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난 주엔 차를 분실했다. 우리 반 수육이 중국 다녀오면서 사다 준 黃金美仁 차를 샘들이랑 같이 마시려고 쪽지를 살짝 붙여 교무실 싱크대 위에 올려두고 갔는데 다음 날 아침 출근해서 보니 없어졌다. 그날 밤 수행평가 채점을 하느라 9시 반쯤에 학교를 나가면서 올려두었으니 다음 날 7시 50분 사이에 없어진 것이다. 황당하고 당황스러운 복합적인 감정이 일었다. 물론 수육에게는 미안해서 얘기 못했다.

오늘 아침, 교무실 책상 위에 늘 두고 다니던 필통이 없어졌다. 학교에서 노트북 배정받으면서 받은 USB도 하필 그 곳에 있었다. 늘 들고 다니면서 그 날따라 필통속에 넣어두곤 깜빡! 오늘은 몸도 안 좋은데... 마음도 안 좋아졌다.

지난 학교에선 지갑을 한 번 분실했고, 화장품 주머니도 잃었다가 껍데기만 찾은 일이 있었다. 올 2월 졸업식이 있던 날엔 2학년실에 도둑이 들기도 했다. 특별실 문은 잠겨있었고 책상 서랍도 다 잠궈두었는데 그걸 발로 차서 찌그러뜨려 열고는 몇몇 샘들 지갑속의 상품권이랑 현금만 홀라당 털어간 일이 있었다. 두어 분이 그렇게 도난 당하셨는데 그 기분이란...

사실 학교에서 분실사고가 잃어나면 바로 '아이들'을 의심하게 된다. 지난 학교에서 지갑을 잃어버렸을 때나, 오늘 아침 지갑이 없어진 것을 알아차렸을 때도 솔직히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어느 녀석이..."이다. 그리곤 혼자 괜히 섭섭하고 서럽다. 나름대로 아이들과 친하려 노력하고 아이들도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알아주리라 생각하는데 이럴 때는 그런 마음도 혼자만의 착각이었구나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유치한 감정이다. 무엇보다 잃어버린 건 물건을 방치한 내 탓이고 그걸 잃어버렸다고 대상도 없이 피어오르는 막연한 섭섭함이라니. 아무튼 분실이 잦다고 해서 이 많은 물건들을 어디 쟁여넣을 수도 없고 어쩌나?? 법정스님 말씀처럼 물건은 돌고 도는 것이니 어디선가 잘 쓰이기를 바랄 수 밖에. 그리고 무조건 아이들을 의심하는 버릇은 고쳐야겠다. 그냥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어라, 필통 없어졌네. "

하지만 고가의 물건을 잃어버렸을 때도 이런 식의 마음 단속이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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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6-09-11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학년실에 둔 노트북을 잃어버린 적이 있었답니다.
그 때의 황망함이란... 노트북 가격보다도... 그 안에 들었던 보충수업 시간표가 아깝기 그지없었답니다. 새로 짜느라 땀깨나 흘렸지요.
잃어버릴 것이 많다는 것은 가진 것이 많다는 것이겠지요.
책상 서랍에 잃어버릴 것 없이 열어두고 다니고 싶은 요즘입니다.

해리포터7 2006-09-11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그많은 아이들을 다 보듬을 수 없는 노릇이잖아요..그냥 고가의 물건은 단속을 잘 하는 길밖에 없네요..님! 도 닦으시네요...ㅎㅎㅎ마음 편하게 털어버리셔요..이뿐필통 장만하시구요..제 중학교 친구 하나도 중학교에서 수학선생님으로 지낸다고 하네요..님을 보면 그친구 생각이 나요..사진의 분위기도 비슷하시구...그래서 더 안쓰럽습니다..

해콩 2006-09-11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뜨아아아~~ 저같으면 엉엉 울었을걸요. 수업자료랑.... 개인적인 편지랑.. 컴에게 일정부분 머리속을 나눠 주고 있지나 않은지.. 가급적 도구의 도움 없이 인간의 몸만으로 홀가분하게 살면 좋을텐데 말예요.

