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베개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3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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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친구와 함께 나쓰메 소세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소세키의 글은 담백해서 여러 번 읽어도 질리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맵고 짜고 달고 자극적인 음식을 먹을 때는 확! 하고 순간적으로 입맛을 잡아끄는 게 있지만 심심한 음식은 그렇지 않다.


그렇지만 자극적이지 않기에 오래도록 질리지 않고 먹을 수 있다. 곱씹을수록 음식을 이루는 재료 본연의 맛이 살아나 먹는 기쁨, 맛을 알아가는 즐거움을 더욱 누릴 수 있다. 게다가 심심하고 자극적이지 않기에 두고두고 자주 꺼내 먹어도 좋다. 몇 년, 몇 십 년 생각날 때마다 먹어도 그때그때 먹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나쓰메 소세키의 문학, 그의 글이 바로 그렇다. 너무나도 심심한데 요상하게도 시간이 지나면 그 심심한 맛에 그의 작품을 다시 꺼내 들게 된다. 그 심심함 때문에 시간을 두고 또 다시 읽어도 질리지 않고 곱씹을수록 전에는 몰랐던 또 다른 ‘맛’을 발견하게 된다. 뭐랄까, 심심해서 절대로 질리지 않는 평양물냉면 같다고나 할까….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 중 국내 번역된 것들은 거의 다 읽어간다. <풀베개>와 <우미인초> 이 두 작품만 못 읽었던 셈인데 이번에 <풀베개>를 읽었다. 아, 이제 <우미인초>한 작품만 남았다. 어쩐지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렇지만 아마도 그의 다른 작품들을 여러 번 되새김질하며 또 읽을 듯하다. ‘현암사’에서 이미 출판되었고, 앞으로도 나올 예정인 나쓰메 소세키 전집을 한 권씩 장만하면서 다시 읽어도 좋을 것 같다.

<풀베개>는 나쓰메 소세키 작품 중 크게 관심이 가던 작품은 아니다. 몇 번 집었다가 다른 책에 밀리고는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좋았다. 어쩌면 이렇게 유유자적, 마음의 여유가 많은 시기에 읽어서 더 잘 들어왔는지도 모르겠다. 나쓰메 소세키는 그다지 길지 않았던 창작 시기 동안 소설은 물론 한시, 하이쿠, 수필 등 다양한 분야의 글을 썼다. 이 작품에서는 나쓰메 소세키의 ‘하이쿠’를 맛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작품 전체가 한 편의 긴 ‘하이쿠’를 읽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첫 시작부터 그야말로 ‘심금’을 울린다. 이 문장을 읽고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기까지 적어도 5분 이상은 첫 페이지에서 멈춰있던 것 같다. “이 지(理智)만을 따지면 타인과 충돌한다. 타인에게만 마음을 쓰면 자신의 발목이 잡힌다. 자신의 의지만 주장하면 옹색해진다. 여하튼 인간 세상은 살기 힘들다. 살기 힘든 것이 심해지면 살기 편한 곳으로 옮겨 가고 싶어진다. 어디로 옮겨 가도 살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시가 태어나고 그림이 생겨난다. (...) 옮겨 갈 수도 없는 세상이 살기 힘들다면, 살기 힘든 곳을 어느 정도 편하게 만들어 짧은 순간만이라도 짧은 목숨이 살기 좋게 해야 한다. 이에 시인이라는 천직이 생기고, 화가라는 사명이 주어지는 것이다. 예술을 하는 모든 이는 인간 세상을 느긋하게 하고 사람의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까닭에 소중하다.”

저 문장을 두고두고 또 읽어본다. 첫 페이지에서 읽어낼 수 있듯이 이 작품은 나쓰메 소세키의 예술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군데군데 동서양의 문명에 대한 그의 생각도 묻어나온다. 한 폭의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자연으로 떠난 ‘나’는 자연 속에서 세상과 고립된 채 작품에 몰두하고자 한다. 그 자연 속에서 여러 인물을 만나며 ‘그림’을 그리고자 하지만  쉽게 그림은 그려지지 않는다. 그런 중 ‘나미’라는 아름다운 여성을 만나게 되면서 ‘나’의 관심은 그녀에게 서서히 옮겨가는데, ‘나’는 과연 최초의 목표였던 ‘그림’을 완성할 수 있을까?

