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번째 파도
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 김라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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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번째 파도'를 얘기하려면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를 먼저 말해야 할 것 같다. 그 책을 처음 알게 된 건 큰딸아이가 읽고 싶다고 책을 사달라고 해서였다. 어디서 정보를 얻었는지, 그 책을 사달라고 했고 손에 알맞게 잡히는 하드커버에 산뜻한 표지부터 맘에 든다며 아이가 먼저 읽었다. 난 책장을 휘리릭 넘기며 그저 가볍고 말랑말랑한 연애담 같은 정도이겠거니 하고 읽지 않고 있었다. 참 좋더라는 말은 아이한테 먼저 들었다. (얘가얘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성숙한 건가.)  공식홍보대사(^^) 다락방님에게도 익히 강추받은 책이다. 그 후 낭독녹음 봉사를 하고 있는 점자도서관 책꽂이에서 그 책을 우연히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얼른 집어들었다. 다소 무거운 책을 녹음한 후엔 조금 가벼운 책, 술술 잘 넘어가는, 편안한 대사가 있는 소설 같은 게 읽고 싶은데, 마침 내 눈에 띈 것이 이 책이었다. 역시 타이밍이 중요한가 보다. 

두 사람이 주고 받는 이메일 언어, 구어체의 글이면서 문어체의 묘한 깍듯함이 섞인 문장들을 읽으며 나는 점점 어디론가 빠져들어갔다. 어디에 빠져들었냐하면, 음,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소리, 어디론가 달려나가고픈 해거름 잿빛 공기, 가늘게 흔들리는 잎새들의 몸부림 같은 것, 도무지 시작도 끝도 알 수 없이 휘말려오는 그 비슷한 감정이란 것으로. 그리고 주체할 수 없이 점점 타들어가는 언어의 목마름, 나아가 고갈상태 같은 것이 마음속에 자리했다. 표현할수록 부족하고 말할수록 어긋나고 그러다 어느 순간엔 데칼코마니처럼 마주 접으면 딱 맞아떨어지는 어떤 것, 그게 말이고 글이고 그것으로 표현되어 서로 나누는 감정이더라. 할퀴기도 하고 보듬기도 하고 갈증에 애를 태우는 언어들 뒤에서 내가 에미가 되었다가 레오가 되었다가, 그녀가 되었다가 그가 되었다가, 목소리톤을 번갈아 조금씩 바꿔가며 읽어나갔다. 참 좋았다. 좀 간지러운(?) 대사들도 있었고 아릿하게 가슴을 적시고 울리는 대사들도 있었다. 달콤하거나 씁쓸하거나 날카롭거나 다정한 말 아니 글이 감정을 들었다놓았다 하며 자신을 드러내거나 감추며 상대를 탐닉하고 있었다. 조사 하나, 단어 하나, 괄호 하나, 점 하나, 말줄임표 하나, 느낌표 하나에도 그들의 다 드러내지 못하는 감정이 실려있었다. 망설임, 주저함, 다가감, 그리움, 시기, 질투, 과감함...  얼굴을 마주보며 말하는 모습을 눈으로 담고 목소리를 귀로 담는 것보다 모니터를 사이에 둔 그들의 말 아니 글은 더욱 예민하고 섬세하고 그래서 더욱 위험하고 예리했다.   

그들의 언어를 따라가며 점점 그들의 '감정'에 빠져들어갔다. 나는 그들이 되어 때로는 애틋하게 때로는 질투심에 불타 때로는 간절하게 서로를 그리워했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이었다. 에미의 12년 된 내부 세계 동반자 베른하르트가 말하듯 실체가 없는 환상, 뼈와 살이 있고 흠이 많은 실체가 아닌, 글자 뒤에 숨어있는 환상이었기 때문에, 모든 건 완벽해 보였다. 감정은, 사랑은, 미움은 과연 어디서 생겨날까. 말,말,말. 글,글,글. 허망하기 짝이 없는 - 그걸 알면서도 매달리게 되는 - 그것들로 짓는 사상누각에 그들의 감정이 실리고 눈을 뜨면 한 순간 날아가버릴 수 있는 한 줌 바람같은 그것에 감정은 점차 더 고조되고 때로는 추락하고, 막연했던 것들이 소소해지고 구체화 되었다. 처음엔 잘 알지 못했고 예견할 수도 없었던 그들의 감정은 점점 색을 입고 향을 더하고 미세한 결을 갖추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좀 더 용감한 건 에미였다. 그녀에게 불어오는 북풍은 도저히 감당해내기 어려운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새벽 세시'의 결말은 참 허탈했다. 두고두고 회자될 기막힌 결말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이었다. 그 속편이라 할 수 있는 '일곱번째 파도'의 결말은 대체로 흡족하다. 현실에서 그럴 수 있다고 보기엔 설레고 두려운, 그래서 비현실적이다. 나는 이 결말을 환상이라 말해야겠다. 이 책 '일곱번째 파도'의 결말에 대해 궁금증이 있었고 그만큼 두근거리며 아껴 읽었다. 그래서 나는 간단히 말하자면,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환상을 심어주다니, 작가가 살짝 얄밉다. 전편의 설렘이 사라지는 느낌이다. 일곱번째 파도는 어차피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 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일곱번째 파도 같은 걸 꿈꾼다. 실재하지 않는 것이기에 '조용한 외부세계'에 대한 '꿈'을 꾼다 . 잔잔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여섯번의 파도 다음에 일어날 일곱번째 파도는 허망한 '감정'안에서만 일어나는, 비실재적이라 잔인한 파도가 아닌지. '이성'은 끊임없이 그 파도를 밀어내고 있는 것이다. 레오가 그랬던 것처럼.

   
 

일곱번째 파도는 조심해야 해요. 일곱번째 파도는 예측할 수 없어요. 오랫동안 눈에 띄지 않게 단조로운 도움닫기를 함께 하면서 앞선 파도들에 자신을 맞추지요. 하지만 때로는 갑자기 밀려오기도 해요. 일곱번째 파도는 거리낌 없이, 천진하게, 반란을 일으키듯, 모든 것을 씻어내고 새로 만들어 놓아요. 일곱번째 파도 사전에 '예전'이란 없어요. '지금'만 있을 뿐. 그리고 그뒤에는 모든 게 달라져요. 더 좋아질까요, 나빠질까요? 그건 그 파도에 휩쓸리는 사람, 그 파도에 온전히 몸을 맡길 용기를 가진 사람만이 판단할 수 있겠지요.(256쪽)

 
   

이 두 권의 책, 모두 상당한 매력을 풍긴다. 사랑(이란 감정)은 어디에서 오는가, 사랑(이란 감정)은 어떻게 진행되는가,를 묻고 싶다면 이 두 권의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언어! 사랑은 그리고 어떠한 감정은 언어에서 오고 언어는 그것을 더욱 공고히 한다. 언어로 환상의 집을 짓고 또 허물기도 하며 언어로 우리의 감정은 고조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언어란 것, 듣지 말 것을, 보지 말 것을, 읽지 말 것을. 이 두 권의 책은 언어로 유발되는 우리의 모든 감정을 지독하고 집요하게 파고 들어가, 결국 그 모든 감정이 마음을 흔들고 현실을 흔들고 운명을 흔들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아무렇지 않게 쓰는 언어습관에서 고개를 쳐드는 내면의 억눌린 감정과 꿈틀대는 욕망을 읽을 수 있을 정도라면, 너무한가. 아니다. 책속의 레오처럼 이메일 언어를 연구하는 언어심리학자가 아니어도 글 이면의 글, 말 이면의 말을 살필 일이다.  

