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간관계는 매우 협소하다.그러나 깊고 넓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제는 불편한 관계를 이어갈 만큼 감정의 여유도 없고 체력도 따라주지 않는다. 1년에 한 번, 아니면 두 번 만나는 친구, 만나지는 못해도 거의 서로의 일상을 돋보기처럼 보는 친구가 몇 있다. 어느 시절에는 사람을 좋아하고 적극적으로 다가가기도 했다. 그런 나를 아는 친구가 엊그제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너 말도 많이 하는 애였는데, 그치?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나한테 정말 그랬는데.” 아쉬움이 담긴 말투였다. 어쩌다 그런 나는 사라졌을까. 그렇다고 지금의 내가 싫다는 건 아니다. 이형만 변하는 게 아니라 내부의 어떤 것들도 수시로 변하는 게 인생인까.

 

그건 그렇고 그저께엔 친구를 만났다. 맛있는 걸 해주겠다면 바리바리 짐을 싸 들고 왔다. 카페를 운영하는 친구라 뭐든 잘 한다. 매일 주방에서 일하는 그녀에게 미안했지만 나는 그저 맛있게 먹기만 했다. 카페에서 직접 기르는 민트를 시작으로 라임도 챙겨오고 마트에서 낙지까지 사온 정성을 어찌다 말할 수 있을까. 무지 매운 낙지볶음을 먹고 후식으로 친구가 만든 칵테일을 마셨다. 우리는 소소하지만 대단한 일상을 서로에게 전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친구가 우리 아파트에서 찍은 길고양이 사진을 보면서 친구가 기르는 고양이 이야기를 했고 그녀의 남자친구가 궁금해하는 내 독서 목록도 알려주었다. 친구는 나를 만날 때 항상 선물을 가져오는데 그녀가 선물이라는 걸 도통 믿지 않는다. 이번엔 예쁜 선글라스를 사 왔다. 자주 써야 할 텐데. 모르겠다.

 

 

 

 

 

 

 

친구는 내가 언젠가 글에 썼던 나의 별명 ‘빨간 원피스’를 지어준 당사자다 여름이면 그 원피스가 생각나곤 한다. 그 시절의 나를 생각하는 일,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다. 아무튼 우리가 공유한 시간과 공간은 살아서 이렇게 미소를 짓게 만든다.

 

장마가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이곳은 맑음이다. 6월이 참 빠르게 지나간 것 같다. 아직 6월이 끝난 건 아니지만. 장맛비가 내리는 밤을 기다린다. 하루 정도는 그냥 아무 생각없이 쏟아지는 하염 없이 바라보고 싶다. 그런 밤에 이런 책을 곁에 두어도 좋겠지. 읽지 않더라도 눈길이 닿는 곳에 있다면 마음의 습기가 사라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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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하지 않았던 비가 내렸다. 어쩌면 예보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곧 장맛비가 내릴 날들이 이어질 것이다.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는 건,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보는 것과 닮은 기분을 데리고 온다. 좀 엉뚱하지만 허연이 만난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읽으면서 책 속의 설국을 마주하면서 비가 쏟아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눈과 비, 그것이 주는 예민한 감각을 느끼고 싶었다고 할까. 어쨌거나 이 책이 좋았다는 말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은 읽기도 전에 문장에 미혹된 소설이다. 알다시피,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아니 노벨문학상 수상작으로 누구나 한 번쯤 읽어보거나 읽어보고 싶은 리스트에 담긴 소설이 아닐까 싶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하나의 장면으로 압축되어 소설의 전체를 이끄는 소설은 많지 않다. 첫 문장을 시작으로 눈의 나라로 초대하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생각하면 나는 기차와 하나가 터널을 지나고 있는 기분, 낯선 세계에 도착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한 번도 눈으로 가득한 땅, 그곳이 어디든 방문한 기억을 갖고 있지 않은데도 말이다. 아마도 나와 같은 기분을 느낀 이는 많을 것이다. 눈부시게 강렬하고 차가운 눈과는 반대로 뜨거운 태양의 계절인 여름에 만나는 설국은 색다른 즐거움이다. 물론 헌연의 이 책은 설국 만을 위한 책은 아니다. 그럼에도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은 오직 설국만 읽었기에 소설과 작가를 분리하는 게 불가능하다.  허연이 들려주는 대로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만나는 일, 그것은 가와바타 야스나리란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는 것 같았다. 발자국을 따라가면서 내가 남긴 발자국을 바라보는 아득한 기분이라고 할까. 말이 많아진다. 기다렸던 책이라 그랬을까. 읽는 내내 지루함은 찾을 수 없었고 더욱더 가와바타 야스나리란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누군가는 이 책을 따라 여행을 할 수도 있고 눈의 계절에 계획을 세울지도 모른다.

