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했던가. 예술가의 삶은 짧고 그가 남긴 작품은 영원하다고 해도 될 것 같다. 『예술가의 일』에 이어 조성준의 『당신이 사랑한 예술가』를 읽고 든 생각이다. 예술을 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수많은 예술가 중에 대중에게 인기를 얻고 오래 기억되는 이는 얼마나 될까. 언론에 주목받지 못한 삶, 생전에는 얻지 못한 작품의 가치, 재능만 탐할 뿐 예술가를 돌보지 않은 세상. 음악, 미술, 영화, 건축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25명의 예술가의 삶을 마주하다 보면 안타깝기도 하고 그들이 남긴 작품을 생각하면 고맙기도 하다.



작가는 25명의 예술가를 5개의 주제로 나눠 소개한다. 목록을 살피고 끌리는 주제를 먼저 읽어도 무방하다. 아는 이름을 발견하고 그를 먼저 읽어도 충분하다. <차별과 편견을 넘다>란 주제는 블랙리스트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우리나라도 과거 정권에서 등장했던 블랙리스트. 예술이 전부인 그들은 소리 없이 현장에서 사라졌다.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도 그러했다.




1950년대 초반 유대인이었고 진보적인 인물이었던 그도 정부의 사상 검증 대상이었다. 직접 심문 받지는 않았지만 방송국 출연 자리를 잃었고 이유 없이 여권 갱신도 거절당했다.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그에게 출국 금지라니. 너무도 치사하다. 번스타인은 스스로를 부정하는 진술서를 쓴다. 아, 얼마나 치욕스러웠을까. 그러나 그 이후에도 그는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흑인 인권 운동 단체를 후원하고 베트남 전쟁 반대를 외쳤다. 그로 인해 FBI 블랙리스트에 올라 오랫동안 감시당했다. 예술가 얼마나 깊고 강하게 대중에게 영향을 미쳤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감시하다니. 이해할 수 없다.


번스타인은 언제나 경청했다. 클래식 음악으로 정점에 오른 후에도 자기가 하는 음악이 최고라는 오만에 빠지지 않았다. 동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그들의 존재를 존중했다. 자리에 집착하지 않고 떠나야 할 때 떠났다. 그 이후로도 음악을 누리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많은 사람에게 알려주려 했다. (47쪽)


<존 케이지와 굴다처럼>에서 만날 수 있는 예술가는 천재 혹은 괴짜로 불리는 예술가를 만날 수 있다. 피아니스트로 프리드리히 굴다, 완벽주의로 잘 알려진 영화감독 스탠리 큐브릭, 그리고 한국의 거장 김기영 감독이 있다. 김기영 감독과 함께 윤여정 배우, 봉준호 감독이 생각나는 이가 많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그러나 그에 대해 몰랐다. 서울대 의대를 나오고 의대에 진학하고 연극 활동을 했다. 6·25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란을 와서 부산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면서 부업으로 <대한 뉴스> 제작했다니. 그것을 계기로 의사는 관두고 영상을 만드는 일을 했다. 처음부터 영화를 전공했다면 얼마나 대단한 작품을 만들었을까. 술도 하지 않고 영화인과의 교류도 없이 오직 영화만 생각한 감독. 완벽한 콘티 없이는 영화 촬영을 하지 않았다니. 그의 고집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은 김기영 감독 그 자체였다.


그는 사람들이 직면하기 싫은 주제들을 에둘러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과장하고, 뒤틀고, 기이하게 표현했다. 이상한 방식으로, 이상한 영화를 찍으면서도 그 안에 당시 사회 병폐를 집어넣었다. 기이한 영화로 흥행까지 거머쥔 김기영의 존재는 라이벌들과 비교해 독보적이었다. (101쪽)


<누가 스타를 죽였는가>란 주제에서 만난 예술가는 제목에서 알 수 있는 하나같이 애처로운 예술가의 이야기다. 대중은 천상의 노래, 매력적인 재능, 놀라운 연기력을 사랑하지만 무대와 공연장, 스크린 밖에서는 그들을 외면하다.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는 빌리 홀리데이를 보고 감탄하지만 무대 밖에서는 '더러운 검둥이' 취급하며 차별했다. 2011년 세상을 떠난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삶은 정말 가련하고 가여웠다. 자유롭게 음악을 만들고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만족했던 에이미를 세상이 알아봤다. 사랑에 빠진 남자로 인해 약물에 중독되고 그가 떠난 후 상처를 노래했다. 약물과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려 재활원을 찾기도 한 에이미 곁에 든든한 지원자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스타의 사생활을 깨려고 카메라를 들이미는 세상이 아니라 회복하기를 기다려주는 대중이었다면 우리는 지금 노래하는 에이미를 볼 수 있지 않았을까.


