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숨 가쁜 사랑
폴 세르주 카콩 지음,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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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가쁘게 읽어갈 생각이었다. 그러질 못했다. 가다가 쉬고 가다고 또 쉬고 숨을 골라야했다. 은유적 문장과 압축된 행간의 말도 곱씹어 소화해야 했고 이들의 생을 관통하며 탄생한 위대한 작품들(수많은 소설과 영화)이 나올 때마다 잠시 숨을 쉬어야했다. 두 사람의 일생을 교차하며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하나'의 삶에 때론 한숨을 때론 격정을 느끼며 쉬어가야 했다.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사랑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사랑 그 이상의 격랑으로 나를 휘감는 느낌이었다.

 

내가 만난 로맹 가리는 9년 전에 만났던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는다'와 에밀 아자르 라는 필명으로 문단에 종주먹을 날린 '자기 앞의 생'이 모두였다.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숨 가쁜 사랑>은 그들 두 사람을 좋아하는(적어도 이름을 들어본) 사람들에게 로맹 가리의 다른 작품들과 진 세버그의 옛 영화들을 찾아볼 동기부여가 되겠다. 내게도 그러하다. 누벨바그의 아이콘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의 히로인, 숏커트가 아주 잘 어울리는 발랄하고 영민한 얼굴을 한 그녀는 한 마디로 가련한 여자였다. 어쩌면 그녀 생 절정의 봄날이었던 '네 멋대로 해라'의 시절을 지나고부터 - 열심히 하는 사람도 운이 있는 사람을 못 당한다고 하더니 - 그녀는 운이 조금 부족한 경우가 아니었나싶다. 운명이다. 피할 길 없는, 슬프고도 강렬한. 그녀의 해맑은 웃음 뒤로 사뭇 먹구름이 보였던 이유를 이 책을 읽으며 알 수 있다. 내면을 흔드는 굽이치는 열정의 파도를 어떻게 다스리며 살아야 한단 말인가. 화려한 이력과 염문도 만만지않은, 자신만만하고 세심하고 교양이 풍부한 대작가와 다소 불운했지만 시대를 풍미한 아름다운 여배우가 도저한 강을 거슬러 올라가려는 열정이 이러한대.

 

두 사람의 사진을 아래위로 배치한 흑백 앞쪽 표지에 샛노란 뒤쪽 표지가 상큼한 이 책은 사실을 기반으로 한 소설, 일종의 전기소설로 읽힌다. 저자 폴 세르주 카콩의 플롯이나 문체, 주관적 느낌을 서술한 문장에 이르기까지, 한 권의 숨 가쁜 소설같다. 하기야 어느 누구의 삶이든 사랑이든 소설 같지 않을까. 이들의 삶과 사랑을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첫눈에 반해 8년의 결혼 생활과 이혼, 그후 12년 간 지속된 끊길듯 끊이지 않은 인연의 세월은 한 권의 소설 그 이상의 숙명으로 느껴졌다. 유일한 아들이 세심하게 많은 일을 해내는 아버지 가리를 회상하는 짧은 말과 진이 아들에게 유언으로 남긴 말은 혈육이 갖는 보편적 감정 이상으로 진하게 전해온다.

 

진이 1979년 9월 타국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경제적으로나 심정적으로나 지원과 배려의 끈을 놓지 않은 로맹 가리는 단순히 입에 권총을 물고 생을 마감한 작가로 알기엔 출생의 슬픔과 생의 수많은 이력이 예사롭지 않다. 유대인이라는 명찰을 죽을 때까지 달고 자유프랑스군에 헌신한 공로로 받았던 훈장과 외교관으로서 이룬 업적까지 자살로 인해 제 이름값을 얻지 못한, 편견과 굴욕의 세월을 다 견디고 오로지 작품 속에서 '가면의 생'을 살며 문단을 조롱한 사람. 진지함과 숭고함, 도덕적 의무에 충실하면서도 다섯 개의 필명을 가지고 노골적으로 적대적인 문단을 쥐락펴락하고 존재의 가벼움과 농담을 즐겼던 가리는 진과 마찬가지로, 아니 우리 누구나와 마찬가지로, 여러 개의 가면을 쓰고 아직 '자신을 다 표현하지 않았다는 특별한 감정(p137)'을 느낀다. '진 또한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내기 위해 가면들을 선택했고 바로 그래서 그녀 역시 연기를 결코 끝내지 못했다. (p138)'

 

가리는 진과 부인 레슬리 사이에서 번민하면서도 열정적으로 글쓰기에 매달려 영어로 쓴 <레이디 L>의 프랑스어 번역을 감수하는데, 드골은 가리의 모든 책 중 이 책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다. 1959년에 썼고 1963년에 프랑스어로 출간된 이 책은 레슬리에게 헌정한 것이라는데 고독하게 단독자로 살고 싶었던 가리의 탁월한 경구들을 내놓는 기회가 되었다. 가령,

 

 

시간은 그대를 늙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가면을 받아들이게 만든다. (p120)

 

 

 

진의 죽음 후 일 년, 가리의 권총자살은 진과의 사랑 때문이 아니었을 수도 있고 그럴 수도 있다. 진의 사망도 약물중독일 수도 있고 FBI의 음모일 수도 있다. 인생은 어느 랍비가 말했듯, 고요한 강물이랄 수도 있고 요동치는 강물이랄 수도 있으니.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이 책에서 눈여겨 보게 되는 건, 이들 두 사람이 살아온 시대의 강물, 24년의 차이가 나는 세대의 문제와 그 세대의 험난한 구비구비와 파란만장이다.

 

이건 분명 세대 문제였다. 가리의 세대, 그가 존경하는 말로(Malraux)세대의 사람들은 교양을 통해 자기 조건을

승격시켰다. 진이 세대에게 구원은 어쩌면 대마초와 기타, 까다로운 염격함으로 가장된 절망, 술 그리고 체 게바라가 준엄한 눈길로 내려다보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그 옆 포스터에서 혀를 내밀고 있는 어지러운 방 안에서 싸움이

아니라 정사를 나눌 때 동반되는 저항 가요 속에 있었다. 그것은 세대 문제이자 모순의 문제였다.  (p138)

 

 

진이 보기에 여자의 욕구는 알지만 욕망은 모르는 남자, 가리가 보기에 철이 없게도 행동에 망설임이 없고 감정에 순수한 여자. 잦은 이별과 낙담 속에서도 배신하지 않고 20년을 함께한 이들의 사랑을 어떤 잣대로 어떤 키워드로 말할 수 있을까. '행복의 그림자 뒤를 좇는 여자와 행복을 느끼지만 행복을 잡을 줄 모르는 남자'의 사랑이란 대체 무어라 말할 수 있었을까.

