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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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런 증상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나의 눈이 먼다면 과연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물론 살아있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차차 어둠의 삶에 익숙해지는 것이 인간의 습성이라고 해도 그것은 너무도 끔찍한 일이다. 주제 사라마구는 어떻게 이런 소설을 생각하게 되었을까.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를 통해 그가 인간 본질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을 하는 작가가 아닐까 어렴풋이 생각했지만, 눈먼 자들의 도시를 만나고 보니 그가 더 궁금해진다.

 나만이 아닌 세상 모두가 동일한 조건에 눈이 먼다면, 그것을 받아들이는데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허나, 점진적으로 세상에 눈 먼 자들이 늘어난다면 제발 내 차례가 오지 않기를 모두가 바랄 것이다. 이유를 찾을 수 없기에, 다수를 위해 소수의 전염자들을 정부는 공권력이라는 이름하에 감금한다. 그것은 마치 정부가 행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인 양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인간은 쉽게 동요한다. 죽음을 몰고 오는 전염병이 아니더라도 SARS, 조류 독감같은 경우에도 인간은 아무리 안전하다고 강조해도 닭고기를 먹지 않으며 중국이라는 단어조차 말하기를 꺼려하지 않았는가. 인간은 이처럼 단순하며, 이기적이다. 물론 그것은 당연한 일 인지 모른다. 하여, 의사의 아내는 홀로 눈이 멀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하기 두려웠을 것이다. 자신이 눈먼 자들에게 위협을 당할 수도 있으며, 그들의 노예가 될 수도 있었으니, 그녀는 그들과 같이 눈 먼 자로 남아야만 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잔인한 고통인가.

 사람들은 불과 몇 시간만에 이성과 사회규범을 잃어버리고 혼돈의 세상에 빠져버리고 만다.  한 순간, 나는 마치 내 눈이 멀 것만 같은 두려움이 느껴졌다. 왼쪽, 오른쪽을 번갈아 막아가며 나의 눈이 볼 수 있음을 확인하고 있었다. 어처구니 없지만, 나는 꼭 확인해야만 했다. 눈먼 세상은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동물의 왕국으로 변해버렸다. 아니, 차라리 동물의 왕국처럼 체계가 있었다면 나았으리라

 먹을 것을 시작으로 숨어있어서 차마 드러내지 않았던 인간의 탐욕은 눈이 멀고서도 드러난다. 살아 남기 위한 본능적 욕구를 이용하여 여자를 농락하고, 사랑하는 아내를 구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버린다. 끝내, 의사의 아내는 그들을 살인하기에 이른다.  전쟁터가 이러했을까. 그 안에서 인간이므로 가져야 할 본질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 추악한 모습이 본질일까.

 이제 누구라 할 것 없이 모두가 눈이 멀고, 그 안에서 새로운 사회가 구성되고 새로운 규범이 생겨난다.  서로가 협력하여 선을 이루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선이라는 것은 항상 존재한다는 것인가. 본다는 것으로 선의 역할이 맡겨진 의사의 아내, 그녀는 진정 볼 수 있다는 이유로 그들을 이끌고 돌봐야만 하는가. 누군가 묻는다면 그렇다라고 말할 자신이 없다. 영영 그들이 아무 것도 보지 못한대로  소설이 끝나지 않는다면 어쩌나, 덜컥 겁이 났던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어요. 응, 알고 싶어.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본문 461쪽

 주제 사라마구가 『눈먼 자들의 도시』를 통해 보여준 인간의 본질, 그것은 우리의 사회의 모습과 같은지 모른다. 눈을 뜨고 있어도 우리는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저 쉽게 생각하고 시류에 휩싸여 행동하는 어리석음, 그 안에서 제대로된 시선으로 선을 행하는 자는 누구일까. 『눈 먼 자들의 도시』는 신비의 거울처럼 위기에 처한 인간들의 내면이 변모하는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경고한다. 

