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견자들
김초엽 지음 / 퍼블리온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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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만 가득한 미래를 상상하지 않는다. 내가 마주할 미래가 아닐지라도 마냥 유토피아를 꿈꿀 수 없는 현실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 지구가 온전히 인간을 위한 공간이 될 거라는 예측도 할 수 없다. 우주 그 어딘가에 미지의 생명체가 존재하고 그것이 언제든 지구에 정착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김초엽이 그려낸 『파견자들』의 모습은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


지상이 아닌 지하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어떤 조건을 통과한 후 지상에 나갈 자격이 주어지는 파견자들로 구분 짓고 지하 세계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미래의 모습은 얼핏 보면 SF 소설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은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 그대로다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일부에게만 공개가 허락된 정보들, 현재의 환경과 체제에 수긍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불확실한 어떤 세계로 나가고자 하는 사람들. 어찌 보면 이 소설은 궁극적으로 나는 어디에 속한 존재이며 무엇을 원하는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살 것인가, 나와 다른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해서.


소설로 돌아가 보면 주인공 '태린'은 어려서부터 파견자가 되고자 했다. 자신의 스승 '이제프'처럼 파견자가 되어 그와 함께 지상으로 나가 탐사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모든 걸 참고 견뎠다. 기억 보조 장치 뉴로브릭의 도움 없이 오롯이 혼자 해야만 했다. 뉴로브릭과의 연결이 끊긴 게 한 번씩 말썽을 부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환청처럼 들리는 이상하 목소리가 태린은 익숙하고 친근해 '쏠'이란 이름까지 붙여주었다. 모든 과제를 통과하고 파견자가 된 태린의 첫 임무는 맡고 지상으로 나갔다.


범람체에 둘러싸인 인간은 광증을 유발한다고 보호소에서 치료를 받는 줄로 알았던 태린의 눈앞에 펼쳐진 지상의 모습은 숨 막힐 듯한 아름다운 그 자체였다. 놀랍게도 범람체의 일부가 된 늪인들은 스스로 그 삶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범람체의 존재를 피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고 공존의 방식을 택한 것이다. 기이한 모습, 그러니까 인간이라 규정지은 모습이 아니었지만 지하의 인간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의 언어로 소통하고 자신들의 존재를 진동을 통해 지하로 보내고 있었다. 여기, 자신들이 살고 있다고 말이다.


도시는 기이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색채로 일렁이는 세계. 곳곳에 강렬한 원색의 물감들을 흩뿌려놓은 것처럼 빠짐없이 찬란했다. 도시를 점령한 범람체들이 각가 경쟁이라도 하듯 빛깔을 드러내고 있었다. 색이란 색은 모두 사용한 거대한 유화 작품으로 지상을 덮은 것처럼, 마치 색이 그 자체로 살아 있어 도시를 통째로 움켜쥔 것처럼 범람체는 존재감을 발했다. (114쪽)


태린은 그 존재가 낯설지 않았다. 이상했다. 늪을 발견하고 늪인을 만났을 때도 혐오나 거부가 아니라 뭔가 익숙한 느낌이었다. 쏠이 그랬던 것처럼. 태린은 그제야 이제프가 파견자란 매료와 증오를 동시에 품고 나가는 직업이라는 말을 이해했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보낸 파견자들의 임무가 무엇인지, 돌아오지 않은 파견자들이 있는지, 왜 그들에 대한 정보를 감추고 찾으려 하지 않는지 알게 되었다. 형체와 목소리가 다른 그들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지상은 오직 인간의 공간이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지상의 범람체는 제거의 대상이었다. 이제프가 태린에게 보여주고 싶은 지상의 아름다움도 그러했다. 범람체는 인간과 함께 살 수 없는 존재, 지구에서 사라져야 마땅했다. 그러나 태린의 생각은 달랐다. 뉴로브릭의 오류라 여겼던 목소리의 존재, 쏠과 함께 살아가는 게 나쁘지 않았다. “하나의 몸에 두 개의 자아가 깃들 수는 없어. 네가 혹시나 그것에게 마음이 있다고 믿을까 봐. 난 그게 걱정이야.” (109쪽)라며 이제프는 걱정했지만 태린은 뇌 속을 침입한 범람체인 쏠과 지낼 수 있었다.


