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8
아서 밀러 지음, 강유나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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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일어나는(그러나 한 번 일어나면 엄청난) 대자연이 주는 공포와 달리, 비록 미세할지라도 인간의 삶은 태어나자마자 공포와 불안을 내포한다는 생각이 든다. ‘태어나자마자 썩어가기 시작’한다는 노래 가사도 있듯이, 삶의 시작은 곧 죽음으로 가는 길이라는, 삶이 주는 태생적인 공포. 게다가 결국 그렇게 죽고 말 것인데, 죽기까지 어떻게 ‘먹고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끊이지 않는 불안과 공포. 아주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나 ‘먹고 살아야’하는 일에 대한 불안이 없는 특수한 환경의 몇몇 인간을 제외하고 이 지구의 인간은 모두 이런 ‘불안’을 안고 살아갈 것이다.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은 바로 그런 현대인의 불안과 공포가 절절하게 녹아있다. 그렇기에 이 작품이 1949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되자마자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현재까지 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공연되고 사랑받는 미국의 대표적인 희곡으로 자리 잡은 게 아닐까. <세일즈맨의 죽음>은 공간과 시간을 초월해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잠재된 ‘먹고 사는 일에 대한 불안’을 탁월하게 표현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우리 나이로 치면 환갑을 넘긴 윌리 로먼은 세일즈맨으로 30년이 넘게 일했다. 지금도 일하고 있지만, 여전히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있다. 나이 들어 운전하기 어려운 지경인데도 매일 무엇인가를 팔고자 차를 타고 집을 나선다. 한때 잘나가던 세일즈맨이었지만 그의 현재는 초라하다. 성공하지 못한 자신의 인생을 보상받기라도 할 생각으로 집착했던 두 아들은 백수건달이나 다름없다. 특히 그토록 사랑했던 첫째 아들 ‘비프’와는 어디서부터 꼬였는지 만나기만 하면 싸움뿐이다. 윌리는 이런 초라한 현실을 잊고자 자꾸만 찬란했던 과거에 집착한다. 과연 윌리 로먼과 그의 가족에겐 그가 꿈꾸듯 더 나은 미래, 희망이 있을까?

<세일즈맨의 죽음 Death of a Salesman>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작품은 비극이다. 그런데 그 비극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대단히 탁월하다. 윌리의 환상을 통해 나타나는 찬란했던 과거와 남루한 현재의 적절한 대비, 이웃이자 친구인 찰리와 그의 아들 버나드의 성공한 삶과 대비되는 윌리 로먼 가족의 초라한 현실, 아들 비프와 아버지 윌리의 갈등과 그 갈등의 원인인 된 비밀 등이 차례로 드러나면서 극은 탄탄하게 전개된다. 그다지 길지 않은 분량의, 한정된 공간 안에서 펼쳐지는 희곡임에도 그 안에서 전달하는 주제와 인생에 대한 통찰력은 묵직하다.

‘저는 이 회사에서 삼십사 년을 봉직했는데 지금은 보험금조차 낼 수 없는 형편입니다! 오렌지 속만 까먹고 껍데기는 내다 버리실 참입니까. 사람은 과일 나부랭이가 아니지 않습니까!’ 와 같은 윌리의 대사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의 참혹한 현실에 대한 비판도 엿보인다. 대공황 이후 ‘먹고 사는 일’에서 벼랑 끝에 내몰린 한 가정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세일즈맨의 죽음>은 지금 이 땅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매일 일해도 가난함을 벗어날 수 없는 워킹푸어들이 넘쳐나고, 그렇게 회사에서 일해도 나이 들면 언제 폐기처분될지 모르는, 그래서 미래는 더 암담하기만 한 직장인들의 삶…. 그 불안과 공포를 잠시라도 잊고자 ‘지르고’ 또 ‘질러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카드 값과 카드 할부가 끝날 때쯤이면 고장 나기 일쑤인 전자제품에 둘러싸인 그런 삶. 그 삶이 60년 전 작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린다 : 여보 인생은 버리며 사는 거예요. 항상 그런 거지요. (14쪽)

