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의 습격 - 모두, 홀로 남겨질 것이다
김만권 지음 / 혜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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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예능 프로에 출연한 연예인이 인공지능 챗봇과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복잡해졌다. 인공지능이 아닌 고유한 인격을 지닌 인간 같았기 때문이다. 순간 무섭기도 했다. 어떤 미래에는 인간이 아닌 인공지능과 대화하며 살아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물론 인공지능 챗봇을 사용한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일이다. 하나의 기술이 모두에게 제공되는 건 아니니까.


철학자 김만권의 『외로움의 습격』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예능의 한 장면이 떠오른 건 무슨 이유일까. 편리함으로 위장하고 가려진 사회의 모습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만연한 외로움이라는 감정의 실체를 낱낱이 파헤치는 책이라고 해야 할까. 저자가 강의 형식으로 들려주는 내용은 철학적 사유가 아닌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며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이다. 사회 전반에 드리워진 외로움의 원인과 해결책에 대한 고민이다.


단순히 외로움만 생각하자면 고립, 단절, 소외로 연결되는 노년층이 가장 크게 느끼는 감정일 거라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통계가 말하는 건 달랐다. 20대가 느끼는 외로움과 좌절이 자살을 선택하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사실은 충격을 안겨줬다. 어쩌다 우리 사회가 외로움에 점령당했을까. 디지털의 시대, 초연결망의 세기를 살고 있기에 그렇다. 아마 대부분 인정할 것이다. 스마트폰에 중독된 일상을 살고 있을 테니까. 터치 한 번으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세상. 불가능은 없어 보인다. 굳이 인간과 관계를 맺지 않아도 인공지능이 다 알아서 해주는 편리함.


저자가 이 책에서 주목하는 건 그것이다. 디지털, 데이터, 인공지능의 시대에서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가. 플랫폼 노동자로 적락한 사람들. 빅데이터의 수많은 데이터를 모으고 정리하는 인력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빅데이터로 만들어진 정보가 어떻게 차별을 만들고 생성하는지. 그저 내가 원하는 정보를 검색 한 번으로 알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할 뿐.


외로움의 시대에서 인공지능은 가장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연예인의 사례처럼, 정보와 조언을 구하는 사이. 그러나 책임은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해야 한다. 인간과 관계에 대해 배우지 못하고 타인에 대해 이해나 배려를 모르는 채 인공지능(기계)와 관계를 맺을 때 어떤 책임도 지지 않고 쉽게 폐기할 수 있다.


인간을 대신한 AI 면접은 공정할까? 여러 책에서 읽었지만 인공지능이 수집한 수많은 데이터의 근원이 우리의 정보이며, 생성형 인공지능이 학습하는 대상이 인간이라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하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지난 시대 인간이 답습해 온 편견과 차별, 혐오가 그대로 축적된 데이터로 활용된다는 것. 그러니까 좋은 인간관계의 데이터가 있어야 좋은 인공지능이 된다는 것이다.


현재 인공지능이 사용하고 있는 딥러닝이라는 학습법은 우리의 모습을 고스란히 반영할 수밖에 없는 구조예요. 한마디로 인공지능은 인간을 닮을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러니 우리가 서로를 보호하고 아낀다면, 그런 우리의 모습이 빅데이터에 담겨 인공지능이 만들어 내는 결과물에도 영향을 미칠 거예요. (196쪽)


저자가 외로움과 능력주의에 대한 접점을 설명할 때 특히 외로움의 심각성이 와닿았다. 지난 코로나 시대를 돌아보면 비대면 시대에 사회적 약자의 삶은 말 그대로 곤궁 그 자체였다. 비대면 학교 수업에 필요한 전자기기(인터넷, 스마트폰)이 없는 이들에게 디지털의 시대는 하나의 벽이었다. 얼핏 공정으로 인지하기 쉬운 능력주의에 숨겨진 이면도 마찬가지다. 모두에게 주어진 평등한 기회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정보를 수집할 능력, 고시나 시험만 집중할 수 있는 비용만 생각해도 그렇다. 거대 플랫폼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빅데이터와 기술을 사용하는 이들은 상위계층이며 그들은 그것을 대를 이어 상속하고 싶어 한다. 계층은 사라지지 않고 격차는 심해진다.


