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본 것 - 나는 유해 게시물 삭제자입니다
하나 베르부츠 지음, 유수아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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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댓글 가운데 광고는 삭제한다. 스팸 차단 키워드를 이용해 관리한다. 불특정 다수가 읽지 않기를 바라는 글은 이웃 공개나 비공개로 올린다. 운영자니까 내 블로그라서 가능하다. 내가 정한 기준이다. 누구나 볼 수 있는 공간의 게시물의 유해성 판단은 누가 하는 것일까. 어떤 기준으로 영상이나 이미지를 삭제하는 것일까. 하나 베르부츠의 소설 『우리가 본 것 : 나는 유해 게시물 삭제자입니다』를 읽기 전까지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인 만큼 다양한 게시물이 올라올 것이고 나쁜 의도를 가진 이도 있을 터. 누구나 볼 수 있으니 혐오나 공포를 조장하는 것들은 제재를 가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주어진 가이드라인에 따라서 이미지나 게시물을 삭제하는 일의 어려움이나 트라우마는 생각한 적이 없다.


AI의 기술로 유해 이미지를 자동 삭제한다는 글을 읽은 적은 있다. 그러나 삭제할 대상이나 이미지를 일일이 입력하는 건 사람이 해야 한다고 기억하는데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의 일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다. 좋은 것도 반복해서 보면 질리고 감흥이 없는데 매일같이 유해한 것들을 보고 삭제 여부를 검토하는 일은 얼마나 힘들까. 누군가 보수가 높으니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직접 해보지 않은 일에 대해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


소설은 대기업 하청업체 ‘헥사’에서 콘텐츠 감수사였던 케일리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들려주는 이야기다. 인터뷰 형식이라 다큐멘터리를 시청하는 기분이다. 그녀는 누구의 질문에 답하는 것일까. 얼핏 사회고발 프로그램의 PD가 아닐까 싶지만 변호사다. 헥사에서 일한 동료들이 기업을 상대로 집단소송을 진행하고 케일리도 동참하기를 바란다. 케일리는 동참할 생각이 없다. 그녀에겐 그저 직장일 뿐이니까. 집단소송이 이슈화되면서 사람들은 케일리에게 그곳에서 무엇을 봤냐고 묻는다. 가장 최악이 무엇이냐고 답을 기다린다. 호기심과 관음증을 바탕으로 한 무례한 질문이다. 그러나 만약 나라면 그 궁금증을 피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케일리는 업무가 끝나면 그것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랬다고 여겼던 건 아닐까. 케일리에겐 동료가 있었고 헥사에서 새로운 연인도 만났다. 아름다운 ‘시흐리트’를 만난 이 직장이 유해할리 없다. 그러나 업무 환경은 시흐리트에겐 트라우마가 되었다. 시흐리트는 자신의 정신건강을 위한 먹거리를 주문하고 보호하려 애쓴다. 휴가를 내기도 한다. 케일리가 특별한 사람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영리한 작가는 케일리를 통해 독자가 판단하기를 원할 뿐이다.


무엇보다도 이 새로운 동료들은 내가 낮 동안 무얼 봤는지 아는 유일한 사람들이었죠. 우리는 많은 얘기를 나누지 않아도 그런 게시물이 어떤 느낌이고 의미인지 알 수 있었어요. 근무 시간에는 주로 무엇을 내리고 올릴 건지 얘기를 나눴어요. 이따금 누군가 “야, 지금 진짜 지랄 같은 걸 봤어”라고 말하면 나머지 우리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죠. 잠시나마 홀로 내버려둬야 한다는 걸 모두 알고 있었으니까요. (52쪽)


소설을 읽으면서 혼란스러웠다. 왜냐하면 나는 구독하는 유튜브가 없고 숏폼이나 릴스 같은 영상을 찾아보지 않지만 잔인하고 영화나 드라마에서 잔인하고 혐오스러운 영상을 볼 때가 더 많다. OTT에서 보는 드라마나 영화는 갈수록 폭력성은 강하고 노출은 심하고 과도하다. 그곳의 심의는 누가 하는 것일까. 결제를 했으니 그곳에서 유해한 게시물은 없는 것일까. 오직 나의 판단과 기준만 남은 것인가.


내가 헥사에서 일하는 노동자라면 케일리처럼 견딜 수 없을 것 같다. 일하는 동안 휴대폰을 지참할 수 없고 유선전화조차 없는 환경에서 정해진 클립을 다 확인해야 하는 업무.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영상을 보면서도 영상에서 누군가 죽음의 위기에 놓여있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 퇴사를 결정한 동료의 말이 소설의 핵심이 아닐까.


