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1/2장으로 쓴 세계 역사 열린책들 세계문학 104
줄리언 반스 지음, 신재실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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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둔지는 꽤 되었는데 이제야 읽었다. 예전에 사서 바로 읽지 않았던 이유는 제목에 들어간 ‘세계 역사’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꽤 두꺼운 분량인데 왠지 ‘역사’와 관련된 좀 지루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어서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실제로 이 작품은 처음 출간되었을 때 ‘역사’ 코너에 꽂혀있는 웃지 못 할 사연도 있었단다.


걱정(?)과는 달리 이 작품은 정말 재미있다. 픽션과 논픽션이 어우러진 작품으로 어떻게 보면 그 기법상 줄리언 반스의 또 다른 작품인 <플로베르의 앵무새>와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는데, 재미와 기발함, 그리고 왠지 모를 감동까지 두루 평가한다면 나는 <플로베르의 앵무새> 보다 이 작품에 더 손을 들어줄 것 같다.


읽는 내내 줄리언 반스의 해박함과 재치, 위트에 경탄했고 정말 ‘잘 쓴다’는 존경심까지 솟구쳤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까? 싶기도 하고. 암튼 줄리언 반스, 그는 현존하는 영어권 작가 중 매 작품 감탄이 쏟아지고 신작이 나오길 손꼽아 기다리는 그런 작가임에 틀림없다. 책 뒤표지에 어떤 이는 ‘당신은 이 책을 거듭 읽고 싶을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정말 그렇다. 책을 다 읽고, 당장 다시 어느 구절을 펼쳐 읽어도 재미있고, 문장을 읽고 나서 음미하고 생각하는 과정도 즐겁다. 언젠가 한 번은 또 다시 읽어보고 싶은 작품이다.


이 작품의 ‘줄거리(?)’를 소개한다는 건 무의미한 일이다. 제목처럼 10 1/2장으로 이루어진 이야기들은 서로 전혀 상관이 없는 이야기면서도 알고 보면 교묘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1장을 살펴보자. 1장은 성경 속 ‘노아의 방주’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런데 어딘가 좀 다르다. 아니 많이 다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노아의 방주’와는 전혀 딴판이다. 어라? 1장의 화자는 다름 아닌 ‘나무좀’이다. 그것도 노아의 방주에서 살아남은 ‘나무좀’이란다. 이 작은 벌레가 전해주는 ‘노아의 방주’의 실상은 굉장히 재미있고 유머러스하지만 열렬한 기독교신자라면 좀 불쾌(?)할 수도 있으리라.

계속 ‘나무좀’이 화자가 되어 이야기가 전개될까 싶은데, 그 후 매 장은 다른 화자가 등장해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게다가 내용도 앞서 이야기했듯 ‘노아의 방주’와 얼핏 보면 상관없는 것 같으면서도 한 번 더 생각해보면 ‘상관있는’ 이야기들이다. 어떤 장은 예술 작품에 대한 비평서 같기도 하고, 어떤 장은 심지어 줄리언 반스의 에세이다(아마도 이 에세이를 1/2장으로 봐도 무방할 듯하다). 그리고 마지막 장은 또 다른 기막힌 우화로 끝을 맺는다.


400페이지에 달하는 긴 이야기를 통해 세계 역사(?)를 전하고자 한 반스의 야심찬(?) 계획에서 내가 얻을 수 있던 것은 인류의 역사란 결국 그것을 전달하는 자의 취사선택에 따른 픽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누가 그 사건을 보느냐에 따라 역사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해석될 수도 있고, 때문에 누군가에게는 진실인 역사가 누군가에게는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역사는 처음에는 비극으로, 두 번째는 소극으로 되풀이 된다(241쪽)’는 반스의 말처럼 전혀 다른 것 같지만 닮은꼴을 한 과거의 역사가 현재도, 그리고 미래에도 비슷하게 반복되고, 될 것이다.