​어느 겨울 저녁, 가까이 있는 산과 멀리 있는 산이 한꺼번에 성에 낀 기차 유리창에 비친 풍경이 눈앞에 있지 않은가. 기차 안과 기차 밖, 속계와 선계의 경계에 비친 여인의 얼굴. 그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허무. 그것이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의 출발점이 아니었을까. 나는 에치고유자와를 그리워하며 『설국』을 읽고 또 읽었다. 묘한 느낌이 들었다. 읽을 때마다 조금씩 나이가 들어가는 여인의 옆얼굴을 보는 듯하기도 했고, 때로는 바쇼의 하이쿠 한 구절에서 보여주는 소멸의 미학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또 어떨 때는 전철역에서 펄럭이는 주간지의 속됨이 느껴지다가도, 어떨 때는 일본에서 처음 봤던 칠흑같이 엄숙한 장례식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내게 『설국』은 깨달음 같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또 다른 문이 눈앞에 등장하는, 문을 열 때마다 이 문이 끝일 거라고 기대하지만 결국 또 하나의 새로운 문 앞에서 고개를 떨구게 되는 거대한 미로 같았다.

 

허연은 설국의 배경인 에치고유자와를 시작으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문학이 꽃을 피운 공간으로 이동하면서 그의 소설을 하나씩 설명한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을 좋아하는 시인의 해설로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완벽에 가깝다. 책은 언제나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는데 설국이 여러 단편의 연작 형태였다는 것도 그렇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이 소설을 단 한 번의 호흡으로 쓴 게 아니라 연작 형태로 시작했다고 한다. 하나의 소설을 완성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정성을 들였을까 생각하니 아름다운 문장 하나하나가 허투루 보이지 않았다. 가히, 최고의 문장이라 할 수 있는 도입의 문장에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고치고 또 고쳤을 테니 말이다.

 

책을 통해 나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인생에 대해 알았다. 그가 살았던 시대, 일본의 문화적 흐름, 동료들과의 교류, 사랑까지 말이다.  설국을 비롯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다른 소설,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은산소리, 고도에 대한 소개도 그렇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추구한 이미지와 소설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할까. 그런 것들을 허연은 하나씩 짚어준다. 특히『설국』에 대한 해설은 다시 소설을 꺼내들게 만든다. 주인공 시마무라와 두 여인 고마코와 요코의 심리적 변화를 보여주는 묘사와 대립에 대한 부분은 소설을 빛나게 만든다.

 

설국은 줄거리 소설이 아니라 이미지의 소설이다. 설국에 나오는 모든 배경은 일정의 논리가 아닌 이미지다. 시마무라가 살고 있는 도쿄라는 현실 세계가 아닌 터널 밖의 세계, 즉 에치고유자와라는 이미지의 세계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은 도입부부터 우리가 이미지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에치고유자와에 도착한 순간을 묘사하는 부분에 드러나는 이미지, 어둠 속 기차 차창에 비친 신비로운 이미지, 바로 그 이미지에서 소설은 시작한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반가울 책이겠지만 솔직히 나는 허연의 이야기가 좋았다. 위대한 문학 속 장치를 쉽고 친절하게 설명해준다고 할까. 시인이 만난 소설가, 설국의 고장인 에치고유자와에 대한 시인의 기대로 시작한 도입부터 여행의 묘미를 만날 수 있다. 고백하자면 지금껏 만났던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 가운데 제일 좋았다. 읽을수록 끝을 향하는 게 아쉬웠다. 그건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인생을 채운 허무하면서도 외로운 분위기와 이전에 몰랐던 그의 소설에 대한 허연의 이야기의 힘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린 시절 부모의 죽음을 시작으로 누이, 할머니, 할아버지의 죽음까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삶은 죽음과 하나였다. 그런 그에게 생은 부질없이 소멸하는 대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제자 미시마 유키오의 자살에 충격을 받고 그가 자살을 선택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 느껴진다. 나 역시 그의 죽음이 그가 살아온 생과 잘 어울린다는 허연의 생각에 동의한다.

