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가방
세르게이 도나또비치 도블라또프 지음, 정지윤 옮김 / 뿌쉬낀하우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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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계속 큭큭큭큭. 키득키득 웃게 된다. 그러다가 끝내 어느 부분에서는 ‘푸하하하하’ 박장대소하게 된다.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많이 웃어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한 편의 개그 소설로 손색이 없다. 하지만 그냥 웃고 끝나는 게 아니다. 이 담담한 소설 속에는 웃고 나면 한없이 찡한, 현실이 담겨 있다.


러시아 소설은 읽고 나면 마음에 남는 게 많지만 섣불리 집어들게 되지는 않는다. 러시아 소설하면 떠오르는 무겁고, 심각하고, 어두운 이미지- 그런 것들 때문에... 그러나 도블라또프의 작품 <여행가방>은 그런 러시아 소설에 대한 고정관념을 깬다. 큭큭큭큭-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체호프의 유머 코드가 담긴 단편을 읽을 때의 느낌과도 좀 비슷하다. 실제로 도블라또프는 ‘20세기의 체호프’라고 불린단다. 적어도 <여행가방>에서는 도블라또프가 체호프보다 더 웃기다.


도블라또프는 미국으로 망명한 러시아 출신 작가다. 1972년부터 신문 기자로 일하며 산문을 쓰던 그는 정부의 박해를 피해 1978년 소련을 떠났다. 그때 그는 소련을 떠나며 가방에 짐을 싸는데, <여행가방>은 그 가방에 담겨 미국까지 따라온 물건들에 관한 이야기다. 양말, 구두, 양복, 벨트, 잠바, 모자, 셔츠 등이다. 이 물건들과 관련한 추억이 옴니버스 형식으로 펼쳐진다. 때로는 예상치 못한 반전이 있고, 단편마다 웃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나는 프롤로그를 읽자마자 도블라또프의 작품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일주일 후에 나는 벌써짐을 싸고 있었다. 다 싸 놓고 보니 가방 하나로도 충분했다. 나는 내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져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내 나이가 서른여섯이 아닌가. 그 서른여섯 해 가운데 18년 동안 돈벌이를 하며 살았다. 수중에 돈이 생기면 물건을 사고는 했으니, 그렇게 사들인 것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 결과가 달랑 여행 가방 하나다. 그것도 코딱지만한 가방으로. 아니, 내가 거지도 아니고, 어떻게 이런 지경이 돼 버렸을까?(9쪽)


머리말만 읽고 이렇게 한껏 기대를 하게 되었는데, 첫 번째 단편인 ‘핀란드 산 양말’의 시작부분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큭큭큭 웃기 시작했다. 도블라또프, 이 사람- 살아있다면 왠지 만나서 수다를 떨어보고 싶은 심정까지 들었다. 누군가 남을 웃길 때, 웃기는 사람이 ‘이건 진짜 웃긴 이야기야’하며 폼을 잡고 이야기를 시작하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시종 웃어대면 듣는 사람은 그다지 웃기지 않다. 그런데 도블라또프는 웃지 않는다. 웃긴 이야기라고 말하지 않는다. 담담한 어조. 때로는 심각하게, 시니컬하게 이야기한다. 무미건조한 문체다. 그래서 더 웃기다. 심각한 얼굴로 자신은 전혀 웃지 않으면서 개그를 하는 개그맨이 더 큰 웃음을 주듯이.

 세상에는 정확한 학문들이 존재한다. 이것은 곧 정확하지 않는 학문들도 존재한다는 말이다. 내 생각에, 그 정확하지 않은 학문들 가운데 일등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어문학이다. 그래서 나는 어문학부 학생이 되었다. (핀란드 산 양말, 16쪽)

 나는 내가 겪었던 가난을 슬퍼하지 않는다. 만약 헤밍웨이의 말을 믿는다면 가난은 작가에게 그 무엇도 대신할 수 없는 학교이다. 가난은 사람을 명민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런 식의 교훈은 얼마든지 있다.
 흥미로운 점은, 헤밍웨이가 부자가 되자마자 이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페르낭 레제의 잠바, 139쪽)


앞서 언급했듯 도블라또프 작품의 매력은 그저 한번 웃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각 단편에는 공산주의 치하 러시아의 암담했던 현실, 그 현실 속에서 고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애잔하게 그려진다. 게다가 그 짧은 단편 속에서 인간에 대한 작가의 명민한 통찰력이 돋보인다. 나는 <여행가방> 이 한 권만으로도 도블라또프의 팬이 되었다. 그런데 국내에 번역되어 나온 작품은 이 책이 처음인 듯하다. 앞으로 그의 작품을 더욱 많이 만나볼 수 있으면 좋겠다.
 