어떻게 하면 외로움의 습격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빅데이터를 어떻게 사용할지, 인공지능의 시대에 인간의 존엄과 고유성은 어떻게 할 것인가. 저자는 해답은 인간에게 있다고 말한다. 아빠가 된 그가 솔직한 마음을 토로하듯 써 내려간 글에는 안타까움과 간절함이 가득하다.


아빠인 나는 묻는다. “왜 우리는 자식들에게 타인을 먼저 배려하라고 선뜻 말해주지 못할까?” 이유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 이 세상이 ‘각자도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풍요로움이 넘쳐나는 가운데도 각자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시대의 모순을 순순히 받아들인 채 살아가고 있다. 아빠가 된 나는 이런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꾸고 싶다. 내 아이에게 이런 ‘외로운’ 세계를 물려주고 싶지는 않다. 내 아이가 외롭지 않으려면 내 아이와 어깨를 맞대도 살아갈 다른 이들도 외롭지 않아야 한다. (346~347쪽)


두서없이 정리하고 말았지만 좋은 책이다. 현재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심각한 외로움과 직면한 문제를 쉽고 친절하게 알려주는 책이다. 저자는 외로움을 설명하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경각심을 갖고 디지털과 데이터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한다. 스마트폰이 신체의 일부가 포노 사피엔스(phono sapiens)인 우리가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외로움의 습격』을 만나 인공지능이 아닌 진짜 친구를 만들고 그들과 함께 공존하는 미래를 꿈꿀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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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4-01-03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2024년 갑진년이 되었습니다.
올해도 건강하고 행복한 시간 되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자목련 2024-01-04 12:30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 님, 오후 따뜻하게 보내세요^^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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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세계는 발을 들이는 순간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직감한다. 사랑이라는 세계가 그러하다. 입구만 있을 뿐 출구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 사랑은 그렇게 우리는 그 닫힌 세계에 살게 만든다. 사랑이 끝났다고 해도 그 세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사랑을 기억하는 한, 감각을 잊지 않는 한 존재한다. 어쩌면 지독히 고통스러운 현실을 살아갈 수 있는 건 저마다 간직한 그 세계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으면서 하루키가 그 세계를 철옹성처럼 지키려 노력하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환상 같기도 한 이 소설을 읽으면 각자의 세계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애틋하고 아련한 첫사랑의 기억을, 팍팍하고 고단한 현실이 아닌 다른 공간으로의 이동을, 불가능한 일이라도 아예 잊고 있었던 작은 마음 같은 것들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원하고 바랐던 삶을 말이다.


소설의 주인공이 열여섯, 열일곱의 십 대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저 바라만 봐도 좋을 감정이 피어오르던 시절, 아무런 말도 없이 사라진 소녀에 대한 기억을 소년이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주고받았던 편지, 서로를 마주하며 이야기를 나눴던 장소, 모든 건 그대로인데 소녀만 사라졌으니까. 소년은 멈춰있을 수밖에 없다. 그 소녀가 들려준 불확실한 벽으로 둘러싸인 그 도시는 잊을 수 없다. 대학에 가고 직장에 다니고 다른 연인을 만나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는 동안에도 어른이 된 소년이 살아가는 세계는 그 소녀와 그 도시가 지배적이다.


“그냥 원하면 돼. 하지만 무언가를 진심으로 원한다는 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야. 시간이 걸릴지도 몰라. 그 사이 많은 것을 버려야 할지도 몰라. 너에게 소중한 것들. 그래도 포기하지 마.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려도, 도시가 사라질 일은 없으니까.” (15쪽)


