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젊은 날의 숲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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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자서전은 거울과 같아서 나는 항상 자서전을 통해서 내 모습을 본다. 또한 지나가는 사람을 거울을 통해서 본다. 그들이 내 관점에서 나를 선전하고 나를 우쭐하게 하고 나를 치켜세우는 말이나 행동을 할 때마다 자서전에 싣는다. - 

위 인용글은, 인생의 순간적인 일을 60만 단어 이상으로 확장하는 게 자서전 쓰기의 목표라고 말했던 마크 트웨인이 자신의 자서전쓰기에 대해 서술한 글이다. 유쾌하고 자신만만한 그는 뻔뻔하리만큼 즐거운 글쓰기를 하고 있다. 트웨인의 이 글귀가 떠오른 건 <내 젊은 날의 숲>과 같은 방식의 자서전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나'의 이야기를 주변인물의 이야기로 우회하여 하는 방식을 말한다.

김훈의 신작 <내 젊은 날의 숲>은 주인공인 조연주라는 미혼여성의 자서전(어느 날 그녀가 그걸 쓴다면) 안에 들어갈 한 꼭지가 될 수 있는  글이다. 어쩌면 작가가 性을 바꾸어 화자가 되어 있는 연주는 자서전을 쓰되 트웨인처럼 통쾌발랄하지 않다. 수줍고 소심하고 약간은 우울하다. 그러나 담담하다. 본인의 이야기나 본인의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자신을 보여주는 방식은 '지나가는 사람들'이나 인연의 끈으로 질기게 엮인 사람들을 통해서다. 그들의 이야기, 그들의 상처, 그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야기함으로써 자신을 보여준다. 아니 자신을 '본다'. 보여준다고 해서 상대가 다 보는 것도 아니고 본다고 해서 상대를 다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자신을 잘 볼 수 있고 잘 보여줄 수 있는 방식 중의 하나로 이렇게 무던하고 느린 방식을 채택한 작가의 불안하게 길게 휜 눈빛을 떠올려본다. 원고지를 밀고가는 답답한 몽당연필이나 풍경을 밀고가는 묵직한 자전거처럼 우둔하지만 강직한 사랑과 희망의 '밀고나감'이 결미와 작가의 말에서 느껴진다. 그것은 다시 서울을 향해 액셀을 힘껏 밟는 연주의 발끝에 실려있다.  

   
  돌이켜보니, 나는 단 한 번도 '사랑'이나 '희망' 같은 단어들을 써본 적이 없다. 중생의 말로 '사랑'이라고 쓸 때, 그 두 글자는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부재와 결핍을 드러내는 꼴이 될 것 같아서 겁 많은 나는 저어했던 모양이다. 그러하되, 다시 돌이켜보면, 그토록 덧없는 것들이 이 무인지경의 적막강산에 한 뼘의 근거지를 만들고 은신처를 파기 위해서는 사랑을 거듭 말할 수밖에 없을 터이니, 사랑이야말로 이 덧없는 것들의 중대사업이 아닐 것인가. ...... 여생의 시간들이 사랑과 희망이 말하여지는 날들이기를 나는 갈구한다.  - 작가의 말 중  
   

작가는 하덕규의 노래 중 끝부분의 가사에서 제목을 따왔다고 고백했다. 제목을 먼저 생산하고 거기에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하나로 들어앉혔다고 한다. 로맨틱한 이야기도 심금을 울리는 대목도 없이, 건조하고 냉랭한 분위기로 일관되는 작품속에서 역시 김훈다운 사유의 세계와 명품 문장들은 모종의 전율을 선사한다. 서사의 힘이 약하다는 평가에도, 그를 내치지 못하는 매력은 그런 것에도 있지 않을지. 강직한 문체는 모성을 자극하는 여리고 순함에 대한 방어기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세상과 사람에 대한 초연한 이해와 냉랭함을 가장한 온기가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것은 작품속 김중위가 조연주에게 뼈 세밀화를 부탁하러 왔을 때 채택한 방식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소심하게 변죽을 울리는 방식인데 다급하고 절실할수록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자신의 고통을 암시하는 듯하면서 늪으로 돌을 던져 오리를 놀라게 하는 방식이었다.'(152쪽)  그 효과가 배가될지 아닐지는 모르겠으나 소심한 방식이긴 하다.

'탯줄을 끌고 태어나는(94쪽)' 포유류의 슬픈 인연과 생명의 '쟁쟁쟁'과 죽음, 그리고 사랑과 희망에 대한 조연주의 이야기를 읽고 나서 나는 '나'를 보여줄 수 있는 인연에 대해 생각한다. 나를 둘러싸고 나를 키워왔고 나를 좀먹고 나에게 상처를 입히고 그럼에도 나를 보듬어주는, 또한 내가 상처 입히는 그 모든 인연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내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없다. 내 생명에 대한 사실을 무엇으로 설명할 것이며 그걸 설명하는 일이 과연 유효하고 절실한 일일까. 인연, 사실은 '인연의 부재'를 이야기 하고 있는 작품 속 인연들은 허섭하다. 세상의 밑바닥을 긁어서 가족을 입히고 먹인 아버지, 부부의 질긴 연을 끊지 못하고 '그 인간'이라는 익명성과 구체성의 중간에 남편을 두고 불면의 밤을 보내는 어머니, 유전적인 폐쇄성을 극복하지 못하는 父子, 신우와 안실장, 미래의 사랑을 기대하며 오늘 어줍잖은 명함을 건네는 청년 김중위, 그리고 만주벌판에서 한반도 작은 땅에 건너와 덧없이 무너진 야망과 욕망의 대명사, 좆내논이라 불리는 늙은 말 한 마리. 이 모든 인연의 결핍이 꽃과 잎과 사람의 뼈를 세밀화로 그려내는 차갑고도 따스한 여자 조연주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세상과 맺은 인연을 말해준다. 작품 속 일관된 하나의 은유는 아버지인데 그의 역할은 '미안하다'와 '죽었다'로 요약된다. 그것은 '나'의 생명의 사실이기도 하고 그 배경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버지의 부재는 아버지의 존재를 극명하게 증명해준다.  아버지의 뼈를 갈아서 밥에 섞어 새들에게 뿌려주고 나서 그녀는 '아버지가 없는 세상은 넓고, 눈에 걸리는 것이 없는 무인지경으로 보였다.'(339쪽)고 했다.    

사람의 태생적인 결핍성은 소멸과 생성의 고리를 순환하는 생명의 나무들과 그것들이 이루는 초연한 숲의 이야기 속에 녹아있다. 숲에는 시간이 흐른다. 숲의 시간은 사람의 시간과 다르다. 하지만 다르지 않기도 하다. '인연이라기보다는 인연의 부재가 가져오는 결핍감'이 숲에서는 느껴지지 않는다. 숲을 이루는 나무들은 탯줄이 아니라 씨앗으로 태어나 '혈육이 없어서 인륜이 없고 탯줄이 없어서 젖을 빨지 않는 것이 나무의 복'이라고 수목원의 안요한 실장이 말하는 '것 같다고' 한 조연주는 가을 서어나무 숲 속에서 '숲에는 피의 인연이 없다'는 깨달음에 이른다. 소멸과 생성이라는 생명의 사실이 그려낸 형상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 자신의 몸이 구현하고 있는 건 그런 숲의 시간이라는 것. 하지만 그녀는 아버지의 뼈를 그 '숲'에서 제가끔의 소리로 일제히 울어대는 새들에게 나눠준다. 숲을 부러워하는 마음에는 욕망과 시기심이 깔려있고 그걸 냉랭하게 바라보는 연주의 마음은 인연의 결핍감이 낳은 것인데, 그 숲에서 어느 정도의 충만감을 얻어가는 과정이 세밀화를 그리는 과정과 그 풍경의 특별한 묘사에 은근히 배어있다. 연주의 심리묘사는 세밀화를 그리기 위한 생명 있는 것들에 대한 시선으로 그려진다.