 다행스럽게도 주제 사라마구는 눈먼 자들이 서로를 이해하려 하고 함께 협력하여 살게 되었을 때 점진적으로 눈이 멀었던 것 처럼 다시 그들에게 눈뜬 자들로 돌아가게 한다. 그들에게 보이는 한 줄기 빛, 그것은 무엇일까. 새로이 만나는 세상에 빛과 같은 삶을 살라는 메시지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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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빛 자오선
코맥 매카시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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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역사에 있어 전쟁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인지도 모른다. 세상은 강자와 약자가 존재하기 마련이고, 그들의 욕망은 전쟁을 불러온다. 그리하여, 인류는 잔혹한 죽음을 역사에 기록한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들의 소리를 통해 새로운 역사로 이어지고, 토론의 대상이 된다. 인간으로써는 차마 행할 수 없는 처참한 살인 기록들을 마주하며 과연 그들이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게 믿기지 않지만 그건 사실이다. 

 잔인함이 자리잡은 인간의 내면, 그 살벌한 현장에 작가 코맥 매카시는 소년을 등장시킨다. 그에게 있어 소년은 <로드>에서 만난 아들과 같다. 냉랭한 눈빛, 세상에 대한 적대감이 가득한 소년, 코맥 매카시는 여전하게 불친절하기만 하다.  역사적 기록, 전쟁을 재구성한 소설이지만, 그 시절 그 무리에 분명 열네 살, 아니 더 어린 소년은 존재했을 것이다.  소년과 감옥에서 만난 토드빈, 전직 신부라는 이유로 선의 표상으로 보여지는 토빈, 살벌한 눈빛이 그려지는 인간 사냥군 글랜턴, 궤변을 늘어놓는 판사등 구체적 인물을 제시하지만 소년에게는 어떠한 이름으로도 불려지지 않는다. 어쩌면 소년이라는 단어가 그 이유를 대신할지 모른다. 아이, 소년, 그들은 세상과 세상을 이어 줄 끈이 아니던가.
 
 1842년 미국과 멕시코의 전쟁은 끝이 났지만, 기록과 실제는 언제나 다르다. 멕시코와 미국은 새로운 전쟁에 돌입한 것이다.  모래 바람이 가득한 사막, 가물거리는 오아시스, 마른 선인장, 그리고 경계심이 가득한 사람들의 건조한 눈빛만이 소설을 진행시킨다. 이처럼 건조하고 메마른 세상을 서정성 짙은 문장으로 승화시킨 코맥 매카시, 아마도 이런 이유로 그의 소설을 극찬하는 것이리라.

 살인과 약탈, 방화는 마을을 초토화시키고, 피로 물들인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긴다. 낭자한 피는 그저 결과일 뿐이며, 살아있으니 또 다시 걷을 뿐이다. 군대는 흩어졌다, 다시 모이기를 반복한다. 새로운 사람들이 영입되거나 한꺼번에 소멸된다. 소년은 혼자가 되었다가 어디선가 스친 그들과 재회를 한다. 그들이 죽여야 할 사람들은 아파치였으나, 끔찍하고 잔인한 욕망은 인디언과 주민들에게로 향한다.

 걷고 걷는다. 적과 아군의 차이는 없다. 그저 나만이 아군일 뿐이다. 그들이 맞는 새벽, 새로운 빛은 말 그대로 핏빛이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생사의 결정은 정의에 관한 모든 질문을 무력화하네. 하느님의 거대한 선택에는 도덕적이고 영정이고 자연적인 모든 사소한 것들이 다 포함되네. 325족)전쟁이라는 상황은 살인에 대해 한없이 너그럽다. 그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을 진행시키는 살벌함, 그것이 인간의 본질인가. 선과 악, 정의는 사라지고 오직 죽음만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인가.  말이 없는 소년은 목격자이며 관찰자,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해 끊임없이 말을 하는 판사는 마치 하느님의 대변자처럼 느껴진다.