 

가리가 자유프랑스군으로 참전한 2차 세계대전, 프랑스의 68년 5월 혁명, 미국의 히피 문화와 흑인 인권운동의 정신과는 반대로 진이 태생적으로 갇혀온 청교도적인 가정분위기로 인해 받은 몰이해와 상처가 안타깝다. 블랙팬서와 블랙모슬렘의 암투를 비롯해 많은 부분 조장된 세상의 선입견과 오해와 비난을 견디고 소수자들의 인권에 관심을 갖고 행동력을 보여주려 했던 그녀는 좀더 악랄하고 노회한 집단에 의해 희생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은 그들의 첫 만남에서 시작하여 그들의 죽음으로 맺는다. 첫 대목부터, 가리보다도 11살 연상이었던 레슬리의 눈으로 보이는 스물 한 살의 진 세버그는 어쩐지 운명을 예고하듯 애련하다. 가리의 사랑 그 이상의 애정과 보살핌이 표현되는 부분은 가슴 뭉근하다. 어쩌면 진의 사랑의 정체성은 굶주린 부성애에서 오지 않았을까, 느껴지는 대목들도 안타깝다.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생을 씨실날실로 한 이 책은 사실 단숨에 읽어내려갈 수 있다. 분량이나 편집, 스토리 전개가 시원시원하면서 은유적인 표현과 행간에 의미를 함축한 아름다운 문장으로 일관한다. 이 자체로 그들의 소설같은 사랑에 버금가는 소설 같은 책이다. 책을 읽다가 궁금하거나 인상 깊어서 더 찾아보게 되는 부분이 많은데 그 중 '가리는 돈키호테였다. 그는 기사도 시대의 인간이었다(p136)'라고 표현한 문장에 이어 세르반테스에 대한 (당연하지만)긍정적 문장이 인상 깊다. 그외에도 잠시 나오지만 더 찾아볼 만한, 로맹 가리가 진과 함께 추도한 앙드레 말로, 가리의 친구 알베르 까뮈, 그리고 진이 한때 사랑에 빠진 클린트 이스트우드에 대한 에피소드도 처음 본다. 진이 쟁쟁한 경쟁률을 뚫고 발탁된 첫 영화 '잔 다르크'도 예외가 아니다. 감정에 충실하고 투명한 진과는 달리 염문이 퍼진 후 정작 발을 빼며 냉정했던 클린트는 좀 실망이랄까. 이 책으로 로맹 가리는 내가 더욱 좋아하는 작가 대열에 들게 되었다. 가령 그가 불가리아 소피아 주재 대사 비서로 임명되어 근무할 당시의 이야기는 가리가 얼마나 여유있고 능청맞으며 대담하고 자신만만하며 영리한지를 보여준다.

 

자유로운 인간에 대한 그의 신념을 소피아에서 드러내 보인다면 혹평을 받을 터였다. 그와 비슷한 사람들을

보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안 될 일이었다!  그는 행인들의 눈길에서 두려움을 읽지 못한 것처럼, 관청 통로에서

고문과 살인을 짐작하지못한 것처럼 행세하며 2년을 보내야 했다. 불가리아 비밀경찰은 그에게서 통찰력을,

남다른 점을 금세 포착하고 그로부터 대사관 금고 속에 잠들어 있는 좋은 정보를 끌어낼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들은 침대에 여자를 집어넣었고, 깨진 유리창 구멍을 통해 온갖 각도로 사진을 찍었다. 됐다! 이제 그를 마음대로

쥐고 흔들 일만 남았다. 그러나 가리는 그런 일에 넘어갈 사람이 아니었다. 그를 찾아와 사진을 내미는 두 명의

비밀경찰에게 그는 침착하게 말했다.

  "미안합니다. 그날 제가 몸이 좀 안 좋았어요. 기회를 다시 한 번 주세요.

   이 방면에서 프랑스의 명성에 누가 안 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군요."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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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2-07-03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숙제를 마치셨군요!!!
저도 써야 하는데,,,이렇게 잘 쓸 자신없는뎅,,,,제 리뷰 대신 써주면 안 되나요????????ㅎㅎㅎㅎ

그의 사진을 보면 그가 "얼마나 여유있고 능청맞으며 대담하고 자신만만하며 영리한지"를 느낄 수 있어요.
표현하신 대로 딱이에요!!! [솔로몬 왕의 고뇌]도 읽어보세요.
저는 숙제를 한다는 압박감으로 빨리 읽느라 좀 건성으로 읽은 부분이 있다는 걸 고백해요.ㅠㅠ
님이 올린 이 책도 읽어보고 싶네요. 사실 저는 소설보다 이런 책이 더 좋아요(사실을 기반으로 쓴)

참!!저 지금 들어왔어요!!ㅠㅠ
리뷰를 쓰고 잘까 아니면 그냥 잘까 막 고민 중,,,ㅎㅎㅎ

프레이야 2012-07-03 08:28   좋아요 0 | URL
리뷰 안 쓰고 잔 거, 잘 한 거에요. 열두시 전에 쓰고 자기! 우리 약속했잖아요.ㅎㅎ
난 그 책 읽고 싶은데 우리 책 바꿀까요??
가리는 미모도 출중한 것 같아요. 그윽한 눈매하며.. 시가를 물고 있는 모습이랑..
진은 또 어떻구요. 멋진 사람들. 술과 약물에 절어 죽은 그녀가 너무 안 됐어요.
그들이 유명한 작가와 배우가 아니었다면 좀 달랐을까, 그런 하나마나한 생각도 들었어요.
시간은 그대를 늙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가면을 받아들이게 만든다!!!
어제 빠진 거 추가했어요. 너무 멋진 말이잖아요.

라로 2012-07-03 10:04   좋아요 0 | URL
12시 취침!! 우리 약속 실천해야죠!!
그런데 일찍 일어났어요. 리뷰를 써야 한다는 압갑감.ㅠㅠ
그 책 리뷰 써달라고 하면서 출판사에서 보내 준 거거든요.ㅠㅠ
어떻게 저 같은 사람에게 리뷰를 써달라고 책을 보내 줄 수 있어요!!ㅠㅠ
리뷰라고 써 놓고서 미안해 죽겠어요,,,다시는 저에게 부탁하지 않겠죠???ㅎㅎㅎㅎㅎ

책은 바꿔 읽고 싶으나 다 읽으면 다른 분 드리겠다고 약속했어요~~~.ㅎㅎㅎ
다음에 좋은 책 생기면 바꿔 읽읍시당~~~~.^^

전 로맹 가리의 다음 책으로 [가면의 생] 읽기로 했어요.
시간은 그대를 늙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가면을 받아들이게 만든다!!! ^^

라로 2012-07-03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13, 총 299364 방문

곧 300,000명이 방문 하겠는 걸요?????
이벤트 열어요!!!!ㅋㅎㅎㅎㅎㅎ(막 이래,,,ㅎㅎㅎ)

프레이야 2012-07-03 08:26   좋아요 0 | URL
헉~ 방문자 숫자, 난 잘 안봐서 몰랐네요.
열까말까ㅎㅎ 히힛~

라로 2012-07-03 10:05   좋아요 0 | URL
열어/열어/열어/열어/열어~~~~~~.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라로 2012-07-03 10:05   좋아요 0 | URL
제가 잡을 테야욧!!야심차게~~~~~.ㅎㅎㅎㅎ

프레이야 2012-07-03 20:01   좋아요 0 | URL
어이쿠 야심찬 뤼야님 ㅎㅎ
이거이거 열어야한다는 묘한 압박감 ㅋㅋ

nada 2012-07-03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여기서 뤼야님 뵈니까 반갑네요.
뤼야님은 댓글만 읽어도 에너지가 퐝퐝 튀어서, 절로 웃음이 나요.

정말 멋진 리뷰예요!
어쩜 이렇게 차분하고 일목요연하게 책 한 권을 두루 훑으실 수가 있는지.
문단의 가식과 허위에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저항했던 <은교>의 이적요 시인도 생각나고,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를 언젠가 꼭 봐야겠다는 다짐도 새로이 하면서..
멋진 리뷰에 추천하고 갑니당.^^


프레이야 2012-07-03 20:07   좋아요 0 | URL
히히~ 꽃양배추님이 추천해주시니까 더더 좋아요.^^
그렇네요, 이적요, 박범신 모두 생각나네요.
진 세버그가 나온 영화가 무척 많더군요. '네 멋대로 해라'는 그녀가 가장 젊고 발랄한 모습을
담고 있어서 저도 찾아볼 생각이랍니다. 다른 것들에서 스틸 사진을 보니 어찌나 아름다운지.^^
뤼야님은 정말 목소리도 댓글도 퐁퐁~~ 튀어 좋아요.ㅎㅎ

가연 2012-07-03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안읽어봐서..ㅎㅎ 내용을 잘 모르겠지만, 그리고 로맹 가리와 진 셰버그도 기억에 없는 사람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은 좋네요. 책이 궁금해지는데요.

