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도 몇 번은 절망한다. 하루에도 몇 번은 희망한다. 그건 아주 정상적인 일이다. (97쪽)

춥고 쓸쓸한 겨울밤이다. 까만 밤이 내리는 듯하다. 그런 밤은 때로 외로워서 눈에 힘을 준다. 시를 읽는 밤이 늘어난다. 마음이 울적해서 시를 읽기도 하고 아무 기대 없이 펼친 시집에서 다정한 마음을 선물 받는다. 시가 있어 좋은 계절, 겨울이다. 시가 태어나는 과정을 알지 못한다. 불현듯 쏟아지는 별똥별처럼 그렇게 태어나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시인만이 아는 통로에서 시를 발견하는 것처럼. 아니었다. 하나의 단어가 확장되고 하나의 문장을 고치고 다듬어졌을 때 시가 되는 것이었다.

시인은 떠났고 나는 시인이 남긴 시를 읽는다. 위암이 발병해 투병했다는 소식만으로도 나는 가슴이 아렸다. 암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일상을 고통스럽게 만드는지 조금은 알기에. 그 시간을 지켜보았기에. 그래서 일면식도 없는 시인의 부재가 아프고 아프다. 어쩌면 고국이 아닌 타국에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막연하게 얼마나 외로웠을까 생각한다. 곁에 소중한 사람이 있었고, 사랑하는 이들과 마음을 나누었을 게 분명한데도 나는 자꾸만 그런 생각을 들춰낸다.

시인에게 시는 전부였다. 당연한 말처럼 들리지만 정말 그랬다. 2011년부터 2018년 떠날 때까지 쓴 시작 메모는 온통 시였다. 시인의 삶에 시는 그냥 시로 존재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시와 시인은 하나였고 서로 기대어 사는 존재였다. 메모라고 쓰고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사유는 시를 향한 갈망이었다. 하루를 시작하고 날씨를 기록하고 누군가를 만나고 어딘가를 다녀오고 그런 보통의 일상도 하나같이 시의 시작이었다. 시를 목적으로 하는 삶, 시를 향한 마음, 새로운 시를 쓰는 일상은 시처럼 고요하고 헤아릴 수 없는 시처럼 어려웠다. 어스름의 순간, 나는 하나의 장면을 상상한다. 지금 자판을 두드리는 의자에 담긴 어떤 기운을 느낀다. 나는 시인이 아닌데도 그 마음을 짐작하고 싶다.


간절히 기다릴 때는 아무도 오지 않는다. 저녁이 찾아오는데 등이 시려서 옷을 하나 더 껴입으려다 슬그머니 당신의 손이 내 등에 닿아 있다 생각하고 옷을 의자에 내려둔다. (26쪽)

겨울을 즐겨야 할 시간이다. 하얗게 쌓인 눈으로 둘러싸인 세상. 눈을 바라보는 일은 즐겁지만 헛헛한 마음을 채우는 일은 어렵다. 설명할 수 없는 그리움도 그러하다. 막막한 밤이 지나고 나면 아침이 온다는 걸 모르지 않지만 한 번씩 새벽에 깰 때면 화장실에 다녀오고 나서도 잠들지 못한다. 스마트폰을 만지다가 다시 이불을 끌어당겨도 오른쪽 왼쪽으로 돌아눕기를 반복한다. 그 시각이 길어서 힘이 든다. 내가 원하는 건 깊은 잠일뿐인데. 시인이 원하는 건 무엇이었을까. 한국의 서울에서 지인을 만나고 돌아가는 그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아끼는 이의 시를 읽고 그들이 건네준 애정을 받고 다시 삶을 위해 돌아가는 그 길을 상상할 수 없다.

오늘 나의 일은 초록이 얼마나 무성한지, 그 무성함은 얼마나 아름답고도 참혹한 시간을 살게 하는지 생각하는 것. 가을이 오면 그 시간들 앞에서 나는 얼마나 솔직하지 못한 언어의 욕망에 시달릴 것인가. (175쪽)

시인의 계절은 어떤 모습, 어떤 표정이었을까. 새해의 시작 시인의 글을 따라 읽으면서 내가 지나온 계절들을 떠올린다. 무더웠던 여름, 사랑에 빠졌던 봄, 병실에서 보냈던 여름, 그 계절들과 시인의 그것이 같을 수 없겠지만 문득 신성하게 다가온다. 타인의 부재와 슬픔을 통해 삶을 배우고 살아가는 우리의 계절들.