레오는 '사실은 당신이 그립다'는 말을 하기 위해 '파피용'이 기다린 일곱번째 파도, 그 탈출의 의미를 말한다. 에미는 '보고싶다, 잘 지내고 있기 바란다'는 말을 하기 위해 '당신이 잘 지낸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요.'라고 쓴다. 이들의 언어를 곱씹고 더듬어보는 재미, 언어의 묘미를 잘근잘근 씹어보는 재미, 그들의 연애 감정에 공감하며 그걸 바라보고 느끼고 다루는 과정에 집중해보는 재미를 느끼다, 문득 이 책,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편에서 에미는 '결혼은 모순형용'이라고 말한다. 평화는 잠재된 전쟁을, 안락함은 지루함을, 책임과 의무는 은밀히 욕망하는 무책임과 방종을 동시에 품고 있는 말이 아닌가. 후편에서도 에미는 결혼이라는 가장 이성적이어야 하는 잔잔한 파도에 대해 설핏 냉소적으로 말한다. 일곱번째 파도를 기다리며 하염없이 앉아있기만 하는 자신의 모습에 파격을 가하는 에미, 그녀는 충분히 사랑스럽고 영리하지만 슬프게도 정말 비현실적이지 않은가. (그 결단에 일면 박수 보내고 싶다는 말을 이렇게 쓰고 있는 거다.)  여전히 그녀에게 새벽 세시면 북풍이 불어들고 추워서 잠 못 이루며 창가에 발끝을 두고 거꾸로 눕는 에미를 상상해본다. 그런 에미가 오히려 현실적인 것 같다. 과연 에미, 조용한 외부세계의 마력을 떨칠 수 있을까.

사랑은, 연애는, 관계는 그리고 삶은 지독하다. 사랑하지 않으면 상처 받을 일도 없고 가슴 아파할 일도 없다. 사랑하지 않으면 질투할 일도 없고 증오로 잠못 이룰 일도 없다. 더 많이 사랑하는 자가 더 많이 괴로울 수밖에 없다. 관계맺기에 서툴고 늘 어눌한 사람이지만 삶과 연애하는 것 같다는 상찬을 들은 적이 있다. 그만큼 삶을 아끼고 사랑하고 가꾼다는 의미일테다. 과분한 칭찬이라 내겐 감사한 말이다. 하지만 삶이 삶이라서 상처를 주듯 가장 사랑하는 대상이 상처도 제일 많이 크게 줄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을 알지만 삶을 견디며 살아가야하듯 사랑(이란 감정)도 피할 수 없는 것, 견디며 보듬어야하는 것이다.  

작가는 희망을 주고 싶었던 것일까. 희망처럼 절망적인 게 없는 건데... 그래도 희망이란 말은 희망적인가. 언어로 쌓은 헛된 집 - 그것을 감정이라 부른다면 - 이 결국 그리 헛된 것만은 아니란 걸 '일곱번째 파도'의 결말이 말해준다. 우리는 무엇 하나도 헛되이 쌓고 있지 않다는 걸 긍정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그 결말은 완전한 사랑은 언어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도 말한다. 완전한 사랑은 정신과 육체의 하모니다. 어느 한 쪽이 기우는 건 장애다. 하지만 사랑은, 사랑이라는 감정은 수많은 오해와 질투, 상처를 딛고 결국 살아남을 것이다. 이해하고 양보하고 또 (레오에게 에미가 그런 존재인 것처럼) '내 손바닥에 간직한 점'처럼 나의 일부로 동반의 길을 가야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라면 혹여 일곱번째 파도를 맞는다 해도 새벽 세시면 여전히 북풍이 불어 들어올 것 같다. 에미도 여전히 그러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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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9-20 0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 세시'를 읽고나서, 어느 순간부터 서로 사랑하게 된거지?라고 다시 차근차근 짚어본 적이 있었어요. 언어 속에 숨은 마음이 서로 통할때 사랑은 오는 것일까요? 재밌게 본 영화의 신통치 않은 속편이 아닐까 싶어 망설이고 있었는데, 그래도 궁금하긴 해요 ㅎㅎ

프레이야 2009-09-20 09:46   좋아요 0 | URL
만치님 조용한 일요일 아침이에요.
사랑은 그렇게 오고 자라지만 결국 완전하게 되기엔 언어만으론 부족한 게 있다는 것,
그 책 결론을 보면 알게 될 거에요.^^ 그런 결론 의외였지만 나쁘지 않은 것 같구요.



다락방 2009-09-20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와- 프레이야님.
이 리뷰는 그동안 제가 봐왔던 리뷰중 최고가 아닐까 생각해요. 새벽 세시와 일곱번째 파도 그 안에 담겨진 그 많은 것들을 이토록 잘 풀어내시다니요!
이 책을 읽은 누군가는 이 작가가 굉장히 똑똑하다고 하더라구요. 모니터를 앞에 놓고 인간의 관계가 점점 달라져가는 과정을 이토록 잘 그려낼 수 있다면, 그 작가는 정말 굉장히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일거라구요. 이 소설의 놀라움은 그런점들인 것 같아요. 위에 Manci 님도 말씀하신 것 처럼 무엇이 어디서 어떻게 시작된거지? 되짚어 보면 여기, 이부분, 저기, 저부분이 될 수도 있은 그런 흐름들. 그러나 무엇 하나 확실한 것 같지도 않고. 새벽 세시의 결말은 완벽함, 그 자체, 그래서 현실이었지요.

일곱번째 파도는 그래서 말씀하신 것처럼 환상으로 끝맺는 결론인 것 같아요. 저 역시 그 결말이 나쁘진 않았지만, 전 역시 현실쪽에 좀 더 무게를 두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일곱번째 파도의 결말에 마음 놓는 사람들도 많더군요. 그들은 그랬어야 한다고 말이죠.

오와- 리뷰가 무척 좋아서 저도 모르게 말이 많아졌어요, 프레이야님. 추천이에요.

프레이야 2009-09-20 21:12   좋아요 0 | URL
작가, 굉장히 똑똑할 거란 생각 동의해요.
사람의 심리와 언어의 이면을 꿰뚫고 있는 것 같았어요.
다락방님 고마워요~~

stella.K 2009-09-20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 저기서들 좋다고 난리인 책을 저는 일부러 외면중이었는데(읽을 책이 너무 많아)
조만간 질러버려야할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아마도 리뷰는 못 쓸 것 같습니다.
프레이야님 리뷰에 눌려서...흥!3=33

프레이야 2009-09-20 21:12   좋아요 0 | URL
외면하지 말고 그냥 확~질러요, 스텔라님.ㅎㅎ

2009-09-20 15: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20 2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냐 2009-09-21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쉽지 않은 봉사를 하고 계시네요....그리고 이들의 이메일을 낭독해보는 건 더욱 흥분되는 일일거란 생각도 듭니다. 이 유쾌한, 때로 간지러운 대사들이라니. 저도 다락방님 의견에 동의하면서...추천요

프레이야 2009-09-21 09:01   좋아요 0 | URL
그래요. 소리내어 제가 그 대사들을 말하니 꼭 제가 그들이 된 것처럼
좋았답니다. 우힛~ 감사해요^^

후애(厚愛) 2009-09-21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20개를 드리고 싶은 멋진 리뷰에요.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해요!

프레이야 2009-09-21 23:40   좋아요 0 | URL
후애님, 20개씩이나요 ㅎㅎ 고맙습니다^^

라로 2009-09-22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새벽세시 바람이 부나요?>에서 그냥 제 기억을 멈추고 싶어서 일곱번째,,,는 읽지 않고 있는데
이거이거 읽어???말어????

프레이야 2009-09-22 21:37   좋아요 0 | URL
거기서 멈추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래도 읽어보시라고 뽐뿌질해야쥐~

꿈꾸는섬 2009-09-22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글 보니 또 읽어야할 책이 생기는군요. 그것도 두권이나 말이죠.^^

같은하늘 2009-09-23 01:33   좋아요 0 | URL
저도 같은 의견입니다. ^^
프레이야님 미워요~~~

프레이야 2009-09-23 23:30   좋아요 0 | URL
꿈꾸는섬님, 같은하늘님, 두 권 모두 읽어보시면 빠져들걸요.ㅎㅎ

순오기 2009-09-26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로거 베스트 특종이던데 내가 리뷰를 차분히 읽지 않아서 축하도 못했어요.^^
새벽 세시도 선물받았지만 아직 안 읽어서 코멘트를 못해요.ㅜㅜ

프레이야 2009-09-28 07:18   좋아요 0 | URL
앗, 몰랐어요. 히힛~
전에 부산서 만났을 때 새벽 세시,얘기 잠시 나왔죠?
언니의 이야기 기억나요.^^

세실 2010-03-27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님이 낭독하신 목소리로 듣고 싶어요. 참으로 촉촉한 느낌일듯!
음 왠지 일곱번째 파도는 늦가을에나 읽어야 할듯 합니다.
새벽 3시의 여운을 오래 간직하고 싶어요.

