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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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나는 어떤 소설을 기대했던가?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이야기를 잘 듣기는 했을까? 소설을 좋아하는 나지만 이 책은 내 리스트에 없었다. 김연수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지도 못했거니와 내가 좋아하는 [스누피의 글쓰기 완전 정복]이란 책의 역자인 줄도 몰랐다. 세상에나 요즘 소설가들은 번역도 잘하고 이렇게 끔찍할 만큼 긴 호흡의 글을 쓰는 재능도 있다니, 하느님은 너무 한거 아냐, 나의 투덜대는 소리는 아마도 하느님의 귀에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과연 이 책에 무엇이 있기에 그리도 흥분하면서 이 책을 말하는 건지.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그 뒤에 어떤 말이 나오면 좋을까?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네 편이다. 우리는 하나이다. 김연수는 어떤 말을 하고 싶었을까? 음, 나는 사랑한다를 예상했었다. 애절한 사랑의 밀어를 기대했다. 한 참을 읽어내려가도 나는 종잡을 수 없는 미로에 빠진 기분이었다. 그 길을 따라 걷고 있는데 또 다시 만나지는 처음의 그 길,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또 다른 길.. 그랬다. 그게 맞을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헤메다 보니 멀리 그 끝이 보이는 듯 하다.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나와 한 사람의 관계의 다리를 건너다 보면  저 외국 누군가와도 관계가 닿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프로를 본 적이 있다,아마도 스펀지가 아니었나 싶다. 그런 경험을 하기도 했다. 나와는 전혀 상관없을 꺼라 여겼던 사람이 내 친구의 친척이거나 지인이 되는 경우, 좁디 좁은 지역사회에 살다보니 사실 그런 두려움에 나에 대해 말하기 꺼린 적도 있었다. 이 책엔 그러한 관계의 지속이 클립의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다.

끝없는 이야기의 시작은 할아버지의 유품으로 태워지지 못한 한 장의 누드 사진으로 시작되는데 그 사진은 정말 시작일 뿐이었다. 그 사진의 출처를 찾아 나서며 정민과 나는 수많은 이야기를 쏟아내고 그 이야기는 광대한 우주를 채울 것만 같다. 정민의 삼촌과 정민의 이야기, 나의 할아버지의 이야기,그리고 광주의 한 복판에서 자신의 전부였던 사람(한기복)의 죽음을 지켜보게 된 이길용과 그 이길용이 강시우로 다시 존재하여 살기까지의 이야기, 90년대 운동권 학생의 대표로 독일로 날아오게 된 내가 만나는 베르크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그 이야기들.

사실, 이렇게 말하는 나 역시 설명하기 어렵다. 그들의 관계가 쫌쫌하게 짜인 그물에 걸린 물고기와 같고 또 그 그물을 낚아 올린 누군가와도 같다고 할까? 그리고 기대지 않던 사랑과 존재의 외침이 있다.

[인생이 이다지도 짧은 건 우리가 항상 세상에 없는 것을 찾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라.173쪽] 소설 속 많은 인물들이 갈망했던 것은 민주주의도 아니며 자유도 아니며 자신의 존재, 그것이었는지 모른다. 살아남기 위해 거짓을 말하고 거짓으로 위장한 많은 사람들의 삶은 우리가 살아온 80~90년대, 아니 더 거슬러 올라가 6.25전쟁과 일제 식민지까지 이어진다.
[지금 네가 느끼는 그 세상이 바로 너만의 세상이야. 그게 설사 두려움이라고 하더라도 네 것이라면 온전히 다 받아들이란 말이야. 더이상 다른 사람을 흉내내면서 살아가지 말고.254쪽] 살아가면서 느끼는 크고 작은 두려움, 두 팔 벌려 환영하지 못하지만 내 것으로 만들려면 그것과 친해져야 할 것이다. 그런 것이 삶이겠지.