마지막 <캡틴, 마이 캡틴>과 <시네마 천국으로 떠난 거장>에서는 예술을 위해 전부를 던진 이들의 삶을 들려준다. 연기하는 인물과 완벽하게 하나가 된 히스 레저, 패션이고 명품이었던 코코 샤넬, 전 세계 영화감독이 이탈리아를 찾게 만든 모리코네까지 저자가 소개하는 25명의 예술가는 그가 남긴 작품 속에서 우리의 곁에 살아있다. 그들의 노래를 듣고 영화를 볼 때 그들의 삶의 겹쳐 보일 것이다.


모리코네는 떠났다. 그래도 영화는 끝나지 않는다. 위대한 영화는 계속 탄생할 테도, 아름다운 영화음악은 계속 흐를 것이다. 그럼에도 거대한 석양이 저문 느낌은 어쩔 수 없다. 역사가 하나의 책이라면, 고단한 삶을 위로하는 문장으로 가득한 한 페이지가 넘어갔다. (297쪽)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큰 기쁨을 주는 예술가에게 고마운 시간이었다. 책을 통해 내가 몰랐던 월북화가 이쾌대, 김환기와 백남준의 생에 대해 알 수 있어 좋았다. 그들이 어떤 유년 시절을 보냈고 어떤 환경에 있었고 누구에게 영향을 받았는지 알고 난 후 작품을 보면 이전과는 다른 것을 발견하려 노력할 것 같다.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해 노력한 그들 덕분에 우리가 사랑한 예술이 존재한다는 걸 기억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3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권여선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눈치가 빠르면 편하다. 하지만 눈치가 느리다고 불편해할 일인가. 그건 아닌 것 같다. 각자 행동의 속도가 다르듯 이해의 속도도 그렇다. 상대의 농담이나 유머에 즉각 반응하는 이가 있으면 한참 지나야 그 숨을 뜻을 알고 혼자 웃거나 나중에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삶의 속도는 왜 아니 그렇겠는가. 삶의 시차를 인정하는 순간 눈치 없음에 대해 불평할 일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건 의도를 파악하고 알아차리는 게 모두 똑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좋아하는 작가 권여선의 작품이 대상을 수상한 『2023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읽고 어떤 의도를 파악하는 일, 말하지 않은 말들과 숨겨진 뜻에 대해 생각한다. 차마 말하지 못하는 이의 사정이나 미뤄두어야 했을 말들에 대해서도. 대상 수상작인 권여선의 「사슴벌레식 문답」은 다시 읽어도 좋다. 아니 읽을수록 소설의 진위에 다가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까지 든다.


오랜 시간 알고 지내온 친구, 서로를 위한다고 여겼지만 결국 내 삶을 살기에 급급한 현실에 오해하고 상처 주는 일은 소설 속 네 명의 친구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30년 전 대학을 입학하면서 같은 하숙집을 시작으로 서로의 청춘을 응원하고 조언하며 지낸 그들. 한 친구의 생일을 맞아 떠난 여행지에서 민박집에 들어온 사슴벌레를 보며 나누던 대화는 ‘사슴벌레식 문답’이 되었다. 진로에 대한 고민, 방황과 좌절 때문인지 죽음을 선택한 한 친구의 20주기 추모 모임에 남은 셋 중 홀로 참석한 화자는 ‘사슴벌레식 문답’ 속에 숨겨진 의도를 생각한다. 시대가 바뀌고 지키고 싶었던 신념의 형태도 달라지고 점차 삶의 방향도 달라진다는 것을.


어디로든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든 들어와, 대답하는 사슴벌레의 말속에는, 들어오면 들어오는 거지, 어디로든 들어왔다, 어쩔래? 하는 식의 무서운 강요와 칼 같은 차단이 숨어 있었다. 어떤 필연이든, 아무리 가슴 아픈 필연이라 할지라도 가차 없이 직면하고 수용하게 만드는 잔인한 간명이 ‘든’이라는 한 글자 속에 쐐기처럼 박혀 있었다. ( 「사슴벌레식 문답」 중에서)


화자처럼 어떤 일은 뒤늦게 해답을 안겨준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어 같은 일을 경험했다 하더라도 저마다 다르게 기억하고 해석할 수 있다는 것. 오해가 쌓이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친구를 배신하는 일이 생긴다. 그럼에도 그 시절 함께했던 순간은 맨 처음 나누던 ‘사슴벌레식 문답’의 그리움으로 남아있지 않을까.