‘나’가 그림을 완성했을지 어땠을지는 모르지만, 주인공의 그림을 그리기 위한 자연속 여정을 담은 이 작품은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과 같다. 곳곳에 ‘아-’하는 감탄이 나오는 하이쿠가 담겨 있어서 그런지 문장과 문장 사이에 여백이 느껴지고 그 여백 안에서 풀내음이 올라오는 듯하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서 예술이나 인간의 삶, 근대 문명에 관한 쉽지 않은 철학적 질문을 만날 수 있다. ‘나’와 함께 산속을 거닐면서 그 해답을 찾는 것은 독자의 몫이리라. 

<풀베개>- 이 한 편의 담박하면서도 진중한 하이쿠는 내게 오래도록 여러 번 읽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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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16-07-02 11: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현암사 전집중 `도련님`과 `마음`을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고양이의 어투가 너무 불편해서 읽다가 포기했어요. 한꺼번에 다 장만할 돈은 없고 여유가 생길때마다 한권씩 천천히 사모아야 할 것 같은데 나머지 작품들 중에 혹시 먼저 읽어야 할, 좀 더 맘에 드셨던 작품이 있으시면 추천 부탁드립니다! :-)

잠자냥 2016-07-02 23:58   좋아요 1 | URL
저는 사실 나쓰메 소세키 후기작을 참 좋아합니다. 마음, 행인, 한눈팔기. 이 세 작품이요. 마음은 읽으셨다고 하니 행인이나 한눈팔기는 어떨까 싶고요. 혹시 북깨비 님이 20대시라면 <산시로>도 읽기 좋을 듯합니다.

북깨비 2016-07-03 00:17   좋아요 1 | URL
30대 후반이에요. ㅎㅎ 행인과 한눈팔기를 장바구니에 담았어요. 감사합니다! =)

새파랑 2022-01-17 14: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점심때 이책을 다 읽었는데 뭔가 시를 읽고 그림을 보는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ㅋ 유유자적 생활이 부럽기도 하더라구요 ㅋ

잠자냥 2022-01-17 14:22   좋아요 2 | URL
맞아요. 정말 시를 읽고 그림 보는 것 같죠?
뭔가 산 속을 유유히 거닐고 싶어지는 책. ㅎㅎ

새파랑 2022-01-17 14:24   좋아요 1 | URL
이 책의 리뷰를 어떻게 써야할지 고민입니다. 잠자냥님 너무 잘 쓰심^^

blanca 2022-03-18 12: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글 읽고 이 책 사려고 하니 이미 구입했고 리뷰까지 썼네요. -- 충격이에요. 기억에 없어서요.

잠자냥 2022-03-18 12:42   좋아요 1 | URL
하하하하하! 크게 웃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저도 이 책 두 권이나 있어요. 똑같은 걸로.. ㅠㅠ 사고 또 사고. ㅋㅋㅋㅋㅋㅋㅋ
 
팔코너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1
존 치버 지음, 박영원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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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코너’라는 교도소에 갇힌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페러것’- 교도소에 감금된 남자의 이야기라? 어쩐지 뻔해 보인다. 물론 책을 읽는 사람은 분위기나 작품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다. 그가 죄를 짓게 된 동기, 감옥 안에서의 생활, 교도소에 있는 또 다른 죄수들과의 관계나 그들의 사연 등등. <팔코너>에는 이런 모든 ‘예상 가능한’ 이야기들이 있다. 그러나 ‘교도소’라는 특이한 공간을 무대로 한 여느 작품들과 조금은 다르다. 무엇보다 <팔코너>를 매혹적인 작품으로 만든 데에는 존 치버의 쓸쓸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장이 큰 역할을 했으리라.