비프 : 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칠 년이나 뭔가를 해보려고 애썼거든. 물품 배송부 직원, 세일즈맨, 이런 저런 일들. 그냥 하찮은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었지. 뜨거운 여름날 아침에 전철을 타고, 재고를 챙기고, 전화를 하고, 아니면 사고팔고 하는 것에 너의 온 인생을 바친다고 생각해 봐. 진짜 바라는 것은 셔츠를 벗어 던지고 야외에서 일하는 건데 고작 두 주짜리 휴가를 위해 일년 중 오십 주를 죽어라 고생하는 거지. 그리고 언제나 네 옆의 녀석보다 한발 앞서야해. 그러나 여전히, 그게 네가 말하는 미래가 있다는 거지. (22~23쪽)

비프 : 모르겠어요. 좀 둘러보며 뭘 할지 봐야겠어요.
린다 : 비프, 평생을 둘러보며 살 수는 없지 않겠니?
비프 : 뭘 지그시 붙들고 있지를 못하겠어요. 어머니, 뭐든 죽 붙들고 있을 수가 없다고요.
린다 : 비프, 사람은 철새처럼 봄이 되면 왔다가 가을 되면 날아가는 게 아니란다. (62쪽)

윌 리 : 헤이스팅스 냉장고라니, 들어나 봤어? 내 인생에 한 번이라도 좋으니 고장 나기 전에 내 것으로 가져 봤으면 좋겠네! 만날 고물만 내 차지야! 막 자동차 할부가 끝나니 폐차 직전이지. 냉장고는 미친 듯이 벨트나 닳아 없애고 있어. 그런 물건들은 유효 기간을 정해 놓고 나오나 봐. 할부가 마침내 끝나면 물건도 생명이 끝나도록 말이야. (85~86쪽)

윌리 : 저는 이 회사에서 삼십사 년을 봉직했는데 지금은 보험금조차 낼 수 없는 형편입니다! 오렌지 속만 까먹고 껍데기는 내다 버리실 참입니까. 사람은 과일 나부랭이가 아니지 않습니까! (97쪽)

윌리 : 우습지 않아? 고속도로 여행, 기차 여행, 수많은 약속, 오랜 세월, 그런 것들 다 거쳐서 결국엔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더 가치 있는 인생이 되었으니 말이야. (117쪽)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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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즈 엔드 열린책들 세계문학 98
E. M. 포스터 지음,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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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의 작품을 읽는 일은 즐겁다. 책 읽기를 좋아해서 책 읽는 행위 자체가 즐겁기는 하지만, 유난히 그 즐거움이 더 큰 작품이 있다. E.M. 포스터가 그렇다. 그의 작품을 읽고 있노라면 고고하고 우아한 숲을 거닐고 있는 기분이 든다. 고고하고 우아한 숲이라는 게 존재할지 모르겠지만 그런 느낌이다. 아주 잘 짜인 지적인 소설을 읽는 기분도 든다. 실제로 그의 작품은 매우 지적이고 낭만적이면서도 아름답다. 그러나 우아하고, 도도하고, 아름답다고 해서 그 아름다움이 ‘허영’이나 괜한 의미 없는 멋부림과는 거리가 멀다. 진실한 아름다움이 담긴 작품, 포스터의 작품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이렇지 않을까.  

그가 자신의 최고 작품으로 꼽았다는 <하워즈 엔드>를 읽는 동안 문장 하나하나에 감탄하고, 이야기 짜임에 감탄했다. 이 사람이 나중에 이런 역할을 하고, 저 사람이 이런 영향을 줄 줄이야! 이 사람의 인생이 이렇게 흐를 줄이야!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탄성을 자아냈다. 어떻게 보면 꽤 복잡한 이야기인데 이토록 군더더기 없이 매끄럽게 흐를 수 있다니. 작가에 대한 존경심이 절로 들었다.

게다가 그런 이야기 속에 담긴 주제의식 또한 가볍지 않다. 인물들이 툭툭 내던지는 대사나 대화에서 삶의 가치에 대해 이런 저런 고민을 해보게 된다. 포스터의 작품은 한 편의 잘 만들어진 고전 드라마를 보는 듯한데, 그저 한 편의 재미있는 드라마로 끝나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 의식의 깨달음을 얻게 되는 ‘사회성’까지도 겸비했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나는 포스터의 작품을 사랑하고 포스터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

<전망 좋은 방>에서도 포스터는 고루한 인습이나 전통과 싸우는 자유로운 개성을 가진 인물(애머슨 부자)을 내세워 그런 악습에 갇혀 사는 사람들을 인식을 일깨우는 데 힘을 썼다. <모리스>에 나오는 ‘모리스’ 역시 그런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전혀 상반되는 기질을 가진 사람들을 내세워 그들의 대화를 통해 인생에서 소중한 것이 과연 전통과 인습을 지켜나가고, 그러느라 인간의 영혼과 삶이 자유롭게 날지 못하고 감금당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인가 질문을 던져 왔던 포스터. 그리고 그의 이런 질문은 <하워즈 엔드>에서도 계속 된다.