그 옛날 노아의 방주는 히틀러의 압제를 피해 다른 대륙으로 떠난 유대인 난민들을 실은 배일 수도 있고, 신대륙을 발견하고자 떠났지만 난파에 시달려 침몰하다 구조된 뗏목일 수도 있고, 이 험난한 세상을 견뎌내기 위한 ‘사랑’일 수도 있다. 왜 갑자기 사랑이냐고? ‘순진한 처녀들은 사랑이 약속의 땅이고, 둘이서 대홍수를 피해 살아남을 수 있는 방주라는 소리를 듣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방주일지도 모르나, 인육식 관습이 만연하고 있는 방주이고, 잣나무 막대기로 머리통을 때리고, 어느 때라도 당신을 물속으로 집어던져 버릴 수 있는 흰 수염의 미친 노인이 선장으로 있는 방주이다. (316쪽)’라는 반스의 에세이에 절대적으로 공감하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이야기구조에 익숙해진 독자들에게는 조금 당혹스러운 소설일 수도 있겠으나, 하나의 퍼즐을 맞춘다고 생각하면서 읽다 보면 ‘읽는 재미’는 물론 ‘아!’하는 감탄까지 터져 나오는 작품이다. 이 작품이 그래서 어찌어찌한 주제를 말하고자 했다고 섣불리 결론 내리기는 뭐하다. 게다가 읽는 사람에 따라 워낙 다양한(?) 해석이 나올 여지가 많은 작품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나는 어떤 역사를 믿을 것인지는 사랑의(곧 믿음의) 문제라고 조심스레 나만의 결론을 내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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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꿈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안토니오 타부키 지음, 박상진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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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때로 우리 자신의 꿈에 골몰한다. 그런데 타부기처럼 타인의 꿈은 어떠할지 상상해보는 일도 무척 재미있으리라. 그리고 그 상상은 문학의 외피를 입었을 때 더욱 아름답게 빛날 수 있을 것이다. 타부키의 <꿈의 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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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꿈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안토니오 타부키 지음, 박상진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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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작가나 예술가가 만일 꿈을 꾼다면 어떤 꿈을 꿀까? 타부키의 <꿈의 꿈>은 바로 그런 호기심에서 비롯되었다. 안톤 체호프나, 랭보, 페소아 등 개인적으로 관심 가는 이들의 꿈부터 타부키의 생각을 통해 만나본다. 어쩐지 정말 그들은 그런 꿈을 꾸었을 것 같다. 다른 이들의 꿈을 해석하는데 온 삶을 바친 프로이트의 꿈은 어떠했을까 상상해보는 일도 재미있으리라. 타부키의 이 글을 통해 더 알고 싶은 이들이 생겼는데, 예를 들면  마야코프스키,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 등이 그렇다. 마야코프스키가 결벽증이 있어 비누를 늘 소지하고 기회가 닿을 때마다 손을 씻었다는 점등은 흥미로웠다. 사는 게 무척 고달팠을 것 같다.

타부키의 <꿈의 꿈>은 랭보, 라블레, 로트렉, 스티븐슨 등의 꿈을 통해 알 수 있듯이(어차피 타부키의 상상으로 빚어진 이야기지만) 꿈이란 결국 현실에서는 좌절되거나 이루지 못할 욕망을 해소하는 개인만의 자유로운 영역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페르난두 페소아 덕후임을 인정한 그였기에 그런지 페소아의 꿈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그를 향한 애정이 고스란히 엿보인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나 또한 내가 좋아하는 작가나 예술가의 꿈을 상상해보는 글을 써볼까 하는 욕심이 생기더라. 예를 들어 카프카...

'1922년 체코 프라하, 자신의 조그마한 방에서 카프카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꿈을 꿨다. 꿈 속에서 그는 한 마리 검은 까마귀였다.... 그 까마귀는 한 마리 벌레로 변한 아버지이지만 아버지가 아닌 듯한 존재의 머리 위를 쉼 없이 날아다녔다.... ' 이렇게 시작하는... 카프카의 꿈의 꿈.

