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위로
임재청 지음 / 책읽는수요일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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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작정 책을 읽었던 때가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이 가장 순수하게 책을 읽었던 때가 아닌가 싶다. 물론 지금도 책을 읽고 있고 책을 구매하고 책을 곁에 두었다. 책에 대한 애정이 식은 건 아니다. 다만 책과의 거리가 조금 생긴 것이다. 반성의 시간을 갖자면 예전보다 나와 문학과는 조금 멀어졌다. 특히 한국문학의 경우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이 나오면 바로 읽곤 했다. 그에 대한 감상을 기록하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많이 게으름을 피우는 독자가 되었다. 읽었지만 리뷰나 메모를 하지 않는 책이 늘어났고 한 달에 한 권, 고전을 읽거나 인문 분야의 책을 읽자는 다짐을 하지 않는다. 책이 거기 있으니 읽겠지 하는 무책임한 마음만 커졌을 뿐이다.


 책이 있어 좋은 사람, 가장 좋은 친구가 책이라 말하는 사람, 임재청『문학의 위로』를 읽으면서 나는 부끄러웠고, 저자의 책에 대한 열정이 부러웠다. 고전을 읽는 건 노력이 필요하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지금 이 순간이 아닌 내가 알지 못하는 시대를 담은 이야기. 저자에 비하면 부끄럽지만 내가 고전을 통해 얻고자 했던 건 그 안에서 오늘을 발견하는 게 아니었을까 싶다. 저자가 읽은 책의 목록을 살펴보면 제목으로는 이미 읽은 것 같은 책도 있지만, 처음 만나는 고전과 작가의 대표작 정도만 알고 있었던 경우도 있었다.  


 같은 책을 읽었지만 나와는 다른 부분에서 감동을 받고 다른 문장에 밑줄을 긋는다. 오프라인으로 독서모임을 하는 지인의 말을 빌리면 한 권의 책을 읽고 저마다의 목소리로 책을 말하는 시간이 정말 즐겁다고 했다. 다른 시선으로 책을 만나는 일, 이 책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다. 책의 힘은 언제나 크다는 사실도 확인하다. 문학의 힘, 고전의 울림을 통해 삶의 위로를 받는다는 사실도 말이다. 이 책은 사랑, 성장, 가치, 소외와 저항, 구원을 주제로 고전을 선정하고 그 속의 삶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데 중요한 게 무엇인지 나누고자 한다.


 하루를 살아내는 것조차 버거운 이들에게 사랑을 믿냐고 묻는다면 무슨 대답이 돌아올까?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3포세대에서 N포세대가 된 이들은 문학의 위로를 믿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몸 안에 성냥갑 하나씩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말하는 라우라 에스키벨의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를 읽는다면 성냥갑에 불을 지펴줄 상대를 만나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내면의 변화가 인생을 지탱하는 힘이 되어주기도 한다는 걸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에서 한스에게는 아버지가 기대하는 삶이 아니라 내가 살고 싶은 것을 선택할 때 행복할 수 있었을 거라는 단순하면서도 평범한 사실. 결국 고전은 누군가의 인생이다.


 그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인생, 절망과 좌절이 반복될지라도 지지 않고 일어서야 한다는 용기와 위로를 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에서 받는다. 처음에 읽었을 때는 몰랐지만 접하면 접할수록 좋은 고전이라 생각한다.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이라는 같은 듯 다른 삶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노인의 이야기는 가장 좋은 비타민이며 처방전이라 해도 좋다. 이 책에 대한 저자의 글 또한 그러하다. 그러니까 그는 실패를 아는 사람인 것이다.


