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플린, 채플린
염승숙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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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적으로 상상의 세계에 빠져드는 것에 대해 현실의 도피라고 말하기도 한다. 현실의 고통이 극에 다랐을 때,  벗어나고 싶은 욕망은 마술이나, 판타지에 환호한다. 영화 '나니아 연대기'에서 옷장을 통해 새로운 세상이 열리듯 염승숙는 꼬리뼈를 통해, 숫자를 통해, 달력을 통해서 환상으로 이끈다. 그 환상은 환영이 아니라, 그리움이고 추억이었다. 황정은의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 열차>을 읽은 이라면 분명, 두 소설이 비슷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닮은 듯 달랐다.  황정은은 깊고 무거웠으며, 염승숙은 엉뚱하면서도 따뜻했다. 

  염승숙은 환상의 도착점을 달로 연결시켰다. 달은 죽음이기도 했고, 희망이기도 했다. 꼬리뼈 전문 물리치료사가 주인공인 <뱀꼬리왕쥐>에서 아버지는 사라졌고, <춤추는 핀업걸>에서는 자유 자재로 달력속을 드나드는 엄마가 있다.  표제작인 <채플린, 채플린>이나 , <채플린, 채플린 2>에서도 마찬가지로 채플린의 모습처럼 사람들이 멈춰버린다. 세상사가 지겹고 돈벌이가 힘들어서 그들은 사라진 걸까. 아니다, 이미 사라진 사실일진대, 잠시 숨어버렸다고 남아있는 자들은 그렇게 믿고 싶었는지 모른다.  상상이라는 허구의 공간에서 그들을 추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퇴화해버렸지만, 우리 몸의 일부였던 꼬리뼈를 기억하는 <뱀꼬리 왕쥐>의 주인공처럼 말이다. 

 “사람이면 누구나 각자 하나씩 자신만의 달을 가지고 태어나. 그게 바로 꼬리뼈야. 천골에 이어지는, 여러 개의 미추가 결합된 뼈. 태생기에는 누구나 아홉 개의 미추로 이루어진 꼬리뼈를 가지고 있다는 건 너도 알고 있지? 성장하면서 소실되어버리지만 흔적기관으로 남아 있지. 난 그게 우리의 마음에 떠오르는 달이라고 생각해. 안타깝게도 우린 늘, 삶이 너무 고되고 팍팍하게 느껴질 때만 고개를 들어 하늘에 매달린 달을 바라보지. 하지만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언제나 자신만의 달이 떠오르고 있어. 우리는 스스로 그걸 깨달아야 해.”p 28

 정말 우리의 마음에 떠오른 달이 있는지도 모른다.  일상에 지쳐, 눈물이 날때, 달을 올려다보면 그곳에 돌아가신 엄마가 웃고 있다면, 그렇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 염승숙은 그런 확신을 주고 싶었나 보다. 사라졌다 다시 차오르는 달이 항상 우리를 지켜보고 있으니 힘을 내라고 말하고 싶었나 보다. 그것은 주민증록 말소를 해도 엄연하게 삶은 존재한다고 말하는 <피에로 행진곡>에서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런 소설도 있다. 태어날 때 온몸 구석구석 숫자를 가지고 태어나, 공영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아이의 이야기인 <수의 세계>. 공영에게 세상은 수로 통하는 것, 신비하고 놀라운 수의 세계를 만나게 되는 기발한 소설. 

 <다만 내가 지금 이 순간 바라는 것이 있다면,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동안에 그 누구도 아프거나 괴롭거나 슬프지 않았으면 한다는 것, 당신에게 건네는 나의 조금만 농담이, 작게나마 따뜻한 위로로 다가갔으면 좋겠다. 작가의 말>이 다정하게 들린다. 독자가 기꺼이 염승숙과 함께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즐겁게 넘나드는 것은 앞으로 다양한 현실과 부딪쳐 많은 것을 겪게 되면서 선보일 소설에 대한 앞선 기대를 해도 괜찮다는 믿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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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들의 도시
조해진 지음 / 민음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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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득 외로운 존재라는 생각이 들 때, 꼬집어 말할 수 있는 이유 없이 울적할 때, 소설은 힘이 된다. 하여 위로 받고 싶은 순간을 잊어버리려 소설을 찾기도 한다. 괴롭고 고통스러운 인물들을 만나면 가만, 안도의 쉼을 내쉬기도 한다. 조해진의 소설 <천사들의 도시>에 인물들이 그러했다. 철처하게 고립된 삶을 살거나, 보편적인 일상으로의 복귀가 힘든 상황으로 내몰려진 사람들이었다. 모두가 최선의 다해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지만 결과는 최악이었고, 위태로웠다. 