우리는 때로 우리 자신의 꿈에 골몰하고는 한다. 그런데 타부키처럼 타인의 꿈은 어떠할지 상상해보는 일도 무척 재미있으리라. 그리고 그 상상은 문학의 외피를 입었을 때 더욱 아름답게 빛날 수 있을 것이다. 타부키의 <꿈의 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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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베르의 앵무새 열린책들 세계문학 56
줄리안 반즈 지음, 신재실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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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람들은 당신과 전혀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들이 당신의 일부를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당신에게서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다. 당신이 무모하게 책 한 권을 쓰게 되면, 그 일로 인하여 당신의 예금 계좌, 건강 진단서, 결혼 생활 모습 등 당신의 일부는 돌이킬 수 없이 대중의 몫이 된다.
 -'플로베르의 앵무새' p.106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혹은 ‘네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이 책을 읽고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바로 이런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진실’이라는 것이 과연 정말 ‘진실’일까 ‘진실’ 혹은 ‘진짜’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할까? 이런 질문을 [플로베르의 앵무새]는 우리에게 남긴다.



제목만 보고 혹은 간단한 서평만 보고 이 책을 ‘플로베르’에 관한 전기라고 생각할 수 있다. 플로베르 전기라? 그럴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이 책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어떤 한 인물에 대한 ‘전기’와는 전혀 다르다. ‘전기’지만 ‘전기’라고 할 수 없는… 사실 줄리언 반스의 [플로베르의 앵무새]가 아니었다면 내가 과연 ‘플로베르’라는 작가와 그의 작품을 알고자 하는 욕망이 생겼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스의 작품을 읽기 위해 [마담 보바리]도 읽고 ‘플로베르’에 관해 인터넷에서 찾아보기도 하고 그랬는데, 이런 식으로 ‘플로베르’에 대해 알게(?) 된 것, 그리고 반스의 이 작품을 읽은 것 등등 모든 것이 즐거웠다.

이 작품은 ‘플로베르’에 미친 한 의사가(이제는 늙어서 은퇴한) ‘플로베르’의 진짜 앵무새(플로베르가 글을 쓸 때 옆에 두고 ‘창작’의 영감을 얻었다고 전해지는 박제된 앵무새)를 찾아 ‘플로베르’의 고향 루앙을 방문하면서 시작한다. 그런데 그곳에는 서로가 진짜임을 주장하는 박제된 앵무새 두 마리가 있다. 어느 것이 진짜일까? 의사는 그것을 밝히기 위해 ‘플로베르’의 삶을 추적하는 일을 시작한다. 그러면서 속속들이 밝혀지는 ‘플로베르’의 삶과 사랑, 그리고 작품들… 그러나 이 책 속에 드러나는 ‘플로베르’의 삶과 ‘플로베르’라는 인물에 대한 갖가지 정보들을 보다 보면 과연 ‘플로베르’라는 사람은 어떤 모습이 진짜 ‘그’의 모습일까 갈수록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의 2장 ‘연보’ 부분을 보면 플로베르의 ‘연보’가 3가지 버전으로 소개된다. 하나는 일반적인 버전의 연보(그의 성공과 사회적 명성 그래서 행복한 부분들이 기술된 연보), 또 다른 하나는 첫 번째 버전의 연보와는 다른 성공의 이면에 감춰진 슬픔과 불행 등이 기록된 연보,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플로베르의 개인적이고 내밀한 기록들로 이뤄진 연보(이 연보를 보면 ‘플로베르’라는 사람이 무척 섬세하고 상처받기 쉬운 인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 두 번째 장이 이 책의 주제를 잘 집약한 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누군가를 안다고 말할 때 일반적으로 플로베르의 삶을 설명한 첫 번째 ‘연보’(즉 객관적으로 알려진 사실에 기초하여)와 같은 방식에서 입수한 정보로 ‘그’ 또는 ‘그녀’를 안다고 말한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진실인가? ‘그’ 또는 ‘그녀’의 삶에는 플로베르의 첫 번째 연보와는 다른 두 번째, 세 번째 연보가 존재하듯이 ‘그들’만의 또 다른 연보가 존재할 것인데, 그 모든 것을 알지 못한 채 내가 아는 ‘그’ 혹은 ‘그녀’가 ‘진짜’ 그 사람이라고 섣불리 말할 수는 없는 게 아닐까? 이런 질문을 끊임없이 이 작품은 우리에게 던진다. ‘정말 당신이 그 사람 혹은 그 사물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진짜요?’ 하고. 어느 것이 진짜인지 모를 앵무새의 존재 역시 이러한 주제와 무관하지 않다.