해콩 2006-09-11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리포터님~ 벌써 편하게 훌훌 털어버렸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들이 모두 도둑님으로 보여서 제가 괴로워요. ^^ 생각보다 제가 마음이 非좁거든요. ㅋㅋ

BRINY 2006-09-11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대폰이랑 지갑이랑 대충 책꽂이 사이에 던져놓고 있다가 서랍으로 옮겨넣었네요. 그래도 무엇보다 스스로 조심하는 게 제일이겠지요...

해콩 2006-09-11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나쁜 일은 없을 수록 좋겠지요. 아이들도, 나도.
 

한 달에 한 번 禁食을 해야겠다.

요즘 내게 남은 욕망이라곤  '식욕'이 유일한 것 같다. 먹어댄다. 살이 찌는 게 문제가 아니라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내 모습이 마뜩찮다. 한 달에 한 번은 종일 굶어봐야겠다. 몸의 허기로 마음의 허기를 잊을 수 있을까? 무슨 짓을 해도 배부른 자의 헛짓 같이 느껴지는 죄스러움을 벗어나기엔 역부족이지만...

 

내일부터 한 가지씩 아이들이 내게 남기는 '흔적'을 기록해야겠다.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아이들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다. 이러다간 잊어버리겠다. 묶어둘 빌미가 필요하다.

사실 며칠 전엔 ㅈ모를 등교길에 만났다. 여름방학 후, 녀석이 뭔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여자친구가 생겼고 그 아이가 머리카락에 손 대면 가만히 안둔다고 해서 두발검사가 있는 날이면 결석을 한단다. 어머니가 학교에 전화를 해주신다나? 졸업하면 뭐할건데? 했더니 처음엔 농사를 짓겠다고 했다. 그거 얼마나 힘든 일인줄 아냐? 하고 싶었지만 꿀꺽 삼켰다. 아이들은 졸업 후 할 일이 궁하면 '농사 짓겠다'는 무책임한 말을 잘 뱉아낸다. 암튼.... 그 말 대신 내가 해준 말이라고는 틀에 박힌 애매한 잔소리... 한심했다. 하지만 그 후론 얼마간 생각해보았는데 뭐 딱히 내가 따로 해줄 말도 생각나질 않는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할까? 어떤 말을 해야 할까?

목요일, 7명의 아이들이 보충수업을 빠지겠다고 했다. 대부분이 아파서였다. 그 중 네 명은 우리 반 반장을 포함해 녀석과 친한 세 명이었다. 솔직히 의심스러웠다. 한꺼번에 달려와 동시에 생리통이란다. 특히 ㄷ원이는 성실한 녀석은 아니다. 그래서 부모님 확인을 강요했더니 울먹이기까지 했다. 나중 한 녀석은 어머니도 의심한다고 투덜투덜... 내 잘못이다. ㄷ원이 말이 맞다. 같은 날 아프지 말란 법이 어디있어요? 에구... 녀석에게 담임의 입장에 관한 궁색한 변명따위나 늘어놓다니 부끄럽다. 뒷날까지 녀석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방학숙제 - self camera로 하루 일과 찍어보기-해온 데 대한 상 [얼굴 빨개지는 아이]를 받고도 고맙다는 인사 한 마디 안한다. 물론 인사는 평소에도 잘 안하기 때문에 조퇴 의심한 데 대한 앙심의 표현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난 너무 소심-세심하다. 이런...

암튼... 이런 저런 일들로... 아이들로 인해 일렁이는 나의 마음을 기록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처럼. 이건 대단한 노동이 될텐데 감당할 수 있으려나...

이것들이 오늘 내가 느닷없이 한 결심 두 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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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포터7 2006-09-11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콩님 선생님이란 참 힘든직업인거 같아요..제가 집에서 애들을 키워봐도 그렇고 애들친구가 와도 애매할때가 많은데 다큰녀석들을 어떻게 감당하시는지 늘 존경스럽답니다..어렸을적에 선생님을 꿈꾼적이 있었지요..하지만 애들키우면서 제 감정 조절을 잘 못하는 자신을 깨닫고는 정말 선생님 안하길 잘했다 싶었어요.ㅎㅎㅎ

프레이야 2006-09-11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마음이 허기져 먹을 걸 입에 달고 있는 경우가 있어요. 제가요.. 그리고 해콩님은 참 좋은 선생님인 것 같아요. 아이들 마음 관리하기 정말 힘들죠..

