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나날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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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 권만으로도 이 사람의 작품은 앞으로 늘 찾아 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작가가 있다. 제임스 설터도 나에게는 그런 이 중 하나다. 단편 모음집인 <어젯밤> 이후 나는 그의 작품이 남김없이 국내에 소개되기를 바랐고, 그렇게 나올 때마다 흥분과 기대, 고마운 마음으로 읽어댔다. 이제까지 마음산책에서 총 4권이 소개되었던가? 두 번째로 소개되었던 <가벼운 나날>은 <어젯밤>과 달리 장편으로 짜임새나 분량, 내용을 보면 금세 읽을 수 있는 그런 작품인데 생각보다 오래 읽었다.


그 이유는 당신이, 직접 보면 알리라. 그럼에도 그냥 간단히 그 이유를 말해 보자면 바로 설터가 빚어내는 ‘문장’ 때문이다. 인물이나 배경, 공간, 사물을 묘사하는 방식. 사람의 심리를 설명하는 방식 등을 읽고 또 읽게 된다. 쉽게 지나칠 수 없는 구절들이 이 작품에는 빼곡하다. 물론 이렇게 문장에 주목하면서 읽는 독자는 그리 많지 않을 수도 있다. 


평소 문장에 관심이 많거나 소설이나 드라마 대본, 영화 시나리오 등을 쓰고 싶어 하는 작가 지망생이나 혹은 이미 작가이거나 등등 대체로 글 쓰는 산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아닌 이상 이렇게 문장 하나하나를 음미하면서 책을 읽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일까? 제임스 설터는 대중들 보다는 작가나 평론가들 사이에서 더 자주 회자되는 작가로 보인다.


이 작품만 하더라도 여러 작가들이 칭송해 마지않았다. 나 역시도 문장이나 묘사하는 방식 등에 관심이 많아 그의 문장 여러 부분에 찬탄을 하며, 밑줄을 그어 가면서 읽었다. ‘아, 어떻게 이런 표현을 하지?’ 싶은 구절이 ‘너/무/나/도’ 많았다. 특히 설터는 인물을 그리는 방식이 뛰어나다. 특별하지 않은 단어, 별 것 아닌 특징을 잡아서 나열했을 뿐인데 그 짧은 문장 안에 한 인물의 개성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문장들.

그녀는 입이 컸다. 여배우의 입이었다. 사람을 흥분시키는, 환한 웃음을 짓는. 겨드랑이에 얼룩이 있었고 입에선 민트 향이 났다. 그녀는 천성이 사치스러웠다. 충동적으로 물건을 샀다. 벤델 백화점에 가기를 친구 집 드나들듯이 하면서 한 번에 대여섯 벌씩 드레스를 샀고, 탈의실에 들어갈 때는 커튼을 꼼꼼하게 닫지도 않아서 그녀가 옷 벗는 모습이, 가느다란 팔과 몸통, 그리고 비키니 팬티가 보였다. 그렇다. 그녀는 바닥을 닦고 빨랫감을 모은다. 그녀는 스물여덟이다. 꿈이 아직 몸을 떠나지 않았을, 몸을 장식해 줄 나이다. (30쪽, ‘네드라’를 설명하는 부분)

그는 유태인이었다. 가장 우아하고 가장 로맨틱한 유태인. 얼굴에는 권태로움이 서렸고, 이지적인 분위기는 모두가 부러워했고, 머리카락은 건조했다. 옷은 야릇하게 낡은 느낌을 주었다. 그러니까 지나치게 신경 쓰지 않은 매무새였는데, 이를테면 단추가 하나 떨어졌거나 소매 끝이 더럽거나 했고, 그의 입에서는 몸이 안 좋아진 삼촌의 입에서 나는 종류의 약간 나쁜 냄새가 났다. 그는 키가 작았다. 손은 부드러웠고, 금전 감각은 없었다. 전혀 없다시피 해서, 그 방면에서는 알비노 환자나 마찬가지였다. 일종의 기형. 돈 없는 유태인은 이빨 없는 개와 같다. (38쪽, ‘비리’를 설명하는 부분)

그의 아내는 젊음의 막바지에 있었다. 그녀는 밤새 밖에 내놓은, 아름다운 만찬과 같았다. 화려했지만 손님은 돌아가고 없었다. 걸을 때 얼굴의 살이 떨리기 시작한 나이였다. (94쪽)