   
 

숲에서, 나는 여기가 아닌 다른 세상으로 가는 문 앞에 있었지만, 그 문을 열고 들어가지 못하고 그 안쪽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세밀화는 그 기웃거림의 흔적이었다. (120쪽)

 
   

단편집 <강산무진>에서도 그렇듯 전문적 직업을 묘사하는 데 집요하고 치열한 작가는 세밀화를 그리는 화가 조연주를 통해 생명의 사실과 생명의 진실을 특별한 방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사실성은 오히려 진실성을 매복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민통선 전방에서 발굴된 한국전쟁 당시의 유해를 보고 세밀화를 그려내는 일은 꽃과 잎을 그려내는 일만큼 생명의 사실을 그려내는 지난한 작업일 것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매장하지 못한 '상추쌈을 먹고 싶다'는 편지 속 어느 군인의 절규처럼 진실은 영원히 묻힐 수도 없지만 쉽사리 말하여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생명의 사실을 그리기 위해서는 살아 있는 인간의 시선과 인간의 몸을 통과해 나온 표현이 필요하다는 것(80쪽)'이다. 수목원의 안실장이 굳이 사진이 아닌 세밀화를 고집하는 이유다. 작품 속 월별로 민들레나 패랭이꽃 등 계절의 꽃을 세밀화로 그려내기 위한 연주의 시선은 섬세하고 치밀하다. 가령 '도라지꽃은 흐린 날 물안개 속에서 쟁쟁쟁 소리가 날 듯한데, 패랭이꽃은 햇빛 속에서 쟁쟁쟁 소리가 난다.'  

쟁쟁쟁, 소리는 마음의 문을 닫고 사는 어린 신우의 빛나는 가마에서도 들린다. 연주는 그런 생명의 사실을 눈으로 귀로 확인한다. 아버지가 있으되 부재와 결핍의 세월을 사는 그 아이를 통해 자신을 보고 그 아이가 안실장처럼 더 커져버리기 전에 서울로 가서 그 아이를 꼭 안아주고 싶어 하는 그녀, 한 번의 우회전으로 폐쇄성 짙은 숲에 들어갔듯이 이제 한 번의 좌회전으로 그 공간에서 빠져나왔다. 인연의 부재와 사랑의 결핍으로 머뭇거리며 어쩌면 행복한 방황을 하던 숲의 안쪽에서 탈주한 그녀는 숲의 바깥에서 다시 또 다른 부재와 결핍을 안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사랑과 희망에 대한 가느다란 불빛을 앞세우고 액셀을 밟는 소리를 우리는 들을 수 있다. 부재감에서 존재감으로 결핍감에서 충만감으로 나아가는 길에서 '내 젊은 날의 숲'은 그렇게 열려 있는 게 아닐까. 부재를 말할수록 비루하지만 소중한 존재감이, 결핍을 말할수록 인정할 수밖에 없는 어느 정도의 충만감을 우리는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때론 투정 부리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다지 나쁘지 않아 웃음 한 번 씨익 웃을 수 있는 그런 정도의 삶으로. 

말년에 실명하며 눈앞의 것들이 멀어져가는 체험을 한 보르헤스가 <보르헤스와 나>에서 쓴  문장은 <내 젊은 날의 숲>과 관련해서 더욱 분명한 위로가 된다. - 나는 명백하게 소멸할 운명을 가지고 있고 단지 나 자신의 어떤 순간들만이 남의 기억 속에 남게 될 것 아닌가. 나의 삶은 덧없는 것이 되고 나는 모든 것을 잃고, 모든 것은 망각 또는 다른 사람에게 속해 있게 되는 것이다. -

김훈의 친필 사인이 들어있는 신간을 선물해주신 순오기님에게 감사드린다. 오늘 낭독녹음을 마쳤고 내일부터는 회원신청도서인 <부처님의 생애>를 녹음 시작할 거다. 급한 것이라고 특별히 부탁받아 다른 책 점찍어 둔 걸 미루고 이 책부터 빨리 녹음하련다. 생명의 사실에 대해, 부처와 관련하여 김훈 작가의 말에서 인상깊은 대목이 있어 적어둔다. 어떠한 것에 대한 말이든, 말은 결국 덧없고 말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위대하고도 가련한 '아버지'를 태우고 네 다리를 버둥거리며 승천한 늙은 말처럼. 애초에 존재성이 모호했던 그 늙고 말라비틀어진 말처럼.

   
 

- 부처가 생명의 기원을 말하지 않은 것은 과학적 허영심이 없어서라기보다는 말하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산천과 농경지와 포구의 생선시장을 들여다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었다. 창조나 진화는 한가한 사람들의 가설일 터이다.(3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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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12-23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야 언니, 좋은 리뷰예요.
숲이란게 참 많은 은유를 가진거 같아요. 돌이켜보니 정말 그렇네요.
일정 부분에 대한 부재와 결핍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은, 나름대로 행복한 사람이지 않을까요?
내부의 구멍을 못 보고 외부의 잘못으로 돌리면서, 공허한 욕망으로 치닫는 사람이 얼마나 많나 말이예요.

저 요즘 <술과 장미의 나날>이란 에세이를 읽는데,
술 이야기 읽으며 언니 생각 했어요. 요즘도 와인과 막걸리 즐기시나요? ^^

프레이야 2010-12-23 20:56   좋아요 0 | URL
결핍을 스스로 인정하고 끌어안을 수 있을 때 행복감이 지속되겠지요.
그것이 쉽지 않은 일이지만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ㅎㅎㅎ 술과 장미의 나날, 검색해봐야쥐.

같은하늘 2010-12-24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순오기님 페이퍼에서 본적이 있는데, 강산무진에서도 여성의 심리를 세밀하게 묘사하셨다더니...
여기서도 그런가 보군요. 혹시 전생이 여성분이셨을라나요? ㅎㅎ
이렇게 멋진 리뷰 앞에서 딴 생각이나 하고 있는 1人~~~

메리 크리스마스여요~~ 프레이야님~~~^^

프레이야 2010-12-25 09:34   좋아요 0 | URL
네, '언니의 폐경'에서 특히 그래요.
여기선 그리 세밀히 묘사했다기보다 변죽을 울리는 묘한 방식이에요.
여성성이 강하게 내재해있지 않을까 싶기도..ㅋ
오늘 크리스마스네요, 그러고보니.
점점 이런 날에는 별 의미가 두어지지 않네요.^^
그래도 메리 크리스마스~~~아이들이랑 보내세요. 같은하늘님

섬사이 2010-12-24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처가 생명의 기원을 말하지 않은 것은 과학적 허영심이 없어서라기보다는
말하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문장 정말 좋네요.
요즘 저도 '결핍'이라는 말에 대한 생각을 했었는데요,
때론 내게 무엇이 결핍되었는지도 모른채 살았던 것 같아요.
아니면 애써 결핍을 인정하지 않았던가.
어느날 화들짝 놀라서 정신차리고 보니 있다고 생각했는데
없는 게 있더라구요. ^^
프레이야님의 크리스마스에 행복과 즐거움이 '결핍'되는 일은 없겠지요?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철철 흘러넘치도록이요~~^^

프레이야 2010-12-25 09:35   좋아요 0 | URL
무엇이 결핍되어있는 모른채 살았던 같다는 말에 동감이에요.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구요.
그런데 그걸 깨닫는 순간 가지고 있는 것도 많구나 생각하게 돼요.^^
섬사이님도 오늘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2010-12-24 1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5 0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anca 2010-12-27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마크 트웨인의 말이 너무 인상적이에요. 자서전을 읽어보려 했었는데 서둘러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서전. 프레이야님 서평을 읽어 저의 감상이 정리되는 느낌이에요. 인연. 순간, 마크 트웨인과 보르헤스의 말들. 아....너무 와닿아요. 프레이야님, 크리스마스 행복하게 보내셨죠? 정작 눈은 오늘 펄펄 왔어요.