 표제작인 <천사들의 도시>를 포함해 7개의 단편 모두 울적하고 지친 군상들의 이야기다. <천사들의 도시>는 32세 한국어 강사인 ‘나’와 5살때 미국으로 입양되 15년간 살다가 한국에 잠시 돌아온 19살 ‘너’의 이야기다. 사랑하기엔 너무도 많은 것들이 달랐다. 언어를 시작으로 생각과 감정의 표현도 다르다. 분명 서로에 대해 알고 싶으나 쉽지 않다.  결국 ‘너’가 천사들의 도시로 떠나고 난 뒤 ‘나’는 너를 여전하게 사랑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일주일>는 독일 출장시 단 한 번의 관계로 인해 에이즈에 감염된 여자의 이야기다. 극심한 추위를 견딜 수 없어, 아니, 그 순간 감정이 원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에이즈 감염이라는 결과는 너무 혹독했다. 직장에도 가족에게도 알릴 수 없는 혼자만이 감당해야하는 것이었다. 누구라도 붙잡고 하소연하고 싶었을 여자는 사무실로 카드 영업을 하는 남자에게 그 사실을 말해버린다.  포기하고 싶은 삶, 희망이 없는 삶. 여자에게 삶은 이미 계획된 극본같다.  <지금은, 집으로 돌아가 세상의 문을 걸어 닫은 후 오늘분의 무대를 정리하고 커튼을 내려야 할 시간이다.p 62> 내일의 무대가 기다리고 잇음을 암시하는 것을 통해 작가는 그래도 희망을 말하고 있다고 믿고 싶다.

 억눌한 누명을 쓰고 2년 동안 감옥에 살다가 누명이 벗겨져 사회로 돌아온 남자와 연극배우로 단역만 전전하다가 주연을 땄지만 망막색소변성즈응로 인해 더이상 무대에 오를 수 없는 여자의 이야기인 <기념사진>이 인상적이다. 분명 죄가 없음이 밝혀졌지만 직장도 구할 수 없고 가족과도 함께 살 수 없게 된 남자는 불륜 현장을 사진으로 담아 생계를 유지한다. 남자와 여자는 같은 아파트 6층에 산다. 점점 시야가 좁아지는 여자는 무례하고 도도하게 보인다. 사람들에게 일일이 설명할 수 없는 여자는 <그리고, 일주일>속 주인공과 다를 바 없다. 우연하게 여자에 대해 알게 된 남자는 여자를 돌봐 준다. <남자가 아는 것은 지금은 여자에겐 누군가 필요하다는 사실, 그것뿐이었다. 3년 전, 살인 사건이 이러난 집 앞을 지나가가 우연히 CCTV 카메라에 찍혔던 그날처럼, 그때 남자에게 절실하게 누군가가 필요해던 것처럼 지금 여자에게도 자신의 말을 들어 줄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 남자는 그것만 알 뿐이다. p 170>

 단편 속 인물은 하나같이 그가 그녀같다. <인터뷰>의 주인공 우즈베키스칸에서 한국 남자와 결혼해 한국에 왔지만 남편에게 버려진 여자 나탈리아는 한 말은 이 소설집을 대변하는 듯 하다. <한국 남자와 결혼한다고 해서 한국인이 되는 건 아니란 걸 나도 몰랐으니까요. 운이 좋아 한국 국적을 취득한다 해도 나는 애초부터 그 무엇도 될 수 없는 경계에 서 있는 사람일 뿐이죠. p 86>