프레이야 2012-07-03 20:09   좋아요 0 | URL
가연님 고맙습니다.^^
가연님은 읽으신다면 좀더 비판적으로 읽으실 것 같아요.
누구의 생이든 쉽게 뭐라 말할 수는 없겠지만 참 뜨겁게 살다간 사람들이 아닌가싶었어요.

블루데이지 2012-07-04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리뷰보고 저도 읽고.싶어서 구입했어요!
저는 어떤 느낌을 받을수있을까 벌써부터 기대되어요!

프레이야 2012-07-04 09:04   좋아요 0 | URL
블루데이지님도 읽어보시면 많은 느낌이 들 것 같아요.
한 사람(아니 두 사람)의 생을 이렇게나마 따라가볼 수 있는 게 좋긴 한데
그들도 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친구 아버지 장례식장에 갔다와서 그런가싶기도 하고요.
사는 동안 잘 살아야겠구나, 그런 생각도 들었답니다.^^

빨간바나나 2012-07-06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생이지만 언니같은, 친구같은 그녀의 아버지 장례식장에 다녀와서 이 책을 읽었어요.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 정말 모르겠어요. 너무 어려워요.
두 사람의 외모는 근사해요.
표지의 진 세버그는 정말, 예쁘다, 아름답다는 표현 부족한 것 같아요.
흑백사진이라 그런가.
그러고보니 제가 흑백사진을 좋아하네요. 특히 아름다운 여인들이 있는^^
아무튼 이 책 표지 마음에 들었어요.
프레이야님의 리뷰를 읽고보니 전 참 대충읽었구나,싶어요.ㅠ.ㅠ
주말이에요. 전 로맹 가리를 더 읽을지 다른 책을 읽을지 고민이에요.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프레이야 2012-07-06 21:59   좋아요 0 | URL
빨간바나나님도 장례식장 다녀오셨군요.
저도 며칠 전 그랬어요. 친구 아버지에요. 아직 일흔 중반의 연세에 십년을 앓고...
삶과 죽음의 간극이 극명하구나, 그런 생각하면서도 오랜만에 만난 친구 보니 반가워
그만 수다 떨다 왔답니다. 저도 제인 오스틴과 로맹 가리 그리고 헤밍웨이, 이렇게 세 사람
작품이 숙제인데 누구부터 만날까, 아님 교차하며 만날까 살짝 고민이에요. 즐거운 고민이랄까요.
님도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아하하하 2012-08-24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처음으로 책이나 영화를 구입하는 것 외에 리뷰를 읽었네요. 너무 감동적입니다. 저도 사서 읽고 그 감동을 느껴보겠습니다. -길론-
 
[나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나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 박범신 논산일기
박범신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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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은교> 열풍을 외면할 수 없다. 부단히 창작해온 작가이지만 때맞춰 이런 에세이도 나왔다.

김광균의 말이 아니어도 가장 자기고백적인 글, 수필이야말로 저물녘처럼 본성에 가장 가까워지고 본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글이 아닌가. 작가라면 결국 수필로 마무리 되어야할 것 같다. 이 책에도 영화 <은교>에서 이적요의 집과 서재의 실제

공간이 되었던 집의 연극이 끝나고 난 뒤의 쓸쓸한 분위기와 배우들에 대한 찬사가 잠시 있어 혼자 막 반가웠다.

10시간 노인 분장을 하고 난 박해일을 보고 작가는 자신을 본 듯 했을까, 이질감을 느꼈을까.

 

박범신의 소설을 좋아하거나 탐독한 독자는 아니었지만 작년에 읽은 <은교>는 상당히 경이로웠고 그 후 에세이

<산다는 것은>을 읽었다. <나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는 '논산일기 2011 겨울'이라는 부제를 달고 따끈하게

갓 구워져 나온 빵처럼 풍미있는 일기다. 정확히 2011년 11월부터 2012년 3월 하루까지 작가가 페이스북에 올린 일기를

모았다는데 그냥 가볍게 읽기에는 그의 실존적 고민과 고백이 비장하고 진중하다. 글을 쓰는 일을 천직으로 하거나

취미로 글을 쓰는 사람에게도 그저 각자 나름의 의미를 즐기며 살아가야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인생 선배로서 꽤

의미심장한 충고가 된다. 밤호숫가 별빛 아래서 막걸리 한 잔 나누며 들으면 더 좋을 듯하다. 

 

작가는 논산에서 살기를 결심하고 그동안 살면서 여러번 남편의 짐을 싸본 아내는 말없이 이불이며 옷가지를 싼다.

논산에서만이 아니라 차로 두 시간 걸리는 서울도 일이 있으면 왔다갔다 하며 서울에서의 일기도 섞여 있다.

작년에 그의 글쓰기 39주년. 39년의 삶을 동행한 아내의 지청구처럼 서울일기면 어떻냐는 말이다.

작가의 아내로 산다는 것은 평생 쉽지 않은 일이겠구나, 박범신의 글을 보면서도 역시 느낀다.

<산다는 것은>에서도 그렇듯 이 책에서도 아내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오는데 시종일관 무뚝뚝하다.

하지만 깊이 모를 뭉근한 사랑과 정이 뚝뚝 묻어나는 게 감춰지지 않는다. 평생의 친구, 동지, 미안하고 고마운 대상.

 

평생 글을 써왔고 앞으로도 글을 쓰는 일을  천명으로 알고 살아갈 작가가 굳이 논산일기라고 쓴 이유가 그의 고향

논산이 그저 훈련소나 연상시키는 문화의 사각지대 같이 거친 느낌만을 주는 게 싫어서였다는 이유도 재미있다.

이건 반은 농담일테고 실제로 그는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고 고백한다. 그곳에서 안빈낙도, 무위자연을 말하고

싶은 게 아니고 그것은 하나의 '그리움'일 뿐 사실 그의 스타일이 아니라고 솔직히 말한다.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위태로운 새로운 시간과 공간  속으로 '출발'해 간 것이라고, 

'새로운 시간을 향한 장엄한 반역과 그 너머에 있을 미지의 또 다른 감미를 구하고자 하는' 자신의 꿈은 옹골차다고

자신만만하게 고백한다. 역시 청년작가답다.

 

곁들여놓은 사진풍경도 맑고 깨끗하다. 작가의 고향 자랑도 들을 만하다. 예향 논산, 학문적으로 뛰어나고 서인들의 본거지,

아름다운 풍광, 조정리 탑정호가 그리 멋진 곳인지 몰랐다. 그는 고향의 역사에 서린 잊혀져갈 이야기를 소설로 써내려갈

야심을 가졌고 책에서도 여러번 드러낸다. <나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는 강줄기처럼 유유히 흘러가는 시간, 그가 글을

써온 오랜 시간의 어느 지점에서 멈춰서서 지난 날을 반추하고 현재를 감사하며 다음 사랑(글)을 시작하기 위한

내적 준비에 대한 가열찬 고백이다. 오욕칠정을 숨기지 않고 많은 부분 충동으로 살고 글을 쓸 때만 생각한다는 말에

동감하는 그는 어느 부분에서도 그다지 위선적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자신 안에 키우는 짐승 한마리에 대한

고백에서는 청년의 기운이 느껴진다. <산다는 것은>에서도 비슷한 고백이 있었다.

글을 쓰는 자는 그래야 되지 않을까. 살아가는 자는 그래야 되지 않을까.