그래서 소녀를 잊을 수 없었던 그가 그 도시를 발견하고 그곳의 도서관에서 꿈을 읽는 사람이 된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그림자를 버리고 두 눈에 상처를 내면서 소년이 바랐던 건 소녀를 다시 만나는 일이었으니까. 자신을 알지 못하는 소녀가 그를 위해 차를 끓이고 하루 일과가 끝나면 소녀를 바래다주며 집으로 돌아가는 일상은 살아가는 일은 소설 밖 독자에게는 불가해 보이지만 소설 속 그에게는 설렘과 행복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것을 위해 버려야 했던 그림자를 향한 마음은 복잡하다. 그래서였을까? 도시 밖으로 함께 가자고 말하는 그림자를 혼자 돌려보내고 남은 그 앞에 펼쳐진 세계는 이전의 삶이었다. 다시 소녀가 사라진 세계였다. 그의 간절함이 부족했던 것일까. 독자인 나는 혼란스럽다. 왜 하루키는 그를 도시 밖으로 되돌려 놓은 것일까? 그토록 원했던 도시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여서 그랬던 것일까?


궁금증은 그가 직장을 그만두고 작은 시골의 도서관장으로 일하게 되면서 이전 도서관장 고야쓰 씨, 매일 학교 대신 도서관에 와서 책을 읽는 옐로 서브마린 소년과의 만남으로 풀린다. 그들은 그림자를 아는, 그 도시를 믿고 가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분명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과감하게 원하는 것을 향해 나가는 사람들. 누구의 이해도 원하지 않고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소설은 두 개의 세계를 오가며 묻는다. 우리는 어디에 살고 있는지, 무엇으로 존재하는지 말이다. 도시에 있는 그림자인지, 도시 밖에 있는 이가 그림자인지. 그러나 사실상 그런 질문은 의미가 없다. 자신이 믿는 대로 자신의 세계를 살면 그만이다. 완전한 것 따위는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겠지만 자신이 원하는 세계를 잃어버리지 않고 놓치지 않고 살아가면 된다. 그게 어렵다는 걸 알기에 하루키는 옐로 서브마린 소년의 말을 통해 위로를 전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요. 이 도시에는 현재뿐입니다. 축적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덮어쓰이고 갱신됩니다. 그게 지금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세계입니다”. (738쪽)


오랜만에 읽은 하루키의 소설은 여전히 그의 매력을 충분히 발산한다. 상상과 현실의 경계를 오가며 그가 추구하는 이미지를 꿈꾸게 만들고 독자를 이끈다. 불확실한 벽으로 둘러싸인 문지기가 지키는 도시, 그 안의 도서관, 최소한의 것들로 이루어진 삶. 소설에서 빠져나와 머릿속에 도시를 그려본다. 그리고 깨닫게 된다. 분리되는 그림자, 바늘 없는 시계탑과 그 불확실한 벽으로 둘러싸인 소설 속 도시는 아니더라도 내가 사는 세계에서도 중요한 건 현재뿐이라는 사실이다.


발을 내딛고 살아가는 세계에서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다는 생각과 순간순간 나타나는 벽을 뚫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을 때 나의 세계를 확장시킬 수 있다. 그리하여 사랑과 긍정으로 구축된 세계는 그지없이 아름답고 단단하게 존재하여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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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3-12-28 15: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이랑 깔맞춤 컵 귀여워요^^

자목련 2023-12-29 09:46   좋아요 1 | URL
의도적인 깔맞춤입니다 ㅋㅋ

희선 2023-12-31 0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디에 사는 게 자신인가... 어쩌면 소설에만 두 세계가 있는 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가지 못한 길을 아쉬워 하기도 하잖아요 그런 걸 자주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거의 자신이 가기로 한 길 갈 것 같기도 합니다 자꾸 아쉬우면 다른 길로 가 보는 것도... 이건 그렇게 쉽지 않을 것 같네요

자목련 님 2023년 마지막 날 잘 보내세요


희선

자목련 2024-01-02 11:24   좋아요 1 | URL
네, 말씀처럼 우리는 모두 두 개의 세계를 살아가는지도 모르겠어요.
항상 소중한 마음을 나눠주셔서 감사해요.
희선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즐거운 시간 이어가세요^^

루피닷 2024-01-01 0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자목련 2024-01-02 11:23   좋아요 1 | URL
루피닷 님, 감사합니다.
건강하고 활기찬 한 주 시작하세요!!
 
