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신이 읽는 젊은 작가들
박범신 엮음 / 문학동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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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을 사랑하는 이라면, 기실 작가가 소설을 통해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한다. 몇 몇 인기 작가의 인기는 소위 잘 나가는 연예인에 버금간다. 독자는 글을 통해 작가의 일상, 인간적인 모습을 궁금해한다. 그리하여 좋아하는 작가를 더 알고 싶어하며 더 가까운 관계를 맺기를 꿈꾼다. 이런 독자의 욕구에 부응하는 책이 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바로, 박범신이라는 대작가가 신예 작가와 그들을 사랑하는 독자와의 만남을  엮은 책, <박범신이 읽는 젊은 작가들>이다. 
 
 한국문학예술위원회가 주최한 ‘금요일의 문학이야기’에서 박범신은 10명의 젊은 작가들(이기호, 심윤경, 백가흠, 오현종, 손홍규, 이신조, 김도연, 김종광, 김종은, 김도언, 김 숨, 박성원)과의 만남의 시작을 이렇게 열었다.

 
문학의 원천적인 힘이 그거예요. 우선 작가 자신을 견고하게 구원할 수 있고, 자신을 구원함으로써, 본인은 부정할지 모르지만, 독자의 구원에도 음으로 양으로 관계맺게 되는 힘이 바로 문학의 힘인 거예요. 그것이 꼭 양적으로 많아야 하는 건 아니에요. p18 박범신

 참여한 작가들 중에는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작가, 생경한 이름의 작가, 이름은 익숙하지만 작품을 만나보지 못한 작가도 있었다. 지정한 책을 읽고 독후감을 발표하고, 질의를 통해 작가의 답변을 듣는 형식으로 금요일 저녁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의 열기가 책을 뚫고 나올 정도로 책에서 그들의 뜨거운 열정이 느껴졌다. 

 독자는 다양한 소설을 읽으면서 나 아닌 다른 삶을 발견하기도 하고, 허구라지만 소설에서 만난 캐릭터를 주변에서 만나기도 한다. 하여, 작가가 왜 그런 캐릭터를 만들었는지 궁금해하며 작가의 생각을 듣고 싶어한다. 실제 뉴스를 통해 이미 잘 아려진 사건을 소재로 쓴 백가흠의 <배꽃이 지고>에 대해 폭력에 길들여진 과수원댁이 소설속에서 도와달라고 청해야지 않냐고 묻자 백가흠실제로 도움을 청하고 있지요. 그런데 누가 도와주고 있나요?  p97 시니컬하게 답한다. 백가흠은 자신의 문학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문학을 가지고 뭘 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요, 또 문학을 통해서 뭐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저는 없습니다. 문학에 있어서 주인공이 되고 싶지도 않고요. 그냥 쓰는 거죠. 내가 써야 되니까. 독자들에게 어떤 글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도 아직은 별로 없고요, 아직까지는 나를 위해서 글을 쓰고 있어요. 그게 나쁘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작없을 계속할 거구요, 또 문학권력에 대해서는 그런게 있는지 없는지 관심이 가지 않아요. 저하고는 별로 상관이 없는 얘기처럼 들리기 때문이기도 할 거예요. p100 백가흠

 작가 김 숨은 소설을 쓰는 사람들에게 자기만의 색을 찾으라는 말을 남겼다.  내가 잘 쓸 수 있는 소설이 무엇인가, 나에게 맞는 소설이 무엇인가를 찾는 게 저는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을 해요. 그걸 찾기 위해서 남의 소설도 읽는 거고 끊임없이 습작을 하는 거고, 저도 그 과정에 있다고 생각하고요, 여러분도 만약에 글을 쓰신다면 그걸 중요하게 생각하시고 다른 작품 읽을 때도 그걸 모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는 어떻게 남과 다르게, 남에게 맞는 나만의 글쓰기를 할 것인가 이 부분을 많이 고민하시기 바랍니다. p246 김 숨 선배 작가들의 말에 귀를 세우고 있을 소설가 지망생들의 반짝이는 눈이 그려진다.

 이 책의 또 다른 즐거움은 소설가가 읽는 소설가를 만나는 것이다. 바로 박범신을 통해 듣는 작품 해설에 있다. 이제 소설가의 이름을 갖고 한 권, 두 권의 책을 낸 작가들에게 30년 이상 글을 써온 작가 박범신의 눈에 비친 작가들의 모습은 어떠할까. 놀라운 소재, 대단한 필력을 가진 젊은 작가들을 칭찬하지고 했지만, 살짝 아쉬움도 비쳤다.