언젠가 쓸 수 없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301쪽)

언제나 내가 원하면 내가 쓰고 싶은 것들을 쓸 수 있다고 믿으면 살아온 나였다. 그러나 시인의 말처럼 나도 쓸 수 없는 순간이 올 것이다. 시인의 글이 가슴에 박힌다. 쓸 수 없는 삶, 보통의 일상을 유지할 수 없는 순간이 온다는 건 무섭고 두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그 순간만을 생각하며 겁에 질려 살 수는 없는 일. 병원에 가기 전에 베란다 창 틀에 올려 둔 귤을 퇴원 후 돌아와 마주하며 쓴 시인의 글이 오래 마음을 붙잡는다.

나는 귤을 쪼갰다. 귤 향! 세계의 모든 향기를 이 작은 몸 안에 담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살아오면서 맡았던 모든 향기가 밀려왔다. 아름다운, 따뜻한, 비린, 차가운, 쓴, 찬, 그리고, 그리고, 그 모든 향기. 아,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가기 전에 나는 써야 하는 시들이 몇 편 있었던 것이다. (307~308쪽)

그때를 알 수 없지만 우리는 모두 떠날 존재다. 사라질 존재라는 사실은 서글프지만 그러므로 우리의 생은 아름답게 빛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담담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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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1-01-04 11: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늘 한겨레에서 코로나로 사망하신
분들에 대한 장례 기사를 읽었는데,
팬데믹 시절의 비정함에 대해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네요.

지구별에 머무는 동안 빛나도록 노력
해야겠습니다.

자목련 2021-01-05 09:55   좋아요 1 | URL
준비하지 못한 영원한 이별, 얼마나 아플까 싶습니다.
코로나로 인한 일상의 변화가 참 서글픕니다.
그러니 살아 있음에 감사가 절로 나오기도 하고요.

scott 2021-01-04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허수경시인에 유고집
자목련님에 첫문장
[하루에도 몇 번은 절망한다. 하루에도 몇 번은 희망한다. 그건 아주 정상적인 일이다.]
여러번을 읽었네요.
허수경시인이 번역하신 파울 첼란 1920년 11월,이제는 지도에서 사라진사라진 부코비나의 체르노비츠에서 태어나 1970년 4월 파리의 센강에 투신했던 시인에 운명과 도 겹치네요..

우리모두 사라질 존재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순간 열심히 살아야겠죠

자목련 2021-01-05 09:56   좋아요 1 | URL
가슴 먹먹한 문장들이 많지만 어떤 날은 그런 문장이 큰 힘으로 다가옵니다.
소한인 오늘, 춥고 차갑지만 따뜻함이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서니데이 2021-01-04 2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유고집이네요. 저는 그 직전에 나온 책을 선물받은 적이 있어요. 어느 날 갑자기 부고를 알게 되었던 생각이 납니다.
자목련님 새해 첫 주말 잘 보내셨나요.
올해도 좋은 일 가득한 한 해 되세요.
새해복많이받으세요.^^

자목련 2021-01-05 09:57   좋아요 2 | URL
네, 유고집이에요. 그래서 더 쓸쓸하게 다가오고요.
서니데이 님, 즐겁고 건강한 화요일로 채우세요^^

scott 2021-02-10 15: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이달의 당선 2관왕~*
추카~추카~
설연휴 가족 모두 평안하고 행복하게 보내시길 바래요.^.^

자목련 2021-02-10 16:1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스콧 님을 비롯한 이웃님들 덕분이에요.
스콧 님도 건강하고 평온한 명절 보내세요^^
 