프레이야 2010-03-27 23:19   좋아요 0 | URL
일곱번째 파도,도 낭독하고 싶어요.
언젠가 할까해요.^^
새벽 세시의 여운은 늦가을까지 이어지겠군요.
그것도 괜찮을 듯해요.^^
 
<빠담 빠담, 파리>를 리뷰해주세요.
빠담 빠담, 파리
양나연 지음 / 시아출판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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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여행에세이를 읽고 나면 뭔가 더 갈증이 나는 경우가 많았다. 생각해보면 내가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막연한 동경, 저자의 과감한 선택과 모험심에 대한 부러움이 그 책을 집어들게 만들었지만 읽고 나면 대리만족을 한 만큼이나 허허로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보고 느끼고 받아들이는 건 주관적인 것이고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과 독특한 정서에 기반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오히려 한번도 그 장소에 가보지 못한 사람으로서 느끼는 이질감을 부추기고 공감대와는 거리가 멀어진다. 그리하여 그 책에 나온 여행지들은 내게 더욱 멀고도 먼 세상이 되는 것이다.  

파리에 대한 여행담을 담은 책은 이미 여럿 있지만, 이 책, 양나연 개그작가의 여행기는 조금 다르다. 그냥 여행객으로서의 이야기가 아니라 여행가이드로서 보내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의 이야기다. 불어는 전혀 못하고 영어도 능통한 수준이 아닌 그녀, 여행을 그리 많이 해본 것도 아니고 가이드라는 일도 해본 적 없고 유럽사나 미술과는 전혀 무관했던 사람, 웃찾사 인기작가로 제법 유명한 그녀가 어느 날 국경을 넘어설 기회를 선택한 건 분명 자기혁명이다. 그녀는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한 후 우선 남미를 택했다. 그중에서도 페루를 선택했다. 모든 건 그녀의 선택에 달려있었고 그녀의 선택으로 시작되었다. 운명을 만들어갔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유롭고 확고하게 선택을 했다는 점이 가장 높이 보였다. 서른을 얼마 앞둔 나이의 활달하고 유머러스한 우리나라 전문직 미혼여성이 선택한 길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서른은 조금 넘겼다.

그녀의 길은 모두 우연에서 시작되었다. 우연을 절호의 기회로 받아들이고 놀라울 정도로 명쾌한 선택을 해나간 그녀가 참 매력적으로 보였다. 우리는 대개 우연인듯 찾아온 기회들은 모두 놓치고 세월이 지나, 그때의 다소 안이했던 사고보다는 운명이 자신을 그냥 지나쳤다는 변명으로 외부요인을 탓하기 일쑤다. 모든 문제는 자신이 열쇠를 쥐고 있다는 걸 이 책을 읽고 새삼 깨닫게 되었다. 양나연 작가는 새로움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부딪혀보겠다는 자신감과 적극성으로 자신을 버리고 온몸으로 도전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무한히 긍정할 수 있는 힘이 가장 부러운 미덕이었다. 

우선 표지부터 참 산뜻한 이 책은 미려한 문장이나 과장된 감상, 자기연민이나 자의식과잉 따위는 전혀 찾을 수 없다. 경쾌하고 수월하게 읽히는 문장은 마치 옆에서 들려오는 수다처럼 재미나다. 개그작가다운 좋은 점이다. 몸으로 부대끼며 터득한 체험담이 아주 진솔하게 읽힌다. 군데군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천연덕스레 상황을 뚫고 나아가는 모습, 자신의 강점을 무엇보다 잘 알고 있고 그것을 긍정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힘도 잃지 않고 있다. 파리여행에 대해 구체적으로 팁이 되는 내용도 많고 파리와 관련한 갖가지 소소한 이야기들도 곁들어있다. 파리를 찾게되면 꼭 가보라고 권하는 덜 알려진 장소와 저자 자신이 주관적으로 마음을 홀리게 된 장소와 특별한 화가에 대한 소개도 흥미있다. 사진도 적절히 소박하게 보기좋다.

'양가이드'가 배운 것은 "무엇보다 먼저 내가 할 일은 손님과 소통하고 그들을 안전하게 모시고, 즐겁게 대하는 방법을 깨우치는 것이었다." (86쪽)였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작품해설을 하는 건 하면 할수록 늘게 되어 있지만, 많은 일행을 리드하며 손님을 안전하게 모시는 마음은 할수록 느는 게 아니라 늘 마음속에 품고 있어야 한다'는 걸 배우게 된다. 여기서도 역시 일보다 지식보다 우선하는 건 '사람'이었다. 사람냄새 물씬 나는 여행가이드!

파리에 있으면서 가이드 연수차 또는 특별보너스로 다녀온 유럽의 몇몇 다른 나라에서의 에피소드도 양념으로 맛있다. 그 중 스페인의 어느 길에서 우연히 보겐 된 장애우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들 선입견과 편견을 한 방 때리는 것이다. 자신이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눈에 보이는 칭찬 하나로 의기양양해진 자신에게 보이지 않는 데서도 진정 최선을 다하는 가이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참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꾸미지 않은 글에 진심이 담겨있었다. 

그래서 결론은? 그녀는 지금 파리의 가이드로 돈도 잘 벌고 잘 살고 있을까? 그녀가 그길을 선택하여 온몸을 던져 최선을 다했듯, 그녀는 지금 또다른 선택을 하여 아주 행복해보인다. 이 리뷰를 보는 분은 그게 무얼지 궁금할 것이다.^^ 그녀더러 친구들이 묻는단다. 

"왜 이렇게 행복해 보여? 

그녀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럼 한 번 떠나 봐. 다 잊고 말야! 어쩌면 그곳에서 네가 원하는 무언가를 찾을 수도 있을 거야. 그게 일이든, 사랑이든, 또 다른 행복이든? (283쪽)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을 때 그 무엇인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막연히 꿈꾸고 있는 파리가 내 마음 속에서 조금은 더 가까워진 것 같다. 그리고 무엇을 원하는지 그걸 찾기 위해서라도 다 잊고 떠나보라고 스스로 권하기엔 뭐 이리 걸리는 게 많은지.. 소소한 떠남부터 조금씩 연습이 필요할까. 아니면 그런 것 필요없이 과감하게 떠나보는 게 맞을까. 어느 쪽이든 쉽지 않으니 이런 책의 저자가 부럽단 말밖에.. 빠담, 빠담~ (Padam, Padam은 사랑에 빠진 사람의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를 뜻하는 프랑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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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9-09-15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체 요즘 아가씨들은 어찌나 이쁜지요. 저렇게 당차고 씩씩하다니.....(아..이런 얘기는 정말 않고 싶어요. 젊은 것들은...하는 나이타령도 지겨워요. 하지만 어쩝니까..그저 부러운데요..)

프레이야 2009-09-15 00:54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말에요. 흐흑.. 저 나이 때 뭘하고 있었나 몰라요.
지금은 어찌나 걸리적거리는 게 많은지.. 싱글일 때 그나마 해볼 수 있는 것들인데,
라고 말하면 그것도 핑계가 되려나요.. 저 책 속에 임산부가 6살 아들 데리고 그러니까
모두 셋이서 파리여행 온 사람도 있더군요.^^ 그나마 애 하나 더 낳으면 움직이기 힘들 것
같아 처음으로 나선 해외여행이라더군요. 부라보!