프레이야 2010-12-28 02:48   좋아요 0 | URL
어린 분홍공주 돌보며 양서를 골고루 빨리 읽어내시는 블랑카님 늘 흠모하고 있는 거 아세요?^^
오늘 거긴(서울?) 눈이 왔나요? 이곳은 전혀 그렇지 않고 흐렸지만 포근했어요.
사람의 진심을 느낀 하루여서 행복했어요.
영화 '황해'도 봤는데 생각을 좀 정리해야될 영화에요.
여운이 특별하네요.
 
칼의 노래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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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이 감동을 주는 법은 늘 이렇다. 이래서 그를 밀쳐낼 수 없다. 철저하게 비정하게, 혹은 비장하게 읽히다가 책장을 덮는 순간 역시 로맨티스트다운, 서늘한 풍경을 그려주는 방식. 몇번인가 책장을 그냥 덮을까, 하기도 하고 어느 지점에선 먹먹해서 문장을 붙들고 앞뒤로 왔다갔다 머뭇거리기도 하고, 단문들로 빠르게 치고 나가는 문장들을 헤집고 나아가는 일이 그닥 고된 일도 아닐텐데 꽤 더디게 읽혔다. 추상적인 단어와 관념속의 어떤 이미지들이 치고 들어왔다가 또 치고 나가는 걸 반복하는 과정에서 성웅 이순신보다 전쟁터에 나가있는 한 사람이 도드라졌다. 바다이거나 육지, 그 전쟁터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역사적 배경을 초월하여, 시공을 초월한 우리 삶의 보편적 공허함 속에 건재해 있다.  

그 공허함이 부정적인 것일까, 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시비를 가릴 수 없는 저 너머의 지점에 서서 미성숙한 나를 그윽히 바라보며 미소짓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긍정적이어서 오히려 섬뜩하다. 신의 눈길이 그와 비슷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건 그저 안고 가야할 숙명과도 같은, 생을 사는 목숨의 권리에 대한 부채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외롭게 견뎌야할 폭염과도 같다. 폭염이 연일 육신을 누르고 정신마저 지치게 하는 즈음, 그것은 생의 그렇게나 대단한 폭염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것이 생에 마지막 폭염이라 생각하고 살라는 누군가의 말이 생각났다.  

<칼의 노래>는 우리 삶의 무수한 적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온갖 냄새가 창궐하는 전장에서 죽음을 맞는 법에 대한 고찰이다. 적들은 전체적으로 밀려오고, 실체가 없다. 개별적으로 닥쳐올 때마저도 그것은 하나의 전체로서 압박한다. 보이지만 잡히지 않는, 어쩌면 실재하지 않는지도 모르는 것에 무엇을 걸었던지 모르겠다. 오늘도 내 것이 아닌 오욕칠정의 감정들을 부여잡고 번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적들도 '나'가 대적할 대상이 애초에 아닌지도 모른다. 내 것이 아니라면 그냥 놓아버리면 그만인 것을, 미련하게도. '나'를 경멸하고 조롱하는 적들, '나'에게 불친절하고 '나'를 오역하는 세상의 모든 적들, '나'의 총체적인 반군들에게 취할 수 있는 자세가 무엇인가.  

글벗과 저녁을 먹고 매미소리 들으며 평상에 앉아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한달을 살고 죽음을 맞을 매미 - 수매미 - 는 그악스레 울어댔다. 그리 울어대면 장렬한 죽음이 되려나. 한 달 전에 지리산에서 홀로 죽음을 맞았다는 우리 또래 여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의 적은 온몸에 퍼진 암세포였다. 죽음의 방식을 일부 선택한 여인의 이야기가 이순신이 선택한 자연사와 겹쳐졌다. 순간, 그악스레 사는 법을 모르고 아직도 꿈을 꾸고 사는 어줍잖은 나는 그녀가 '얼마나 외로웠을까'를 말했다. 연이어 내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 속해 있을 공간에 대해서도 말했다. 아름다운 도시, 아니면 사랑하는 자, 그러니까 적의 품? 지금 살아온만큼의 세월을 앞으로 더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 장수시대가 끔찍하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지금부터 무언가 새로운 걸 시작해도 늦지 않다는 말이 된다. 물론 건강이 유지되어야 그것도 가능한 일이다. 실버타운으로 들어가는 날을 벌써 이야기하는 건 어리석다할지 모르지만 그런 걸 대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보장이 없는 시대다. 그러나 나는 현명하지 못하여 현실적인 걸 대비할 줄 모른다. 그냥 적들과 부대끼며 자연사할 것이다. 그정도면 족하다. 장기는 기증할 것이다.  

적은 무수하다. 질병, 배신, 절망, 증오, 죽음...... 그리고 사랑.  
김훈은 책머리에서 사랑은 불가능에 대한 사랑일 뿐이라고 밝혔다. 그러니 적의 이름은 '불가능'이다. 

"사랑이여 아득한 적이여, 너의 모든 생명의 함대는 바람 불고 물결 높은 날,  내 마지막 바다 노량으로 오라. 오라, 내 거기서 한줄기 일자진으로 적을 맞으리. "  

우리가 희망을 걸고 꿈을 꾸는 것들은 생에 최대의 적이다. 그것들은 늘 절망을 안겨주고 잠시나마 비상하던 꿈을 깨게하여 진흙탕에 구르게 한다. 비루한 우리들은 오늘도 꿈을 꾸었고 또 깼다. 내일은 내일의 꿈을 꿀 수도 있겠지만 그것들은 늘 약속을 어기고 절망을 또 심어줄 것이다. 가치는 혼돈을 정의는 오류를 몰고온다. 절박하다. 그 오류와 모순이 최대의 적이다. 김훈은 절박한 오류를 안고 홀로 살겠다고 선언했다, 책머리에.  

그러나 나는 적이 애초에 없었듯 사랑도 애초에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신기루에 불과한, 또는 제멋대로 모양을 바꿔 흐르는 구름떼와 같은 것. 사랑은 그런 게 아니다. "불가능에 대한 사랑", 적은 그런 게 아니다. 살기등등한 적 앞에서 "고착은 곧 죽음(58쪽)"이다. 이순신은 전쟁터에서 적의 화살에 죽는 것이 자연사라고 확신한다. 1인칭 화자 김훈의 언사이지만, <칼의 노래>는 두 인물간의 감정이입과 거리두기가 꽤 적절하다. <칼의 노래>는 '칼의 울음'으로 시작하여 '들리지 않는 사랑노래'로 맺는다. 후자는 다소 김훈답지 않은 소제목인가. 김훈 작품의 매력은 냉소와 절망으로 일관하는 듯하다가 세상끝에서 발하는 처절한 희망으로 치닫게하는 기운이다. 게다가 그는 현실주의자처럼 보이지만 낭만주의자의 밑얼굴을 감추지 못한다.

   
 

삶은 집중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분산 속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모르기는 하되, 삶은 그 전환 속에 있을 것이었다. 개별적인 살기들을 눈보라처럼 휘날리며 달려드는 적 앞에서 고착은 곧 죽음이었다. 달려드는 적 앞에서 나의 함대는 수없이 진을 바꾸어가며 펼치고 오므렸고 모이고 흩어졌다. 대장선이 후미에 있을 때 이물 너머로 바라보면 함대는 적과 마주잡고 쉴새없이 너울거리며 춤을 추는 무도자처럼 보였다. 