이 작품은 ‘페러것’이 ‘팔코너’에 수감되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형을 살인한 죄로 구속됐다. 감옥에 들어오기 전 직업은 ‘교수’였고 심한 마약중독자이다. F동 독방에 수감되는 페러것. 교도관의 말에 따르면 F동의 ‘F는 성교(fuck), 마약중독자(freak), 멍청이(fools), 동성애자(fruits), 초범(first-timers), 뚱뚱한 놈(fat asses), 망상(phantom), 뻔뻔함(funnies), 미친놈(fanatics), 저능아(feebies), 장물아비(fences), 등신(farts)의 머리글자’라고 한다. 이 분류대로라면 페러것은 아마도 마약중독자이자, 초범에 속할지 모르겠다.

심한 마약중독자인 페러것에게는 감옥 안에서도 하루 한 알의 메타돈이 허락된다. 메타돈을 복용하며 페러것은 환상을 만나기도 하고, 환각 상태 속에서 감옥에 들어오기 전 생활을 추억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속속 페러것이 왜 마약중독자가 되었고 급기야 형을 살해하게 되었는지 드러난다. 면회를 온 부인과의 대화를 통해서도 그가 감옥에 들어오기 전 삶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 이렇게 드러나는 ‘바깥 세계에서의 삶’을 보자면 딱히 감옥 안의 삶보다 더 행복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듯하다. 다만 자유가 허락된 것의 차이가 있을 뿐이랄까.

오히려 감옥 안의 삶이 덜 외로워 보일 정도로 ‘팔코너’에 들어오기 전 페러것의 삶은 고독 그 자체다. 결혼으로 그가 직접 꾸린 가정 생활도 위태위태하고, 그가 태어나 자란 가정 역시 마찬가지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도(어쩌면 가족이기 때문에 더) 고독하고 외로운 그를 보고 있노라면 F동 독방에 수감되어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것과 별다를 바 없어 보인다. 오로지 마약을 통해서 그 안의 또 다른 그를 만날 때만 페러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 때문에 어디에서도 소외되지 않는 사람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그토록 마약에 집착했던 것은 아닐까.

이 소설이 좀 더 흥미로웠던 이유는 페러것에게서 존 치버의 모습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딱히 행복해 보이지 않는 가정에서 자라났고, 심한 알콜 중독자였으며, 결혼 생활을 유지했지만 평생 동성애 스캔들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실제로 동성 연인이 있었던 그의 모습이 고스란히 ‘페러것’에게서 드러난다. 때문에 ‘페러것’은 ‘존 치버’의 분신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다. 그리고 존 치버는 ‘페러것’을 통해 어쩌면 사변적인 소설로 그쳤을 수도 있을 이야기를 붕괴되어 가는 미국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훌륭한 작품으로 만들어냈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언젠가 읽었던 윌리엄 버로스의 <퀴어>가 떠올랐다. 윌리엄 버로스의 자전적 이야기였던 <퀴어> 역시 마약과 동성애가 주된 소재다. 그런데 그 책은 읽는 내내 빨리 끝나길 바랐다. 그다지 긴 분량이 아니었는데도, 내가 이 책을 계속 읽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반면 이 책은 책장을 넘기기가 아까웠다.  마약, 동성애,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 등등 사람들이 듣고 싶지도, 보고 싶어하지도 않는 소재로 이토록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도 어려울 것이다. <팔코너>는 그래서 돋보이고 또 돋보인다. 책을 놓고도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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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즈 데케루 펭귄클래식 106
프랑수아 모리아크 지음, 조은경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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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라는 제도는 생각 할수록 참 이상하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영원성은 더더군다나 보장할 수 없는 인간의 사랑을 법적으로 구속해 둔다는 것부터가 모순인데다가 '가문과 가문'의 만남이라는 허울 좋은 명목으로 내가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까지 가족으로 받아들이라고 강요한다. 그래, 그렇게 해두고 서로 간섭하지 않으면 그만일 텐데, 한국에서  결혼해 사는 사람들을 보면 참 기절할 정도다. 어떻게 그런 불합리한 요구들을 '가족도 아닌 가족'들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강요할 수 있을까? 배우자야 내가 선택한 사람이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대체 왜 그 밖의 사람들까지, 그들의 요구까지 순응하면서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것일까?