기억의 내용은 동일해도 그 뉘앙스는 바뀐지 오래인데 말이다. 사슴벌레 문답처럼.

어디로 들어와?

어디로든 들어와.

어디로 들어와 이렇게 갇혔어?

어디로든 들어와 이렇게 갇혔어. 어디로든 나갈 수가 없어. 어디로든……

갇힌 기억 속의 내 옆에 쌍둥이처럼 갇힌 지금의 내가 웅크리고 있다. ( 「사슴벌레식 문답」 중에서)


사슴벌레식 문답을 아는 이를 만나면 반가울 것이고 좋아질 것이다. 그는 권여선의 이 단편을 읽었다는 것이니까. 처음 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한동안 혼잣말로 중얼거릴 것 같다. 어디로든 들어와? 어디로든 들어와.


최진영의 「썸머의 마술과학」 은 열여섯 언니 이봄과 아홉 살 동생 이여름의 시선으로 들려주는 이야기다. 봄과 여름이 화자가 되어 시를 쓰는 모임에 나가는 엄마와 해장을 위한 모임에 나가는 아빠. 아빠의 주식 투자로 생긴 빚 문제로 아파트를 두고 싸움을 하는 엄마 아빠를 피해 근처 할머니 댁에서 비공식 모임을 하는 자매. 자신을 여름이 아닌 썸머라 불러달라는 사랑스러운 썸머는 환경에 관심이 많다. 배우는 대로 흡수하고 실천하려는 어린이다. 지구와 미래를 걱정하는 썸머를 보고 있자니 어른인 나는 심히 부끄럽다. 그런 썸머를 보는 봄의 마음과 믿음을 우리 모두가 지녀야 할 것이다.


썸머를 생각하면 미래를 무한하게 긍정하고 싶다. 팬데믹, 미세먼지, 전염병, 홍수, 침수, 가뭄, 꺼지지 않는 산불, 식량난, 기후 난민, 토양오염, 해양오염, 종의 멸종처럼 암울한 일들로 가득한 미래가 아니라…… 탄소 중립 실현, 미세먼지 없는 대기, 자연 분해 가능한 플라스틱, 재생 에너지, 수소에너지, 전기자동차, 대체 식품 등으로 채워질 미래를 상상하고 싶다. 엄마 아빠에게는 낯설지만 우리에겐 당연해질 것들을 사람들이 계속 만들어낼 거라고 믿고 싶다. (「썸머의 마술과학」 중에서)


서유미의 「토요일 아침의 로건」 은 주말마다 스터디 룸에서 영어를 배우는 ‘로건’의 이야기다. 오십 대 남자인 그는 미국지사 발령을 목표로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다. 목표에 가까이 왔다고 여긴 시점에 그는 뇌종양 진단을 받는다. 강사인 젤다에게 영어 공부를 그만두겠다고 말하려 하지만 4주 내내 말하지 못한다. 그건 가족에게도 마찬가지다. 장모님의 생신 모임에서는 오히려 미국 생활을 기대하고 있을 정도다. 마침내 젤다에게 의사를 전달했을 때에도 젤다 역시 축하할 일이라며 인사를 건넸다. 주말마다 마주한 풍경들, 한강공원의 모습들이 로건에겐 어떤 의미일까. 토요일마다 로건이었던 그는 김성호로 살아갈 것이다. 쓸쓸함이 가득 묻어난다. 소설의 마지막이 하나의 장면이 되어 박힌다.


카페 밖으로 나온 뒤 그는 잠시 문 앞에 서 있었다.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그를 지나 자전거도로로 나아갔다. 그는 헬멧과 선글라스를 쓴 사람들의 옆모습과 군더더기 없고 날렵한 뒷모습을 보았다. 무언가 그의 앞으로 계속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고 자신이 무엇을 선택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러자 비로소 마음이 아팠다. ( 「토요일 아침의 로건」 중에서)


담담하고 차분한 슬픔은 ‘나’와 여덟 살 차이가 나는 큰이모의 딸 인주 언니 이야기를 그린 백수린의 「빛이 다가올 때」에서도 비슷하다. 시력을 잃은 큰이모를 위해 모든 걸 포기하고 직업마저 큰이모가 바랐던 교수가 된 인주 언니가 대학생 때 과외를 받았다. 시간이 지나 간호사로 해외취업을 한 나는 교환교수로 뉴욕 온 인주 언니와 재회한다. 뉴욕에서 시간을 보내며 나는 인주 언니는 큰 존재였지만 자신처럼 누군가 좋아하며 설레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러나 마흔 넘은 인주 언니가 스무 살 갓 넘은 남자를 사랑하는 일, 언니의 감정을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여겼다. 인주 언니의 나이가 되어 과거 사춘기 시절 교생선생님을 사랑했던 자신처럼 인주 언니도 그럴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내 생각대로 감정을 판단했다는 미안함.