나를 이동시키면서 고정된 적을 조준하는 일은 어려웠고 나를 고정시키고 이동하는 적을 조준하기도 어려웠다. 나를 이동시키면서 이동하는 적을 조준하기는 더욱 어려웠으나, 모든 유효한 조준은 이동과 이동 사이에서만 이루어졌다. 내가 적을 조준하는 자리는 적이 나를 조준하는 표적이었다.(58- 59쪽)

 
   

 

학익진을 펼치며 적과의 춤을 추는 이순신을 그려본다. 춤을 추듯 생을 산다면 죽음도 그러한 것이 될 수 있을까. 그러나 다시, 결국 칼로 베어지지 않는 아득한 적을 '내 마지막 바다'로 불러 한줄기 일자진으로 맞이하려는 그를 그려본다. 명과 왜의 협약으로 퇴진하는 왜군을 공을 세우는 기회로 삼지않은 장군이 아니었더라면 임진왜란이 끝나고 경상도땅 정도는 왜의 손에 들어갔을 수 있다고 한다. 현명하기보다 무모하기, 두려움 앞에 두려움 그 자체로 나서기. 적의 칼에 베어져도 전쟁터에 '속하여' 맞는 자연사를 꿈꾸는 그는 어쩌면 적을 가장 사랑한 사람, 주어진 올무의 삶을 누구보다 사랑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나는 지금 나의 전쟁터에 제대로 '속해' 있는가.   

"오사카의 영화여, 꿈속의 꿈이려니."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검명과 이순신의 그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 적 속에 내가 속해 있는 것이다. 만개한 꽃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적들도 한갖 꿈속의 꿈이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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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ek 2010-07-30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의 가장 밑바닥에서 시작해서 형이상학을 치고 오르는 느낌. 그리고 처절한 외로움. 몇 번을 읽어도 아직까지 잘 정리가 안 되는 것 같습니다.

프레이야 2010-07-30 10:41   좋아요 0 | URL
그의 문장은 처음과 두번째의 느낌이 다른 것 같아요.
결말 부분에서 그 처절한 외로움이 더욱 강하더군요.
삶도 죽음도 결국 홀로 감당해야하는 것이겠지요.

마녀고양이 2010-07-30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끈질기게 대항하는 죽음을 맞고 싶지 않아요. 그건 모든 이의 소원일까요?
너무너무 끈질겨서, 길게 늘어지는, 너무 처절한 그런 죽음은 싫어요.

언니.... 날두 더운데,, 너무 난해해염~ 아하하

프레이야 2010-07-30 10:42   좋아요 0 | URL
매미소리 짜르르~해요, 아침부터.
날도 더운데 그냥 난해하게 이럴 거 없이 단순하게 살까요?
아웅~~ㅎㅎ

비로그인 2010-07-30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 훈은 사람도 문장도 강한 그 마초성?에 괜히 저항감을 느끼게돼요. 그 문장의 힘에 혹하면서도 모음 수필집말고 실제로 소설을 읽은 적은 한번도 없다는.. 그러나 안 읽고 있기엔 아까운 작가겠지요?

프레이야 2010-07-30 20:06   좋아요 0 | URL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지만 언뜻언뜻 보이는 여성성에 오히려
연민이 느껴질 때가 있어요. 생리에 대한 묘사는 경험해보지도 않은
그가 어찌 그리 더 세세할까요. 자료를 보고 썼다고 하지만 말에요.
내치기엔 매력이 심한..ㅋ
만치님, 더워서 어찌 지내나요?

stella.K 2010-07-30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 이 책을 읽고 리뷰를 안 썼던 기억이 나네요.
이야기의 배경 보단 실존에 더 많은 촛점을 두고 썼다는 생각이 드는데,
리뷰를 어떻게 써야할지 난감하더군요. 그땐 서재질 초기이기도 해서
리뷰를 쓰는 것 자체가 익숙하지도 않았지요.
다시 읽으면 써 지려나?
공무도하를 읽겠다고 하곤 여태 못 읽고 있습니다요.ㅜ

프레이야 2010-07-30 19:59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그리 생각했어요. 실존에 대한 소설.
공무도하, 읽으시면 괜찮다 느끼실 거에요.^^

순오기 2010-07-30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번을 읽었어도 세월이 흐르니 느낌만 남아 있지, 구체적인 감상은 가물가물해요.
김훈은 정말, 이순신과 난중일기의 문장을 사랑했지요.

프레이야 2010-07-30 20:00   좋아요 0 | URL
김훈의 문장은 두번 읽는 게 맞는 거 같아요.
전 두번 읽진 않았지만 두번 읽으면 확실히 명징할 거 같구요.

hnine 2010-07-30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번에도 우연이 아니었나봐요. 이번에도 김 훈의 글과 프레이야님의 글을 구분 못하며 읽었어요.
'사랑'도 '적 (敵)'이라 함은, 사랑이 곧 집착일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냉소와 절망으로 일관한 것 같으면서 드러내는 낭만주의자의 얼굴이라, 훌륭한 리뷰입니다.

프레이야 2010-07-30 20:05   좋아요 0 | URL
네, 저는 김훈이 참 낭만적이구나, 생각들어요.
결국 그의 그런 면모가 훨씬 현실적인 게 아닐까 싶구요, 역설적으로.
문장을 조금 수정했어요. 감정이입이 다소 심했던지요.^^
 
미식견문록 -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세계음식기행 지식여행자 6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현진 옮김 / 마음산책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영화 ‘카핑 베토벤’ 속 베토벤은 ‘내 영혼은 창자에 있다’고 말했다. 이 말에 담긴 영감을 표현할 예술적 영감이 떠오르진 않는다. 이순신이 ‘나의 애를 끊나니’라고 읊었던 절절함 그 너머의 근원성을 떠올릴 수 있는 정도다. 그것도 관념으로만. 사랑스러운 요네하라 마리 여사는 미국에 사는 두 러시아 망명자의 저서 [망명 러시아 요리]의 구절을 인용해 ‘고향에서 뻗어 나온 가장 질긴 끈은 영혼에 닿아 있다. 아니, 위(胃)에 닿아 있다’ 했다. 애국심이나 민족혼 따위는 2,3순위가 된다. 그녀에게 영혼은 위(胃)에 있는 셈이다. 그녀의 말대로, 아니 망향의 한에 몸부림친 그 두 명의 망명자 말대로 ‘이렇게 되면 끈이 아니라 밧줄이요, 억센 동아줄’이다. 고향, 생명이 뿌리 내렸던 아련한 원초적 그리움의 그곳은 감각의 기억과 굳게 연결되어있다. 내가 알든 모르든, 인정하든 안 하든. 

사실 후각이 좀더 원초적일 거라 생각했다. 미각은 후각과 샴쌍둥이 정도 될까. 나같은 몽상가 타입은 맛에도 이상을 그려두기 쉽다. 이래야한다 저래야한다 등등. 실상은 현실에 뿌리내리는 일에 서투른 나는 맛에 대한 이상향이 있지도 않고 내 미각의 고향으로 내세울 수 있는 것도 뚜렷이 기억나지 않는다. 웅숭깊고 뜨듯한 아랫목 같던, 외할머니의 진한 된장찌개 정도? 마리 여사의 표현을 빌자면, 나도 새로운 음식에 열린 미각을 가진 혁신주의자도 아니고 새로운 음식에 미각을 닫아거는 보수주의자도 아니다. 그렇다고 살기 위해 먹는 비관주의자도 아니고 먹기 위해 산다는 낙천적인 족속도 못 된다. 유머감각이 뛰어난 마리 여사의 표현대로 대개의 우리는 살기 위해 먹는 사람과 먹기 위해 사는 사람의 중간 어디쯤에 걸쳐서 살게 마련이지 않나.