그녀 삶의 모든 것은 하다가 만 상태였다. 답장을 안 쓴 편지들, 마루에 흩어져 있는 고지서들, 밤새 밖에 놓아둔 버터. (143쪽)

 
비단 인물에 대한 묘사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통찰이 빛나는 문장도 여기저기서 보인다. 그렇기에 작가들이 그의 문장에 그토록 감탄하는 것은 아닐까. 글, 즉 문장에 대한 감탄의 읽기- 조금은 특수한 읽기 방식이 아닌, 조금 더 보편타당한 읽기 방식으로 살펴봐도 <가벼운 나날>은 무척 빼어나다. ‘이 세상엔 두 종류의 삶이 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당신의 삶 그리고 다른 하나의 삶. 문제가 있는 건 이 다른 삶이고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것도 바로 이 삶이다.’ 작품의 서문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아!’하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작품은 바로 그, 남들에게는 감춰져 있는, 보이지 않는 삶의 이면을 보여준다. ‘비리’와 ‘네드라’ 부부. 그들은 예쁜 두 딸이 있고 교외에 사는 남부러울 것이 없어 보이는 중산층 부부다.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문화적 수준은 물론 교양도 쳐지지 않는다. 그들이 사는 교외의 이 평온한 집으로 때때로 찾아오는 또 다른 중산층 커플들이 있으며 그들과의 관계도 원만하고 풍요롭다. 겉으로 보기엔 한없이 잘 어울리는 이상적인 커플이다.

그러나 언제나 삶이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듯 그들의 삶을 내밀하게 들여다보면 ‘균열’이 여기저기서 드러난다. 어찌 보면 이것은 회복하기 불가능한 성질의 심각한 균열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상적인 부부’의 역할 또는 연기를 오랜 세월 꾸준하게 해 나간다. 삶이 그들에게 주는 역할이 바로 그것이므로.

그런 역할 속에 아이들은 자라나고 주변에서 때로 누군가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그렇게 세월은, 시간은 흘러간다. ‘네드라’는 ‘비리’에게 이렇게 묻기도 한다. “진실하게 살면서 행복하고 너그러운 사람이, 충실하지만 불행한 사람보다 낫지 않아? 그렇지 않아?” (274쪽) 이 질문은 작품을 읽고 있는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같기도 하다.

어떻게 사는 삶이 정말로 제대로 사는 것인지 생각하게끔 하지만 답은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한 가지 명확한 것은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찾아오는 중요한 깨달음 중 하나는 꿈꾼 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이다. (325쪽)’ 처럼 꿈꾼 대로 삶이 흐르지 않는다는 아프지만, 진실인 깨달음이다. 때문에 ‘네드라’와 ‘비리’ 이 부부의 삶을 보고 있노라면 그것이 먼, 과거의 어떤 부부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나의 삶에 대한 질문 같기도 하여 때로는 서걱서걱 모래를 씹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꿈꾼 대로 살 수 없기에 그 안에서 그래도 하나쯤 열망하는 것, 열망하는 대상을 얻기 위해 때로는 사투를 벌이고 그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타인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윤리나 도덕을 거스를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만약 그렇게 얻은 것들조차 시간이 지나 희미해지고 빛이 바래진다면…. 다른 반짝이지 않는 것들과 똑같이 빛나지 않는 것이라면, 그런 사실을 또 다시 깨닫게 된다면 그때는 어찌해야 하는 것일까?
 
그럼에도 우리는, 사람은 지금 이 순간을 산다. 아이들은 자라고 어른들은 늙어 가고 그리하여 죽음을 맞이하고…. 시간은 그렇게 순환하며 인생은 흘러간다. 우리의 ‘가벼운 나날’들은 그렇게 흘러가서 ‘하나의 삶’이 된다. 그 삶은 어느 순간 빛이 바래지더라도 ‘삶’ 자체로써 의미가 있음을 <가벼운 나날>에서는 조용히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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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kuru 2016-02-27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어보니 꼭 읽고 싶어집니다.
다음에 서면 중고서점에 책이 나오지 않나 살펴봐야 되겠어요!

잠자냥 2016-02-29 11:33   좋아요 0 | URL
네, 기회된다면 꼭 한 번 읽어보세요. 즐거운 독서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이별여행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배정희.남기철 옮김 / 이숲에올빼미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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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표지부터 두근두근 낭만적이 이 책은 슈테판 츠바이크의 국내 초역 두 작품이 실려 있다. 하나는 ‘이별여행’, 또 다른 하나는 ‘당연한 의심’이다. 츠바이크의 다른 작품도 그랬듯이 이 두 작품도 한번 손에 들면 읽기를 마칠 때까지 내려놓을 수가 없다. ‘이별 여행’은 표지처럼 낭만적이고 쓸쓸한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당연한 의심’은 찌릿찌릿한 공포스릴러(적어도 내게는 그랬다)다.