한 해의 끝이 아쉬운지 밤새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바람은 제 할 일을 했다. 기온도 내려가서 창문이 열리지 않는다. 잠깐 그대로 두어야 할 것이다. 힘을 주어 열려고 한다면 탈이 날 것이다. 어제는 안부를 전하려고 휴대폰 전화 목록을 살피다가 가장 많이 받은 문자가 재난문자라는 걸 실감했다. 우리가 사는 시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시스템이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우리는 모든 정보에 쉽게 접근하고 더 깊게 알 수 있다. 빠른 정보도 좋겠지만 정확한 정보 전달이 더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전기압력밭솥을 버리면서도 그랬다. 폐가전 무료 수거를 신청했지만 소형의 경우에는 5개를 모아서 신청을 해야 한다는 안내를 받았다. 5개를 모을 수도 없고 집안에 둘 공간도 마땅치 않아서 관리사무소에 문의를 했더니 경비 아저씨께 여쭤보라는 답을 했다. 스티커 가격을 듣고 조금 놀랐다. 여름에는 무료(오디오와 비디오)로 버렸으니까. 재활용을 위한 분리수거를 하지 않았던 날들이 떠올랐다. 버리스타가 되어야 한다는 공익광고를 볼 때마다 언젠가 이 세상은 쓰레기 천국이 될 것 같은 공포를 느낀다. 무조건 다 재활용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기억하고 실천해야 한다. 사소한 것들이 중요하고 소중하다. 분리수거를 하는 방법도 조금씩 달라진다. 잘 알아야 하니 잘 버릴 수 있다는 생각에 동의한다. 나도 잘 지켜야 하는데. 때때로 부끄러운 순간이 많다.


12월 31일이 흐른다. 내일은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의 첫날이다. 오늘과 내일, 똑같은 하루지만 의미를 부여하니 다른 세상으로 구분된다. 송구영신예배는 올해도 드리지 못할 것 같다. 작년에도, 그전에도 참석하지 않았던 예배인데 올해는 참석하지 못한다는 쪽으로 기우니 조금 아쉽다.


2021년을 위한 달력이 많아졌다. 동네 치킨집에서 배달을 시켰더니 맛있는 메뉴가 가득한 탁상 달력이 함께 왔다. 서점에서 보내준 달력까지 생각지 않았던 달력 풍년이다. 코로나로 인해 은행이나 거래처에 방문을 하지 않아서 달력을 구매했다는 친구가 생각났다. 생일이나 주요 행사를 달력에 표기한다는 친구다. 집안에 있는 게 익숙해서 필요한 곳이 아니면 외출을 아예 생각하지 않는다는 친구의 말이 쓸쓸하게 다가오는 날들이다.


새벽에 내린 눈이 녹고 있다. 눈사람으로 변하는 한강의 단편 <작별>이 생각난다. 소설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일까. 어쩌면 내가 모르는 세상에서는 더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눈사람은 아니더라도 마른 감정의 삶, 뜨거운 눈물이 사라지는 그런 삶일지도 모른다. 어제 우연히 방송에서 배우 이순재 씨가 60년 만에 친구를 만나는 장면을 보았다. 살아있다면 만나고 싶은 친구라는 부제가 뭉클했다.


모든 걸 다음으로 미루는 시간을 사는 해는 올해로 끝났으면 한다. 한 해의 마지막 날 봄을 기다리는 기대와 설렘을 품어본다. 조심스럽지만 기대를 키울 수 있는 날들이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런 시를 읽으면서 씁쓸한 마음으로 보내는 마지막 날, 내년에는 산뜻하고 신나는 일상을 꿈꿔도 괜찮다는 말이 듣고 싶다.



너무 이상한 관계들

너무 이상한 싸움들

너무 이상한 진실들

너무 이상한 당신들

너무 이상한 공기들


싸구려가 된 죽음 싸구려가 된 골짜기


모르고 싶어요

나는 몰라요


(……)


당신은 사하라

나는 툰드라


우리

만나지 말아요


그래야, 남을 수, 있어요 (「놀라운 일, 바이러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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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0-12-31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2021년 새해 건강하고 행복한 나날로 가득차시길 바랍니다.

☆★*☆★*☆★
* Happy *
* New Year~ *
★☆*★☆*★☆

자목련 2021-01-01 17:01   좋아요 1 | URL
친절하고 다정한 스콧 님, 올해도 잘 부탁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환한 웃음이 가득한 날들이면 좋겠어요!