(전쟁의  피에 자기 자신을 오롯이 바친 사람만이, 저 밑바락으로 내려가 생생한 공포를 맛보고 급기야 참된 영혼으로 공포와 이야기 나누는 법을 배운 자만이 진정한 춤을 출 수 있네. 427쪽)문득, 인간의 본성에 대해 생각한다. 성악설(性惡說), 성선설(性善說)로 대두되는 인간의 본질, 과연 그 본질은 무엇으로 이루어졌을까. 독자인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난해한 문학을 이해하고자 욕심을 부릴 것도 아니요, 추악하고 살벌한 인간에 대해 논할 것도 아니다. 다만, 작가가 그려내는 아비규환의 현장에 언제나 소년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위안을 삼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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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노래한다
김연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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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나온 날들, 경험하지 못한 역사 속 많은 사건들을 종종 문학을 통해 접하게 된다. 시나, 소설을 통해 새로운 해석과 감춰졌던 진실이 드러나게 되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누가 그랬던가, 역사는 강자의 편에서 기록된다고. 우연찮게 오늘은 새로운 정권이 구도를 잡으려 용트림한지 꼭 1년을 맞는 날이다. 작년 한 해, 조금이나마 나아질 꺼라는 기대를 품었던 수많은 이들의 가슴, 그 가슴에 지금은 분노와 냉대로 가득하다. 
 
 정치에 대해 관심이 많지 않다. 그러나 올 해, 세상은 모두를 정치에 참여하는 자로 이끌어냈다. 촛불을 손에 든 유모차 부대, 교복을 입은 어린 학생들, 넥타이 부대, 어느 하나 자신의 이익을 염두해두고 거리로 달려나가지 않았다. 스스로의 판단하에 자발적인 동참이었다. 그들의 뜨거운 밤의 노래가, 그들의 흥겨운 춤사위의 진심을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러야 세상은 알아줄까.

 편향적인 사고로 내 앞가림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살고 있는 내게, 부끄럽지만 역사는 지나간 날들의 기록일 뿐이다.  1930년대 민생단 사건을 배경으로 한 소설, 이념은 어떤 것이며, 혁명을 위해 무참히 죽은 이들의 영혼, 그들은 진정 무엇을 위해 청춘을 바쳤는가. 그들의 무수한 밤들, 두려움에 떨던 날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불렀던 노래들. 

 북간도, 1932년 9월의 용정, 내게는  윤동주의 생가로 기억되는 그곳에 모인 젊은이들은 무엇을 위해 삶을 내던졌는가. 그저 한 여자를 사랑한 남자 김해연, 그 남자를 사랑했지만, 혁명을 위해 죽는 그 순간에서야 사랑을 고백하는 여자 이정희. 중국, 일본, 조선의 젊은이 들은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스파이로 이용하여 그들은 <민생단 사건>의 중심에 선다. 이념이 중요했던, 민족이 중요했던 그 시대는 피끓는 청춘의 죽음을 요구한 시대였다. 

 사랑에 배신당했다고, 연인을 이해하기까지 김해연은 입과 귀는 닫히고, 눈은 멀고 만다. 그들의 사랑이 아름다운 봄 날의 기억임을 알기에 그의 침묵이 그의 모부림이 가슴 아프다. 그를 꼭 안아주고 잠들게 할 사랑이 빨리 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봄날 아스라한 아지랑이 같은 사랑, 그 눈과 입을 열리게 한 이, 역시 혁명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게 된 여옥이라는 청춘이었다.  새로운 사랑은 새로운 혁명으로 이어지나, 시대는 그들에게 사랑 보다 혁명을 요구한다. 그들이 바람과 맞서며 지새운 밤들, 정의라 믿고 그것을 위해 총을 겨누는 그 밤의 공포를, 포근한 침대 속에서 그들의 밤과 마주한 나는 머리 속으로도 느낄 수 없다.