인간 심리의 대가인 슈테판 츠바이크는 ‘이별 여행’에서 가진 것 없는 젊은 청년이 부잣집에서 가정교사를 하면서 받는 상처, 그로 인해 생긴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 그 과정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는 사랑과 이별 등을 섬세하게 그리고 있다. 츠바이크 소설이 대부분 그렇듯 큰 사건이 있어 그 이야기를 따라가는 재미보다는 소소한 사건 가운데 시시때때로 변하는 인물의 감정선을 느끼는 일에 더 큰 재미가 있다. ‘이별여행’에서도 가난 때문에 느낀 상처와 굴욕감, 그로인해 더욱 커진 자존심은 물론 사랑의 열정, 욕망, 고통, 그리움, 재회의 어색함, 이별의 쓸쓸함 등이 굉장히 섬세하게 묘사된다. 어찌나 두근두근하고 애잔하고 쓸쓸한지, 참 짧은 분량의 소설인데도 읽고 나면 가슴 한구석이 헛헛해진다.

그러나 ‘이별여행’보다 더 놀라웠던 작품은 두 번째로 수록된 ‘당연한 의심’이다. 이 작품은 한 편의 스릴러로도 탁월하다. 은퇴한 노부부가 살고 있는 전원마을에 이웃으로 한 젊은 부부가 이사 오면서 시작된다. 소설의 첫 시작부터 ‘살인’사건이 언급되기 때문에 이 아름다운 전원마을에 범상치 않은 사건이 벌어졌으며 그 범인을 노부인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독자는 곧바로 알게 된다. 과연 누구일까 궁금증을 멈출 수 없어 읽어나가다 보면, 대단히 놀랍고 예측 불허인 스토리에 기가 탁 막혀온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당연한 의심’에서도 진저리쳐질 정도로 인간의 심리를 묘사한다. 특히 열정과 에너지가 지나치게 넘치는 사람이 주변에 끼치는 피해를 무척 공감 가게 그리고 있다. 새로 이사 온 젊은 부부 중 남편이 바로 그런 인물인데, 이 남자를 보고 있으면 책 속에 있는 사람인데도, 이런 사람이 마치 곁에서 살아 숨쉬고 있는 듯해서 내가 다 피곤해질 지경이다. 이런 인물에 대한 묘사는 물론 이 남자를 바라보고 있는 주변 사람들의 심리까지도 츠바이크는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게다가 더 놀라운 것은 이 작품에는 사람 외에 개 한 마리가 등장하는데, 이 개의 행동 및 심리까지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탁월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도 개를 참 오래 키워봐서 알지만, 정말 작가가 개를 철저하게 관찰했구나 싶어져서 존경스러워지기까지 한다. 츠바이크도 개를 오래 키워본 게 아닐까 추측을 해본다. 만약 개를 키운 적도 없으면서 그저 '관찰'만으로 이런 소설을 썼다면 정말 그는 '천재'다. 대단한 작가다.



    인간은 추억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다. 식물만이 아니라 모든 창조물에는 자기 고유의 색을 유지하고, 꽃과 줄기가 시들어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땅속의 새로운 자양분과 하늘의 새로운 빛이 필요하다. 하물며 인간의 꿈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언뜻 보기에 지상의 것이 아닌 듯한 꿈조차도 현실적인 감각에서 양분을 얻어야 하고, 가시적이고 실질적인 징표의 도움이 필요하다. 만약 그런 것이 없다면 추억의 잎도, 열매도 매말라버리게 마련이다. (49쪽, '이별 여행')



    그를 알기 전에 우리 두 노인네는 선량함, 호의, 솔직하고 따듯한 감정 같은 것들이 지나칠 때에는 사람을 못 견디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98쪽, '당연한 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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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2장으로 쓴 세계 역사 열린책들 세계문학 104
줄리언 반스 지음, 신재실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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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둔지는 꽤 되었는데 이제야 읽었다. 예전에 사서 바로 읽지 않았던 이유는 제목에 들어간 ‘세계 역사’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꽤 두꺼운 분량인데 왠지 ‘역사’와 관련된 좀 지루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어서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실제로 이 작품은 처음 출간되었을 때 ‘역사’ 코너에 꽂혀있는 웃지 못 할 사연도 있었단다.