[우리는 지나간 뒤에야 삶에서 일어난 일들이 무슨 의미인지 분명하게 알게 되며, 그 의미를 알게 된 뒤에는 돌이키는 게 이미 늦었다는 사실을. 378쪽] 누드 사진은 아무 것도 아닌 그저 흔한 한 장의 사진 일 수 있었다. 그 사진을 통해 이어지는 수많은 너와 나 그리고 저 먼 우주에 나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내가 있을 뿐이다[삶이란 우리가 살았던 게 아니라 기억하는 것이며 그 기억이란 다시 잘 설명하기 위한 기억이다.384쪽] 삶이란 진정 그런 것일까? 내가 살아온 기쁨과 슬픔의 날을 기억하는 것이고 그 날들을 감정을 배제하고 내가 너에게 잘 설명하는 것. 그것일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네가 존재하는게 너무 다행이다' 라는 보이지 않는 어떤 소리를 듣는 듯 했다, 그리고 또한 나와 어떤 형태로든 닿아있을 누군가가 있어서 참 고맙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슬퍼할 때 그 누군가도 어쩜 함께 슬퍼할지 모르고 내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그 누군가는 들을 것만 같았다. 설령 그게 신이라도 괜찮다. 아니 영광일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더, 이런 글을 쓰는 김연수는 아마도 작가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기 위해 수억년 저 멀리 어떤 별에서 지구로 날아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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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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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녀를 세상에 강하게 드러낸 소설 '몽고반점'을 나는 읽지 않았었다. 그 몽고반점이라는 제목이 묘한 거리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었다. 단편집 '내 여자의 열매'와 '검은 사슴'을 만나고 다시 그녀의 책을 서성이고 있었지만 아직 다른 책을 읽지 못했다. 그러던 중에 신간의 소개에 한강의 새로운 소설 집을 냈다는 글을 만났을 때도 그저 기웃거리고 있었던 내 마음을 자극한 것은 단편 '그 여자의 열매'연상 선에 있다는 소개 글 때문이었다. 사실,한강의 글은 유쾌한 재미가 있거나 가슴 찡한 감동이 밀물처럼 달려오는 것이라 말할 수는 없다. 어쩌면 그러한 점이 내가 그녀의 글을 읽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이 소설을 연작이라는 이름으로 구성하거나 염두에 두고 쓰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내 여자의 열매를 만나고 더구나 몽고반점을 읽지 않는 내게 이 책은 그녀가 치밀하면서도 계획적인 구도로 차례로 글을 썼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채식주의자,몽고반점,나무 불꽃으로 이어지는 이 책은 크게는 인간이라는 테두리를 두고 볼 수 있으며 작게는 아니 근본적으로는 가족간의 욕망과 상처를 다루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내 안에 속하지 않기에 더 강한 욕망을 불러오는 것들이 있다. 지극히 평범하기에 아내와의 결혼을 선택시 주저하지 않았다는 채식주의자의 화자인 나는 지극히 평범하여 결국은 나와 다른 아내(영혜)를 이해하지도 이해하려하지도 하지 않고 자신의 삶에서 아내를 배제시킴으로써 나를 지키게 된다. 어느날 꿈 때문에 고기를 먹지 않게 된 납득하기 어려운 아내의 변화는 가족간의 마찰로 이어지고 결국 자살을 시도하고 정신병원의 신세를 지게 된다. 알 수 없지만 왠지 영혜는 숨을 쉴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잠깐,아니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녀의 삶의 시작이었다. 영혜는 홀로 지내게 되고 그녀를 지켜내야만 한다고 믿는 언니의 가족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몽고반점은 이 연작소설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절정부분이라 하겠다. 처제(영혜)에게 남아있다는 몽고반점의 이야기를 들은 그는 처제를 욕망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아내와 또 다른 모습을 가진 아내의 동생 처제. 그녀를 자신의 작품에 등장시키게 되고 결국은 욕망의 경계를 무너뜨리게 된다. 남편과 동생의 괴이한 상황을 목격한 아내는 자신의 욕망을 절제시킨다. 그 욕망이라는 것은 남편을 그리고 동생을 죽이고 싶었을지 모를 분노 가득한 욕망이리라. 결국 동생(영혜)는 정신병원으로 다시 향하게 되고 그리고 남겨진 그녀의 이야기는 나무 불꽃에서 그녀만의 절망과 슬픔 그리고 남아있는 삶을 쓰고 있다

어느 누구도 영혜를 이해하지도 이해하려도 하지 않는다. 나무 불꽃의 화자인 그녀는 말한다. (시간은 흐른다.182쪽 시간은 여전히 흐른다. 190쪽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197쪽) 어떠한 경우에라도 어떠한 상황이라도 삶이라는 것은 지속되어지고 있으며 어린 시절 그녀도 영혜도 자신의 욕망대로 삶을 살아오지 못한 상처를 가슴에 간직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결혼과 동시에 자매는 그 상처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왔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들의 남편은 그녀들을 통해 자신의 욕망만을 채우려 하고 정작 그녀들은 삶을 거부하는 모습으로,삶을 견뎌내는 모습으로 그렇게 살아간다.