“그냥 더 이상 인간 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뿐이야.” (127쪽)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문제라는 걸 인식하지만 소설 속 헥사처럼 음지의 영역에서 또 다른 피해자를 낳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많은 이들이 이 소설을 읽었으면 좋겠다. 짧은 분량으로 많은 질문을 던지는 소설이다. 지금도 끊임없이 게시물과 동영상이 업로드된다. 누군가 유해하다고 여긴 게시물은 누군가 무해하다고 판단하여 삭제 대상이 아닐 수 있다. 나는 그런 게시물 게시자가 아닌가, 유포자는 아닐까. 지금 내가 클릭한 이 게시물은 유해한가, 아니면 무해한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다양한 콘텐츠가 공포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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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7-04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거 다락방 님이 궁금해했던 그 책이네요?! 역시 리뷰는 자목련 님이 먼저 ㅋㅋㅋㅋㅋㅋ

자목련 2024-07-04 11:56   좋아요 1 | URL
부장 님은 너무 바쁘시니 ㅋㅋㅋㅋ

다락방 2024-07-05 17:18   좋아요 1 | URL
저도 사두긴 했는데 말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4-07-04 12: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으 정말 힘든 직업인 것 같아요... ㅠㅠ 유포된 성착취물 찾아서 삭제하는 일을 하는 분들도 다른 데서 봤었는데 에휴... 올리는 것들 지옥에나 가라~~!!
자목련님 리뷰 잘 읽었습니다!

자목련 2024-07-05 17:14   좋아요 1 | URL
그러니까요. 퇴근 후에도 영상이 따라올 것 같아요. 우리나라에도 분명 이런 직업이 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
말씀처럼 N번방 같은 놈들 다 지옥에 가야~~
독서괭 님, 주말 신나고 즐겁게 보내세요^^

blanca 2024-07-04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 그래도 장바구니에 담아 놓았는데 자목련님의 리뷰는 믿고 구입하렵니다.

자목련 2024-07-05 17:16   좋아요 0 | URL
제 리뷰는... 이 소설 괜찮았어요. 소설을 읽으며 생각도 많이 했고 이제 영상을 접할 때 쉽게 클릭하지 못할 것 같아요. 블랑카 님의 리뷰, 기다릴게요^^
 

드라마나 영화의 소재가 되는 마녀, 『마녀의 역사』 란 제목을 보고 마녀사냥, 마녀재판, 화형 같은 게 떠올랐다. 정확하게 마녀에 대한 개념도 모르면서 말이다. 이처럼 우리는 만들어진 이미지와 이야기를 신뢰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마녀는 누구일까? 그 시작은 언제였을까. 그리고 왜 우리는 지금까지 마녀사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까. 『마녀의 역사』 란 책은 그런 궁금증을 불러온다.


책은 중세에서 근대까지 유렵에서 벌어진 마녀사냥, 마녀재판에 대해 들려준다. 누가 누구를 주도적으로 마녀로 만들었고 재판에 이르렀는지 말이다. 풍부한 자료와 해설, 그리고 강렬한 일러스트로 마녀를 생생하게 그려내고 그 시대에 빠져들게 만든다. 초기의 마녀는 병을 고치고 사회를 지키는 존재였다고 한다. 고대 중동에서는 여신을 숭배했다. 고대 마녀들은 사회에 꼭 필요했다. 그러다 전사, 싸움, 남성 중심으로 남성 우위 문화와 종교의 발전하면서 마법과 마법을 쓰는 여성들에 대한 시선이 변화하였다. 기독교가 발전하면서 요술에 단호한 태도를 취한 것이다. 요술을 쓰고 마법을 쓰는 것은 기독교와 대립하며 악마와 결부된 것이라 여긴 것이다.





이처럼 종교든, 집단이든,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목적을 위해, 또는 정치적으로 상대를 무너뜨리고 악의적 소문을 내고 흠집 내는 일은 어느 시대나 똑같이 자행되어 왔다. 그 방식과 형태만 다를 뿐이다. 책에서 만난 마녀사냥을 통해 한 사람을 죽음으로 내모는 잔혹함에 경악한다. 여기 공작부인의 경우를 보자. 공작부인이 마녀라고 누가 생각하겠는가. 잉글랜드 남동부 서리주의 하급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왕족과 결혼한 ‘엘리노어 코브햄’은 왕위 계승자의 아내였다. 그러니 곧 잉글랜드의 왕비가 될 수 있었다. 그녀는 왕비 자리를 노리고 요술을 쓴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재판의 목적은 그녀와 남편을 무너뜨리는 거이었다. 앨리노어가 신비 신앙(점성술)에 의존했다는 것, 그로 인해 왕비가 될 수 있을지 점쳤을 게 문제였다. 당시 강력한 권력을 지닌 교회는 신앙으로부터 일탈한 자를 벌한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요술로 고발당한 왕가의 여성은 헨리 4세의 과부 ‘잔’도 있었다. 의붓자식 헨리 5세르 저주한 혐의였다.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4세와 결혼을 위해 요술을 벌였다고 규탄 받은 ‘엘리자베스 우드빌’도 있다. 이쯤에서 조선시대 궁궐을 떠올리는 이도 있을 것이다. 단 한 명 왕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여러 후궁들의 다툼, 때와 장소만 다를 뿐 욕망을 채우기 위한 모습은 다르지 않다.


