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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엔 무리일까 생각했지만 욕심을 냈다. 7시 반에 출발한다고 이주형샘이 공지했지만 '나도 꼭! 가고 싶으니 8시까지만 기다려달라'고 댓글을 달았다. 실은 살이 통통하게 오르던 그제밤부터 그 달을 탐내고 있었다.

학교서 이런 저런 일로 꼼지락거리다 집에 도착한 시간은 거의 4시. 아이들 간부 수련회가 있어 금정산 수련원에 가야한다는 준비된 뻥을 때린 후 이것 저것 챙겨넣은 배낭을 짊어지고 집을 나섰다. 아! 아름다운 석양... 양갱까지 챙겨넣고 택시를 타고 지하철 온천장 역 근처 두번째 육교에서 내려 마침 대기 중이던 산성버스 203번에 냅따 올랐다. 어느새 달이 둥그렇게 떠오르고 있었다. 기사 아저씨의 운전솜씨는... 젤 앞자리로 자리를 바꾸면서부터 '스릴 두배, 만족 세배'였다.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기분. 옆차선의 자가용들은 줄을 지어 내려오고 있었는데...

동문에 같이 내린 아저씨들을 따라 컴컴한 산길을 가자니 조금 무서워졌다. 의주샘은 전화를 안받고... 두번째 전화에서 통화 성공. 조금만 더 가면.. 동문.. "강난희" 의주샘 목소리였다. 내가 먼저 "의주야"하려고 했는데.. 타이밍을 놓쳤다. 컴컴한 '루'안에 의주샘 혼자 있었다. 커피랑 떡이랑 먹으며 나머지 사람들-주형샘과 경희샘을 기다렸다. 잠시후에 홍송희샘도 함께 도착. 그리고 준호샘도 오는 중이란다.

그렇게 6명이서 출발하게 되었다. 달은 휘영청~ 구름을 잽싸게 지나가고 있었다. 피부를 스치는 바람이 아주 유쾌했다. 그리고 더 유쾌한 건 샘들과 주고 받은 재미난 이야기들이었는데.. 기억이 안난다. 금정산의 능선.. 북문... 내려다 본 야경. 동래일대는 물론 저 멀리 광안대교까지 보였고 화명동과 김해까지.. 능선을 따라 걸어서 그런지 바람이 계속 밀려왔다. 정말 밀려왔다. 태풍의 영향으로 아주 축축한 바람이었다. 풀들은 땅에  납작 엎드리고 나무들은 쓍쓍 시달리고 있었다. 그 느낌.. 어렸을 때 시골에서 맡아보았던 숲의 냄새가 났다. 늘 잊고 있다가도 한 번씩 꼭 같은 냄새를 맡게 되는데 머리속에 각인이 되었나 하는 생각을 했다. 각인되는 감각... 이런  밤은 공감각적으로 각인되어 잊혀지지 않을 듯 하다. 시각과 후각, 촉각, 청각, 또 미각까지.. 라면을 끓여먹었다. 역시 주형샘.. ^^  생라면으로 하나를 뽀실라 먹고 남은 세개를 끓여서 6명이서 국물하나 남기지 않고 깨끗이 먹어치웠다. 솟대가 아름다운 금정산장에서... 후식으로 송희샘이 깍아온 배, 내가 준비해가 떡.. 커피.. 먹는 것도 남기는 거다. 미각의 추억으로.

범어사로 되짚어 내려오는 길은 쉽지 않았다. 귀찮고 번거로왔다. 돌들땜에. 걸려 넘어지면 어디 한 군데는 족히 깨지겠다. 발목이 삐든가... 능선이 아니라 골짜기라서 달빛의 은혜도 없었기에 준호샘이 후레쉬 맨이 되어주었다. 늘 자랑해 마지 않는 '그 성능 좋은 군용 후레쉬'에 의지해서 한발 한발.. 간혹가다 진창...미끄덩...  희끄무레 하게 보이는 안내판들이 사람으로 보이기도 해서 '혼자 왔으면 기절까지는 아니라도 간이 쪼그라들었겠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주형샘이 갑자기 우리들에게 쓰레기를 던지기도 했지만 소기의 목적은 별로 달성하지 못했다. 사실 가만히 서 있는 희끄무레한 안내판이 더 무서웠다.