 인간은 패배하려고 창조된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패와 패배를 같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실패할 수는 있어도 패배해서는 안 됩니다. 삶은 용감한 사람들의 것입니다. 그런데 패배는 이런 용감함마저 없으며 아무것도 꿈꾸지 않는 것입니다. 반면에 실패는 84의 끝에서 다시 85의 희망이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비록 무언가를 얻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85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패를 아는 사람만이 고기를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136쪽, 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실패는 다음을 기대할 수 있게 만든다. 두 번 다시 실패하지 않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하고 연습할 수 있는 지혜를 선물한다. 그것은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속 이런 부분과 이어진다. 자신에게는 닥치지 않기를 바라는 실패, 불행에 대한 단호한 의지를 만들기도 한다. 불행을 치유할 수 있는 티끌의 믿음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한다. 어디서 믿음의 싹을 찾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햄릿은, 진정으로 위대함은 어떤 명분이 있고서야 행동하는 게 아니라, 명예가 걸렸을 때 지푸라기 하나를 위해서도 싸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불행 속으로 뛰어들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불행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지푸라기 하나에도 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그것을 견디기 위해서는 매번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불행에 지혜가 더해질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위대한 걸작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266쪽,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


 읽지 못한 좋은 고전을 먼저 읽고 손을 내밀어 준 책이다. 책등이 아닌 책 속으로의 초대인 셈이다. 늦었지만 ​찰스 디킨스 『위대한 유산』과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초대에 응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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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01 2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6-05 1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는 한때 잘 참는 아이였다. 기다리는 일도 잘 했다. 그건 아주 나쁜 습관이었다. 그런데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참고 기다리는 동안 온간 말들이 켜켜이 쌓였다가 사라졌다. 기다리는 일밖에 할 수 없어서 그랬던 적도 있었지만 기다리는 그것이 무엇이든 늦은 이유를 따지고 물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러다 통증을 참고 말았다. 미련하고도 미련하게. 과거의 일이지만 현재도 참는 편에 속한다. 특별히 몸 어딘가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니다. 이상이 생긴 건 작은언니다. 목 디스크가 심해져서(안타깝게도 심해진 상태에서 병원에 찾았다) 입원 치료를 앞두고 있다. 서울에 있는 병원이다. 이럴 땐 서울에 살고 싶다.

 

 작은언니의 일상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런 언니를 바라보면서 그 지경까지 몰랐냐고 크게 화를 내지 못했다. 화를 낸다고 해서 언니의 불안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어차피 벌어진 상황,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걸 아주 잘 안다. 청소년인 조카에게 엄마의 상황을 전달했고 언니에게 생각을 많이 하지 말라고만 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은 별 의미가 없을뿐더러 내일을 걱정한다고 오늘이 달라지지 않는다고 분명하면서도 차분하게 말했다. 병가를 낼 수 있는 직장(유급이면 더 좋겠지만)이라 다행이라고, 기간이 길지 않아 다행이라고, 수술이 아닌 다른 선택으로 치료를 할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그리고 해야 할 일들에 대해 말했다.

 

 당연히 가장 속상한 건 언니다. 누구도 그 아픔을 대신할 수 없다. 누군가는 목 디스크가 별거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언니에겐 대단한 것이다. 아는 것과 경험하는 것, 안다고 믿는 것은 다르다. 각자의 인생은 각자의 퍼즐로 만들어지니까. 우연일까, 나는 소노 아야코의 『약간의 거리를 둔다』를 읽었고 많은 위로를 받았다. 어쩌면 이 책은 내가 아닌 언니에게 더 필요한 책인지도 모르겠다. 삶에 대한 태도,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들려준다. 성급하게 말하는 것일지 모르지만 온전히 좋은 책에 속한다고 말하고 싶다. 진부한 인생의 조언이라고 해도 좋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잔소리처럼 들리지 않는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인생이라고 말하지 않겠다. 인생은 좋았고, 때론 나빴을 뿐이다. (74쪽, 「인생은 좋았고, 때로 나빴을 뿐이다」, 중에서)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다는 드라마 속 대사처럼 인생이 그러하지 않을까. 너무 낙관적인 게 아니냐고 말한다면 비관적인 것보다 훨씬 나은 거 아니냐고 답하겠다. 당신은 조르바처럼 살고 싶은 욕망이 없느냐고. 어쩄든 소노 아야코의 글은 힘이 세다. 읽는 이에 따라 다르게 스며들겠지만 스며들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어둠 없이는 빛의 존재를 깨닫지 못한다. 인생이라고 다를 리 없다. 행복은 여간해서는 그 실태를 알아차릴 수 없지만 불행을 배우는 순간, 불행과 다른 행복의 존재를 상상하게 된다. 그러므로 불행은 생각만큼 손해는 아니다. 행복에 대한 갈망은 오직 불행한 가운데 키워지기 때문이다. 절망적인 운명을 똑바로 응시하지 않는 한, 희망의 본질에서 빛나고 있는 삶의  비밀은 영원히 드러나지 않는다. (62쪽, 「불행한 사람만이 희망을 소유한다」, 전문)