어떤 일이 지나간 뒤에라도, 그토록 끔찍한 일들을 겪은 뒤에도 사람은 먹고 마시고,용변을 보고, 몸을 씻고 살아간다. 때로는 소리 내어 웃기까지 한다. 204쪽 나무가 되고 싶었던 그래서 거꾸로 서 있고 싶어했던 영혜, 나무가 부르기에 나무가 있는 숲으로 걸어갔다는 영혜를 만나면서 동생이 그토록 나무가 되고 싶어했는지 이제는 조금씩 이해할 수 있다. 

약간 멍이 든 듯도 한,연한 초록빛의,분명한 몽고반점이었다. 그것이 태고의 것,진화 전의 것,혹은 광합성의 흔적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는 것을, 뜻밖에도 성적인 느낌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식물적인 무엇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101쪽  소설 속 영혜도 그리고 그녀를 지켜주고자 마음을 쓸어내리던 그녀가  바란 것은 아마도 태고적의 그것이었는지 모른다. 햇빛을 받고 물을 먹고 사는 자연 그대로의 삶을 원했는지 모른다. 

엽기적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을 것이고 또한 한강을 떠올리면 도저히 연상시키지 못할 글이라 고개를 젓는 이도 있으리라. 그녀는 아무 것도 쓸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을 지나왔다고 했다. 그녀가 쓰고 싶어도 쓰지 못했던 날들의 이야기들은 또 언제 내 손에 올까. 그 전에 나는 아직 만나지 못한 그녀의 책들을 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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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와 책 - 지상에서 가장 관능적인 독서기
정혜윤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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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로 쓰인 [지상에서 가장 관능적인 독서기]라는 말이 참으로 매혹적으로 들린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내가 속해있던 곳은 침대,바로 그곳이다. 책을 들고 있는 긴 손가락이 나를 부르는 듯 그랬기에 나는 주저없이 책을 선택했다. 그러면서도 내심 저자가 읽은 많은 책의 내용으로 엮인 다소 진부한 책 일꺼라 예상을 했다. 언제나 그렇듯 새로운 바람은 불어 오듯이 그 예상을 깨고 이 책은 이제 저자가 책 속에서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했던 책들처럼 내게도 그런 존재로 남을 것이다.

침대의 프레임에 책을 가득 담아두었다는 저자의 침대가 너무 부럽다. 손을 뻗으면 책이 있고 그 책을 나만을 위해 읽어내려 간다는 저자의 말이 너무 황홀하다. 내 침대에도 책이 있다. 그러나 나의 책은 저자의 그것과 같지는 않다.  책에 대한 열정은 삶의 또 다른 이름으로 내게는 기억된다.

들어보지도 못한 책과 작가의 이름을 만나면서 처음으로 얼마나 많은 책들이 세상이 있을까?  지금 나는 그런 생각에 빠져들고 있다. 책이라는 이름으로 글이라는 것을 쓰고 있을 작가들은 지금도 고뇌할 것이고 그들의 책을 접하고 읽는 많은 사람들 중에는 나처럼 마음의 새겨둘 준비를 하고 있으리라. 더불어 이 책을 통해서 만난 많은 책들의 제목을 검색하면서 나는 도대체 어떤 책읽기를 했나 싶어 조금 마음이 우울해지고 있기도 하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불어 슬프고 사람들과 작은 스침에  있어 그 어떤 떨림이너무 강해 멍한 시간속에 머물러 있고 새벽시간 홀로 세상에 깨어있는 듯한 느낌을 저버릴 수 없을 때 나는 이제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사실,이 책을 읽는 도중 어떤 책을 주문하기도 했다. 이 책에 빠져들어 그 책을 읽지 않으면 안될 것만 같았다. 