독일인과 영국인의 피가 흐르는 헬렌과 마거릿 자매는 말 그대로 ‘교양인’이다. 지적이고 똑똑하며 음악과 문학, 예술 등 ‘정신적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다. 게다가 이상주의자이며, 페미니스트적 기질도 농후하다. 마거릿의 동생인 헬렌이 좀 더 이상주의자며, 마거릿에 비하면 더 격한(?) 페미니스트다. 그런데 이 두 자매는 여행을 갔다가 우연히 그들의 세계와는 정반대에 속한 삶을 살고 있는 윌콕스 부부를 만나게 된다.

헨리 윌콕스는 전형적인 사업가의 모습을 지닌 남자로 여자는 남자의 등 뒤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는 식의 보수적인 세계관에 부자와 빈자의 차이, 계급 차이는 사회가 유지 되려면 ‘있을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결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의 부인인 루스 윌콕스 역시 그런 남편의 등 뒤에서 ‘가정’을 지키며 사는 삶이 여자의 삶이라고 믿는다. 이렇게 한 눈에 보기에도 전혀 다른 성질을 지닌 사람들이 여행에서 우연히 만나고, 그 인연으로 헬렌과 마거릿은 윌콕스네 집 <하워즈 엔드>로 초대를 받게 된다. 소설은 <하워즈 엔드>를 둘러싸고 헬렌, 마거릿 슐레겔 자매와 윌콕스 가의 삶이 어떻게 우여곡절을 겪으며 변화하는지 보여준다.

이상적이고 정신적인 세계에 사는 ‘슐레겔’ 가문과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세계로 상징되는 ‘윌콕스가’ 이 두 가문의 대비 속에 또 다른 흥미로운 인물이 존재한다. ‘레너드’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레너드는 음악회장에서 헬렌과 마거릿 자매와 우연히 만난다. 헬렌이 레너드의 우산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 하고 가져가는 바람에 인연을 맺게 된 것. 헬렌은 실수로 음악회장에서 남의 우산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고 가져가는 일이 많은 사람이지만 레너드는 그 우산 하나에(우산 가격에) 전전긍긍할 정도로 극빈층 계급에 속한다. 가난하지만 책이나 음악과 같은 문화적인 것과 늘 가까이 하고자 하고, 그런 것에 목말라 했던 그가 큰마음을 먹고 음악회에 갔고 거기서 ‘문화적인 소양을 잘 갖춘 여유로운 중산층 계급’의 헬렌, 마거릿 자매를 만나게 된 것이다.

이런 인연으로 그 두 자매와 우정을 쌓게 된 레너드는 그녀들의 집을 방문할 때마다 문화적으로 충족되는 기분이 들지만 한편으로는 도저히 자기가 감히 건널 수 없는 벽, 차이가 있음을 실감하고 좌절하기도 한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 속에서 책과 음악을 소비하며 교양인이 되고자 노력하는 것은 여유로운 중산층 계급이 어릴 때부터 항상 문화적 환경에 둘러싸여 자라나며 쌓아 온 그것과는 엄연한 차이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축적해온 교양과 문화에 대한 폭넓은 이해력을 레너드가 따라가기엔 한계가 있었고 그는 그것을 뼈저리게 절감한다.

<하워즈 엔드>는 이렇게 최상류층은 아닌 중산층 계급 중에서도 좀 더 부자인 윌콕스가, 넉넉한 재산이지만 윌콕스 가문보다는 경제적으로 수준은 낮은, 그러나 문화적 소양은 넘치는 슐레겔 자매, 마지막으로 경제적으로 최하 수준에 머물고 있지만 문화적으로는 어쩌면 윌콕스가 보다는 소양이 있는 레너드를 등장시켜 이 세 계급(중산층 내에서도 상, 중, 하를 이루는)이 어떻게 얽히고설켜 그들의 삶이 변화하는지 보여준다. 그 안에서 계급차이, 남녀문제, 경제적 상황이 개인의 인성에 미치는 영향 등을 날카롭게 포착한다.