 

 속상한 일이 생길 때마다, 걱정거리를 만날 때마다 스프링을 생각한다. 외부의 힘에 변형된 물체가 원래의 모양으로 되돌아가려는 힘을 말이다. 아픈 감정, 상처가 아물고 본연의 마음을 갖는 힘을 생각한다. 언니는 목 디스크라는 외부의 힘에 의해 변형됐고 입원과 퇴원 후, 그리고 회복을 위한 장기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언니를 지켜보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언니의 몸과 마음의 준비가 끝날 때까지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무조건 다가갈 필요는 없다. 모든 것은 거리를 두면 아름답다는 말처럼 말이다. 언니와 나의 거리도 그렇다. 가족과 친구, 연인, 그들 사이에 거리가 필요하다.

 

 거리라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의미를 갖는지 사람들은 잘 모른다. 떨어져 있을 때 우리는 상처받지 않는다. 이것은 엄청난 마법이며 동시에 훌륭한 해결책이다. 다른 사람도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내 경우엔 조금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으면 세월과 더불어 그에게 품었던 나쁜 생각들, 감정들이 소멸되고 오히려 내가 그를 그리워하는 건 아닌가, 궁금함이 밀려온다. (121쪽, 「떨어져 있을 때 상처받지 않는다」, 전문)

 

 『약간의 거리를 둔다』와 닮은 듯한 시집도 있다. 정호승의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를 함께 읽으면 더 좋겠다.  희망을 거절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희망이 없는 희망을 거절한다

희망에는 희망이 없다 희망은 기쁨보다 분노에 가깝다

희망을 통하여 희망을 가져본 적이 없다


나는 절망이 없는 희망을 거절한다

희망은 절망이 있기 때문에 희망이다

희망만 있는 희망은 희망이 없다

희망은 희망의 손을 먼저 잡는 것보다

절망의 손을 먼저 잡는 것이 중요하다


희망에는 절망이 있다

나는 희망의 절망을 먼저 원한다

희망의 절망이 절망이 될 때보다

희망의 절망이 희망이 될 때

당신을 사랑한다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 전문

 

 

넘어지면 넘어지는 대로 넘어져라

결코 넘어지지 않으려고 하지 마라

굳이 뒤돌아보지 말고

넘어지더라도

그 누군가의 가슴에는 넘어지지 마라

오로지 자기의 슬픔 가슴에 넘어져라

하늘이 보이면 하늘을 보고

구름이 보이면 구름의 길을 따라 흘러가라

땅에 손을 짚으면 땅이 되고

물에 팔을 짚으면 그대로 물이 될 때까지

넘어지는 것이 일어서는 것이 될 때까지

일어서기 위하여 다시 넘어지게 될 때까지

누구 손을 내밀어도 선뜻 잡지 말고

아침이슬에 빛나는

풀잎의 긴 손을 잡아라 「넘어지는 법」, 전문


 

 우리가 사는 시대는 희망은 사라지고 절망만 남은 시대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인의 시처럼 절망이 있기에 희망이 존재하는 것. 저마다의 절망에서 피어나는 희망의 꽃은 얼마나 강하고 단단할까. 언니는 잠시 넘어졌다. 언니에게로 말이다. 이제 일어설 것이다. 일어서기 위해 넘어지게 된 거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나는 제법 병실에 익숙하지만 언니는 그렇지 않다. 병실에서 언니가 더 건강해지고 일과의 거리, 사람과의 거리, 그리고 자신과도 약간의 거리를 두기를 바란다. 약간 쉬기, 약간 혼자 있기, 약간 울기, 약간 웃기. 말이 되는 말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약간이라는 말,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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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30 2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31 1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위안의 서 - 제3회 황산벌청년문학상 수상작
박영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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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의 죽음을 유기하기 위해 파놓은 깊은 구덩이 같은 발굴 현장에 내리고 있는 눈송이들이 그는 죽음처럼 보였다. 죽음은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언제나 우리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려 삶의 윤곽을 뒤덮어버리는 선뜩한 비늘들인 것이었다.’ (115쪽)