근원적인 슬픔을 안고 태어나 실존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하는 그는 말한다.

 

나이 든 사람들이 '점잖게' 앉아 있는 모습은 내가 보기엔 가짜 모습이다.

그는 일상적인 추락과 상승을 거듭하는 불연속선에 항시적으로 걸쳐져 있다.

내가 그러하니 내 안의 그들도 그러하리라고 나는 상상한다. 화석화 과정을 겪는 것은 바깥의 얼굴뿐이다.

나의 문학적 에너지도 알고 보면 그 위험한 내부 분열에서 나온다.

삶의 유한성이 주는 슬픔을 지혜롭게 넘으려면 창조적인 작업에 열중하는 게 좋다.

전문가가 꼭 될 필요는 없다. 중년에 준비하고 시작해야 할 일의 하나로,

늙어가면서 어떤 창조적인 작업을 연마할 것인가, 어떻게 창조적인 자아를 위로할 것인가가 중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 156쪽

 

일찌기 한 번 멈춰선 적이 있다. 그는 1993년부터 3년간 용인의 한방산터에 묻혀 세상을 미워했다.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내고 칭찬과 비난를 동시에 듣고 앞뒤가 다른 지인들에게서 배신감도 들었던 그는 돌연

절필을 선언하고 숨었던 적이 있다. 미워한다는 건 그만큼 그리워한다는 말. 그가 늘 말하는 '그리움'의 원천은

세상이었는지 모른다. 그때도 지금도.

그런 말이 떠오른다. 사람이 어떤 것에 도달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이후가 중요하다는.

어떤 결론에 이른 게 어떤 결과를 얻은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후 어떻게 나아갔는가, 어떻게 달라졌는가가 중요하다.

 

'저만치'에 대한 글귀는 자신이 비난 받았던 예전의 글쓰기에 대한 적절한 해명(변명이라해도 좋다) 같이 들리면서

나름의 꼿꼿한 작가관에 공감 되었다.

 

유리창 한 장 사이인데, 때론 창밖과 창 안쪽 세계는 별과 별 사이처럼 멀고, 또 나와 나 사이처럼 가깝다.......

'저만치'는 그야말로 비밀스럽고 눈물 나는 거리이다.

 

작가는 창 안쪽에서 창 밖의 세계를 보고 기록하는 사람이다. 뛰고 걸으면서 쓸 수는 없다. 피 튀기는 저자의 이야기를

아무리 현장감 넘치게 쓴다 해도 쓸 때, 그는 창 안쪽의 책상으로 돌아와 앉아야 한다. '저만치'의 거리가 없다면

사물을 볼 수도, 기록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돌아보니, 평생 '저만치'의 그 거리와 싸워온 느낌이다. 세상과, 혹은 당신과, 더 가까워 한 몸이 되고 싶을 때는

'저만치' 떨어져 있어 고통받았고, 더 멀어져 남이 되고 싶을 때 역시 '저만치' 가까이 있어 고통받았다.  (257-258쪽)

 

 

 

 

앞으로 그의 소설이 나오면 읽어보게 될 것 같다. 내일 힐링캠프에도 출연한다.^^

본문 뒤에 수록된 2011년 6월 발표한 소감문(장편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출판기념회)은 '논산일기'를 압축한 듯

그의 '산다는 것'과 '글을 쓰며 산다는 것'에 대해, 앞으로의 행보와 결심과 야망에 대해 정리하여 드러내준다.

"고백하거니와, 나의 마지막 꿈은 문학에서가 아니라, 인생, 그것 자체에서 승리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실존의 어두운

혼돈을 이기고, 유한한 시간의 감옥을 벗어나서 내 영혼이 마침내 참된 자유에 도달, 그야말로 훨훨, 거침없이 날아오르는

날을 맞이하는 것이 나의 은밀하고도 최종적인 지향입니다.(322쪽)"라고.

그는 정말 욕심 많은, 욕망에 충실한 사람이 아닌가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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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2-06-18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어보고 싶네요,,,그런데 시간이 읎어요,,ㅠㅠ
그리고 이번에 남편이 집 싹 정리하면서 책 사면 어쩌구 저쩌구 라는 엄포를 놔서,,,ㅠㅠㅠ
저 내일 유방검사가요,,,갑자기 무서워요,,ㅎㅎㅎㅎㅎ

프레이야 2012-06-18 22:13   좋아요 0 | URL
검사 잘 받고 꼭 결과 알려줘요. 너무 겁 먹지 말구요.ㅠㅠ
책보다 건강이 우선 ^^

근데 박범신, 인용을 줄이자라고 본인 스스로 결심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의 작품 몇 개를 읽어본 제 느낌은, 인용이 꽤 많은 편이란 거에요.
훌륭한 작가의 훌륭한 문장을 가슴에 새기고 인용하는 것, 나쁘다곤 볼 수 없지만
거기서 나아가는 게 중요하겠지요. '은교'같은 경우는 아예 좋은 시들을 대놓고 따왔구요.
물론 등장인물 이적요 시인의 시노트라는 구실이 되지만요.

moonnight 2012-06-18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교도 사놓기만 하고 못 읽은 주제에 이 책도 보관함에 넣습니다. 프레이야님 리뷰를 읽자니 너무 읽어보고 싶어지는걸요. >.<

프레이야 2012-06-18 19:57   좋아요 0 | URL
열정이 식지 않는 어느 육십 대 작가에 대해, 생을 나보다는 더 산 인생선배의 이야기로서도
들어볼만해요.^^ 글을 쓴다는 것은 결국 삶을 사는 것이란 생각도 들었어요.
'은교'는 어여 읽어보세요. 맘에 드실 건데요.^^

반딧불,, 2012-06-18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교를 시작 못했습니다. 영화를 한번 더 볼 요량이었는데 아마 요원할 듯 해서 책을 읽어야 겠네요.
최근에 반하게 된 작가죠. 그전엔 그리 대단하단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뭘 모르는 독자였는지도^^

프레이야 2012-06-18 22:11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래요. 예전에 별 관심 없었던 작가인데 은교 이후 달라졌어요. 제가요.
에세이도 좋습니다.^^

프레이야 2012-06-19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밤 힐링캠프에서 박범신, 매력있었어요.
논산의 그 집으로 3명이 갔더군요. 글방 창문 밖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풍경이 호젓했어요.
이 책 '논산일기'에서 이야기한 자신의 이야기도 많이 나왔고요. 유쾌하고 의미있게 좋은시간이었어요.

blanca 2012-06-19 09:15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저도 어제 보고 무한감동 받았어요. 그 어린 시절 담벼락 얘기하는데 눈물이 줄줄 나더라고요.

프레이야 2012-06-19 10:21   좋아요 0 | URL
블랑카님, 눈물을 찍어내며 고백하던 작가의 모습이 참 순수해 보였어요.
목숨을 끊으려 4번이나 시도했던 이야기, 히말라야 이야기, 독서지도의 필요성까지
오욕칠정의 긍정적 발산에 대한 이야기까지 다요. 위트도 있고 재미나게 봤어요.
요새 힐링캠프 계속 좋아요.ㅎㅎ 법륜, 정대세에 이어 ㅎㅎ 담주는 안 볼까 해요.
그 여자탤런트분은 그닥 관심가지 않아서요.ㅋ

2012-06-20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을 재밌게 읽지는 않았지만, 힐링캠프는 보고 싶네요. ^^;

프레이야 2012-06-20 23:57   좋아요 0 | URL
히히~ 힐링캠프 좋았어요.
논산 서재 창 밖으로 보이는 계룡산 국자봉까지도요^^
 
[김제동이 어깨동무합니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김제동이 어깨동무 합니다 -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을 꿈꾸며
김제동 지음 / 위즈덤경향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전작 <김제동이 만나러 갑니다>는 읽지 못했다. 이 책도 읽고 싶어지게 만드는 책이다, <김제동이 어깨동무 합니다>는.