Falstaff 2020-12-31 10: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규리의 시집, 찜했습니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

자목련 2021-01-01 17:02   좋아요 1 | URL
기대에 부응하는 시집이기를 바라요.
언제나 좋은 리뷰 잘 보고 있어요.
올해 어떤 책들을 읽으실까 벌써 궁금하네요^^

수이 2020-12-31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자목련 2021-01-01 17:03   좋아요 0 | URL
향기로운 이웃 수연 님, 감사합니다.
즐겁고 신나는 일상을 이어가는 새해이기를 바라요.
수연 님이 읽으실 울프의 소설도 기대하고요^^

mini74 2020-12-31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산뜻하고는 신나는 일상이 내년엔 마구마구 쏟아지길 바랍니다 즐거운 연말 보내세요 ~

자목련 2021-01-01 17:04   좋아요 1 | URL
넵, 정말 올해는 그런 일들이 별처럼 쏟아지면 좋겠어요.
모두에게요!
미니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초딩 2020-12-31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항상 건강하시고요~

자목련 2021-01-01 17:04   좋아요 0 | URL
초딩 님, 감사합니다. 2021년 복된 새해, 즐겁게 시작하시길 바라요!

희선 2021-01-01 01: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라디오 방송에서 들으니 가전제품은 그냥 내놔도 가져간다고 하더군요 저는 그런 거 몰랐습니다 그런데 작은 건 다섯 개를 내놔야 한다니... 잘 버리셨기를 바랍니다

날짜가 바뀌었어요 자목련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웃을 일 자주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냥 웃어도 된다고 하지만...


희선

자목련 2021-01-01 17:06   좋아요 2 | URL
여름까지는 소형 갯수 제한이 없었는데 바뀐 것 같아요.
희선 님, 이곳은 펄펄 눈이 오고 있어요.
희선 님, 올해도 잘 부탁드려요.
건강 잘 챙시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항상 고마워요!^
 


처음엔 오른쪽 귀가 가려운 정도였다. 그랬던 게 귀가 아프다고 느꼈을 때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마스크를 쓰고 병원에 도착한 나는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의사는 무척 심각한 상태라며 나를 혼내는 투로 진료를 했다. 청력을 잃을 수도 있다고 엄포를 놓았다. 진료가 끝날 때까지 조심하라는 말을 놓지 않았다. 항생제 주사와 약이 처방되었다. 약은 생각보다 독했고 한동안은 약에 취한 것처럼 잠을 많이 잤다. 병원에 다니는 일은 길게 이어졌다. 외투를 챙겨 입을 정도의 계절까지 나는 이비인후과에 다녔다. 이제는 정기적으로 병원에 가서 체크를 해야 한다. 의사는 진료를 하면서 나의 귀, 그러니까 고막을 보여주었다. 나의 일부지만 나는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나의 고막을 화면을 통해 마주하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병원에 다니는 일은 피곤한 일이다. 아픈 몸을 달래며 하루하루 생활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귀가 아파서 병원에 갈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 나에게 뭐든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저 귀가 아픈 정도인데도 심신은 무너졌다. 다른 누구를 챙길 여력이 남지 않았다. 정말 나만을 위한 날들이었다. 이주란의 단편집 『한 사람을 위한 마음』처럼 내게는 나를 위한 마음이 필요했고 존재했다. 이주란의 소설은 나에게 그런 마음을 안겨주었다. 사실, 이 단편집은 이런 이야기다,라고 꼬집어 말하기 어려운 책이다. 이주란은 그냥 속삭이듯 말한다. 툭 던진다고 할까. 발단, 전개를 생각하고 그냥 한 부분을 잘라 말한다. 이 단편집 전체가 그러하다. 그런데 묘하게 그런 분위기가 이제껏 어떤 문제든, 어떤 상황이든 너무 열심히 설명하며 살아온 나에게 이제는 너도 그렇게 해도 괜찮아,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이상한 말처럼 들릴 것이다. 근데 우리는 너무 그렇게 살아왔다. 아픔도 슬픔도 감추거나 숨기거나.