간밤의 꿈 이야기
안주영 지음 / 기린과숲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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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의식의 연장이라고 했던가. 걱정과 고민이 가득한 날, 어찌할 수 없는 일이 발생했을 때 꾸는 꿈에는 그 일의 당사자가 나온다. 아니, 그런 일이 있을 때에만 꿈을 꾸는 편이다. 그래서 나는 꿈 없을 잠을 원한다. 새벽녘 깨어 잠들지 못했거나 일어나야지 하다 잠깐 잠이 들었을 때 종종 꿈을 꾼다. 어김없이 내 마음의 불안과 걱정이 꿈에서 표출된다. 이를테면 특정 인물이 등장하거나 특정 장소가 나오는 것이다. 꿈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지만 그런 꿈은 꾸고 싶지 않다. 도대체 꿈이란 무엇일까. 여기 매일 밤 꿈을 꾸고 기록하는 이가 있다. 잠에서 깨고 나면 사라진 꿈을 어떻게 기록할까. 그만큼 그에게 꿈은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안주영의 『간밤의 꿈 이야기』에서 만난 그의 꿈은 이상하고 신비롭다. 흔히 말하는 복권을 사야 할 꿈, 키가 크느라 꾸는 꿈, 말 그대로 개꿈인 그런 꿈이 아니라 짧은 소설이나 영화 같고 거대한 시 같다. 읽으면서 정녕 이게 꿈일까 의구심이 들 정도다. 어떤 꿈은 끝나는 게 아쉬워서 끝이 아니라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마음까지 든다. 그가 들려주는 간밤의 꿈 이야기를 통해 독자는 그의 불안과 두려움을 엿본다. 꿈에 등장하는 인물이 그의 관계를 추측한다. 꿈을 읽으면서 나는 그가 되어 소중한 이의 죽음을 느끼고 애도하며 아파한다. 저자의 상황을 모르고 현실이 아닌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나와 동생은 아직 키가 작고 어린데, 아빠는 어느새 머리가 세서 계속 누워만 있다. 우리 가족과 친척, 그리고 아빠의 지인들은 모두 아빠를 내려다본다. 아빠가 눈을 뜨지 않자 엄마가 아빠를 흔든다. 엄마, 아빠가 함께 찍었던 사진 여러 장이 떨어진다. 고모가 아빠를 흔든다. 아빠의 한쪽 귀가 떨어진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빠의 친구가 아빠를 흔든다. (「아빠의 선물」 중에서)


가족이 등장하는 꿈을 읽으며 내 꿈에도 엄마와 아빠가 나오면 좋겠다는 바람을 엄마와 아빠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든다. 동시에 그토록 바라는 게 아니었나 싶은 마음이 들면서 꿈이라는 게 참 묘하구나 싶다. 어쩌면 내가 원하는 꿈이 아닌 꿈이 나를 알고 찾아오는 건 아닐까. 그렇다고 저자의 꿈이 마냥 몽환적 이미지라는 건 아니다. 절규, 공포, 혼란, 혼돈으로 이끄는 꿈도 많다.


지독한 두통을 뽑아내어 버렸더니 다른 이들이 두통이 달라붙어 괴롭히는 「두통」, 첫 수업에 늦었는데 바로 수업을 하는 게 아니라 자기자랑만 늘어놓고 정신을 차리니 강의실은 텅 비어있는 「첫 수업」, 어린 시절 먹지 않고 버린 약들을 어른이 되어 다 먹어야 한다는 「약국」, 1가정 1반려동물이라는 정책으로 집으로 커다란 상자가 배달되지만 누구도 열어볼 용기를 내지 못하는 「반려동물」, 기묘하지 않은가. 일상의 고통과 걱정이 고스란히 꿈으로 이어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사진을 찍은 것처럼 세세하게 담아내는 작가의 능력에 감탄할밖에.