줄거리가 상당히 의외의 방향으로 흐르기에 세세히 설명은 못하지만(결정적 스포일러가 될 위험이 다분히 있다), 앞서 언급했듯 한 편의 드라마를 보듯 상당히 재미있다. 게다가 포스터는 각 계급에 대해 어떤 계급의 삶이 더 낫고 옳은지 섣불리 개입하여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실제로 그들은 서로의 삶에 매혹되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들과는 정반대되는 삶에 격렬하게 거부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책을 덮을 즈음에는 어떻게 사는 삶이 좀 더 인간답게 사는 삶인지 판단을 내릴 수는 있을 것이다.

“모두가 애정에 달린 문제에요. 애정요. 모르겠어요? 아시겠죠. 저는 헬렌을 아주 좋아해요. 하지만 당신은 별로 그렇지 않죠. 맨스브리지 씨는 아예 헬렌을 모르고요. 그게 다예요. 애정은 서로 주고받을 때 권리가 생기는 법이에요. 맨스브리지 씨. 수첩에 적어 두세요. 유용한 말이니까요.” (3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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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외투.광인일기.감찰관 펭귄클래식 64
니콜라이 고골 지음, 이기주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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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펭귄클래식코리아의 니콜라이 고골 작품집 <코, 외투, 광인일기, 감찰관>을 읽었다. 세 편의 단편과 희곡 한편(감찰관)이 담겨 있는데 그 중 단편 <외투>가 계속 기억에 남는다. <외투>는 읽을 때도 좀 짠-했는데, 읽고 나서도 생각할수록 슬프다. 현진건의 <빈처>나 <운수 좋은 날>이 떠오르기도 한다. 가난하고 척박한 환경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소시민의 가련한 삶이랄까, 그런 느낌.


<외투>의 주인공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정서업무를 담당한 9등관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말단 공무원이라고 해야 할까? 그는 자신의 일을 너무나도 사랑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몇몇 자모를 쓰는 순간이면 거의 몰아지경에 빠져버릴’ 정도로 글씨 쓰는 일을 좋아하는 전형적 소시민이다.


정서업무 외에는 별다른 일이 없는 그에게 어느 날 큰 사건이 일어난다. 몇 년을 입어 닳고 닳아버린 외투가 그만 찢어지고 만 것. 아카키예비치는 이 낡은 외투를 살리고자 안간힘을 쓴다. 혹한은 다가오고 새 외투를 살 돈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투가 너무 낡아 수리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단다. 청천벽력이다! 어쩔 수 없이 새 외투를 맞추는데 필요한 돈을 계산하고 그는 이 거대한 프로젝트에 몰입하기 시작한다.

거의 먹지도 쓰지도 않고 돈을 모으기 시작한다. 일찍이 ‘목표’ 따위는 없던 인생이었던 아카키예비치에게 새 외투 장만이라는 뚜렷한 목표가 생겼고, 그는 이 프로젝트를 실행하면서 일종의 희열감까지 맛본다. 드디어 고대하던 그날이 왔다. 한눈에 보기에도 멋진 새 외투가 자신의 것이 되었다! 그는 이 외투를 입고 행복해서 어쩔 줄 모른다. 낡은 외투로 늘 놀림을 받던 그는 관청 동료들에게 부러움과 함께 주목을 받게 된다. 새 외투와 관련해 사람들이 한마디씩 던지고 웃고 그에게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기까지 한다. 동료들은 축하 파티를 해야 한다며 그를 저녁 식사에 초대하기까지 한다. 존재감이 미미했던 그에게 새 외투로 인해 전혀 다른 삶이 펼쳐진다.

그런데 어쩐지 <외투>를 읽고 있노라면 불안 불안한 기분이 든다. 아카키가 새 외투를 입고 그저 행복하게 살아갈 것만 같지 않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동료들과 저녁 식사를 멋지게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새 외투를 강도들에게 빼앗기고 만다. 아뿔싸! 이렇게 외투를 빼앗긴 채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외투 찾는 일에 골몰하던 그는 불행하게도 절망감에 빠져 숨을 거두고 만다.