 

살아 있어 느끼는 환희와 기쁨보다는 삶 자체에 아무런 감정이 없는 고요한 허무가 그를 지탱했을 것만 같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고아와 다름없이 성장했고 파혼의 이유도 알려주지 않은 채 사라진 약혼자로 인해 비탄에 빠진 젊음, 문학이 있었기에 그는 살아갈 수 있었던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한다. 그래서 그에게 체념은 체념이 아닌 위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체념의 힘을 알 것 같다. 내가 느끼는 체념의 깊이와 대가가 느꼈을 그것은 다르겠지만 말이다.

 

체념한다는 것, 그리고 그 체념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 그것이 가와바타 야스나리였다. 체념에는 체념이 주는 힘이 있다. 깊은 체념을 경험해본 사람들은 안다. 체념이 힘이 된다는 것을.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내가 원고의 첫 행을 쓰는 것은 절체절명의 체념을 하고 난 다음이다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그의 소설에는 궁극이 있다. 궁극의 욕망, 궁극의 삶, 궁극의 관계, 궁극을 찾아간 그의 귀착지는 허무다. 당연한 일이다. 결국 인간의 생은 허무한 것이므로…….

 

존재함과 동시에 결국엔 소멸하고야 하는 생의 본질을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진즉에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소설에서 어떤 희망이나 행복을 발견할 수 없는 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흔적을 따라 허연은 그의 삶을 바라본다. 그가 태어난 집을 가만히 지켜보고 그가 걸었을 길을 걷고, 학창시절 다녔던 서점에 가보고 그가 마셨던 커피를 마시면서 그를 생각한다. 허무로 남은 생을 말이다. 닿는 순간 부서지고 마는, 부질없이 소멸하는 생에 대해서 말이다. 한 권의 책이 주는 즐거움에 사색이 더해지는 시간이다.

 

온 세상을 순백으로 덮는 눈도 그러하다. 햇빛이 닿는 순간, 녹아버리고 만다. 사라진다는 걸 알면서도 눈을 만지고 그것에 닿기를 원한다. 겨울에 첫눈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초여름, 설국으로의 초대는 반갑고도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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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하게 방문한 블로그의 글을 읽고 위로를 받은 적이 있다. 전혀 알지 못하는 타인의 글에서 나를 발견한 것이다. 거기 내가 있었다. 내가 처한 환경과 심경을 고스란히 대변하는 듯 글은 괜찮다고 말하고 있었다. 괜찮다고, 자책하지 말라고 말이다. 나는 글이 주는 힘을 믿는다. 그리고 그 힘을 키우고 싶은 사람이다. 어떤 목적을 향한 글이 아니더라고 그저 하나의 습관에 불과한 글이라도 쓰기를 소망한다. 그러니 시인의 산문과 시를 함께 마주할 수 있는 조각의 유통기한을 만난 건 행운이라 할 수 있다. 저자 이지혜 시인의 시를 만난 적은 없다. 산문집 그곳과 사귀다를 읽었을 뿐. 하나의 시가 어떻게 탄생하는지 그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산문이라니,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각의 유통기한40편의 시를 위한 40편의 산문이 있다. 하나의 시와 하나의 산문이 짝꿍이 된 것이다.

 

누군가를 기억하고 지난 시간을 돌아보거나 어떤 감정을 추스르고 달래고 어루만져 기록하거나 그대로 두는 글. 친구와 연인과의 관계, 혹은 그들과의 다툼과 이별, 그리고 여행처럼 지나간 일상들을 마주한다. 마치 내가 이별한 것처럼, 마치 내가 떠나온 것처럼 마음을 당기는 글이 있었고 지나온 내 모습의 조각을 발견하는 것 같은 글도 있었다. 누구나 한 번쯤 멍하니 앉아 천장을 바라보던 순간, 그때 내가 다르게 했더라면 지금은 달라졌지 않았을까 하며 후회하는 어느 시절을 떠올리기도 했다. 분명 저자의 감정이며 일상일 텐데 말이다.