라로 2009-09-15 0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를 떠나서 정말 다 잊고 한번 떠나봤으면 좋겠어요~. 빠담빠담 파리든,,아님 제주도라도,,,혼자,,,아~ 기회가 한번 있었는데,,,뭐하냐고 시간을 다 보냈는지,,,,에구 아까비..

프레이야 2009-09-15 01:57   좋아요 0 | URL
맞아맞아..혼자 떠나보는 거, 그걸 원하는 거에요.
이제 어디 풀어놔도 못 가는 바보멍충이 ㅋㅋ
제주도라도,라고 하니까 진짜 가고싶어라~

같은하늘 2009-09-18 17:03   좋아요 0 | URL
아~~ 슬프다...
이제 어디 풀어놔도 못 가는 바보멍충이 ㅋㅋ

전 얼마전 너무 화가나서 아빠가 애들 보든 말든 두고 가출을 한 적이 있는데...
허걱~~~ 나갔더니 갈데가 없더라는...
서점가서 책만 열심히 보고 왔다는 슬픈야그...
혼자서 뭘 하라해도 이제 못하는 바보멍충이...ㅜㅜ

프레이야 2009-09-18 19:47   좋아요 0 | URL
우린 동지네요.ㅎ 바보멍충이..ㅎ

순오기 2009-09-17 0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보고 있어요. 아이 셋을 두고 한 달간 취재여행 갔던 그녀가 부러울 뿐.
떠나는 연습이 필요한데 우린 생활 속에서 떠나면 큰일나는 줄 알고 살잖아요.ㅜㅜ
양나연~ 개그작가였군요, 이제는 이런 젊음이 부러울 뿐! 쿵~~~

프레이야 2009-09-17 08:04   좋아요 0 | URL
오기언니, 공지영의 수도원기행, 좋아요?
전 안 읽어봤어요. 예전에 그 책 나왔을 때 공지영작가에 대한 호감이 별로
없었던 터라.. 그런데 지금은 달라졌어요.
떠나는 연습, 전 너무 안 하고 못 하고 살아온 것 같아요. 애가 원래 그래요ㅋ
젊음이 부러울 뿐 2! 철푸덕~

순오기 2009-09-18 00:42   좋아요 0 | URL
수도원 기행에 수도원 이야기는 별로 많지 않아요~ 간단히 소개하고 오히려 공작가의 심경이 너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듯... 난 유럽의 수도원이 궁금했는데 말이죠.ㅜㅜ

꿈꾸는섬 2009-09-17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 크면 아무 생각없이 한번 떠나보려구요. 근데 그때가 언제일까요? ㅎㅎ

프레이야 2009-09-17 21:36   좋아요 0 | URL
꿈섬님, 정말 이러다 언제 떠날지 모르겠어요.ㅎ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 영원히 철들지 않는 남자들의 문화심리학
김정운 지음 / 쌤앤파커스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책제목 때문에 득도 실도 있을 것 같다. 어찌 보면 도발적인 제목에서 잠정구매자의 호기심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내용을 읽어보면 그 제목에서 걸리는 몇 개의 단어들이 오해될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알게된다. 제목에서 기대했던 어떤(?)것과 다르다고 다소 실망했다는 말도 들을 수 있는 책이다. 뭘 기대했는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제목에서, '나는'이라는 단어는 저자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자신의 개인적이고 사사로운 이야기들로 행복론을 풀어간다는 뜻이다. 자신의 이야기가 있어야 삶이 행복하다는 책의 내용과 맞닿는 단어다. '아내'는 세상의 모든 인간관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다할 수 있는 배우자, 그러니까 혈육을 제외한 가장 가까운 인간관계에 놓여있는(또는 놓여있어야하는) 사람을 대표한다. '결혼'은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는 말에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로 사람이 살면서 행해야하는(혹은 행할 수밖에 없는) 어떤 일이나 인생의 중대한 사건을 의미한다. '후회한다'는 인간이라면 느낄 수밖에 없는 자기반성이나 자기반영에 다름아닌 단어가 된다. '나는 남편과의 결혼을 후회한다'라고 제목이 바뀌어도 전하는 메시지는 하등 다를 게 없다는 말이다.

저자는 40대 후반의 남자다. 하지만 그것에 한정되어 이 책의 부제 '영원히 철들지 않는 남자들의 문화심리학'이라는 말에 경도될 필요가 없는 책이다. 이 책은 남자, 여자에 관한 책도 아니고, 남자만 영원히 철들지 않는 것도 아니다. 여자는 더할 수 있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철들지 않을 확률 99.9%다. 이 책은 흔하디 흔한 말, '행복'에 관한 솔직담백하고 본질적인 이야기, 인생을 사는 목적과 그 과정의 중요함에 대한 이야기, 다시 말해 '어떻게 살면 행복할 수 있을까'에 대한 보다 세밀한 이야기가 된다. 틈틈이 문화심리학자다운 전문용어와 철학자의 이름이 나오고 학자다운 서술이 충분히 의미있지만, 전체적으로 아주 쉽고 대중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통해 웃으며 공감할 수 있게 서술해 놓았다. 의도적으로 무게잡지 않는 쪽으로 간다.   

최근 삶이 행복하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사람과 한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고 말하는 사람을 보았다. 극명한 대조였고 놀라운 부분도 있었다. 나로 말하자면, 아주 가끔 행복하지만 대개는 행복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분명 행복하고 싶은데 왜 행복하지 않지?, 라는 어리석은 질문에 이 책이 명쾌한 답이 된다. 사람마다 타고난 성정에도 문제가 있겠지만 한마디로 말해 저자가 내리는 답은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재미는 어디서 어떻게 생기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이 책에 있다.  

부사적인 삶과 맥락을 바꾸는 삶, 즉 유쾌한 마디가 있는 삶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마음에 와닿는다. 독일 유학을 했고 슈베르트를 좋아하고 여자의 풍만한 가슴과 망사스타킹에 흥분하는 배울만큼 배웠고 여리고 섬세한 감성의 저자. 그가 열광하는 문구류, 특히 만년필 중 대나무 만년필이 있다. 대나무의 마디를 물리적으로 또 은유적으로 끌어들여 우리가 느끼는 시간의 속도에 대한 상실감과 삶의 허망함, 도무지 재미가 없는 삶에 대한 이유를 설명한다. 그것은 삶을 즐겁게 하는 '축제'와 '의식'(ritual)의 필요성으로 이어진다. 축제가 없는 삶, 마디가 없는 삶, 리추얼이 없는 삶, 스스로 맥락을 바꾸지 못하는 삶이 행복에 대한 기갈증을 유발해왔는데 자신은 그것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요즘 젊은애들처럼 무슨무슨 날을 억지로라도 만들어 까불어대는 것을 저자는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역시 관점의 차이다. 소실점을 낳은 '원근법'과 '관점'이 같은 단어 perspective로 표기되는 것을 들어, 주관적 관점이 창조하는 삶의 의미와 재미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것과는 상극의 관점이다. 내가 주체적으로 만드는, '즐겁게 반복되는 리추얼'을 통해 감정을 나누는 '정서의 공유'가 없다면 진정한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고 '함께' 행복하기란 어렵다. 저자는 문화도 정서의 공유 의식으로 본다. 하지만 의식을 그리 거창한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하루하루 조촐하고 소소한 의식으로도 함께 행복할 수 있는데 그런 것의 가치를 소홀히 하기 쉽다.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 잊고 사는 것이다. 행복을 만들고 느끼는 일도 일종의 습관이다.

너무 평범하고 뻔한 이야기일 거라 생각드는 책이지만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은 다르다. 쉽게 쓰고 말하는 것이 더 어려울 수 있다. 곳곳에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말들이 많다. 관념적이지 않고 구체적 이야기로 풀어준다는 게 장점이다. 자부심 강한 문화심리학자다운 해석도 곳곳에서 번득인다.  