걱정(?)과는 달리 이 작품은 정말 재미있다. 픽션과 논픽션이 어우러진 작품으로 어떻게 보면 그 기법상 줄리언 반스의 또 다른 작품인 <플로베르의 앵무새>와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는데, 재미와 기발함, 그리고 왠지 모를 감동까지 두루 평가한다면 나는 <플로베르의 앵무새> 보다 이 작품에 더 손을 들어줄 것 같다.


읽는 내내 줄리언 반스의 해박함과 재치, 위트에 경탄했고 정말 ‘잘 쓴다’는 존경심까지 솟구쳤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까? 싶기도 하고. 암튼 줄리언 반스, 그는 현존하는 영어권 작가 중 매 작품 감탄이 쏟아지고 신작이 나오길 손꼽아 기다리는 그런 작가임에 틀림없다. 책 뒤표지에 어떤 이는 ‘당신은 이 책을 거듭 읽고 싶을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정말 그렇다. 책을 다 읽고, 당장 다시 어느 구절을 펼쳐 읽어도 재미있고, 문장을 읽고 나서 음미하고 생각하는 과정도 즐겁다. 언젠가 한 번은 또 다시 읽어보고 싶은 작품이다.


이 작품의 ‘줄거리(?)’를 소개한다는 건 무의미한 일이다. 제목처럼 10 1/2장으로 이루어진 이야기들은 서로 전혀 상관이 없는 이야기면서도 알고 보면 교묘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1장을 살펴보자. 1장은 성경 속 ‘노아의 방주’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런데 어딘가 좀 다르다. 아니 많이 다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노아의 방주’와는 전혀 딴판이다. 어라? 1장의 화자는 다름 아닌 ‘나무좀’이다. 그것도 노아의 방주에서 살아남은 ‘나무좀’이란다. 이 작은 벌레가 전해주는 ‘노아의 방주’의 실상은 굉장히 재미있고 유머러스하지만 열렬한 기독교신자라면 좀 불쾌(?)할 수도 있으리라.

계속 ‘나무좀’이 화자가 되어 이야기가 전개될까 싶은데, 그 후 매 장은 다른 화자가 등장해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게다가 내용도 앞서 이야기했듯 ‘노아의 방주’와 얼핏 보면 상관없는 것 같으면서도 한 번 더 생각해보면 ‘상관있는’ 이야기들이다. 어떤 장은 예술 작품에 대한 비평서 같기도 하고, 어떤 장은 심지어 줄리언 반스의 에세이다(아마도 이 에세이를 1/2장으로 봐도 무방할 듯하다). 그리고 마지막 장은 또 다른 기막힌 우화로 끝을 맺는다.


400페이지에 달하는 긴 이야기를 통해 세계 역사(?)를 전하고자 한 반스의 야심찬(?) 계획에서 내가 얻을 수 있던 것은 인류의 역사란 결국 그것을 전달하는 자의 취사선택에 따른 픽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누가 그 사건을 보느냐에 따라 역사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해석될 수도 있고, 때문에 누군가에게는 진실인 역사가 누군가에게는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역사는 처음에는 비극으로, 두 번째는 소극으로 되풀이 된다(241쪽)’는 반스의 말처럼 전혀 다른 것 같지만 닮은꼴을 한 과거의 역사가 현재도, 그리고 미래에도 비슷하게 반복되고, 될 것이다.

