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객관적 시각이야말로 모든 시각적 실천의 생성력에 대한 책임의 문제를 종결시킨다기보다 다시 촉발한다. 부분적 시점은 유망한 괴물과 파괴적 괴물 모두를 설명할 수 있다. 객관성에 관한 모든 서구의 문화적 서사들은, 페미니스트 과학의 문제에 각인되어 있는 우리가 정신과 몸, 거리 유지와 책임감이라고 부르는 것과 맺는 관계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알레고리다. 페미니스트 객관성은 한정된 위치(location)와 상황적 지식에 관한 것이지, 주체와 대상의 초월과 분「열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보는 방법을 통해배운 것에 대해 책임질 수 있을 것이다. - P343

상대주의는 어디에도 없으면서도 동시에모든 곳에 똑같이 존재하는 방식이다. 입장의 ‘동등성‘은 책임과비판적 탐구를 부인하는 것이다. 상대주의는 객관성 이데올로기에 나타난 총체화와 완벽한 쌍둥이 거울이다. 상대주의와 총체화모두 위치, 체현, 부분적 시점과 관련된 이해관계를 부인한다. 양자 모두 잘 보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상대주의와 총체화는 동등하고 완벽하게 모든 곳에 있으면서도 어디에도 없는
‘신적 요술‘이 약속하는 시각이자 동시에 대문자 과학을 둘러싼수사학에 공통된 신화다. 하지만 다름 아닌 이 부분적 시점의 정치학과 인식론이야말로 꾸준히 지속된, 합리적이고 객관적인구의 가능성이 자리한 곳이다. - P346

무엇이 세계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인가에 관한 투쟁은 보는 방법에 관한 투쟁이다. 그것은 시각의조건들인 식민주의에서 과학의 문제, 절멸주의(exterminism)에서과학의 문제(소풀리스, 1988) 그리고 페미니즘에서 과학의 문제등에 관한 투쟁이다.
정치적으로 다양한 경험주의, 환원주의 혹은 다른 과학적 권위를 가진 해석에 대한 공격에 가담하는 문제는 상대주의적으로접근하기보다 위치로 보아야 한다. - P351

상황적 지식은 지식의 대상이 텅빈 스크린, 토대, 자원이 아니라 행위자이자 행동가로서 형상화되어야 한다고 요구하며, ‘객관적인‘ 지식에 실린 고유한 행위자성과 저자성으로부터 변증법을 차단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 주인과노예의 관계로 형상화해서는 결코 안 된다고 요구한다. - P359

객관성은 탈참여(dis-engagement)에 관한 것이 아니라 상호적이고 그리고 대체로 불공평한 구조화에 관한 것이며, 세계 속에서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다. 그런 세계에서 우리는 영원히 죽을수밖에 없는 인간이다. 말하자면 죽음이라는 ‘마지막‘ 통제는 불가능하다. 마지막까지 우리는 분명하고 뚜렷한 아이디어를 가지지 못한다. 다양하게 투쟁하는 생물학적인 몸은 생물학적인 연구조사와 글쓰기, 의료사업, 다른 사업 실천, 테크놀로지, 즉 이장에서 은유로 열거했던 시각화 기술의 교차로에서 출현한다. 하지만 교차로의 마디로 기꺼이 들어가는 것은 생생한 언어로 들어가는 것에 비견된다. 그런 언어는 문학적 가치의 생산에 적극적으로얽혀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것은 재치 있는 행위자와 행동가로서코요테와 프로테우스처럼 변화무쌍한 세계의 체현으로 얽혀들어가는 것이다. - P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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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종교/신학이 지배하는 사회는 기본적으로 위계(位階=hierarchy)의 사회이다. 초월적 신들과 그들에 의해 권력을 위임받은 사제들 및 귀족들,
그리고 평민들, 그 아래에 천민들이 피라미드를 형성한다. 지중해세계에종교는 항상 존재해왔지만, 우리는 로마 제국에서 이런 위계가 점차 두드러지고 또 철학사의 흐름과 일정 대목에서 교차함을 볼 수 있다.
AD 2세기 서구사상사에는 또 한 번의 거대한 변환이 도래한다. 이흐름은 ‘스토아주의에서 플라톤주의로‘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나 이때의플라톤주의는 사실상 철저히 종교적인 플라톤주의였다. - P587