타인이 느꼈던 방식 그대로 세상을 느껴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얼마나 헛된가. 우리는 오직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대로만 느낄 뿐이다.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그렇다. ( 「빛이 다가올 때」 중에서)


의 감정과 의도를 알아차리는 일은 이처럼 어렵다. 눈치챘다고 해도 내가 느끼는 눈치와 상대가 느끼는 눈치가 같다는 보장은 없다. 나머지 세 편의 소설도 그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재난에 대비하는 과정을 그린 것 같지만 위기 상황에 대피소에 모인 사람들이 서로의 어려움을 알아차리고 도와주는 최은미의 「그곳」, 비대면으로 진행되는 노동의 현실을 그려낸 구병모의 「있을 법한 모든 것」, 아내의 고통을 안다고 여긴 남편의 제안으로 시작된 요트 여행에서 요트 난파로 위험한 상황에 이르고 그 순간 자신의 내면을 마주하는 손보미의 「끝없는 밤」.


상대의 모든 말과 행동을 눈치채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보통과 다른 어떤 표정이나 감정을 살피는 일은 필요할 것이다. 상대에게 바라는 것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말이 아닌 문자, 쉼표, 이모티콘에 담긴 표정을 읽는 일 어렵지만 노력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소설을 읽는 일도 그러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늘을 잡아라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9
솔 벨로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남동생은 매주 복권을 산다. 복권을 살 때 내가 옆에 있으면 그중 하나는 나를 준다. 내 돈 주고 복권을 사지도 않으면서 그 복권이 당첨되었는지 은근 기대를 한다. 혹시나, 혹시라도 하면서 QR코드를 확인한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동생에게 한 번쯤은 그런 일이 생기면 좋겠다고 바란다. 물론 동생은 요행을 바라지 않는다. 과거에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렇다. 그저 일을 마치고 친구들과 저녁을 먹고 맥주 한 잔을 마시는 기분으로 복권을 산다.


노벨 문학상 수장 작가 솔 벨로의 『오늘을 잡아라』 을 읽으면서 복권을 사는 마음이 생각났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찌질하다고 해야 하나, 안타깝다고 해야 하나, 주인공 윌헬름 때문에 그랬을까 싶기도 하고 소설을 발표한 1956년이나 지금이나 사는 게 내 맘대로 안 되는 게 인생이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우리의 주인공 윌헬름을 마냥 응원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44세의 중년 남자 윌헬름의 우유부단한 성격이 답답하기도 하고 어쩌자고 정신을 못 차리나 싶기도 하다가 오죽하면 저럴까 싶은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그도 인생이 이리 흘러갈 줄 몰랐을 것이다. 대학 때 배우가 될 줄 알고 학교를 그만두었지만 그에게 배우란 타이틀은 주어지지 않았다.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고 직장 생활을 열심히 하고 결혼생활에 충실했더라면 과거 배우 활동은 멋진 에피소드가 되었을 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현재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이혼도 못하는 상태로 집을 나와 아내에게 두 아들의 양육비와 생활비를 지금 해야 하는 상황이다. 설상가상으로 애인도 있다. 아내와 언제 이혼할지 알 수 없는 윌헬름를 언제까지 믿고 기다려줄지 모르지만.


회사를 그만둔 이유만 해도 그렇다. 기대했던 승진을 사장 사위에게 빼앗기고 회사를 나와버린 것이다. 심정이야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박차고 나오다니. 어쩌면 윌헬름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바로 의사인 아버지였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현직에서 물러난 아버지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아들에게 유산을 남겨줄 수는 있겠지만 현재로는 한 푼도 줄 생각이 없다. 그런데 이 두 부자 같은 호텔에 머문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의 하루를 잘 알고 누굴 만나는지도 다 안다. 윌헬름는 자신의 경제 상황을 아버지에게 알리고 도움을 받을 기회를 엿보는데 호락호락하지 않다. 두 부자 사이를 아는 늙은이들의 말을 듣기도 싫고 자신을 아이 대하듯 잔소리하는 아버지도 싫다.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아들이 어울리는 탬킨 박사라는 작자가 영 수상해서 멀리하라고 해도 윌헬름은 통 들어먹지 않는다. 사기꾼이 분명한데 아들은 그걸 모르고 있다. 그러나 윌헬름은 탬킨 박사를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의 화려한 언변과 확인할 수 없는 과거 이력에 이미 빠져 돈을 맡기고 선물 투자를 시작했다. 그들이 투자한 종목은 하락세를 보여 윌헬름은 돈을 빼고 싶은데 탬킨은 걱정하지 말라고 여유를 부린다. 탬킨 박사의 말은 구구절절 옳은 것처럼 보인다. 이 얼마나 공감가는 말인가.