인간이기를 고집하지 않고 범람체와 결합한 삶이 있다는 걸 인정했다. 그것이 미래의 삶이라는 걸 태린은 알게 된 것이다. 이전과는 다른 삶이지만 여전히 삶이었고 지상에 그런 선택을 한 삶이 있다는 건 숨기고 감춰야 할 비밀이 아니라 모두가 알아야 할 일이었다. 우주로부터 불시착한 먼지로 인해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지구, 그리하여 인간이 아닌 모습으로 다른 목소리로 살아가는 존재가 있다는 걸 말이다.


더 이상 지상과 지하의 구분할 이유가 없었다. 태린이 쏠의 자아를 인식하고 그와 한 몸에서 지낼 수 있는 것처럼 범람체와 인간은 서로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야 했다. 누군가 그것을 거부하고 누군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무조건 거부하거나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요할 수 없다. 그것은 선택과 존중의 문제니까. 지금까지 김초엽이 소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건 바로 그것이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유능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 그 무엇과도 공존하며 동등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 인공지능, 돌연변이, 사이보그, 동물, 식물, 범람체(균류)이든 말이다. 대로는 흡수되거나 때로는 일부가 되어 다른 형태가 되었을 뿐 삶은 이어진다고 말한다. 내가 좋아하는 김초엽의 단편에서 만난 문장처럼.


“이곳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들이 이곳을 덜 미워하게 하지는 않아. 그건 그냥 동시에 존재하는 거야. 다른 모든 것처럼.” (『내가 떠나온 세계』 수록, 「숨그림자」)


신비롭고 아름다운 소설을 읽으면서 범람체와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모르는 존재, 나와 다른 존재와 살아가는 모습은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깨닫는다. 다른 형태로 존재하는 삶이라고 해서 그 삶을 부정해서는 안 되고 부정할 수도 없다는 것을. 마찬가지로 누군가에게 내 삶이 역시 다른 형태의 삶이라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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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레퓨테이션: 명예 1~2 세트 - 전2권
세라 본 지음, 신솔잎 옮김 / 미디어창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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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는 계단 가장 아래에 있었다. (15쪽)


소설의 첫 문장을 읽고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 살인사건의 범인을 추적하는 소설이라고 추측할 것이다. 그렇다면 화자는 범인일까, 목격자일까. 궁금증을 불러오는 이 소설은 넷플릭스 전 세계 1위 <아나토미 오브 스캔들>의 원작자 세라 본의 신간이다. 『레퓨테이션: 명예』 란 제목과 살인사건, 명예를 위해 살인사건의 진실을 밝힌다는 의미일까, 명예를 위해 진실 따위는 필요 없다는 뜻일까.


당당한 커리어 우먼을 상징하는 표지 속 인물, 소설 속 엠마 웹스터(이하 엠마)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노동당 하원의원으로 주목을 받는 정치인, 최근에는 여성 인권을 위해 ‘리벤지 포르노’ 법안을 통과시키며 승승장구한다. 그러나 성공한 여성 정치인의 실제는 달랐다. 온갖 협박과 악플에 시달려야 했다. 생명을 위협하는 악플과 살아가는 일상이란 어떨까, 감히 상상할 수 없다. 그런가 하면 이혼 후 사춘기에 접어든 딸 플로라와 보내는 시간도 부족했다. 엠마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알 수 없었다. 남편과 재혼한 캐럴라인과 더 가까이 지내는 것 같아 속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엠마는 하원의원이 되기 전 교사였다. 그때 동료였고 플로라의 음악 선생이었던 캐럴라인은 남편의 외도 상대였고 현재는 재혼한 상태다. 완벽한 정치인이자 엄마로 살고 싶지만 현실은 한쪽으로 기울기 마련이다. 정치인의 삶이란, 기자와 협력해야 했고 자신을 반대하는 이들과도 잘 지내야 했다. 지역구의 사람들을 만나며 그들의 고충을 들으면서도 그들이 한순간 자신을 위해 할 수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하는 삶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어딘가에서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두려움, 여성 정치인의 삶은 험난 그 자체였다.


그런데 아이에게 일이 생겼다. 플로라가 왕따를 당하고 있었고 자신을 괴롭히는 레아의 나체 사진을 찍어 남학생에게 보낸 것이다. 자신을 돕고 협력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기자 마이크는 플로라의 기사를 쓰겠다고 말한다. 어제까지 동지이자 친구였던 남자가 적으로 돌변한 셈이다. 정치인이자 엄마인 엠마 웹스터는 이 위기를 어떻게든 넘겨야만 한다.