 무엇이 되고 싶었던 사람들이다. 그 무엇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내 말을, 나의 억울함을 말하고 싶었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 그것이 무엇이었다. 이처럼 조해진의 소설은 차분함을 너머 우울했지만 그래도 닫혀있지 않았다. 에이즈에 감염으로 오늘이 마지막이 아니라고, 세상에 나를 버렸지만 나는 도움을 바라는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소설 속 인물들은 특별한 상황에 처해했다. 일반적으로 상상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예기치 않게 닥친 일들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다. 그들을 바라보는 이상한 시선은 버려야 한다고 소설은 말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하여 경계에 서 있지만 경계 밖이 아니라 안을 향하고 있음을 확인시킨다. 결국 그것이 삶이라고 말하는, 이런 소설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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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피 민음 경장편 1
김이설 지음 / 민음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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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문학을 좋아하는 이유는 우리네 일상과 가장 근접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여류 작가를 특히 선호하는 것은 여자로써의 삶에 대해 좀 더 깊게 파고든 그들의 소설과 공감할 수 있어서다.  지극히 권태롭고 불순해 보이는 제목과 표지를 누구라도 이 소설을 지나칠 수 없게 한다. 작가의 등단작 <열 세살>과 <엄마들>을 읽었을 때 그 기대감을 기억하기에 주목받는 신예라는 문구가 내게는 당연한 것이다.

 엄마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아빠의 존재를 모르며 태어남과 동시에 나쁜 피라고 낙인찍힌 여자, 화숙이 있다. 두 모녀를 당연히돌바줘야 할 가족인 할머니와 외삼촌 조차 냉대와 폭력을 일삼았다. 그런 엄마에게 화숙도 연민보다는 증오와 분노가 있었다. 천변에서 고물상을 하던 외삼촌의 폭력에 쓰러진 엄마가 죽음에 이르렀지만 모른 척 외면했다. 모든 게 엄마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린 소녀에게 감당할 수 없는 일들로 화숙이 비툴어진 심성을 갖게 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모든 화를 동갑내기 사촌 수연에게 뒤집어 씌워 자신의 존재를 지키고 싶었을 뿐이다. 거짓말로 수연을 난처하게 했고, 외숙모의 외도를 외삼촌에게 고했다. 

 수연은 언제나 화숙는 다른 삶을 살았다. 연약했고, 여대생이 되었고, 결혼을 했다. 심지어 사랑했던 옛 남자 재현과 다시 살림을 차린다. 화숙은 어느 것 하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토록 원했던 평범한 삶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늙은 할머니를 부양했고, 삼촌에 대한 분노도 여전했다.  화숙에게 남은 것은 악의뿐이었다.

 못생기고 살집 많던 여고생은 뚱뚱하고 키 작은 노처녀가 되었다. 손톱은 언제나 뭉뚝했고, 찬 바람이 불면 손등이 트기 시작했다. 겨울이 되면 붉게 변해 피가 났다. 발뒤굼치도 언제나 허옇게 들뜨고 굳은 살점이 갈라졌다. 그렇게 나이를 먹었는데도 부자가 되지 못했다. p 53

 어린 혜주를 살뜰하게 돌보는 옆집 여자 진순을 이해할 수 없다. 딸까지 버려가며 사랑을 선택했지만 수연의 마지막은 자살이었다. 재현을 찾으러 간 외삼촌은 실종되고 결국 시신으로 돌아왔다. 화숙에서 가족이란 이름으로 남은 이는 없다. 지겹도록 끔찍했던 외삼촌의 고물상이 새로운 일터가 되었고, 엄마도 외삼촌도 그 누구도 아닌 혜주와 진순만이 화숙을 기다렸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인 천변과 고물상은 누구도 원하지 않는, 더럽고 피하고 싶은 곳이지만, 삶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법. 버려진 것들로 이뤄진 고물상이 누군가에게는 절대적인 삶의 근원지가 된다. 그 안의 사람들, 화숙을 비롯해 모두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왔다. 우울증으로 아이마저 외면하고 도망쳐야 했던 진순, 장애인 딸을 낳았다는 이유로 평생 죄책감에 시달렸을 할머니가 술꾼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가족이기, 벗어나고 싶었는지 모른다. 반면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아니었다면 쉽게 천변을 떠날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 혜주는 달라야 한다는 것이 화숙의 진심은 아니었을까. 하여, 자신이 경험하지 못했던 가족을 만들고 지키고 싶은 욕망이 살아났는지도 모른다.