교회에서 이단을 근절하고자 대부분 여성을 마녀로 표적 삼았다는 건 안타깝다. 종교개혁자들도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마르틴 루터는 여성은 허약하므로 요사스러운 약속에 끌린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했다. 16세기부터 17세기 유럽의 마녀사냥으로 기록상 적어도 4만 명이 처형당했다고 한다. 기록이라는 점을 생각하며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어느 시대든 반사회적 선동가가 출현해 민중에게 불안과 편견을 심고, 사회에서 일어나는 재난의 원인으로 특정한 그룹이나 개인을 희생양으로 만든다. 희생자는 유대인, 이미, 정부, 유럽연합, ‘지옥에서 찾아온 이웃’ 등 다양하나, 그것이 누구든 이 사회적인 병의 증상은 거의 같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알아야 한다. (『마녀의 역사』, 89쪽)


마녀 사냥꾼이 등장은 당연했다. 책에서 소개하는 마녀 분간법을 보니 어처구니가 없다. 몇 개를 언급하자면 과부이며, 고양이, 두꺼비 등을 기르고, 매주 교회에 가지 않고, 해가 진 뒤 밖을 나돈다, 혼잣말이 많다. 현대 사회에 적용하자면 내 이웃은 마녀가 분명하다. 그런가 하면 악의적인 마술로부터 몸을 지키는 방법도 흥미롭다. 고양이 시체를 벽에 묻는 관습, 마녀의 의자라 불리는 굴뚝의 튀어나온 돌, 밝은 색 유리로 만들어진 구체인 마녀의 공, 마녀에 대항하는 절대적인 효과를 발휘한다는 식물 마가목.


중세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충분히 만족할 것이다. 마녀에 대한 다양한 시선과 고찰로 마녀를 만나볼 수 있는 책이다. 놀랍고 흥미로운 역사 속 마녀의 이야기는 현재를 돌아보게 만든다. 지금 우리는 어떤 시대를 사는지 말이다. SNS, 인공지능, 딥페이크를 통해 또 다른 마녀사냥을 하는 건 아닐까. 소문의 진위, 확인되지 않은 사실로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고 가고 있는 건 아닌지 살펴야 할 것이다.


『마녀의 역사』를 읽으며 떠오른 책이 있다. 『세계의 악녀 이야기』다. 마녀와 악녀, 둘 중 누가 더 사회에 해를 입혔을까. 아니, 마녀와 마찬가지로 누가 그녀를 악녀로 만들었는지가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역사에 남은 여성의 위대한 업적은 많지 않다. 대신 미모를 내세운 계략을 위해 이용되거나 부와 사치를 일삼에 민중의 적이 된 이야기를 떠올리기 쉽다. 어린 왕이 즉위했을 때 일정 기간 국정을 어머니나 할머니가 대리로 처리하던 수렴청정과 권력을 유지하려고 반대 세력을 몰살하는 드라마가 생각날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모두 악녀일까. 어쩌면 그들은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드라마 <선덕여왕> 속 미실을 연기한 고현정의 잔인하고 표독스러운 포정이 자꾸만 악녀와 겹쳐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저자 시부사와 다쓰히코가 선택한 12명의 악녀는 악녀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 책이 1964년에 나왔고 문고판 후기가 1982년에 쓰인 것으로 보아 적어도 60년 전에 나온 책으로 책에 등장하는 12명에 대한 평가는 다를 수 있다. 고백하자면 나는 악녀로 선택된 12명 가운데 엘리자베스 여왕, 마리 앙투아네트, 클레오파트라, 측천무후, 마그다 괴벨스의 이름만 알고 있을 뿐 나머지는 알지 못했다. 그들을 기억하는 이유도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만났기 때문이다.