이렇게 말하면 이주란의 단편들이 맑고 명랑하고 유쾌한 이야기라고 착각할 수도 있겠다. 그건 아니다. 엄마를 잃은 조카, 그런 조카를 돌보는 이모와 할머니. 헤어진 연인에 대한 이야기, 죽은 동생의 공간에서 동생의 삶을 회상하는 이야기, 어린 시절의 가난과 아버지의 부재, 불안한 현실, 고단한 월세방의 일상처럼 힘겹고 지친 일상이다. 그런데도 소설 속 화자가 던지는 말들이 이상하게 힘이 난다.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도 모르게 악착같이 살아온 시간과는 다르게 살아보자고 말하는 것 같다고 할까. 그냥 소소한 일상들을 누리면서 말이다. 조카의 친구들을 위해 떡볶이를 만들기 위해 장을 보고, 어버이날 꽃을 사면서 그리운 이를 생각하고, 항상 잘 해야 한다는 긴장 속에서 사는 대신, 힘이 들다고 말하며 사는 쪽으로 방향을 돌려보면 어떠냐고. 소설 속 화자의 말이 지금 이 시대를 사는 모두에게 다 들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너무 당연한 것들을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며 살아온 시간들과는 다르게 살아도 괜찮다고. 귀가 아파서 병원에 가는 게 가족들에게 미안했다. 이상한 마음이라는 걸 안다. 그래도 그런 마음이 든다. 내가 뭘 크게 잘못해서 그런 것 같은 미안함. 나는 이제 그런 미안함을 줄이며 살 것이다. 이주란의 소설 속 인물처럼.

“자신 없으면 자신 없다고 말하고 가끔 넘어지면서 살고 싶다. 무리해서 뭔가를 하지 않고 넘어지지 않으려고 긴장하는 것이 싫다.” (『한 사람을 위한 마음』, 88쪽)

“나는 앞으로 정말 미안할 때만 미안하다고 말하고 살 것이다.”(『한 사람을 위한 마음』, 134쪽)

그러다 이런 소설을 읽으며 갈팡질팡한다. 권여선의 단편집『아직 멀었다는 말』에서 마주한 인물들이 너무 힘들게 살기 때문이다. 나는 귀가 아파서도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매는데 권여선이 들려주는 삶의 고통은 그 강도가 너무 세다. 해도 너무 하다 싶을 정도다. 가족들이 남긴 대출금을 갚느라 TV 시청료까지 아끼며 살아가는 스물한 살의 삶이 가혹하다. 혼자 남았다는 것도 감당하기 힘든데 월급을 고스란히 대출금을 갚아야 하는 처지다. 그뿐인가, 권여선은 우리가 피부로 느끼는 고단한 삶이 어떤지 현미경으로 확대해서 보여준다. 계약직 교사에게 재계약이란 희망, 그 희망이 이뤄져야 요양원에 있는 어머니를 돌볼 수 있으니 학교 측에서 원하는 건 뭐든지 다 해내야 한다. 사회적 약자가 바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때때로 그들에게 하루하루는 얼마나 길고 지루할까. 그래도 끝은 아니니까 더 힘을 내야 할까. 그러니 ‘아직 멀었다는 말’은 산다는 게 무엇인지 알려면 아직 멀었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하는 건 아닐까. 그래도 또 나는 그들에게도 그들을 위한 마음이 필요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어쩌면 나를 위한 주문일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나 2020년을 돌아볼 때 코로나19의 공포를 떠올리겠지만 나는 아픈 귀를 달래며 지낸 2달여의 시간도 기억할 것이다. 거대한 공포 속에서 나의 작은 통증도 중요하니까. 살아 있으니 살아내야 한다고, 이런 말들을 자주 꺼내는 한 해였다. 살아 있다는 게 감사한 일이라고,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했다. 귀가 아파서 병원에서 진료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의도하지 않게 사람들을 관찰했다. 누군가에는 나도 그런 대상이었을 거다. 마스크로 가렸지만 지친 표정이 역력한 이들, 그런 와중에도 아이들의 목소리는 흥겹다. 아픈 주사를 맞으러 왔지만 코가 줄줄 흐르고 마스크는 답답하지만 아이들은 대부분 의자에 앉아 발을 흔들려 엄마나 아빠, 할머니에게 종알종알 말을 하고 있었다. 언젠가 그 공간의 모든 것들이 추억이 된다는 걸 아이들은 알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조금 괜찮아진다. 올해의 일상도 그렇게 될 수 있으니까. 한지혜의 산문집『참 괜찮은 눈이 온다』처럼. 아주 작은방이 집이었던 시절을 시작으로 단칸방, 철거민, 임대 아파트에서의 복닥거리며 살아온 이야기, 구조조정으로 회사를 그만두었을 때 송별회 자리에서 부른 노래, 세상을 하얗게 덮은 눈으로 위로를 받은 순간, 식물인간으로 긴 시간 고생하시다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기억, 이런 것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일부라는 걸 느낀다. 우리가 누리는 소소한 기쁨과 즐거움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알게 된다. 실패의 기억, 아픈 일상, 가족과의 이별, 삶의 전반에 대한 한지혜의 담담한 단상은 그 자체가 일상을 움직이는 힘이라고 전한다.

