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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번째 파도
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 김라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9월
평점 :
'일곱번째 파도'를 얘기하려면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를 먼저 말해야 할 것 같다. 그 책을 처음 알게 된 건 큰딸아이가 읽고 싶다고 책을 사달라고 해서였다. 어디서 정보를 얻었는지, 그 책을 사달라고 했고 손에 알맞게 잡히는 하드커버에 산뜻한 표지부터 맘에 든다며 아이가 먼저 읽었다. 난 책장을 휘리릭 넘기며 그저 가볍고 말랑말랑한 연애담 같은 정도이겠거니 하고 읽지 않고 있었다. 참 좋더라는 말은 아이한테 먼저 들었다. (얘가얘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성숙한 건가.) 공식홍보대사(^^) 다락방님에게도 익히 강추받은 책이다. 그 후 낭독녹음 봉사를 하고 있는 점자도서관 책꽂이에서 그 책을 우연히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얼른 집어들었다. 다소 무거운 책을 녹음한 후엔 조금 가벼운 책, 술술 잘 넘어가는, 편안한 대사가 있는 소설 같은 게 읽고 싶은데, 마침 내 눈에 띈 것이 이 책이었다. 역시 타이밍이 중요한가 보다.
두 사람이 주고 받는 이메일 언어, 구어체의 글이면서 문어체의 묘한 깍듯함이 섞인 문장들을 읽으며 나는 점점 어디론가 빠져들어갔다. 어디에 빠져들었냐하면, 음,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소리, 어디론가 달려나가고픈 해거름 잿빛 공기, 가늘게 흔들리는 잎새들의 몸부림 같은 것, 도무지 시작도 끝도 알 수 없이 휘말려오는 그 비슷한 감정이란 것으로. 그리고 주체할 수 없이 점점 타들어가는 언어의 목마름, 나아가 고갈상태 같은 것이 마음속에 자리했다. 표현할수록 부족하고 말할수록 어긋나고 그러다 어느 순간엔 데칼코마니처럼 마주 접으면 딱 맞아떨어지는 어떤 것, 그게 말이고 글이고 그것으로 표현되어 서로 나누는 감정이더라. 할퀴기도 하고 보듬기도 하고 갈증에 애를 태우는 언어들 뒤에서 내가 에미가 되었다가 레오가 되었다가, 그녀가 되었다가 그가 되었다가, 목소리톤을 번갈아 조금씩 바꿔가며 읽어나갔다. 참 좋았다. 좀 간지러운(?) 대사들도 있었고 아릿하게 가슴을 적시고 울리는 대사들도 있었다. 달콤하거나 씁쓸하거나 날카롭거나 다정한 말 아니 글이 감정을 들었다놓았다 하며 자신을 드러내거나 감추며 상대를 탐닉하고 있었다. 조사 하나, 단어 하나, 괄호 하나, 점 하나, 말줄임표 하나, 느낌표 하나에도 그들의 다 드러내지 못하는 감정이 실려있었다. 망설임, 주저함, 다가감, 그리움, 시기, 질투, 과감함... 얼굴을 마주보며 말하는 모습을 눈으로 담고 목소리를 귀로 담는 것보다 모니터를 사이에 둔 그들의 말 아니 글은 더욱 예민하고 섬세하고 그래서 더욱 위험하고 예리했다.
그들의 언어를 따라가며 점점 그들의 '감정'에 빠져들어갔다. 나는 그들이 되어 때로는 애틋하게 때로는 질투심에 불타 때로는 간절하게 서로를 그리워했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이었다. 에미의 12년 된 내부 세계 동반자 베른하르트가 말하듯 실체가 없는 환상, 뼈와 살이 있고 흠이 많은 실체가 아닌, 글자 뒤에 숨어있는 환상이었기 때문에, 모든 건 완벽해 보였다. 감정은, 사랑은, 미움은 과연 어디서 생겨날까. 말,말,말. 글,글,글. 허망하기 짝이 없는 - 그걸 알면서도 매달리게 되는 - 그것들로 짓는 사상누각에 그들의 감정이 실리고 눈을 뜨면 한 순간 날아가버릴 수 있는 한 줌 바람같은 그것에 감정은 점차 더 고조되고 때로는 추락하고, 막연했던 것들이 소소해지고 구체화 되었다. 처음엔 잘 알지 못했고 예견할 수도 없었던 그들의 감정은 점점 색을 입고 향을 더하고 미세한 결을 갖추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좀 더 용감한 건 에미였다. 그녀에게 불어오는 북풍은 도저히 감당해내기 어려운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새벽 세시'의 결말은 참 허탈했다. 두고두고 회자될 기막힌 결말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이었다. 그 속편이라 할 수 있는 '일곱번째 파도'의 결말은 대체로 흡족하다. 현실에서 그럴 수 있다고 보기엔 설레고 두려운, 그래서 비현실적이다. 나는 이 결말을 환상이라 말해야겠다. 이 책 '일곱번째 파도'의 결말에 대해 궁금증이 있었고 그만큼 두근거리며 아껴 읽었다. 그래서 나는 간단히 말하자면,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환상을 심어주다니, 작가가 살짝 얄밉다. 전편의 설렘이 사라지는 느낌이다. 일곱번째 파도는 어차피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 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일곱번째 파도 같은 걸 꿈꾼다. 실재하지 않는 것이기에 '조용한 외부세계'에 대한 '꿈'을 꾼다 . 잔잔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여섯번의 파도 다음에 일어날 일곱번째 파도는 허망한 '감정'안에서만 일어나는, 비실재적이라 잔인한 파도가 아닌지. '이성'은 끊임없이 그 파도를 밀어내고 있는 것이다. 