 

누구나 완성되지 않은 마지막 조각을 안고 살아가는 것 같다. 끼워 맞출 수는 있지만 맞추지 않는, 그 한 조각을 맞추게 되면 마지막 기대마저 현실이 될 것 같아서 말이다. 조금 늦게 알게 됐다. 억지로 퍼즐을 맞추려던 나의 노력이, 억지로 기억 하나를 잃게 하는 일이었음을. 그냥 내버려 두었을 때 어쩌면 약간의 착각과 환상이 나의 마음을 위로해주었는지도 모르는데. (산문빈자리의 거리중에서)

 

그때는 그때여야 한다고

그때는 말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때가 아니었다 (서로가 그때에서 사라질 때일부)

 

하루의 마침표를 찍는 일기처럼 써 내려간 산문이 하나의 시로 이어졌다. 시를 쓰기 위한 워밍업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일기 같았고 편지 같기도 했다. 어떤 순간을 기억하고 떠오르며 수많은 감정을 정리하는 순간의 고요가 느껴진다고 할까. 소설가의 창작 노트를 수록한 단편집이 즐거운 것처럼 시를 쓸 때의 배경을 상상할 수 있는 경험을 안겨준다. 40편이 시와 산문은 저마다의 목소리를 갖고 있지만 더욱 와닿는 시와 산문은 문장에 대한 것이었다. 뒤죽박죽 정리할 수 없는 감정을 가만히 지켜보고 가라앉은 감정을 글로 정리하는 시간이라고 할까. 나에게도 그런 시간이 있었기에 오래 기억하고 싶은 문장이었다.

 

문장의 힘, 모든 문장이 같지 않게 하는 것은 우리가 그 안에 있어서였다. 추억이 되려고 쓴 문장에 자신이 더 아프다는 소설가처럼. 매일 글을 쓰지만 가끔 내가 기억하고 싶어서 쓰는 건지 어떻게든 써야 해서 쓰는 건지 헷갈릴 때가 있다. 그래도 쓰지 않는 것보다 나은 이유는, 분명 감정을 묶어둔 문장으로 살아갈 날들이 있을 거라 믿기 때문이다. 문장 속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처럼 흐르고 있다. 더 많이 쓰고 싶다. 어차피 잊히지 않는 시간 속을 사는 우리니까. (산문 문장의 힘중에서)

 

움직이는 감정을

묶어두는 것이

문장이라던데

 

문장의 세계란,

흐르는 것들 사이에서 흩어지는

우리에게는 달콤한 곳

 

‘4월에는 함께 하자

우리가 들어간 세계의 이름

고정된 세계에서는

흐르는 시간도 다시 고정되었다

 

이 세계에서 잘 살고 있는 걸까요

흐르지 않는 것이

가장 잘 흐르는 거겠죠

 

흩어진 것들이 다시 만날 때쯤

7월이 되었다

거짓말처럼

 

움직이지 않는 것에는

입구만 있을 뿐 출구가 없었고

그런 세계에서는

계절이 숫자가 점점 많아졌다

 

움직이는 감정은

굳어지지 않으려던 계절

 

문장의 세계를 사는 법 (문장의 세계전문)

 

시를 사모하는 이에게 시를 쓰고 싶은 이에게 반가운 책이 아닐까 싶다. 시가 되는 순간과 마주하는 책, 하나의 생각 조각을 어떻게 발전하는지 한눈에 그 과정을 볼 수 있으니까. 나만의 시를 쓸 수 있는 무모한 용기로 도전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다만 40편의 시가 유독 만남과 이별, 사랑, 관계, 시간이라는 주제로 압축된 것 같아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 독자에게는 신선한 접근이라 할 수 있다. 반대로 그런 시를 찾고 있었던 이에게는 더욱 끌리는 책이다.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된다. 급할 필요도, 서두를 필요도 없는 만남이 있단 것을. 생각보다 아주 작은 것이 인연의 속도를 정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연마다 제각각의 속도로 색깔로 이어진다는 것, 그래서 인연인 거다. (산문우리의 암호중에서)

 

불꽃이 틘다고 안심할 것도, 나뭇잎이 멈췄다고 불안해 할 것

도 없으니. 차차, 두고 봅시다. 우리 사이에 어떤 계절이 들어올

. 어떤 노래가 스밀지, 어떤 술잔이 오고 갈지 모르니까요.

