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거란전쟁
길승수 지음 / 들녘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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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지만 역사에 대해 잘 모른다. 한국 역사에 대해 근대사만 조금 알 뿐 그 이전의 역사는 학창 시절 수업 시간에 배운 게 전부다. 고조선을 시작으로 유적지 지명이나 빗살무늬 토기 같은 걸 외운 정도 말이다. 그 역시 시험을 위한 공부가 전부였다고 할 수 있다. 어린 시절 대하드라마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상한 건 나이가 들면서 대하드라마를 보면서 재미를 느낀다는 점이다.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더한 팩션 드라마가 아닌 정통 대하사극 말이다. 드라마 속 실존 인물에 빠져들며 인물의 심리에 동화되고 감정 이입이 되면서 역사적 사건의 배경을 배운다고 할까.


11월에 방송 예정인 대하사극 <고려 거란 전쟁>(가제)의 원작 소설 《고려거란전기 : 겨울에 내리는 단비》를 쓴 길승수 작가의 『고려거란전쟁』을 읽으면서 잠깐 드라마의 한 장면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현종과 그의 무한 신뢰를 받은 강감찬의 이야기라고 하는데 강감찬이 동북면병마사가 되어 군대를 지휘했던 나이가 65세라는 사실은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말 그대로 노익장이 아닌가 싶다.


책 이야기를 해보면 이 책은 『고려거란전쟁』란 제목 그대로 고려와 거란의 전쟁을 다룬 책이다. 후 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고려를 건국했다. 고구려의 명맥을 잇기 위해 나라의 이름을 고려라 짓고 북방 개척 의지가 강했던 건 알려진 일이다. 왕건이 지방 호족과 결혼하여 수많은 아내와 자식을 둔 것도 하나의 정책이었다는 사실도 말이다. 그래서 왕족의 족보가 아주 복잡하다. 왕권과 권력을 위해 친척과의 혼인으로 인해 더욱 복잡해진 가계도에 다시 한번 놀랐다. 그림과 사진 자료를 풍부하게 실어 이해를 돕는다. 고려의 모자에 대한 설명만 봐도 그렇다. 성종은 10세 이상 남자는 모두 모자를 쓰고 다니도록 법으로 제정했고 고려가 본격적으로 발전을 시작한 때가 성종이 다스릴 시기였다.





거란과 전쟁 당시 고려의 결정적인 무기인 ‘검차’라고 불리는 수레도 흥미롭다. 표지에서도 볼 수 있는 검차는 수레에 창이나 칼을 꽂아 방어력을 높인 무기로, 수레가 연결되면 마치 성곽과 같은 효과를 발휘한다. 검차는 기병을 상대하는 데 효과적인 무기였다. 드라마에서는 모자에 대한 고증과 더불어 검진차를 어떻게 표현할까 궁금해진다.





고려를 중심으로 여진족, 거란, 송나라의 이야기도 빠질 수 없다. 거란과 고려가 전쟁을 하는 동안 실리에 따라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 송과 거란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도 볼 수 있다. 그 시절에도 외롭고 힘든 일게 외교였다는 사실도 함께. 거란은 꾸준하게 고려를 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거란이 993년 1차 침공을 시작으로 1018년 구주대첩(우리가 알고 있는 강감찬이 활약한 귀주대첩을 말한다. 책에서는 구주로 통일하며 구주는 지명이다), 나아가 1023년 7차까지. 무려 7번의 전쟁이 있었건 것이다.


거란과의 전쟁에서 고려가 어떻게 대비하고 방어하며 승리를 이끌었는지 배경과 지역적 상황과 시대별로 등장한 거란의 고려의 인물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고려와 거란의 전쟁을 생각하면 누구나 서희를 떠올리게 된다. 알려진 바로는 서희의 외교담판으로 한판승을 이룬 것 같지만 그 뒤에는 서희와 함께 거란의 소손녕을 방어하기 위한 성종의 기개가 있었다. 조선의 인조와 확연하게 비교되는 왕이다.