 

 죽음을 읽는 일은 고통스럽다. 그것이 실재가 아닌 소설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하루하루의 삶이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존재 앞에 무기력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미 사랑하는 이들과 영원한 이별을 했고 죽음에 익숙해져 단단해졌다고 여겼지만 죽음은 여전히 무너지지 않는 성처럼 나를 가로막는다. 그럼에도 이러한 소설을 읽는 건 무슨 이유일까? 그저 습관처럼 읽었을지도 모른다. 소설을 읽으면서 잠시나마 도망칠 수 없는 현실의 무게를 망각할 수 있으므로. 물론 소설의 마지막을 덮으면 바로 현실이 된다는 걸 안다. 그러나 소설을 읽기 전과 확연히 다르다.

 

 보존과학자로 유물을 관찰하고 기록하며 그것들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일을 하는 남자와 자살률을 낮추기 위해 정부에게 비밀리에 파견한 공무원인 여자. 모두 죽음을 지척에 둔 삶이다. 전혀 다른 곳에서 다른 방식으로 죽음을 만지는 그들이 만난 건 우연일까, 운명일까. 남자가 보존 처리한 미라 특별전을 여자가 관람한 것이다. 복원된 유물을 미화하는 설명에 화가 난 여자에게서 그는 강렬한 느낌을 받는다.

 

 그녀는 생을 버리고 죽음을 선택했지만 실패한 이들에게 절망이 아닌 희망을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삶은 온통 어둠뿐이었다. 지금껏 버텨온 생을 놓아버리고 싶었던 순간 그녀는 그에게 문자를 보낸다. 단 한 사람에게라도 자신을 보이고 싶었을 뿐이다. 아무런 기대도 없었다. 외할아버지와 엄마를 죽음으로 이끈 병, 그도 예외는 아니었다. 최선을 다해 자신을 지켜야 했지만 그녀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것은 신호였다.

 

 그는 어떤 것도 소홀히 지나칠 수 없었다. 그 모든 풍경과 소리와 냄새가 다 그녀와 자신의 사이를 이어주고 있는 어떤 가느다란 실낱처럼 여겨졌다. 그는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그것들을 하나씩 자신의 눈에 음각하고 있는 중이었다.’ (137쪽)

 

 서로에게 서로의 전부를 보이지 않아도 작은 눈빛만으로도 전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죽은 자의 유물을 파내는 구덩이, 그 어둠 속에서 사랑을 나누는 동안 그들에게 죽음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매일매일 자신에게 남겨진 시간을 갉아먹듯 살아가는 그에게 그녀는 자신을 기억하는 단 한 사람이자, 전부였다. 거기 죽음이 있으므로 삶을 포기하지 않고 묵묵하게 살아가는 남자에게 그것으로 충분했다. 스스로에게 아름다운 위안이자 애도를 부여한 것이다.

 

 남겨진 자에게 위안이 되어야 하는 그녀의 일상은 그와의 만남 후 미세하게 달라졌다. 상담자를 대하는 태도와 삶에 대한 자세가 정해진 메뉴얼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음을 그녀는 느꼈다. 그것은 죽음을 당당하게 마주하는 것처럼 다가온다. 박영의 소설은 분명 죽음이란 이미지에서 시작되었지만 천천히 어둠과 그림자를 걷어낸다. 빛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죽음을 상대할 수 있는 건 오직 삶이라는 진실. 설사 그 삶이 고독할지라도 아름답다는 걸 기억하라는 듯 빛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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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5-25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이라는 유한한 존재의 시발은 아마도
죽음이겠죠.

죽음에 맞서기 위한 방법이 삶이라는 역설
이 새삼 와 닿습니다.