침대와 책은 어떤 이에게는 정말 필요조건이 된다. 반대로 어떤 이에게는 불필요조건이 되기도 한다. 내 경우는 전자의 경우에 속한다. 침대 속에서 나는 책을 읽는다. 침대에 앉아서 침대에 누워서 침대에 책을 쌓아두고 침대에 책을 정리하며 책을 읽는다. 책이라는 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그저 이야기가 좋아서 책을 만났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이야기가 좋아서라는 이유도 있지만 책속에 빠져들고 싶어 책을 읽기도 한다. 또한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숨쉬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인간에 대한 예의] 를 읽으면서 삶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품고 [어린 왕자]를 통해 소통과 관계를 되뇌이며 [사람풍경]을 읽고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책 속의 많은 사람들과 친구가 되고 있음을 꼭 기억하고 나도 저자처럼 나만의 책 사연을 먼 훗날 기록하고 싶어진다. 

나는 나이 들면 쉼보르스카 할머니처럼 되고 싶다는 웅대한 꿈을 품고 그녀의 책을 덮는다. 사랑이 끝나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그녀의 [끝과 시작]이란 시의 첫 문장에 나와 있다. '모든 전쟁이 끝날 때마다 누군가는 청소를 해야 하리!' 자기만의 전쟁을 치르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지금은 청소를 해야 할 시간이다. 135쪽

'지금은 청소를 해야 할 시간이다.' 아,이렇게 멋진 말을 내 목소리를 빌어 누군가에게 전해줄 그 순간을 꿈꾸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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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계단을 보라
윤대녕 지음 / 세계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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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이름으로만 기억하는 작가,윤대녕. 최근작인 [제비를 기르다]에 호평을 들은지라 내심 그 책을 만나봐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나 언제나 그렇듯이 읽고 싶은 책은 계속 쏟아져 나오고 그 순간 무엇인가를 선택하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다. 우연히도 최근작이 아닌 그의 작품을 덜컥 사게 된 것은 8편의 소설 중에 피아노와 백합의 사막 이라는 단 하나의 단편 때문이었다. 목마름을 시험하려는 듯 목차도 맨 끝에 수록되어 있었다. 피아노와 백합의 사막...
그 사막까지 가는 도중 나는 또 다른 많은 사막들을 건너고 있음을 알았다. 윤대녕의 이 소설 집에는 끝없는 사막과 알 수 없는 공허감과 잡히지 않는 형체를 알 수없는 것들로 가득하다.

보이지 않는 내면의 모습과 갈등하고 존재하지 않는 영혼을 찾으려 헤메이는잃은 사람들이 가득하다. 배암에 물린 자국 산책길에 아무런 준비없이 만난 뱀은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강한 독을 가지고 있다. 자신이 찾고 있는 것이 뱀이 아님을 알면서도 왜 그렇게 뱀에 집착하는지 알 수 없다. 겨울 동면에 들어갔을 것이 분명한데 주인공은 아직도 그 뱀을 찾아다닌다. 이 소설 속에서 남겨진 것은 분명 자국일 것이다. 그것은 나 스스로 만든 자국임을 언젠가는 주인공도 알게 되리라. 어떤 것이든 지나가면 잊어버려야 함을 알지만 그 상흔 속에서 자꾸만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 우리는 과연 무엇을 기억하기에 그런 것일까? 주인공이 찾는 단순한 뱀일까? 아니라면 그것은 무엇일까? 이러한 맥락의 소설은 표제작인 남쪽 계단을 보라 에서도 보여진다. 어느 순간 나의 시간이 나를 제외한 타인의 시간이 다르게 흘러가는 것만 같은 느낌. 그들과 동떨어진 세상에 살고 있는 느낌을 경험했다면 조금은 쉬운 소설이 되리라.  