 “다녀오셨어요.”
안채로 들어서자 혜주가 큰 소리로 인사를 했다. 색연필을 쥐고 있던 혜주가 다시 바닥에 엎드려 발을 까닥거리며 그림을 그렸다. 여자 셋이 손을 잡고 있는 그림이었다. 그림의 구석에는 세모 지붕의 집 한 채, 하늘에는 노란 해가 떠 있었다. p 178

 혜주가 그린 그림 속 여자들은 더이상 나쁜 피를 나눈 가족이 아닌, 새롭게 태어난 가족이다. 혜주가 화숙과 수연처럼 성장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적어도 화숙과 진순혜주에게 자신의 분노와 피해의식을 표출하지 않을 것이며 가족이라는 이유로 어떤 희생도 강요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불편한 소설이나 외면할 수 없는 소설이다. 내가 만든 인물들이 당신을 대신해 앓았으면 좋겠다, 라는 작가의 바람처럼 고통스러운 삶을 치열하게 살아내는 그들이 몹시 안쓰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소설이라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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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9 0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10 1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는 오직 글쓰고 책읽는 동안만 행복했다 - 원재훈 시인이 만난 우리시대 작가 21인의 행복론
원재훈 지음 / 예담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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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만으로도 한국 문학의 상징이 되는 작가들. 그들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삶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설렘을 준다. 박범신이 만난 젊은 작가들에 비해 원재훈이 만난 작가들은 가장 적은 나이가 마흔인 중년을 훨씬 넘어선 작가들이다. 자신의 글쓰기에 대해 확고한 신념이 있는 작가들이라고 하면 맞을까 싶다. 21명의 작가중 정현종 시인을 시작으로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많아서 다소 흥분된 책읽기를 시작하였고 끝까지 그 기분은 계속되었다. 책은 1~2년 전 원재훈이 직접 작가들 을 인터뷰한 글들을 엮어 놓았다. 인터뷰한 장소는 주로 서울이나 일산이 많았고 도종환과 김용택은 작가의 집으로 저자가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한 잔의 차나 술 잔을 마주하기도 하고 밥을 먹기도 하면서 문학과 사랑, 삶, 행복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유명인이나 다름없기에 독자들에게 많이 알려진 사실도 많았지만 김연수와 시인 문태준이 고교 동창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언제나 책을 처음 만났던 그 때의 나와 작가를 기억하고 있었던 때문인지 은희경이 쉰을 넘겼고 정호승 시인이 예순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작가들에게는 언제가 책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 법.  많은 책들 이 언급되었고, 정현종이 언급한 ‘카프카와의 대화’를 꼭 만나봐야 겠다 생각했고, 정호승의 만나지 못한 책을 주문 하기도 했다. 

 세련된 외모의 은희경이 어린 시절 왕따를 당하고 아버지의 사업이 안 좋아서 야반도주의 경험을  ‘비밀과 거짓말’로 썼다니 그 소설이 새롭게 다가왔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전 소설가로 사는게 좋아요. 이것만 잘하면 되니까 말이죠. 그런데 최근에는 산문을 쓰기로 했어요. 이제 좀 다른 장르의 글을 쓰는 법도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겁니다. 이제는 여러 가지 상황이 바뀐 것 같아요. 전 이제 문학소녀가 아니라, 일로 글을 쓰는 사람입니다. 여러 장르의 글을 소화해내는 것도 능력이죠. ” p 86  이제 그녀의 산문을 읽을 준비로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책의 제목은 윤대녕의 말을 썼다. 그는 어린 시절 조부모 밑에서 자랐고 조부를 문학의 아버지라 할 정도다. 그리고 그 시간을 이렇게 말했다. “오직 글 쓰고 책 읽는 동안만 행복했어요. ”그는 자신의 소설을 오늘이라고 한다. “모든 인간은 다 죽습니다. 죽음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확실한 미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삶을 이야기하지요. 그것이 바로 오늘 입니다. 나는 이 오늘을 씁니다. ” p 113 그가 쓰는 오늘은 작가이며 독자이기도 한 것이다. 아, 윤대녕의 단편‘못구멍’을 다시 읽고 싶어진다.  