 진실은 언제나 힘겹게 얻어지는 것일까. 여옥이 불러대던 노래들, 도통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으나, 그 처연함이 이 시대, 시청 앞에 모인 시민들의 노래와 같다는 것을 안다.  몇 년의 시간 동안 이 이야기를 쓰고자 고민했다는 김연수식 밤의 노래는 이제 세상의 낮과 밤에 울려 퍼진다. 길고 깊은 밤, 아침이 혹여 오지 않을까 두려운 내게 김연수의 노래는 말을 건다. 밤이 지나면 새벽이 오는 것을 알지 않느냐고. 

 지금 어디에 있나요?  제 말이 들리나요? 어쩌면 이건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겠어요.(중략)
우리가 영국더기 언덕에서 찍었던 그 사진이 생각나요. 그러니까 멀리서 몸을 뒤척이며 흘러가던 강물들. 눈송이들처럼 떨어져 내리던 봄의 하얀 꽃잎들. 십자가를 향해구불구불 이어지던 영국더기 언덕길. 사진 속에 찍힌 그 모든 것들은 내가 더없이 아끼던 보물들이었고, 내게 필요한 건 오직 그게 보물이라는 걸 알아보는 단 한 사람뿐이었어요. 내가 원할 때마다 지치지 않고 함께 그 보물들을 봐줄 사람이었죠. 한때는 이 세상 전부를 원했지만. 이젠, 겨우 그 정도. 이제 내가 아는 세계의, 그러니까 거의 전부. 323~324쪽 정희가 보낸 편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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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일기
이승우 지음 / 창비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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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말이 있다. 적절한 때, 정확한 입장을 밝히지 못하면 의도하지 않은 상황으로 흘러가고 만다. 그 후로 많은 불편함으로 지속된다. 그러나 삶에 있어서 타이밍을 맞춘다는 것은 맘 먹기에 따른 것처럼 간단하지 않다. 때로 평생을 묻어둔 그 타이밍을 죽음을 앞에 두고서야 기억해 내곤 한다. 그 때, 내가 그러지 않았다면, 그랬어야 했는데. 후회 아닌 후회는 비밀인 양, 숨겨둔 일기장에 기록되고 만다.

 이승우의 『오래된 일기』속 단편들은 말해야 할 것을 말하지 못하고 자신의 일기장의 기록한 간질 간질한 불편함들이다. 가려운 곳은 긁어주어야 한다. 바로 긁어주지 못하면 부스럼이 되고,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소설들은 지워버렸다고, 잊어버렸다고 치부했던 불편함들이 사실은 마음 한 구석에서 부유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한다. 소설 속 화자들은 주도적인 삶을 살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다. 결코 소설가가 될 꺼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소설가가 되고 싶어했던 사촌 대신 소설가가 된 나의 오래된 일기장을 가직한 ‘오래된 일기’, ‘무슨 일이든, 아무 일도’ 속 나는 아버지의 재혼으로 정신적 질환을 앓고, 가족들에게 철처하게 무시당하는 동생 상규를 돌본다. 아니, 사실은 그를 떠나보내고 싶어한다. 집안의 십자가라고 말하면서도 그 십자가를 돌보지 않은 가족들.

 ‘타인의 집’ 과방’ 을 통해 공간이 주는 위안을 말한다. 사소함으로 시작된 부부싸움은 끝내 별거가 되고, 나는 집에서 쫓겨난다. 삶에 있어 절대적으로 필요한 집이라는 공간은 방으로 이어진다. 사실, 우리는 집보다는 나만의 방을 원하고 있지 않은가. 우연이지만, 옛 애인의 집에 머물게 된 타인의 집 화자는 그 공간 자체에 위안을 받는다. 같으면서도 다른 그 공간에서 누군가는 생을 마감하고, 누군가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도 한다. 자신을 돌봐주었던 치매 걸린 큰어머니의 등장으로 가족을 헤체된다. 아내와 아이는 미국으로 떠나버리고 큰어머니는 죽고 만다. 이혼을 종용하는 아내, 그는 집을 팔고 자신만의 방을 찾아 헤맨다. 과거의 따뜻했던 공간, 모든 것은 사라지고 나서야 그 존재감의 실체를 느낀다.  언제 떠나야 할 지 모르는 방, 그 안에 나는 새로운 존재를 각인시킨다. 