줄리언 반스 특유의 비꼬는 듯한 문장과 영어와 불어 사이의 언어 유희, 신화과 고전을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을 맛보며 예술과 삶, 비평가와 작가, 작가와 작품 사이의 거리 등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 무척 좋았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플로베르’라는 한 작가의 면면을 살펴보는 즐거움이 대단했다. 물론 이 책에 그려진 ‘플로베르’가 온전히 ‘그’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이 책에 인용된 플로베르의 ‘말’ ‘말’ ‘말’들만 봐도 플로베르가 꽤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특히 ‘물고기가 물속을 헤엄치듯 내 마음은 언제나 눈물 속을 헤엄치고 있다.’라니!!! 




행복은 천연두와 같다. 너무 빨리 걸리면 그것은 너의 몸을 망쳐 놓는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마음속에 고귀함의 방을 하나씩 갖고 있다. 나는 그곳에 담을 쌓고 아무도 들어올 수 없게 했다.

물고기가 물속을 헤엄치듯 내 마음은 언제나 눈물 속을 헤엄치고 있다.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썩어 가기 시작한다.

삶은 왜 이렇게 끔찍하단 말인가? 삶이란 머리카락이 둥둥 떠다니는 수프와 같다. 그렇지만 여러분은 그 수프를 마셔야 한다.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지 못하는 것이고, 다음으로 고통스러운 것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 사는 일이다.

-줄리언 반스 [플로베르의 앵무새]에 언급된 ‘플로베르’의 ‘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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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가 되어 인간을 밀어라 - 산문의 향기 005
나쓰메 소세키 지음, 미요시 유키오 엮음, 이종수 옮김 / 미다스북스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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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나쓰메 소세키의 서간집이다. 그가 부인은 물론 어린 자식들, 장인 등 가족에게 보낸 편지와 친구 및 문하생들에게 보낸 편지, 애독자들에게 보낸 답장, 일과 관련한 공적인 편지 등 140통 조금 넘게 실려 있다. 소세키는 편지 쓰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지인에게 보낸 약 2천여 통의 편지 중 추린 것이라는데 이 책을 읽다 보면 2천여 통의 편지를 한 번 모두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호기심을 자극했던 것은 소세키가 그의 부인에게 보낸 편지다. 소세키는 런던 유학 당시 부인에게 편지를 종종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 몇 주에 한 통씩 보낸 듯한데 부인은 생활하느라 바빴는지 이에 답장을 바로바로 하지는 않았다. 때문에 나쓰메 소세키는 답장 없는 부인에게 버럭 성질을 내며 짜증을 내기도 한다. 답장을 바로 하지 않는다고 짜증은 냈지만 소세키는 딱히 아내를 크게 사랑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쓰메 소세키 작품에서 정이 깊은 부부가 있었던가? 별로 그렇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런 그의 사생활의 반영일까?