검은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왔다. 우리가 탄 배는 크게 흔들렸다. 나는 배의 나무 기둥을 꼭 붙잡았다. 우지끈. 반대편 나무 기둥이 부러졌다. 이미 축축해져 버린 나무 기둥들은 점점 검게 물들었다. 그렇게 나무들은 썩어갔다. (「검은 파도 속에서」 중에서)


꿈이 이끄는 세계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게 만든다. 만질 수 있다면 꿈을 만지고 싶게 한다. 허상과도 같은 꿈을 지척에서 바라보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저자의 꿈 이야기를 읽으며 그의 꿈이 검고 어두운 빛이 아닌 환한 빛으로 물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 내면의 심리 상태를 고스란히 묘사한 문장이 조금 유연하고 안온하기를. 나의 꿈을 향한 바람이기도 하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아도 산뜻하고 맑은 기운은 안겨주는 그런 꿈을 꾸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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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3-12-26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께서는 정말 다양한 작가의 소설을 읽으시는군요.
꿈하니까, 지금 읽고 있는 무지 재미없는 소설이 떠오릅니다^^

자목련 2023-12-27 11:10   좋아요 1 | URL
꿈을 기록한 저자가 놀라웠어요.
페넬로페 님이 읽는 재미없는 소설이 궁금해지네요!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
이주혜 지음 / 창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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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삶을 써보세요. 쓰면 만나고 만나면 비로소 헤어질 수 있습니다. (16쪽)


말로 전할 수 없는 것들을 글로 써 전달하면 조금 나아진다. 그러나 상대는 다를 수 있다. 말이 더 직접적으로 다가오고 글은 오히려 이상하게 곡해할 수도 있다. 사실 어떤 심정은 말이든 글이든 전할 수 없다. 내 마음에만 깊이 박혀 스스로를 상처 주고 갉아먹기만 한다. 그럴 때 그 마음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치유하기 위해 추천하는 방법 중 하나가 글쓰기다. 이주혜의 장편소설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 속 화자도 그랬다.


남편의 잘못된 행동으로 하던 일을 접고 남편과 별거를 시작했고 딸과도 멀어졌다. 혼자의 삶은 피페해졌고 정신과 상담을 받기 시작한다. 의사의 처방대로 약을 먹었지만 우울, 불안, 불면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런 화자가 기대 없이 글쓰기, 정확하게는 일기 쓰기를 시작한다.


각자의 일기를 쓰고 나누는 모임에서 화자는 '시옷'의 시점으로 쓴 일기를 들려준다. 80년대, 열 살 여자아이의 일상을 통해 그 시대상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할머니, 아빠, 엄마와 함께 유복하고 평온했던 날들을 시작으로 조금씩 균열되고 무너지는 가정 안에서 어떻게 성장하는지 보여준다. 항상 자신을 아껴주고 사랑하던 아빠의 부재, 그 빈자리를 꿋꿋하게 채우는 할머니와 엄마. 자신은 이해할 수 없는 어른의 세계에서 인정받고 싶었던 아이의 모습은 안쓰럽다.


소설은 8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에서 알 수 있듯 사회적으로 혼란한 모습과 그것을 직접 경험한 개인적인 기록이자 역사의 기록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독자가 마주하는 건 화자인 '시옷'의 일기다. 짧은 머리와 옷차림으로 인해 남자아이로 인식해 합창단원이 된 아이. 노래 부르는 게 좋았던 아이는 자신이 여자아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상한 건 엄마와 할머니의 태도다. 그에 관해 정정하지 않는다. 시옷이 여자아이로 알려졌을 때에도 시옷을 달래주거나 하지 않는다. 합창단 촬영이 있던 날, 시옷은 자신이 노래를 잘 부르니 여자 아이든 남자 아이든 상관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지휘자는 노래 잘 하는 미성의 소년을 원했기에 여자 단복을 입고 나타난 '시옷'을 외면할 뿐이다.





아마도 엄마와 할머니는 빚에 쫓겨 집에 오지 못하는 아빠 걱정에 시옷은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다. 할머니와 엄마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시옷은 그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어른들은 아이는 몰라도 된다고, 나중에 알려준다며 무책임하게 회피한다. 시옷이 남자였다면 어땠을까? 기죽지 말라고 합창단복도 제일 먼저 준비했을 것이다. 같은 시대를 살아온 이들에게 시옷의 담담한 일기는 자신의 어린 시절과 겹쳐서 다가온다.