저자가 소개하는 악녀들은 대체로 명문가에 태어났지만 근친상간이나 정략결혼으로 행복하다고 할 수 없는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 때문에 외도 상대 때문에 남편을 독살하거나 위험에 빠뜨리는 경우가 많았다. 저자가 소개한 악녀는 어린 나이에 결혼한 것도 모자라 남편은 전쟁터에 나가고 시어머니의 잔소리를 들어야 하는 우울한 삶에서 쾌락을 선택하거나 뛰어난 미모나 결혼으로 얻는 지위와 권력을 휘두르는 음란한 여성이다. 물론 하나같이 참혹한 결말을 맺는다.


책에 의하면 평생 처녀로 살다 간 엘리자베스 여왕은 수많은 남성과 관계를 맺었다. 여왕은 그들이 자신만을 사랑하길 원했지만 상대로 인해 마음고생도 심한 것으로 보인다. 쉰 세 살의 여왕이 사랑한 스무 살의 에식스. 점점 여왕을 등에 업고 거들먹거리는 그를 어떻게 봐줄 수 있겠는가. 야심이 강하고 폭력적이었던 네로 황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의 욕망은 실로 대단한다. 아들 네로에 의해 암살을 당해 생을 마감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측천무후도 다르지 않다. 황제의 여인이 되었지만 질투가 심해 황제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둔 여인은 독살을 하거니 알 수 없는 죽음에 이르렀는데 그 대상은 자식과 며느리까지 다양했다.


12명의 악녀는 만족할 줄 몰랐다. 아마도 자신이 잡은 권력이 영원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자신의 자리를 위협한다고 여기면 모두 제거하려 했다. 자식이든 연정을 품은 상대도 가차없었다. 중세 유럽의 여성들과 괴벨스의 아내 마그다 괴벨스는 성격이 다르긴 한다. 필요 없는 가정이지만 베를린 체육관에서 열린 나치당 집회에 가지 않았더라면 마그다의 인생은 달라졌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여왕, 왕비로 사느라 성이나 궁정에 갇혀 밖을 볼 수 없었던 그들의 삶이 조금은 안타깝기도 하다. 우리 역사를 봐도 그렇지 않은가. 궁궐 안에서 살아내느라 자신만의 탈출구가 필요했던 이들의 이해할 수 없는 모습들. 주술에 빠지고 약과 독에 취할 수밖에 없는 그들은 정신적으로 불안했을 것이다.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저자의 설명처럼 말이다.


끊임없이 무언가에 쫓기듯 이것저것 놀이를 바꾸어가며 새로운 유행을 좇던 그녀의 광적인 향락 습성은 도대체 어떤 성격에 기인할까. 신앙심 깊은 엄격한 어머니로부터 경고를 받은 마리 앙투아네트는 다음과 같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어머니는 대체 저에게 무엇을 하라는 말씀이신지요? 저는 따분해질까 봐 두렵습니다.” 왕비의 이런 표현은 18세기 말의 정신 상태를 여실히 보여준다. 붕괴 직전의 고요함일지도 모른다. 혁명이 발발하기 전, 모든 것이 충족되어 있던 귀족 사회에서는 따분한 이외의 그 어떤 정신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면적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춤을 계속 춰야 했다. (『세계의 악녀 이야기』, 117쪽)


12명의 여성은 악녀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먼 훗날 그들은 재조명될 것이다. 역사는 돌고 악녀의 계보는 추가되고 이어질 것이다. 『세계의 악녀 이야기』는 책으로 만나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같았다. 『마녀의 역사』와 『세계의 악녀 이야기』는 제대로 역사를 읽고 기록해야 한다는 걸 알려주는 책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기록은 중요하고 그것을 해석하는 일도 마찬가지라는걸. 마녀와 악녀란 프레임을 만드는 게 일조하고 있는 게 아닌지 반성해야 한다고.


세계에는 아직 요술의 혐의로 목숨을 잃는 지역이 있다. 이성이 시대라 불리는 현대를 사는 우리도 이러한 상황을 성찰해야 하며,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러한 사상에는 밝은 면이 있다. 오랫동안 추하고 고독한 외지인이라고 비웃음을 사고 두려움을 받아온 마녀들은 우리들에게로 돌아왔다. 긍정적인 존재로 다시 태어난 현대의 마녀 위키와 그들의 마법은 20세기에 착실히 인기를 모아, 긍정적이고 힘차게, 드높은 의지를 품은 커뮤니티를 형성했다. 암흑의 시대를 잊어서는 안 되지만 21세기의 마녀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려 하고 있다. (『마녀의 역사』,1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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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작약의 시간은 끝났지만 시로 작약을 만난다. 늦은 감이 없지 않다. 작약의 계절에 만났으면 더 좋았겠지만 아쉬움은커녕 반갑다. 이렇게 또 작약에 빠져든다. 조용미 시집 『초록의 어두운 부분』에서 발견한 시다. 이 시집을 구매하려고 했던 건 아니다. 안희연의 신간을 살펴보다가 문학동네 말고 창비나 문지에서는 어떤 시집이 나왔나 찾다가 조용미의 신간을 보았다. 목차를 보다가 작약을 보았다. 아니, 작약이라니 그럼 이 시집을 사야지.