자목련 2017-05-29 17:42   좋아요 0 | URL
한 손에는 삶이, 다른 한 손에는 죽음이 닿아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공기 도미노 오늘의 젊은 작가 15
최영건 지음 / 민음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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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일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우선 내게 속한 일상들, 내가 사랑하는 이들에 대해 제한을 두어도 괜찮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마구 벌어지는 세상이니까. 타인과의 관계도 그러하다. 관계의 끝에는 모든 게 연결되어 있어 하나의 원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지금의 나를 이끄는 관계에도 최선을 다하기에 부족하다. 최영건의 『공기 도미노』를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 의미를 부여하는 일, 관계를 확장시키려 애쓰는 일, 모든 게 부질없는 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소설을 읽는 일에도 적용할 수 있다. 문학이라는 큰 범주 안에서 잡을 수 없는 작가의 목소리를 잡으려 애썼던 시절이 있었다. 뭔가 내가 모르는 대단한 의미가 행간에 숨어있는 건 아닐까. 그것과 마주하지 못한다면 내게 읽기는 외면적인 행위에 불과한 게 아닐까, 두렵기도 했다. 단지 하나의 이야기, 꾸며진 이야기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말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소설 속 인물이 입체적으로 내게로 걸어오는 게 느껴졌다. 아름다운 문장의 옷을 입은 인물에 반하거나 현실보다 더 적나라한 생활인의 모습에 놀라거나 표정 없는 인물의 얼굴과 겹쳐지는 누군가가 떠오른 것이다. 그것은 마치 그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최영건의 소설은 도미노란 단어가 주는 불안에서 끝내 반전을 이끌어내지 않았다. 예측된 결과이었는지도 모른다. 모두 쓰러지고 무너지는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소멸하는 인물들이라고 할까. 연주가 할머니 복자의 재혼 상대인 현석을 도우러 그의 집에 방문했을 때 목도한 그곳의 분위기는 화합이 아닌 분리였다. 현석과 아들 내외는 서로를 철저하게 무시했다. 서로 다른 환경의 두 가족이 하나가 되기 위해 겪어야 할 배려나 소통은 존재하지 않았다. 연주와 할머니의 관계도 다르지 않았다. 복자에게 연주는 애정의 대상이 아닌 주종 관계처럼 보인다. 연주가 운영하는 카페의 실제 주인, 연주 행동, 연주의 연애, 모든 게 맘에 들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소설엔 곳곳에 불안과 비극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자함과 우아함으로 위장한 현석과 복자, 그리고 저마다 누군가와 갈등을 빚는 인물들이 있다. 현석의 며느리 소현에겐 외도하는 남편 원균, 원균에겐 내연녀 해정, 연주에게는 연인인 병식, 병식의 친구 태영에겐 여동생 진수가 그러했다. 공교롭게도 그들은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지 못했고 서로를 온전하게 이해하려 하지도 않았다. 소설 속 그들은 그렇게 살아왔고 변화하려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우연한 사고에 휘말리고 갑자기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오토바이 사고로 연주를 잃고 뒤이어 현석이 떠나고 복자는 혼자 남았다. 그런 복자를 현석의 며느리 소현이 살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흐름이다.

 

 ‘손을 뻗으려면 눈앞의 공기를 흩뜨려야 한다. 손을 뻗기 전의 장면을 부숴야 한다.’ (21쪽) 

 

 ‘눈앞의 문제를 위해 손을 뻗다 보면 의지와는 무관하게 보이지 않는 다른 것들마저 훼손하게 된다. 망가뜨리고도 느끼지 못한다. 부서뜨리면서도 조각들을 볼 수 없다. 큰 그림, 작은 그림, 아주 작은 그림. 아주 작은 그림만을 보는 눈. 그렇게 표현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그 표현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172쪽)

 

 생각해보면 삶이란 그렇게 지속된다. 알 수 없는 일들의 연속, 작은 균열에 무너지는 일상과 관계들.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지금과는 다른 삶을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나가기 위해 도미노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말이다. 그 끝에 변화와 성공이 있다는 보장은 없지만 말이다. 누군가는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도미노를 세우고 누군가는 그것을 쓰러뜨리기를 원한다. 무너지는 도미노를 세우는 일. 어쩌면 무너질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저마다 도미노로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때로는 있는 그대로 살아가는 게 중요한 목표가 된다. 모든 일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하나의 조각으로, 하나의 도미노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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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 도미노 오늘의 젊은 작가 15
최영건 지음 / 민음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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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묘하게 빠져드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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