 추억이 아닌, 과거의 기억들이 소설을 통해 드러난다. 3년 전 헤어진 여자로의 전화는 지난 과거는 현재로 흡입된다. ‘정남진행’, ‘풍장- 정남긴행2’는 그 과거로의 여행이다. 광화문에서 정남쪽에 위치한 정남진이라는 곳은 과거의 이야기의 시작점이며 귀착점이다. 그 여로를 동행하며 독자는 그들의 과거를 떠올린다. 내게 있어 그곳은 어디인가. 고향, 사랑이 머물렀던 곳, 기억이란 기억들이 차곡차곡 쌓인 우리들의 정남진은 어디인가.

 담아둔 말은 그 시간이 오래되면 진정성이 사라질지 모른다.  누군가에 의해 말해지지 않으면 도무지 알 길이 없는, 길고 어둡고 놀랍고 뜨거운 이야기들이 우리의 삶의 지표면 아래로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돼. 128쪽  현 시대에 부활한 과거의 이야기꾼 전기수라는 직업을 통해 나는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전하는게 아니라 말을 나누고 싶어한다. 말을 통해, 당신을 알고 나를 보이고 그렇게 살아야 함을 알면서도 입을 열지 못한다.  현대인의 고독감, 온전하게 나를 드러내고 싶은 말들, 일기장에 담아두지 않아야 한다. 일기장이라는 말은 비밀스럽다. 작가 이승우가 오랫동안 담아둔 마음의 고백 아닌 고백은 다소 어려웠고 먼 메아리로 남는다.

“자신의 생명을 조금씩 떼어내서 하루씩 삶을 연명하는 거랍니다. 삶을 유지하기 위해 삶을 내놓아야 하는 거지요. 그것이 인생이예요.”91쪽

 하루를 살기 위해 우리는 딱 하루만큼의 삶을 내어 놓을 수 있는 걸까. 내일을 만나기 전에, 지난간 오늘을 기록한다. 주저함과 머뭇거림을 쌓아둔 일기장, 그 일기장 속에 회환과 슬픔도 있을 터, 그러나 그 기록들은 나에 속한 것들. 또 다른 일기장을 펼친다. 이제 나는 어떤 말들을 비밀스런 이곳에 쓰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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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상속
키란 데사이 지음, 김석희 옮김 / 이레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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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나라는 그 나라만의 역사를 갖는다. 그 역사가 환희로만 쓰여졌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겠지만, 역사는 슬픔, 고통을 동반한다. 우리나라에게 일본강점기, 6.25가 그랬고, 많은 아시아들은 유럽의 강국들의 식민지로 살아온 시절이 그러하다. 안타까운 것은 지금도 우리는 그 역사로 인해 아직도 힘든 삶을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상실의 상속』이라는 절망이 가득한 제목의 소설은 인도의 칼림퐁이라는 마을, 1986년을 배경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다. 1980대의 인도를 나는 알지 못한다. 히말라야 등반을 위한, 셀파, 티벳, 네팔이 자동으로 검색되는 곳, 칼림퐁. 그곳에 어떤 상실이 가득했을까. 

 칼림퐁에 ‘초오유’라는 저택에 퇴역 판사, 외손녀 사이, 요리사, 그리고 판사의 애견 무트가 살고 있다. 판사는 냉소함으로 일관하며 오직 무트에게만 애정을 쏟는다. 요리사는 미국으로 건너간 아들 비주의 편지만이 즐거움이며 십대 소녀 사이는 가정 교사 지안을 만나기 전까지 건조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칼림퐁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과, 비주가 살고 있는 미국의 뉴욕의 풍경이 교차하며 소설은 전개된다. 

