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서방세계가 본격적으로 문화적 도약을 이룬 것은 12~13세기를 거치면서였다. 여기에는 몇 가지의 내적 추동력과 두 가지의 중요한외적 추동력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우선 이 시대에 이르러 새로운 농법(3포제 등), 다양한 건축물들의 구축(처음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그후에는 고딕 양식으로), 인구의 증가(1000년이 지나면서 인구가 비약적으로증가해, 1300년 정도가 되면 5000만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여러도시들의 성장과 대학들의 건설, 화폐 사용과 은행 설립, 수공업의 발달과 유통 증가(‘한자 동맹‘ 등) 같은 여러 현상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 P689

중세의 철학은 그리스의 철학이 이슬람으로 전달되면서 그 기초가 마련되었다. 이슬람의 경우 철학과 신학이 매우 분명하게 구분되었는데,
이는 철학을 위해서는 다행이었고 또 과학적 작업들을 위해서도 좋은배경이 되었다. 이븐 시나와 이븐 루쉬드는 이런 과학적-철학적 탐구의절정을 이루었다. 서방세계는 이슬람에서 그리스 철학의 보고(寶庫)를발견함으로써 새로운 사유에 눈을 떴고 특히 12세기 이후 알베르투스마그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둔스 스코투스, 윌리엄 오컴 등을 비롯해 많은 거장들을 낳을 수 있었다. 전반적으로 볼 때 이런 흐름은 플로티노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로의 이행을 보여주었으며, 중세라는 시대가 지적으로 점점 정교화해간 궤적을 보여준다. - P750

르네상스 시대 도식적으로 말한다면 15세기(‘콰트로첸토‘), 16세기(‘칭쿠에첸토‘)는 탄생의 시대였다. 이 시대에 오늘날까지도 우리의(지중해세계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들까지 포함해) 삶을 주도하고 있는 여러 방식들-국민국가, 자본주의, 인본주의, 과학기술 등이 탄생했다. 이런삶의 양식들은 지중해세계에서 만들어졌지만 점차 전 세계의 주류가 되었고, 때문에 이 양식들을 반추해보는 것은 곧 우리 삶의 중요한 한 실마리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러한 탄생들을 관류하고 있는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인간적인 것의 (재)발견‘일 것이다. 국민국가의 탄생은 권력의 중심을 신과 교회로부터 왕과 국가로 이전시켰다. 자본주의의 탄생은 인간의 물질적 욕망을 긍정함으로써 새로운 생활을 도래시켰 - P753

다. 인본주의의 탄생과 인간의 자기 탐구의 시작은 이데아와 신으로 대변되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을 인간중심주의로 바꾸어놓았다. 과학기술의탄생은 인간을 자연의 노예가 아니라 주인으로 바꾸어놓음으로써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오래도록 파급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이 모든 변화들의중심에는 인간적인 것의 (재)발견, 더 정확히 말해 근대적 주체의 탄생이놓여 있다. - P754

기계론이란 세계를 하나의 기계로서-근대 철학자들이 즐겨 든 비유로 하면 하나의 정교한 시계로서 파악하는 것을 뜻한다. 달리 말해, 우리가 기계를 설명하기 위해 동원하는 개념들연장(延長), 무게, 힘, 속도 등 -만을 동원해서 설명하는 것을 뜻한다. 데카르트는 이런 설명을 극단적으로 단순화하기 위해, 즉 세계를 기하학으로 온전히 환원하기 위해, 모든 사물들을 ‘res extensa (extended thing)‘
로 파악했다. 이른바 범기하학화(pangeometrization)의 세계관이다. 질적인 것들은 모두 이 ‘res extensa‘로 환원되어 설명된다. 이렇게 극단적인환원주의로 파악된 세계에서 두 가지만이 전혀 다른 실체들로서 이해되는데, ‘res cogitans (thinking thing)‘와 신(神)이 그 둘이다. 신은 무한실체요 영혼(사유하는 실체)과 물질(연장을 가진 실체)은 유한실체들이다. - P832

신과 영혼을 제외한 모든 사물들은 같은 실체로서 파악된다. 이렇게 데카르트의 세계에서는 세 종류의 실체만이 인정된다. 숱한 종류의 실체들이 존재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와는 판이한 세계이다. 풍성한 질들로 가득 차 있던 아리스토텔레스적 세계는 갑자기 (신과 영혼만을 예외로한다면) 오로지 연장=외연으로만 구성된 기하학적 세계로 바뀌어버렸다. 데카르트의 기계론이야말로 자연에 대한 상(像)을, 더 나아가 세계에대한 철학적 파악 전반을, 아니 서구 문명 (뿐만 아니라 인류 문명) 전체의존립 근거 자체를 송두리째 바꾸어놓은 결정적인 지도리이다. - P833

