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와 오늘 낮 혜화동 바탕골소극장에서 <춤추는 모자>라는 가족뮤지컬을 보고 왔습니다.
저는 너무 게을러서 평소 아이를 데리고 극장이나 미술관 등을 자주 찾는 편이 아닙니다.
그런데 며칠 전 선배가 티켓을 우편으로 보내와서 마지막 공연일인 오늘 무거운 몸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배우들의 열연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조금 엉성한 감이 있는 작품이었지만 아이는 처음 본 연극
무대가 꽤나 신기하고 즐거운 모양이었습니다.
무대 여기저기 널려 있는 다양한 디자인의 야광 모자들이 꽤 눈길을 끄는 세미 뮤지컬인데요.
버려진 모자들은 간절히 자신을 써줄 주인을 기다리고, 어느 날 다리를 다쳐 그토록 좋아하는
무용을 못하게 된 주인공 소녀 하늘이가 자신에게 맞는 모자를 찾아 하나하나 써본다는 뭐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자아찾기, 어른의 눈으로 보면 조금 진부하다고 할 수도 있는 이야기죠.
초등학생 자녀들을 데리고 온 젊은 엄마아빠들이 객석을 가득 채웠습니다.
핫팬츠, 멋지게 머리 위에 올려붙인 선글래스 등 아이 엄마라기에 그들은 너무나 젊고 패셔너블해
저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습니다.
앞에 앉은 자매는 지루한지 몸을 비비 꼬며 "이거 언제 끝나?"하고 연신 제 엄마에게 묻더군요.
배우들이 저 소리를 들으면 얼마나 힘이 빠질까 신경이 조금 쓰일 정도로 큰 목소리였습니다.
집으로 오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종점인 역에 내렸는데 대여섯 살의 여자아이가 승강장 앞에
꼼짝않고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인가 다가가봤더니 원피스 밑으로 흘러내린 응가가
종아리를 적시고 바닥에도......
엄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흘끗대며 지나가고요. 아이는 울고......
이럴 때 엄마가 와서 아이를 닦아주고 그것을 깨끗이 치워주기만 기다리는 건 아이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닐까요?
가지고 있는 휴지로 종아리를 닦아주며 아이를 안심시킨 후 그 아이의 엄마를 기다렸습니다.
화장실로 데려가 다짜고짜 아이의 옷을 벗기고 궁둥이를 씻어줘야 하지 않을까 생각은 했지만
그새 엄마가 나타나면 어떡하나 싶어(사실은 그렇게 핑계를 대고 뭉기적거린 거죠) 눈에 보이는
똥이나 닦으며 아이 옆에 있었습니다.
저보다 고작 두어 살 많은 딸아이가 옆에 있으니 아이도 안심이 되는 듯 울음을 멈췄고요.
10분쯤 뒤 그 아이의 젊은 할머니가 헐레벌떡 나타났습니다.
저는 나머지 휴지와 비닐봉지를 하나 건넨 뒤 자리를 떴습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그 정도 일은 인생에서 아무것도 아닙니다.
조금 당황할 정도의 사소한 일이지요.
그런데도 그 순간의 기억이 아이의 마음 속에 빼도박도 못할 비관과 고독을 심어버린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 곤란한 순간에 함께 엄마를 기다려준 사람들이 있었음을 그 아이가 기억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