그가 말하는 행복론을 대표하는 문장으로 이런 게 있다. 행복은 구체적으로 정의되어야 하고 반복설명될 수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좋은 것은 항상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불행하다는 생각이 드는 요인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내면의 억압과 집착, 부자유함, 존재미확인 등이 크다. 억압과 집착을 누르려고만 하기보다(누를수록 커진다) 다른 자극을 받아들여 서서히 작아지게 하는 방법이 현명하다. 부자유는 내가 속한 공간적 자유와 크게 관련된다는 말에도 공감된다. 그래서 차를 마셔도 답답한 실내공간보다는 바람을 마실 수 있는 공원의 벤치를 택하라고 권한다. 공간적 자유의 의미는 떠났다 돌아오는 여행의 리추얼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존재증명은 몸을 괴롭혀 자학적으로 하기보다는 상호작용을 통해 즐겁게 하라고 권한다. 특히 '나'와 '나 아닌 것'을 구분하여 내 안의 항상성을 유지하라는 말도 유용하다. 내가 아닌 것들, 내 밖의 것들에 의해 나의 안을 무너지지 않게 하라. 내 본질을 사랑하라는 말이다. 내 본질은 사회적 위치도 아니고 재산도 아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았지만 명예퇴직한 사람들이 뒤늦게 삶이 후회스럽고 이제부터 재미있게 살고싶다고 때늦은 소리를 하는 것은 사라질 것들에 가치를 두었기 때문이다.   

서술이 일목요연하지 않고 내용이 간혹 중복되는 부분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거슬릴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유쾌한 대중강의를 듣듯 긴장 풀고 읽는다는 마음이면 편하다. 마지막 장은 앞에 했던 이야기들의 최종정리와도 비슷하다. 하지만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은 짧고 강하다. 충분히 의미있고 공감된다. 칸트의 '숭고함'의 철학을 끌어들이고 엄마와 아기의 감정소통방식을 말하며 우리가 삶을 사는 목적을 간단하고도 본질적으로 정의했다. 그것은 식욕과 성욕보다 앞서는 인간의 본능이라고 규정한다. "우리는 **하려 산다."  **은 내 호의의 표현이고 따스한 감정이 소통되며 공유되는 방식이다. 그것으로 인해 내 존재의 증명을 받는 셈이고 타인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술창작의 욕구도 그것을 받고 싶고 하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나로서도 **을 얼마나 하고 사는지 의문이다. 언제 가슴 깊이 우러나는 **을 해보았던지.. 그것은 진심에서 환하게 웃으며 맞장구치는 것과 같은 일인데 그런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앞으로론 **하는 일을 스스로 많이 만들어야할 것 같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 더 행복하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은, 가끔 후회하는 사람(저자)과 가끔 만족하는 사람(저자의 아내)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로 시작하여 자연스레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셈이다. '나의 이야기'가 없고 공허한 '남의 이야기'로 밤을 새며 술을 마시고 알 수 없는 분노와 적개심으로 그 분풀이 대상을 찾고 있는 사람에게 조금의 해답이 될 수 있다. 어떤 게 행복한 삶이고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는 (교과서적으로) 누구나 잘 알 것이다. 그러나 저자 서문에 밝혔듯 "문화심리학적으로 한국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사는 게 재미없는 남자들'이다. 온갖 사회정의를 부르짖는 구호 뒤에 숨겨진 적개심, 분노, 공격성의 실체는 '재미없는 삶에 대한 불안'이다."라는 문장은 또다른 오해의 소지가 약간 있지 않을까.  

아무튼 저자의 말대로, 이래도 후회, 저래도 후회라면, 후회도 현명하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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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27 2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8-28 07: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9-08-28 08:02   좋아요 0 | URL
전설의고향과 예술의전당, 엄마가 뿔났다.. 이 얘기 이 책에도 나와요.ㅎㅎ
아침프로그램에 나오는 걸 전 한번도 못 봤네요.
재미있게 사는 분 같아요.~~
책 속에 직접 찍은 사진들도 몇 들어있는데 좋더군요.

穀雨(곡우) 2009-08-28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행복이 구체적으로 정의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애써 해 본 적이 없네요.
막연함에서 오는 즐거움만 보려 했나 봅니다. 그러니 행복보다는 불행에
더 기울여 질 수 밖에 없었던 것도 같구요. 이 책이 이런 내용인지
이제사 알았네요. 좋은 리뷰 공감하며 추천 꾹~~

프레이야 2009-08-28 18:59   좋아요 0 | URL
구체적 정의, 책에선 하얀침대시트로 얘길 시작하는데 가벼운 듯 유쾌해요.
반복되는 자신만의 의식ritual이 있어야 지속적인 행복이 이뤄질 것 같아요.
추천, 고맙습니다.^^

같은하늘 2009-08-28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말씀처럼 제목 때문에 눈길이 갔던 책입니다.
그런데 인생 행복론에 대해 얘기하는 책이였군요...
삶이 힘들고 지친다고 생각하는 제가 보아야 할 책인데요...^^

프레이야 2009-08-29 09:57   좋아요 0 | URL
제목이 도발적이죠? 하지만 누구나 후회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겠지요.
후회도 현명하게 하자구요! ^^

맥거핀 2009-09-01 0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행복은 구체적으로 정의되어야 하고 반복설명될 수 있어야한다는 것..이 말이 저도 와닿네요. 무라카미 하루키도 수필집에서 비슷한 것을 이야기했던 것 같고 말이죠. '작지만 확실한 행복' 뭐 이렇게 말하면서 말이죠. 저도 간명하고 소소한 행복이 좋아요. 드러누워 좋아하는 영화보면서 맥주 홀짝거리는 것, 뭐 이런 거도 거기에 들어갈까요? 하하. 지금도 프레이야 님의 좋은 글 보는 것도 행복입니다.

프레이야 2009-09-01 09:03   좋아요 0 | URL
9월의 첫날 아침입니다.
'간명하고 소소'하면서 피부로 느끼는 구체적 행복,
그걸 구하기에 가을은 적절한 계절같아요. 바람이 벌써 다르네요.
제 글이 행복을 준다는 말에 덩달아 행복해집니다.
그런데 제 글 중, **로 표기한 두음절의 단어가 무얼까, 아무도 안 물어보시네요.^^

맥거핀 2009-09-02 00:00   좋아요 0 | URL
하하..저는 답을 알 것 같네요.

프레이야 2009-09-02 18:35   좋아요 0 | URL
헉? 대단하십니다.
힌트 드리자면 ㄱ으로 시작합니다. 맞을까요?

맥거핀 2009-09-03 02:02   좋아요 0 | URL
아..제가 생각한 게 아니었나 봅니다.
(역시 괜히 아는 척을 하면 안됩니다.^^;)

프레이야 2009-09-04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잉~ 이주의 마이리뷰 오랜만에 선정되었네요.^^
 
<느림보 마음>을 리뷰해주세요.
느림보 마음 - 시인 문태준 첫 산문집
문태준 지음 / 마음의숲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표지 한 구석에 달팽이가 그려진 이 책을 다 읽고 문태준 시인의 '맨발'을 다시 꺼내 읽었다. 시에서 느꼈던 느림보 마음이 이 수필집에서는 긴 여러편의 산문시 같은 문장에 담긴 것 같았다. 그의 '맨발'로 느림보 마음을 재확인하고 싶었다. 그의 시간은 역시 느리게 흐르고 그의 발걸음은 역시 느리게 내딛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사랑도 느리고 느긋하다. 그래서 더 속깊어 보인다.