 

인터뷰집은 흥하거나 망하거나 둘 중 하나일 가능성이 좀 있는데 이 책은 김제동 특유의 편안하면서도 날카로운 번득임이 고루 묻어 있어 흥하는 쪽이 아닐까 싶다. 그랬으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바람이다. 내가 읽었던 인터뷰집이라야 고작 지승호가 우리시대 빛나는 영화감독들과 함께한 인터뷰집 몇 권과 조국, 정재승, 정혜신 등 각계 엘리트들의 한겨례 특강을 청중을 앞에 두고 사회자 오지혜와의 대담식으로 모은 <21세기를 사는 지혜, 배신>, 지승호가 인터뷰한 박원순의 <희망을 심다>등이다. <배신>과 <희망을 심다>는 점자도서관에서 낭독녹음을 한 책이라 더 인상깊다. <김제동이 어깨동무 합니다>는 좀 더 대중에게 알려졌고 티비에서 주 1회는 보게 되는(힐링 캠프), 본인은 싫다지만 소셜테이너로 불리는 노총각이 다양한 분야의 친분관계를 살려 인터뷰이를 택해 자신과 그들의 이야기를 교차 편집하였다.

 

몇 해 전인가. 김제동의 토크 콘서트에 간 적이 있다.

국내 모 기업에서 연 환경토크콘서트였는데 우연한 기회에 작은딸을 데리고 가게 되었다. 복도를 지나다가 하얀색 반팔 피켓셔츠를 입고 까무잡잡한 피부에 안경, 생각보다 단단해 뵈는 체구의 남자랑 딱 부딪힐 뻔했는데, 그였다. 주변에 몇 사람의 남자들을 대동하고 있었다. 무대에서 그는 한 시간 반 정도 토크를 이어갔고 무릎을 꿇기도 했고 종반에는 기타를 치며 노래까지. 환경을 주제로 한 토크라 4대강 이야기도 나오고 토목공화국에 대한 이야기도 얼핏 나왔지만 우스개로 정치적인 코멘트는 넘기는 재주를 보이며 시종일관 구비구비 이야기 고개를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재능이 돋보였다. 의미심장한 고개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나왔고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나 심경을 아주 솔직히 털어놓으면서 자신의 결핍을 웃음의 소재로 하는 모습도 미더웠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그렇게 자유로이 할 수 있는 무대가 있어 행복해보였다.  

 

그래서인가, 상대이 자신이 하고픈 말을 자유로이 펼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는 게 김제동이 인터뷰하는 방식이다.

<김제동이 어깨동무 합니다>는 각계각층 18명의 인터뷰이를 김제동이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그가 준비한 것은 상대가 이야기하고 싶은 걸 물어줄 준비다. 그가 모르는 것에서 과도하게 나아가지도 않고 잘난 척 하지도 않는다. 인터뷰이한테서 배울 건 배우고 얻을 건 얻겠다는 생각이 엿보이는 개방된 대화의 태도다. 나이와 상관없이 인터뷰이 모두가 그에게는 스승이라는 태도가 강점이다. 무엇보다 편안하고 겸손하다. 이효리처럼 상대적으로 친분이 더 있는 상대와의 인터뷰는 또 다른 느낌일 텐데, 그것마저도 나쁘지 않다. 굳이 흠을 잡자면, 깊이는 좀 덜하다고 할까. 그렇다고해서 할 이야기가 빠져있다는 느낌은 없다. 장황설을 늘어놓는다고 본질에 가까운 건 아닐 테니. 대화마다 내가 밑줄 긋기해 놓은 부분도 많다. 그건 다음에 다른 카테고리로 하고.

 

특히 안철수, 박경철과 나눈 대화 중 리더십에 대한 부분이 내게 공명한다. (52-52쪽)

 

안> 21세기는 일반 대중이 리더를 무조건 따라가지 않아요. 탈권위주의 시대가 되면서, 지금은 대중이 리더에게 리더십을 부여하지요. 게다가 대중이 리더에게 원하고 갈망하는 자질이 더 중요해요. 현재 대중이 원하는 리더십은 상황에 따라 흔들리지 않는 안정성, 미래에 대한 비전과 희망, 그리고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이에요.

 

제동> ...... 어쨌든 리더십은 정의와 연결돼 있는데,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 잊지 않고 돌려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눈다고 말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려놓는 것이다......)

 

안> 어떤 사람의 말과 생각은 그 사람이 아니에요. 그 사람의 행동과 선택이 그사람이더라고요.

 

박> 수많은 구호와 수다, 슬로건은 결국 자신의 콤플렉스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죠.

 

 

저 위의 인용문 중 제동의 괄호 부분은 책을 읽다가 처음엔 좀 헷갈리는 편집인데, 인터뷰어의 독백 같은 것이다.

대화 중간중간에 저런 부분이 있는데 글자체를 좀 달리 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김제동이 대화로 배우고 사유하고 자신의 생각과 소신을 정리해나가며 성장하는 부분이라 의미가 있다.

 

인터뷰이보다 인터뷰어에게 살짝 더 비중이 갔다고 느끼게 되는 건, 18인의 인터뷰가 끝난 후 신동화, 오광수

두 명의 경향신문 선임기자가 각각 김제동을 심층인터뷰 한 부분과 '이 시대의 보통명사 김제동을 말한다' 편 때문이기도 하다.

이 책은 인터뷰이를 통해 인터뷰어 김제동이 더 돋보이는, 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책으로서 더 의미 있다.

 

웃음에 좌나 우를 가릴 수는 없죠. 좌뇌-우뇌로 갈라서 사람이 살 수 없듯이 이분법으로 가를 수 없는 구조,

이게 웃음의 한 구조라고 생각하거든요. (중략)  모든 혁명은 궁극적으로 인간을 웃게 만들기 위해 하는 것 아닌가요?

행복하면 웃지 않습니까? 그렇게 본다면 웃음은 혁명과 동의어라고 해도 된다는 것이죠.  (중략)

 

여담이지만 저같이 무대에 서는 사람의 가장 큰 기술은 사람을 웃기는 것이라기보다 웃기고자 했던

의도를 숨기는 것 입니다. 웃기고자 했는데 안 웃잖아요. 그럼 빨리 숨겨야 됩니다. 안 들키게 말이죠.

                                                                                                                      (224-225 쪽)

 

눈물 많고 글도 말도 잘하고 책도 많이 읽는 휴먼테이너, 소통의 감수성과 실천적 연대의 가치를 몸소 실천하며,

무엇보다 "웃음은 혁명"이라고 생각하는 올곧은 김제동의 행보가 더욱 주목된다. 이토록 속 깊은 남자가 아직 결혼을 못한 건

단지 인연이 안 나타나서일까. 비가 오는 날 어떻게 술을 안 마실 수 있냐며 너스레를 떨지만 외로움에 몸서리 친다는 총각,

이 책의 수익금은 결혼 자금으로 사용될 예정이라고 서문에 적으며 잠시 행복해져 본다는, 제대로 웃기는 남자다.

 

꼭 안고 자자. 우리.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처럼.

세상이 다 너를 내팽개져도 나는 너를 지킬테니.

세상 소리 다 내 품안에서 못 듣게

내 더운 몸으로 너를 껴안을 테니 아무 걱정 없이 자라.

잠든 사이에도 너에게서 멀어지지 않을 테니.

잘 자.

베개야.