 어느 날, 초오유에 지안에게 정보를 얻은 무장한 소년병들이 판사의 총과 음식을 빼앗아버린다. 이 사건은 모두에게 크나큰 상실을 주는 시작이 된다. 경찰은 엉뚱한 사람을 잡아 고문한고 그의 가족들은 판사에게 선처를 구하지만 판사는 냉담하다. 결국, 가족들은 판사에게 가장 소중한 무트를 훔쳐간다. 소설은 판사, 요리사, 사이의 과거로 거슬러 간다. 

 판사는 인도의 현실을 넘어서기 위해 영국으로 유학을 간 엘리트였지만, 영국인이 되려 애쓰는 인도인을 경멸했다. 사실, 그 역시 인도인이 아닌 영국인으로 살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런 욕망은 아내를 구타하고 아내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판사 역시 결국은 모든 것을 버리고 칼림퐁에 안주하고 만다. 고아가 된 외손녀 사이와 대면하고 만다.  단란했던 요리사의 가정, 아내의 죽음은 그에게 가장 큰 상실이었고 미국이라는 곳에서 비주가 성공하기만을 바란다. 부모를 사고로 잃고 고아가 된 사이에게 지안을 사랑하지만, 극심한 빈부, 환경, 사고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1980년대 미국에서 인도인들의 생활은 희망이었을까. 불법체류자, 뒷골목, 사람들의 천대, 여기 저기 일터를 옮겨다니는 것이 실상이었다. 그린카드를 받기 위해 몸부림치는 불법체류자들의 모습, 자신이 크게 성공한 줄 아는 가족들의 청탁 편지. 그 안에서 비주는 깊은 상실감에 빠지고 만다. 기회의 땅이라는 미국, 현실은 유색인종,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로 이어진다. 

 소설은 칼림퐁이라는 지역의 아름다운 풍광의 세밀한 묘사, 해설처럼 그들의 일상을 기록한다. 소설이라는 이름을 가진 시대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나라, 인도, 그곳에는 다양한 인도인의 삶이 있었다. 영국을 흠모하고 문화를 받아들이는 삶, 인도의 전통적인 삶을 고수하고자 하는 이들, 카스트 제도에 억눌린 삶.

 역사는 이런 식으로 움직였다. 천천히 세워진 것이 순식간에 불타버리고,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 속에서 앞뒤로 도약하고, 젊은이들은 해묵은 증오에 휩쓸렸다. 삶과 죽음 사이의 공간은 결국 측정할 수도 없을 만큼 작았다. 493쪽

 1980년대 인도는 혼란스러움 그 자체였다. 인도 자체가 절망에 휩싸였을 때, 칼림퐁의 초오유의 사람들도 절망속에 있다. 판사에게 사라진 무트, 사이에게서 멀어진 지안, 요리사에에게 연락이 되지 않는 아들 비주. 그들은 절대적인 절망에서 희망의 씨앗을 볼 수 있을까.

 복잡하고 모호한 소설이다. 끝내 소설은 어떤 희망도 보여주지 않는다. 1980년대를 지났지만, 인도를 비롯하여 미국, 영국은 아직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인도는 영국이라는 역사를 안고 살아갈 것이다. 운명이라는 것으로 이어진 상실은 그렇게 상속되는지 모른다. 우리가 일본과의 해결되지 않는 관계를 상속받은 것 처럼.  크거나 작거나 우리는 상실감을 느낀다. 그 상실을 이겨내고 새롭게 시작하려고 애쓰는 과정이 삶이다. 『상실의 상속』, 소설 제목으로는 정말 멋지지만 결코 삶을 통해 경험하고 싶지 않은 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는 이미 수많은 상실의 상속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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