저 작약의 본을 짐작해 볼까


내 이파의 작약은 한때 귀신이었다가 한때 기린이었다가

한때 흰뺨검둥오리였다가 한때 벚나무모시나방이었다가

한때 거미게였다가


어쩌면 나였던 누구였다가, 단공도 부단공도 모르는 크게

깨우진 자였다가 공재고택의 향나무였다가


이번 생에 모든 것을 다 이루어 이 고리를 끊으려 했던

그저 사람이라는 이름을 얻은 고독한 자였다가


마침내 확연히 명백한 작약이 되었다 내 앞의 작약이 되었다 (「작약의 본생담」 , 전문)



먼 산 작약

산작약


옆 작약

백작약


저수령 넘어 은풍골로 작약을 보러 간다


당신 없이,


백자인을 먹으면 흰머리가

다시 검어진다


잠을 잘 수 있다


백자인을 먹으면 다시 나의 자리로

돌아간다


측백나무의 씨

온석 같은 열매 속에는


백자인 여섯 알이

가만히

들어 있다


저수령 넘어 은풍골로 작약을 보러 간다 (「작약을 보러 간다」, 전문)







사진첩에서 작약을 찾았다. 백작약, 사라 작약, 레드 참 작약. 작약이 피고 지던 순간을 떠올린다. 올해의 작약이 준 행복들. 그리고 곧 수국이 가져다줄 기쁨도 생각한다. 물론 『초록의 어두운 부분』에 수국에 관한 시도 있다. 그 시는 수국을 마주할 때 읽어야지.


시가 있어 좋다. 시로 작약을 만나서 좋다. 이런 시를 써 준 시인이 고맙다. 유희경의 「심었다던 작약」에 이어 이제 조용미의 작약도 기억할 것이다. 책장에 조용미의 다른 시집이 있다. 모아두기만 한 시집을 펼치는 여름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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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가 날 대신해 소설, 잇다 5
김명순.박민정 지음 / 작가정신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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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손주가 아닌 손녀는 대학은커녕 고등학교도 인문계가 아닌 상고를 가야 한다고 주장하셨다. 물론 나는 그 주장에 반하여 인문계와 대학을 졸업했다. 자식의 편에 섰던 엄마 덕분에 가능했다. 엄마는 딸들이 더 나은 삶을 살기를 원했고 결혼도 늦게 천천히 해도 좋다고 여겼다. 엄마가 돌아가실 즈음 오빠만 결혼을 한 상태였다. 이른 나의 결혼을 결정한 오빠도 마음에 들지는 않으셨을 것 같다. 김명순의 소설을 읽으면서 이상하게 엄마와 할머니 생각이 많이 났다. 시대를 잘못 타고 나서 딸이라는 이유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제대로 표출하지 못하고 그늘에 갇혀 살아온 삶.


『천사가 날 대신해』에는 김명순의 소설이 세 편 수록되었다. 데뷔작인 「의심의 소녀」 와 「돌아다볼 때」, 「외로운 사람들」이다. 「의심의 소녀」 (1917년)엔 제목이 암시하듯 소녀가 등장한다. 평양 대동강 근처의 마을에 ‘범네’라는 이름의 소녀와 할아버지가 이사를 온다. 그러나 둘만 소통할 뿐 동네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는다. 소문만 무성할 뿐이다. 그러다 동네에 한 신사가 나타났다는 소식에 할아버지와 범네는 급히 동네를 떠났다. 놀랍게도 그 신사는 범네의 아버지였다. 불행한 결혼 생활로 범네의 엄마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할아버지는 손녀의 이름도 바꾸고 손녀를 살리려 숨어사는 것이다.


「돌아다볼 때」(1924년)의 주인공 ‘소령’도 평탄한 삶이 아니다. 소령은 신여성이지만 첩의 자식으로 태어나 어머니와 같은 운명일까 주변의 걱정을 산다. 공교롭게 소령은 평양에 강연을 하러 온 이학자 ‘효순’이란 남자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효순은 유부남이었고 이를 안 소령의 고모는 소령의 혼처를 찾아 결혼시킨다. 그러나 소령의 남편은 난봉꾼이었고 시어머니는 모든 걸 소령의 탓으로 돌렸다.