“우리한테 과거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미래는 근심 걱정만 가득하고. 진짜는 현재뿐이야. ‘지금 여기 ’뿐이라고. 오늘을 잡아야지” (97쪽)


그럼에도 소설을 읽으면서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탬킨이 진짜 사기꾼이면 어쩌냐 싶어서 그의 느긋함이 의뭉스럽기까지 하다. 진짜 잘 아는 게 맞나 싶어서 제발 윌헬름에게 아버지 말을 듣고 정신 차리라고 말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한데 설령 말이 전해진다 해도 윌헬름이 결단을 내려야 가능한 일이다. 아버지의 진심도 모르는 아들이지 않은가. 그렇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누가 나 대신 선택과 결정을 하겠는가.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예상이 맞아떨아졌다. 탬킨은 사라졌고 윌헬름은 그를 찾아 나선다. 작정하고 달아났다면 어떻게 그를 찾겠는가. 복잡한 뉴욕의 수많은 인파 속에서 탬킨 같은 남자를 따라가다 모르는 이의 장례식장 안으로 들어간다. 한 남자의 장례식장에서 그는 오열하고 만다. 윌헬름이 무엇을 느꼈을지 알 수 없다. 그가 그 순간 얻은 깨달음을 알 수 없다.


눈물이 앞을 가려 제대로 볼 수 없는 윌헬름의 눈앞에서 꽃다발과 불빛이 황홀하게 어우러졌다. 바다처럼 웅장한 음악소리가 귀까지 차올랐다. 그는 눈물이 가져다주는 위대하고 행복한 망각의 힘으로 군중 한복판에 숨어들었지만 음악은 거침없이 그의 내면으로 쏟아져들어왔다. 윌헬름은 그 소리를 들으며 슬픔보다 더 깊게 가라앉았고, 애끓는 울음을 뚫고 마침내 무엇보다 절실했던 마음의 안식을 찾아 더 깊이 내려갔다. (172쪽)


이 모든 게 단 하루의 일이다. 그렇다면 윌헬름은 오늘을 잡지 못한 것일까. 잡은 것일까. 그가 남은 인생은 진짜 오늘을 잡고 오늘을 살기를 바랄 뿐이다. 그건 현재의 오늘을 살아가는 윌헬름에게도 해당된다. 소설 속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은 오늘의 그것과 닮았고 투자 시장도 다르지 않다. 중년 남자의 고민과 윌헬름이 뉴욕을 벗어나고 싶은 욕망도 비슷하다. 잡힐 듯 잡히지 않은 오늘을 사는 일, 녹록지 않다는걸. 인생이 그렇다는 걸 거듭 확인한다. 남동생은 이번 주에도 어김없이 복권을 샀을 것이다. 주말까지 확인할 수 없는 기쁨을 기대하고 누리기를...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자 2024-03-12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리뷰가 마치 영화 한 편을 본 것 같아요 ....

자목련 2024-03-13 12:53   좋아요 1 | URL
달자 님,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영화나 연극으로 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만 모르고 이미 나왔을지도...
 

매화축제가 시작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꽃대궐이 시작될 모양이다. 봄은 매년 오는데 왜 이리 설레는 걸까. 그런데도 어떤 감정은 해가 바뀌어도 살아나지 않고 메마르다. 연애 세포를 깨워야 한다는 우스갯소리처럼 연애 감각을 깨워야 한다. 직접적으로 누굴 사랑하거나 연애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말이다. 딱딱하게 굳어 끝내 바스러질지도 모를 감정에 노크하는 시를 만났다. 국내 최초의 시(詩) 큐레이션 앱 ‘시요일’에서 기획한 다섯 번째 시선집 『이 연애에 이름을 붙인다면』에 수록된 시들이다.



목차를 살피며 내가 좋아하는 시인의 이름을 발견하고 반가웠다. 아, 그래 그 시집에 그런 시가 있었지. 기억을 떠올리며 나는 이 시를 처음으로 읽었다. 사랑에 전부를 걸어도 후회하지 않을 당당한 자신감, 끝이 어떨지라도 누가 뭐래도 나는 지금 사랑을 선택하겠다는 당찬 기백이 느껴진다고 할까. 그러다 이 사랑이 혼자만의 사랑이라면 얼마나 처절한가 생각하니 가시를 삼킨 것만 같다.