   
 

펄과 물 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갔다 /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 문태준 시집 <맨발> 중 '맨발' 일부

 
   

 처음 이 책의 제목을 보는 순간, 느림보 마음은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말처럼 들렸다. 문장을 만나보니 모두 느리고 겸손하고 부드럽고 여유롭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조금은 답답하고 행간이 넓은데도 문장이 빨리 지나가지 않았다. 마음에 여유가 없으면, 이렇게 무사태평한 문장이란, 도저히 읽히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처음엔 들었다. 공교롭게도도 내 마음이 전혀 느리게 가지 못할 때였다. 근래 내가 들은 가장 충격적인(?) 말은 '여유가 없어서'라는 상냥한 힐난이었다. 상냥함을 조심스레 가장했지만 그 뜻을 모를 리 없다. 내 성정이 원래 여유가 없고 조급하고 다혈질이다. 보기보다 그렇다. 내가 여유 없는 사람으로 보였다는 건 어찌보면 내가 가장을 할 줄 모른다는 말도 된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해 초중반까지 좋은 글귀들이 마음에 깊이 들어오지 못하고 겉돌았다. 문장이 가슴에 와닿지 않으니 무겁지 않게 넘길 수 있는 이 책이 오히려 힘겨웠다. 나로선 마음이 복잡할 땐 오히려 지식습득용의 책이 낫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이 책이 조금 힘들었던 건 순전히 내 거친 마음밭에 탓을 해야한다. 그러니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쓰자면 내 반성(?)이 어쩔 수 없이 나와야될 것 같다.   

조금은 인내심을 가지고 다시 읽어나갔다. 단어 하나하나 어렵거나 치장한 것이 없다. 말을 에둘러 고상해 보이려는 흔적도 없다. 미풍을 마시며 시골길을 유유히 걷듯 한가롭고 느긋한 풍경을 자아낸다. 풍경! 이 책을 가장 잘 말해주는 단어같다. 시인은 책의 마지막 장에 "나의 기도는 풍경을 떠올려 그 풍경이 내 마음속에 살게끔 하는 것입니다....... 오늘 나는 당신이 기도를 올리고 있는 풍경을 떠올리는 것으로써 나의 마지막 기도를 올립니다." 라고 적고 있다. 평생 농부로 살아오신 아버지와 순박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비롯해 유년의 가난하고 소박한 기억들, 지금의 가족에 대한 웃음띈 이야기, 스쳐지나가는 마음의 풍경과 소소한 일상의 풍경들까지, 어느 것에도 진심과 애정이 조촐하니 담겨있다. 형식을 따져 읽을 것도 없고 그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저자의 생각과 느낌을 따라 쉬엄쉬엄 읽으면 된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위로 받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내 황폐해진 마음이 조금은 부드러워지는 것 같기도 하고 내 모난 성정이 조금은 깎여나가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책 한 권 읽었다고 당장 그리 될 리 없지만 상당한 위로와 은근한 충고가 된다. 잔소리나 힐책이 아닌 애정어린 충고, 예전에 말수 적으신 외할머니가 작고 낮은 목소리로 한 마디 할 듯 말 듯 건네주시던 그런 말씀처럼, 순하고 평화롭다. 요즘 시대에 이런 종류의 문장을 만나는 일은, 좀 과장된 표현이겠지만, 몇 십 년 전의 글인가 싶을 정도로 예스럽고 촌스럽다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험악하고 뾰족한 말들이 넘치는 세상에 무공해 언어의 느린 산문시(같은 에세이)가 주는 느낌이 특별하다.   

느린 마음, 느린 열매, 느린 닿음, 느린 걸음. 이렇게 4개의 장으로 나눠 실었지만 굳이 구분하지 않아도 좋을 듯하다. 사계절에 대한 생각을 비롯해 자연의 크고 작은 존재들에 대한 깊고 따뜻한 인식, 일상의 작고 하찮은 물건에 대한 소중한 느낌도 사람에 대한 애틋한 감정 못지 않게 작은 감동을 준다. 느린 마음을 위해서는 마음구석을 비워두고 깊은 강으로 나아가라 한다. '빈그릇에 담긴 물'이 되라 한다. 물은커녕 불같은 내가 그때그때 대응하려고 바둥거렸던 일들을 돌아보게 하는 글귀는 이런 것이다.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껴 있는 시간입니다. 비껴 있는다 함은 한 발짝 물러선다는 뜻입니다. 물러선다 함은 뒤를 만들어 뒤를 본다는 뜻입니다. 말과 생각과 행동의 뒤를 살핀다는 뜻입니다.(96쪽)  내 말과 생각과 행동의 뒤를 살펴서 언행을 일삼는다는 것, 그것은 좋은 일앞에서는 물론 화가 나는 그 순간의 시간을 살짝 비껴서 있으라는 뜻이기도 하다. 무수히 늘어놓은 독설과 소금 뒤집어쓴 미꾸라지처럼 군 내 성정을 감수해준 가까운 사람들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느낀다. 

그의 문장은 그저 감상적이거나 연약한 말놀이를 하고 있지 않다. 유연함 속에 강건함을 지키며 그것을 탄탄한 문장으로 보여준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더위를 못견뎌한다. 친정엄마도 그랬다. 아마도 40 고개를 넘으면서부터가 아니었나싶다. 생의 무더위를 견뎌내고 가을과 겨울을 맞는 사람들에게 계절로서의 여름은 하나의 은유이기도 하다. 가령 이런 문장은 폭염같은 생을 얼마나 굳건하게 나아가라 전하고 있는가. - 여름은 모든 풀과 나무를 무성하게 자라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일념에 대해 말합니다. 한결같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용기백배한다는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자신을 무릎으로 삼는 일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220쪽)  여름은 그리하여 무너진 자를 일으켜세웁니다. 절망의 못에서 우리의 삶을 건져올립니다. 여름은 처음도 끝도 없습니다. 중간만 있습니다. 진행되는 시간만 있습니다. 여름날의 저 들찔레처럼. (221쪽)  

수수하고 정감어린 문장을 읽어가다가 깨끗한 우리말을 자주 만나게 되는 것도 이 책의 장점이다. 예를 들어,  

1. 그 풍경은 너무나 장엄해서 넷 에움이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습니다. (153쪽)  

2. 내가 어물전에서 일하는 분과 대화를 하면 아이는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곁말을 겁니다.(161쪽) 

3. 살면서 입말을 주고받다 어느덧 정이 들기도 하지만, 몸과 몸이 만나는 때에도 덧정이 생겨납니다. 요즘은 가족과 함께 대중목욕탕에 가는 시간이 덧정이 생기는 시간입니다. (225쪽)  

 

지금의 내가 제일 마음에 품어야할 문장은 나이듦에 대한 생각이다. 

   
 

나이가 들어 산다는 것은 마음속에 오름 하나씩을 품고 산다는 것은 아닐는지요. 부드럽게 올라가고 내려오는 오름의 능선을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오름처럼 유순하다는 그 말의 의미를. 오름처럼 완만한 말, 오름처럼 서두르지 않는 심성과 생각의 품 말이지요. (244쪽)

 
   

 

이 책에 실린 모든 문장이 바로 저자가 말한 '오름처럼 완만한 말'이다. 가끔 마음이 복닥댈 때면 아무 쪽이나 펼쳐 읽어도 좋을 문장들이다. 오르다 다리 아프면 중간에 퍼질러앉아 쉬어도 좋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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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09-08-22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책을 읽은 소감이 제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기뻐요. 그가 골라 쓴 고운 언어들을 저는 활용을 잘 못하지만 많이 배워요.

프레이야 2009-08-22 23:31   좋아요 0 | URL
반딧불이님 서평으로 처음 이 책을 알게 되어 담아두었는데 서평단도서로
왔지 뭐에요. 기뻤지요.^^ 요즘 제 마음이 사막이 되어 문시인의 고운 언어밭을
좀 캐고캐야겠어요.

순오기 2009-08-23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이 복닥댈 때면 아무 쪽이나 펼쳐 읽어도 좋을~ 오르다 다리 아프면 중간에 퍼질러앉아 쉬어도 좋은'
님의 리뷰도 충분히 한 편의 에세이로 읽혀요. 이주의 마이리뷰, 혹은 블로거 특종으로 뽑힐 것 같은데요.^^

프레이야 2009-08-23 22:21   좋아요 0 | URL
하이고~ 오기언니^^
늘 좋게 읽어주시고 공감해주시니 고마워요.