내가 크게 박장대소했던 부분은 다음 장면이다. 도블라또프가 자신의 게으름에 대해 쓴 구절이다.

 솔직히 말해, 나는 집에서 나가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다들 나를 가만히 좀 내버려 뒀으면 좋겠는데….
 어릴 때 우리 집에 루이자 겐리호브나라고 하는 유모가 있었다. 그녀는 늘 체포될까 봐 전전긍긍하며 지냈기 때문에 매사에 집중을 하지 못했다. 언젠가 한번은 루이자 겐리호브나가 나에게 반바지를 입혀 주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는 내 다리 두 개를 바지 한 가랑이에 다 넣어 버렸다. 결국 나는 그 모양으로 하루 종일 돌아다녀야 했다.
 당시 네 살이었던 나는 이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나는 그녀가 옷을 잘못 입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입기가 싫었기 때문이다. 옷을 다시 입는 일은 지금도 싫어한다.
 그와 비슷한 일들이 내 기억 속에는 많이 남아 있다. 어릴 때부터 나는 무엇이든 참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쓸데없이 귀찮은 일만 피할 수 있다면야….(포플린 셔츠, 1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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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사랑 세계문학의 숲 32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김석희 옮김 / 시공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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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어떤 사람을 자기 자신의 완벽한 이상형으로 만드는 일은 가능한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이상형'이라고 한다던가, '이상형'에 가깝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런 일은 무척 드물 것이다. 때문에 조금은 혹은 많이 자신의 이상형에서 부족한 상대방을 이상형에 가깝게 만드는 일이 노력으로 가능할까?

예를 들어 어떤 한 인간의 외모가 그 또는 그녀가 생각하는 완벽한 이상형에 가깝다고 하자. 그 또는 그녀는 그런 외모를 지닌 사람 A에게 우선 외모를 보고 반한다. 그러나 A의 외모 외에 다른 지점들은 그 또는 그녀에게 완벽하게 부합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성격이나 말투, 가치관, 옷차림, 생활 습관, 지식의 정도, 문화적 취향의 차이 등등 여러 면에서 외모가 주는 호감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비례하리라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오히려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단순히 외모만으로 어떤 한 사람을 사랑하기란 불가능한 게 아닐까? 그렇다면 이런 생각도 해 볼 수 있다. 외모가 완벽하게 이상형에 가까운 사람을 만나, 그 또는 그녀를 나의 취향에 맞게 완벽하게 ‘개조’ 혹은 ‘재교육’하는 것이다. 마치 어떤 아바타 캐릭터를 창조하고 키우듯이 말이다.

여기, 바로 그런 사람이 있다. 남자의 이름은 ‘가와이 조지’. 남자는 어느 카페에서 여급으로 일하고 있는 소녀를 우연히 보게 된다. 소녀의 나이는 열 다섯. 이 남자는 스물 여덟이다. 남자는 ‘나오미’라 불리는 소녀를 보자마자 호감을 느끼게 된다. 두어 달 정도 소녀를 만나면서 소녀와 가까워 진 남자는 그녀에게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는다.

남자는 이 소녀를 ‘키워서’ 괜찮은 여자가 된다면 아내로 맞이할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이다. 남자는 소녀에게 지금부터라도 괜찮다면 자신과 함께 살면서 하고 싶은 것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한다. 카페 여급으로 별다른 희망 없이 살아가느니 남자와 함께 살아가며 이런 저런 경험을 해볼 생각에 소녀는 선뜻 승낙을 한다. 남자 또한 소녀가 어떻게 자랄까 내심 기대되고 호기심으로 가득하게 된다.

한편 소녀의 삶에 별다른 기대도 간섭도 없던 소녀의 가족들은 조지의 제안을 쉽게 수락한다. 그때부터 열 다섯 소녀와 스물 여덟 남자의 동거는 시작된다. 그들은 사람들과 동떨어진 곳에 집을 얻어 그들의 ‘동화 속의 집’에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조지는 회사에 출근을 하고 나오미는 평소 배우고 싶다던 영어와 음악을 익히러 일주일에 몇 번씩 외출을 한다.