, 기다립시다. 생각보다 아주 작은 것들이 우리 둘을 흔들지

도 모르니까요. 오늘 아침 보잘 것 없다고 내던진 것이 어쩌면

우리를 바꿔놓을지도 모르니까요. 차차, 혼자인 듯 그러나 혼자

가 아닌 듯 그렇게 알아갑시다. 허허, 차차는 참 외로운 말이지

만요. 흐흠, 차차는 참 조건 없는 말이지만요. 후후, 차차는 참

맹맹한 호흡이지만요. 혹시나 설마 혹시나 차차, 춤을 추다가도

못 만나면 다른 리듬으로 만나겠죠. 어쨌든, 오늘부터 차차! (차차전문)

 

솔직하게 말하자면 작정하고 시집을 읽게 되는 경우는 드물다. 어쩌다 보니 시집을 집어 든 경우가 훨씬 많다. 어딘가에서 본 한 구절을 찾느라고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은 한 구절을 찾느라고 읽었던 시절이 더 많다. 그 시를 찾느라고 읽게 되는 시집,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니 좋아서 자꾸만 읽게 되는 시집. 내가 먼저 읽지 못했던 시를 누군가 먼저 읽고 들려주어서 찾게 되는 시집이 더 많다. 시집 전체가 다 좋았던 적도 있지만 몇 편의 시가 좋아서 시집을 소장하게 된 경우도 있다. 시란 참으로 놀라운 힘을 지녔기에 그 힘의 능력을 믿기에 여전히 시집을 찾고 시를 읽는다. 최근에 가장 나를 흔드는 시집은 박소란의 한 사람의 닫힌 문이다. 잘 알지 못하는 시인의 시집이다. 단지 제목에 이끌려 곁에 둔 시집이다. 그리고 이런 시에 꽂혀 계속 반복해서 읽는다. 어쩌면 나는 이 시를 말하고 싶어서 이렇게 장황한 글을 쓰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

 

그것을 잃은 후

이제 나는 그 어떤 것도 잃을 수 있게 되었다

 

세상에 잃을 것이 너무 많고

그것은 어디에나 있고

 

어느 일요일과 같이

늦잠에서 깬 뒤 머리핀을 찾아 방 안을 두리번거리다 알게 되었지

살면서 머리핀 하나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일인가

기다렸다는 듯 머리칼은 흩어지고 조금의 아픈 기색도 없이

아 따분해 다시금 잠들고

 

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인가

 

잃어버렸다, 는 말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것을 잃고 난 후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라진 그것을 아주 갖지 않는다는 것

갖지 않고도 산다는 것 그러므로

이제 나는 더 아름다워질 수 있게 되었다

머리핀 아니라 해도

 

내게는 잃은 것이 너무 많고

그것이 아니라 해도, 내가

아니라 해도

 

세상에는 내가 너무 많고

 

어느 일요일 아침

늑장을 부리며 눈을 뜬 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라질 것이다 수없는 내가 그래왔듯

 

나는 또 살게 될 것이다 (잃어버렸다전문)

 

어느 시절에는 소설의 한 문장에서 매우 큰 위로를 받았다. 그 문장을 읽고 외우며 그것에 기대어 살기도 했다. 어느 시절엔 이처럼 우연으로 다가온 한 권의 시집에서 이런 시를 발견하고 울컥한다. 잃어버린 물건을 떠올리다가 내가 잃어버린 사람의 흔적을 뒤적이다가 멍한 시간을 보낸다. 뒤늦게 그 물건을 발견하게 되면 얼마나 반가울까. 그러나 그 누군가를 발견하는 일은 그리 반갑지 않거나 외면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데면데면한 표정으로 지나칠 수도 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 또한 살게 될 것이다. 시를 읽으며 그런 보통의 일상을 견디며 단단해질 거라 믿는다. 나는 그러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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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친구를 만났다. 친구와의 만남, 보통의 일상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오랜만에 만났기에 순간순간 방점을 찍어야만 했다. 어쩌다가 이렇게 서로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고 살았는지 사연은 많고도 길다.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을 수도 있고 삶에 집중하느라 그랬을 수도 있다. 여하튼 우리는 세월을 건너 만났고 늙고 있는 모습에 적잖이 놀라면서도 반가웠다.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다시 저녁을 먹고 다시 주스를 마셨다. 사이사이에 친구가 운전하는 자동차로 낯선 길을 다녔다. 처음 보는 봄이었고 처음 보는 삶이었다. 그 길을 돌고 돌아서 공간을 이동하면서 서로에게 집중했다. 꼬박 열 시간. 피곤함을 몰아낼 우리의 의지에 어떤 이름을 지어야 할까?