공부를 열심히 한 신여성이지만 자유연애에 대한 확신과 사회 구조는 바꿀 힘은 없었다. 100여 전에 발표한 소설인데 어떤 면에서는 현재의 삶에 대입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여성 혐오와 차별을 고스란히 전해진다. 여성을 대하는 남성의 태도도 다르지 않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소유물로 착각하고 구속할 수 있다는 생각은 왜 변하지 않는가. 「의심의 소녀」의 범네의 아버지는 헤어지자는 말에 여자친구를 살해하고, 이혼한 전처를 죽이는 현재의 남성과 다르지 않다.


장편소설 「외로운 사람들」 (1924년)에서는 시대적 상황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며 신념과 사랑으로 인해 갈등하는 네 남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시대엔 부모가 정해준 사람과 혼인을 맺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순희’와 ‘순철’ 남매는 달랐다. 신연성 순희와 사회학자 정택은 사랑을 위해 도피했다. 각자 정혼자가 있었다. 그들의 사랑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순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둘은 같이 떠난 것과 다르게 따로 돌아왔다. 순희의 동생 순철은 어린 나이에 두 살 많은 복순과 혼인했다. 어린 시절부터 봐왔던 사이라 어른의 뜻에 따라 혼인하는 게 당연하다 여겼다. 그런데 유학에서 청국 왕녀 순영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순영에게 결혼한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양다리를 걸치게 된다. 순영이 조선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순철의 순영과 복순 사이에서 갈등한다.


서로 잘 이해하는 두 연인이 모-든 관계를 끊고, 모-든 소식까지 서로 알리지 않으면서, 오히려 다른 곳에 사랑을 옮기지도 아니하였다면 세상은 그 연고도 모르고 웃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이 믿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운명의 위협을 받아가면서,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발자국마다 그들의 피를 흘리면서 그들의 꿈꾸는, 어떤 목표를 향하여 걸어나간다. 이런 일이 세상에는 흔히 없는 일이요, 사람들은 다- 모르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외로운 사람이 되었다. ( 「외로운 사람들」, 117~118쪽)


「외로운 사람들」에서 정택과 순철은 자신의 사랑의 정당성을 찾기 위해 고뇌한다. 말이 고뇌이지 뻔뻔하다. 정택은 조선에서 다른 여성을 만나는데 그녀를 보호할 이가 자신뿐이라는 괴상한 논리를 펼친다. 그나마 순철은 양심적이다. 순철밖에 의지할 곳이 없는 복순과 이국 땅에서 순철의 사랑만이 전부인 순영을 외면할 용기가 없다. 그래도 조강지처를 버리지 않기로 결심한다. 순철을 기다리던 순영은 병에 걸려 생을 마감하고 정택의 혼인 소식에 순희도 죽음을 택한다. 순희와 순영의 마지막은 죽음이어야 했을까. 시대를 탓해야 할까. 가정 폭력과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인 여성이 가해자를 처벌하기 위해 2차 피해를 감당해야 하는 100년 후의 지금을 생각하면 모르겠다.


박민정의 「천사가 날 대신해」에서도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친구 ‘세윤’의 실종과 죽음에 대해 들려준다. 세윤은 불행한 결혼 생활을 끝내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새로운 미래를 꿈꾼다. 화자와 함께 ‘JLPT’시험 준비를 한다. 그런 세윤이 실종 후 자살한다. 세윤이 남긴 건 일상을 담은 브이로그가 전부다. 나는 그 브이로그를 통해 세윤의 고통을 짐작하고 가늠할 뿐이다. 놀라운 건 브이로그에 등장하는 ‘로사’였다. 나의 학교 후배였던 로사가 세윤의 직장 동료였다. 세윤에게 로사의 이름을 들었을 때 그녀가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 말해줬지만 세윤은 듣지 않았다. 세윤의 죽음이 직접적으로 로사에게 있다고 주장할 수 없지만 나는 더 강하게 로사를 멀리하라고 말하지 못한 게 후회스럽다.


어떤 억측이나 소문은 얼마나 무서운가. 우리는 그것을 알면서도 슬그머니 가담한다. 김명순의 「의심의 소녀」에서 정확한 사실을 모르면서 소문에 가담하는 동네 사람들, 「돌아다볼 때」의 고모처럼 지레 짐작한다. 뉴스나 언론을 통한 보도에 상상하는 더한다. 박민정의 「천사가 날 대신해」에서 세윤이 감당해야 할 시선은 어땠을까. 이혼녀, 전 남편과 연락을 하는 일을 바람을 피우는 거라 수군거리는 동료들. 그런 문제에 대한 고민은 박민정의 에세이 「때가 이르면 굳은 바위도 가슴을 열어」로 이어진다.