꿈꾸는섬 2009-08-23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은데요.^^

프레이야 2009-08-23 23:48   좋아요 0 | URL
네, 마음이 편안해지고 순해지는 문장들이에요.^^

맥거핀 2009-08-25 0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같은 사람에게도 필요한 책이군요. 그런 책을 읽음으로써, 뭔가 바뀔 수 있으면 좋겠는데..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 와중에서도 이 리뷰도 다다다다 읽고 있군요. 아..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프레이야 2009-08-25 07:53   좋아요 0 | URL
다다다다... ㅎㅎ
사람이 행복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이런 성정도 좀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같은 경우에요.^^
조급하면 지는 건데 말입니다.
 
<노서아 가비>를 리뷰해주세요.
노서아 가비 - 사랑보다 지독하다
김탁환 지음 / 살림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이 소설은 고종독살음모사건과 관련해 실제 김홍륙의 에피소드를 모티프로 했다. 김탁환의 '리심'에 러시아 역관 김홍륙과 고종의 대화가 나온다. 조선 제1호 커피애호가였다는 고종에게 러시아 초대 공사 베베르의 처형, 독일여성 손택Sontag(안토니예프 존타크)이 러시아 커피를 가져오는 대목이다. 거기 묘사된 러시아 커피는 '텁텁하고 씁쓸한 맛이 강하고, 깔끔하지 못하고 군데군데 잡스러운 냄새들이 섞여있'다.  

나는 러시아 커피를 마셔본 경험이 없어 모르겠으나 작가는 실제로 마셔보고 묘사한 것인지.. 아마 그렇겠지. '노서아 가비'에서 러시아 커피는 '리심'에서의 묘사와는 달리, 쓰고 강하지만 부드럽기도 한, 매혹적인 검은 액체다. 뻬제르부르그 사람들은 특별히 '사상보다도 예술보다도 돈보다도 사랑보다도 더 지독한 액체'라고 주장한다고(14쪽). 책표지는 내가 좋아하는 커피색 바탕이다. 표지의 카피는 노서아 가비가 '사랑보다 지독하다'고 씌어있다. 정말?^^

목차가 우선 재미있다.  커피는... 으로 시작해서 커피에 대한 13개의 정의를 내려 두었다. 통속적으로 들리지만 그리 동의되지 않는 것도 아닌 것이 적당히 눈길을 끈다. 그 정의들은 이야기의 내용과 대체로 관련이 있다. 내 리뷰 제목은 그 중 하나를 따왔다. 각 꼭지 앞에 다양한 커피도구와 커피종류를 그림으로 그려놓았다. 이런 도구들, 그림으로 봐도 은근히 멋있다. 이야기는 상당히 속도감 있게 전개된다. 세밀한 풍경묘사나 외모, 심리묘사, 상황설명은 접어두고 말을 타고 달리듯 넓은 공간적 배경을 거침없이 단문으로 내달린다. 따옴표도 과감히 생략하고 인물간의 대화도 빠르고 단호하게 이어간다. 

비극적인 시대 구한말 조선 역관의 외동딸, 그녀는 살가웠던 아버지를 여의고 어떤 일이 있어도 조롱鳥籠속에 갇혀 살진 않을 거라고 다짐한다. 아버지에게 전수받은 몇가지 재능과 삶의 기술을 밑천으로 러시아 이름 따냐로 다시 태어난 주인공. 영화로 이미 제작되고 있다는 후문을 듣고 보니 이 여인으로 어울릴만한 배우가 누굴까, 생각해보게 된다. 상당히 매력적이고 입체적인 성격이다. 게다가 광활한 러시아 숲을 유럽 귀족들에게 판 돈과 조선의 은행돈까지도 수중에 쥐는 사기꾼 중의 사기꾼이 아닌가. 강인하면서도 섬세하고 예리한 판단력의 소유자로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매혹적인 분위기가 연출되어야할 것 같은데. 뱃심 두둑하면서도 내면엔 외로움을 간직한, 그러나 결코 차갑지 않다고 말할 수 없는 분위기. 바리스타는 물론 몇개 외국어, 말타기, 무술 외에도 사람을 부드럽게 압도하는 대화술을 가진 희대의 사기꾼으로 탄생되어야 할 것 같은데. ^^    

커피와 담배의 나날로 '감히 인생을 요약해버리는 여자의 속삭임'. 이렇게 커피의 정의가 시작되고 이야기는 과거로 직진한다. 따냐가 미국에서 1898년 대한제국의 황제가 된 고종의 편지를 읽으며 과거를 회상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수미상관을 이룬다. 자칭 스토리 디자이너답다. 뉴욕에서 문학카페를 하는 그녀는 팩션으로 탄생한 통쾌경쾌한 사기극의 주인공이다. 나라가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 그들, 따냐와 이반(두사람 모두 조선이름이 중요하진 않다)에게 인생은 배반과 음모, 협잡의 세계다. 이런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사기꾼의 철칙을 지키는 게 우선! 무엇보다 이익을 좇을 것, 쓸모가 없는 것은 사람이든 물건이든 가차없이 버릴 것,  진실해서도 정직해서도 안 되고 일이 끝나면 같은 곳에 머물러 있지 않을 것. 사랑의 감정에 잠시 흔들리던 따냐가 사태를 파악하면서부터 사건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영화화 된다면 따냐의 사기꾼 애인 이반 역할로 누가 좋을까. 사기꾼다운 그럴싸한 말솜씨와 사람으로부터 동정심과 신뢰감을 얻기 쉬운 인상과 진지한 태도를 겸비한, 준수하나 마른 체형의 남자로. 

상상의 여지를 두루 남겨둔 인물들을 상상해보는 것 이상으로 이 책을 읽고 떠올릴 수 있는 건, 누구나 갖고 있음직한 커피에 대한 소소한 추억이다. 뜨겁거나 미적지근하거나.. 마지막 장의 제목처럼 커피가 '끝나지 않는 당신의 이야기'라면 커피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나로서도 커피의 추억을 잊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일 테다.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마시느냐에 따라 커피의 맛은 다르다. 내 몸과 마음의 반응도 다르다. 커피는 대화의 중개자로, 어색함의 해결사로 역할하는 경우가 많지만, 나에게 최고의 커피는 혼자 멍하니 마시는 커피다. 아침마다 부드러운 밀크거품을 내어 카페라떼를 만들어 마시고, 작가처럼 나도 길을 가다 커피향기가 나는 곳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들어가 카페라떼를 주문한다. 달리기 한 시간으로 소모되는 칼로리를 마시는 것이라지만 하루 두세 번은 마시니 그 칼로리가 어디로 다 가지...  

그래도 부드러운 거품이 입술에 살짝 묻는 그 커피가 제일 부담없다. 진한 풍미를 원할 땐 가끔 원두를 갈아 드립해서 마시는데 코와 입으로 들이키는 맛이 집안에 번지는 향과 함께 일품이다. 자신이 만든 커피가 세상에서 제일 맛나다고 뻐길 수 있으면 행복한 게 아닌가. 하지만 나도 자판기 커피나 커피믹스의 유혹에 약하긴 마찬가지다. 그건 마시고 나면 후회되는 때가 많다. 값싼 언어를 소모하고 났을 때 기진맥진 허무로 다가오는 자기혐오 비슷한 것. 그래도 진한 욕설을 싸구려처럼 퍼부었을 때 같은 쾌감은 있다. 그건 종이컵으로 마셔줘야 제맛이다. 가벼운 일회성, 값 이상의 따뜻함, 진하고 솔직하게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 위장에서 부글거리는 느낌!

영화 '블룸형제 사기단'에서 고아 상속녀인 그녀 레이첼 와이즈의 대사가 문득 떠오른다. 속임 당하지 않으려면 스스로 속여라... 지랄같은 세상, 자기혐오에 속임 당하지 않으려면 자신의 외롭고 어려운 처지를 객관화하고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 속여서라도 행복을 가꾸고 지키란 뜻이다. 물론 긍정적인 쪽, 생을 긍정적으로 밝게 사는 비법이었다. 그리고 완벽한 사기란 모두가 좋은 쪽으로 되는 것이라 했다. 그러나 어떤 식의 대가는 반드시 지불되고, 누군가의 희생도 따르는 법.