내 원칙을 지켜야 했다. 품격을 잃으면 도대체 내게 무엇이 남겠는가? 뻔뻔하게 나가야 한다. 단호한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협조할 마음이 없다고 계속 밀고 나가야 한다. (1권, 181쪽)


내 직업만 아니었다면 플로라의 행동은 가파른 곡선의 일부이자 대단히 유감스러운 10대의 비행, 한심한 실수쯤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내 명예 때문에 아이의 명예가 달린 문제가 타블로이드 신문에 기사화될 위험에 처한 것이다. (1권, 199쪽)


엠마를 향한 관심과 공격은 끊이지 않는데, 그녀가 사는 집에서 시체가 발견되었다. 시체는 바로 마이크였다. 엠마는 사건의 용의자가 된다. 그녀가 진짜 범인일까? 엠마가 두 명의 여성 의원과 함께 살고 있는 집에서 발견된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자체만으로도 여론은 엠마를 집중 공략했다. 기자였던 마이크가 왜 그곳에 왔는지, 살인사건의 실체보다 엠마와 마이크 둘 사이의 관계를 파고드는 선정적인 기사가 쏟아진다. 알려진 바로는 마이크는 엠마가 보낸 메시지, 그러니까 집에서 만나자는 연락을 받고 택시를 타고 그 집에 도착했다.


엠마의 주장은 달랐다. 마이크에게 문자를 보낸 적이 없고 집에 들어왔을 때 무단 침입을 한 그를 발견했고 나가라고 소리쳤으며 둘 사이의 다툼이 있었지만 그를 죽이려고 한 것은 아니다. 두려고 무서운 마음에 정당방어로 그를 밀쳤을 뿐이다. 마이크가 플로라의 일을 언론에 보도하려고 온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증거는 엠마를 향하고 있었다. 마이크와 협력하던 사이가 아니라 좋은 감정을 갖고 밤을 보냈다는 사실까지 알려지고 말았다.


심지어 엠마는 처음에 거짓말을 했다. 열쇠 꾸러미로 얼굴을 가격하고 세라믹 그릇으로 마이크의 머리를 내리치고 증거를 버렸다는 것을 숨겼다. 부검 결과, 문자 메시지 내역, 주변의 증언으로 엠마는 자신이 거짓말을 했다는 걸 인정했다. 하지만 집에서 만나자는 문자는 보낸 적이 없었다. 경찰에서도 그 부분은 인정했다.


치열한 법정 싸움이 시작된다. 한 편의 법정 드라마를 보는 듯 생생하게 그려낸다. 배심원을 앞에 두고 엠마가 마이크를 고의로 살인했다고 주장하는 왕립기소청과 우발적 살인이라는 변호사 톰. 자신을 걱정하는 플로라, 엠마를 응원하며 재판을 참관하는 캐럴라인. 재판에서 증인의 역할은 중요했다. 엠마에게 우호적인 증인과 그렇지 않은 증인, 그들의 증언이 사건에 미치는 영향은 컸다. 재판정에서 매번 팽팽하게 맞서지만 유죄 쪽으로 조금 더 가깝다. 고백하자면 나는 소설의 중간을 건너 뛰어 결말을 먼저 보고 싶은 욕구를 참느라 힘들었다.


누군가 엠마를 함정에 빠드린 게 아닐까 생각했다. 어쩌면 그러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여성 인권을 지지하는 정치인의 몰락을 바라지 않았으니까. 배심원의 판결이 무죄로 나왔을 때 내심 안도했다. 그러나 엠마의 본심을 알고 나니 혼란스러웠다. 무죄를 선고받고 나온 속내, 그러니까 정치인으로의 엠마의 마음 말이다.


밖으로 나오자, 나는 어느새 정치인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그 의심을 종식시키는 소감을 겸손한 태도로 전달해야 했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물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열여섯 살짜리 남자아이를 생각하면서. (2권, 242쪽)


입을 떼며, 내게는 선택권이 있음을 깨달았다. 참회와 감사를 표하며, 거침없이 자기 의견을 말하는 여성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내게 가르쳐 준 공인의 삶에서 물러나겠다고 이야기를 할 것이냐, 아니면 반항적이지는 않되 더욱 굳건한 모습으로, 내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여성들의 삶을 향상시키는 데 힘쓰겠다고 말할 것이냐. (2권, 243쪽)


『레퓨테이션: 명예』는 이처럼 여성 정치인이 미디어에 노출되면서 겪게 되는 복잡한 심리를 아주 세밀하게 보여준다. 동시에 정치인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재미있게 술술 읽히지만 복잡한 심경을 마주하는 소설이다. 인간의 욕망과 야망이 얼마나 무서운지, 권력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말이다.


