지…. 열렬한 독자, 팬이 아니었기에 충격의 강도는 높지 않았는데 마씨 부자의 이야기에 왜 ‘박상희’만 기억에 남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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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박이 쏟아지는 동안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 2015 제15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우박이 쏟아졌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만 해도 우박을 보리라 생각지 못했다. 바람이 먼저 불기 시작했고 머리 위로 검은 구름들이 몰려들었다. 여느 때와 다른 비라고 느낀 건, 아니 비가 오는 게 맞는 건가 한 건 바닥에 떨어지는 물방울의 모양때문이었다. 바닥을 적시는 빗방울의 밀도가 너무 넓었다. 소리에 비해 바닥을 적시는 물기가 없던 탓이다. 하늘 한번 쳐다보고 바닥 한번 쳐다보는데 이내 폭발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바닥을 튕기며 또르르 굴러다니는 알갱이들이 눈에 띄었다. 차에도 떨어지는데 속도 없이 넋놓고 바라보았다. 시간을 보니 삼십여분쯤 지난 것 같은데, 잔상이 길었다.


왜 머리 위 눈이 녹지 않을까?

   시간이 흐르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우리가 시간 밖에 있으니까요. 

       -p42, 한강, 눈한송이가 녹는 동안


  이때, 시간 밖에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현실상황은 잊고 마냥 넋을 놓고 있던 그 시간은 좋았다. 비가 그치고 난 뒤에야 여러 가지 걱정에 휩싸였다. 사람에게로 떨어지진 않았나, 농작물엔 피해가지 않았나, 내 차는 멀쩡한가…. 그러고 보면 고통을 잊는 방법 중 하나는 현실의 시간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황순원 문학상 수상작품집이라 후보작들에도 눈이 간다. 여러 작가들의 대표작들이 수록되어 있는 만큼 작품 하나 하나 깊은 울림을 준다. 각각이 다른 작가이며 다른 주제와 소재인 단편들인데도 이 작품집 전체를 관통하는 느낌 하나를 집어 올린다. 그것은 고통 아닐까.


내가 여기를 틀어박혔다는 것을 아는 이 누구인가.

아무도 나를 구하러 오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나를 구하러 오지 않을 것이므로 나는 내 발로 걸어 나가야 할 것이다.

     - p408, 황정은, 웃는 남자.


  우리 모두는 헤어날 수 없는 고통을 가슴에 품고, 고통을 기억하며 살아간다. 결코 누군가가 구하러 오지 않으면 고통의 시간 속에 영원히 머물러 있을 삶. 김애란의 <입동>에서처럼 소소한 일상을 살며 그에 맞는 소탈한 행복을 꿈꾸었을 뿐인데 그냥 열심히 살아갔을 뿐인데 한낮에 쏟아져 내린 우박처럼, 머리를 강타하는 그런 상처를 입게 되는 일들이 일어나는 삶. 나 혼자 만의 삶이 아니라 함께 하는 이가 있음으로 행복하다 싶지만 위험스러운 상황이 생기면 나도 모르게 함께 하는 이가 아니라 습관처럼 붙잡고 마는 가방처럼 그 ‘열심히’조차 패턴화되어 있기도 한 삶. 나도 모르게 타인에게 고통을 전가시켜 버리게 되는 그런 삶도.


그는 그냥 하던 대로 했겠지. 말하자면 패턴 같은 것이겠지. 결정적일 때 한 발짝 비켜서는 인간은 그다음 순간에도 비켜서고…… 가방을 움켜쥐는 인간은 가방을 움켜쥔다. 그것 같은 게 아니었을까. 결정적으로 그, 라는 인간이 되는 것. 땋던 방식대로 땋기. 늘 하던 가락대로 땋는 것. 누구에게나 자기 몫의 피륙이 있고 그것의 무늬는 대개 이런 꼴로 짜이는 것 아닐까. 그렇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직조해내는 패턴의 연속, 연속, 연속. p407, 황정은, 웃는 남자.