 
내가 젊은 작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의 하나는,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절실한 상처들에 대해서 소설을 통해서 정직하게 진술하고 있지 않는 것 같다는 거예요. 나는 자기 삶에 대한 어떤 반응이 문학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어떤 의미에서 볼 때에는, 지금 삼십대의 젊은 작가들은 그런 반응으로부터 좋게 보면 어떤 갭을 두는 것처럼 보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부정직하다, 이게 내 독후감 중의 하나였어요. p272 박범신

 출판 기념회나, 낭독회를 통해 작가와의 만남이 활발해졌지만 여전하게 먼 이야기다. 하여, 내게 이 책은 무척 소중한 책이다. 문학이라는 길에 첫 발자국을 남긴 작가들의 다양한 생각들을 만날 수 있었다. 생경한 이름의 작가들의 책이 점점 궁금해진다. 그들의 책을 만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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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옹 창비시선 279
정호승 지음 / 창비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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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도적으로 시집을 구매하고 시를 읽으려 애쓰고 있다. 거창한 이유는 없다. 날이 갈수록 건조해지는 마음을 위해, 시를 읽고 있는 동안 잠시라도 말랑말랑한 감성을 유지하고 싶기 때문이다. 시를 소리 내어 읽고 있노라면, 시에 취하게 되어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기까지 하다. 특히나 비가 오는 날엔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라는 <수선화에게> 한 구절이 맴돈다. 외로우니까 사람이고, 그래서 혼자가 아닌 둘이 되어 진한 포옹을 하려 애쓰는게 아닌가 싶다.

 정호승의 시집은 <슬픔이 기쁨에게> 이후로 참 오랜만에 만난 것 같다. 10대의 끝, 20대 초반의 기억을 제외하면 어디 정호승의 시집뿐이겠는가.  포옹이라는 따뜻한 말과는 다르게 시집에 흐르는 기운은 쓸쓸함이 가득 묻어나는 고독이었다. 아니, 외로운 사람, 고독한 사람곁으로 다가서 그를 위로하려는 마음이다. 

 밤의 연못에 비친 아파트 창 너머로
 한 소년이 방바닥에 앉아 혼자 라면을 끓여먹고 있다
 나는 그 소년하고 같이 저녁을 먹기 위해
 나도 라면을 들고 천천히 밤의 연못 속으로 걸어들어
간다
 개구리 두꺼비 소금쟁이 부레옥잠 들이 내 뒤를 따른다
 꽃잎을 꼭 다물고 잠자던 수련도 뒤따라와
 꽃을 피운다 (17 쪽, 밤의 연못 전문)


누구나 한 번쯤 그 소년, 소녀가 되었던 시절의 기억이 있으리라. 그럼에도 과거가 아닌 현재 만나게 되는 어린 소년을 외면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화려한 도시속 소년은 친구로 인해 즐거운 파티를 연다. 개구리, 두꺼비, 소금쟁이와 함께 활짝 핀 수련은 환하게 밤을 물들이니 이제 소년은 외롭지 으리라. 

 집에 들어가도 나는 집이 없다
 나는 집 없는 집에서 산다
 냉장고가 내 아내고 세탁기가 내 딸이다 (64쪽, 집 없는 집의 일부)

 문 없는 문을 연다
 이제 문을 열고 문밖으로 나가야 한다
 문 안에 있을 때는 늘 열려 있던 문이
 문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갑자기 쾅 닫히고 보이지
는다
그래도 문 없는 문의 문고리를 당긴다
 문은 열리지 는다 (74쪽, 문 없는 문의 일부)

집으로 들어가는데 집이 없고, 문 없는 문을 열다니. 시인이 보기에 우리가 사는 집은 진짜가 아닌 집으로 느껴졌나 보다. 생각해보니 어린 시절 엄마가 있었던, 강아지 존이 반겨주던 집은 이제 더이상 존재하지 는구나. 엄마라고 부를 수 있는 대상도 없고, 존이라는 잡견도 없다. 그리고 그 시절의 나도 없다. 집 없는 집에서 사는 우리네 모습이 한없이 쓸쓸하다.

 정호승의 시는 유독 노랫말로 많이 쓰인 연유로 다른 시들보다 훨씬 더 가깝게 느껴진다. 오랜만에 정호승의 시를 읽다 보니 저 멀리 작은 기억이 하나 떠오른다. 정호승을 좋아하던 친구, 문예창작을 공부하던 시절 정호승님이 오셔서 친필 사인을 받았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던 친구. 그 후에 만났을 때 그 시집을 내게 건넸다.  자신의 이름으로 받은 정호승 시인의 사인이 담긴 책. 엉겹결에 받았지만, 친구가 자신에게 아주 소중한 것을 내주었다는 것을 그 때는 알지 못했다. 