범어사 경내로 진입했다. 두 번째 범어사 구경인데 이렇게 밤드리 노닐다니 정말 행운이다. 지난 번 봤던 대숲이 쏴쏴 울고 있었고 땡그랑 땡그랑 풍경소리 요란했다. 그리고 수위아저씨들...생각해보면 당연하지한 절집에도 수위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기념 촬영하고 막 계단으로 내려서려는데 또 한분의 수위아저씨 등장... "딸아이들이 (딸아이? 이 얼마만에 들어보는 흐뭇한 호칭인가! ^^; )이렇게 밤늦게 다니면 안된다. 빨리 가라. 웃기는 왜 웃노? (어찌 안 웃을 수 있는가. 딸아이라는데.. 계속 웃음~~) " 아저씨는 계속 우리 "딸아이' 세 명만을 야단치셨다.

계속 걸어도 좋았을 것이지만 택시를 잡았다. 두대에 나눠타자며 주형샘과 준호샘을 버리고 출발하려는데 기사분께서 마저 타라고 하셨다. 택시잡기 어려울 거라며.. 감동한 우리는 얼렁 두 사람을 불렀다. 뒷자리에 5명.. 그나마 나는 엉덩이는 시트에 걸칠 수라도 있었는데 황경희 샘이 자꾸 미끄러져 내려가더니... 푹 꺼져 버렸다.

상남회관에서 내려 경희샘의 저린 다리를 펴고 이번에는 널널하게 의주샘의 차를 옮겨탔다. 자주 없는 이런 밤엔 당근 한 잔 더 해야지. 준호샘의 '술마신 새벽 포장마차 디비기' 경험담을 들으며 부대앞에 도착, 차를 대고 술집을 찾아 헤맸다. 고맙게도 3시 반까지 영업하는 집을 물색, 아주 비싼 술-백세주 설중매-과 비싼 안주 -오뎅탕, 파전-을 시켰다.

지율스님의 경직된 투쟁방식(너무 경직된 표현인가?)에 관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학교 현장으로 옮겨와 우리의 모습과 그들의 모습을 비쳐보는 계기도 되었고.. 화제로만 본다면 100분 토론을 방불케 하는 술자리였다. (갑자기 리영희 선생님은 지율스님을 어떻게 생각하실까 궁금하다. )

3시! 남은 건 우리뿐. 술집을 나와 의주샘 차에 올랐다. 벌써 많이 기운 달을 보며 '너무나 흡족한' 밤의 끝자락을 달리고 있었다. 씻고 내방에 들어오니 4시.. '같이 못 갔으면 우짤뻔했노. 이런 밤은 자주 오지 않는데... '  너무나 만족스런 하루였다. 다음에도 이런 기회는 절대로 놓지지 않으리라 생각하면 기절...

12시에 일어나 점심을 먹었다. 모처럼 푹~ 잤다. 오늘은 그냥 하루 종일 게으름 부리며 쉬었다. 이리 저리 뒹굴며 책도 보고 그래도 세탁기도 한 번 돌려주고, 청소기도 한 번... 낮잠도 자고 또 책 보고..

[한국 현대사의 길잡이 리영희]를 다 읽었다.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솔직한, 실천하는 지식인'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주의자'이기를 거부하는 '휴머니스트'. '휴머니스트'! 인간이 인간으로 남길 원한다면 인류의 궁극적 목적은 늘 '휴머니즘'일 것이다. 그것이 현실적으로는 30%정도의 악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존재라하더라도. '자신에게 솔직할 것, 그러나 노력할 것!' 내가 배운 것이다.

내일부터 다시 일과가 시작된다. 사실 요즘은 학교 가는 것이 두렵다. 아이들 앞에서의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욕심이겠지만 '소통'의 부재를 느낀다. 나를 말하고, 저희들을 들어주고 싶은데 아이들이 그걸 원하지 않는 것 같아 갑갑하다. 아이들은 무관심하고 늘 바쁜 듯이 보인다.  시간이 지나길 기다리며 기대도 실망도 하지 말라는 충고를 들었지만 나는 하루하루 마음에 상처가 난다. 이런 시간들을 견디기에 나는 너무 비좁은가? 욕심이 과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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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율스님.. 오늘, 58일째 단식을 푸셨다. 입원하셨단다.

사진으로 본 천성산은 참 아름답다. 그 산을, 그 산에 깃든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세 번이나 목숨을 건 단식을 하셨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스님의 욕심이라하지만, 그런 욕심 때문에 세 번씩이나 목숨을 내놓을 사람이 있을까? 그건 또 단순한 '욕심'은 아닌 것이다. 개인을 버린, 모든 이들을 위한 '욕심'이겠지. 개인의 '욕심'을 버리고 진심으로 들여다 보아야 보인다. 자신의 일-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그렇게 매몰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또 부러웠다. 그런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단순히 이렇게 말하는 것조차 죄스럽다.