그 옛날 노아의 방주는 히틀러의 압제를 피해 다른 대륙으로 떠난 유대인 난민들을 실은 배일 수도 있고, 신대륙을 발견하고자 떠났지만 난파에 시달려 침몰하다 구조된 뗏목일 수도 있고, 이 험난한 세상을 견뎌내기 위한 ‘사랑’일 수도 있다. 왜 갑자기 사랑이냐고? ‘순진한 처녀들은 사랑이 약속의 땅이고, 둘이서 대홍수를 피해 살아남을 수 있는 방주라는 소리를 듣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방주일지도 모르나, 인육식 관습이 만연하고 있는 방주이고, 잣나무 막대기로 머리통을 때리고, 어느 때라도 당신을 물속으로 집어던져 버릴 수 있는 흰 수염의 미친 노인이 선장으로 있는 방주이다. (316쪽)’라는 반스의 에세이에 절대적으로 공감하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이야기구조에 익숙해진 독자들에게는 조금 당혹스러운 소설일 수도 있겠으나, 하나의 퍼즐을 맞춘다고 생각하면서 읽다 보면 ‘읽는 재미’는 물론 ‘아!’하는 감탄까지 터져 나오는 작품이다. 이 작품이 그래서 어찌어찌한 주제를 말하고자 했다고 섣불리 결론 내리기는 뭐하다. 게다가 읽는 사람에 따라 워낙 다양한(?) 해석이 나올 여지가 많은 작품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나는 어떤 역사를 믿을 것인지는 사랑의(곧 믿음의) 문제라고 조심스레 나만의 결론을 내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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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꿈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안토니오 타부키 지음, 박상진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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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작가나 예술가가 만일 꿈을 꾼다면 어떤 꿈을 꿀까? 타부키의 <꿈의 꿈>은 바로 그런 호기심에서 비롯되었다. 안톤 체호프나, 랭보, 페소아 등 개인적으로 관심 가는 이들의 꿈부터 타부키의 생각을 통해 만나본다. 어쩐지 정말 그들은 그런 꿈을 꾸었을 것 같다. 다른 이들의 꿈을 해석하는데 온 삶을 바친 프로이트의 꿈은 어떠했을까 상상해보는 일도 재미있으리라. 타부키의 이 글을 통해 더 알고 싶은 이들이 생겼는데, 예를 들면  마야코프스키,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 등이 그렇다. 마야코프스키가 결벽증이 있어 비누를 늘 소지하고 기회가 닿을 때마다 손을 씻었다는 점등은 흥미로웠다. 사는 게 무척 고달팠을 것 같다.

타부키의 <꿈의 꿈>은 랭보, 라블레, 로트렉, 스티븐슨 등의 꿈을 통해 알 수 있듯이(어차피 타부키의 상상으로 빚어진 이야기지만) 꿈이란 결국 현실에서는 좌절되거나 이루지 못할 욕망을 해소하는 개인만의 자유로운 영역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페르난두 페소아 덕후임을 인정한 그였기에 그런지 페소아의 꿈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그를 향한 애정이 고스란히 엿보인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나 또한 내가 좋아하는 작가나 예술가의 꿈을 상상해보는 글을 써볼까 하는 욕심이 생기더라. 예를 들어 카프카...

'1922년 체코 프라하, 자신의 조그마한 방에서 카프카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꿈을 꿨다. 꿈 속에서 그는 한 마리 검은 까마귀였다.... 그 까마귀는 한 마리 벌레로 변한 아버지이지만 아버지가 아닌 듯한 존재의 머리 위를 쉼 없이 날아다녔다.... ' 이렇게 시작하는... 카프카의 꿈의 꿈.

우리는 때로 우리 자신의 꿈에 골몰하고는 한다. 그런데 타부키처럼 타인의 꿈은 어떠할지 상상해보는 일도 무척 재미있으리라. 그리고 그 상상은 문학의 외피를 입었을 때 더욱 아름답게 빛날 수 있을 것이다. 타부키의 <꿈의 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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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베르의 앵무새 열린책들 세계문학 56
줄리안 반즈 지음, 신재실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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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람들은 당신과 전혀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들이 당신의 일부를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당신에게서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다. 당신이 무모하게 책 한 권을 쓰게 되면, 그 일로 인하여 당신의 예금 계좌, 건강 진단서, 결혼 생활 모습 등 당신의 일부는 돌이킬 수 없이 대중의 몫이 된다.
 -'플로베르의 앵무새' p.106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혹은 ‘네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이 책을 읽고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바로 이런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진실’이라는 것이 과연 정말 ‘진실’일까 ‘진실’ 혹은 ‘진짜’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할까? 이런 질문을 [플로베르의 앵무새]는 우리에게 남긴다.



제목만 보고 혹은 간단한 서평만 보고 이 책을 ‘플로베르’에 관한 전기라고 생각할 수 있다. 플로베르 전기라? 그럴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이 책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어떤 한 인물에 대한 ‘전기’와는 전혀 다르다. ‘전기’지만 ‘전기’라고 할 수 없는… 사실 줄리언 반스의 [플로베르의 앵무새]가 아니었다면 내가 과연 ‘플로베르’라는 작가와 그의 작품을 알고자 하는 욕망이 생겼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스의 작품을 읽기 위해 [마담 보바리]도 읽고 ‘플로베르’에 관해 인터넷에서 찾아보기도 하고 그랬는데, 이런 식으로 ‘플로베르’에 대해 알게(?) 된 것, 그리고 반스의 이 작품을 읽은 것 등등 모든 것이 즐거웠다.