 시를 선물해서 행복하고, 시를 선물받고 행복해 하는 이가 점점 많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하여 시가 풍요로운 세상이 되어 나같이 의도적으로 시를 읽지 아도 자연스럽게 시가 우리 곁에 머무르면 좋겠다.

** 이 시집을 선물해주신 소중한 당신, 마음가득 당신을 포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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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책장을 들였다. 쌓아놓은 책들, 박스에 담아두었던 책들을 꺼냈다. 다시 읽고 싶은 문장들, 언니는 읽은 책은 그냥 박스나 저 안쪽에 두라고 충고했다. 허나, 나는 이 책들을 제일 잘 보이는 곳에 꽂아두었다. 볼 때마다 행복을 느끼고 싶은 욕심에. 몇 권 안되는 책이라 생각했는데, 여기 저기 끄집어 보니 책이 참 많다. 도서관, 교회, 조카에게 갈 책을 또 나눴다. 나의 우선순위는 언제나 그렇듯 한국 소설이기에, 미안하지만 인상깊었던 외국소설, 특히 일본 소설은 과감하게 마음을 정리했다.  사촌동생에게 보냈던 한국 소설들이 아쉽게 맴돈다.

몇 권만 사진에 담았다. 사실, 나의 책읽기는 한정되었고, 편독이 심하다는 것을 안다. 그래도 한국 소설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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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02-09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미경과 한강이 특히 눈에 띄네요. 제가 좋아하는 작가거든요. :)

자목련 2009-02-10 01:23   좋아요 0 | URL
저도 좋아하는 작가예요. 한강의 책을 기다리고 있어요...

프레이야 2009-02-23 0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권 보여요. 정미경의 '나의 피투성이 연인' 리뷰도 잘 읽었습니다.

자목련 2009-02-23 14:58   좋아요 0 | URL
9권, 어떤 책일까 궁금해집니다. ^^*

passerby 2010-08-21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서 나와 비슷한 취향을 가진, 블로거추천,이라는 것이 있어서 호기심에 클릭해 보았는데,
깜짝 놀랐어요.
마치 제 책장을 보는 듯한 느낌. 한국 소설편식을 좋아하는 님에게 난데없는 친근감.
남기고 싶었어요.
 
낭만적 사랑과 사회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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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은 시대를 반영한다. 유행이라는 단어로 설명하지 않더라도 변화하는 세상에 따라 문학이 추구하는 가치관도 다양하게 발전한다. 80년대라는 무거운 지게를 짊어졌던 시대의 작가들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그들의 슬픔과 고통을 전한다. 90년대가 지나고 밀레니엄 시대를 맞이하면서 문학은 새롭게 변화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하여 기발하고 신선한 발상의 문학이 우리 앞에 등장하게 된다.
 
 소설가 정이현은 이제 인기 작가로 통한다. 베스트 셀러 <달콤한 나의 도시>가 드라마로 방영되면서 그녀에 대한 인지도 높아지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달콤한 나의 도시>보다는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 더 많은 애정을 느낀다. 뭐랄까, 정이현이라는 이름과 매우 잘 어울리는 소설이라고 할까. 파격적이고 자극적인 소재, 문체는 당돌한 느낌마저 든다. 8편의 소설, 화자는 모두 여성들이다.  
 
 얼핏 보면 신세대적 연애소설의 모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연애에 대한 소설은 아니다. 욕망을 위해 위선과 가식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여성들, 이미 어른의 세상을 알아버린 더이상 순수하지 않은 당돌한 소녀들의 연애는 일탈 행위와 같다. 비꺽거리는 관계의 부모에서 납치 자작극을 벌이는 여고생을 소설속에서도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시대는 이미 지나버렸다. 남편의 죽음으로 인해 경제적 안정 느끼게 되자, 두 번째, 세 번째, 새로운 결혼에 대한 타인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고, 정부를 살해하고도 태연하게 일상 속으로 복귀한다. 
 
 정이현은 <낭만적 사랑과 사회>, <순수>, <소녀시대>라는 내용과는 상반된 제목으로 인해 사회가 갖고 있는 여성에 대한 기존의 통념이 얼마나 무지한지 꼬집고 있다. 오직 여성에게만 순결을 요구하는 사회의 잘못된 관습을 발칙하게 비웃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변화된 이 시대의 여성들의 모습인지 모른다. 제도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스러운 삶을 때로 악녀가 되기도 하는 여성들. 남성적 시선이 아니기에 많은 여성 독자들은 통쾌한 대리만족을 느꼈을 것이다.
 
