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질 수 없는 건 상처랬죠?

 

가질 수 없는 건 다 상처랬죠?
닿지 않는 하늘 닿지 않는 바다
돈이 없어 닿지 않는 외투
빌릴 수 없는 방 두 칸짜리 집
닿지 않는 사랑

절망의 아들인 포기가 가장 편하겠죠
아니, 그냥 흘러가는 거죠
뼈처럼 흰구름이 되는 거죠

가다보면 흰구름이 진흙더미가 되기도 하고
흰구름이 배가 되어 풍랑을 만나고
흰구름 외투를 입고
길가에 쓰러진 나를 발견하겠죠

나는 나를 깨워 이렇게 말하겠죠
<내가 나를 가질 수 없는데
내 것이 아닌 것을 가져서 뭐하냐>구요

-신현림, 「가질 수 없는 건 상처랬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내 애인은

                

내 애인은 오월대 전사

피가 고여 흐르는 이 땅의

눈부신 꽃불이다.

최루탄 자욱한 거리에서

일제히 타오르는 횃불

나는 그의 등 뒤에서

진격의 나팔을 높이 부는 나팔수다.

쓰라린 눈을 들고

전사의 무리 속에서

나는 그대 모습 쉽게 찾고

최루탄 총성 속에서도

그는 내 나팔소리 선명히 듣는다.

막걸리 한 잔에도 쉽게 취하고

라면 한 그릇에도 감사할 줄 아는

우리는 이 땅의 아들딸

피멍든 조국의 상처에

뜨거운 입맞춤으로 달려 나가는

내 애인은 오월대 전사

나팔소리 드높이 울리는

나는

전사의 애인이다.

 

[쑥고개 편지]. 최은희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해콩 2005-08-28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 다닐 때까지 정리해둔 시 파일에서 발견한 시이다. 종이 아래에 선명하게 이렇게 찍혀있다. '비 개인 토요일의 나른한 아침에 난희에게 적다. 정재가'

정재.. 대학동기인 그녀는 당시 1기였던 우리과 총대였다. '노란 셔츠의 사나이'를 잘 부르고 당시만해도 자주 있었던 데모판을 열심히 뛰어다니던... 아마도 학과사무실에서 조교의 보조를 하고 있었나? 막 들여온 신형 타자기로 열심히 타이핑 연습을 하던 정재는 어느 날 불쑥 나에게 이 시를 건네주었다. 짜다라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면서 학생운동은 무서워서 늘 피해다니던 학과 일에도 민족과 겨레에도 노동과 노동자에게도 무관심했던 나에게 이 시는 서늘하게 다가왔다. 이 시어들이 두렵고 무서웠다. 정재는 나에게 이 시를 주었다.

정재는 여군이 되었다. 여자가 취직하기는 정말 어려운 시대였다. 서울에서 이런 저런 공부를 하고 있던 우리에게 용산에서 훈련받는 중이라며 불쑥 자취방을 찾아왔었다. 그 후엔 포천으로 배치받고... 그녀의 아파트까지 찾아가서 놀던 우리는 행복하고 즐거웠다. 한명씩 부산으로 내려오게 되면서 정재도 멀어졌다.

2001년, 방송통신대 중문과 2학년 출석수업을 받으러 온 정재를 다시 만났다. 임신 5개월이었다. 같이 밥을 먹고 산책을 했다. 서울에서 결혼해서 첫 출산을 걱정하는 평범한 여군이라고 했다. 출산 후 다시 서울로 올라가야한다고, 신랑이 거기 있다고..

그녀가 지금은 병원에 있단다. 두 아이의 엄마인 그녀, 홀어미니의 맏딸인 그녀. 작년에 교퉁사고를 당했단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얼른 연락해봐야한다. 더 늦기 전에! 후회하기 전에!

심상이최고야 2005-10-04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랬구나....시를 즐기는 해콩님! 어울려요!
 

                      어쩌면

                                                                      - 聞 一 多

어쩌면 당신이 울다 지쳐서

어쩌면 지금쯤 잠들었겠지

부엉아 울지말고, 개구리야 울지말고, 박쥐야 날지마라

 

빛나던 햇빛도 당신의 눈꺼풀을 건드리지 못하게

맑던 바람도 당신의 눈썹을 흔들지 못하게

누구도 당신 앞에선 걸음을 멈추게

두꺼운 소나무 그늘을 떨쳐 시원히 덮어주겠네

 

어쩌면 당신은 지금 진흙을 기어가는 지렁이 소리를 듣는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지금 작은 풀뿌리가 물을 빠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 가는 세 음악을

욕설을 엮은 사람을 육성보다 곱게 듣는 것이다

 

그래! 눈까풀을 내리고

고이자게! 고이자게!