소설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시옷의 마음을 들려준다. 빚을 갚기 위해 집을 팔고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가고 그곳에서 남동생 '수호'가 태어나고 '윤수'라는 아이와 보낸 시간. 뭉쳐진 기억이 하나씩 펼쳐지고 그때는 알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었던 엄마와 어른의 모습을 생각한다. 정작 어른이 되어서는 딸 해준의 마음을 읽을 수 없고 점점 멀어진다. 시옷과 엄마의 사이와 다르지 않다.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은 일기를 통해 시옷 자신을 들러싼 것들과 화해하는 소설이자 열 살 여자아이 시옷의 성장소설이다. 이주혜는 일기 쓰기가 삶을 돌아보는 것이고, 거부하고 외면하던 기억을 꺼내는 일이고, 상처와 직시하는 것이라 말한다. 일기 쓰기 교실의 강사 림자의 말처럼 말이다. 헤어지고 싶은 기억이 있다면 기록하세요. 어떤 수치심도 글로 옮기면 견딜 만해집니다. (23쪽) 온전히 이별하고 온전히 극복하는 건 불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조금 나아진다. 기록하는 순간, 그전의 나에게서 멀어지게 되니까. 시옷이 그랬던 것처럼.


내가 그때의 엄마보다 더 나이가 들어보니 알겠다. 처음부터 완성된 사람은 없다고. 할머니도 엄마도 아빠도 갈팡질팡 우왕좌왕하다가 그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택을 했을 뿐이라고. 겉보기와 달리 속은 무척 시끄러웠을 거라고. 여러 번 무너지고 또 무너졌을 거라고. 그래도 매 순간 끊임없이 선택하면서 그렇게 한발 한발 앞으로 걸어갔을 거라고. 사는 게 원래 그렇다고. 이제야 겨우 알겠다. (324쪽)


올해의 겨울은 폭설과 한파로 기록하고 기억될 것이다. 시간이 지나 올겨울을 떠올리고 내가 쓴 글을 검색한다면 이주혜의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을 읽던 날들도 따라올 것이다. '시옷'이었던 여자아이와 '수윤'이란 어른 여자와 함께. 그때의 내가 쓰고 있기를 소망한다. 그게 무엇이든 진심을 다해 계속 쓰는 사람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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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사람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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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나는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우주의 먼지에 불과하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그런 순간이 있지 않은가. 지금의 현실이 마치 꿈처럼 느껴질 때 말이다. 오래전 침잠하던 시절 모든 게 아득했다. 잠이 들고 아침을 맞는 반복된 일상이 무의미했고 진짜는 달아난 가짜의 내가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무기력한 숨어들기 위한 변명이었던 것 같다. 최진영의 장편소설 『단 한 사람』을 읽으면서 문득 그 시절이 떠올랐다. 이유는 모르겠다. 작은 섬의 두 그루 나무로부터 시작되는 신비로운 설화 같은 이 소설은 좀 묘하다.


묘하다는 느낌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인간의 존재 이전 태초의 나무가 서로를 바라보며 성장하여 숲을 이루는지, 나무가 인간과 어떻게 이어져 인간의 죽음과 생명에 개입하는 과정을 들려준다고 할까. 아니, 그 모든 걸 상상하게 만든다고 하는 게 맞을까. 어쩌면 인간의 생과 사를 지켜보는 한 나무(신이자 자연)를 통해 전하는 계시인지도 모른다.


나무에 이어 소설은 장미수가 신복일과 낳은 다섯 남매로 시작한다. 세 딸 일화, 월화, 금화와 쌍둥이 목화와 목수는 자란다. 아들인 막내 목수는 누나가 아닌 언니라 부르며 지낸다. 금화는 쌍둥이를 데리고 숲으로 간다. 그리고 무서운 일이 일어났다. 커다란 나무가 금화를 덮쳤다. 목화가 어른들을 부르러 간 사이 금화는 사라졌고 목수는 겨우 목숨을 건졌다. 목수는 그날의 기억을 잃었고 금화는 찾을 수 없었다.