아직은 몸에 좋다는 음식보다 혀에 좋은 음식에 더 당기는 나는 그래도 둔하지 않은 혀와 약하지 않은 위를 가졌다고 자만하고 있다. 그렇다고해서 내 혀가 타인에게 반감을 줄 정도로 까다롭지는 않은 것 같은데 몇가지 못 먹는 음식 앞에서 고개를 젓는 나를 가끔 까탈스럽게 보니 그것도 좀 우스운 일이다. 편견은 발이 빠르다 했지만 발 빠른 편견이 또 틀리지 않은 경우도 많으니 뭐라 부정할 수도 없는 일. 그렇다해도 미각을 포함해 모든 감각은 주관적이고 개별적이니 강요하지 마시길. 아무튼 미식가의 대열에 끼지도 못하는 나는 ‘미식견문록’이라는 다소 거창한 제목의 이 책을 내가 원해서 벗에게 선물로 받았었다. (나비님 고마워요)

보드카병 뒤로 돔형의 사원 지붕이 마치 술병의 뚜껑처럼 보이는 하얀색 표지, 어려서부터 공산당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체코와 프라하에서 살았던 작가의 유년시절 에피소드를 비롯해 러시아어 동시통역사로서 일하며 체험했던 갖가지 일화, 음식에 얽힌 크고 작은 역사와 그 배경에 덧붙인 뼈있는 한 마디들이 술술 읽힌다. 서곡으로 시작해 총 3악장과 그 사이 휴식과 간주곡, 이렇게 음악의 악장 형식으로 글들을 묶어둔 것도 즐거움을 준다. 작은 것이 작은 게 아니란 건 다들 아실테지. '처음 구운 핫케이크에는 멍울이 생기기 쉽다'는 등 두루 인용되는 인상깊은 러시아 속담들과 ‘커다란 순무’등 친숙한 동화와 우화들, 음식과 심리의 배경에 대한 추적 뒤의 독특한 해석, 역사적 사건에 대한 해박함, 그리고 통념의 반전과 의외의 결론이 주는 재미는 맛있는 음식을 먹는 재미에 비하면 아주아주 조금 못할 뿐이다.

미식가라기보다 대식가라고 자처하는 마리 여사는 미각으로 새겨진 과거의 기억을 오랜 세월이 지난 시점에서 혀 끝에 떠올리며 그 이면에 숨어있던 맛을 곱씹는다. 대개는 사람의 본성과 생의 이면에 붙어있는 달콤하고 씁스름한 맛이겠거니. 여유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면의 맛과, 일례로 염소젖에 대한 미각의 기억처럼, 끝까지 양보하기 싫어하는 천진한 단호함이 솔직하고 유쾌하다. 미각의 기억은 오래되고 집요하며 짧지 않은 생에 하나의 연장선상으로 이어진다. 궤적을 그리는 그것은 성장하며 변화하기도 하고 어떤 계기로 사장되기도 한다. "식욕은 먹는 중에 생긴다." 그리고 먹는 중에 사라지기도 하고. 욕구와 욕망은 채우기 전에는 없어지지 않는 법. 그녀의 미각에 대한 기억과 그 욕망도 채워서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고, 거기서 한 발 나아간 명쾌하거나 아리송한 결론에 씨익 웃음 짓게 된다. 특히 우리가 알고 있던 상식이 깨어지는 경우에도 경쾌하다. 새롭게 안다는 사실은 극도로 불편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늘 반가운 것이다.

러시아와 러시아인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 글이 많은데, 곳곳에서 고국 일본에 쓴 소리도 마다않는다. 유연하고 발랄한 마리 여사는 재치있는 글을 통해 다양한 민족의 역사와 종교, 신화를 선들선들 건드리면서 심각한 문투는 취하지 않는다. 감자 이야기를 하다가 작가는 1825년 러시아 최초의 무장봉기를 한 데카브리스트들에 매료된다고 고백한다. 현실에 꺾이지 않고 그것을 깨달음으로써 이상을 관철한 젊은 귀족청년들의 이야기가, 땅속에서 열리는 감자처럼, 드러나지 않지만 깊은 맛이 우러난다고 쓰고 있다. 이 외에도 밝게 자란 사람의 인간미가 느껴지는 대목이 여럿이다.

또한 프라하 외국인학교 시절 엄마가 해다준 주먹밥 한 덩어리에 눈물나게 힘이 솟았다고 고백하는 솔직한 그녀. 음식을 먹으며 '맛있다 쩝쩝' 말하지 말라는 노승의 말은 이쯤 되면 창고에나 넣어둬야한다. 고베 식도락 여행을 간주곡으로 연주한 '미식(美食)견문록' 에서 줄곧 삶의 개성 있는 미식(美識)이 읽히니 나같은 이런 독자도 참 병증인가싶다. 그래도 내게 이 책의 묘미는 그것이다. 이 책에 구체적으로 언급된 마리 여사의 맛의 기억을 내가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인지, 또 나는 관념으로 그것들을 맛볼 수밖에 없었다. 앎은 관념보다 경험이 우선일텐데,라는 말도 어쩌면 선입견이라 밀어붙이고 싶다. 이런 책을 즐독하는 수많은 간접체험자들의 앎은 그럼 어떡하라고.
  

가령 아래의 인용글 같은 것은 작가도 인용한 글이지만 삶을 사는 우리에게 보편적으로 의미있다.  

 

   
  할바란 우선 일정한 밀도와 끈기와 온도가 될 때까지 재료에 거품을 낸 결과요, 둘째로 이렇게 해서 생긴 여러 가지 거품을 섞은 다음 저어가며 식히는 기술이다. 그렇기에 할바는, 과자의 품질도 맛도 끈기도 재료에 의해서도 아닌, 어디까지나 조리하는 기술에 좌우된다는 것을 말해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93쪽)
 
   


할바는 '터키꿀맛'과 동일한 것 같은데, 영화 '나니아 연대기'에서 눈의 여왕이 소년을 유혹할 때 내놓던 그 하얀가루가 발린 과자가 아닌가싶다. 눈가루를 배경으로 얼마나 빛나던 유혹덩어리였던지. 작가에게는 기가 막히게 맛나다는 할바의 재료가 별거 아니듯 어쩌면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재료도 서로 도토리키재기일지 모른다. 비교는 우월감과 동시에 열등감을 자초하는 일이니 금물. 그저 내게 주어진 재료를 조리하는 기술에 성패가 달려있지 않은가. 기술이 좋으면 맛은 당연한 부산물일 테고. 맛만 내려고 성급하다거나 쓸데없는 멋을 부리다가는 낭패를 보는 수가 있다. 맛은 반드시 혀로 보아야 하는 것!

에필로그를 읽다 기발한 아이디어에 한 번 더 웃는다. ‘미모의 적이자 생활습관병의 원흉이라고 지탄받는 지방을 자고 있는 동안 전력으로 전환하는 간단한 장치만 발명된다면, 다이어트 문제와 에너지 문제는 일석이조로 해결되니 그 발명가는 억만장자가 될 것이다.’(245쪽)  그런 사람이 꼭 나타날 것이라 믿는 작가는 귀엽기까지 하다. 대식가라면 당연히 따라올 걱정이 발명의 어머니를 낳은 셈이다.

참, 살라미 소시지를 좋아하는 마리 여사는 뱀파이어의 후손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말도 안 되...지 않는 추측의 근거는 책 속에서 즐기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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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23 1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0-07-23 12:52   좋아요 0 | URL
저도 소문에 반해 처음 읽은 작품이에요.
특유의 유머와 통찰이 재미나게 읽혔어요.
다른 작품도 차츰 읽어볼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리뷰만 쓰는 걸로 자동응모인가요?