지겹고 힘들었던 시간도 지나고 나면 조금 달리 보인다. 귀의 통증이 사라지니 나는 잠들지 못할 정도로 고통이 있던 밤을 잊었다. 어느새 다시 일상으로 회복한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그 새벽을 생각한다. 너무 아파서, 당장이라도 응급실로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가족을 깨우지 않았고 아침이 오기를 기다렸다. 생각해 보면 잘 한 일 같다. 그 몇 시간 차이로 나의 상태가 극명하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테니까. 모든 게 나의 태도에 달린 것이다. “좋은 일도 아주 좋지는 않았고, 나쁜 일도 아주 나쁘지는 않았다.” (『참 괜찮은 눈이 온다』, 64쪽)란 글귀처럼. 그러니 겸허하게 달라진 일상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일도 필요하다. 그리고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건 성공한 삶이 아니라 소란하면서도 고요한 일상을 유지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마음, 그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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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0-12-15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글을 읽으면 위로가 참 많이 됩니다*^^* 저는 요즘 거절못하고 상대방을 미워하는 것보단 잘 거절해 보자란 맘으로 살고 있는데 잘 안되네요. 소란하면서도 고요한 일상, 가슴에 와닿습니다 ~

자목련 2020-12-16 09:10   좋아요 0 | URL
저야말로 이렇게 귀한 댓글에 힘이 납니다. 거절, 정말 어려워요. 우리에게 거절의 힘이 필요하네요.
차가운 겨울, 그 안에서 따뜻한 기운이 가득하길 바라요.^^

scott 2020-12-15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것 아닌 증상 자각하지 못한채 살아가는데 그래도 치료 받고 회복중에 계시니 다행입니다
자목련님, 건강 빨리 쾌유하시길 바랍니다.
[어렸을 때는 눈이 내리면 마냥 신나고 즐겁더니 나이를 먹으면서는 마음이 애틋해진다. 그게 “괜찮다” 소리를 듣고 난 이후부터 생긴 감정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 소리와 함께 내 서른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누구도 듣지 못하는 소리를 비로소 들으면서, 내 삶도 한결 깊어졌다.-참 괜찮은 눈이 온다 ]

자목련 2020-12-16 09:13   좋아요 0 | URL
아침을 포근하게 열어주는 말씀 감사해요. 별것 아니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많이 한 시간이었어요. 지금도 계속 귀를 생각하고 관찰합니다. 의사 말대로 제가 의사도 아닌데 말이에요. ㅎ
이 겨울이 지나면 우리의 삶이 한결 깊어질까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모두에게...
 


 일기예보는 맞았다. 지금 눈이 내린다. 그런데 눈송이가 너무 작다. 눈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지만 아직 쌓이거나 하지 않았다. 이제 진짜 겨울 속으로 들어왔다. 진짜 겨울이라고 쓰고 보니 지금껏 내가 썼던 겨울은 가짜 겨울이냐고 겨울이 따지는 건 아닐까. 아무튼 눈이다. 어젯밤에 잠들기 전에 눈이 온다는 걸 알았기에 아침에 일어나면 하얀 눈을 볼 수 있기를 기대했다.

 자꾸만 창밖을 내다본다. 눈이 쌓이는 걸 직접 확인하고 싶다. 쓸데없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눈이 내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눈송이가 되어 바람이 데려다주는 곳으로 가는 상상을 했던 때가 기억난다. 추운 겨울이었고 나는 어렸다. 아마도 엄마에게 심하게 혼이 난 기억이다. 밖으로 나왔지만 마당을 서성이는 게 전부였다. 아파트에는 놀이터라도 있지만 한적한 작은 시골 동네에는 그저 산과 들이 전부였다. 사춘기는 아니었고 그보다 좀 더 어린 나이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하지만 그때는 심각했을 것이다. 순간의 마음은 그 순간에 가장 정확하고 명확하니까.


