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눈

                                            - 허 영 만

 

이태리 맹인가수의 노래를 듣는다. 눈 먼 가수는 소리로


느티나무 속잎 틔우는 봄비를 보고 미세하게 가라앉는

꽃그늘도 본다. 바람 가는 길을 느리게 따라가거나

푸른 별들이 쉬어가는 샘가에서 생의 긴 그림자를

내려놓기도 한다. 그의 소리는 우주의 흙냄새와 물냄새를

뿜어낸다. 은방울꽃 하얀 종을 울린다. 붉은 점 모시나비

기린초꿀을 빨게 한다. 금강소나무껍질을 더욱 붉게 한다.

아찔하다. 영혼의 눈으로 밝음을 이기는 힘!

저 반짝이는 눈망울 앞에 소리 앞에

나는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그의 행복을 기도드리는             

                                                            신동엽


그의 행복을 기도 드리는 유일한 사람이 되자.

그의 파랑새처럼 여린 목숨이 이쓰지 않고 살아가도록

길을 도와 주는 머슴이 되자.

그는 살아가고 싶어서 심장이 팔뜨닥거리고 눈이 눈물처럼

빛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나의 그림자도 아니며 없어질 실재도 아닌 것이다.

그는 저기 태양을 우러러 따라가는 해바라기와 같이

독립된 하나의 어여쁘고 싶은 목숨인 것이다.

어여쁘고 싶은 그의 목숨에 끄나풀이 되어선 못쓴다.

당길 힘이 없으면 끊어 버리자.

그리하여 싶으도록 걸어가는 그의 검은 눈동자의 행복을

기도 드리는 유일한 사람이 되자.

그는 다만 나와 인연이 있었던

어여쁘고 깨끗이 살아가고 싶어하는 정한 몸알일 따름.

그리하여 만에 혹 머언 훗날 나의 영역이 커져

그의 사는 세상까지 미치면 그땐

순리로 합칠 날 있을지도 모을 일일께며.


댓글(3)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해콩 2005-07-09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시집에 나오는 시일까...

글샘 2005-07-09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989년 간행된 신동엽의 시집 《꽃같이 그대 쓰러지는》에 수록되어 있는 유작(遺作)이라네요. ^^ 주말 즐겁게 보내세요~~~

해콩 2005-07-10 1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걱... 89년 ... 검색해봤더니 역시나 없네요.. 아예 '품절'이라는 말도 안떠요.. ㅜㅜ
 

바닥이 나를 받아주네

 

날마다 한치씩 가라앉는 때

주변의 모두가 의자째 나를 타고 앉으려고 한다고

나 외의 모든 사람에겐

웃을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될 때

 

집으로 돌아오는 밤길

눈길 스치는 곳곳에서

없는 무서운 얼굴들이 얼핏얼핏 보일 때

발바닥 우묵한 곳의 신경이

하루 종일 하이힐 굽에 버티느라 늘어나고

가방 속의 책이 점점 늘어나

소용없는 내 잡식성의 지식의 무게로

등을 굽게 할 때

 

나는 내 방에 돌아와

바닥에 몸을 던지네

모든 짐을 풀고

모든 옷의 단추와 걸쇠들을 끄르고

한쪽 볼부터 발끝까지

캄캄한 속에서 천천히

바닥에 들어붙네

몸의 둥근 선이 허락하는 한도까지

온몸을 써서 나는 바닥을 잡네

바닥에 매달리네

 

땅이 나를 받아주네

내일 아침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

그녀가 나를 지그시 잡아주네.

 

- 양애경 [바닥이 나를 받아주네], 창비시선162. 84, 85.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해콩 2005-07-10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힘들 때는 바닥이 나를 받쳐주더라..
마음과 몸이 그저 아플 때
공허한 이 우주 어디 한 곳 마음 맬 곳 없고
그래서 몸도 마냥 헤매일 때
바닥에 달라붙어 깊히깊히 가라앉으면
조금씩 조금씩 떠오르더라
하지만 아침마다..
나를 받쳐주는 유일한 바닥
그 바닥을 스스로 밀어내는 것
여전히 힘들어서
동틀무렵 가슴을 쓸어내린다
 

추억에서 67

                                                      - 박재삼

 

晋州장터 生魚물전에는
바다밑이 깔리는 해 다진 어스름을,

울엄매의 장사 끝에 남은 고기 몇 마리의
빛 發하는 눈깔들이 속절없이
銀錢만큼 손 안 닿는 恨이던가
울엄매야 울 엄마,

별빛은 또 그리 멀리
우리 오누이의 머리 맞댄 골방 안 되어
손 시리게 떨던가 손 시리게 떨던가,

晋州南江 맑다해도
오명가명
신새벽이나 밤빛에 보는 것을,
울엄매의 마음은 어떠했을꼬,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 같이
말없이 글썽이고 반짝이던 것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들은 그들이 앉아있는 나뭇가지들을 계속하여 톱질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더 잘 톱질할 수 있는지를

서로서로에게 소리쳐 가르쳐주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심연으로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는 다시 톱질에 열중하였다.

 

[간디의 물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