하나의 개념이 탄생했던 조건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x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이해는 그 개념의 탄생 조건들에 대한 이해를 포함한다. 하나의 탄생은 가름/변별화이다. 거기에는 늘 어떤 대립성이 작동한다. 대립, 갈등, 부정, 모순의 장에서 무엇인가가 탄생한다.
‘philosophia‘의 탄생에도 이런 대립성들이 작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 P841

지중해세계에서 자연에 대한 상이한 이해 그리고 그것과 맞물려 나타
‘난 인간관과 가치관에서의 상이한 정향들은 결국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움직이는 사유의 운동이었다. 어떤 형태가 되었든, 지중해세계에서 등장해 숙성했던 대다수의 철학사상들은 현실과 이상,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움직이면서 초월과 자연, 인간의 운명, 도덕적/윤리적 실천을 사유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흐름에서 이상에의 지향이 때로 강박으로 흘러가곤 했다는 것은 사실이고, 근대 이래의 철학자들은 이 때문에 내재적이고 경험적인 사유의 정향을 취하게 된다. - P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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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사이보그-사이버네틱 유기체가 되었다. 그것은 혼종적기술이자 유기체적 체현과 텍스트성의 구성물이다(해러웨이,
1985). 사이보그는 텍스트, 기계, 몸 그리고 은유다. 이 모든 것들은 커뮤니케이션과 관련하여 이론화되고, 실천에 참여한다. - P384

상황적 목적은 필연적으로 유한하며, 부분성에 근거하고, 동일성과 차이, 유지관리와 분해라는 미묘한 놀이 사이에 있다. 위노그라드와 플로레스의 언어학적 체계는 ‘탈자연화된 것이며, 완전히 구성주의적인 실체다. 이런 점에서 그와 같은 체계는 유기체적·기술적·텍스트적인 것들 사이에 서로 침투 불가능한 경계를설정하지 않는 포스트모던 사이보그이다. 하지만 그들의 언어학적인 커뮤니케이션 체계는 취약성으로부터, 다시 말해 체현으로부터 궁극적인 추상화를 통해 절멸주의적 병리학과 함께하는 ‘정보사회‘의 AI 사이보그와는 분명히 대립적이다. - P388

면역성은 공유된 특수성과 관련하여 인지될 수도 있다. 즉 면여성은 타자(인간과 비인간, 내부적인 것과 외부적인 것)와 관계속으로 반쯤 스며들 수 있는 자기와 관련하여, 언제나 한정된 결과와 관련하여, 개체화와 동일시의 상황적 가능성과 불가능성과관련하여, 부분적 융합과 위험과 관련하여, 인지될 수 있다. 포스트모던한 자기의 문제적인 다수성은 면역학의 멍울진 담론에서는 강력하게 형상화되는 동시에 억압되기도 하기 때문에, 그런 다수성은 건강, 병, 개체성, 인간성, 죽음에 관해 부상 중인 다른 서구적이고 다문화적인 담론 속으로 이동해야만 한다. - P409

사이보그 체현과 상황적 지식이라는 약속과 공포로 가득 찬이런 차이의 장을 벗어나는 출구는 어디에도 없다. 가능한 자기들을 연구하는 인류학자로서 우리는 실현 가능한 미래의 기술자들이다. 과학은 문화이다. - P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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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이슬람의 과학은 그리스 과학, 헬레니즘 시대의 과학을 잇는 과학사의세 번째 중요한 단계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성과는 14세기 스콜라철학의 자연철학을 거쳐 17세기 과학 혁명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과학사저작들에서 이슬람 과학은 소략하게 다루어져 있거나 아예 빠지기까지 - P660

한 경우를 볼 수 있다. 그리스 과학으로부터 근대 과학으로 이어지는 중간 단계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슬람 과학은 좀더 많은 주목을 받을가치가 있다. - P661

