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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슨 크루소의 초상


  그는 약간 긴 듯한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고 어깨를

흔들며 휘파람이나 슥슥 불고 다녔다. 남들 다 일으키

는 그 흔한 연애사건 하나 없는 그는 아무도 눈여겨보

지 않는 가난뱅이 중의 하나였다. 어느 날인가 그는 강

의도 잊어버리고 나무 그늘에 누워 하염없이 하늘을

붙잡고 있었다. 그의 눈이 얼마나 맑은지 햇빛이 빠져

들고 있었다.

  얼마 뒤 그는 잠적했다. 알래스카에서 남지나해까지

회유하는 고래를 따라갔다고도 하고, 땅속에서 석탄을

캔다고도 했다. 어깨를 벗어붙이고 목수나 그밖의 날

품을 팔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어느 쪽이든 그는

실패했다고 했다.

 어느 날 그는 돌아왔다. 검게 그은 팔뚝과 양미간의

깊은 주름이 그간의 사정을 말해주었다. 막다른 곳에

서 삶에 매몰된 적 있는 사람이 어둠의 밑바닥을 조금

알게 되는 것처럼, 그는 스스로의 그늘이 아픈 듯 서

있었다. 나는 그를 로빈슨 크루소라 불렀다.



로빈슨 크루소의 귀향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

마음속에는 언제나 바다

일렁대는 파도와 갈매기를 풀어놓은 바다가 있었지

갈증으로 번들거리는 저 눈

이따금 술기운을 빌려 울기도 하지


추억할 만한 것 없이 늙어가는 것

그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외로움을 핑계로 떠돌았지

마음속에는 언제나 바다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

섬을 집으로 삼는 건 외로운 일이 아니지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하며


크루소 아저씨 편지하세요

커다란 하늘색 봉투에다 그리운 섬에게라고 적어

물결에 띄우세요

지난 겨울 당신이 다녀간 걸 알죠

잘려나간 현사시나무 그루터기에서

당신의 발자국을 보았죠

그 어두운 무늬를 알아보았지만

곧 모른 체했죠

당신은 더 이상 바다 쪽을 바라보지 않죠

나는 난바다 한가운데의 섬일 뿐이구요

다가올 폭풍우와 파도만 보죠

당신이 내 옆을 지나더라도

늙어버린 당신을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르죠

모든 섬은 한결같이 짙푸른 초록이지만

흐르는 물처럼 섬도 흐르지요

흘러가버린 당신의 청춘, 당신의 섬이



로빈슨 크루소의 섬


섬은 더 멀리 있는지도 모른다


툭툭 끊어지는 수평선

바다를 건너는 새들에게는 쉴 곳이 없는가

긴 여행 끝에

제 무게를 허공에 던지는 순간

추락하는 빛 속에서 섬을 보게 되는지도 모른다


로빈슨 크루소는 다시 섬으로 갔다

한때 그를 가두었던 무인도

새들보다 더 먼곳으로 가기 위해

다시 한번 가슴속의 새들을 풀어놓기 위해


수평선 너머의 수많은 섬들 중

그리워할수록 얼룩지는 것들

(늙은 로빈슨 크루소는 섬을 찾을 수 있을까)



로빈슨 크루소를 꿈꾸며


로빈슨 크루소가 구석에 쭈그려 앉아

가끔 울기도 하던, 이제는 그 술집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럼주 통과 푸른 사과가 가득 차 있던

도시 한가운데 지하의 난파선 셸링


아무도 그가 누구인지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들 중의 하나가 그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모두들 자신들도 한번쯤

이곳을 버리고 은밀히 로빈슨을 꿈꾼다


정처없는 뜬구름과 푸른 산호의 섬

우리들이 보물섬에 대해 말하듯

그의 섬에 관하여 조심스럽게 이야기할 때에도

그런 섬은 없다고, 누구도 단정짓지는 않는다

설령 우리들 중의 하나가 로빈슨을 꿈꾼다 하더라도

아무도 그를 비웃지는 않는다

갑자기 심각해진 사람들은 말을 잃을 뿐이다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


취해도 쉽게 제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는 우리는

오랜만이라며 서로 눈빛을 던지지만

어느새 슬그머니 비어버린 자리들을 세며

서로들 식어가는 것이 보인다


가슴 밑바닥에서 부서지는 파도

저마다 물결 속으로 떠내려가는 것을 느낀다

오갈 데 없는 사람들 사이의 한 섬,

그 속에 갇힌 한 사람을 생각한다


외로움보다 더 가파른 절벽은 없지

살다 보면 엉망으로 취해 아무 어깨나 기대

소리 내서 울고 싶은 그런 저녁이 있다


어디든 흘러가고 싶은 마음이 발치에서

물거품으로 부서져가는 것을 본다

점점 어두워오는 바다로 가는 물결

무슨 그리움이 저 허공 뒤에 숨어 있을까



- 출처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 / 창작과비평사 1996

- 시인 김수영

  1967년 경남 마산 출생

  199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남행시초> 당선

        ‘시힘’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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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며 피는 꽃  