지중해세계에서는 여러 형태의 일신교들이 명멸했지만, 후대의 역사를 염두에 둔다면 유대교의 일신교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유일신에 대한 표상은 매우 작은 종족이었던 유대의 문화맥락에서 점차 확대되어 후에는 지중해세계 전반, 적어도 그 절반으로퍼져나갔다. 그러나 이런 확장은 유대교 자체로써가 아니라 그것이 기독교의 형태로 바뀜으로써 가능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 P650

기독교 서사가 광범위하게 퍼져나간 데에는 그것이 담고 있는 이런비극의 정조(情)가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대중에게는 논리적 설득력이나 학문적 사실성, 엄밀성보다는 심금을 울리는 ‘이야기‘ (현대식으로 말해 ‘스토리텔링‘)나 감각적인 이미지 등이 더 호소력 있는 법이기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신학적 해석은 이런 비극성과 이율배반적 관계를 형성했다. 만일 이 모두가 신의 각본이라면, 즉 예수가 많은 고난을 겪는다해도 결국 그 모두가 ‘해피엔딩‘으로 가는 과정으로 이미 정해져 있는것이라면, 역사적 예수의 진실성과 감동은 현저하게 증발해버릴 수밖에없는 것이다. 예수의 행적은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어떤 위대한 기획에의해 연출된 것일 뿐, 인간인 우리가 그것을 경모하고 사랑하고 그처럼되기를 즉 예수-되기(becoming-Jesus)를 희구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 P652

사건이기를 그쳐버리는 것이다. 기독교의 정통은 그노시스학파의 SF와도 같은 예수 해석을 거부하고 보다 역사성 있는 예수상을 수립했지만,
그 상은 결국 역사적 진실성이 휘발된 신학적 예수상에 불과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은 이런 예수상이 아니라 깨달음과 고난과 희망으로 가득 찬, 우리 자신이 그것 ‘되기‘를 꿈꿀 수 있는 그런 예수상이아닐까.

서구에서 종교는 특정한 한 심급(審級)이지만, 이슬람세계에서 이슬람교는 모든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단 한 사람에의해 기획되고 모색되고 성취된 것이다. 예수는 사랑받을 수 있는 인물이지만, 무함마드는 존경받을 수 있는 인물이다. 기독교가 예수의 삶에대한 추후적인 음미를 통해 그의 사후에 조금씩 형성되어간 것이라면, 이슬람교는 무함마드가 그의 생전에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알라와 무함마드의 거리는 야훼와예수의 거리보다는 물론이고 야훼와 모세의 거리에 비해서도 비교할 수없을 정도로 크다. 이슬람교에서 무함마드는 어디까지나 ‘예언자‘일 뿐이다. "신의 아들인 예수와는 격차가 큰 셈이다. - P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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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는 차이의 체계를 구성하고 분류하는 핵심이다. ‘섹스‘와 ‘젠더‘라는 용어의 복잡한 분화와 융합과정은 이 단어들의 정치적 역사의 한 부분이 된다. ‘섹스‘와 관련되었던 의학적 의미들은 20세기를 통과하면서 영어에서는 점진적으로 ‘젠더‘에 축적된다. - P235

엥겔스는 계급과 국가 사이의 매개적인 구성체로서 가족을 최우선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성별의 구분을 분리하여 고려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적대적인 구분에 포함시켰다[카워드(Coward), 1983]‘ 가족 형태의역사적 다양성과 여성의 종속이라는 문제의 중요성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연스러운 이성애를 토대로했기 때문에 섹스와 젠더를 역사화할 수 없었다. - P238

여성을 자연의 범주에서 벗어나, 문화적으로 구성되고, 역사적으로 자기 구성적인 사회적 주체로 자리매김하려는 정치적·인식론적 노력 중에, 젠더의 개념은 생물학적 섹스의 오염으로부터격리되는 경향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여성은 태어날 때부터 종속적인 존재로 출현한다고 주장하는 ‘나쁜 과학‘을 제외하고는, 무엇을 섹스 혹은 여성으로 간주하여 구성할 것인가라는 진행 중인문제는 이론화하기 힘들어졌다. ‘생물학‘은 개입에 열려 있는 사회적 담론이라기보다 몸 자체를 지칭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 - P243