그까짓 외투 때문에 죽어?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아카키예비치의 외투에 대한 집념과 그 물건에 대한 숭배(사랑)의 감정이 절절하게 묘사되어 있다. 때문에 그가 외투를 잃고 절망감에 빠지는 모습이 꽤 설득력 있다. 그리고 이런 일련의 과정이 무척 애잔하다. 그토록 노력해 장만한 외투를 입고 동료들의 관심을 받으며(인정과 애정의 욕구를 충족하며) 외로움을 달랜다. 전에 없던 자신감까지 생긴다. 사람들과 어울리며 삶에 대한 색다른 느낌도 받는다. 그런데 그 외투를 빼앗기고 말았으니 그토록 허망할 수가. 다시금 그 외로움과 무의미한 날들로 돌아가야 하는가!

아무것도 아니었던 그가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면서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타인과 있어도 관심 받지 못하면 한없이 외로운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쓸쓸한 기분이 든다. 게다가 이 옛날 작품을 읽고 있노라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과 묘하게 겹친다. 고작 글씨 쓰는 일에 그렇게도 열광하는(그것이 유일하게 자신의 존재 이유를 확인할 수 있는 길이며, 인정받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9등 사무관- 꼭 갖고 싶은 외투가 생겼고, 그 외투를 갖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간다. 어쩐지 일을 해서 월급을 타면 ‘무엇 무엇을 질러야지’하고 마음 먹는 현대 직장인의 삶과 닮지 않았는가. 멋진 물건을 소유하고 그로 인해 사람들에게 인정받는(혹은 인정받는다고 착각하는) 모습까지도 닮았다.

‘외투’라는 단순한 소재를 통해 니콜라이 고골은 인간의 외로움과 욕망(소유의 욕망, 인정받고 싶은 욕망, 사랑받고 싶은 욕망)을 세밀하게 표현하고 있다. 소설 작법은 다소 거칠게 느껴지기도 하지만(중간에 뜬금없이 작가가 화자로 나타난다거나, 갑자기 환상적인 요소가 개입된다든가 등등) 왜 도스토예프스키가 "모든 러시아 문학은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고 평했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특히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는 고골의 <광인일기>에서, <분신>은 <코>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두 작품을 비교해서 읽어봐도 재미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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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 하프 트루먼 커포티 선집 2
트루먼 커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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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먼 카포티의 <다른 목소리 다른 방>과 <풀잎 하프>는 내가 좋아하는 장르인 ‘성장 소설’에 속한다. 그러나 두 작품의 느낌은 사뭇 다르다. 전자는 조금은 그로테스크하고 상징적이고 은유적이다.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난해한 느낌도 든다. 그에 비해 후자인 <풀잎 하프>는 쉽고 단순하다. 그러나 무척이나 따뜻하고 다정다감하며 감동적이다.


<차가운 벽>에 실린 카포티의 단편 중 몇몇 작품이 굉장히 따뜻하고 아름답고 감동적이었는데 그런 단편의 조금 긴 버전이라고 보면 좋을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카포티에게는 없어서는 안되었을 그 존재, 사촌 ‘숙 포크’ 양에 관한 이야기가 <풀잎 하프>의 주된 내용이기 때문이다. 카포티는 네 살 때 부모의 이혼으로 앨라배마 주 먼로빌의 친척집에 맡겨 졌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순 살의 다정한 친척 ‘숙’을 만난다. <풀잎 하프>는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를 그린다.

 
고아인 ‘콜린’은 나이든 여자 사촌들과 함께 산다. ‘돌리’와 ‘베레나’가 그들이다. 이 집에는 콜린의 사촌들과 마찬가지로 나이든 흑인 여자 하녀 ‘캐서린’이 함께 산다. 우연히 어떤 사건 때문에 자매지간인 ‘돌리’와 ‘베레나’는 사이가 틀어지고 돌리는 콜린, 캐서린과 함께 집을 나가 숲 속의 나무 오두막으로 떠난다. 어찌하다 보니 그곳에 은퇴한 판사 찰리와 소년 가장 라일리까지 합세하게 된다.