개학 첫날 오늘, 실은 몸이 좀 무거웠다. 갈까 말까 계속 망설였다. 누군가 같이 간다면 모를까 혼자 대중교통으로 그곳에 가기에는 너무 아득했다. 그러면서 후원금 몇푼 내고 집회 몇 번 간 것으로 양심의 빚을 덜어보려했던 불순함을 씻고도 싶었다. 황경희 샘한테 연락이 왔다. 가야지... 같이!

이 집회는 아주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다. 장준호샘 말처럼 극좌에서 극우까지의 사람들이 한 자리에 있는지 어떤지 나는 모르겠지만 연령이나 성별은 확실히 그렇다. 오늘은 금정초등학교 6학년 여학생이 앞에 나와 글을 읽었고 개구장이 1학년들이 노래를 했고 수녀님들도 노래를 해주셨다. 소박하지만 다양한 힘이 모이는 참 마음 따뜻한 집회다. 노래하고 웃고 느끼는 동안 몸이 좀 가벼워지는 듯도 했다. 역시 사람은 움직여야한다.

집회장 한 쪽에 마련된 스크린에 천성산의 모습과 지율스님의 인터뷰가 흐른다. 눈물 흘리시는... 코끝이 찡해왔다. 목숨을 걸고 무언가 하는 사람.. 부럽다. 내가 무엇에 목숨을 걸고 있는 지, 혹은 걸어볼 것인지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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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09-05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율스님 동생의 아린 편지 [지부 게시판에서 펌]

저에게는 언니가 둘이 있습니다. 사실 말이 언니지, 나이 차이가 많은 언니들은 저에게는 엄마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한 언니는 저를 먹이고 입혀서 키웠고, 다른 한 언니는 제게 산과 강으로 여행을 시켜주며 자연을 보여주고, 어린나이에 이해하기 힘든 문학과 음악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런 엄마 같은 언니가 지금 50일이 넘는 단식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말릴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언니가 얼마나 천성산을 사랑하는지, 그것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피나게 노력하며 싸웠는지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바짝바짝 말라가는 언니를 보면 애가 타지만 겉으로는 웃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속상해하면 저를 집으로 보내려고 할 것이란걸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설마 죽게까지야 놔두겠냐고 생각하면서 버티기를 50여일, 속살에는 여름장마에 습기가 차 생긴 피부병과 영양부족으로 검버섯 같은 까만 점들이 수없이 박혀 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걷고 말하는 것을 보면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어떤 사람은 뒤에서 뭘 먹고있는 건 아닌가 의심하는 분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분께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당신이 30일 정도만 단식을 하고 바로 다른 음식을 삼켜보라고. 아마 죽지 않으면 위독한 지경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저는 3번의 단식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래서 단식을 하는 것보다 단식이 끝난 뒤 더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단식이 끝나도 바로 음식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우선 여러 잡곡을 푹 끓여서 꼭 짜내고 국물만 먹었습니다. 제철에 나는 채소와 다시마 끓인 국물 정도로 일주일정도는 속을 다스려야 죽이라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긴 단식 중에는 물 종류 이외에는 먹을 수 없다는 것을 단식을 해본 분이라면 잘 알 것입니다.

언니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억지로 등을 떠밀어 집에 오기는 했지만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속상해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맡겨놓은 아이들을 데려올 생각도 않고 펑펑 울었습니다. 다른 때 같으면 울만큼 울면 속이 시원해지는데, 왜 울면 울수록 답답해지는 것일까요? 누구를 원망할까요? 단식을 하는 언니를 원망할까요, 아니면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는 청와대를 원망할까요, 그것도 아니면 하늘을 원망할까요?

제게 언니는 내가 죽으면 아무도 손대지 못하게 하고 니가 꼭 가족장으로 해달라고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저는 알았다고 안심을 시켰지만, 기가 막혀 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이없는 환경영향평가로 산과 계곡을 마구잡이로 훼손시키는 사람은 죄가 없고, 그것을 지키려는 사람은 죽음 앞에 서야하는 게 우리의 자연보호 현실이었습니다. 지키는 것 역시도 우리의 몫입니다. 모든 분들이 공이 적고 많음을 따지지 말고 한마음으로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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