  그리하여 고통tm런 <어제의 일들>은 통째로 잊어버려 버리거나, 지치고 힘들어 억울하다, 억울하다 외치다 마침내 누구도 아닌 이에게, 나를 힘들게 한 사람이 아닌 다른 이에게 화풀이를 하며 괴로워하는 삶.


나는 왜 자꾸 애꿎은 사람들에게 화를 내는가? 나는 왜 자꾸 애꿎은 사람들에게 화를 내려 하는가? - 287, 이기호,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


나도 애초에, 이렇게 생겨먹지는, 않았겠지. 불가촉천민처럼, 아무에게도, 가닿지 못하게. 내 탓도 아니고, 세상 탓도 아니다. 그래도 내가, 성가시고 귀찮다고, 누굴 죽이지 않은 게, 어디냐? 그냥 좀, 지진 거야. 손바닥이라, 금세 아물었지. 그게 나를, 살게 한거고. - p184, 권여선, 이모  


  삶은 고통의 연속이다. 꽁꽁 숨어도 보고 타인의 손바닥에 담배를 지지기도 하며 맘 속의 화를 발화해 그 추동으로 잘 살아갈 듯도 하지만. 딱히….   상품처럼 온 나라를 떠돌아다니는 존재가 되거나, 그저 ‘임시’로 순간에 머무르는 삶으로 머물고 만다.


그렇다고 자유롭게 살았냐 하면 그것도 아니지. 희망이 없으면 자유도 없어. 있더라도 막막한 어둠처럼 아무 의미나 무늬도 없지. 그때 나는 방탕하게 돈을 다 써버리고 얼른 죽어버리자 하는 생각밖에 안 했던 것 같다. 그러다 조금씩 변해서 지금처럼 살게 됐는데, 그게 아무리 생각해도 그날 밤 이후부터인 것 같구나.  p169 , 권여선, 이모


  그래서 이 고통은 기억하는 삶이어야 할지, 기억하지 않는 삶이어야 할 지 모르겠다. 조해진의 <사물의 작별>에서처럼 내가 준 고통은 알츠하이머에 걸려서도 잊지 않고 사과해야 하며 타인이 내게 준 고통은 <어제의 일들>처럼 잊어버리는 게 좋은 걸까.

  하지만,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처럼 어떤 일들에 대해선 그 고통의 밖에 있는 것 자체가 고통일 수가 있다. 삶이란 끊임없는 사람과의 관계맺음이다. 더 나은 사회 속에서 서로가 행복을 꿈꾸며 사는 것이 우리의 소망일진대, 마냥 고통을 외면하는 것이 최선은 아님을 또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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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끌


소년이 온다, 한강, 창비, 2014.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란 것이 있어서 이렇게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나는 살고 싶습니다.” - 시민군의 일기


 작가는 소설을 쓸 수 없었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쓰기 위해 자료를 읽고 읽으며 글이 써지지 않는 날들을 보내며 글자가 나아가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 작가에게 이 소설을 마칠 수 있도록 이끈 것은, 시민군의 마지막 일기를 읽고 나서였다.

 

그때 무엇에 얻어맞은 것처럼, 제가 그때까지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 깨달았어요. 그리고 생각한 것이, 이 소설이 인간의 참혹과 폭력에서 시작했지만 인간의 존엄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거였어요. 그저 거기까지만 가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소설의 맨 앞과 맨 뒤에 촛불을 밝히자고, 할 수 있는 최선의 애도를 하자고 생각했어요. 그러자 어떻게 장들을 배열해야 할지 알 수 있게 되었고 월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할 수 있었어요.

- 2015 제15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수상작가 인터뷰 중 -


  그렇게 문장을 완성할 수 있었던 <소년이 온다>는 1980년 광주의 이야기다. 5·18 민주화운동이란 명명을 얻기까지, 그날의 역사가 재현되고 있지만 이 역시 그날을 조금 보여줄 뿐이다. 한 도시가 마비되고 고립된 그 시간들의 이야기는 작가가 이야기를 전개할 수 없을 정도의 강도로 그야말로 소설같아 현실로 가져오는 것이 어려울 정도의 일들이 숨겨져 있다. 5·18. 이제 37년의 시간이 지나 이 역사적 상처를 가슴에 안은 모두가, 역사가 치유의 시간을 맞이하고 있는 시점이다. 여전히 진상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채이고 왜곡과 거짓을 넘어선 희화화를 일삼는 이들이 여전히 이 역사를 조롱하고 있다. 바로 잡힌 규명을 통해 예의없고 반성없고 잔혹한 무리들의 인식세계도 변할 수 있을까. 열다섯 소년의 혼이 여전히 떠돌고 있는 이날의 역사, 그날의 아픔,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5·18을.   