내 사랑에는 파국이 없으니

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


과육을 파먹다

그 속에서 죽은 애벌레처럼

순진한 포만으로


돌이킬 수 없으니

계속 사랑일 수밖에요 (신미나 「복숭아가 있는 정물」)


그리고 이런 시를 읽고 울컥한다. 연애가 시작되고 이어지는 날들, 모든 날 모든 것이 행복하다가도 어느 순간 연인의 표정에 시시각각 연애가 흔들린다. 아, 나도 연인의 얼굴과 말투 하나에 온 신경을 쓰고 살피던 시절이 있었다는 게 떠오른다. 돌이켜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서로에게 스며들기를 바랐던 날들이다. 그게 진정 연애의 모습일 것이다.


너는 내 표정을 읽고

나는 네 얼굴을 본다


너는 쾌활하고 행복하게 마시고 떠든다

그래서

나도 쾌활하고 행복하게 마시고 떠든다


그러다 너는 취해 운다

그래서 나는 취하지 않고 운다


눈물을 닦으며 너는 나를 사랑한다

눈물을 닦으며,

나는 네 사랑을 사랑한다


너는 나를 두고 집으로 갈 것이다

나는 너를 두고, 오래 밤길을 잃을 것이다


내 얼굴엔 무수한 표정들이 돛처럼 피어나고

내 얼굴은 무수한 표정들에 닻처럼 잠겨 있다 (이영광 「얼굴」)







어떤 시는 내 마음 같고 내 연애의 기억 같다. 어떤 시는 시인의 사랑 같고 어떤 시는 시인의 고백 같다. 그게 무엇이든 무슨 상관이랴. 시를 읽고 시에 취하고 시를 품고 시를 흠모하고 시를 만지면 그만인 것을. 그래도 『이 연애에 이름을 붙인다면』 란 시집의 제목처럼 모든 사랑은 저마다 다른 이름이 있을 것이다. 사랑이 끝난 후에도 그 사랑의 이름은 지워지지 않고 환한 봄날에도 시리게 추울지도 모른다. 사랑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삶을 송두리째 무너지게 하거나 삶을 환희로 가득 차게 만드는지.


내 팔을 가져다가 머리를 베고 잠들었던 아이는

자다가 내 팔을 내동댕이친다

아이가 휘두른 내 팔이 얼굴을 때린다

사랑은 곧잘 내 얼굴에 던져지는 모욕 받은 내 팔이다

줄을 타고 작두를 타고 공중그네를 타는

힘겨운 재주 부리다가, 내가 하는 사랑은

네가 나를 가져다 놓았다 하기에 (이선영 「사랑, 그것」 )


- 열차가 끽, 서는 소리

- 소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가장 아름다운 꿈은,

그 애와 함께 있는 꿈이에요. (한정원 「25」 )


모호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세계로 이끄는 시들이다. 67편의 시에는 차마 말하지 못한, 표현하지 못한 사랑의 형태가 가득하다. 모든 사랑의 이름을 겹겹이 쌓아 올린 무너지지 않을 탑이라 해도 좋을 시선집. 당신을 붙잡는 시가 있다면 그것이 당신 사랑의 이름이 될 것이다.


오랜만에 시집을 꺼내는 시간이 될지도 모른다. 모아두기만 해서 미안했던 시집, 그 안에서 마음을 두드리는 시를 만나는 일. 봄을 핑계로 시로 안부를 전해도 좋을 것 같다. 쑥스럽고 이상할지라도 봄이니까. 봄이라서 그랬다고 말을 덧붙이며.
















댓글(15) 먼댓글(0) 좋아요(4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4-03-11 09: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헐........매화축제를 한다고요??? 벌써 꽃이??
헐...... 자목련 님 연애하신다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연애에 이름을 붙인다면> 진짜 연애 시만 가득한 거 같네요?! ㅎㅎㅎ

자목련 2024-03-11 10:16   좋아요 0 | URL
남쪽은 매화가 한창이라고~~
남은 생애 연애는 없을 듯 합니다. ㅋㅋㅋ
전략적으로 기획한 시집인 것 같아요.

blanca 2024-03-11 13:06   좋아요 1 | URL
저도 자목련님의 연애 대목에 눈이 커졌어요. ^^ 남쪽 벌써 매화가 폈다고요? 봄이 가는 게 왜 이리 아깝나요.

레삭매냐 2024-03-11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 드디어 꽃대궐이 시작되려나 봅니다.
저희 집에 네그리다 튤립이도 꽃대를
올리고 있더라구요. 드디어 !