서방의 종교사상들과 마찬가지로 이슬람의 종교사상들도 플라톤, 아니 사실상 플로티노스의 그림자 아래에서 전개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플로티노스의 철학은 말 그대로 천년의 세월에 걸쳐 지중해세계를 지배했다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철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그 어떤 사상도플로티노스 자신의 『엔네아데스』를 뛰어넘는 철학적 성취를 이루지는못했다. 철학은 종교/신학을 위한 도구였지 그 자체로서 수준 높게 추구되지는 못했던 것이다. - P665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을 해석하면서 이븐 루쉬드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이탈해 파격적인 주장을 한다. 이븐 루쉬드가 볼 때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가 보다 일관적이려면 수동적 이성 역시 탈물질적이고 영원해야 한다. 이 주장에 함축되어 있는 바는 수동적 이성이 우발적이고 물질적인 개개인의 신체와 완전히 분리된 실체여야 한다는 점 - P677

이다. 그래서 능동적 이성만이 아니라 수동적 이성도 공히 개개인을 초월한 이데아적인 존재로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26) 이를 이븐 루쉬드의 ‘이성 단일론‘이라 부른다. 만일 그렇다면, 불멸하는 것은 개개인의형상이 아니라 단지 단일한 보편적 이성뿐이다. 능동적 이성은 물론 수동적 이성까지도 압둘라나 마르얌의 이성은 아닌 것이다.
이븐 루쉬드의 이런 해석은 이슬람교의 교리와 정면 충돌하는 것이었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공히 개별자의 영혼의 부활, 나아가 경우따라서는 신체의 부활까지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존재론적 보장이 있어야만 한 개인에게 귀속되는 죄, 업(業), 책임, 의무 등을 인정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 등으로 해서 이븐 루쉬드는 박해 당했고 그의 책들이 불태워지기까지 했다. - P678

유럽에서와는 달리 이슬람세계에서는 ‘철학‘과 ‘신학‘이 명확히 구분되었다. 물론 유럽에서도 철학과 신학은 구분되었으나, 대체적으로 철학이 신학에 종속되었다. 반면 이슬람의 경우 신학은 어디까지나 이슬람 신학이었고, ‘철학‘은 그리스에서 유래한 학문인 그리스 철학을 뜻했다. 이런 구도는 이슬람에서의 철학자들의 위상을 유럽에서의 그것과는다르게 만들어주었다. - P6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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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객관적 시각이야말로 모든 시각적 실천의 생성력에 대한 책임의 문제를 종결시킨다기보다 다시 촉발한다. 부분적 시점은 유망한 괴물과 파괴적 괴물 모두를 설명할 수 있다. 객관성에 관한 모든 서구의 문화적 서사들은, 페미니스트 과학의 문제에 각인되어 있는 우리가 정신과 몸, 거리 유지와 책임감이라고 부르는 것과 맺는 관계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알레고리다. 페미니스트 객관성은 한정된 위치(location)와 상황적 지식에 관한 것이지, 주체와 대상의 초월과 분「열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보는 방법을 통해배운 것에 대해 책임질 수 있을 것이다. - P343

상대주의는 어디에도 없으면서도 동시에모든 곳에 똑같이 존재하는 방식이다. 입장의 ‘동등성‘은 책임과비판적 탐구를 부인하는 것이다. 상대주의는 객관성 이데올로기에 나타난 총체화와 완벽한 쌍둥이 거울이다. 상대주의와 총체화모두 위치, 체현, 부분적 시점과 관련된 이해관계를 부인한다. 양자 모두 잘 보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상대주의와 총체화는 동등하고 완벽하게 모든 곳에 있으면서도 어디에도 없는
‘신적 요술‘이 약속하는 시각이자 동시에 대문자 과학을 둘러싼수사학에 공통된 신화다. 하지만 다름 아닌 이 부분적 시점의 정치학과 인식론이야말로 꾸준히 지속된, 합리적이고 객관적인구의 가능성이 자리한 곳이다. - P346

무엇이 세계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인가에 관한 투쟁은 보는 방법에 관한 투쟁이다. 그것은 시각의조건들인 식민주의에서 과학의 문제, 절멸주의(exterminism)에서과학의 문제(소풀리스, 1988) 그리고 페미니즘에서 과학의 문제등에 관한 투쟁이다.
정치적으로 다양한 경험주의, 환원주의 혹은 다른 과학적 권위를 가진 해석에 대한 공격에 가담하는 문제는 상대주의적으로접근하기보다 위치로 보아야 한다. - P351

상황적 지식은 지식의 대상이 텅빈 스크린, 토대, 자원이 아니라 행위자이자 행동가로서 형상화되어야 한다고 요구하며, ‘객관적인‘ 지식에 실린 고유한 행위자성과 저자성으로부터 변증법을 차단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 주인과노예의 관계로 형상화해서는 결코 안 된다고 요구한다. - P359