 

지난 삶을 돌아보기도 했고 슬픔을 꺼내놓기도 했고 맘껏 웃음을 터트렸고 쏟아지는 울음을 막지 않았다. 말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그간의 날들, 숨겨둔 비밀을 꺼냈다. 그러나 서로에게 강요는 없었다. 그저 말을 할 뿐이고 들을 뿐이다. 내 비밀을 말했으니 네 비밀도 말해주기를 바라는 눈빛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긴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종종 상대의 비밀을 강요한다. 막역하다는 이유로, 친구라는 이유로, 선배라는 이유로.  그러니까 내 비밀을 상대에게 전함과 동시에 상대도 그럴 거라 믿는다. 어쩌면 그건 암묵적인 폭력이다. 그것은 감정에 상처를 입힌다. 내가 상대에게 어떤 이야기를 꺼내고 싶은 마음과 그 결정이 온전히 나의 것이듯 상대도 그렇다는 걸 우리는 종종 잃어버린다. 그래서 실수한다. 말을 하고 싶어도 말이 되지 않는 순간이 있다는 걸 우리는 모른다. 말이 되어 나오려는 순간, 말은 사라지기도 하고 말이 되어서 나오는 순간 말은 칼이 되기도 하고 약이 되기도 한다는 걸 우리는 놓친다.

 

말은 강하면서도 약하다. 그래서 때로는 침묵이 필요하다. 침묵으로 길들여진 관계는 깊고 단단해질 수밖에 없다. 그들 사이에 소리 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깊이, 그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기도 하고 우정이라 부르기도 할 것이다. 그것의 이름이 무엇이든 오래 지속될 수 있는 믿음을 키우는 일, 말을 고르는 일일지도 모른다. 말을 고르는 일, 정성을 들여 말을 만드는 일일지도 모른다.

 

깊은 밤 나를 안아주고 친구는 떠났다. 잘 도착했다는 문자나 통화는 서로 하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의 날을 살아가고 어느 날 문득 다시 만나 서로를 안아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런 시집을 꺼냈다. 김경미의 『고통을 달래는 순서』, 나희덕의 시선집 『그녀에게』.  두 시집의 제목을 오래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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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있는 이곳은 한때 가장 떠나고 싶었던 곳이다. 아이러니하게 인생은 나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정착’이라는 단어를 쓸 정도는 아니지만 말이다. 지방의 소읍에서 시간의 속도는 아주 느리다. 지방 국도의 규정 속도로 살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고 내 삶의 속도는 적어도 그렇다. 돌아왔다고는 하나 익숙한 곳은 아니다. 여전히 나는 이곳에 대해 잘 모르고 맛 집이나 관광지를 묻는 질문의 답을 찾지 못한다. 그것들에 상관없이 살아갈 뿐이다. 줌파 라히리의 『내가 있는 곳』을 자꾸만 ‘내가 사는 곳’이라 읽게 된다. ‘있는 곳’과 사는 ‘사는 곳’은 같은 것 같지만 전혀 다르다. 어쩌면 그건 줌파 라히리가 이방인이라 그런지도 모른다. 모국어가 아닌 이탈리아어로 글을 쓰는 일, 아니 그것으로 소설을 쓰는 일은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했을까.

 

소설을 읽으면서 잠시 머무는 곳 그 이상의 의미를 두고 쓴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소설이라고 분류했지만 이 책은 소설보다는 일상의 관찰이며 기록이라 하고 싶다. 46개의 짧거나 긴 글에서 그녀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차분하게 정리한 글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무미건조하고 메마른 건 아니다. 소설의 화자인 ‘나’는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이며 혼자 살고 있고 주변의 동료나 친구들과 사귐에 있어 수동적이다. 어쩔 수 없이 맺어진 관계, 혹은 그런 사이를 유지하는 일에 대해 힘들어한다. 일로 엮인 모임이나 만남에서 겉돌고 사랑했던 연인과의 현재 관계도 마찬가지다.