*넷플릭스 시리즈 영상화가 확정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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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은 없고요?
이주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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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있다. 그것이 나쁜 일에 국한된 건 아니다. 말하고 싶은 순간이 오지 않았을 뿐, 말하고 싶은 때가 오면 말하게 되는 것들이다. 누군가 그 말을 재촉한다. 누군가 그 말을 강요한다. 가깝다는 이유로, 자신이 그것에 대해 안다는 이유로, 누군가에게 들었다는 이유로 말이다. 좋은 의도라는 걸 알면서도 선뜻 말이 나오지 않을 때가 있다. 그저 말하고 싶지 않은 것, 그게 전부라는 걸 사람들은 의심한다.


이주란의 단편집 『별일은 없고요?』은 그런 마음을 안다고 말한다. 그런 마음이어도 괜찮다고, 과장된 표현을 요구하거나 속내를 보여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이다. 이주란의 단편은 기쁨과 즐거움보다는 가라앉은 마음이나 지그시 누른 슬픔 같은 것들이 있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 소설집을 읽는 게 답답하거나 불편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주란의 소설은 원인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가까운 이의 죽음, 사고, 이별을 암시할 뿐 자세한 내막은 들려주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은 말하고 싶지 않은 것들, 아직은 때가 오지 않는 말들이라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표제작 「별일은 없고요?」를 포함한 8개의 단편 가운데 몇 편은 두 번째 읽게 되었다. 읽으면서 바로 그 사실을 알아차린 단편도 있고 중반 이상 읽고서 기억한 단편도 있다. 이주란 소설의 특징은 특별하지 않은 일상을 그리는 것, 그 안의 이야기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는 것, 전반적으로 상실을 다루지만 지독한 슬픔을 뿜어내지는 않는다고 할까. 그래서 한편으로는 돌림노래나 도돌이표 같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생각해 보면 삶이란 반복적인 돌림노래와 비슷하지 않는가. 관계는 늘 어렵고 쉽게 오해하는 대신 오해를 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러면서 상대를 이해하는 마음, 상대를 안다고 생각한 마음이 얼마나 오만한가, 얼마나 부족한가 깨닫기도 한다.


이주란의 소설은 그런 마음을 인정하라고 괜찮다고 위로한다. 마음이 기우는 대로 말하고 싶은 때가 오면, 지금이 아니라 그때 말해도 괜찮다고 말이다. 표제작 「별일은 없고요?」에서 수연은 연인과 헤어지고 직장을 그만두고 엄마가 일하는 지방의 원룸으로 온다. 낯선 동네를 오가며 산책하고 엄마가 밥을 해주는 곳에서 일하는 외국인에게 한글을 가르친다. 두 번째 읽으면서 처음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문장을 오래 바라보았다. “새집이어도, 아무튼 언젠가 그 방에서도 누군가는 죽을 수 있어.” (25쪽)


누군가는 죽을 수 있다는 건 모두가 죽을 수 있다는 것, 죽음과 상실이었다. 「별일은 없고요?」의 뒷이야기처럼 여겨지만 인물의 이름은 다른 「사람들은」에서는 얼마 전 엄마를 잃은 은영의 집에 직장 동료였던 은영이 며칠 신세를 지겠다고 연락이 온다. 집 주인인 은영이 일하러 나간 사이 은영은 혼자 시간을 보내는데, 나중에 은영의 엄마도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람들은 상실을 겪은 이에게 잦은 안부를 묻고 괜찮냐고 묻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지만 정말 그럴까. 혼자만의 방식과 애도의 기간이 있다고 생각한다. 두 은영이 그랬던 것처럼.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할머니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방식으로 애도를 하는 「어른」 속 경아의 곁에는 아줌마가 있다. 가족이나 친척이 아닌 관계지만 시시콜콜한 일상을 나누고 시골 동네를 산책하고 두부를 사러 가고 곁에 머물러 주는 어른이다. “울고 싶은 만큼 울었어?”(103쪽)라고 물어주며 아줌마는 돌아가신 고모 이야기를 꺼내며 경아에게 “마음 놓고 울라는 거야”(104쪽)란 마음을 건넨다. 아줌마와 지내며 아줌마가 들려주는 이야기로 인해 경아는 위로를 받는다.