                                                             - 서문 중

 

 

 역시 그는 홍희인간(弘喜人間)을 목표로, 웃기고자 했던 의도를 숨길 줄 아는 똑똑한 개그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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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6-18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사람의 말과 생각은 그 사람이 아니에요. 그 사람의 행동과 선택이 그사람이더라고요"

저는 이 부분이 몸서리치게 공감됩니다.
말과 생각은 포장할 수 있지만, 일관된 한사람의 행동과 선택은 포장되지 않으니까요.
특히 특정 상황에서,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 극단 상황에서 나타나는 행동과 선택도 그렇지만,
일상적으로 보여지는 행동과 선택도 그렇습니다. 아니, 일상사의 행동과 선택이 더 어렵겠다 싶어집니다.

프레이야 2012-06-18 20:01   좋아요 0 | URL
저도 격하게 공감되어 밑줄 좍^^
우리의 하루는 수많은 종류의 선택을 해야하는 순간들로 이어가는 것 같아요.
어떤 행동도 선택의 범주에 들어간다면 결국 어떤 선택을 하느냐의 문제가 그 사람이라는 말인데
거창한 것보다 소소한 일상의 선택에서부터 '그 사람'이 나타는 것이겠죠.
'선택'은 어떤 면에서 '태도'의 문제와도 통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마고님.^^
 
별 다섯 인생 - 나만 좋으면 그만이지!
홍윤(물만두) 지음 / 바다출판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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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12월 20일 점자도서관에서 이 책의 녹음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 책이 지난 해 내가 마지막으로 낭독한 책이다. 나는 이 책을 어쩐지 소리내어 읽고 싶었고, 시각장애우들에게도 큰 힘이 되는 내용이라는 확신도 들었기에. 최대한 담담하고 편안하게 읽으려 했는데 부록에 있는 낯익은 알라디너들이 그녀에게 보내는 안녕의 인사는 기어이 나를 목메이게 하고  잠시 정지버튼을 누르기를 여러 번 했다. '나만 좋으면 그만이지!'라는 부제가 깜찍하게 달린 이 귀한 책의 리뷰를 쓰려면 개인적인 소회를 쓰지 않을 수 없다.  아마 알라디너들 누구나 그렇듯 오랜 알라디너를 비롯해 그리 오래지 않은 분들까지 누구나 어떤 식으로든 그녀에게 마음의 빚과 선물을 동시에 지고 받고 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물만두님은 이 공간에 2000년부터 추리소설 리뷰를 꾸준히 올렸다. 내가 이곳에 어린이책 리뷰를 올리기 시작한 게 큰아이 7살 적이었으니까 그 시점보다 앞서거나 뒤서거나 아마 그 비슷하다. 그 당시에는 지금의 서재 시스템이 운용되기 전이다. 2004년 8월 지금의 서재가 마련되어 우리는 뜻밖에 작은 집 하나씩을 분양 받은 셈이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리뷰를 쓰고 소소한 소통을 하기 시작했는데 셜록홈즈와 아가사 크리스티 정도만 읽었던 나는 추리소설 리뷰에는 그다지 많은 관심이 없었다.(그래도 마음이 끌리는 책의 리뷰는 읽고 답글을 쓰곤 했다.)  그러다 보니 물만두님의 리뷰보다는 그녀와 가족들의 소소하고 유쾌한 일상의 이야기에 호호호 댓글 쓰고 가끔 그녀도 내 서재에 놀러오셔서 유쾌한 말씀을 주시곤 했다. 댓글마다 어찌나 빵빵 터지게 해주시던지 활력소가 되었다. <별 다섯 인생>를 읽으면 우리가 어쩌면 쉽게 나누는 그런 댓글 한 줄과 몇마디 안부가 물만두님에게는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 알 수 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성실한 리뷰로 꾸민 블로그는 세상 밖을 바라보고 세상에 인사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그녀의 유일한 창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한 '사람'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탓인지 그녀가 육체적으로 그렇게 힘든 감옥에 갇혀있는 줄 몰랐고 재작년 추석 끝에 그녀가 올린 페이페에서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뭔가 생각보다 심각한 일이라는 느낌을 받았던 거다. 나의 사람살이가 그토록 껍데기였나 싶어 나중에야 마음 한 귀퉁이가 쿵 내려앉았다. 혹여나 그동안 내 한심한 투정과 불만의 글을 보고는 어떤 생각이 드셨을까, 부끄럽기도 했다.

 

 

나,

너,

그 리 고

사 랑 에

 대 하 여.

 

나, 너, 그리고 사랑이 있다가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나와 너는 남았으니 그건 그것대로 좋은 것이다.

나와 네가 사라지고 사랑이 남는다 해도 그 사랑 또한 좋은 것이니 족하다.

나, 너, 그리고 사랑이 모두 사라진다 해도 모두 함께 사라졌으니 슬픔은 남지 않아 좋지 않을까.

나와 사랑만 남거나 너와 사랑만 남는다면 그 남은 한 자리는 슬픔이고 그리움이고 아쉬움일 테니.

 

                                                                                                               2006. 11. 18

 

 

위의 글은 에필로그와 부록 앞, 마지막 페이지 바로 앞장에 있는 비공개글이다. 이 글을 읽고 책을 잠시 덮는데 잔잔한 물결이 밀려들어 온몸을 적시는 느낌이있다. <별다섯 인생>에는 블로그에서 본 기억이 나는 에피소드도 많지만 물만두님이 비공개로 써둔 일기가 사이사이에 들어있는데, 나는 이 글들이 너무 좋아 배껴두고 싶은 정도였다. 이 글들에서는 우울과 조증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이겨내기도 하며 그녀가 깊이 사색하는 모습과 세상을 보고 읽는 정직하고 다정한 입김, 여리지만도 강하지만도 않은 감수성과 문학적 소양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질보다 양으로 승부한다고 겸양의 말을 하고 있지만 그녀가 남긴 1800여편의 추리소설 리뷰가 그냥 쉽게 나온 것이 아니라는 증거다.  데미지를 입기 싫어 로맨스를 읽지 않는다는 대목에서는 무조건 삶에 강한 척만 하지는 않은 순수한 배짱을 볼 수 있다. 안락사에 찬성한다는 글은 영화 '청원'의 주인공을 떠올려 주는데, 단 60초만이라도 관에 들어가 몸을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순간을 체험해 보라던 말이 새삼 영화 속 대사가 아니라 현실이라는 뜨거움이 느껴진다. 삶은 몸으로 살아내는 것! 그녀는 온몸으로 견디고 싸우며 치열하게 살다가 무지개 다리를 건넌 것이다. 머리로만 사는 나는 할 말이 없다. 그녀의 삶은 내가 감히 연민하거나 안타까워할 수 있는 삶이 아니다. 누구의 삶인들 별이 아닐까마는 물만두님의 '별 다섯 인생'에는 감히 별 하나 아니 두 개 더 드리고 싶다.

 

2004년 9월 3일의 글 '만두의 진실 또는 고백'으로 프롤로그를 시작해 2003년 12월에서 2007년 1월까지의 글이 담긴 이 책은 주로 물만두님의 가족사, 가족과의 일상, 그리고 알라딘과 알라디너들의 이야기다. 언제든 창가로 가 창문을 활짝 열고 바깥세상을 마음대로 볼 수 있는 우리와는 달랐던 그녀의 시간들을 감히 곱씹어보며 숙연해지길 여러 차례, 웃지 못할 기막힌 상황에서도 유머를 날려 깔깔깔 데굴데굴 구르게 만드는 글을 읽으면 그와는 반대로 비공개 일기 속에 묻어둔 솔직한 회환과 갈망의 심정, 삶에 대한 동경과 무시로 찾아오는 우울, 그러나 삶을 긍정하는 포용과 용기가 대조적으로 더 귀하게 느껴진다.