꿈꾸는섬 2010-07-23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네하라 마리 여사는 작년부터 읽어봐야지만 하고 아직도 안 읽어봤네요. 마음산책 이벤트로 여기저기 쏟아지는 리뷰의 찬사는 정말 안 읽고는 못 버틸 것 같아요. 근데 언제쯤 읽게 될지 그걸 모르겠네요.
정말 좋은 글이에요.^^

프레이야 2010-07-23 19:34   좋아요 0 | URL
리뷰는 아무래도 쓴소리보다 단소리를 더 하게 되니 너무 믿진
마시구요.ㅎㅎ 아니에요. 전 충분히 재미있고 좋았어요.
꽤 유쾌한 글이었어요.
더운날 건강히 지내세요, 꿈섬님^^

순오기 2010-07-25 0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리뷰는 읽고 읽어도 맛나요~~~~~^^
마음산책 이벤트, 리뷰를 쓰면 자동 응모된다고 나와 있어요.
3월에 참 재밌게 읽었는데, 어제 도서관에서 다시 빌려왔어요.^^

프레이야 2010-07-23 21:49   좋아요 0 | URL
영원한 저의 팬, 오기언니 고마워요.ㅎㅎ
저도 이 책을 시작으로 마리 여사의 다른책을 좀 읽어볼까 해요.

순오기 2010-07-23 22:21   좋아요 0 | URL
어제 오늘 '프라하의 소녀시대' 읽었는데 참 좋았어요.
30년이 지나 친구를 만나는 장면에서 눈물도 찔금 나오고...

프레이야 2010-07-24 00:39   좋아요 0 | URL
프라하의 소녀시대, 목록에 둘게요.^^

blanca 2010-07-23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마리 여사가 러시아 통역도 했군요. 글 읽는데 정말 감칠맛나요. 할바 먹어보고 싶어요. 저도 대식가였는데 ㅋㅋㅋ 나이가 들수록 음식에 까탈을 부리게 되요.

이 글 읽다가 처음으로 명동칼국수 먹던 날 감동의 도가니에 빠져 전율했던 기억이 나서 웃고 가요. 좋은 글 감사해요, 프레이야님!!

프레이야 2010-07-23 21:51   좋아요 0 | URL
전 예전엔 참 못 먹는 것도 많고 까다로웠는데
나이들어가면서 대식가가 되더군요.ㅎㅎ
요즘 완전 위대해요ㅋㅋ
명동칼국수, 참 오래전 먹었던 기억이 나요.
대학 1학년 친척집에 갔던 겨울방학이었던 거 같아요.
음식은 여행과 마찬가지로 누구와 먹었던가가 기억의 한 코드가 아닐까싶어요.

순오기 2010-07-25 04:00   좋아요 0 | URL
우리 민경이도 이 책 읽고, 여행자의 아침과 할바가 제일 먹고 싶다고 했어요.ㅋㅋ

프레이야 2010-07-24 00:46   좋아요 0 | URL
민경이도 읽었군요. 역시 독서맘 닮은 딸이에요.
여행자의 아침식사,는 도무지 얼마나 맛없는지 먹어보고 싶다는? ㅎㅎ
전 고베 식도락 여행이 부러웠어요. 훌쩍~

양철나무꾼 2010-07-23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었어요~
한권을 읽으니 전작을 읽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저는 '식욕은 먹는 중에 생긴다.'
이말이 제일 와닿았는데,
황신혜가 한번 먹기 시작하면 옆에다가 밥공기를 퍼 대령해야 한대요.
먹다가 끊기면 입맛이 싹 달아난다나,뭐라나~^^

프레이야 2010-07-24 00:43   좋아요 0 | URL
그 말, 와닿지요.^^ 저도 리뷰에 살짝 언급했어요.
식욕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욕구는 그런 성질이 있는 거 같아요.
연예인들은 워낙 식단조절을 하는 사람들이라 눌러뒀던 욕구가
발동하면 제어하기 힘든가 보군요.ㅎㅎ

마녀고양이 2010-07-25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할바 읽으면서 저도 나니아 연대기의 터키 과자 생각났어요.
그리구,, 맛의 환상... 염소젖 이야기 읽구 얼마나 웃었는지.
제가여 알프스 소녀 하이디 읽으면서 똑같은 환상을 가졌는데,
요네하라 마리도 같은 말을 하더군요~ ㅋㅋ

프레이야 2010-07-26 01:28   좋아요 0 | URL
님, 읽으셨군요.^^
맛의 환상, 기억의 환상, 사랑의 환상, 그런 것들 참 우습지요.


라로 2010-07-31 0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의 일년만에 읽으신거????ㅎㅎㅎㅎㅎㅎ
암튼 이 리뷰 당선되면 한턱 크게 쏘세요~~~.ㅋㅎㅎㅎㅎㅎㅎ

22번째 추천은 전데요,,,이상하게 어제부터 짝수~ㅎㅎ


프레이야 2010-07-31 22:23   좋아요 0 | URL
나비님 손수 써서 보내주신 카드꺼정 책갈피에 꽂아서요.ㅎㅎ
다시 보고 감동먹었잖수.
마리 여사, 사랑스러워요.
 
양파 이야기 바깥바람 4
최윤정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바람의아이들 최윤정, 소박 간결하고 강단있는 인생통찰의 문장, 손수 그린 그림도 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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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0-06-08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여기 최윤정씨가 그림도 그렸어요? 와, 궁금하네요

프레이야 2010-06-08 10:33   좋아요 0 | URL
네, 평소에 스케치 해둔 작은 그림인데 군데군데 적절히
배치해뒀더라구요. 그림에 조예도 깊은 것 같았어요.
전 이분 문장을 참 좋아해요.
그림책 번역문도 참 좋고 어린이문학관련 책도 모두요.

희망찬샘 2010-06-20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최윤정!!! 그 이름, 낯익다 했더니 저도 이 분의 글을 여럿 읽었네요.

프레이야 2010-06-20 19:00   좋아요 0 | URL
그죠? 전 이 분 책은 무조건 신뢰하는 버릇이 있어요.ㅎㅎ
고학년 동시집 <가만히 들여다보면>도 참 좋아해요.
최윤정님이 고른 시들인데 윤동주, 오규원, 이런 분들의 시도 있고요.
문지아이들,에서 나와서 그것도 맘에 들구요.
 
일곱번째 파도
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 김라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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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번째 파도'를 얘기하려면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를 먼저 말해야 할 것 같다. 그 책을 처음 알게 된 건 큰딸아이가 읽고 싶다고 책을 사달라고 해서였다. 어디서 정보를 얻었는지, 그 책을 사달라고 했고 손에 알맞게 잡히는 하드커버에 산뜻한 표지부터 맘에 든다며 아이가 먼저 읽었다. 난 책장을 휘리릭 넘기며 그저 가볍고 말랑말랑한 연애담 같은 정도이겠거니 하고 읽지 않고 있었다. 참 좋더라는 말은 아이한테 먼저 들었다. (얘가얘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성숙한 건가.)  공식홍보대사(^^) 다락방님에게도 익히 강추받은 책이다. 그 후 낭독녹음 봉사를 하고 있는 점자도서관 책꽂이에서 그 책을 우연히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얼른 집어들었다. 다소 무거운 책을 녹음한 후엔 조금 가벼운 책, 술술 잘 넘어가는, 편안한 대사가 있는 소설 같은 게 읽고 싶은데, 마침 내 눈에 띈 것이 이 책이었다. 역시 타이밍이 중요한가 보다. 