무척 재미있게 만나지는 소설은 신라의 푸른 길 자나가는 자의 초상이라고 할 수 있다.물론 이  두 소설 속에도 발화하지 못하고 스스로 꺼져버리는 내면의 소리가 있다. 우연하게 경주를 향하는 버스에 동승한 남녀의 대화는 헌화가를 논하다가 어느 한 지점에 서로가 헌화가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직감하게 된다. 더 이어나가고 싶은 마음속 욕망을 자제하는 글의 묘미가 탁월하다. 그에 반해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는 과정에서 도저히 빠져 나오지 못하는 자나 가는 자의 초상 속의 인물들은 무척이다 답답하게만 보이지만 삶이란 아무리 낮게 엎드려 있어도 때로 조사관처럼 어떤 응답을 요구해 오게 마련인가 보다. 99쪽  이 문장 하나로 그 답이 될 듯하다. 

가족사진첩과 새무덤 또한 부재자의 강한 존재를 느낄 수가 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기억하는 아들과 어머니,이제 그 자리에 아내가 함께하면서 다시 살아나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 또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대한 것도 두 소설에서는 아버지의 부재와 존재에 상관없이 그들과 화해하려는 모습을 보게 된다. 사랑도 삶처럼 하나의 신성한 노동이란 걸 알게 되는 날 우리는 비로소 자신들과 화해하게 되겠지.109쪽 기억 속에 있는 기존의 아버지가 아닌 새로이 맞이하는 가족과 아버지에 대한 강한 유대감을 원했음이 분명하다.

이제 그 길로 가는 마지막 길목에 다다랐다. 사막의 거리 바다의 거리 라는 소설엔 메마른 도시가 있다. 그 안에 사막도 있다. 매일 매일 만나는 이 곳이 사막의 거리가 된다는 느낌이다. 미로같은 골목길을 지나 만나는 세상,그것이 사막일 것이다.그러나 그 안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하는 것은 사막을 만나는 누구에게나 오는 것은 아니리라. 안개속을 걸어가는 듯한 모호함으로 그 길을 헤치니 이제 그 끝에 도착했다.

피아노와 백합의 사막을 만난 것이다. 사막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던 것인가? 자문하지만 그건 아니다. 사막의 선인장이 아닌 백합을 결합시킨 것이 궁금할 뿐이었다. 그 황량한 사막에 피아노를 접목시킨 것이 나의 목마름의 가장 큰 원인이리라. 사막을 향해 가는 주인공은 어릴 적 사막을 꿈꾸던 친구를 기억한다. 시인이 되어 죽음을 앞 둔 그와 함께 사막을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 보이지 않는 끝에서 그가 치던 피아노 연주를 울리게 하고 싶었던 걸까? 잃어버린 그 시절을 돌아보고 싶었던 건가?

심연에서 올라오는 감정의 옷을 한 겹 한 겹 조심스레 벗겨내는 숨막히는  작가의 시선이 있다. 그의 글속에 서성임이 느껴진다. 그 서성임을 과연 무엇일까? 너에게 가고 싶은 서성임이었을까? 사막으로 가로막힌 너에게로 향하고 싶은 소망이었을까?
사막은 가령 이런 식으로 [발생]한다. 너와 나 사이에 팽행하게 지속되어 있던 긴장의 끈이 한수간에 끊어지고 그리하여 아득한 거리로 서로 밀려나면서 그 사이에 황량한 모래벌판이 가로놓이게 된다. 256쪽 
작가가 발생이라고 표현한 사막,나와의 많은 관계 속에서 어쩜 지금 어느 누군가와 사이에는 사막이 발생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몰려온다. 그러나 사막을 건너온 백합이 깊게 뿌리를 내려 새로이 꽃을 피울꺼 라는 소망을 갖게 하기도 한다. 무척이라 길게 그리고 어렵게 다다른 피아노와 백합의 사막을 만나고 나니 사막의 모래바람을 지나 오아시스처럼 자리잡은 나만의 백합을 만나고 싶은 바람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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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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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갈 즈음 세상은 온통 전자공학과 이공계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인문학이나 문과 계열은 사장의 시간으로 접어들고 있었고 이과를 지원해야만 앞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시간부터 취직이라는 커다란 관문이 나를 숨막히게 한 것은 엄마의 고집을 뒤로 하고 외지로 학교를 나왔기때문이다. 고교 2학년이 되어서 적성이 크게 반영되었는지는 기억할 수 없지만 나는 주저없이 이과를 택했다. 그것은 어쩜 불행의 시작이었는지도 모른다는 핑계를 그 후로 가끔 늘어놓게 된다. 나는 수학을 잘 못했다. 본격적인 수학을 배울때 수학의 정석을 껴안고 잠을 자고 있었지만 수업시간에는 졸기를 밥 먹듯이 했다. 그러다 보니 점차 수학에는 흥미를 잃어가고 있었음에도 나의 성적으로 갈 수 있는 학과는 수학과 뗄레야 뗄수 없는 학과가 되어버렸다. 그 부터 사람들은 나를 수학으로 연결하여 기억하기도 한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무엇이었을까? 먼저 그런 질문을 하게 된다. 내가 사랑한 수식은 거창한 공식이 아닌 인수분해이다. 중학교 3학년에 배운 인수분해,수학선생님은 인수분해를 설명하시며 비오는 날 우산을 같이 쓰고 가는거라 했었다. 그 시간에 배운 수식은 무척 재미있었고 그 시간도 즐거운 시간으로 남아있다. 그 후로 비오는 날은 우산을 보면 인수분해가 생각난다. 그렇게 수는 우리 가까이에 있음을 이 기회에 다시 확인하게 된다.