 

 

-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었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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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22 0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뽀송이 2007-02-22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_*
여고 때... 처음 '접시꽃 당신'으로 만난 도종환 시인...
아내가 죽은 후... 끝가지 혼자 살 것 같았는데...
지금은 행복하게 살고 있겠죠?
그래도 그의 시는 아직도 내 가슴 한 켠을 흔듭니다.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__)

프레이야 2007-02-22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그러셨군요. ㅎㅎ
뽀송이님/ 한결같이 편안하게 다가오는 시인인 것 같아요.
 
 전출처 : 푸하 > 비슷한 정서의 세 시.

서시 /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바다와 나비 / 김기림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


청(靑)무우 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公主)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
 

 

 

추천사 / 서정주


 
향단(香丹)아, 그넷줄을 밀어라.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 밀듯이,
향단아.
 
이 다수굿이 흔들리는 수양버들나무와
벼갯모에 뇌이듯한 풀꽃데미로부터,
자잘한 나비새끼 꾀꼬리들로부터
아주 내어 밀듯이, 향단아.
 
산호(珊瑚)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
나를 밀어 올려 다오.
채색(彩色)한 구름같이 나를 밀어 올려 다오.

이 울렁이는 가슴을 밀어 올려 다오!
서(西)으로 가는 달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
 
바람이 파도를 밀어 올리듯이
그렇게 나를 밀어 올려 다오.
향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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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집 2007-02-12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을 공부하던 시절 세 분 모두 제겐 스승이었답니다.

프레이야 2007-02-12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나무집님도 문학을 공부하셨군요. 어느 쪽인지는 몰라도, 문학적 감수성은
여전하실 듯해요. ^^
 
 전출처 : 水巖 > 오규원 - 한 잎의 여자 2


         한 잎의 여자  2
                                          - 오      원 -
          나는  사랑했네    여자를  사랑했네
          난장에서  삼천원  주고  바지를  사입는
          여자, 남대문시장에서  자주  스웨터를  사는
          여자, 보세가게를  찾아가  블라우스를  이천 원에  사는
          여자, 단이  터진  블라우스를  들고  속았다고  웃는
          여자, 그  여자를  사랑했네, 순대가  가끔  먹고  싶다는
          여자, 라면이  먹고  싶다는
          여자, 꿀빵이  먹고  싶다는
          여자, 한  달에  한두  번은  극장에  가고  싶다는
          여자, 손발이 
          여자, 그  여자를  사랑했네, 그리고  영혼에도  가끔  브래지어를  하는
          여자.
          가을에는  스웨터를  자주  걸치는
          여자, 추운  날엔  팬티스타킹을  신는
          여자, 화가나면  머리칼을  뎅강  자르는
          여자, 팬티만은  백화점에서  사고  싶다는
          여자, 쇼핑을  하면  그냥  행복하다는
          여자, 실크스카프가  좋다는
          여자, 영화를  보면  자주  우는
          여자, 아이는  하나    낳고  싶다는
          여자, 더러  멍청해지는
          여자, 그  여자를  사랑했네, 그러나  가끔은  한잎  나뭇잎처럼  위험
            가지끝에  서서  햇볕을  받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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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숲을 바라보며

 

오규원



겨울 숲을 바라보며
완전히 벗어버린
이 스산한 그러나 느닷없이 죄를 얻어
우리를 아름답게 하는 겨울의
한 순간을 들판에서 만난다

누구나 함부로 벗어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욱 누구나 함부로 완전히
벗어버릴 수 없는
이 처참한 선택을

겨울 숲을 바라보며, 벗어버린 나무들을 보며, 나는
이곳에서 인간이기 때문에
한 벌의 죄(罪)를 더 겹쳐 입고
겨울의 들판에 선 나는
종일 죄, 죄 하며 내리는
눈보라 속에 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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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09 17: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7-02-09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님/ 날이 많이 풀린 것 같아요. 이런 때일수록 겸손해져야겠다고 다짐합니다. 금방 호들갑을 떨고 까불다 감기 걸리죠. ㅎㅎ 가지를 곧게 뻗고 한껏 내어보이는 겨울나무의 가지를 좋아합니다. 죄의 옷을 겹쳐입고 선 우리는 부끄러울 수밖에 없겠지요.

水巖 2007-02-10 0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퍼 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