저도 어제 <패터슨> 시집을 도서관에
서 보려고 가져 왔으나 아직 펴보진
못했네요.

시집을 잘 읽지 않지만 그래도 봄이니깐요.

자목련 2024-03-12 16:43   좋아요 0 | URL
아, 기대돼요!
네그리다 튤립 얼마나 예쁠까요!

네, 봄이니까요~~

blanca 2024-03-11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새 시집 읽기 시작했어요. 한정원 시집 참 좋죠. 옮겨 주신 시도 참 좋네요. 봄 꽃망울 보면 마음이 싱숭생숭합니다. 시인들은 천재 같아요. 시인들 대표작 모은 문학동네 시인선 050도 살짝 추천하고 갑니다.

자목련 2024-03-12 16:45   좋아요 0 | URL
한 시인의 시집도 좋지만 이렇게 엮은 시들도 좋더라고요.
풀판사가 50, 100 특집으로 시선집을 내주지 고맙죠^^

새파랑 2024-03-11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집 책탑이 너무 멋집니다. 봄이 오긴 왔나 봅니다~!!

인용된 시들이 다 좋네요~!!

자목련 2024-03-12 16:46   좋아요 1 | URL
아직 춥지만 봄이에요. 날도 길어지고 한낮에는 겉옷이 무겁게 느껴지는...

망고 2024-03-11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화가 벌써요? 저희집 매화는 이제 조금 움 틀까말까 하는데요 사실 이것도 올해는 빨라요 유독 봄이 빨리 온거 같아요^^

자목련 2024-03-12 16:47   좋아요 0 | URL
제가 사는 이곳도 아직은 꽃이 귀하지만 남쪽은 이미 환한 꽃들이 가득한 것 같더라고요.
망고 님의 마당에서 피어날 꽃들도 곧 만나겠지요?

구단씨 2024-03-11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요즘 읽고 있는데, 좋네요.
소개해 주신 시 중에서 <얼굴> 인상적이구요.
올해에는 다른 지자체에서도 봄꽃 행사를 조금 일찍 시작하더라고요.
시골 동네의 매화 나무에 벌써 꽃이 피었어요.
봄이네요...

자목련 2024-03-12 16:47   좋아요 0 | URL
봄이 점점 빨라지는 걸 실감하는 날들이에요.
작년하고 또 다른 것 같아요.
시와 꽃이 있는 봄!!

그레이스 2024-03-13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육을 파먹다
그 속에서 죽은 애벌레처럼
순진한 포만으로˝
너무 좋아요
이래서 시를 읽지 싶네요.^^♡

자목련 2024-04-15 14:24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 님, 답글이 늦었습니다.
시는 정말 놀랍고 대단해요!
그래서 시인이 더 궁금해지기도 하고요^^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6
문진영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곳이 아닌 곳에서 살고 싶었다. 그러니까 좀 더 크고 넓은 도시 같은 곳. 한때 그런 곳에서 살았고 지금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을 꿈꾸지 않는다. 그곳이 어디든 산다는 건 매한가지니까. 누군가 떠나고 누군가 남고 그게 삶의 이치라는 걸 알지만 떠나고 남는 마음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떠나고 싶어서 떠나고 남고 싶어서 남은 돌아오고 싶어서 돌아오는 게 아니라는 걸 말이다. 사실, 내 마음 하나도 벅차니 당연한 일이다. 어떤 마음을 헤아리는 것은 가능할까. 문진영의 『딩』 을 읽으면서 그런 마음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딩』은 아버지가 죽고 집을 정리하기 위해 고향 K로 돌아오는 지원을 시작으로 주미, 재인, 영식, 쑤언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옴니버스 형태의 소설이다. 작은 어촌 마을인 K를 배경으로 그 안에서 스치고 지나가며 연결된 사람들, 특별할 것 없는 다섯 명의 사연은 소리 없이 내리는 눈처럼 가만히 쌓이고 스며든다. 지원은 엄마가 돌아가시고 대학 진학을 하면서 절대 돌아오지 않을 결심으로 고향을 떠났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장례를 치르고 집을 정리를 위한 목적으로 내려왔다. 돌아온 것이 아니었다. 장례식장에서 연락처를 받은 주미에게 연락을 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주미는 부모님이 운영하는 모텔(지금은 호텔로 이름을 바꾼)에서 일을 하면서 언젠가 고향을 떠나기만을 기대했다. 그러나 여전히 이곳에 남았다. 첫사랑과 결혼을 기대했던 연인도 지원을 떠났다. 지원도 모든 걸 정리하고 떠날 생각이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다. K는 서핑으로 유명해져 주미의 호텔을 찾는 이도 많다. 똑같은 날들을 보내고 있는데 장례식에서 만난 지원이 연락을 하고 둘은 만난다. 영식의 포장마차에서 둘은 소주를 마시며 지원의 사정과 과거의 일들을 이야기한다. 함께 지원의 집에 와서 잠까지 잔다. 지원을 위해 북엇국을 끓이고 메모를 남기고 다시 호텔로 향한다.