아줌마가 최선을 다해 살아온 삶의 모든 것을 내가 지금 나눠 받고 있다는 무자비한 따뜻함 때문이었다. ( 「어른」, 114쪽)


그런가 하면 남편을 잃고 대학 후배의 집에서 지내는 「파주에 있는」 현경은 매일 후배가 전하는 안부와 염려를 받는다. 집 밖을 나가지 않는 현경은 첫사랑이었던 재한의 메일을 받고 외출을 한다. 버스를 타고 시장에 가며 사람들의 분주함을 마주한다. 재한은 소소한 일상을 건네며 그저 곁에서 걸어준다. 그리고 헤어질 때 잘 살라고 말한다. “잘. 잘 살아야 돼.” (275쪽)라는 그 말에 담긴 진심이 내게도 전해지는 것 같다.


이주란의 소설은 밋밋하다고 할 수도 있다. 사건의 개요나 핵심 설명은 찾을 수 없다. 그러니까 폭풍이 몰아치는 순간이 아닌 그 이후의 감정들에 집중한다고 할까. 그 시간들이야말로 우리가 보내야 할 삶이고 버티고 견뎌내야 할 시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상실의 슬픔, 부족한 애도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걸 알려준다. 그것이 지독한 슬픔이라 할지라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들은 말하고, 말하고 싶지 않은 것들은 말하지 않고.


그러고 싶으니까 그러는 것 같아.

응?

결국엔 자기가 결정하는 거지.

뭘?

행동, 태도, 반은, 그러니까…… 모든 것.

모든 것?……

거의 대부분.

마음이 어떤 쪽으로 아주 많이 기울면 어쩔 방도가 없잖아. (서울의 저녁」, 2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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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 장면들 - 마음이 뒤척일 때마다 가만히 쥐어보는 다정한 낱말 조각
민바람 지음, 신혜림 사진 / 서사원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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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힘들고 지칠 때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는 사람은 대단하다. 달래는 정도가 아니라 괜찮은 상태로 돌아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히 스트레스를 푸는 정도가 아니니까. 어떤 이는 지나간 과거에 오래 매달려있고 어떤 이는 사람들과의 부침에 힘겨워한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괴롭다. 『낱말의 장면들』 의 저자도 다르지 않았다. 마음이 힘들고 관계에 지치고 아픈 몸과 함께 살아가는 게 고달팠다. 그럴 때마다 저자는 사전을 찾았다. 잘 알려지지 않고 많이 쓰지 않는 순우리말을 외우고 마음을 기댔다. 그렇게 자신만의 단어를 만들었다. 그런 단어들이 주는 힘을 일상과 함께 녹여낸 글이 모인 책이 『낱말의 장면들』이다.


이런 발상을 하다니, 색다르고 특이한 느낌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금세 그런 마음은 사라졌다. 차분하고 가만하게 들려주는 일상과 그에 맞는 낱말의 어울림에 스며들었다. 지친 마음을 쓰다듬고 나아갈 길을 열어주고 관계를 돌아보게 하는 낱말은 저자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어서 그랬다.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감정들, 치료하지 못하고 내버려 둔 상처들, 서로가 다른 게 당연한데도 부딪히는 마음들에 대한 조용한 고백이라고 할까.


어떤 사람은 순간 감정을 바로 다른 감정으로 바꿀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다. 혼자 삭히느라 끙끙대는 동안 감정은 더 크게 곪아간다. 자기 마음의 문지기란 저자의 표현에 공감하며 나는 문을 얼마나 열고 닫았는가 돌아보게 된다. 한 번 닫히면 끝까지 열리지 않는 마음의 문을 지닌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사람은 자기 마음의 문지기다. 스스로 통과시켜주지 않으면 감정은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머문다. 제대로 느끼고, 표현하고, 일찍 보내줘야 병이 되지 않는다. 부정적 감정을 쉽게 통과시키지 않는 마음은 긍정적 감정 앞에서도 문을 활짝 열지 못했다. (31쪽)


외국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강사를 하고 대학교에서도 교수를 돕는 업무를 본 사람을 떠올리면 소심보다는 당당한 이미지가 따라온다. 하지만 저자는 자신이 정한 일상을 지키느라 힘들었다. 누구나 그렇게 산다고 말할 수 있지만 사실 그 선을 넘어도, 기준이 무너져도 큰일이 생기지도 일상이 무너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한 번쯤 그런 경험이 있어야 별일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더 좋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도 아니라는걸.