<테레즈 데케루>의 '테레즈'는 바로 그러한 불합리한 결혼 생활에 반기를 들고 속박된 삶에서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쓰는 여인이다. 어쩌다 보니 또 다른 '피난처'를 찾아 결혼하는 대다수의 여자들처럼 테레즈 역시 어떤 안정적인 자리, 자신의 최종적인 지위를 찾고자 서둘러 결혼한다. 테레즈는 그렇게 '뭔지 모를 위험에 대항해 안정을 찾고자 했고' 그리하여 '새로운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 뿌리를 박고, 자기 자리를 잡았으며 관습을 따르게 되었다.'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를 구원했다'고 믿게 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테레즈는 점차 결혼과 가족이라는 굴레가 주는 속박감에서 숨막혀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그곳에서 개인의 자유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남편과의 의사소통도 점차 불가능해진다(어쩌면 애당초 불가능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임신을 하고 딸을 갖게 되어도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 임신을 했을 때 남편의 지나친 관심이 역겹기만 하고 오히려 자신이 가문의 자손받이라는 생각에 비참해질 뿐이다.

'그는 내 걱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배속의 아이를 걱정하는 거야. 그 끔찍한 어조로 계속 말하지. 퓨레 좀 더 먹어.... 생선은 먹지마....당신 오늘은 충분히 걸었어....모유 때문에 고용한 외국인 유모야... 그런 말에 감동할지 모르지만 난 전혀 감동스럽지 않아. 라 트라브 가족은 내 안의 신성한 꽃병에 경외심을 품은 거지. 난 그들의 자손받이야. 필요하다면 그들은 이 태아를 위해 기꺼이 나를 희생할 테지. 나라는 개인감정은 뒷전이야. 가족들의 눈에는 나는 기껏해야 포도나무일 뿐이야. 오로지 내 옆구리에 주렁주렁 달려있는 열매만이 중요할 뿐….


테레즈는 한 침대에서 잠드는 남편을 '침대 밖으로 영원히 어둠속으로 그를 떨어뜨릴 수만 있다면!' 하는 소망을 품게 되고, 결국 그 소망을 현실로 이루고자 실행에 옮기게 된다. 남편을 서서히 독살할 음모를 꾸미게 되는 것이다. 테레즈의 이 계략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테레즈는 남편과 가족 없이 혼자 지내고 스스로 생활비를 벌고,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여자가 되는 삶을 꿈꾼다. 가족 없이 자유롭게 사는 것을 꿈꾼다. 그러나 그녀의 꿈은 쉽게 실현되기 어려워 보인다. 테레즈의 숨 막히는 결혼 생활을 보고 있노라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만든 이 제도가 얼마나 인간을 억압하는 '폭력'적인 제도인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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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나다 - 수전 손택의 일기와 노트 1947~1963 수전 손택의 일기와 노트 1
수전 손택 지음, 데이비드 리프 엮음, 김선형 옮김 / 이후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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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손택은 자신의 일기가 이렇게 온 세상에 공개될 것을 알았을까? 만약 알았다면 이토록 적나라하고 솔직하게 기록할 수 있었을까? 만약 그녀가 죽기 전 누군가가 손택에게 일기를 공개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면 그녀는 허락을 했을까 하지 않았을까? 이런 질문들이 끊임없이 떠오를 정도로 손택의 일기 모음인 <다시 태어나다>솔직’ ‘진솔그 자체다. 그렇기에 수전 손택을 좋아하고 존경하던 팬의 입장으로 그녀의 내밀한 사적 기록을 훔쳐(?) 읽는 일은 은밀한 쾌감과 즐거움이 따른다. 그러나 작가 사후 작가의 동의없이 일기가 출간되는 것을 본인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여전히 궁금하기는 하다.