레오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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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번째 파도는 조심해야 해요. 일곱번째 파도는 예측할 수 없어요. 오랫동안 눈에 띄지 않게 단조로운 도움닫기를 함께 하면서 앞선 파도들에 자신을 맞추지요. 하지만 때로는 갑자기 밀려오기도 해요. 일곱번째 파도는 거리낌 없이, 천진하게, 반란을 일으키듯, 모든 것을 씻어내고 새로 만들어 놓아요. 일곱번째 파도 사전에 '예전'이란 없어요. '지금'만 있을 뿐. 그리고 그뒤에는 모든 게 달라져요. 더 좋아질까요, 나빠질까요? 그건 그 파도에 휩쓸리는 사람, 그 파도에 온전히 몸을 맡길 용기를 가진 사람만이 판단할 수 있겠지요.(2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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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권의 책, 모두 상당한 매력을 풍긴다. 사랑(이란 감정)은 어디에서 오는가, 사랑(이란 감정)은 어떻게 진행되는가,를 묻고 싶다면 이 두 권의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언어! 사랑은 그리고 어떠한 감정은 언어에서 오고 언어는 그것을 더욱 공고히 한다. 언어로 환상의 집을 짓고 또 허물기도 하며 언어로 우리의 감정은 고조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언어란 것, 듣지 말 것을, 보지 말 것을, 읽지 말 것을. 이 두 권의 책은 언어로 유발되는 우리의 모든 감정을 지독하고 집요하게 파고 들어가, 결국 그 모든 감정이 마음을 흔들고 현실을 흔들고 운명을 흔들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아무렇지 않게 쓰는 언어습관에서 고개를 쳐드는 내면의 억눌린 감정과 꿈틀대는 욕망을 읽을 수 있을 정도라면, 너무한가. 아니다. 책속의 레오처럼 이메일 언어를 연구하는 언어심리학자가 아니어도 글 이면의 글, 말 이면의 말을 살필 일이다.
레오는 '사실은 당신이 그립다'는 말을 하기 위해 '파피용'이 기다린 일곱번째 파도, 그 탈출의 의미를 말한다. 에미는 '보고싶다, 잘 지내고 있기 바란다'는 말을 하기 위해 '당신이 잘 지낸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요.'라고 쓴다. 이들의 언어를 곱씹고 더듬어보는 재미, 언어의 묘미를 잘근잘근 씹어보는 재미, 그들의 연애 감정에 공감하며 그걸 바라보고 느끼고 다루는 과정에 집중해보는 재미를 느끼다, 문득 이 책,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편에서 에미는 '결혼은 모순형용'이라고 말한다. 평화는 잠재된 전쟁을, 안락함은 지루함을, 책임과 의무는 은밀히 욕망하는 무책임과 방종을 동시에 품고 있는 말이 아닌가. 후편에서도 에미는 결혼이라는 가장 이성적이어야 하는 잔잔한 파도에 대해 설핏 냉소적으로 말한다. 일곱번째 파도를 기다리며 하염없이 앉아있기만 하는 자신의 모습에 파격을 가하는 에미, 그녀는 충분히 사랑스럽고 영리하지만 슬프게도 정말 비현실적이지 않은가. (그 결단에 일면 박수 보내고 싶다는 말을 이렇게 쓰고 있는 거다.) 여전히 그녀에게 새벽 세시면 북풍이 불어들고 추워서 잠 못 이루며 창가에 발끝을 두고 거꾸로 눕는 에미를 상상해본다. 그런 에미가 오히려 현실적인 것 같다. 과연 에미, 조용한 외부세계의 마력을 떨칠 수 있을까.
사랑은, 연애는, 관계는 그리고 삶은 지독하다. 사랑하지 않으면 상처 받을 일도 없고 가슴 아파할 일도 없다. 사랑하지 않으면 질투할 일도 없고 증오로 잠못 이룰 일도 없다. 더 많이 사랑하는 자가 더 많이 괴로울 수밖에 없다. 관계맺기에 서툴고 늘 어눌한 사람이지만 삶과 연애하는 것 같다는 상찬을 들은 적이 있다. 그만큼 삶을 아끼고 사랑하고 가꾼다는 의미일테다. 과분한 칭찬이라 내겐 감사한 말이다. 하지만 삶이 삶이라서 상처를 주듯 가장 사랑하는 대상이 상처도 제일 많이 크게 줄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을 알지만 삶을 견디며 살아가야하듯 사랑(이란 감정)도 피할 수 없는 것, 견디며 보듬어야하는 것이다.
작가는 희망을 주고 싶었던 것일까. 희망처럼 절망적인 게 없는 건데... 그래도 희망이란 말은 희망적인가. 언어로 쌓은 헛된 집 - 그것을 감정이라 부른다면 - 이 결국 그리 헛된 것만은 아니란 걸 '일곱번째 파도'의 결말이 말해준다. 우리는 무엇 하나도 헛되이 쌓고 있지 않다는 걸 긍정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그 결말은 완전한 사랑은 언어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도 말한다. 완전한 사랑은 정신과 육체의 하모니다. 어느 한 쪽이 기우는 건 장애다. 하지만 사랑은, 사랑이라는 감정은 수많은 오해와 질투, 상처를 딛고 결국 살아남을 것이다. 이해하고 양보하고 또 (레오에게 에미가 그런 존재인 것처럼) '내 손바닥에 간직한 점'처럼 나의 일부로 동반의 길을 가야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라면 혹여 일곱번째 파도를 맞는다 해도 새벽 세시면 여전히 북풍이 불어 들어올 것 같다. 에미도 여전히 그러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