작가는 누구보다 ‘나’를 많이 말하지만, 가장 ‘나’로부터 멀어지고 싶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내가 단 한 명의 작가이지만 또한 오롯이 작가일 수 있으려면 끝없이 나르시시즘을 경계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쓰는 사람이 자기 생애까지 대생화해서 이루려는 문학 행위가 그저 소문으로만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때가 이르면 굳은 바위도 가슴을 열어」, 306쪽)


어렵고 쉽게 읽었다 말할 수 없지만 좋은 소설이었다. 이런 기획이 아니었다면 나는 김명순의 이름도 모르고 그의 소설을 찾아 읽을 일도 없었다. 페미니즘이나 여성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도 좋은 교재가 될 것 같다. 소설적 재미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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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자 2024-07-15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민정 작가의 <백년회로외전>을 읽고 너무 좋았어서 박민정 작가의 다른 책을 검색했는데, 백년회로외전보다 더 새로 나온 신간이 있더라구요! 이 책을 통해서 ‘소설,잇다‘라는 시리즈도 발견을 했네요 정말 좋은 기획인 것 같아요.. 땡투 날리고 한국 들어가서 구입할 예정! 역시 언제나 유려한 글로 후기를 써 주시는 자목련님 오늘도 잘 읽었습니다:)

자목련 2024-07-16 10:10   좋아요 0 | URL
네, ‘소설,잇다‘ 는 의미있고 남다른 시리즈라 생각해요. 한국 여성 작가에 대한 관심과 그들의 시선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볼 수 있다고 할까요.100년 전 작가의 글을 읽기가 살짝 힘든 부분도 있지만요.
달자 님도 즐겁게 만나시면 좋겠어요!
 
나목 박완서 아카이브 에디션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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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 때 내일이 오지 않을 꺼라 생각한 적이 없다.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날들이 있었을 뿐. 평범한 일상이 한순간 무너지고 살아가는 이유를 찾지 못하는 이에게 내일은 어떤 의미일까. 살아있기에 살아가가는 일은 고통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나목』의 ‘나’도 그랬을까. 전쟁이라는 폭력을 견뎌내며 폐허와 함께 살아가는 일을 지금을 사는 이는 알 수 없다.


미 8군 PX 아래층 초상화부에서 일하는 ‘나’는 미군을 상대로 초상화 접수와 가격을 흥정한다. 환쟁이에게 업무를 배분하고 독촉한다. 지루할 정도로 반복된 일상에 새로운 환쟁이 ‘옥희도’씨가 들어온다. 똑같이 미군 애인의 초상화를 그리는데 그는 달라 보였다. 물론 ‘나’에게 관심을 주는 남자는 따로 있었다. 전기부에서 일하는 ‘태수’였다. 태수는 적극적으로 호감을 표했고 ‘나’는 그게 싫지 않았다. 그러나 태수와 옥희도 둘 중 한 명을 꼽으라면 태수는 아니었다. 태수와 관계는 약간의 밀당 같은 것이라면 옥희도와는 자석 같은 끌림이었다. 옥희도도 ‘나’의 마음을 알고 ‘나’를 향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옥희도는 ‘나’를 아끼는 사람이었다. 아내가 있고 5명의 아이가 있다는 사실이 아니었어도 그는 ‘나’를 사랑하는 일을 멈추었을 것이다.


옥희도는 그런 사람이었다. 스물한 살 나의 마음을 어루만지면서도 적절한 거리를 두었고 그 마음의 끝을 맺을 수 있는 사람. 스물한 살인 ‘나’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솔직하게 옥희도에게 전한다. 아파서 일을 나오지 못한 그를 병문안을 핑계로 찾아가면서 아내와 아이들을 만나면서 그 안에 같이 있기를 바란다. 누군가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옥희도 같은 사람은 잊고 태수를 생각하라고 말할 게 분명하다. 어쩌면 옥희도를 사랑한다고 믿는 ‘나’의 착각이었는지도 모른다. 금지옥엽으로 자신을 아꼈던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 여동생을 챙기던 오빠 둘의 부재가 만든 감정 말이다.