목화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열여섯 봄 목화는 꿈을 꾸었다. 사람들이 죽고 있었고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을 받으라고 했다. 단 한 사람만. 누구를 구할 수 있단 말인가. 왜 단 한 사람이어야 하는가. 그 한 사람도 목화가 정할 수 없었다. 꿈이었지만 그건 꿈이 아니었다. 엄마 장미수, 할머니 임천자로 이어지는 믿을 수 없는 숙명이었다. 엄마 장미수가 늘 피곤했던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할머니 임천자는 그냥 받아들였다. 누군가를 구하는 것 그것만으로 족했다. 하지만 엄마 장미수는 달랐다. 거부하고 경멸했다. 목화는 의미를 찾으려 했다. 대를 이어 내려오는 능력이라고 할까. 하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임천자는 묵묵히 장미수의 아이들을 돌보고 장미수는 자신이 끝이기를 바랐다.





둘이었다가 하나가 된 나무. 부활한 나무. 시간을 초월한 생명. 무성한 생에서 나뭇잎 한 장만큼의 시간을 떼어 죽어가는 인간을 되살리는 존재. 그 모든 것을 목화는 첫 소환에서 깨달았다. (92쪽)


목화가 단 한 사람을 구하는 과정은 당연하게도 무자비한 죽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죽음을 떠올리게 만든다. 안타까운 사고에서 가해자를 살려야 할 때 따르고 싶지 않았다. 비관했던 목화는 점차 알고 싶었다. 왜 자신인지. 꿈이라 여겼지만 자신이 누군가 구한 일은 현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기사를 검색하면 알 수 있었다. 목하는 자신이 구한 그 사람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자신이 구한 단 한 사람. 그들은 목화의 존재를 모르지만. 그리고 목하는 그 일을 중개라고 부르고 단 한 사람을 구하는 일을 받아들인다. 다행인 건 목화 곁을 지키는 목수가 있었다. 소환되어 사람을 구하는 동안 목수는 목화 곁을 지킨다.


중개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뭔지 알아? 목수는 짐작하여 대답했다. 글쎄, 살려달라는 말? 목화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사랑한다는 말. 그날 목수는 그 말을 기록했다. (104쪽)


영원한 건 오늘뿐이야. 세상은 언제나 지금으로 가득해. (148쪽)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는 모두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누군가. 예외 없이 그를 향해 하는 말, 사랑한다는 말. 작가가 나무를 통해 전하고 싶었건 바로 그것인지도 모른다. 수많은 죽음 가운데 단 한 사람만 구할 수 있는 능력, 대를 이어진 숙명. 목화 같은 사람이 어딘가 존재하는 건 아닐까. 어쩌면 우리 모두 목화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각자가 단 한 사람만 구할 수 있다면, 서로가 서로를 구할 수 있으니까. 놓치는 일은 절대도 없을 테니까.


오직 사람만이 다른 생명을 위해 기도한다. 신을 필요로 한다. 기적을 바란다. 먼저 떠난 존재가 너무 그리워 죽음 이후를 상상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208쪽)


아름다운 소설이 전쟁 같은 삶을 살아가는 우리를 위로한다. 상처, 비관, 슬픔, 상실, 죽음의 소용돌이에서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가는 우리를 가만히 지켜보며 전부를 내어주는 나무처럼. 어쩌면 나는 목화 같은 존재가 살려낸 단 한 사람일지도 모르니까. 살아있음에 대해 감사하고 소중한 오늘을 사랑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나의 몫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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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3-12-15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과 커피잔이 무척 잘 어울립니다. 이 책 칭찬이 자자하여 기대되네요^^

자목련 2023-12-17 15:25   좋아요 1 | URL
꼬마요정 님의 첫 문장이 저를 기쁘게 합니다. ㅎㅎ
이 소설, 괜찮았어요^^

공쟝쟝 2023-12-15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얼마전에 본 영화 <너와 나>도 비슷한 맘을 먹게했는 데… 지금을 사는 뛰어난 작가와 연출가들은 그런 질문을 던지나봅니다.. 🥲

자목련 2023-12-17 15:25   좋아요 0 | URL
조현철 배우가 감독한 영화죠? 저도 한 번 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