 정이현의 소설은 기존 60년대 여류 작가들과는 분명 다르다.  매끄럽고 깔끔한 문장들, 냉소적인 면에서 은희경을 떠올리지만 그보다 부드럽고 유쾌하다. 새로운 시도이며 더 친근한 것이 사실이다. 같은 세대라는 이유로 작가 정이현에 대한 관심을 놓지 못하고 있다. 반면 같은 시간을 경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80년대 출생 이력을 가진 작가들의 책은 의도적으로 멀리 하게 된다. 신세대적 발랄함, 톡 쏘는 청량음료 같은 글들이 반갑기도 하지만, 아직은 친숙해지기는 좀 버겁다. 문학이 그만큼 시대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표현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인기 작가라는 타이틀보다 소통하는 작가라는 타이틀으로 소개되는 정이현이면 좋겠다. 산뜻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의미있는 산뜻함으로 시대를 묘사하는 그런 소설가가 되면 좋겠다. 일부 편향된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벗어난 시선을 둘 수 있는 작가였으면 좋겠다. <달콤한 나의 도시>, <오늘의 거짓말>도 나쁘지 않았지만 앞으로 그녀의 소설에서 날카로운 성숙미를 만나기를 바란다.
 
* 두 번째 읽은 소설, 이제서야 리뷰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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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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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인의 삶을 관찰하고 수집하는 남자, 정작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그에게 속한 이름, 그것은 진짜가 아니다.  그가 살고 있는 삶은 알맹이는 사라진 껍데기가 아닐까 허무함만이 가득하다. 8년 동안 자신의 존재를 새로이 만들어 준 탐정 소장이 떠나고 홀로 남은 그는 이제 자신을 찾아 나선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나를 찾아 헤매는 여정. 나를 아는 사람이 없을까. 

 파트릭 모디아노의 대표작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기억을 잃은 한 남자가 자신을 찾아나서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기’로 불린 삶이 아닌 본연의 이름과 삶을 찾아가는 과정은 한 가닥 떠오르는 기억도 없어 무기력하기만 하다. 그가 찾아낸 단서들은 낡은 상자 속에서 잠자던 몇 장의 사진들, 과거의 자신을 어렴풋이 기억하는 정원사, 사진사, 여전하게 낯선 사람들뿐이다.

 한 장이 낡은 사진 속에 함께 한 그들은 이미 죽거나 사라져 존재를 확인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 시절, 그가 그들과 함께 했던 시간들은 다시 돌아갈 수도 재생될 수도 없는 시간들이 분명하다. 왜 그곳에 있었는지 사랑하는 연인과 왜 헤어져야 하는지 자신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에게 절실한 것들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이미 새로운 기억으로 가득찬 건물들은 그에게 아무런 위로도 주지 못한다. 다만 그 자리에서 만났던 바람, 나무, 느낌이 자신을 그 시절로 데리고 간다. 아, 사랑했던 여인, 함께 했던 친구들. 기억 속 세상은 어지러웠고 그들은 안전한 곳으로 떠나야만 했는지 알 수 없다.

 감성을 자극하는 서정적인 문장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p9 그 파동들이 때로는 먼 곳에서 때로는 더 세게 나를 뚫고 지나갔었다. 그러다 차츰차츰 허공을 떠돌고 있던 그 모든 메아리들이 결정체를 이룬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였다. p.153 )과 그가 누구일까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오는 흡입력을 가진 매력적인 소설.  탐정이라는 직업적 암시는 자신을 찾게 되어 다행인 결말을 이끌어 낸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2번지>에서 그가 마주하는 것이 무엇이든 지난 날의 나를 확인한 그는 이제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과거와 너무도 다른 삶이라 할지라도.

 불확실한 자아에서 확실한 자아를 찾게 되었을 때, 진정 행복할 수 있을까. 내가 기억하는 삶, 타인이 나를 기억하는 삶이 한 곳에서 만날 때 기억은 완성되는 것인지 모른다. 빛바랜 사진은 삶을 살아내는 모두에게 존재한다. 현재라는 삶을 살고 있는 우리는 추억과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재생되는 그 시절로 때로는 위안을 얻는지도 모른다.  지갑 한 구석에 쑥스러운 웃음의 촌스러운 작은 여자 아이를 만나는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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