 

이름도 예쁜 홍윤님이 예기치 않은 희귀병으로 고통의 삶을 살면서도 세상을 웃어넘길 수 있었던 힘은 가족의 사랑이었다. 곳곳에 어머니에 대한 뼈아픈 미안함과 고마움, 아버지에 대한 애틋함과 사랑, 두 동생들을 향한 맏이로서 갖는 책임감과 보살피려는 마음이 진하게 배어있다. 다섯 식구가 알콩달콩 주거니 받거니 토닥거리며 사는 정경이 푸근하게 그려지는 장면들, 빨간 야구모자를 비딱하게 쓴 꾸밈없이 말간 그녀의 얼굴을 보는 듯 참으로 솔직담백한 이야기들, 읽다 보면 곳곳에 '우띠', '에헤라디야' 이런 추임새 덕에 나는 또 정지버튼을 눌러야했다. '에헤라디야'는 그냥 글자 '에헤라디야'가 아니고 나도 모르게 자동으로 곡조가 붙어져 '디'에서 최고음으로... 해놓고는 혼자 우스워 배꼽 잡았다. 특히 아버지의 한 마디 "엉덩이 상한 거 아니야?" 에 물만두님이 넘어져 누워 있는 상태로 "어버버 아버버..." 뭐 이렇게 반응했던 대목 읽을 때도. 이 글은 예전에 물만두님 서재 페이퍼에서 '상한 엉덩이'라는 제목으로 읽은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데도 다시 읽으니까 어찌나 웃기던지. 하하하 참으로 유쾌한 분! 

 

'당신이 장애인이라면' 등 장애인을 위한 시설과 복지 문제를 비롯 사회적 사안에도 늘 관심 두고 비판적 견해를 갖고 계셨던 분, 점점 근육량이 줄어들어 입부터 작아지고 나중엔 여섯 손가락의 힘으로 마지막 자판을 두드렸던 그녀, 이제는 평안한 곳에서 영면하시길 바랍니다. 지금 당신들은 충분히 행복한 거라고, 힘주어 전한 말씀 고맙습니다.

 

물. 만. 두, 세 글자 닉의 한자뜻이 있었다. 2004년 10월 18일 정하셨나 보다. 석 자 모두 나는 처음 보는 뜻과 음이었다. ^^

그녀의 소망이 이루어졌기를 바라며 이 리뷰의 제목으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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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2-01-13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당신들은 충분히 행복한 거라는 말씀, 새기고 갑니다.

프레이야 2012-01-14 09:19   좋아요 0 | URL
네, 메리포핀스님 고맙습니다. 저도 그렇게 새겨봅니다.^^
이 책을 많은 분들이 보시면 좋겠어요.

블루데이지 2012-01-14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서재 시작한지 얼마안되어서 잘 몰랐어요^^
프레이야님의 글을 읽으니 그분이 더 알고 싶어 지네요^^

프레이야 2012-01-14 09:20   좋아요 0 | URL
블루데이지님 토요일 아침이에요. 편안한 주말 보내세요.^^
이 책은 많은 분들이 보시면 좋겠어요.

순오기 2012-01-14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열심히 읽었더니 이제 거의 다 읽어가요~
정말 유쾌하고 긍정적이고 낙천적이었던 분~ 새삼 다시 보게 됐어요.

프레이야 2012-01-14 09:21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도 워낙 긍정의 에너지 넘치는 분이라 늘 배우고 얻어요.^^
건강하세요 언니.

2012-01-15 1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15 14: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15 19: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15 2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로 2012-01-15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아이폰으로 이 글을 읽었어요,,,인용하신 글을 물만두님의 책에서 읽을때는 이렇게까지 좋다고 생각 못했는데
님의 페이퍼에서 읽으니 넘 좋으네요. 오늘 다시 읽으니 더욱 좋고..

프레이야 2012-01-15 23:48   좋아요 0 | URL
네, 정말 물만두님은 시인이에요.
비공개글들 참 좋더군요. 나비님, 느닷없이 선물해주셔서 더 고마웠어요.^~


마녀고양이 2012-01-16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따스한 책이였어요,,,,
읽는 것만으로도 눈물 나던데, 낭독까지 하셨으면 언니,, 막 눈물 흘리면서 하신거 아니예요?
그렇게 큰 선물을 남기고 가신 물만두님을 뵈면서, 제 삶도 한번 돌아봅니다...
이렇게까지 사랑과 감사를 받지는 못 하더라도, 적어도 욕은 먹지 말아야할텐데 말이예요....

프레이야 2012-01-16 21:55   좋아요 0 | URL
네, 눈물 훔치다 웃다 그랬어요.^^
그저 부끄러울 따름이에요.
루게릭병으로 5년만에 저 세상으로 가신 김영갑님의 책에서도 느낀 건데
그 분은 병이 오히려 한 가지에 몰입할 수 있는 힘을 주어서 구원 받았다 생각하더군요.
정말이지 쉽지 않은 태도가 아닐까요.ㅠ

근데 나 이거 녹음하다가 물만두님 좋아하셨던 노래가사 적힌 부분에서 그냥 노래부르고 싶어진 거
알아요? ㅎㅎ 서른즈음에, 보고싶다 등등.. 노래로 부를까하다가 청각공해일까봐 참았다는..
 
나를 생각해
이은조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5월
평점 :
품절


'내면의 권태를 들추는 시크한 시선'


이국의 바다로 곧바로 이어질 것 같은 발코니. 그 마루바닥 위에 어디론가 나아갈 듯 놓여있는 투명샌들 한 켤레. 여름을 부르는 샌들 한 짝을 덮고 있는 띠지 위에 씌여있는 부제다. 나는 문득 '권태'에 붙박인다. 그리고 '내면'에, 다시 '시선'에.  작가의 시선은 표지처럼시크하다. 문장은 젊은 여성의 깡총한 치맛자락처럼 날아갈듯 군더더기가 없다. 책날개에 웃고 있는 그녀는 단아하고 섬세해 보이는 분위기에 연약해 보이지만 강인한 내면이 엿보인다. 일면한 내 기억에 새긴 이미지도 그렇다. 그녀의 첫 장편소설의 탄생을 축하한다. 다소 엄살도 섞였다고 고백했지만 누구나 연애와 청춘의 그 혼란과 환희와 권태에 공감할 수 있을 거다. 나는 다소 이른 연애와 결혼을 했지만 당시 연애가 종종 고단하다 싶으면서도 참 순애보적이었다는 생각이 지금에야 든다.


흔히 우리네 삶을 한 편의 연극에 비유한다. 삶의 공허함 - 그걸 권태로 말할 수도 - 을 빗대어 연극이 끝나고 난 뒤의 텅빈 무대와 텅빈 객석을 말하기도 한다. 이 소설은 스러져가는 극단의 홍보를 맡고 있던 유안이 직접 쓴 각본을 무대에 올리는 과정과 그녀의 사소한 일상과 가족, 지리멸렬한 연애를 함께 이어나간다. 누군가의 삶이 좀더 괜찮아 보인다고 느낄 때 우리는 자신을 위악으로 속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구나 헤집고 보면 자신만의 멍에에 눌려서 살아가지만 때론 그 무게가 마음대로 날아가려는 우리 삶과 우리 마음을 잡아 앉히는 역할을 해준다. 무게가 멍에가 아니라 중심잡이 역할을 한다고 느끼는 순간 삶은 권태가 아니라 끌고 나갈 만한 커다란 여행가방 같은 게 될 수 있지 않을까.   