 어른이 되고 어느 겨울에도 집을 나온 적이 있었다. 그 시골 집은 아니었다. 전후 사정은 자세히 설명할 수 없지만 그때는 버스를 탔다.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마음이 편해졌다. 그냥 어디론가 갈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어디로 갔냐고? 결국엔 돌고 돌아 집으로 갔다. 안온한 공간, 집 말이다.


 지금 이 순간이 마구 쏟아진다. 곧 쌓이겠다. 밖으로 보이는 집의 지붕 위에 눈이 쌓인다. 무서운 기세로 내린다. 불과 20여 분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얼마나 많이 내리고 쌓이고 시간이 지나면 녹을 것이다. 눈이 녹고 사라진 뒤에도 눈이 내리던 모습을 바라보던 순간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눈이 내리는 아침, 이런 시집을 읽는다. 세상에나 이런 제목인데 어떻게 지나칠 수 있을까. 이규리 시인의 『당신은 첫눈입니까』. 우연을 가장한 아침의 시다. 제목 때문에 구매했는데 이제 겨울의 시집이 되겠다. 겨울에 펼쳐보는 시집. 






 눈이 주는 감성은 묘하다. 멍하니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동안 어떤 생각도 나를 침범하지 못한다. 비와 마찬가지로. 하지만 눈과 비는 다르다. 눈을 맞는다. 이상하게 그래도 될 것 같다. 물기를 품은 눈이니 눈물을 맞는다고 할까. 눈물을 맞는다. 아프지 않게, 슬프지 않게 눈물을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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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공간과 시간을 공유한 이들은 다투기도 한다. 서로의 기억이 많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오류이고 왜곡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아침 일찍, 그러니까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친구가 전화를 걸어왔다. 혹 무슨 일이 있나 걱정하면서 전화를 받았다. 친구는 물어볼 게 있다면서 학교 이야기를 꺼냈다. 특정 선생님에 대한 기억이었다. 나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대로 말했다. 그 기억은 대체로 친구와 비슷했다. 친구는 반색하면서 다른 친구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이름만 아는 동창이었다. 그 아이도 나를 그렇게 기억할 것이다.


특정 선생님과 과목에 대한 기억은 학교 전체와 선생님들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어린 시절 선생님은 무척 중요한 존재였다. 지금까지 교직에 계실까, 그때 왜 그렇게 무서웠을까. 대부분 초임 발령지였으니 젊고 어린 선생님들이셨다. 아련하고도 애틋한 순간을 나누고 우리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추워진 날씨, 고장 난 밥솥( 주문을 했다), 스트레스에 대한 이야기. 마지막엔 늘 그렇듯 아프지 말고 건강하자고 말을 건넸다.


시선은 언제나 변화한다. 내 위치가 달려져서 그렇기도 하고 경험치가 쌓여서도 그렇다.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해서 그럴까. 선생님에 대한 생각을 잠깐 했다. 교육자라는 사명감 같은, 그리고 현재 나와 연결된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 연말이 다가와서 그런가 보다. 앙상한 가지만 남긴 나무 가운데 여태 꽃은 간직한 장미를 발견했는데 기분이 묘했다. 차를 타고 지나가는 길이라 사진을 찍지 못한 게 아쉽다. 전혀 시들거나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덤빌 테면 덤벼하는 태도라고 할까. 요즘 같은 날들에는 그런 결연한 의지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똑같이 주어진 날들인데 12월은 뭔가 부족한 걸 채워야 할 것 같다. 올해의 책이나 무슨 결산 같은 걸 하는 것도 그래서 일 것이다. 업무의 목표나 달성도 중요하겠지만 이런 사소한 즐거움도 12월이기에 가능한 것 아닐까. 아직 한 달이나 남았으니 읽지 못했던 책도 읽고 읽고 싶은 책을 쟁여놔도 괜찮다는.


황정은의 『아무도 아닌』이 새로운 표지로 나왔다. 좋은 단편집이라고 소문냈던 책이다. 양장본이다. 소유하고 싶은 욕구를 채워볼까. 나에게 주는 크리스마스 선무로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아름다운 핑계이지 않은가. 메리 올리버의 시집 『천 개의 아침』, 최근에 읽은 에세이 때문일까, 주변에 좋다는 소문 때문일까 하루키의 단편집 『일인칭 단수』도 핑계 목록에 넣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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