해콩 2006-09-11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터님, 혜경님.. 안녕하시죠? ^^
내친 김에 오늘 당장 하루를 굶어봐? 생각하다가 다음주 월요일로 미뤘어요. 생리중이라 약간 어지럽고 몸이 다소 가라앉은 상태거든요. 교사도 아이들처럼 생리 휴가를 한 달에 한 번 쓸 수 있는데 감히 그걸 쓰겠다고 말할 용기가 없네요. 학교는 내가 없어도 잘 굴러가는데 말이요. ㅋㅋ 이제 가을이라 마음은 점점 더 허기질 것이고 먹을 것은 쏟아져 나올텐데... 이 가을에 무모하게 금식 결심을 하다니. 그렇지만 하루쯤 굶는 것, 잘 할 수 있을 거예요. 그쵸? 보기보다 제가 독한 구석이 있어놔서리..ㅋㅋ

아이들 마음 보듬는 건.. 정말 힘들죠. 제 마음 하나 제대로 간수 못하는데요.. 그렇지만 길지 않지만 제 경험으로는 교사들이 아이들을 이해해주려고 노력하는 것 보다 아이들쪽이 더 너그러웠던 것 같아요. 뭔가 잘못했을 때, 바로 "미안. 샘이 잘못-실수했다"고 사과하면 늘 받아주거든요. 진정으로 대하면 무관심한 녀석은 있어도 외면하는 녀석은 없답니다. 정말이예요~ ^^

BRINY 2006-09-11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발검사가 있는 날 결석을 한다니, 그 녀석도 참 단세포네요. 재검사는 안한답니까. 오늘 보니까, 금요일날은 근처 학교 축제했다고 야자 출석부에 줄 좌좌작 그어져있고, 오늘은 이틀 놀고 왔는 데다가 날 춥다고 벌써부터 겨울잠 모드로 들어간 아이들-..-

해콩 2006-09-11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체 단속이 있는 날은 결석하구요, 아침엔 일찍 와서 교문지도 피하구요. 수업시간엔 대충 뻐팅기거나 자구요. 뭐 그런 식이지요. 그 반 담임샘이나 저나 도무지 아이들 헤어스타일에 신경쓰는 스타일은 아니라서요. ^^;
 