평소엔 끼지 않는 안경을 극단에 갈 때는 끼고 들어가는 다소 모호한 - 청춘이 그렇듯 - 성격의 청춘 유안이 책을 덮을 즈음엔 '여름을 재촉하는 시원한 비가 내리고' 있는 창 밖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러곤 이상하게도 하루하루 지날수록 소록소록 생각나는 여자가 유안이다. 나는 그가 자그마한 체격에 하얀 피부를 가진 새초롬해 보이지만 털털한 성격의 여자일 거란 상상을 해본다. 새벽안개 속을 헤치고 무작정 발을 내딛는, 그 시절의 모호함을 굳이 청춘의 특권이라 부른다면 일생에 청춘이 아닌 때가 있을까. 유안의 어머니와 오랜 세월 정을 나누는 동성친구, 유안 어머니의 팔순 어머니와 그녀가 평생 사랑한 여자,  까칠한 언니와 언니의 동거녀, 그녀들이 사랑하는 대상과 방식, 이 모든 게 유안에겐 '로맨틱 세계'다. 유안이 무대에 올리는 연극 '로맨틱 세계' 처럼 발랄한 사랑, 가까이 있으면서도 보이지 않는 사랑,  소수의 사랑, 그 어느 쪽이 아니어도 세상엔 수많은 로맨틱 세계가 있다. 하지만 유안 자신의 지리한 연애는 그 반대의 세상에서 답답해 하고 있다. 선망하거나 잘 알지 못해 모호한 세계는 로맨틱하다. 하지만 내가 뒹굴어야하는 세계는 그 반대다. 유안이 이별 후 보통의 연인이 그러그러한 연애를 한다고 머릿속에서 사실화한 방식으로 승원의 흔적을 뒤질 때 그 세계는 결코 로맨틱하지 않다. 유안이 말했듯 할수록 바닥이 드러나는 느낌, 삶이 우울해서 일상이 평온하지 않아서 사랑에도 문제가 있다는 건 어지간히 맞는 말 같다. 그렇다고 동료의 쿨한 충고처럼 '사랑만 사랑하기'엔 너무 생각이 많다. 가만 들여다보면 유안은 대개의 사람이 그렇듯 자신 안에 '나'가 조금 더 많다. 과연 '나'를 진정 사랑해서일까?


유안은 가까이에서 보게 되는 수많은 사랑의 방식을 이해해가면서 자신의 지리멸렬한 연애 혹은 사랑과 당당히 이별한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외딴 산골의 살얼음이 얼린 저수지 같은 느낌'이 들어 굳이 사랑이냐고 묻지 않은 소수(일 거라 생각한)의 사랑에 비해 자신의 기반 약한 사랑 - 그것도 사랑은 사랑이다 - 이 얼마나 초라한지 깨닫는다. 재영의 동거녀가 말했듯 말이 잘 통하는 사랑, 그것은 서로 기다려 줄 수 있는 사랑을 뜻한다. 각자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고 서로 그것을 인정하고 불편과 희생을 감수하는 것을 포함한다. '나'를 얼마나 버려야 그게 가능할까. 질투는 열등감에서 온다고 한다. 자신을 완벽하게 사랑하면 '나'에 대한 집착과 질투를 버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나'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아니 안다고 생각하기에 - '나'에 열등감을 느끼고 '나'를 질투하고 집착한다. '나'는 내가 질투하고 집착할 만큼 잘나지 않았으니 그만해도 될 터. 그리고 더 겸손할 필요도 없을 터. 왜냐하면 겸손할 만큼 '나'가 그리 잘나지 않았으니까. 먼저 자신을 제대로 보지 않고 또 완벽하게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서 타인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위선에 불과할지 모른다. 유안이 기억에 남을 만한 연애가 아니라 기억을 소진시키는 연애를 하고 있는 것 같다고 늘 갈등한 건 근거 있는 불안이었다.
 

언젠가 들은, 삶과 연애하듯 사는 것 같다는 말은 내게 상찬으로 들린다. 그만큼 삶을 열렬히 사랑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내 모서리를 내어줄 수 있는 애심이 있는가 자문해보면 자신이 없다. 아직은 타인을 더 사랑할 수 있을 만큼 '나'를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 연애와 삶을 등식으로 놓고 보면 통하는 점이 많다. 연애의 방식은 삶의 방식을 좌우한다.  연애를 하면 상대의 말을 120% 듣게 된다.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원하지 않는지 몸짓언어와 표정까지 읽고 상대의 욕구에 공명한다. 말이 잘 통한다는 뜻은 기다려준다는 의미와 함께 우선 적극적 듣기가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유안은 연극과 연애한다. 그녀는 저 많은 사람들이 연극을 보러 왜 가지 않을까, 마뜩지 않다. '연극을 보러 가자'가 아니라 '연극이나 볼까'라는 말이 아프다. 마치 '삶을 살자'가 아니라 '그냥 한 번 살아볼까' 정도의 차이랄까.   

 

   
  하나의 문장에서 온전한 목적어로서 기능하지 못한다는 건 슬픈 일이었다.
모든 것의 주어가 되었을 때 기쁘지만은 않은 것처럼.  - 276쪽

 
   

 

세상 모든 사람이 봐주지 않아도 연인의 시선에는 가장 아름답게 포착되길 바라는, 단 하나의 주어, 단 하나의 온전한 목적어가 되고 싶은 유안의 바람은 연애를 하는 사람의 바람이다. 또한 살아가는 대개의 사람이 갖는 바람이다. 우리가 어떤 목적지를 정하고 가는 경우도 있지만 흔히 목적지 없이 나아가기도 한다. 가다보면 샛길로도 가고 새로운 길도 만들어 가는데 가다가 가끔은 돌아보기도 한다.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끔은 멈춰서 내가 어디서 출발했는지를 잊지 말자는 말이 떠오른다. '나를 생각해'는 단순한 이기적 자기애가 아닌 좀더 성숙한 자기애, 모든 사랑의 출발. '출발지로서의 나'를 생각해보게 한다. 그곳엔 수많은 '너'가 나를 세우고 이끌고 밀어주고 있다. 유안이 알든 모르든 존재하는 것이다. 유안의 말처럼 내가 잊은 사랑이라도 세상은 그걸 다 기억하고 있다. 내가 눈치 채지 못하는 존재라도 세상엔 도처에 나를 세우려는 '너'가 있어 오늘도 쓰러지지 않는다. 이 비 그치면 여름이 올 것이고 장성한 초록의 그늘이 생채기 많은 '나'에 드리워질 때쯤이면 더욱 깊어진 눈매를 한 여인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자네들은 가장 노릇을 잘 하고 있나? 

아무도 영웅이 되려고 하지는 않지. 그저 영웅이 나타나기만을 바라는 거야.
그 사람의 노력과 투지, 희생을 기다리지. 과연 누가 자네들을 대신해서 희생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 한 영웅은 될 수도 없고 나타나지도 않지.
영웅도 영웅이 되기 위해 나선 것은 아니었어."    - 95쪽 

 
   

젊은 시절 극작가 겸 연출가로 이름을 날렸던 정 선생님이 유안을 포한함 극단 사람들에게 한 말이다.
그리고 유안의 능력을 의심스러워하는 극단 사람들에게 그녀에게 필요한 건 격려와 지지라고 말해준다.
늙음의 지혜!  연륜은 청춘이 몸소 지불한 대가(代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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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3 10: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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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3 21: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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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7-13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목적을 위해 열심히 달리던 제가
요즘 '한번 달려 볼까'와 '제대로 달려 보자' 사이에서 헤매고 있잖아요. ㅠ

프레이야 2011-07-13 21:00   좋아요 0 | URL
전 늘 그런대요 뭘 ㅎㅎ
마녀님은 제대로 달려보자 쪽으로 좀더 많이 기울어 있어요.

2011-07-14 23: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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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5 08: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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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16 17: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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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16 20: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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