 

이따금 내가 사는 동네 길거리에서 함께 어떤 이야기, 어쩌면 인생을 같이 만들어나갈 수도 있었을 한 남자를 만난다. (「길에서」)

 

한때 사랑했던 남자를 언제 어디서든 만날 수 있는 곳에 그녀가 산다. 집 주변 보도, 다리, 서점, 길거리, 카페, 식당, 병원 대기실, 박물관, 산책길, 빌라…. 그곳에서 마주할 수 있는 일상은 지극히 보편적이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에 비친 일상은 보편적이면서도 특별하다. 그 모든 곳이 그녀에겐 내면의 공간이며 심적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이들에 대한 감정도 비슷하다. 혼자라는 삶에서 묻어나는 외로움을 견디는 일상, 그리고 그 안에서 발견하는 거룩하고 존엄한 삶의 모습들.

 

노부인은 지금 공원에서 시끄럽게 소리치며 놀고 있는 아이들보다 더 활기가 넘쳐 보인다. 끈으로 연결된 두 사람이 이미지가 날 감동시킨다. 그들 사이의 헌신, 연결된 삶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난 우리 안에 흐르는, 순환되어야 하는 규칙적으로 제거돼야 하는 물질을 생각한다. 숨겨진, 흉하지만, 중요한 작업들. (「빌라에서」)

 

나는 나이면서 그렇지 않아요. 떠나지만 늘 이곳에 남아 있어요. (「산책길에서」)

 

소설 곳곳에서 그녀는 떠나기를 원하면서도 주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예민하고 복잡 미묘한 내면의 감정을 느낀다. 어떤 공간에서 느끼는 묘한 안도감, 혹은 두려움을 생각한다. 공간의 힘은 그런 것이다. 기억 저편의 자리에서 여전히 살아있는 공간, 사라졌지만 사라지지 않은 공간이 갖는 능력처럼 말이다. 줌파 라히리에게 이탈리아는 어떤 공간이며 어떤 의미일까.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마주하는 특정 장소, 공간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줌파 라히리의 소설에서 마주하는 공간은 건축가 유현준이 『당신의 별자리는 무엇인가요』에서 들려주는 공간 이야기가 전해주는 감정과 닮았다. 유현준의 공간에는 기억과 추억이 있고 줌파 라히리의 소설 속 공간에는 그것들이 생성되고 자라고 있다. 어쩌면 그녀에게 필요한 건 유현준의 이런 문장은 아닐까.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은 가장 많은 삶을 빚는 공간이다. 그곳이 좋아야 그 사람의 삶의 질도 좋아진다. (『당신의 별자리는 무엇인가요』)

 

모든 길은 다 통한다. 홍대에서 한남동으로 가야 한다고 치자. 가는 길은 수없이 많다. 강변북로를 타고 가도 되고, 삼각지와 이태원을 거쳐서 가도 되고, 남산 순환도로를 통해서 가도 된다. 신촌오거리를 통해서 가다가 길이 막히면 아현동 사거리에서 우회전해 공덕동을 통해서 돌아가도 된다. 길을 바꿔 가도 목적지는 같다. 다만 경치만 달라질 뿐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계획했던 길이 막히면 다른 길로 가면 된다. 그리고 그것이 모여서 새로운 풍경이 되는 것이다. (『당신의 별자리는 무엇인가요』)

 

공간은 우리의 생이 완성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목격자이며 동반자다. 내가 있는 곳에 하루하루가 쌓인다. 언젠가 이곳을 떠난다 하더라도 삶의 흔적은 고스란히 남는다. 많은 시간이 지났어도 문득 그곳을 지나치거나 생각하면 지우고 싶은 감정과 인연들까지 떠오르는 걸 보면 말이다.

 

줌파 라히리의 소설을 빌려 내 삶의 현재인 이곳을 천천히 둘러본다. 어두운 새벽에 등불처럼 환했던 벚꽃나무 길, 자주 찾는 식당과 카페, 멀리서 사는 친구가 오면 항상 방문하는 바닷가, 수목원…. 누군가 나를 생각하면서 떠올릴 공간도. 처음에 뿌리내린 곳을 벗어날 수 없는 나무와 다르게 우리는 그곳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옮겨오고 다시 그곳으로 가기도 한다. 내가 있는 곳은 영원한 공간처럼 여겨지기도 하고 찰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있는 곳을 사랑하고 그곳에서 보는 삶의 풍경, 그리고 맺어지는 관계에 대해서도 다르지 않다. 삶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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