두 사람이 주고 받는 이메일 언어, 구어체의 글이면서 문어체의 묘한 깍듯함이 섞인 문장들을 읽으며 나는 점점 어디론가 빠져들어갔다. 어디에 빠져들었냐하면, 음,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소리, 어디론가 달려나가고픈 해거름 잿빛 공기, 가늘게 흔들리는 잎새들의 몸부림 같은 것, 도무지 시작도 끝도 알 수 없이 휘말려오는 그 비슷한 감정이란 것으로. 그리고 주체할 수 없이 점점 타들어가는 언어의 목마름, 나아가 고갈상태 같은 것이 마음속에 자리했다. 표현할수록 부족하고 말할수록 어긋나고 그러다 어느 순간엔 데칼코마니처럼 마주 접으면 딱 맞아떨어지는 어떤 것, 그게 말이고 글이고 그것으로 표현되어 서로 나누는 감정이더라. 할퀴기도 하고 보듬기도 하고 갈증에 애를 태우는 언어들 뒤에서 내가 에미가 되었다가 레오가 되었다가, 그녀가 되었다가 그가 되었다가, 목소리톤을 번갈아 조금씩 바꿔가며 읽어나갔다. 참 좋았다. 좀 간지러운(?) 대사들도 있었고 아릿하게 가슴을 적시고 울리는 대사들도 있었다. 달콤하거나 씁쓸하거나 날카롭거나 다정한 말 아니 글이 감정을 들었다놓았다 하며 자신을 드러내거나 감추며 상대를 탐닉하고 있었다. 조사 하나, 단어 하나, 괄호 하나, 점 하나, 말줄임표 하나, 느낌표 하나에도 그들의 다 드러내지 못하는 감정이 실려있었다. 망설임, 주저함, 다가감, 그리움, 시기, 질투, 과감함...  얼굴을 마주보며 말하는 모습을 눈으로 담고 목소리를 귀로 담는 것보다 모니터를 사이에 둔 그들의 말 아니 글은 더욱 예민하고 섬세하고 그래서 더욱 위험하고 예리했다.   

그들의 언어를 따라가며 점점 그들의 '감정'에 빠져들어갔다. 나는 그들이 되어 때로는 애틋하게 때로는 질투심에 불타 때로는 간절하게 서로를 그리워했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이었다. 에미의 12년 된 내부 세계 동반자 베른하르트가 말하듯 실체가 없는 환상, 뼈와 살이 있고 흠이 많은 실체가 아닌, 글자 뒤에 숨어있는 환상이었기 때문에, 모든 건 완벽해 보였다. 감정은, 사랑은, 미움은 과연 어디서 생겨날까. 말,말,말. 글,글,글. 허망하기 짝이 없는 - 그걸 알면서도 매달리게 되는 - 그것들로 짓는 사상누각에 그들의 감정이 실리고 눈을 뜨면 한 순간 날아가버릴 수 있는 한 줌 바람같은 그것에 감정은 점차 더 고조되고 때로는 추락하고, 막연했던 것들이 소소해지고 구체화 되었다. 처음엔 잘 알지 못했고 예견할 수도 없었던 그들의 감정은 점점 색을 입고 향을 더하고 미세한 결을 갖추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좀 더 용감한 건 에미였다. 그녀에게 불어오는 북풍은 도저히 감당해내기 어려운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새벽 세시'의 결말은 참 허탈했다. 두고두고 회자될 기막힌 결말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이었다. 그 속편이라 할 수 있는 '일곱번째 파도'의 결말은 대체로 흡족하다. 현실에서 그럴 수 있다고 보기엔 설레고 두려운, 그래서 비현실적이다. 나는 이 결말을 환상이라 말해야겠다. 이 책 '일곱번째 파도'의 결말에 대해 궁금증이 있었고 그만큼 두근거리며 아껴 읽었다. 그래서 나는 간단히 말하자면,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환상을 심어주다니, 작가가 살짝 얄밉다. 전편의 설렘이 사라지는 느낌이다. 일곱번째 파도는 어차피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 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일곱번째 파도 같은 걸 꿈꾼다. 실재하지 않는 것이기에 '조용한 외부세계'에 대한 '꿈'을 꾼다 . 잔잔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여섯번의 파도 다음에 일어날 일곱번째 파도는 허망한 '감정'안에서만 일어나는, 비실재적이라 잔인한 파도가 아닌지. '이성'은 끊임없이 그 파도를 밀어내고 있는 것이다. 레오가 그랬던 것처럼.

   
 

일곱번째 파도는 조심해야 해요. 일곱번째 파도는 예측할 수 없어요. 오랫동안 눈에 띄지 않게 단조로운 도움닫기를 함께 하면서 앞선 파도들에 자신을 맞추지요. 하지만 때로는 갑자기 밀려오기도 해요. 일곱번째 파도는 거리낌 없이, 천진하게, 반란을 일으키듯, 모든 것을 씻어내고 새로 만들어 놓아요. 일곱번째 파도 사전에 '예전'이란 없어요. '지금'만 있을 뿐. 그리고 그뒤에는 모든 게 달라져요. 더 좋아질까요, 나빠질까요? 그건 그 파도에 휩쓸리는 사람, 그 파도에 온전히 몸을 맡길 용기를 가진 사람만이 판단할 수 있겠지요.(256쪽)

 
   

이 두 권의 책, 모두 상당한 매력을 풍긴다. 사랑(이란 감정)은 어디에서 오는가, 사랑(이란 감정)은 어떻게 진행되는가,를 묻고 싶다면 이 두 권의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언어! 사랑은 그리고 어떠한 감정은 언어에서 오고 언어는 그것을 더욱 공고히 한다. 언어로 환상의 집을 짓고 또 허물기도 하며 언어로 우리의 감정은 고조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언어란 것, 듣지 말 것을, 보지 말 것을, 읽지 말 것을. 이 두 권의 책은 언어로 유발되는 우리의 모든 감정을 지독하고 집요하게 파고 들어가, 결국 그 모든 감정이 마음을 흔들고 현실을 흔들고 운명을 흔들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아무렇지 않게 쓰는 언어습관에서 고개를 쳐드는 내면의 억눌린 감정과 꿈틀대는 욕망을 읽을 수 있을 정도라면, 너무한가. 아니다. 책속의 레오처럼 이메일 언어를 연구하는 언어심리학자가 아니어도 글 이면의 글, 말 이면의 말을 살필 일이다.  

레오는 '사실은 당신이 그립다'는 말을 하기 위해 '파피용'이 기다린 일곱번째 파도, 그 탈출의 의미를 말한다. 에미는 '보고싶다, 잘 지내고 있기 바란다'는 말을 하기 위해 '당신이 잘 지낸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요.'라고 쓴다. 이들의 언어를 곱씹고 더듬어보는 재미, 언어의 묘미를 잘근잘근 씹어보는 재미, 그들의 연애 감정에 공감하며 그걸 바라보고 느끼고 다루는 과정에 집중해보는 재미를 느끼다, 문득 이 책,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편에서 에미는 '결혼은 모순형용'이라고 말한다. 평화는 잠재된 전쟁을, 안락함은 지루함을, 책임과 의무는 은밀히 욕망하는 무책임과 방종을 동시에 품고 있는 말이 아닌가. 후편에서도 에미는 결혼이라는 가장 이성적이어야 하는 잔잔한 파도에 대해 설핏 냉소적으로 말한다. 일곱번째 파도를 기다리며 하염없이 앉아있기만 하는 자신의 모습에 파격을 가하는 에미, 그녀는 충분히 사랑스럽고 영리하지만 슬프게도 정말 비현실적이지 않은가. (그 결단에 일면 박수 보내고 싶다는 말을 이렇게 쓰고 있는 거다.)  여전히 그녀에게 새벽 세시면 북풍이 불어들고 추워서 잠 못 이루며 창가에 발끝을 두고 거꾸로 눕는 에미를 상상해본다. 그런 에미가 오히려 현실적인 것 같다. 과연 에미, 조용한 외부세계의 마력을 떨칠 수 있을까.