그렇게 소녀의 성장 과정을 지켜 보며 남자는 황홀해 한다. 점점 자신의 관능을 자극하는 소녀의 성장 자체가 경이로움이다. 과연 이 남자는 그의 바람대로 소녀가 어른이 되면 그녀와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어쩐지 이 소녀, 보통이 아니다. ‘친구’라고 하면서 주변에 몹시도 많은 남자들이 그녀 곁에 머문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쥐락펴락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조지’만 모를 뿐 책을 읽는 사람들은 ‘조지’또한 ‘나오미’에게 그런 남자들 중 하나일 뿐이라는 걸 단박에 알 수 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미친 사랑>은 소설 도입부부터 ‘우리 부부의 이야기를 한다’고 언급되어 있다. 때문에 조지와 나오미가 부부로 맺어졌음을 독자들은 이미 알고 이야기를 읽게 된다. 그러나 부부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그리 순탄하지는 않으며 ‘부부’라고 불리는 이 관계가 그래서 정말, 행복할까?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물론 조지와 나오미는 행복할지 모르겠으나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과연 이런 관계 속에서 얼마나 행복할지 의문이 든다. 물론 그렇기에 <미친 사랑>이라 하겠지만 말이다.

앞서 언급했듯 나오미에게는 너무나 많은 남자들이 항상 그녀 주변을 맴돈다. 나오미는 그런 그들을 뿌리치지 않는다. 오히려 즐기고 이용한다. 대표적으로 이용당하는 사람이 이 작품의 화자인 ‘가와이 조지’임을 이 책을 읽는 이들은 알고도 남으리라. 그녀 입장이라면 ‘조지’같은 남자를 이용해 얻을 수 있는 것을 얻고 다른 젊고 매력적인 남자들과 즐기는 것을 이해할 만도 하다.  

그런데 이 남자, ‘조지’는 그런 그녀의 부정함, 부도덕함 혹은 뻔뻔스러움을 알면서도 쉽게 뿌리치지 못한다. 그러기엔 그녀의 아름다움에 심각하게 도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미친 사랑’도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혹 단순히 미(美)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아닐까?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조지’의 입을 통해 여자의 아름다움, 그리고 그 아름다움에 빠져 허우적대는 한 남자의 모습을 밀도 있게 그려 낸다.

사랑에 있어서 믿음이랄까, 신의.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상대방을 배신하지 않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로서는 이들의 관계를 섣불리 이해할 수는 없었다. 아니 ‘조지’ 이 남자의 마음이 말이다. 자신을 이미 예전에 배신한 사람을, 그 후에도 계속해서 그토록 기만하고 배신을 일삼는 여자를 단지 미치도록 아름답다는 이유만으로 어떻게 계속해서 사랑할 수 있을까?

게다가 상대방에 대한 믿음이 산산조각 났는데도 그 관계를 계속 붙잡고 유지해야만 할 이유가 과연 어디에 있을까? 마음을 가질 수 없다면 육체라도 갖겠다는 무모한 집착이 아닐까? 그 상대가 ‘너무나 아름답기’때문에 과연 그럴 가치가 있을까?

조지의 모습이 점점 마조히스트적으로 변해 간다는 점에서 이 작품을 읽다 보면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의 <모피를 입은 비너스>가 떠오르기도 한다. <미친 사랑>의 ‘조지’, <모피를 입은 비너스>의 ‘제베린’ 이 두 남자는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자신을 하찮게 대하는 상대방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사랑에 빠진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이런 모습이 있으리라. 그러기에 이런 작품들이 수십 년이 흘러도 계속해서 읽히는 게 아닐까. 그럼에도 이 눈 먼 사랑에 그저 안타까운 마음이 들 뿐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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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들 - 윌리 로니스의 사진 그리고 이야기들, 개정판 내 삶의 작은 기적
윌리 로니스 지음, 류재화 옮김 / 이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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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식이나 과장, 꾸밈이 많은 사람이 싫다. 글도 마찬가지고 사진은 더더욱 그렇다. 그렇기에 나는 윌리 로니스의 사진을 참 좋아한다. ‘사진’하면 떠오르는 수많은 거장의 이름이 있겠지만 누구보다도 내가 좋아하는 사진작가는 윌리 로니스, 아니 그의 사진들이다. 그의 사진은 정말 꾸밈이 없다. 굉장한 기교도 없고 어떤 특별한 순간을 찍은 사진도 그다지 많지 않다. 평범하고 소박한 사람들의 일상, 그뿐이다. 그토록 담백하고 소박할 수가 없다. 그런데 보고 있노라면 한없이 미소가 지어지고 어떤 사진은 뭉클하고 또 어떤 사진은 숭고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이 물씬 전해온다. 때로는 한없이 마음 아파오는 사진도 있다.

