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나 영화들을 보면 부자 아빠 덕분에 잘 먹고 잘살던 여주인공이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진 아빠나 사업의 실패로 하루아침에 가난뱅이로 전락하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온다. 가까이는 이은주가 주인공인<불새>라는 드라마가 그랬다.
최고급 브랜드만 걸치고 손에 물 한 방울 묻히고 살지 않다가 산동네 단칸방이나 지하셋방으로 쫓겨온 우아한 여주인공들은 형편이 달라지자 갑자기 사람이 달라진 듯 팔을 걷어붙이고 생활전선에 나선다. 그리고 그녀들은 허름한 옷을 입고 노점상이나 파출부를 하더라도 군계일학으로 반짝반짝 빛난다. 그동안 부자로 살았던 것은 결코 허튼 것이 아니었다는 걸 증명해 주는 듯. 귀한 태생은 숨길 수 없다는 듯......
마찬가지로 드라마 속에서 묘사되는 벼락부자들은 어떻게 운좋게 돈은 거머쥐었는지 모르나 그 천박한 태생은 감출 수 없다는 식으로 보석을 주렁주렁 매달고 최고급 브랜드의 옷을 소화시키지 못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나온다. 드라마니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는 물론, 시청자니 관객들도 어릴 때 읽었던 천편일률적인 동화의 영향에서 아직 벗어나려면 한참이나 멀었다.
두 친구가 생각난다. 중학교 때 친구 A. 독수리전축이 집에 있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였던 시절 그 친구네 집엔 일제 황금빛 파이오니어가 거실 중앙에 떠억하니 있었고 그때 벌써 일본 <스크린>을 구독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 아버지의 잇단 사업실패로 산동네 두 칸짜리 낡은 전세로 이사갔는데 자신과 동생 둘이 함께 쓰는 방의 천장과 벽을 스크린지에서 뜯어낸 좋아하는 배우들의 사진과 기사로 전부 도배해 버렸다. 나는 이상하게 그 현실과 유리된 듯한 이상한 방이 너무 좋아 버스를 두 번 갈아타면서도 자주 놀러갔다.
등록금이 없어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그 친구는 조그만 사무실에 용케 취직이 되더라도 두 달을 채우지 못했으니 한마디로 사장님과의 가치관의 차이가 너무나 컸다. 쥐꼬리만한 월급을 준답시고 온갖 허드렛일을 시키는 무식하고 볼품없는 사장을 견디지 못했고, 그 사장은 또 사장대로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주제에 너무나 도도하고 우아한 내 친구를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 친구는 돈이 좀 생기면 꼭 읽고 싶었던 책과 갖고 싶었던 가수의 테이프와(일제 파이오니어는 단칸방으로 이사할 때 결국 팔아치웠다 꽤 비싼 값을 받고...) 우표와 편지지를 한 무더기 샀다. 그것이 당분간 자신을 버티게 해줄 비상식량이라는 것이다.
B는 사회 친구.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끼리 어울릴 기회가 많았는데 나중에 어쩌다보니 아주 친한 친구가 되어 있었다. 이 친구는 예전에 아주 잘살았다고 들었다. 그래서인지 그 당시 박봉임에도 불구하고 닥스 오리지널 백을 들었고 계절이 바뀌면 메이커 옷을 큰맘먹고 장만했다. 언제인가 내가 아는 후배에게 500만 원인가를 한달만 쓰겠다고 빌려가서는 1년이 지나도록 갚지 않으면서 여전히 술값은 앞장서서 내고 메이커 옷을 사는 것도 여전했다. 나는 그 친구의 모습이 몰락한 부자의 격 있는 생활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 여겨 마음 한구석으로 존경하기까지 했다. '부자로 살던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라고까지 생각했다.(어디까지나 나의 쫀쫀함과 비교하여 그랬다는 말이니 오해 없길 바란다.)
그런데 그 멋진 이미지를 와르르 구기는 사건이 생겼다. 아버지와의 충돌로 임시로 집을 나온 이 친구, 옷들을 미처 챙겨 나오지 못했나보다. 우리 집에 와서 대성통곡을 하는데,
"엉엉, 내가 모래내 시장 구루마에서 3000원짜리 티를 다 사 입고......"
우는 친구를 열심히 위로하고 격려하던 나, 그 순간 짜증이 치솟았다.
"아니 자기는 3000원짜리 티 사 입으면 안되는 사람이야? 3000원짜리 티 입는 사람은 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거냐고!"
꼭 그것이 계기가 된 건 아니겠지만 그 친구와 나는 지금 연락이 끊겼다. 자신은 대학을 나오지 않았으면서 대학 나오지 않은 사람을 경멸하고 자신이 얼마나 부유하게 살았는지를 입만 열면 되새김질하는 그가 어느 순간부터 지겨웠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지겨워하는 것을 눈치챘을 테고......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다. 부자로 살다가 몰락한 사람, 물론 안됐다.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하지만 한번도 부자였던 적이 없는 사람, 부유한 생활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 좀더 맛있고 고급스런 음식도 먹어보고 좋은 옷도 한번쯤 걸쳐보고 돈 걱정 안하는 쾌적한 여행을 경험해 보기를 나는 바란다. 드라마나 영화 같은 데서 너무 부자였던 주인공 위주로 옹야옹야하는 걸 보면 나는 짜증이 난다. 경제적인 거든 문화적인 거든 좀더 골고루 누리고 사는 공평한 사회가 되기를 나는 바란다. 원하는 사람에게 적어도 기회가 한 번은 주어지는......지금 이 사회처럼 철저하게 봉쇄되고 되물림되는 것이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