노란 고운 흙을 사뿐히 덮어주고

엷은 지전을 천천히 태워줄께

 

也許爾眞是哭得太累

也許, 也許爾要睡一睡

那마(그런가마)叫夜鷹不要咳嗽

蛙不要號, 편복(박쥐편,박쥐복)不要飛

 

不許陽光拔爾的眼簾

不許淸風刷上爾的眉

無論誰都不能驚醒爾

撑一傘松蔭庇護爾睡

 

也許爾聽這구(지렁이구)蚓飜泥

聽這小草的根須吸水

也許爾聽着這般音樂

比那呪罵的人聲更美

 

那마(그런가마)爾先把眼皮閉緊

我就讓爾睡, 我讓爾睡

我把黃土輕輕蓋着爾

我叫紙錢兒緩緩的飛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물만두 2005-08-27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해콩 2005-08-27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를 처음 읽은 것은 아마 중학교 때가 아니었나 한다. 어디서 어떻게 처음 읽게된 건지... 전혀 기억에 없다. 그 때는 왜 시를 읽는 지도 모르면서 여느 아이들이 그렇듯이 그저 연애시 비스무리한 것들이 보이면 예쁜 편지지를 사서 베껴두고 정리해두곤 했는데 그렇게 정리된 파일들 중에 이 시가 포함되 있다. 베껴쓴 날짜-1986. 12. 28.-까지 정확하게 적혀있다. 연애시나 서정시도 아닌데 왜 좋아하게 되었을까? 사실 이 시가 일종의 '레퀴엠'인줄도 전혀 몰랐다. 원본을 구해보고 거기에 '葬歌'라고 적혀있는 것을 보고서야 알았다.
당연히 우리나라 시인으로 알아던 중국현대시인 '聞一多' . 중국 어학 연수 가서 西單에 있는 큰 서점에서 이 시인이 갑자기 생각난 것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1925년 3월 27일 처음으로 발표되었으며, 원제는 '해(염교해)露詞'며 '불우하게 요절한 한 소녀를 위해서 짓다'라고 설명이 붙어있다. 장송곡.. 것도 요절한 소녀의...
그나저나 어설픈 중국어 실력으로도 이 시의 한국어 번역에 조금 문제가 있는 것 같긴하다. 베끼는 과정에서의 실수도 있을 것이고... 그래도 그대로 베껴둔다. 중국과 수교도 아득했을 그 시절... 그 누군가의 번역과 나의 추억을 그대로 남겨두고 싶어서..

그 시절 나는 어떤 아이였을까?
 

간이역 

                         - 정 공 채

 

피어나는 꽃은 아무래도 간이역

지나치고 나면 아아,

그 도정에 꽃이 피어 있었던가

 

잠깐 멈추어서

그 때 필 것을, 설계設計

찬란한 그 햇빛을 ````

 

오랜 동안 걸어온 뒤에

돌아다보면

비뚤어진 포도鋪道

아득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제 그 꽃은 지고

지금 그 꽃에 미련은 오래 머물지만

져버린 꽃은 다시 피지 않는 걸.

여숙旅宿에서

서로 즐긴 사랑의 수표처럼

기억의 언덕 위에 잠깐 섰다가

흘러가 버린 바람이었는 걸```

 

지나치고 나면 아아, 그 도정에 작은

간이역 하나가 있었던가

간이역 하나가

꽃과 같이 있었던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우리들은 다 완벽하다

                                                   - 임 보

 

독수리는 독수리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부엉이는 부엉이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보라매의 부리는 먹이를 쪼는 창이지만
딱따구리의 부리는 집을 짓는 연장이다

물에 사는 오리의 발은 물갈퀴요
뭍에 사는 닭의 발은 흙갈퀴다

창공에 날개 드리운 수리부엉이여
한 마리의 벌 나비를 비웃지 마라

그대가 어이 알리
꽃 속의 달콤한 이 꿀맛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