이 작품은 ‘플로베르’에 미친 한 의사가(이제는 늙어서 은퇴한) ‘플로베르’의 진짜 앵무새(플로베르가 글을 쓸 때 옆에 두고 ‘창작’의 영감을 얻었다고 전해지는 박제된 앵무새)를 찾아 ‘플로베르’의 고향 루앙을 방문하면서 시작한다. 그런데 그곳에는 서로가 진짜임을 주장하는 박제된 앵무새 두 마리가 있다. 어느 것이 진짜일까? 의사는 그것을 밝히기 위해 ‘플로베르’의 삶을 추적하는 일을 시작한다. 그러면서 속속들이 밝혀지는 ‘플로베르’의 삶과 사랑, 그리고 작품들… 그러나 이 책 속에 드러나는 ‘플로베르’의 삶과 ‘플로베르’라는 인물에 대한 갖가지 정보들을 보다 보면 과연 ‘플로베르’라는 사람은 어떤 모습이 진짜 ‘그’의 모습일까 갈수록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의 2장 ‘연보’ 부분을 보면 플로베르의 ‘연보’가 3가지 버전으로 소개된다. 하나는 일반적인 버전의 연보(그의 성공과 사회적 명성 그래서 행복한 부분들이 기술된 연보), 또 다른 하나는 첫 번째 버전의 연보와는 다른 성공의 이면에 감춰진 슬픔과 불행 등이 기록된 연보,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플로베르의 개인적이고 내밀한 기록들로 이뤄진 연보(이 연보를 보면 ‘플로베르’라는 사람이 무척 섬세하고 상처받기 쉬운 인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 두 번째 장이 이 책의 주제를 잘 집약한 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누군가를 안다고 말할 때 일반적으로 플로베르의 삶을 설명한 첫 번째 ‘연보’(즉 객관적으로 알려진 사실에 기초하여)와 같은 방식에서 입수한 정보로 ‘그’ 또는 ‘그녀’를 안다고 말한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진실인가? ‘그’ 또는 ‘그녀’의 삶에는 플로베르의 첫 번째 연보와는 다른 두 번째, 세 번째 연보가 존재하듯이 ‘그들’만의 또 다른 연보가 존재할 것인데, 그 모든 것을 알지 못한 채 내가 아는 ‘그’ 혹은 ‘그녀’가 ‘진짜’ 그 사람이라고 섣불리 말할 수는 없는 게 아닐까? 이런 질문을 끊임없이 이 작품은 우리에게 던진다. ‘정말 당신이 그 사람 혹은 그 사물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진짜요?’ 하고. 어느 것이 진짜인지 모를 앵무새의 존재 역시 이러한 주제와 무관하지 않다.

줄리언 반스 특유의 비꼬는 듯한 문장과 영어와 불어 사이의 언어 유희, 신화과 고전을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을 맛보며 예술과 삶, 비평가와 작가, 작가와 작품 사이의 거리 등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 무척 좋았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플로베르’라는 한 작가의 면면을 살펴보는 즐거움이 대단했다. 물론 이 책에 그려진 ‘플로베르’가 온전히 ‘그’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이 책에 인용된 플로베르의 ‘말’ ‘말’ ‘말’들만 봐도 플로베르가 꽤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특히 ‘물고기가 물속을 헤엄치듯 내 마음은 언제나 눈물 속을 헤엄치고 있다.’라니!!! 




행복은 천연두와 같다. 너무 빨리 걸리면 그것은 너의 몸을 망쳐 놓는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마음속에 고귀함의 방을 하나씩 갖고 있다. 나는 그곳에 담을 쌓고 아무도 들어올 수 없게 했다.

물고기가 물속을 헤엄치듯 내 마음은 언제나 눈물 속을 헤엄치고 있다.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썩어 가기 시작한다.

삶은 왜 이렇게 끔찍하단 말인가? 삶이란 머리카락이 둥둥 떠다니는 수프와 같다. 그렇지만 여러분은 그 수프를 마셔야 한다.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지 못하는 것이고, 다음으로 고통스러운 것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 사는 일이다.

-줄리언 반스 [플로베르의 앵무새]에 언급된 ‘플로베르’의 ‘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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