2006. 8. 23. 서울에서

그날 아침, 마음 먹은 대로 5시에 눈을 떴다. 찜질방.. 여러 모로 편리했지만 결정적으로 잠자리가 불편했다. 요도, 이불도 없었고 들락날락 하는 낯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잠을 청하기는 둔한 나로서도 쉽질 않아 깊은 잠을 자지는 못했다. 꼬박 밤을 새웠을 여탕의 아주머니께서 새벽잠을 청하고 늘 그렇게 탕을 청소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할 아주머니들이 박박 여탕 바닥에 세제를 문지르는 가운데 대충 씻고 챙겨 나왔다. 8천원의 입장료에 호박죽 3,000원+인터넷사용료 1,000을 더 지불하고. 가방이 좀 무거웠지만 명륜동을 거쳐 성대 쪽으로 걸어올라갔다. 많이 변했다. 금잔디 광장이야 그 맘 때에도 뭔 건물을 짓는다고 눈독을 들이고 있었으니 기대할 것도 없었지만 늘 공부하던 도서관 아래쪽, 허름한 건물이 있던 자리엔 600주년 기념관인가 뭔가가 들어서서 그야말로 삐까뻔쩍했다. 도서관 뒤쪽으로 와룡산이 보이는 전망좋은 공간이 있었는데 그 곳도 막아버렸고 낡은 책상이랑 의자가 후줄근 쌓여 볼쌍 사나왔다. 새벽 커피를 한 잔 옛 살던 곳을 둘러보며 회상~ 도서관 그 자리에서 뭔가 끄적이고 싶어 들어섰는데... 막막해졌다. 경비아저씨게 쫓겨나왔다. 열람실에 들어가보려고 해도 카드공용 학생증이 있어야하나보다. 모든 것이 야박해졌다. 나를 증명하는 '증'이 나를 대신한다. 그 땐 그렇지 않았는데... 흘러간 것들을 무조건 향수하는 습관은 아니다. 언제부턴가 나를 포함한 세상은 '비어있음'을 견디지 못하는 것 같다. 그 공허함을 거의 의미없음으로 받아들이는 건 아닌지.. 그 아침 내가 본 풍경들에서 느낀 것이라면 사람들이 비어있는 공간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 그것이다. 기어이 꼭대기까지 끙끙 기어올라가 마을버스를 타고 온 길을 되짚어 대학로로 다시 돌아와 둘러본 광경 역시 이러한 느낌에 방점을 찍게 했다. 전날 밤엔 어두워 미쳐 살피지 못했는데 대학로 도로가운데 세워진 말뚝들은 다 뭐냐. 그리고 이렇게 도로가 좁지도 않았단 말이다. 노천공원도 마찬가지. 뭔 이동 통신사가 다 망쳐놨다. 최손한 내눈엔 그리 보인다. 그 자유롭던 광장은 어디로 갔느냐... 걸어 걸어 삼련서점을 찾았지만 실패했다. 유일하게 중국 수입 서적들을 취급했던 그 서점에 걸려있던 액자에 걸려있던 글귀를 참 좋아했는데... 이런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디로 옮겼나 싶어 주위를 한 바퀴 둘어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다시 제자리. 대학로. 서울역에서 8시에 ㅎㅈ이를 만나기로 했다. 수원에서 이까지 오려면 새벽에 출발했겠지? 부산 가는 표를 끊고 화장실에 다녀온 후 계획에도 없던 '철도회원'카드를 만들어버렸다. 것도 현금 이만오천원이나 내고. 바로 후회했다. 가끔 이렇게 도발적으로 행동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반가운 오양! 시립미술관은 덕수궁 근처에 있다. 덕수궁 옆 '그 집'에서 콩나물국밥을 아침으로 먹었다. 겨울이나 여름이나, 아침이나 점심이나 이집을 빠글빠글하구나. 11시 개관. 둘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몇 년 만이지?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는 듯. 일본, 중국, 우리나라 중등학교 한문 교과서를 비교하는 논문을 준비 중이란다. 이런 연구논문이 상당할텐데.. 그 중엔 실제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쏠쏠할텐데... 늘 일상에 쫓겨다니느라 챙겨보질 못하는구나. 안주한 걸까? 암튼.. ㅎㅈ이의 논문은 꼭 챙겨봐야겠다. 피카소전을 졸면서 봤다. 역시 무리였는지 잠이 쏟아지는 것이다. 전날 본 인상파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의 작품 수! 평생 엄청난 작품을 남긴 피카소이니까. 그의 사람들과 관련된 작품배치. 재미있군. 여성들.. 화가의 여성들.. 아이들... PAPER에서 '그는 행복했을까'하는 질문을 전시회에 대한 소감으로 남긴 글을 보았는데 작품을 졸면서 봐서 그런지 변하는 감정을 인정하면서 그런 삶을 녹여 작품 활동하면서 '그는 행복했을 것 같다'는 근거 없는 느낌이 들었다. 지하철을 타고 무작정 인사동으로 갔다. 그냥 점심먹고, 겨우 농협 찾아 ㅎㅈ이는 등록금 넣고 나는 돈 좀 찾고. 서울역으로 돌아와 차시간까지 팥빙수 먹으면서 수다 떨었다. 쓸데없는 말을 너무 많이 한 것 같다. 돌아오는 열차... 역시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의 창가자리 '운빨'이 떨어진 것이 확실하다. 해가 지는 오른쪽 창가자리를 원했는데 왼쪽에 그것도 칸막이 때문에 창밖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열악한 자리다. 내쳐 잠들었다. 8시 반쯤 도착! 집에 도착하자마자 샤워하고 가족들이랑 휴양림으로 향했다. 이리 저리 흘러다니며 구경하고 쉬고... 간만에 가족들 사이에서 그저 편안했다. 그렇게 24일까지 시간은 잘도 흐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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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다. 서울.