  그날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다. 내 친구가, 내 가족이, 내 이웃이… 마구잡이로 얻어맞고, 총에 맞고,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 그들은 살아남았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며 그날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삶을 떠돈다. 그것은 영혼으로 떠도는 그날의 사망자의 모습과 겹친다.

  잡고 있던 손을 놓치고 살아남아 친구의 죽음을 목격한 열여섯 동호의 살아남은 슬픔과 죄책감. 매일 분향소로 들어오는 시신들을 수습하는 일을 맡으며 초를 밝혀 주검들의 혼을 위로하며 친구 정대를 찾는 동호의 괴로움이 절절히 공감되면서 아린 마음이 되는데, 결국 동호마저도 폭도인 국가에 의해 희생당하고 만다. 슬프고 안타깝고 억울하고 답답하고, 그러면서도 멍한.

  어린 동호조차도 그 폭격과 폭력 속에 친구 손을 놓친 것에 죄책감을 느끼며 시민군의 활동을 돕는데, 죄책감도 양심도 없는 존재들이 또 어찌 그리 많을 수 있을까. 절대 권력이라는 그 우스운 명칭. 왜 양심은 가진 자에게는 그토록 머물지를 않는지.


 그들의 얼굴을 보고 싶다, 잠든 그들의 눈꺼풀 위로 어른거리고 싶다, 꿈속으로 불쑥 들어가고 싶다, 그 이마, 그 눈꺼풀들을 밤새 건너다니며 어른거리고 싶다. 그들이 악몽 속에서 피 흐르는 내 눈을 볼 때까지. 내 목소리를 들을 때까지. 왜 나를 쐈지, 왜 나를 죽였지. p57~58


  <소년이 온다>는 그날의 사건만을 기록하지 않는다. 5·18은 한순간 있었던 사건이 아니라 여전히 사람들의 가슴에 머리에 트라우마가 된 사건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그날의 폭력과 고문으로 다친 몸과 마음을 안고 현재를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안타깝게도 그들의 삶은 진행이 되지 않는다. 그날의 충격은 목뼈가 어긋난 것과 같아, 그들의 삶은 여전히 어긋나 있다. 잊겠다 다짐하지만, 절대로 잊히지 않는 기억이 그들의 현재 삶이 된다. 여전히 끔찍한.


 일곱 대의 뺨을 그녀는 이제부터 잊을 것이다. 하루에 한 대씩, 일주일 만에 잊을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이 그 첫날이다.

 어떻게 잊을까 목뼈가 어긋난 건 같았던 그 충격을.


  이런 잔혹함을 자행한 이가 눈앞에 살아 번들번들한 얼굴을 디밀고 나오는 모습을 볼 때마다 역겹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 번들한 기름기가 학살자가 살아온 모습이겠지. 양심이 내려앉지 못할 미끌거림. 그러니 아직은 죽지 마라. 그저 노안으로 죽지 마라. 미끌거린 채 마지막까지 번들번들한 그 얼굴로 사라지지 마라. 이런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따라서 나도 이렇게 다짐한다.


용서하지 않을 거다. 이승에서 가장 끔찍한 것을 본 사람처럼 꿈적거리는 노인의 두 눈을 너는 마주 본다.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 거다. 나 자신까지도.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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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5-30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한강 작가 최고의 작품
이라고 생각합니다.

모시빛 2017-05-30 21:05   좋아요 0 | URL
그런 것 같아요.
소재가 주는 힘이 있긴 하지만 한강 작가도 소재를 잘 풀어낸 것 같아요..
그러니 블랙리스트로 낙인찍혔겠죠...?! 국제적인 상을 수상하고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