고아, 노처녀 자매, 흑인 하녀, 은퇴한 판사, 소년 가장 등 사회에서 소외 받은 사람들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이 숲 속 오두막에서 생활하는 모습은 때로는 우스꽝스럽고 때로는 감동적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는 따스하다. 세상에서 결코 주류가 될 수 없는, 어떤 면에서는 ‘비정상’이라고 분류될 수도 있는 이들이 작은 공동체를 만들고 그 안에서 서로를 위로하고 위로 받으며 사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마음 한구석이 훈훈해 진다.

카포티의 사촌 ‘숙’을 모델 삼아 창조한 캐릭터가 분명한 ‘돌리’를 보자면 ‘콜린’ 즉 카포티에게 어린 시절에 이런 사람이 있었기에 그가 이런 따스한 소설을 쓸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 진다. 그러면서 어쩌면 아무것도 아닐 타인에게 이런 무조건적인 진실한 애정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위대한지 생각해 보게 되기도 한다.

그 사람이 잘났든 못났든, 한 사람에게 순수하고 깊은 애정을 주고 그런 사랑과 보살핌을 받은 한 인간이 그 애정으로 이 세상에서 버텨 가고 살아갈 수 있는 동기를 얻었다면, 한 인간으로 온전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면, 그런 무한한 사랑을 선사한 그 사람은 그 어떤 사람보다도 인생을 잘 살다 갔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마치 <풀잎 하프> 속의 ‘돌리’처럼 말이다.

오랜만에 아주 따스하고 뭉클한 소설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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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의 회전 - 헨리 제임스 장편소설 열린책들 세계문학 192
헨리 제임스 지음, 이승은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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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은 굉장히 모호하다. 그런데 그 모호함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싶다. 집에 아무도 없을 때 혼자 이 작품을 읽었는데 등골이 좀 오싹하기도 하고 생각보다 무섭기도 했다. 선뜻선뜻 누군가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창문 밖에 누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악을 쓰고 피가 철철 흐르는 공포물보다 이렇게 심리적으로 사람을 압박하는 공포물이 사람을 좀 더 숨 막히게 하는 것 같다.

이야기는 한 저택에서 시작된다. 크리스마스 전날 밤 난롯가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 알고 있는 가장 무서운 이야기를 꺼낸다. 그 중 ‘더글러스’는 자신의 이야기가 가장 무섭다며 ‘그 누구의 이야기도 이 이야기를 능가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가 직접 경험한 일은 아니며 그 이야기의 ‘원고’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이 무서운 이야기를 기록한 여자는 20년 전에 죽었고 죽기 전에 더글러스에게 문제의 원고를 보냈다고 한다. 죽은 여자는 더글러스 누이의 가정교사였다. 사람들은 모두 그 ‘원고’에 흥미를 느끼고 본격적인 이야기는 여자의 기록을 토대로 시작된다.

화자인 ‘나’- 즉 여자는 스무 살의 나이에 인적이 드문 시골 대저택에 가정교사로 부임한다. 그녀를 고용한 대저택의 주인은 매력적인 젊은 남자로 여자는 어쩐지 이 남자에게 처음부터 반한 것으로 보인다(이점도 모호하기는 하다). 그런데 이 남자는 저택에 머물지 않고 따로 떨어져 지내는데, 가정교사로 부임하는 그녀에게 ‘자신을 절대로 귀찮게 하지 말라는’ 한 가지 조건을 내건다. 결코 호소하거나 불평하지도 말고 그 어떤 일에 대해서도 편지를 써서는 안 되며 모든 문제를 그녀 스스로 알아서 해결하라고 지시한다.

꽤 괜찮은 보수에 한가로운 대저택에서 별다른 간섭 없이 가정교사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녀는 무척 만족한다. 게다가 그녀가 돌볼 아이들을 직접 만나보니 더더욱 기쁘지 않을 수 없다. ‘플로라’와 ‘마일스’ 두 남매는 귀엽고 상냥하며 똘똘한데다가 말도 어찌나 잘 듣는지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가정부인 그로즈 부인 또한 여자에게 호의적이다. 아이들의 매력에 푹 빠져 즐거운 나날을 보내던 여자 앞에 어느 날부터 이상한 기운이 감지된다. 산책을 하던 그녀 시야에 낯선 사람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뭘 잘 못 본 것일까? 누군가 여행객이 길을 잘못 들어 저택에 들어왔다가 다시 나간 것일까? 그런데 이 남자의 모습은 그 뒤로도 불시에 나타난다. 대체 이 사람의 정체는 무엇일까?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가 있으니 이 책을 읽을 분들은 패스 바람.