남겨진 사람이 아니라 그냥 여기 있는 사람. 누군가 나 왔어, 하고 돌아왔을 때 거기 있는 사람. 아무 때나 연락해도 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은 세상에 드물고, 주미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72쪽)






지원이 떠난 사람이면 주미는 남은 사람이었다. 마치 돌아온 이를 맞이하려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처럼. 지원이 완전히 돌아온 건 아니지만 주미가 있기에 지원은 언제들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가 하면 남아서 기다리는 게 아니라 찾아 나선 사람도 있다. 주미의 호텔에 묵은 재인이 그러하다. 재인은 호텔에서 죽은 연인 P가 묵었던 방에서 지낸다. 재인과 P는 하와이에서 만났다. 재인은 어학원 강사였고 P는 한국에서 온 학생이었다. 둘은 곧 연인이 되었고 P는 서핑을 즐겼다. 그랬던 P가 K의 호텔에서 목을 매어 죽었고 재인은 지금 그곳에 있고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는 영식의 포장마차에 들른다.


영식의 포장마차는 지원, 주미, 재인을 연결하는 공간이다. 한때 단란한 가정을 꾸렸던 영식은 사고로 아이를 잃은 후 자포자기한 상태가 되었다. 삶을 포기하려는 순간 어린 주미 덕분에 살았고 포장마차를 시작했다. 베트남에서 온 노동자 쑤언이 포장마차 일을 돕는다. 술과 안주만 파는 게 아니라 식사가 필요한 이들에게는 밥을 팔았다. 혼자 포장마차를 찾는 재인이 그런 손님이었다. 쑤언은 배를 타는 일을 했지만 일이 없을 때 영식을 도왔다. 함께 일했던 마수드가 죽고 쑤언은 남았다. 베트남을 떠난 쑤언이 돌아갈 곳은 베트남이었다. 한국의 겨울과 눈을 딸 누에게 들려주지만 눈이 없는 그곳이 돌아갈 곳이었다.


떠나고 돌아오는 게 삶이라면 어떤 이별도 아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삶은 돌아오지 못하고 어떤 삶은 떠나지 못한다. 어딘가 부유하다 머물기도 하고 어딘가 부유하다 상처가 나기도 한다. 돌아갈 그곳이 있어 이곳을 버틸 수 있는 삶, 떠날 그곳을 기대하기에 이곳을 견딜 수 있는 삶, 그리고 그들을 가만히 안아주는 남겨진 삶. 『딩』의 지원, 주미, 재인, 영식, 쑤언은 서로가 서로에게 그런 삶이었다. 떠날 것을 알기에 마음을 단속하는 게 아니라 머무는 동안 마음을 기대고 나눠줄 수 있는 삶. 쑤언이 등대 계단참에 둔 귤 하나가 지원의 손으로 옮겨가는 것처럼. P가 재인에게 알려준 국물 맛을 영식의 포장마차에서 만나는 것처럼.


보드에 뭔가가 부딪혀 상처가 나면 부른다는 ‘Ding’을 가만히 따라 읽는다. 상처가 없는 삶은 어디에도 없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산다는 건 상처를 받는 일 투성이지만 나 또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할 테니까. 그런 상처가 무섭다고 삶을 포기할 수 없으니까. P가 재인에게 한 말처럼 당연한 거니까. 상처가 남긴 흉터는 때로 성장의 증거가 되기도 하고 앞으로 나갈 동력이 되기도 하니까.


서핑을 하면 딩 나는 건 당연한 거니까. (...) 그건 …… 내가 오늘도 파도에 뛰어들었다는 증거니까. (85~86쪽)


문진영의 『딩』은 삶이라는 파도에 뛰어드는 모두를 응원한다. 큰 소리로 모두가 외치는 함성은 아니다. 가만가만 지켜보며 어디 다친 데는 없냐고, 괜찮냐고 말해주는 그런 목소리다. 슬그머니 귤 하나를 쥐여주고 뜨근한 어묵 국물을 한 컵 담아주는 그런 마음. 작지만 사라지지 않을 마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