 딸과 함께 다녀온 인도 여행을 풀어 놓는 전경린의 글 속에서는 왠지 평온함이 느껴진다. ‘엄마의 집’ 이후로 그녀의 글에서는 불안보다는 안정감과 따뜻함이 나타나지 않을까. 글쓰기의 한가운데에서 글쓰기의 행복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럼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시절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글을 쓰지 않는다면 내가 뭘 선택할 수 있을까 라는 반문을 하면서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어떤 일을 해서 먹고 살 방편을 마련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지요. 그래서 쓰고 또 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p 426  혼자서 써야 하는 외로움과 고단함의 시간이 얼마나 많았으며 그 안에서 자신이 쓴 글에 만족한 시간은 또 얼마나 될까. 

 아직 소설이나 시로 만나지 못한 작가도 있다. 윤후명의 작품은 몇 번 만났지만 읽다가 손을 놓았던 기억이 있고, 김선우의 산문집도 그러하다. 김선우가 쓰는 동안 쓰고 싶은 소설이 세 권이나 몸으로 들어왔다는 ‘나는 춤이다’가 궁금해진다.  읽는 동안 행복했던 이유는 원재훈의 글에도 있다 . 시인이라 그런지 무척 감각적이고 섬세했으며 같은 공간을 묘사한 부분도 작가마다 그 느낌에 따라 달랐고 독자가 작가들 더 사랑하도록 공들여 썼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인터뷰 하는 내내 작가들도 무척 행복했을 것 같다. 친구이자 선후배를 만나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며 추억에 잠기기도 하고, 열심히 자신이 쓴 작품과 삶에 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 그 자체로도 소중하므로. 내게도 자주 자주 열어보고 싶은 또 하나의 소중한 책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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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 - 제6회 채만식문학상, 제10회 무영문학상 수상작
전성태 지음 / 창비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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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에게나 특정 지역에 대한 추억이 있거나 갈망이 있다. 대부분 자신이 자라 온 고향이거나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 준 곳이 그러하다. 소설에서 만나지는 지역은 소설의 배경임과 동시에 작가에게 소중한 곳이 되는 경우다. 소설가 조경란은 단편 ‘나는 봉천동에 산다’에서 자신의 터전인 서울의 봉천동을 구체적으로 묘사했고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 장편 소설 ‘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의 작가 윤대녕은 집필 내내 제주도에 머물렀다고 한다. 소설가 전성태에겐 몽골이 그러했다. 소설집 <늑대>는 몽골에 의해 탄생된 몽골을 위한 소설집이 아닐까. 
 
 열 편의 소설 중  실린 차례대로 <목란 식당>, <늑대>, <남방 식물>, <코리언 솔저>, <두번째 왈츠>, <중국산 폭죽> 6편의 단편은 모두 몽골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목란 식당을>은 몽골에서 여행사를 하고 있는 주인공 나와 화가인 나의 삼촌과 즐겨찾는 북한 음식 전문점인 <목련 식당>에 관한 이야기다. 교민 신문에 평 옥류관 출신 요리사가 온다는 광고가 실리면서 식당 분주해진다. 식당을 찾은 교민들과 관광객은 북한 출신 요리사는 장사 수단이라며 수입금이 북으로 유입되냐고 묻는다. 식당의 여사장은 사정이 생겼는지 오지 않았다고 말한다. <목란 식당>은 식당일뿐인데, 몽골에서 북을 대표하는 이미지화 되는 현실이 씁쓸한 소설이다.