무늬조차 수업같지 않은 수업 두 시간하고, 한 사람씩 기념사진 찍으며 수료증 받고, 사람들이랑 안녕~ 하고 기숙사에서의 마지막 점심을 샘들이랑 먹고, 방 짝지샘이 태워줘서 터미널까지. 22일 1:30 차로 서울 도착하니 거의 4시. 어디로 갈까? 만나기로 한 동생은 저녁 때나 되어야 시간 될 것 같으니... 피카소전 보러왔는데... 예술의 전당이 더 가깝다는 생각이 퍼뜩 들어 계획을 수정했다. 생각해보니 국립박물관의 유물은 다음번에 와도 그대로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유물전같은 특별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럼 오늘은 인상파 화가전 보고, 내일은 피카소전 보고 혜ㅈ이랑 놀면 되겠다.

지하철 타는 감각을 다 잃어버렸다. 하긴 8년이나 흐른데다가 새로운 노선도 너무 많이 생겼다. 서울은 점점 팽창하고 있다. 지하철로 2시간 정도 가면 그야말로 경기 일대를 대충 돌아볼 수도 있으니. 그러나 두 시간이면 공주를 세바퀴는 돌 수 있는 시간이다. 시간은 상대적이다. 서울서는 시간이 빨리 흐르는 만큼 사람도 빨리 지치고 늙을 것 같은 느낌이다. 시내버스 40분 기다려 시내 한바퀴 도는데 30분 걸리는 경험을 이곳 사람들은 상상이나 하겠는가? 기다리는 시간을 견뎌내지 못할거다.

암튼 예술의 전당은 강남터미널에서 겨우 두 코스. 내려서 마을버스 타고 (걸어도 될 거린데 공연히 맘이 급하고 지리를 몰라서리) 예술의 전당. 8년전만 해도 이곳엔 거의 공터가 많았는데 지금은 커다란 건물들이 꽉꽉 들어찾다. 징그럽다. 이젠 잊혀진 삼풍백화점이 있던 자리도 여기 어디였던걸로 기억하는데... 덥다. 작년 베이징의 날씨처럼.

한가람 미술관 어른 만이천원. 할일혜택 전혀 없이 쌩돈 다 내고 표를 끊었다. 가방은 표 받는 아가씨에게 맡기고 들어선 시간이 4시 반쯤? 혜ㅈ에게 전화하고 들어갔다. 인상파? 사실 잘 모른다. 입구에서 작은 도록을 하나 샀지만 읽을 여유도 없고 그냥 보고싶기도 하고. 그냥 이런 저런 마음욕심 다 내려놓고 그림과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니 그림이 더 친숙하게 다가온다. 부담없이 뜯어보며 그 시대를 떠올려보려고 했다. 어떤 사람이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더 전에 어떤 장면에 땡겨서 붓을 들었다. '세계는 늘 똑같은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빛에 따라, 내가 보고자 하는 것에 따라 바뀔 수도 있다.'는 발칙한 생각은 당시로선 놀라운 것이었으리라. 모든 대상을 옹기종기 틀 안에 몰아넣는 것이 아니라 한사람의 신체의 일부도 캠버스 밖에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거다. 점묘법으로 표현한 '빛의 파편' - 캬~ 이건 르느와르의 표현이다. -  들이 일렁이며 다가온다. 이름이 너무 어렵고 길어 작가가 누군지는 모르겠는 <흰색 공동주택> 앞에 섰을 때 '몇번의 터치로 이 그림은 완성되었을까? 세어보면 재미있겠다.'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은 엉뚱한 생각을 했다. 화가의 딸, 카페의 무희, 집시, 걸인, 국회의사당, 외로운 바위, 6월, 이른 봄, 일출, 롤라스케이트를 타는 아이들, 빨간 옷을 입은 엄마와 아이, 첫 아이의 죽음, 월출, 고요한 강, ...... 더 생각하면 더 쓸 수 있을 것도 같은데..

6시 반에 나왔다. 두 시간 정도 돌아본 것이다. 에어컨 때문에 추워서 더 견딜 수가 없었다. 가방을 찾아 의자에 앉으니 똥그란 일몰이 눈에 든다. 멋지군.  혜ㅈ에게 전화를 하고, 빵 하나를 커피와 함께 먹고. 혜ㅈ이는 지금 바로 수원으로 오라지만 나는 시간이 아깝다. 더 놀고 싶다. 그래서 조금 더 놀고 가마하고 대학로를 겨냥해 갔다. 괜히 옥수역에서 내리는 바람에 시간이 좀 지체됐다. 너무 무거운 가방을 락커에 넣고 동숭아트센터로. 마침 나루세 특별전을 하고 있었다. [방랑기] 보고 싶다. 근데 마치면 11시. 수원은 불가능한 시간이다. 혜ㅈ에게 전화해서 허락 받고 찜질방에서 자기로 했다. 드뎌 찜질방 문화도 체험을 해보나? 