윌리 로니스의 <그날들>은 그가 찍은 사진과 그에 얽힌 에피소드가 담겨 있는 사진집이다. 윌리 로니스가 사진에 얽힌 이야기를 직접 글로 썼다하니 조금 더 궁금해진다. 예상대로였다. 그의 글은 사진처럼 정말 소박했다. 딱 그의 사진처럼 담백하다. 문장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사진에 얽힌 이야기들도 어찌 보면 특별할 것이 없다. 그런데도 그의 글과 사진을 보고 있는 내내 행복했다. 그런 사진을 찍는 사람이라면 참 괜찮은 사람일거야, 라는 생각을 막연히 하고 있었는데 글을 보니 어쩐지 정말 따뜻한 사람이구나 싶어졌다.  글도 사진처럼 무척이나 진실하다.

거장들의 사진이 대부분 그렇듯이 로니스의 사진에도 어떻게 저런 순간을 포착했을까 싶은 사진이 많다. 윌리 로니스는 사람과 그들이 거니는 거리를 좋아했으며 그 거리와 사람이 만나 발생하는 이야기의 ‘순간’에 집중했다. 어떤 이야기가 발생할 것 같은 분위기가 감지되면 그는 한없이 기다린다. 미술관에서 지루해하는 아이들의 모습이나 연인들의 은밀한 만남을 담은 사진들은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그는 사진을 찍기 위해 자기 자신을 숨기지는 않지만 ‘아무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이런 그의 자세랄까, 마음가짐이 사진 속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사진 안에 있는 인물들은 평범하고 소박하지만 일상의 한 장면 장면에서 행복하고 즐거운 이들이다.

그의 사진 속에는 아이들도 많이 등장한다. 이 책에도 아이들이 무척이나 귀여워서 ‘으음~’하는 신음소리가 절로 나는 사진들이 많다. 개구쟁이 꼬마도 있고, 떼쓰는 꼬마도 있으며, 자기들만의 놀이에 빠진 아이들도 있다.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귀엽다. 평소 그의 사진을 볼 때마다 아이들을 이렇게 사랑스러운 존재로, 아이 특유의 행동을 놓치지 않고 잘도 찍는 사람이라면 왠지 좋은 사람일 거야, 라고 막연하게 생각해왔다. 그리고 그런 막연한 기대는 ‘역시 그렇군.’하는 확신으로 돌아온다.

윌리 로니스는 아들 뱅상을 카메라에 많이 담기도 했다. 뱅상 역시 한없이 귀엽다. 평소에는 아들 사진만 많이 봤는데 이 사진집에는 아내 사진도 꽤 많다. 그는 아들뿐만 아니라 아내 역시 무척이나 사랑했던 것 같다. 그가 찍은 가족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사랑이 절로 전해져 마음이 따스해져 온다. 그러다가 급기야 나는 어떤 사진과 그에 얽힌 이야기를 보다가 눈물이 핑 돌고 말았다. 윌리 로니스가 아내 ‘마리안’을 멀리서 찍은 1988년 작품으로 ‘공원의 노부인’이라는 사진이다. 사진 속에서 아내를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그렇게 찍은 이유를 알고 나면 마음이 무척 아프다. 아내는 알츠하이머였고 그보다 먼저 죽음을 준비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 사진은 그런 아내와 윌리 로니스의 이야기가 담긴 사진이라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 사진에 얽힌 이야기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46년을 함께 살았다.’


                        

                        사진은 이렇다.... 사진에 관한 이야기가 궁금한 사람은 이 책을 읽어보시라.....

사진집이고 글도 많지 않아 책장은 쉽게 넘어가서 금세 마지막장에 이른다. 그런데 글도 사진도 무척이나 좋아 다시 앞으로 돌아가게 된다. 사진이 좀 더 많이 실렸으면 좋았을 텐데, 그저 아쉬울 뿐이다. 내 트위터 배경 화면은 윌리 로니스의 사진 중 하나다. 혹 그에 얽힌 이야기를 혹시 알 수 있을까 싶어 기대를 했는데 그 사진은 실리지 않아 그것도 못내 아쉽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그 사진을 보며 계속 혼자만의 상상을 할 수 있어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모든 사진에 얽힌 이야기를 알고 나면 왠지 비밀이 깡그리 사라진 것 같아 섭섭하지 않겠는가.