 표제작인 <늑대>는 광할한 몽골을 그대로 드러난다. 캠프촌 게르에 늑대 사냥꾼들이 도착하며 시작되는 소설은 화자가 바뀌며 전재된다. 사냥꾼의 길잡이를 역할을 하는 촌장과 그의 딸 치무게, 늑대 사냥을 온 늙은 기업가와 함께 온 여자 허와, 사원의 라마, 늑대 사냥을 도와주는 카자르.  각자의 시선으로 늑대 사냥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광활한 초원에서 말과 낙타를 기르며 살고 있던 촌장에게 몽골의 시장 경제 도입은 삶을 변화시켰다. 

 < 한 잔 수태채가, 게르에서 하룻밤 잠이 돈으로 계산되었습니다. 장작을 패는 노동이, 늑대를 쫓는 동행이 벌이가 되었습니다. 그뿐입니가. 게르 천장으로 빛나는 별과 스미는 달빛이, 지나는 바람과 흩날리는 눈이 역시 돈의 현영(現影)처럼 손님들을 끌어왔습니다. 그리고 나는 내가 필요한 것, 때로는 여자가지 도시로 나가 사야 했지요. 그 볼모의 대지에 살을 부리며 나는 내 생에 좋은 일을 다 끝났음을 깨닫곤 했습니다. > p 38 

 늙은 사업가는 몽골의 사회주의체제가 남긴 써커스를 상업화 시켜 돈을 번다. 써커스에 필요한 늑대를 원하지도 하지만 그는 강력하게 말한다.  <나는 늑대 앞에 숙명적인 라이벌처럼 마주서기를 원합니다. 약육강식의 자연법칙이니 죄의식이니 연민이니 하는 것들이 없는 절대공간에서 독대하기를 원하니다. 스스로 자신을 사냥하듯이 이루어졌으면 싶습니다. 어쩌면 나는 가징 사냥다운 사냥을 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 p 46

 그믐밤 늑대를 죽여서는 안된다는 라마의 말을 들었지만 사냥꾼들은 검은 수컷 늑대를 원한다. 늑대를 유인하기 위해 카자르는 양들을 몰아준다. 늑대 사냥은 결국 늑대를 떠나게 만들 것이라는 것에 안타까운 촌장. 늑대는 결국 몽골과 같은 것이었다. 늑대를 쫓는 사냥군이 늘어나고 그들로 인해 돈을 버 캠프촌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몽골은(늑대는) 본연의 모습을 지키기란 어려운 것이리라.

 한국을 꿈꾸는 몽골인과 반대로 몽골을 꿈꾸는 한국인의 모습을 그린 <남방 식물>, <코리언 솔저>에서도 정착되지 않은 시장 경제 체제속에서 혼란스럽고  폐쇠적인 사회를 만날 수 있다.  몽골은 과거 우리가 걸어온 경제 발전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발전에 가려 잊고 있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되볼아보게 한다. 

 그외 단편 <강 건너는 사람들>에서는 죽음을 불사하고 자유를 찾아 떠나는 사람들의 간절함을, <누구 내 구두 못 봤소?> 에서는 남과 북에 모두 아내를 둔 한 남자의 슬픔을 유머러스하게 그려냈다. <이미테이션>이라는 단편은 혼혈아의 외모를 가졌지만 정작 부모는 모두 한국인이기에 결국 자신의 외모를 근거로 외국인 행세를 하며 학원 강사를 하는 주인공을 통해 진짜를 원하지만 진짜를 구별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소설은 몽골이라는 광활한 초원을 활주하는 늑대와 징키스칸의 후예를 상상하게 한다. 그러나 이제 초원은 사라졌고 전성태는 이렇게 썼다. <몽골은 내게 특별한 고통과 영감을 주었다. 시원(始原)의 이지미를 간직한 광활한 대지에서 맞닦드린 고독감은 세계 바깥을 보고 온 듯한 여운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흥미로웠던 것은 사회주의에서 시장경제로 이향한 몽골사회였고, 기이하게도 그것은 우리 사회를 되비춰주는 거울이 되곤 했다.>
몽골에서 돌아온 그의 가슴에는 아마도 한 마리 늑대가 자라고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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