헨리 제임스 <나사의 회전>은 여자가 정말로 유령을 봤는지, 아니면 유령을 봤다고 주장하는 그녀의 모든 이야기가 거짓(여자가 신경쇠약이나 혹은 정신병을 앓고 있을 가능성)인지에 따라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는 작품이다. 만약 여자가 주장하듯이 그녀가 정말로 유령을 봤고 그 유령이 가정부의 증언대로 이 저택에서 그녀보다 먼저 가정교사 생활을 했던 여자 ‘제셀’과 하인 ‘퀸트’라면 그들은 왜 계속 유령으로 머물면서 ‘플로라’와 ‘마일스’에게 여자의 생각처럼 나쁜 영향을 끼치려고 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 ‘악’의 기운이란 대체 무엇일까?

가정부의 증언에 따르면 제셀과 퀸트는 부적절한 관계였다. 게다가 퀸트는 하인이면서 ‘감히!’ 도련님인 마일스와 가깝게 지내며 마일스에게 이러저러한 ‘나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그 나쁜 영향이란 도무지 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그들이 유령이라면 플로라와 마일스 두 아이들은 대체 어떻게, 왜, 유령의 존재를 알고 있고 그들과 친하게 지내면서도 그들의 존재를 ‘모르는 척’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일까?

여자가 본 것이 ‘유령’이라고 가정한다면, 여자가 생각하기에 ‘유령’ = ‘악’과 같으므로 악으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이해할 만도 하다. 게다가 저택의 주인도 없는 마당에 자신이 이 아이들의 보호자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러나 여자는 유령을 두려워한다기보다 유령들에게 아이들을 빼앗길 것 같아 두려워하는 것으로 보인다. 플로라가 자기 보다는 제셀과 더 친한 것 같고, 마일스가 자신보다는 남자인 퀸트에게 더 의지하고 기대는 것 같아 견딜 수 없어 한다. 즉 자신이 두 아이들을 지배(장악)하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으로 보인다.

퀸트와 제셀의 부적절했던 관계에 대해 들은 이후로 그녀의 히스테리적 증세는 좀 더 심해진다. 여자의 생각에 그들은 성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람들이고 그런 그들이 순진무구한 아이들을 오염시키는 것은 참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작품을 읽다 보면 퀸트와 제셀이 부적절했던 관계였던 것처럼 플로라와 마일스도 어쩌면 부적절한 관계(근친상간)가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든다. 여자는 아이들을 ‘순수한’ 상태 그대로 지켜주고 싶지만 사실 알고 보면 이미 그 아이들은 그저 순진무구한 아이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생긴다.

여자의 눈에는 한없이 착하고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인 마일스는 알고 보니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다. 무슨 일 때문에 학교에서 쫓겨났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또한 시간이 흐를수록 여자의 머리꼭대기에서 그녀를 갖고 노는 영악함을 보이기도 한다. 여자의 생각처럼 순진하고 해맑기 만한 소년은 아닌 것이다. 게다가 마일스는 말끝마다 ‘사랑하는 선생님~’하며 다정하게 여자를 부르는데 어쩌면 마일스와 여자 사이에서도 알게 모르게 성적인 긴장감이 있던 건 아닐까 추측해보기도 한다.

여자가 본 것이 유령이 아니라면, 즉 그 모든 것은 환상일 뿐이라면- 여자는 대체 왜 그렇게 히스테리를 부리게 된 것일까? 처음부터 끌렸던 저택의 주인에게 편지 쓸 구실이 필요했던 것일까(여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편지를 써서는 안 된다는 남자의 말을 어기고 결국 이런 일들을 계기로 편지를 쓰게 된다)? 아니면 ‘유령’이라는 존재를 빌어 아이들은 물론 그로즈 부인 등 이 저택의 모든 것을 통제하는 힘을 자신이 갖고 싶었던 걸까? 작품 속에서 마일스와 플로라는 유령의 존재를 알고 있다고 여자는 말하지만, 아이들은 유령의 존재를 부정한다. 오히려 유령을 봤다고 말하라고 다그치는 그녀에게 심하게 배신감을 느끼거나  깊은 상처를 입는다. 여자는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을 아이들에게 강요함으로써 스스로 모든 것을 통제하는 가장 강력한 권력자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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