<노서아 가비>는 암울한 시대의 물결에 빠져 허우적대지 않고 인물들 사이의 간격을 유지하며, 가볍고 신나게 읽힌다. 행간에 상상력을 부여하면서 읽으면 즐거움이 배가될 것 같다. 자료를 두루 찾고 상상력을 발휘한 흔적이 많지만 치밀한 심리묘사는 고의로 생략한 듯하고 쿨하게 내닫는다. 고종의 아관파천 시절 임금에 대한 공격이 이반의 입을 빌어 신랄하다. 그나저나 러시아어를 모르긴 하지만 뿌쉬킨의 시를 러시아어로 낭독하면 어떻게 들릴까. 아름다울 것 같다.

13가지 정의 외에 내가 하나를 덧붙인다면, 커피는 집착이고 중독이다. 그러니 사랑보다 지독하다는 말은 맞는 게 되나? 작가는 따냐의 맘을 빌어, 집착은 곧 파멸이라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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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9-08-12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커피는 집착이고 중독이죠. 요즘 커피가 대세인건가요? 부쩍 커피에 관한 책들 이야기가 많아집니다. 다 예전에 그 커피프린스 1호점 때문일까요? ^^

프레이야 2009-08-12 01:34   좋아요 0 | URL
커피, 일상적인 기호품이 되었지만 좀더 멋지게 마시는 방법은
정말 좋은 사람과 마시든지, 그렇지않은 다음엔
혼자, 지극히 혼자가 되어 마시는 커피가 최고일 것 같아요.
커피프린스1호점, 그런 가게 해보고 싶던걸요.^^

바람돌이 2009-08-12 01:35   좋아요 0 | URL
그래서 카페나 해볼까 하고 뛰어들었다가 다들 망한답니다. ㅎㅎ

프레이야 2009-08-12 01:38   좋아요 0 | URL
우헷~ 그러니까 말에요.
커피는 결국 파멸이라니까요 ㅎㅎ

후애(厚愛) 2009-08-12 0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언니는 아침에 형부 출근하고, 아이들 학교가고 없을 때 베란다에 서서 향기로운 커피를 마시는 게 최고로 행복하다고 하네요. ㅎㅎㅎ 그런데 요즘은 아이들 방학이고 형부가 집에 있어서 커피 마시는 행복을 못 느끼고 있다고 투정부리는 언니에요. ㅋㅋㅋ 전 커피를 마시고 싶은데요. 편두통 때문에 못 마시고 있어요. ㅠㅠ

프레이야 2009-08-12 09:55   좋아요 0 | URL
아아~ 저랑 아주 비슷해요.
아침 나절 조용한 때 혼자 음미하는 커피^^
커피가 편두통에 안 좋은가 보네요.ㅠㅠ

穀雨(곡우) 2009-08-12 0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에 묻은 커피맛이 에스프레소처럼 깊고 진하네요.
커피 좋아라하는 사람은 대개 다 비슷한 모양입니다.
맛에 취하고 분위기에 취하고 향기에 취하니...
멋진 리뷰, 인상적입니다.
그리고 반갑습니다. 자주 들르도록 하겠습니다.

프레이야 2009-08-12 09:56   좋아요 0 | URL
곡우님 반갑습니다. 읽어주셔서 고맙구요.
에스프레소 좋아하시나 봐요.^^

카스피 2009-08-12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서아 가비라 책 제목이 재미있네요.근데 노서아는 알겠는데 가비는 무슨 뜻일까요?

프레이야 2009-08-12 09:57   좋아요 0 | URL
가비는 '커피'요^^
어젯밤 비가 많이 내리더니 아침엔 그치고 하늘이 좀 흐려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참, 모닝커피는 하셨어요?

stella.K 2009-08-12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으셨군요.
그렇다면 일전에 저랑 나눴던 의문을 푸셨겠군요.ㅎㅎ
근데 별점을 보니 그다지 프레이야님 마음엔 쏙 들지는 못했나 봅니다.
저는 나름 좋았는데. 하긴 이 책도 호불호가 좀 나눠지는 것 같더라구요.^^

프레이야 2009-08-12 10:46   좋아요 0 | URL
네네 알게되었지요. 근데 카페라떼가 칼로리가 높다는 건 그전에도 알고 있었어요.
전 다른 이유가 있는 줄 알았지요.ㅎㅎ
전 하루에 2-3잔 카페라떼 마시고 커피믹스도 종종 마셔요.
별셋은.. 술술 잘 읽혔고 재미도 있었는데 좀 미진하단 느낌이 들었어요.
작가의 개성으로 보면 무리없이 좋구요.^^

반딧불이 2009-08-12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도 추적추적 내리고 커피 생각이 간절한 날인데...프레이야님의 리뷰까지 그야말로 뽐뿌질을 하는군요. 두드러기야 나든 말든 일단 한잔 마셔야겠습니다.(마시고 두드러기 창궐하면 프레이야님 덕분임다~)

프레이야 2009-08-12 22:43   좋아요 0 | URL
앗, 두드러기요? 커피 알러지 같은 게 있나요?
우야튼 창궐하지 않아야할텐데요 ㅎㅎ

비로그인 2009-08-12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게 커피는 지나간 옛사랑에의 그리움이려나요?
한때는 아침에 커피 한잔 못마시면 어떻게 사나..하던 때가 있었는데 위가 나쁜고로 이제는 점심 먹고 나서 까페 라떼 믹스 반개에 허쉬쵸콜렛 한 알이 다네요. (지금 마시는 중이랍니다)



프레이야 2009-08-12 22:45   좋아요 0 | URL
저도 위가 징후를 보이면 하루정도 끊었다가 다음날 또에요.
점심시간 마시는 커피군요. 초콜릿으로 카페인 보충? ㅎㅎ

무스탕 2009-08-12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김탁환의 글은 처음 읽었는데 과연 술술 읽히는구나.. 생각은 들더군요. 그리고 전작들도 이런 스타일인가 궁금도 하고요.
전 이반이 젤 궁금했어요. 도대체 이 남정네의 몇%가 진실일까.. 싶은게요.

프레이야 2009-08-12 22:48   좋아요 0 | URL
이반, 영화로 태어나면 꽤 매력남일 것 같지 않던가요?
살아남은 따냐보다 비극적이기도 한 인물이니까 더 연민이 가는 남자 같다고 할까요^^
진실은 글쎄요.. 전 1%정도이지 않았을까 싶어요.ㅎㅎ

맥거핀 2009-08-13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탁환 작가는 다른 건 잘 모르겠고..참 재미있게 써요.
(몇 개 읽다보면 패턴이 매번 비슷해서 살짝 질리기도 하지만요.)
러시아 커피..어떤 맛일지 궁금하네요. (커피를 안 마시는 1人..;)

프레이야 2009-08-13 09:59   좋아요 0 | URL
네, 이이기꾼답더군요.^^
근데 그 좋은 커피를 안 마시는군요.ㅠㅠ

같은하늘 2009-08-14 0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탁환 작가님이 책을 재미나게 쓰신다니 급 관심이 가긴하는데...
저도 커피를 안 마시는지라 커피에 열광하시는 분들의 마음을 잘 몰라요...^^

프레이야 2009-08-14 07:42   좋아요 0 | URL
네, 재미있게 읽혀요.^^
같은하늘님도 커피를 안 마시는군요. 이게 중독성이라..ㅠ

순오기 2009-08-15 0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실을 안 다녀서 댓글이 늦었어요~~ 이 책 궁금해요. 언젠가는 보겠지만...^^
커피 끊은지 1년 반쯤~ 집에서는 안 마시고 나가서 마실 기회되면 마시는 정도니까 완전 끊었다곤 말 못해요.ㅋㅋ

프레이야 2009-08-15 13:14   좋아요 0 | URL
이 책, 재미있게 읽혀요. 좀 아쉬운 점도 있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