성종은 왕으로서의 책임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고, 왕이라면 위험을 무릅쓰며 솔선수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방법이 반드시 적중한다고 볼 수는 없어도, 적어도 그는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는 왕이었다. (71쪽)


길어지는 전쟁에 어쩔 수 없이 현종이 황후의 피난 길 여정이며 그 과정에서 위협을 당하기도 한다. 고려라는 나라가 완전히 정립되지 않은 실태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나라가 위험에 처했는데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관리가 있고 그런 상황에서도 가장 먼저 나라와 왕을 생각하는 관리가 있다는 건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놀라운 건 현종의 태도였다. 현종은 나중에 그들을 무척 너그럽게 대했다는 점이다. 무릇 왕이라면 자신과 반대편에 서 있는 이들을 섬멸하려 할 텐데 현종은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다.


모든 역사서가 그러하듯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그래서 어려웠다. 물론 역사에서 성종, 서희, 천추태후, 현종, 강감찬만 알면 안 되겠지만 익숙하지 않은 거란, 송나라의 인물과 고려의 관리의 이름을 기억하는 건 쉽지 않았다. 드라마가 방영되면 책 속 인물과 비교하면서 보면 좋을 것 같다. 고려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다는 사실과 우리가 모르고 있는 역사적 사실은 또 얼마나 될까 생각하게 하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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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3-09-06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하 역사드라마를 최근 들어 더 보시게 됐다는 말씀이 흥미롭네요^^ 11월에 방영 예정인 이 드라마 안 그래도 손꼽아 기다리고 있어서 그 전에 관련 책을 좀 읽어볼까 생각중이었습니다. 이 책 희망도서로 신청해서 읽어봐야겠네요. 자목련님이 역사 관련 책 리뷰 써주시니 반갑습니다^^

자목련 2023-09-07 17:06   좋아요 0 | URL
역사드라마에 흥미를 가지면 나이든 거라고, ㅎㅎ
역사 관련 책은 등장인물도 많고 어디다 초점을 두고 써야할 지 모르겠어요. 그런 점에서 화가 님의 리뷰는 정말 대단하고요! 11월에는 드라마 이야기도 나눠 볼까요? ^^

책읽는나무 2023-09-06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하사극이 방송될 예정인가 보군요?
저도 학창시절 배웠던 역사가 대부분이어 시간이 지나니 역사적 시대와 인물의 이름들이 좀 헷갈리곤 하더군요.
역사 드라마 보는 거 재밌던데 이 드라마도 재밌으려나요?^^

자목련 2023-09-07 17:08   좋아요 1 | URL
네, 11월에 시작한다고 합니다. 등장 인물이 많아서 힘들겠지만 기대하고 있어요^^

잉크냄새 2023-09-07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통사극의 대명사 최수종이 강감찬역으로 나온다고 하더군요. 오랫만의 대하사극이라 기대중입니다.

자목련 2023-09-07 17:09   좋아요 0 | URL
역할까지는 몰랐는데 강감찬이군요. 기대에 부응하는 재밌는 드라면 좋겠습니다^^

yamoo 2023-09-07 09: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려 거란 전쟁이 사극으로 제작되어 방영되는가 봅니다. 헌데 우리나라 역사는 모두 잘못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두 첫 단추를 잘못끼웠던 게 원죄이죠. 우리나라 역사는 일제시대 조선사편수회에서 편찬한 조선사에서 거의 바뀐게 없습니다. 특히 각국의 강역면에서는요. 교과서가 개정되고 문화면이 아주 많이 바뀌었지만(그만큼 유물발굴이 많이되서) 강역은 일제시대와 대동소이 합니다. 그 이유는 서울대 국사학과의 계보가 친일사학자 이병도부터 시작되기 때문이요.

뭐 어쨌거나 고려의 대 거란 전쟁도 교과서를 읽어보면 우리나라 평양 및 청천강 유역에서 싸웠던 걸로 기억되는데, 최근에 출간된 고려의 대외항쟁사를 보면 대 거란과의 전쟁은 만주지방에서 있었습니다. 교과서의 거란 전쟁과의 지명과 전쟁상황을 보면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안되는 지점이 많아요. 모순되는 지점도 널렸구요. 이걸 요하로 설정해서 읽어보면 아주 딱딱 맞습니다.