손택의 일기를 읽으며 그녀에 대해 몰랐던 부분(물론 꼭 알아야 할 이유는 없는)을 새롭게 발견하기도 했고, 어렴풋이 짐작으로 알았던 부분에 대해서는 좀 더 잘 알게 되기도 했다. <다시 태어나다: 1947~1963>는 그녀가 14세 때부터 30세까지 쓴 일기로 구성된다(손택은 2004년 죽기까지 백 여권의 일기를 썼으며 그녀의 일기는 앞으로 더 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젊은 손택은 어떤 면에서는 예상대로이기도 했으며 또 어떤 점에서는 뜻밖이기도 했다.


대학에 다니던 시절 17세의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고 아들도 하나 두었던 그녀는 양성애자로 알려 졌지만 이 일기를 보면 스스로 자신이 동성애자였음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당시 그녀가 살았던 시대나 주변 분위기, 환경 등의 영향으로 양성애자로라도 살아 보려고 애썼던 듯하다. 동성애 성향에 대해 죄의식을 갖기도 했으며(내가 동성애자라는 죄책감이 얼마나 큰지 이제야 실감하기 시작했다. H와 함께 있으면서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한테는 다 H 탓이라고, 그녀가 내 악의 근원이라고, 그녀만 없으면 난 동성애자가 아닐 거라고, 아니 적어도 대체로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믿게 했다P. 286) 고민하는 모습에서는 그토록 자유분방해 보이던 사람조차도 내면에서는 이런 고뇌를 안고 살았구나 싶어서 안타깝기도 했다.


게다가 더 안쓰러운 것은 어쩐지 자존심도 세고 도도해 보이기만 하던 그녀가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했으나(‘H’아이린처럼 동성 연인에게 끊임없이 애정을 갈구하는 손택이라니! 그것도 자신을 막 대하는데!!) 그럼에도 만족할 만한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점 때문이다. 어쩌면 관계를 맺고 잘 유지하는 법에 서툴렀던 사람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연인과의 관계에서 힘들어 했다. 역시 타인의 일기에서는 이런 부분들이 흥미로울 수밖에 없는 것일까?


또 하나 재미있던 부분은 손택은 말이 무척이나 많았다는 점이다. 얼마나 말이 많았는지 매년 일기마다 말을 적게 하자는 결심을 적었을까!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단추 달기(입에 단추 채우기)’. 게다가 씻는 것도 무척이나 싫어했나 보다. 씻기를 결심하는 부분도 일기에 자주 그려진다. 이를 테면 이렇다. 매일 목욕하고 열흘에 한번씩 머리 감기(헐 열흘에 한 번씩이라니!!!!). 그뿐만 아니라 책을 훔치다 서점에서 붙잡히기도 했다! 이런 모습들은 아마도 일기가 아니었다면 알 수 없지 않았을까? ‘뉴욕 지성계의 여왕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사람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을 본 것 같아 낄낄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렇게 살아왔기에 오늘날의 수전 손택이 존재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어린 나이부터 치열하게 고민하고 끊임없이 공부한 흔적이 일기에 담겨 있어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 영화, 오페라, 연극 등 문화적 자극에 대한 열의가 정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웠던 그녀. 수전 손택의 ‘지적인 것에 대한 갈망은 그칠 줄을 몰랐다. ‘사랑에 대한 갈망과 에 대한 갈망으로 그녀의 삶 전체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을 정도다. 그토록 뜨겁게 매 순간 읽고 보고 쓰고 생각하고 말하며 살았기에 오늘날의 그녀가 존재할 수 있었으리라.