객관성은 탈참여(dis-engagement)에 관한 것이 아니라 상호적이고 그리고 대체로 불공평한 구조화에 관한 것이며, 세계 속에서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다. 그런 세계에서 우리는 영원히 죽을수밖에 없는 인간이다. 말하자면 죽음이라는 ‘마지막‘ 통제는 불가능하다. 마지막까지 우리는 분명하고 뚜렷한 아이디어를 가지지 못한다. 다양하게 투쟁하는 생물학적인 몸은 생물학적인 연구조사와 글쓰기, 의료사업, 다른 사업 실천, 테크놀로지, 즉 이장에서 은유로 열거했던 시각화 기술의 교차로에서 출현한다. 하지만 교차로의 마디로 기꺼이 들어가는 것은 생생한 언어로 들어가는 것에 비견된다. 그런 언어는 문학적 가치의 생산에 적극적으로얽혀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것은 재치 있는 행위자와 행동가로서코요테와 프로테우스처럼 변화무쌍한 세계의 체현으로 얽혀들어가는 것이다. - P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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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종교/신학이 지배하는 사회는 기본적으로 위계(位階=hierarchy)의 사회이다. 초월적 신들과 그들에 의해 권력을 위임받은 사제들 및 귀족들,
그리고 평민들, 그 아래에 천민들이 피라미드를 형성한다. 지중해세계에종교는 항상 존재해왔지만, 우리는 로마 제국에서 이런 위계가 점차 두드러지고 또 철학사의 흐름과 일정 대목에서 교차함을 볼 수 있다.
AD 2세기 서구사상사에는 또 한 번의 거대한 변환이 도래한다. 이흐름은 ‘스토아주의에서 플라톤주의로‘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나 이때의플라톤주의는 사실상 철저히 종교적인 플라톤주의였다. - P587

지중해세계에서는 여러 형태의 일신교들이 명멸했지만, 후대의 역사를 염두에 둔다면 유대교의 일신교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유일신에 대한 표상은 매우 작은 종족이었던 유대의 문화맥락에서 점차 확대되어 후에는 지중해세계 전반, 적어도 그 절반으로퍼져나갔다. 그러나 이런 확장은 유대교 자체로써가 아니라 그것이 기독교의 형태로 바뀜으로써 가능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 P650

기독교 서사가 광범위하게 퍼져나간 데에는 그것이 담고 있는 이런비극의 정조(情)가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대중에게는 논리적 설득력이나 학문적 사실성, 엄밀성보다는 심금을 울리는 ‘이야기‘ (현대식으로 말해 ‘스토리텔링‘)나 감각적인 이미지 등이 더 호소력 있는 법이기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신학적 해석은 이런 비극성과 이율배반적 관계를 형성했다. 만일 이 모두가 신의 각본이라면, 즉 예수가 많은 고난을 겪는다해도 결국 그 모두가 ‘해피엔딩‘으로 가는 과정으로 이미 정해져 있는것이라면, 역사적 예수의 진실성과 감동은 현저하게 증발해버릴 수밖에없는 것이다. 예수의 행적은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어떤 위대한 기획에의해 연출된 것일 뿐, 인간인 우리가 그것을 경모하고 사랑하고 그처럼되기를 즉 예수-되기(becoming-Jesus)를 희구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 P652

사건이기를 그쳐버리는 것이다. 기독교의 정통은 그노시스학파의 SF와도 같은 예수 해석을 거부하고 보다 역사성 있는 예수상을 수립했지만,
그 상은 결국 역사적 진실성이 휘발된 신학적 예수상에 불과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은 이런 예수상이 아니라 깨달음과 고난과 희망으로 가득 찬, 우리 자신이 그것 ‘되기‘를 꿈꿀 수 있는 그런 예수상이아닐까.

서구에서 종교는 특정한 한 심급(審級)이지만, 이슬람세계에서 이슬람교는 모든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단 한 사람에의해 기획되고 모색되고 성취된 것이다. 예수는 사랑받을 수 있는 인물이지만, 무함마드는 존경받을 수 있는 인물이다. 기독교가 예수의 삶에대한 추후적인 음미를 통해 그의 사후에 조금씩 형성되어간 것이라면, 이슬람교는 무함마드가 그의 생전에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알라와 무함마드의 거리는 야훼와예수의 거리보다는 물론이고 야훼와 모세의 거리에 비해서도 비교할 수없을 정도로 크다. 이슬람교에서 무함마드는 어디까지나 ‘예언자‘일 뿐이다. "신의 아들인 예수와는 격차가 큰 셈이다. - P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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