섹스-젠더 체계의 보편화 권력과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사이의 분석적인 분열은 유럽-아메리카 페미니즘의 자민족중심적이고 제국주의적인 경향의 일부로서 특히 유색 여성들로부터치적으로 신랄하게 비판받았다. 젠더 범주는 그 밖의 모든 ‘타자들‘을 모호하게 하거나 혹은 종속시켰다. 하나의 ‘제3세계 여성(Third World Woman)‘을 특징짓기 위해 서구의 혹은 ‘백인‘의 젠더 개념을 이용하려는 노력은 오리엔탈리즘, 인종차별주의, 식민주의 담론을 재생산하는 결과를 종종 초래했다 [모한티(Mohanty),1984; 아모스 외(Amos et al), 1984]. 게다가 미국 ‘유색 여성‘ 자체의 섹스화된 정체성은 복잡한 다툼을 통해 정치적으로 구성되었는데, 그들은 위계적인 차이의 생산 체계에 대한 비판적인 이론을 산출했다. 그런 생산 체계 속에서 19세기와 20세기 초반에 그리고 1960년대 시민운동과 반전운동으로부터 출현했던 여성운동초기 시절부터, 인종, 국적, 섹스 계급 등은 서로 얽혀 있었다. "여성들의 사회적 입장성에 관한 이런 이론들은 ‘총칭적인‘ 페미니스트 이론에 토대를 제공하고 조직했다. - P261

젠더, 인종, 계급에 대한 의식은 가부장제, 식민주의, 자본주의라는모순적인 사회 현실을 겪어 온 우리의 비참한 역사가 강제로 떠안긴 성과다. 그렇다면 내 화법에서는 누가 ‘우리‘로 간주되는가?
‘우리‘라는 강력한 정치 신화를 정초하는 정체성은 무엇이며, 이모임에 들어오고 싶게 만드는 건 무엇일까? 있을 법한 단층선은모조리 따라 (여성들은 말할 것도 없고) 페미니스트들이 고통스럽게 분열되면서, 여성들 사이에 자행되는 각종 지배의 기반을 정당화하는 변명이 되어 온 여성의 개념을 규정하기 어려워졌다. 나자신, 그리고 나와 비슷한 역사적 위치(백인, 전문직, 중산층, 여성, 급진 정치, 북미, 중년의 신체)에 있는 사람들 상당수에게 정치적 정체성이 위기에 처하게 만드는 근원은 너무나 많다. - P282

마르크스주의/사회주의페미니즘이 본질화하는 것은 노동의 존재론적 구조, 혹은 그 유비물인여성의 활동이다. "내가 볼 때 이 입장을 취할 경우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는, 마르크스식 인본주의를 계승하면서 너무나 서구적인자아를 함께 물려받게 된다는 점이다. 마르크스주의/사회주의페미니즘의 경우에 문제는 단일한 여성이라는 실체와 같은 것이 있다는 식으로 자연화한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입장은 여성들을하나로 단결시키기 위해 현실의 여성들이 일상에서 감당하는무를 강조했고, 이와 같은 공식화를 통해 페미니즘에 기여했다. - P288

여성들이 실제로 처한 상황은 지배의정보과학이라는 생산/재생산과 커뮤니케이션의 세계 체제 속으로 통합/착취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정, 일터, 시장, 공적 영역, 몸 자체, 이 모든 것이 거의 무한한 다형적 방식으로 분산되고 인터페이스로 접합될 수 있다. 이 과정은 여성과 다른 이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지만 사람마다 대단히 다른 방식으로 영향을 받는다. 그렇기에 이에 대응하는 국제적 저항운동을 만들어 내기가무척 힘들어지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어느 때보다 이와 같은운동이 절실하다. - P297

새로운 경제적, 기술적 배치는 복지국가의 붕괴, 그리고 여성에게 본인뿐 아니라 남성, 아이, 노인의 일상까지 챙기라는 주문이 점점 강해지는 것과도 관련된다. 복지국가가 해체되는 과정에 안정된 직장을 예외로 만드는 가사경제에 의해 산출되고, 여성임금은 자녀 부양을 위한 남성 임금과 같을 수 없다는 기대로 지탱되는 빈곤의 여성화(feminization of poverty)는 긴급한 관심의대상이 되었다. 다양한 형태의 여성 가장 가구가 생겨나는 원인은인종, 계급, 섹슈얼리티의 함수다. 하지만 이 추세가 일반화되면서 여성 연대의 기반이 다양해졌다. 여성들에게 어머니라는 지위를 강요해 온 현실이 어느 정도 작용한 결과, 여성이 일상을 지탱하는 역할을 으레 맡게 되는 현상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자본주의적이며 갈수록 전쟁 의존적인 경제와 통합되는 현상 자체는 새롭다. - P303

사이보그는 부분성, 유동성, 때로는 성과 성적 체현의 측면을 좀 더 진지하게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젠더는 심오한 역사적 폭과 깊이를지녔어도, 결국에는 보편적인 정체성이 아닐 수도 있다. - P326