[방랑기] 62년 작품이다. 124분. 우와~ 대단한 역량이다. 60년대 영화는 90분 정도도 긴 축에 속했던 거 아닌가? 암튼 영화는 재미있었다. 실제 인물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인데.. 배우들의 적당한 오버연기도 코믹하고 원래 캐리터가 그렇겠지만 예쁜 척 하지 않고 주인공도 맘에 든다.

나오니 11시 얼렁 지하철 4호선 2번출구의 07번 락커에 맡겨두었던 짐을 빼서 가방에 다시 쑤셔넣고 어제 향ㅇ샘이 네이버 '엄마'에서 알아봐준 24시 대학로 불가마 찜질방으로 향했다. 입구에 들어선 순간, 혜ㅈ의 걱정은 그야말로 기우였구나 했다. 환한 것이 이건 뭐 거의 동네 할인마트 수준이다. 대중탕에 찜질방에 수면실에 간식실까지. ㅋㅋ 싸고 안전하다. 대도시에 놀러다닐 때는 자주 이용하면 좋겠다. 호박죽으로 저녁도 건더뛰어 허기진 속을 좀 달래주고 샤워하고 컴앞에 앉았다. 시간당 천원! 이제 남은 시간 2분. 1시간이 정말 후딱 가는구나. 한시 반이다. 이젠 자야 내일 피카소와 그 연인들(여인들?)을 제대로 만나지. 혜ㅈ이도! 5시에 일어나 5시반엔 이곳을 나가 성균관대 주변을 둘러볼 계획. 8년전 추억을 곱씹으며. 풀무질도 한 번 둘러보고. 그리고 서울역에서 8시에 혜ㅈ이를 만나기로 했다.

잠 잘 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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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6-08-24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료하셨군요. 1정이 되기 쉽지 않죠?ㅋㅋ 축하드립니다.
찜질방을 무슨 범죄 소굴처럼 생각하셨나봐요. ㅎㅎㅎ 이제 곧 개학인데, 건강하세요.

해콩 2006-08-25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솔직히 1정 연수, 별 것 아닐 거라고 생각해서 연수중에 위로방문하고 그러는 거 그저 재미삼아 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구요. 오랜 시간 동안 붙잡혀 있는 것도 그렇고 간만에 하는 공부 스트레스도 장난 아니고... 위로방문이 필요하겠던걸요~ 글샘샘은 1정 받으신지 오래 되셨죠? 존경하옵니다.
저 일기를 쓰고 나서 바로 여자용 수면실에 들어섰는데 밤새 잠을 설쳤어요. 사람들이 들락거리고 요나 이불도 없어서... 어떤 악조건속에서도 숙면할 수 있는 제가 잠을 설치는 일은 여간해선 보기드문 현상인데.. 암튼 씻는 건 몰라도 잠을 제대로 자려면 찜질방은 적합치는 않겠다는 결론. 범죄소굴은 아니었어요~ ㅋㅋ
 

1정 연수 마지막 수업이다. 9시부터 한 시간... 10시 반부터 또  한 시간.

그리고 수료증을 주려나? 그 자체론 별 의미 없지만.

 

작은 라면 박스 한 상자만큼, 더도 덜도 아니고 딱 그만큼의 짐을 샀다.

아침밥도 챙겨먹고 씻고...

널.브.러.진 마음도 다시 챙겨 넣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에게 편지를 쓰면서.

 

참 연미산엔 못 갔다. 비가 왔다. 어제부터. 그래서 일출은 못 봤다. 마음을 챙겼으니 상관없다.  

비가 오니 더 좋다.

 

한 시간쯤 뒤에 公州와 안녕이다.

다시 볼 때까지 제발 어지러운 개발 멈추고 어느 한 구석이라도 지금 모습 간직하고 있기를...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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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06-08-22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아이들이 샘을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가시겠네요~

sooninara 2006-08-22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주 연수일기 잘 읽고 갑니다. 저도 공주 가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