마음에도 흐트러진 공간을 두려 한다. 불만족을 하나하나 붙잡아 바꾸려 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땅으로 나를 들여놓는 연습을 한다. 더 좋은 것, 더 나은 것에 대한 강박에서 자유로이 멀어지기를 바란다. (63쪽)


생각해 보면 우리가 바라는 건 대단한 게 아니다. 기쁨과 감동을 느끼는 순간도 아주 작고 사소한 순간이다. 저자가 지난번에 놓친 과일 트럭 아저씨를 만나 맛있는 제철 과일을 사서 먹는 것처럼 단순하다. 성장은커녕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고 여겨질 때 뒷걸음질 치지 않고 제자리걸음이 앞으로 나갈 준비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견디는 시간만큼 곰비임비 쌓이는 게 있으니까. 그건 어떤 업무나 계획에만 해당되는 건 아닐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어떤 생각과 결정을 내릴 때도 마찬가지다. 실수나 실패란 경험이 있어야 같은 경험을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다. 살아가면서 깨단한 것들로 배우는 삶의 태도가 아닐까 싶다.


반복된 어리석음만큼 깨단한 것들이 쌓이면, 어느 순간부터는 삶의 무게중심이 되어줄 것이다. 무게가 묵직한 아픔이 되기도 하지만, 남은 삶에서 균형을 잃지 않게 도와주기도 한다. 주변에 아픔 대신 살아에 가까운 감정들을 옮길 수 있게. (128쪽)


책에서 마음 깊숙이 다가오는 부분은 부모님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후각장애를 갖고 계신 아버지와의 만남에서 저자가 느끼는 마음, 본가에 갈 때마다 엄마와 다투고 돌아오는 속상함. 가장 가깝다고 여기고 적당한 거리를 찾지 못한 사이, 바로 가족이다. 적당한 거리의 맞은바라기에서 서로를 보고 있다면 더 잘 볼 수도 있다는 걸 기억해야겠다. 가까이 있어서 볼 수 없는 것들이 보일 것이다. 더 선명하고 더 환하게.


저자의 마음을 따라 읽으면서 그가 들려주는 곱고 다정한 낱말에 사로잡힌다. 얼마나 성실히 정성껏 고르고 골랐을 낱말일까 상상한다. 이전에 몰랐던 낱말이 반갑게 건넨 인사가 반갑다. 나만 아는 나의 낱말 목록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에 지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끼는 이에게 가만한 위로를 건네준다. 복잡하고 어지러운 마음을 단순하고 편안하게 이끄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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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11-14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아주 오래 전에 낱말의 뜻을
모를 적에 아버지 책장에 있던
두터운 국어사전 찾던 기억이 나네요.

자신만의 단어로 치유를 하다니 발상
이 참신하네요.

자기 나름의 패턴을 지키는 일도 사실
일상에서 쉽지 않나 싶네요.
게다가 더 좋은 것이 행복으로 귀결되
지 않는다는 것도 새로운 깨달음이구요.

이건 뭐 거의 덤으로 책을 한 권 읽은
그런 느낌이네요. 마음은 항상 복잡하고
어지러운 그런 어딘가에...

자목련 2023-11-16 14:41   좋아요 1 | URL
제게도 국어사전을 뒤적이며 낱말의 뜻을 찾고 기억하려 애쓰던 시절이 있어요.
자신을 위로하고 달래는 방법을 안다는 것만으로 차분한 마음의 길에 접어들 수 있겠다 싶어요.

비가 오는 목요일, 매냐 님의 마음이 평온하게 머물기를 바라요.
 
작은 빛을 따라서
권여름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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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꾸준하게 무언가를 하는 일은 대단하다. 건강을 위해 걷기, 명상, 기도 등 쉬운 것 같지만 막상 해보면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누군가 간절하지 않아 그렇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맞다, 간절함이 부여되면 상황은 변한다. 간절함은 아주 작은 자극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남들은 신경 쓰지 않지만 내 안의 무언가를 건드리는 순간 발화한다.