요즘은 좋은 카메라도 많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무척 많다. 그런데 ‘이야기’를 상상하게끔 하는 사진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윌리 로니스의 사진은 굳이 그가 사진에 얽힌 이야기를 글로 써서 보여주지 않아도 그저 사진 한 장만으로도 이런저런 이야기가 떠올려진다. 느낌이 있고 진심이 있다. 피사체의 마음뿐만 아니라 사진을 찍은 작가의 마음까지도 전해진다. 윌리 로니스의 <그날들>은 볼수록 마음이 뭉클해지고 행복해진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분명 그의 사진이 한층 더 좋아지리라. 그리고 윌리 로니스라는 사람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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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5
시마자키 도손 지음, 노영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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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는 조금 뒤늦은 감이 있지만, 예전부터 읽어보리라 생각했던 책을 올해 첫 책으로 읽었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파계>는 새해 첫 책으로 읽기에 참 괜찮았던 작품이었다. 찾아보니 나쓰메 소세키가 극찬한 작품이라고 하던데, 꼭 그래서만은 아니라 꼭 한 번은 읽어 볼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절대로 네 정체를 드러내서는 안 된다. 숨겨라’ 주인공 우시마쓰에게 내려진 아버지의 계율이다. 아버지는 우시마쓰에게 ‘절대로 네 신분을 밝히지 마라. 밝히는 순간 사회로부터, 너는 영원히 밀려나게 된다.’ 한다. 우시마쓰의 아버지는 백정 출신. 그러니까 그의 집안은 대대로 백정 집안이다. 에도 시대 때부터 백정은 최하층 천민으로 여겨지며 특별지역에 거주하면서 부랑자나 거지보다 더 하등한 인종 취급을 받았다. 메이지 유신 이후 신분제 폐지로 그들은 ‘신평민’이 되었지만 여전히 사회적 시선은 차디차다. 가혹할 정도다.

그렇게 살던 고향을 떠나 철저히 신분을 숨긴 채 어느 시골 학교의 교사가 된 우시마쓰. 그가 어느 날 목격한 장면은 백정 출신으로 밝혀져 여관에서 쫓겨나는 한 남자의 모습이다. 사람들은 그를 향해 거침없는 조롱은 물론, 욕설을 내뱉고, 그가 떠난 뒤 소금까지 뿌려댄다. 끔찍하다. 가혹하다. 그는 그런 장면을 본 뒤 더욱 움츠러들 수 밖에 없다. ‘숨겨라’- 아버지의 말이 귓가에 윙윙거린다.

그런 그에게도 숨길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이노코 렌타로’- 자신이 백정 출신임을 당당히 밝히고도 무시할 수 없는 지식인, 사상가의 반열에 오른 그. 우시마쓰는 위험을 무릅쓰고(그의 책을 읽음으로써 누군가 자신을 백정 출신으로 의심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공포) 그의 저작이라면 빠짐없이 찾아 읽고, 그를 숭배한다. 우시마쓰에게 렌타로는 어쩌면 정신적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렌타로는 자신의 정체를 떳떳이 밝히고는 자유롭게, 당당히 사회의 차별이나 냉대에 맞서며 살아간다. 렌타로를 존경하는 마음이 커갈수록 우시마쓰의 갈등과 번뇌는 깊어만 간다. 숨겨야 하는 삶, 그렇기에 두려움과 공포로 점철된 삶. 자신과 같은 백정 출신이기에 렌타로에게만은 자기 정체를 밝혀볼까 고민하지만 번번히 망설이다 끝나고 만다.

시마자키 도손의 <파계>는 이렇게 자기의 정체성(신분)을 숨기고 살아가야만 하는 한 젊은이의 고뇌와 방황을 담백하면서도 사실적으로 그린다. 육체적 아버지의 ‘계율’과 정신적 아버지가 보여주는 당당한 삶의 모습에서 그가 진실된 자기 삶,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은 무척이나 감동적이다.