이 페이퍼를 보니, 예전에 제가 아주 충격적으로 읽었던 고려의 대외항쟁사에 대해 리뷰를 써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중국의 사서에는 통일신라 이후 한반도의 영토가 요하(정확히는 산해관)을 경계로 나뉜걸로 되 있는데, 일제 사학자들이 요하를 대동강(이게 엣 지명이 패수인데, 아무 설명도 없이 일본 학자가 설정했다. 근거 없이 자기가 보기에 패수는 대동강이라고 쓴 한 줄 때문에 우리 역사가 아주 고착화됐다)으로 설정하여 한반도를 벗어나지 못하는 역사의식을 설정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날조한 역사입니다. 이 페이퍼를 보니 울컥하네요..^^;;

자목련 2023-09-07 17:17   좋아요 1 | URL
저는 역사서를 많이 읽은 편은 아니지만 이번 책을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은 어떻게 검증해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대표적인 인물 외에는 잘 모르고 시대에 따라 주목하는 지명이나 인물이 부각되고 있다는 것도요.

야무 님의 말씀처럼 잘못된 정보를 수정하고 제대로 된 역사 지식을 전달하는 교육도 중요하구나 싶어요. 자세한 설명과 좋은 글 감사합니다.
 
여름을 한 입 베어 물었더니 문학동네 청소년 66
이꽃님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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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탁하게 만드는 불순물과 찌꺼기가 있다. 그게 무엇인지 알면서도 귀찮다는 이유로 내버려 둔다. 상념과 상심, 복잡한 것투성이다. 마음이란 원래 그런 거니까. 그 마음을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다. 그러다 그 마음에 누구가 자리를 잡는다. 그에게는 보여줘도 괜찮을 것 같다. 마음의 불순물과 찌꺼가 따위는 사라지고 오직 한 사람만 남는다. 순수한 사랑인 것이다. 이꽃님의 『여름을 한 입 베어 물었더니』를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정화된 마음의 반짝임을 보았다고, 연두와 초록으로 가득한 여름을 닮은 싱그러운 마음이었다고.


청소년 소설을 읽으며 기대하는 마음도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이꽃님의 소설을 몇 권 읽었지만 작가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라는 말처럼 나도 이 소설이 제일 좋았다. 상처를 치유하고 한 단계 나가는 성장에 중점을 둔 게 아니라 갈팡질팡하는 마음의 상태를 잘 묘사하고 그 마음이 어떤지 들여다보는 것, 이꽃님이 그려내는 소설의 특징이다. 속내를 다 보여줄 수 있는 용기라고 할까.


『여름을 한 입 베어 물었더니』 속 찬과 지오를 통해 보여주려는 것도 그러하다. 혼자만 간직하고 있기에 버거운 마음, 비밀을 건넬 수 있는 누군가를 갖는 일, 그리하여 비밀이 비밀이 아닌 조금 특별한 일상이 되고 편안해지는 것. 닫혔던 마음이 열리는 일이라고 해도 좋겠다. 소설 속 찬과 지오의 마음이 조금씩 열린 그 여름, 그 여름 속으로 들어가 보자.


지오는 엄마에게 전학을 통보받는다. 유도부가 유명한 고등학교,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빠가 있는 곳으로 전학을 온다. 그곳에서 한 아이를 만난다. 5년 전 화재 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할머니와 사는 아이 유찬. 외지에서 온 자신에게는 찬바람이 부는 동네 사람들이 하나같이 다정하고 친절하게 대하는 아이. 그 아이가 자꾸 지오 앞을 맴돈다. 교실에서도 유도부에서도 찬은 지오 곁에 머문다.


찬은 5년 전 화재 사고 후 이상하게 다른 사람의 마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 마음은 소음이었고 귀찮은 일이었다. 그런데 지오가 곁에 있으면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신기하고 좋았다. 마음이 편해졌다. 지오도 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 된다. 열여덟에 혼자 자신을 낳은 엄마가 아픈 것도, 몰랐던 아빠의 등장으로 마음이 복잡하다는 것도. 화풀이처럼 내뱉은 말은 찬은 가만히 들어준다.