전쟁이 아니었다면 경험하지 않았을 감정이다. 피난을 갖다 돌아온 오빠들은 다락에 숨어지냈다. 계동의 고가에는 ‘나와 어머니만 살고 있어야 했다. 전쟁의 날들이었지만 숨어지내는 오빠들과 어머니가 있기에 두려움은 없었다. 큰아버지와 사촌 오빠의 방문이 있기 전까지. 네 명이 거하기에 다락은 좁았고 ‘나’는 오빠 둘의 거처를 옮기자고 제안했다. 거처를 옮기고 폭격으로 오빠들은 죽음을 맞았다. 자신 때문에 오빠 둘은 죽고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죄의식은 일을 마치고 계동의 고가로 오는 시간을 늦추었다. 실질적인 가장이 되었는데 어머니는 죽은 아들들만 붙자고 사느라 살아있는 딸은 봐주지 않았다. PX에서 돌아온 경을 환대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얼마나 추운지, 얼마나 무서운지 묻지 않았다. 부서진 고가 그 자체였다.


때문에 ‘나’는 퇴근 후 하릴없이 시간을 보냈다. 그 시간을 같이 보내고 견뎌준 이가 옥희도였다. 약속을 하지 않아도 장난감 가게 앞에서 만났다. 옥희도에게 어머니와의 갈등이나 고민을 털어놓은 적은 없지만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전쟁이 앗아간 삶을 그 역시 살아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돈벌이로 초상화를 그려야 해지만 화가로써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 번뇌하며 말이다. ‘나’는 옥희도의 고독과 고통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옥희도가 그린 그림을 보고 죽은 나무, 고목으로만 보았으니까. 그의 아내를 책망하고 질투했을 뿐이다.


나는 그들의 삶에 다가갈 수 없다. 박완서가 세밀하게 담아낸 미 8군 PX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쓸쓸하고 황폐한 거리를 가득 채운 상념과 전쟁의 상흔이 남은 계동의 고가의 풍경을 그려볼 뿐이다. 그러나 주인공 ‘나’ 스스로 알 수 없는 감정들은 조금 알 것 같다. 어머니를 향한 원망과 한 번이라도 자신을 안쓰럽게 봐주기를 바라는 간절함, 자신을 사로잡는 우울과 죽음, 반대라 삶에 대한 열망과 욕구를 느낄 수 있었다. 소설 곳곳에서 빛나고 눈부신 문장으로 마주할 수 있었다. 늙고 초췌한 어머니와 젊고 싱그러운 ‘나’의 모습, 한순간의 불꽃처럼 화려하게 타오르고 싶은 마음에 호텔로 향한 ‘나’의 마음, 요란하게 움직이는 장난감 침팬지의 몸짓을 무기력하게 바라보는 ‘나’와 옥희도의 눈빛.


죽고 싶다. 주고 싶다. 그렇지만 은행나무는 너무도 곱게 물들었고 하늘은 어쩌면 저렇게 푸르고 이 마당의 공기는 샘물처럼 청량하기만 한 것일까. 죽고 싶다. 살고 싶다. 죽고 싶다. (315쪽)


팽팽하게 대립한다고 여겼던 어머니와의 갈등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끝난다. 나의 반항적인 외박이 불러온 결과였을까. 약을 먹고 의사를 불러도 소용없었다. 어머니가 죽고 고가에 나 혼자 남았다. 그리고 나의 곁에는 태수가 있다. 시간이 흐르고 중년의 ‘나’는 남편 태수와 함께 고인이 된 옥희도의 전시회를 찾는다. 그곳에서 마주한 그림.


내가 지난날, 어두운 단칸방에서 본 한발 속의 고목古木, 그러나 지금의 나에겐 웬일인지 그게 고목이 아니라 나목이었다. 그것은 비슷하면서도 아주 달랐다. (390쪽)


나목에게는 아직 멀지만 봄에의 믿음이 있다. 봄에의 믿음. 나목을 저리도 의연하게 함이 바로 봄에의 믿음이리라. (391쪽)


박완서가 그려낸 소설 속 인물들은 전쟁을 살아내느라 삶이 파괴되고 부서졌다. 자신을 괴롭히는 고독과 싸우고 어찌할 수 없는 시대와 싸우고 버텼다. 잎이 지고 가지만 남은 앙상한 나무(裸木)처럼 살았다. 박완서 작가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부서진 삶이라고 해서 포기하지 않았다. 봄을 향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박완서 작가는 소설을 통해 폐허의 삶에서 발견한 한 가닥의 희망을 말한다. 시대는 다르지만 부서지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고독하고 외로운 이들에게, 곧 봄에의 믿음이 있다는 걸 알려준다. 1970년에 발표한 『나목』이 육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빛을 발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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