어찌보면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한가지쯤 타인에게 절대로 밝히고 싶지 않은 작은 비밀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밝혀지면 사회적으로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맛보며 나락으로 떨어지고야 말 그런 비밀 하나쯤. 우시마쓰에겐 그것이 바로 ‘신분’이었다. 아무리 신분제가 폐지되었다지만, 여전히 사회 최하층 출신이자 상종 못할 인종 취급을 받는 백정.

<파계>가 흥미로운 점은 그의 정체성이 ‘백정 출신’이라는 신분이 아닌 다른 어떤 것, 예를 들면 ‘게이’라는 성적 취향을 숨기고 사는 어떤 한 개인의 이야기로 읽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커밍아웃하지 못해서 언젠가 타인에 의해 자기 정체가 탄로날까 봐 두려워 전전긍긍하고 사는 삶, 잠 못 이루는 삶. 그런 벽장 속에 갇힌 어느 게이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면서 그의 정신적 지주인 ‘렌타로’에게만은 커밍아웃하고 싶으나 그마저 번번히 실패하고야 마는 소심하고 약하디 약한 어느 가엾은 인간.

마침내 그는 어떤 일을 계기로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야 만다. ‘파계’- 육체적 아버지의 ‘계율’을 깨드린 것이다. 진실을 밝힘으로써 거짓된 삶을 버리고 참된 삶으로 나아가고자 한 걸음 내딛는 것이다. 그가 가르치던 학생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진실을 밝히는 순간은 그래서 감동적이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알게 된 뒤, 그를 아끼던 이들이 여전히 변함 없을 때, 그 또한 훈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시마쓰 또한 어쩌면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을 색안경 끼고 바라본 것은 아니었을까?

사람은, 어렵지만 어느 순간 진실을 따름으로써, 조금 더 스스로 강해지는 때가 오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러한 진실 앞에서 그를 둘러싼 이들이 진짜 ‘그’의 사람이라면 변함없이 그를 지지하고 믿어주리라는 것을 <파계>는 담담하지만 묵직하게, 감동적으로 그린다.

어떤 이유로든 온전한 자신을(또는 자신의 비밀을) 감추고 살아가는 이 세상의 수많은 ‘우시마쓰 ‘들에게 한 번쯤은 자기를 믿고, 또는 자기 주위 사람을 믿고 ‘계율’을 깨뜨려 보는 일도 괜찮을지 모른다는 어떤 작은 희망을 <파계>는 보여준다. 비록 아버지가 바랐던, 그리고 한때는 우시마쓰 그 또한 바랐던 사회적 명예와 부, 명성 같은 것을 모두 잃었지만, 허울뿐인 거짓된 삶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우시마쓰에게 작은 응원을 보내며 책을 덮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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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
찰스 부코스키 지음, 박현주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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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부코스키의 <우체국>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작품은 허구이며 아무에게도 바치지 않는다.’ 아무에게도 바치지 않는다! 이 문장은 어쩌면 찰스 부코스키 작품의 모든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보통의 작가들은 책 서문에서 자신에게 특별했던 사람을 언급하며 이 작품을 누구누구에게 바친다... 와 같은 문장을 쓰기 마련이다. 물론 이런 서문을 쓰지 않는 작가들도 많지만, ‘서문’을 통해 어떤 비장함 혹은 경건한 분위기를 잡는 작가들도 꽤 있다.

그러나 부코스키는 ‘아무에게도 바치지 않는다’며 작품을 시작한다. <우체국>을 읽다 보니  누군가에게 이 작품을 바쳤다면(?) 어쩐지 그 사람이 머쓱했을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작품에 경건함, 비장함, 숭고함 따위는 없기 때문이다. 문장 빼어난가? 그렇지도 않다. 이야기가 특출한가? 그렇지도 않다. 주인공이 매력적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찰스 부코스키의 분신이라 볼 수 있는 ‘헨리 치나스키’!  찌질해도 이렇게 찌질할 수가 없다. 술과 여자(정확히는 여자와의 섹스)만 있으면 이 세상에서 더 바랄 것이 없을 이 남자는 세상의 잣대로만 보자면 ‘루저 중의 루저’, ‘쓰레기 중의 쓰레기’다.