수라는 소재를 드러내기 위해서인지는 모르나 책 속에는 유려한 문장들이 가득한다. 그러기에 이 책이 더 빛을 내는지 모르겠다. 일부러 꾸미지 않았으나 문장 하나 하나의 매끄러운 곡선들이 하나의 춤으로 태어나고 그림으로 그려진다.더불어 투명하고 맑기까지한 감동을 전해주어서 책을 읽고 손에서 놓고나서도 책을 꼬옥 껴안아 주고 싶은 아니 주변의 누구라도 꼭 껴안아줘야만 할 것만 같다. 사고로 인해 1975년이라는 과거의 시간에 살고 있는 이와는 어떤 대화를 할 수  있을까? '내 기억은 80분밖에 지속되지 않는다'는 메모를 가장 중요시여기는 박사. 80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 주변 사람에게 다시 누구냐고 처음의 질문을 던지기도 하는 박사를 아무런 편견없이 마음을 나누는 친구를 삼을 수 있는 사람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일꺼 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물론 책을 읽었기에 그 사람이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버렸지만 그래도 나는 그들의 특별한 사람들이라는 믿음을 갖는다.

박사와 그 집에서 일하게 되는 파출부와 그의 아들은 안정적인 삼각형의 구도를 이루면서 그들만의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간다. 아들에게 모든 수를 안전하게 해준다는 의미로 수학 기호 루트라는 이름을 지어주게 된다. 반복되어지는 일상 속에서 박사가 안내하는 수의 세계는 황홀함 그 자체로 그녀와 아들에게 다가온다. [광활한 수의 세계에서 고생고생 끝에 만나 서로를 꼭 껴안고 우애를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32쪽]이처럼 수를 소재로 하고 박사가 말하는 수를 통해서 작가는 우리의 삶을 말하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 속에서 인연이 되어 만나는 사람들은 우애수 처럼 서로에게 꼭 필요한 끈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수학이라는 개념을 벗어나 박사에게서 배우는 수는 루트에게는 애정이었고 사랑이었으며 성장하는 아이에게 꼭 필요한 영양분이었다. 세상에 속하지 못하고 수의 세계 속에서 존재하고만 있던 박사에게도 그녀와 아들은 처음 떠오르는 별이었고 달빛이었으며 아침 햇살이었다. 세상은 박사와 그녀와 아들에게 이상한 노인이라는 것과 미혼모와 그의 아들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은 서로를 있는 그대로 그렇게 인정하고 신뢰하고 우정을 쌓아갔다.

특별하지 않다.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주면 된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신뢰의 방법이리라. 박사가 기억하는 1975년식의 야구를 기억해주고 루트가 좋아하는 글러브를 선물하고 함께 추억을 만들면 그뿐이다. [수학의 진리는 길 없는 길 끝에,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숨어 있는 법이지.51쪽 ] 이 멋진 말처럼 우리가 갈구하는 삶의 진리는 요란하게 소리내지 않아도 어느 한 순간에 발견하게 되는 것인지 모른다.
잘 보이는 곳에 보물을 숨겨두어 모두 즐거워하는 보물찾기처럼 우리의 삶의 진리도 그러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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