그간 읽었던 작품을 통해 나쓰메 소세키 성격을 유추해 보자면, 아내를 사랑한다 해도 다정다감하거나 깨알 같은 애정 표현 등 닭살 돋는 편지를 보낼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멀리 떨어져서 지내는데 편지는 정말 무덤덤하다. 애정 표현보다는 잔소리가 많다. 어쩐지 아내가 좀 더 예뻤으면 하는 생각도 늘 하고 살았지 않았을까 싶다. 아내에게 계속 틀니를 하라고 요구하고 머리 모양은 어떻게 하라고 잔소리를 한다. 게다가 늦게 일어난다고 그 먼 영국에서 일본에 있는 아내에게 잔소리를 한다. 이 사람, 참 ㅋㅋㅋㅋ 인간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같이 살기 쉽지 않은 남자였겠다 싶다.



틀니는 하는 게 옳을 것 같소. 머리는 둥글게 묶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소. 자주 감으시오. (85쪽, 아내에게 보낸 편지 중)

출산 후 경과가 좋아 건강해지면 틀니를 하시구려. 돈이 없으면 장인께 빌려서라도 하시오. 돌아가서 갚아 드리겠소. 머리는 묶지 않는 편이 머리카락을 위해서도 뇌를 위해서도 좋소. 오드키닌이라는 물이 있소. 비듬이 생기지 않는 약이오. 써 보시구려. 탈모가 멈출지 모르오. (95쪽, 아내에게 보낸 편지 중)
 
무엇보다 무정하기 그지없는 내가 아내에게만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편지를 보내니 기특하지 않나. 그런 다각형 얼굴이라도 돌아가면 좀 잘해 줄 생각일세. (96쪽, 친구에게 보낸 편지 중)
 
편지의 분위기를 보아 밤에는 12시를 넘기고 아침에는 9시, 10시경까지 자는 듯하구려. 밤은 그렇다 치고 아침엔 좀 일찍 일어나도록 하시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면 병이 없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니 그건 잘 알고 있을 것이오. 9시나 10시까지 자는 여자는 첩이나 창부, 하급 사회의 여자들뿐이라 생각하오. 적어도 좋은 집안에 태어나 상응하는 교육을 받은 사람 중에 그렇게 단정치 못한 사람은 별로 눈에 띄지 않을 것 같소. 야라이초 3번지를 한번 살펴보오. 당신을 제외하고 그런 부인들은 하나도 없소. 이건 유학 전에도 항상 하던 말 같은데 당신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구려. 나쓰메의 부인은 아침 9시, 10시까지 잔다고 수군거리면 좀 창피하지 않겠소. 당신은 어찌 생각하오. 당연히 신병은 특별한 일이지만 요전의 편지에 의하면 아주 건강해졌다고 하니, 몸에 이상 없는 한 일찍 일어나도록 신경 써야 할 것이오. 게다가 아이들 교육상 좋지 않을 것 같소. 후데가 성인이 되어 시집을 가서 당신처럼 9시나 10시까지 잔다면 나는 미래의 사위에게 아주 미안한 마음일 게요. 당신 부모님들은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나는 다르오. 노력해서 자신의 결점을 없애는 것이 인간 제일의 의무일 게요. (124쪽, 아내에게 보낸 편지 중)


이밖에도 아내에게 보낸 편지로 나쓰메 소세키가 치질을 앓고 있었다는 점! 복장에도 꽤 신경 썼다는 점(어쩐지 그럴 거 같았다), 키가 작은 자신에 약간의 열등감이 있었다는 점(특히 영국 유학 당시) 등을 알게 되었다. 친구나 문하생들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는 가르치는 일을 무척이나 괴로워했다는 점(특히 대학에서 교수직을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몹시 싫어함), 박사병에 걸린 인간들을 혐오했으며, 때문에 박사를 수여하겠다는 것을 여러 차례 까칠하게 거절하는 모습 등을 엿볼 수 있다.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기 보다는 친구들이나 문하생들과 맛있는 것을 먹으며 풍류를 논하며 놀고 싶어했다는 점에서는 격하게 공감하며 슬며시 웃음이 나기도 했다. 물론 나쓰메 소세키는 친구들과 노는 것보다는 한가로이 방에서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쓰고 싶은 것을 쓰는 삶을 가장 좋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 있을 때는 이렇게까지 피부가 노랗다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이곳에 와서 보니 스스로 내 피부가 노랗다는 것에 정나미가 떨어지오. 게다가 나보다 키가 큰 사람 앞에서는 아주 어깨가 움쓰러드오. 건너편에서 이상한 놈이 왔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이 큰 거울에 비춰진 내 그림자였던 일이 몇 번인지 모르오. 얼굴이야 어쩔 도리가 없다고 해도 키는 커지고 싶구려. 아이들에게는 되도록 의자에 앉을 때 등받이에 기대지 않게 하는 게 좋겠소. 하긴 이곳에 있는 사람은 대개 키가 작다고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지만, 키는 마음먹는다고 클 수 있는 게 아니니 어쩌겠소. 그래도 아가나 나보다 키가 작은 서양인을 만날 때는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소. 하지만 대개는 여자들도 나보다 크오. 무서울 따름이오. (94쪽, ‘런던의 생활’ – 아내에게 보낸 편지 중)