사이보그 젠더는 글로벌한 복수를행하는 로컬의 가능성이다. 인종, 젠더, 자본은 전체와 부분에 대한 사이보그 이론을 요청한다. 사이보그에게는 총체적 이론을산해 내려는 충동이 없지만, 경계 및 경계의 구성과 해체에 대한개인적 경험은 있다. 파급력 있는 행위를 위해, 과학기술에 대한하나의 관점과 지배의 정보과학에 도전하는 하나의 방법을 하나제시할 정치적 언어가 되기를 기다리는 신화 체계가 있는 것이다! - P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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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3-25 19: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휴 저 이제 퇴근하는데요. 퇴근길에 저도 이 책 또 열심히 읽어보겠습니다. 화이팅!!
 

18세기 후반에서부터 19세기 초반에 형성되었던 초기의 공식(formulation) 이후로, 생물학에 관해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그것은 생물학이 기원에 관해, 창세기에관해, 자연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근대 페미니스트들은 우리의 이야기를 가부장제적 목소리로부터 물려받았다. 생물학은 아버지의 말에 의해 잉태되고 창시된 생명과학이다.
페미니스트들은 부계로부터 지식을 전수받았다. 그 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자 갈릴레오의 말이며, 베이컨의 말이고 뉴턴의 - P128

말이자, 린네의 말이고, 다윈의 말이었다. 반면 육신은 여성의 것이었다.! 그리고 말씀은 자연스럽게 육신으로 만들어졌다. 우리는 젠더화되어 왔다(engendered). 샌드라 길버트(Sandra Gilbert)와 수전 구바(Susan Gubar)는 19세기 여성작가들을 연구하면서,
목소리를 구성하고, 권위를 가지고, 텍스트를 저술하고, 이야기를말하고, 말씀을 출산하려고 애쓴 여성들의 노고에 관해 논의한다.
저술한다는 것은 창시하고 이름 짓는 권력을 갖는 것이다. 글쓰기와 말하기를 배워야만 했던 우리의 자매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연과학적 지식을 생산하고자 하는 여성들은 남성들에 의해 합법적권위를 부여받았던 텍스트인, 자연의 책(book of nature)을 읽어내야만 했다. - P129

남아 있는 유일한 문제는 우리가 다양한 목소리로 여기서, 무엇을말하느냐는 것이다. 다시 시작하기 위한 목소리 하나를 여성은생물학을 바라본다』의 후기가 제공한다.
남성 인간/자연의 안티테제는 인간에 의해 발명되었다. 우리가 할 일은 자연과 더불어 인류의 통일성을 실현하게(현실화한다는 말뜻 그대로) 될, 그리고 내부로부터 이해하게 될 관계를 재발명하는 것이다. (...) 과학은 인간의 자연 지배가 긍정적이고 가치 있는 목표처럼 보였던 특정한 역사적 조건 아래 출현했다는 점에서 인류의 구성물이다. 그런 조건들은 변했고 우리가 여행하고 있는 그 길이 자연을 설명하고 향상시키기보다 파괴하기 쉬울 것이라는 점을 이제는 알고 있다. 여성들은 우리가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의 운명은 제대로 보살펴 주지 않았던 인간의 손에 달려 있다는 점을 남성들보다 훨씬 더 빈번히 인정해 왔다. 이제 우리는 그런 지식을 바탕으로 실천해야 한다. (허버드 외, 1979) - P145

생물학의 규칙을 탈신비화하는 것이 내게는 중요해 보인다.
자연은 구성되고 역사적으로 구축되지, 화석 지층이나 열대우림에서 헐벗은 형태로 발견되지 않는다. 자연은 논쟁 대상이며, 여성은 그 싸움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일부 여성에게는 과학적인이야기의 저자가 될 수 있는 사회적 권위가 있다.