사랑은, 연애는, 관계는 그리고 삶은 지독하다. 사랑하지 않으면 상처 받을 일도 없고 가슴 아파할 일도 없다. 사랑하지 않으면 질투할 일도 없고 증오로 잠못 이룰 일도 없다. 더 많이 사랑하는 자가 더 많이 괴로울 수밖에 없다. 관계맺기에 서툴고 늘 어눌한 사람이지만 삶과 연애하는 것 같다는 상찬을 들은 적이 있다. 그만큼 삶을 아끼고 사랑하고 가꾼다는 의미일테다. 과분한 칭찬이라 내겐 감사한 말이다. 하지만 삶이 삶이라서 상처를 주듯 가장 사랑하는 대상이 상처도 제일 많이 크게 줄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을 알지만 삶을 견디며 살아가야하듯 사랑(이란 감정)도 피할 수 없는 것, 견디며 보듬어야하는 것이다.  

작가는 희망을 주고 싶었던 것일까. 희망처럼 절망적인 게 없는 건데... 그래도 희망이란 말은 희망적인가. 언어로 쌓은 헛된 집 - 그것을 감정이라 부른다면 - 이 결국 그리 헛된 것만은 아니란 걸 '일곱번째 파도'의 결말이 말해준다. 우리는 무엇 하나도 헛되이 쌓고 있지 않다는 걸 긍정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그 결말은 완전한 사랑은 언어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도 말한다. 완전한 사랑은 정신과 육체의 하모니다. 어느 한 쪽이 기우는 건 장애다. 하지만 사랑은, 사랑이라는 감정은 수많은 오해와 질투, 상처를 딛고 결국 살아남을 것이다. 이해하고 양보하고 또 (레오에게 에미가 그런 존재인 것처럼) '내 손바닥에 간직한 점'처럼 나의 일부로 동반의 길을 가야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라면 혹여 일곱번째 파도를 맞는다 해도 새벽 세시면 여전히 북풍이 불어 들어올 것 같다. 에미도 여전히 그러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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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9-20 0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 세시'를 읽고나서, 어느 순간부터 서로 사랑하게 된거지?라고 다시 차근차근 짚어본 적이 있었어요. 언어 속에 숨은 마음이 서로 통할때 사랑은 오는 것일까요? 재밌게 본 영화의 신통치 않은 속편이 아닐까 싶어 망설이고 있었는데, 그래도 궁금하긴 해요 ㅎㅎ

프레이야 2009-09-20 09:46   좋아요 0 | URL
만치님 조용한 일요일 아침이에요.
사랑은 그렇게 오고 자라지만 결국 완전하게 되기엔 언어만으론 부족한 게 있다는 것,
그 책 결론을 보면 알게 될 거에요.^^ 그런 결론 의외였지만 나쁘지 않은 것 같구요.



다락방 2009-09-20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와- 프레이야님.
이 리뷰는 그동안 제가 봐왔던 리뷰중 최고가 아닐까 생각해요. 새벽 세시와 일곱번째 파도 그 안에 담겨진 그 많은 것들을 이토록 잘 풀어내시다니요!
이 책을 읽은 누군가는 이 작가가 굉장히 똑똑하다고 하더라구요. 모니터를 앞에 놓고 인간의 관계가 점점 달라져가는 과정을 이토록 잘 그려낼 수 있다면, 그 작가는 정말 굉장히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일거라구요. 이 소설의 놀라움은 그런점들인 것 같아요. 위에 Manci 님도 말씀하신 것 처럼 무엇이 어디서 어떻게 시작된거지? 되짚어 보면 여기, 이부분, 저기, 저부분이 될 수도 있은 그런 흐름들. 그러나 무엇 하나 확실한 것 같지도 않고. 새벽 세시의 결말은 완벽함, 그 자체, 그래서 현실이었지요.

일곱번째 파도는 그래서 말씀하신 것처럼 환상으로 끝맺는 결론인 것 같아요. 저 역시 그 결말이 나쁘진 않았지만, 전 역시 현실쪽에 좀 더 무게를 두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일곱번째 파도의 결말에 마음 놓는 사람들도 많더군요. 그들은 그랬어야 한다고 말이죠.

오와- 리뷰가 무척 좋아서 저도 모르게 말이 많아졌어요, 프레이야님. 추천이에요.

프레이야 2009-09-20 21:12   좋아요 0 | URL
작가, 굉장히 똑똑할 거란 생각 동의해요.
사람의 심리와 언어의 이면을 꿰뚫고 있는 것 같았어요.
다락방님 고마워요~~

stella.K 2009-09-20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 저기서들 좋다고 난리인 책을 저는 일부러 외면중이었는데(읽을 책이 너무 많아)
조만간 질러버려야할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아마도 리뷰는 못 쓸 것 같습니다.
프레이야님 리뷰에 눌려서...흥!3=33

프레이야 2009-09-20 21:12   좋아요 0 | URL
외면하지 말고 그냥 확~질러요, 스텔라님.ㅎㅎ

2009-09-20 15: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20 2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냐 2009-09-21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쉽지 않은 봉사를 하고 계시네요....그리고 이들의 이메일을 낭독해보는 건 더욱 흥분되는 일일거란 생각도 듭니다. 이 유쾌한, 때로 간지러운 대사들이라니. 저도 다락방님 의견에 동의하면서...추천요

프레이야 2009-09-21 09:01   좋아요 0 | URL
그래요. 소리내어 제가 그 대사들을 말하니 꼭 제가 그들이 된 것처럼
좋았답니다. 우힛~ 감사해요^^

후애(厚愛) 2009-09-21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20개를 드리고 싶은 멋진 리뷰에요.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해요!

프레이야 2009-09-21 23:40   좋아요 0 | URL
후애님, 20개씩이나요 ㅎㅎ 고맙습니다^^

라로 2009-09-22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새벽세시 바람이 부나요?>에서 그냥 제 기억을 멈추고 싶어서 일곱번째,,,는 읽지 않고 있는데
이거이거 읽어???말어????

프레이야 2009-09-22 21:37   좋아요 0 | URL
거기서 멈추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래도 읽어보시라고 뽐뿌질해야쥐~

꿈꾸는섬 2009-09-22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글 보니 또 읽어야할 책이 생기는군요. 그것도 두권이나 말이죠.^^

같은하늘 2009-09-23 01:33   좋아요 0 | URL
저도 같은 의견입니다. ^^
프레이야님 미워요~~~

프레이야 2009-09-23 23:30   좋아요 0 | URL
꿈꾸는섬님, 같은하늘님, 두 권 모두 읽어보시면 빠져들걸요.ㅎㅎ

순오기 2009-09-26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로거 베스트 특종이던데 내가 리뷰를 차분히 읽지 않아서 축하도 못했어요.^^
새벽 세시도 선물받았지만 아직 안 읽어서 코멘트를 못해요.ㅜㅜ

프레이야 2009-09-28 07:18   좋아요 0 | URL
앗, 몰랐어요. 히힛~
전에 부산서 만났을 때 새벽 세시,얘기 잠시 나왔죠?
언니의 이야기 기억나요.^^

세실 2010-03-27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님이 낭독하신 목소리로 듣고 싶어요. 참으로 촉촉한 느낌일듯!
음 왠지 일곱번째 파도는 늦가을에나 읽어야 할듯 합니다.
새벽 3시의 여운을 오래 간직하고 싶어요.

프레이야 2010-03-27 23:19   좋아요 0 | URL
일곱번째 파도,도 낭독하고 싶어요.
언젠가 할까해요.^^
새벽 세시의 여운은 늦가을까지 이어지겠군요.
그것도 괜찮을 듯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