매월 오륙십의 수입만 있으면 지금이라도 도쿄로 돌아가 멋대로 풍류를 즐길 각오지만 놀고 있으면 돈이 주머니 속으로 그냥 들어오는 것도 아니기에 먹고 입는 것을 조금 줄이더라도 뭔가 일거리를 찾아(다만 교사를 제외하고), 여가를 이용해 자유로이 읽고 자유로이 말하고 자유로이 쓰기를 희망하네. (72쪽, ‘교사를 그만두고 싶어’)

한가로이 마음에 드는 책을 읽으며 도처의 산수를 방랑하면 인생이 가장 즐겁지 않겠나.
나는 학교에 교육을 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월급을 받으러 가네. 다른 모든 선생들도 틀림없이 그럴 걸세. 이상. (150쪽, 친구에게 보낸 편지 중)

대학의 교사니 강사니 하며 평가를 해주지만 조금도 고맙지 않네. 내 이상을 말하자면 학교에는 나가지 않고 매주 한 번 평소에 출입하는 학생 제군을 집에 불러 식사를 하면서 농담을 하고 노는 것일세. 나카가와 군 등이 와서 나보고 곧 박사가 될 거라는 말을 하는데, 지겹고 불쾌하네. 나는 일전에 박사는 되지 않겠다고,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미리 나카가와군에게 거절해 두었네. 그렇지 않나, 박사가 되기 위해 태어난 것도 아니고. (153쪽, 친구에게 보낸 편지 중)


나는 그간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을 통해 그가 인간을 혐오했고 삐딱한 염세주의자일 거라고 추측했는데 이 서간집을 통해 어느 정도는 그런 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끼는 문하생들 및 절친한 친구와 주고받은 편지, 자신을 좋아하는 독자에게 보낸 답장 등을 보면 역시 이 사람도 인간에 대한 애정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구나 싶어진다. 때로는 다정다감하기도 하고 농담도 할 줄 알고 진심으로 타인을 걱정도 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 <마음>이라는 소설 속에 있는 선생님이라는 사람은 벌써 돌아가셨어요. 이름은 있지만 알아봐야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사람입니다. 초등학교 6학년인데 그런 것도 다 읽는군요. 그건 아이들이 읽어 봐야 도움이 되는 책이 아니니 그만 읽으세요. 내 주소를 어디에서 알았죠? (318쪽, 독자에게 보낸 편지 중)

무엇보다도 나는 나쓰메 소세키가 모리타 소헤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등 특히 아끼던 문하생들에게 글쓰기를 독려하며 썼던 편지가 인상에 남는다. 그런 편지들은 마치 나에게 보낸 편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마도 나뿐만이 아니라 글을 쓰며 살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는 이런 편지들이 유독 강렬하게, 오래 기억에 남으리라. 인간 나쓰메 소세키를 좀 더 알 수 있으며 이 자체로도 하나의 문학 작품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인 <소가 되어 인간을 밀어라>는 나쓰메 소세키 작품이나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번은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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