내장산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필성슈퍼’ 를 운영하는 가족 이야기, 권여름의 장편소설 『작은 빛을 따라서』에서는 다양한 간절함이 어떻게 빛을 발하는지 보여준다. 급한 마음에 언급하자면 소설은 재미있고 따뜻하고 뭉클하다. 슈퍼로 바쁜 부모님, 집안 살림을 챙기는 할머니, 고등학생 언니, 중학교 3학년 은동, 동생 은율, 여섯 식구의 평범한 일상을 그리는 소설이다.


화자인 은동이 할머니의 비밀을 알게 되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비밀은 할머니가 한글을 모른다는 것. 은동은 할머니의 한글 선생님이 되어 용돈을 받는다. 은동이 용돈을 모으는 이유는 연기 아카데미 학원에 등록하기 위해서다. 그러니까 은동의 꿈은 배우다. 은동은 할머니에게 한글을 가르치며 한 번식 슈퍼 배달을 돕는다. 은동 가족에게 변화가 생긴 건 대형마트가 오픈하면서다. 부모님은 두부 한 모도 배달을 시작했고 김장철에는 절인 배추를 팔았다.


소설은 대형마트에 대응하는 필성슈퍼의 모습과 연극을 향한 은동의 열정, 그리고 할머니의 한글 공부를 통해 실패와 그에 굴하지 않는 간절함으로 일어서는 어떤 마음을 이야기한다. 그 과정은 안쓰럽고 애틋하며 대견하다. 손님이 없어 애타는 마음을 숨기고 태연하게 하루하루 슈퍼 문을 열고 대책을 세우는 부모님, 떨린 마음으로 친구 석희와 아카데미 면접을 보지만 석희에게 연기를 권해 속상한 은동, 배움의 열정만큼 실력이 늘지 않아 속상한 할머니의 모습은 소설이 아닌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손님이 찾아오지 않아도 문을 여는 마음에 대해 생각했다. 새벽 여섯시 차가운 셔터 끝을 잡아 힘차게 올리는 아빠의 뒷모습이 그려졌다. 여느 시간 여섯시, 닫는 시간 열두시는 법으로 정한 건 아니었지만, 스스로 선택한 시간이었고, 우리 슈퍼만의 신성한 약속이었다. (169~170쪽)


슈퍼가 힘들어져 트럭을 몰고 섬으로 물건을 팔러 가는 아빠, 아카데미에 다녀온 후 절친 석희와 멀어진 은동, 조금이나마 힘이 되겠다고 시위를 하듯 대형마트에 가는 할머니. 그 마음을 알 것 같고 내일처럼 여겨졌다. 간절함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외면받는다고 느낄 때 얼마나 속상할까. 하지만 은동이는 연기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고 부모님을 슈퍼를 그만두는 일은 생각하지 않았다. 할머니의 한글 배움도 마찬가지다. 할머니는 문예대회에 나가 하고 싶은 말을 시로 써서 상금을 받고 은동은 연기를 배울 수 있는 곳이 그곳만 있는 게 아니라며 마음을 다잡는다.


간당간당. 엄마의 입에서 최근에 많이 나온 단어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이 단어는 마치 종소리 같았다. 간당간당…… 간당간당. 위태로운 시간을 버티고, 살아내는 사람들의 머리에서 울리는 종소리. 그 종소리를 들으며 확신했다. 내일도 우리 필성슈퍼는 망하지 않았다고 선언하며 문 열기를 선택할 거라고 말이다. 세상을 향해 용감하게 양팔을 벌린 것처럼 슈퍼의 양쪽 문이 활짝 열릴 것이다. (259쪽)


소설 속 은동이네 가족에게 닥친 위기처럼 우리네 일상도 마찬가지다. 하루하루 위태롭게 휘청거린다. 모두 쓰러지지 않으려고 간절함으로 버티며 살아간다. 실패하면서 배우고 그 과정에서 다른 방법을 찾는다. 단 번에 성공하거나 행운에 당첨되지 않는다는 걸 안다. 그저 묵묵히 자신의 존재를 믿고 나아간다. 간절한 마음을 저버리지 않고 자신만의 빛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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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seol 2023-12-26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이 소개해주시는 책들 리스트에 담고 갑니다.

자목련 2023-12-27 11:11   좋아요 0 | URL
biseol 님, 즐겁게 만나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