수전 손택이 자신의 일기가 공개되기를 바랐는지 어땠을지는 여전히 알 수 없고 앞으로도 그렇겠지만 그녀의 글과 날카로운 지성, 올곧게 살고자 노력했던 모습을 사랑했던 사람들이라면 이 아플 정도로 진솔한 일기가 세상 빛을 보게 된 것을 감사할 것이라 여겨진다. 바로 내가 그런 것처럼…. 일기를 덮을 즈음엔 좀 더 인간적으로 가깝게 느껴지는 그녀의 날카로운 글들이 다시금 읽고 싶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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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YDADDY 2023-03-14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가 내 일기를 사후에 읽는다면.. 생각만 해도 지금 당장 불태우고 재는 물에 개어 하수구에 버리고, 파일은 삭제하고 디스크를 몇번이고 완전 포맷해서 복구를 하지 못하게 하고 싶어요. ㅋㅋㅋㅋ (지은 죄가 워낙 많습니다. ㅎㅎㅎ) 그래도.. 손택은 진솔하고 치열하게 살았고 그 삶을 일기로 복기하면서 성장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잠자냥님의 페이퍼를 역순으로 하나씩 읽으며 지금의 잠자냥님의 필력은 끊임없이 읽고 쓰고 보고 경험하고 마지막으로 복기하는 것에서 시작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

잠자냥 2023-03-15 10:18   좋아요 0 | URL
하하, 저의 지나간 글을 읽어보고 계시다니 당장 불태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고 싶어지는 부끄러움? ㅎㅎㅎ
저는 그래서 일기를 쓰지 않습니다! 라고 하고 보니 알라딘 서재나 투비 같은 공간이 일기나 마찬가지네요.... 음 ㅎㅎㅎㅎ

DYDADDY 2023-03-15 10:23   좋아요 0 | URL
브런치를 읽지 않아도 된다 하셔서 전에 쓰셨던 글을 읽어보고 있었어요. ㅋㅋㅋㅋ 일기가 굳이 그날의 일상을 적어야 하는 것도 아니니 서재도 일기와 다름아니다라고 생각해요. 손택처럼 진솔한 글쓰기를 하시는 잠자냥님이 부럽습니다. 그 글이 쌓여 지금의 잠자냥님이 있으신 것이니 부끄러워 마시길 바라요. ^^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세계문학의 숲 40
카슨 매컬러스 지음, 서숙 옮김 / 시공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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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할 줄 모르는 두 사람이 있다. 벙어리 두 사람. 그 둘은 늘 함께였다. 두 사람은 매우 달랐다. 한 사람은 덩치가 크고 뚱뚱했으며 언제나 화려한 색의 옷을 아무렇게나 입었다. 다른 한 사람은 그에 비해 마르고 키가 컸으며 항상 단정하고 차분한 옷차림이었다.

뚱뚱보의 이름은 ‘안토나풀로스’. 단정하고 마른 이의 이름은 ‘존 싱어’. 싱어와 안토나풀로스는 서로를 의지하며 살았다. 마치 이 세상에 서로를 제외하고 다른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아니 어쩌면 싱어가 절대적으로 안토나풀로스에게 의지해 살았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안토나풀로스가 어느날 정신병이 생겨 병원에 입원을 해야만 했을 때 싱어는 삶의 의미를 모두 잃어버린 듯 했다. 그는 공허했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한없이 외롭고 슬펐다. 싱어는 이제 혼자 걸었고 집에 와서도 혼자였다. 안토나풀로스가 없는 집을 견디지 못하고 싱어는 소도시의 외곽으로 거처를 옮긴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사람들은 벙어리 싱어에게서 뭔가 특별한 것을 감지한다. 싱어는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언제나 미소 짓는 얼굴로 들어준다.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으로 듣고 또 듣는다. 아이, 어른, 남자, 여자, 흑인, 백인 가릴 것 없이 모두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조용히 웃어준다.

사람들은 그런 싱어를 이내 좋아하게 되고 그에게는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을 것처럼 굴었다.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소녀 ‘믹’, 자본주의에 물든 미국 사회를 뜯어고쳐 보고 싶은 사회운동가 ‘제임스’, 흑인 인권 신장을 위해 평생을 몸 바쳐 온 흑인 의사 ‘코플랜드’ 박사 등등. 모두가 이 벙어리 싱어를 찾아와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고 위로 받고자 한다.