<우체국>은 이 찌질한 남자 ‘헨리 치나스키’가 어쩔 수 없이 우체국에서 일한 10여 년 동안의 기록이다. “자기, 그건 초등학생 같은 생각이야. 어떤 바보 멍청이라도 구걸하면 일은 얻을 수 있어. 일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거지. 세상에서는 이런 사람을 요령 있다고 하지. 나는 요령 있는 훌륭한 백수가 되고 싶어.” (77쪽)라고 말하는 치나스키는 일하지 않고 사는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같이 사는 여자들의 요구 때문에 그는 어쩔 수 없이 우체국에서 일을 하게 된다. 그리고 치나스키는 일터에서 생지옥을 경험한다. 

<우체국>은 부코스키가 ‘이 작품은 허구’라고 말했지만 허구이기는커녕 자전적 소설이나 마찬가지다. 찰스 부코스키가 우체국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부코스키는 30~40대 시절 10여 년간 우체국에서 집배원으로 일했다. 우체국 시절 간간이 단편을 발표했던 그에게 출판사 측이 ‘글쓰기에 전념하면 매달 100달러를 주겠다.’고 제안을 했고 부코스키는 ‘우체국에서 미쳐 가느니 작가가 돼 굶기로 결심했다’며 전업 작가로 돌아섰다고 한다(이렇게 매력적인 제안을 받은 걸 보면 작가적인 소질은 다분했나보다).

부코스키의 그 미쳐버릴 것 같은 경험이 <우체국>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치나스키는 우체국에서 10년 넘게 일하면서 서서히 망가져간다. 물론 사회적 잣대로 보기에 그는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사람이었을지 모르겠지만 우체국은 아예 그의 영혼을 갉아먹는다. 우체국에서 헨리 치나스키는 인간이 아닌 노동하는 기계일 뿐이며, 하루 종일 감시받다 언제든지 버림받을 존재다. 노동이 과연 신성한가? <우체국>은 비합리적이고 비인간적인 조직 생활을 비판하고(더 나아가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노동의 쓸모없음을 고발한다. 우체국이라는 획일적이고 위계질서로 짓눌린 공간을 통해 부코스키는 노동하는 인간, 노예처럼 사는 인간의 삶을 비웃는다.

부코스키의 분신인 ‘헨리 치나스키’는 술꾼에 호색한이고 도박꾼이며 끊임없이 놀기 좋아하는 방탕아다. 그러나 이 책을 읽다보면 그 방탕아의 삶이 오히려 노동에 짓눌린 인간들의 삶보다 한결 행복해 보인다. 어떤 부분에서는 낄낄낄 웃음이 터지기도 하고 또 어떤 구절에서는 앗, 하는 울림이 전해지기도 한다. 물론 부코스키가 여자를 묘사하는 방식과 쉴새없이(?) 쏟아지는 비속어 등등은 읽고 있으면 조금 불쾌하기도 하지만 한 번쯤은 읽어볼만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거 봐. 당신 촌 출신이잖아. 나는 직장을 쉰 개, 아니 백 개는 넘게 거쳤어. 한 군데서 오래 버틴 적이 없다고. 내말은 말이지. 미국 전역 사무실에는 일종의 놀이가 있다는 거야. 사람들이 지겹거든.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그러니까 사무실에서 로맨스 놀이를 하는 거지. 대부분 시간 죽이는 것 말고는 별 의미가 없어. 가끔은 부수적으로 한두 번 붙어먹기도 하지. 하지만 그때도 볼링이나 텔레비전, 신년 파티처럼 되는 대로 여가를 즐기는 식이야. 그게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상처받지 않을 거야. 내 말 알겠어?” (106~107쪽)

“염병, 그런 데서 일하는 사람들은 남이 인생을 즐기며 사는 꼴을 못 봐. 그렇지 않아? 항상 쳇바퀴에 묶여 일하길 바란다니까.” (119쪽)

“바다 좀 봐.” 나는 말했다. “저기서 철썩이며 올라왔다 내려가는 것 좀 봐. 그 밑에는 물고기들, 불쌍한 물고기들이 서로 싸우고 서로 잡아먹지. 우리도 그 물고기들과 같아. 단지 뭍에 있다는 것만이 다를 뿐. 발을 잘못 디디면 끝장이야. 챔피언이 되는 게 좋지. 어디에 발을 디뎌야 할지 알아 두는 게 좋다고.” (176쪽)

나는 조이스가 길렀던 빌어먹을 잉꼬들과 다를 게 없었다. 새장 안에 갇혀 살다가 문이 열리자 날아올랐던 것이다. 마치 천국으로 쏘아 올린 총알처럼. 그런데 빠져나간들 천국일까? (2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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