여성 학자를 포함한 많은 영장류학자들은 젠더가 자연과학의 내용을 물리적으로 결정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만약 그렇다면 그 결과는 형편없는 과학이라고 일컬어지게 될 것이다. 나는 이 증거가다른 해석을 지지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젠더는 관찰에서 피할수 없는 조건이다. 계급, 인종, 국가도 마찬가지다. - P192

여성 과학자들이 남성에 비해 더 착하거나 심지어 더 자연적인 이야기를 생산해 내지는 않는다. 다만 그들은 과학이라는 규칙의 안내를 받은 사회적 학문을 공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자신들의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이들은 규칙을 만드는 데 기여한다. 구체적인 여성의 삶 속에서 훈련된 에너지를 사용하는 평범한 문제인 것이다. 과학적 이야기의 질을 유지해야 한다는 의무, 비교 설화들의 의미를 향한 의무, 모델의 지위를 책임질 의무는 다면적이고 신비롭지 않으며 과학의 ‘내부‘와 ‘외부‘에 있는 평범한 여성들에게 잠재적으로 열려 있다. 과학을 만드는 사회적 과정을 무시하고, 그 과정에 참여하는 데 실패하고, 과학적 작업의 결과만을 사용하거나 오용하는 태도는 무책임하다. 나는 현재의 역사적 조건속에서 여성, 양육 그리고 남성의 전쟁으로 얼룩진 오염에서 자유롭다고 주장되는 다른 무언가를 이상화하는, 자연에 대한 반과학적 설화를 추구하는 것은 책임감이 훨씬 덜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 P193

포함과 배제는 인종, 젠더, 섹슈얼리티, 혹은 국적과 같이 고정된 범주에 의해 미리 결정되지 않는다. ‘우리‘는 픽션 읽기라고 일컬어지는 고도로 정치적인 실천을 통해 생산된 포함과 배제, 동일시와 분리에 대해 설명할 수 있다. 우리가 누구에게 설명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읽기 자체 속에서 생산된다. 모든 읽기는 잘못된 읽기이자, 다시 읽기이며, 편파적인 읽기이자 강제적읽기이며 상상된 텍스트의 읽기이기도 하다. 텍스트는 원래부터궁극적으로 그냥 그곳에 존재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세계가 원래부터 무너져 있었던 것처럼, 텍스트는 이미 언제나 서로 경합하는 실천과 희망으로 뒤엉켜 있다. 여성 의식을 표시한 당대의 지1도 위에서 대단히 특수하고 순수하지 못한 지역적/지구적, 개인 - P224

적/정치적인 우리의 위치에서 비롯된, 이들 각각의 읽기야말로교육적 실천이다. 그런 실천은 세계를 변혁시키는 ‘여성 경험‘이라는 막강한 창작물을 만들어 내는 권력으로 충전된 차이, 특수성, 친화성이라는 호명을 통해 작동한다. 만회 불가능한 하나라는환상의 상실은 차이 속에 자리한다. -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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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니즘 -로마 시대가 점차 진행되면서 철학은 양극으로 갈라졌다.
이 시대는 전통적인 공동체의 정체성이 무너지면서 ‘개인‘이라는 존재가 등장한 시대였다. 이 개인은 두 가지 상반된 방향으로 나타났다. 그하나는 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접고서 내면으로 또는 작은 ‘우리‘로 움츠러든 개인이고, 다른 하나는 과거에는 금기시되었던 초월적 권력의 화신을 추구한 개인이었다. 전자는 디오게네스와 에피쿠로스로 상징되는이 시대의 상당수 사상가들에게서 볼 수 있고, 후자는 알렉산드로스, 로마의 군벌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로마 황제라는 존재로서 구현되었다.
이에 따라 철학 역시 양극화된다. 한쪽에는 소집단에 안주하면서 심리적평정을 꾀했던 철학 학파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거대 권력에 봉사하면서 통치 이데올로기를 제공했던 어용 철학자들-물론 현대적 의미와는 다른 의미이지만 이 있다. 어느 형태가 되었든, 이는 그리스 민주정과 로마 공화정에서의 철학/철학자에 비한다면 전락한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 P582

헬레니즘 - 로마 시대의 다른 철학들과는 달리 스토아철학은 수준 높-
은 논리학적 사유와 자연철학적 탐구를 보여주었고, 그 바탕 위에서 특히 윤리적 문제들에 천착했다. 이 점에서 그것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이은 세 번째의 위대한 철학 체계였다. 나아가 그것은 특히 지중해세계의 운명을 결정한 로마라는 거대한 힘을 떠받쳐준 정신적 기둥이기도 했다. 전문적인 철학자들만이 아니라 로마의 지도급 인사들의 상당수가 스토아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고, 로마사에서 진정으로 군인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던 장교들도 대개 스토아주의자들이었다. 광폭했던 로마이지만 스토아철학이 그것을 굳게 받쳐주었던 것이다. 철학 자체로서는쇠락한 이후에도 그것은 지중해세계의 주요 가치로서 남았으며, 오늘날까지도 서구 사유의 한 성취로서 이해되고 있다. - P5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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