싱어 같은 사람. 벙어리 친구가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다면 나도 싱어를 찾아가 내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위로 받고 싶을까? 싱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혹은 어떤 고통이나 절망 외로움을 느끼는지 알지도 못한 채 싱어에게 나만의 외로움, 고독, 슬픔, 고통 같은 것들을 이야기하고 털어놓음으로써 ‘위로’ 받은 기분으로 돌아오고 싶지는 않았을까?
 
조용히 항상 미소 지으며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 그 사람의 속내는 과연 어떨까? 싱어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해본다. 싱어를 찾아오는 이들은 모두가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이다. 가난한 사람, 억압받고 차별 받는 흑인, 너무 많이 ‘읽어서’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사회에 상처받기만하는 사회부적응자 등등. 모두가 이 사회의 ‘소외된 자’들이다.

그런데 어찌 보면 가장 소외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말 못하는 ‘장애’를 가진 싱어를 찾아와 그들은 잠시나마 삶의 고통이라든지 외로움을 잊고 간다. 그들이 만들어낸 싱어의 이미지 속에 진짜 싱어는 과연 존재할까? 사람들은 누구나 싱어를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좋은 이미지로 표현한다. 그러나 사실 그 어떤 이미지도 싱어의 존재 자체를 제대로 담지는 못한다.
 
싱어는 자신과 똑같이 말 못하는 벙어리였던 안토나풀로스를 돌보고 그와 말이 아닌 ‘수화’를 나누며 ‘소통’했을 때 외롭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오직 안토나풀로스와 함께 했던 그 시간들이 그에게는 삶의 가장 빛나는 순간 그 전부였다. 나머지는….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존재 이유를 어딘가에서 찾기 마련이다. 음악가를 꿈꾸는 소녀 믹은 자신의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음악’에 대한 열정의 방을 만들어 놓았으며, 제임스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사회변혁을 하고자 하는 어떤 열망이 자리한다. 코플랜드 박사는 흑인 운동에 대한 열정의 방. 이런 것들 말이다.

그러나 그 ‘마음의 방’들이 항상 꿈꿔온 대로 실현되지는 않는다. 그럴 때 또 다른 ‘마음의 방’을 찾아와 위로해주고 상처받고 좌절한 그 ‘마음의 방’을 보듬어 줄만한 존재가 필요하다. 그들에게 존 싱어가 그런 존재였다. 싱어에게는 그 두 개의 마음의 방을 모두 안토나풀로스가 차지하고 있었기에 안토나풀로스 외에는 그 누구도 싱어의 외로움을 위로하고 달래줄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 안토나풀로스가 없는 싱어의 마음은 언제나 외로운 사냥꾼일 수밖에 없고 또 그런 싱어를 잃어버린 나머지 사람들은 또 다른 마음의 외로운 사냥꾼이 될 수밖에 없으리라.

    너를 보고 싶은 외로움을 견딜 수가 없어.
    곧 다시 갈게. 그래야만 해.
    너 없이 혼자 있을 수가 없어. 너는 나를 이해하니까. (267쪽)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은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나 트루먼 카포티의 <풀잎하프> 혹은 남부를 배경으로 한 그의 여러 단편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몹시도 외롭고 슬프다. 아마도 세상 사람들이 서로 이해하고 이해받는 일이 몹시도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때문에 이해받지 못한 마음은 늘 외로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은 아닐까? 게다가 세상에서 나를 온전히 이해하던 한 존재가 사라진다면 그 삶이 얼마나 외로운지를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은 아닐까?

사랑은 ‘이해’이고 ‘이해 받음’은 곧 외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이 기나긴 인생에서, 삶을 외롭지 않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과연 지구상에 얼마나 될까….

정상적인 사람들에게는 벙어리 정신병자로 보인 뚱뚱보 안토나풀로스. 그는 싱어에게 유일하게 외로움을 잊게 해주는 존재였다. 그리고 그들은 '말'이 아닌 다른 것으로 서로를 이해했다. 말은 어쩌면 서로를 이해하는데 아주 작은 역할 밖에 하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언제나 함께 걷던 ‘안토나풀로스’와 ‘싱어’ 두 사람의 모습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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