“그깟 마음 좀 들린다고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 마. 마음? 네가 들린다는 마음이 얼마나 가벼운 줄 알아? 사람 마음은 하루에도 수십 번 바뀌어. 하루는 조금 괜찮았다가, 그래 내가 모르는 어떤 이유가 있었겠지 이해해 보려고 했다가, 또 하루는 미칠 것처럼 화가 나 죽겠다고.” (57쪽)


그렇게 찬과 지오는 이제껏 혼자만 감당했던 마음을 서로에게 흘려보낸다. 지오는 엄마와 단둘이 살면서 들었던 상처가 된 말들, 엄마가 좋아해서 엄마를 지키기 위해 유도를 시작한 일을 찬에게 들려준다. 찬은 자신을 살리고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 방화의 범인을 용서하는 동네 사람들을 향한 미움을 말한다. 지오와 찬이 잘못해서 생긴 게 아닌데도 지오와 찬의 마음에는 미안함이 쌓였다.


지오가 아빠 없이 엄마와 살아온 일, 찬의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할머니와 살게 된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니 그냥 바라봐 주면 되는데 어른들은 애정과 관심이라는 이유로 숱한 말과 시선으로 거든다. 그 말과 시선이 지오와 찬을 아프게 하고 비밀을 만들고 그 세계로 파고드는 걸 모른다. 그런 어른이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어 나는 미안하다.


지오와 찬이 가까워지는 모습을 이꽃님은 너무도 예쁘고 담아냈다. 단 하나의 여름으로 남은 여름이다. 그건 나에게도 마찬가지다. 어느 여름이 특별한 이유는 그 여름을 보낸 누군가 때문이다. 지오와 찬이 그런 것처럼. 찬의 뜨거운 여름을 한 입 베어 물어 찬을 지켜주겠다는 지오의 다짐처럼.


바람이 불었던 것 같다. 예전에는 나뭇잎이 초록색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날은 아니었다. 어떤 잎은 아주 연한 연두색이었고 어떤 잎은 짙은 초록색이었다. 또 어떤 잎은 쨍한 초록색이었고 어떤 잎은 연둣빛이 사라져 가고 있었고 어떤 잎은 눈이 부시게 푸르렀다. 그 모든 잎들이 하나하나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때, 그 순간 유찬의 머리 위로 그토록 다양한 초록 잎들이 흔들리고 있었으니까. (85쪽)


지오와 찬은 마음속 깊은 곳에 담아두었던 질문들을 꺼내고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고 싶지 않았던 어른들의 마음을 어림한다. 그것들의 반복하고 반복하면서 찬과 지오는 성장할 것이다. 지오와 찬이 맞이할 앞으로의 여름을 기대한다. 벅차고 아름답게 빛나는 여름, 싱그럽고 맑은 마음의 열매가 단단해지는 눈부신 여름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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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3-09-05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예쁜 소설이겠구나 생각하게 되네요. 싱그러운 아이들을 만나면 마음이 절로 정화될 것 같습니다^^

자목련 2023-09-06 08:38   좋아요 0 | URL
아리면서도 예쁜 소설이었어요. 여름과 잘 어울리는 그런 소설이라고 할까요^^

페넬로페 2023-09-05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 단락의 문장들!
그저 예술입니다.
이 문장만으로도 소설의 느낌을 알것 같아요.

자목련 2023-09-06 08:41   좋아요 1 | URL
페넬로페 님의 댓글로 즐거운 하루 시작합니다!

구단씨 2023-09-07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인의 마음이 들리면 참 속이 시원하겠구나 싶었거든요.
근데 찬이가 다른 사람의 마음이 들리는 것을 소음이라고 느끼는 순간, 제가 얼마나 단순하게 생각했는지 알았어요.
듣고 싶지 않은 마음까지 듣게 되니, 그게 소음이고, 찬이에게 정말 괴로운 일이겠구나 싶더라고요.
더위가 먼저 생각나는 여름이지만, 이 소설 읽으면서 이 말이 가장 많이 떠올랐어요. 싱그럽다... ^^

자목련 2023-09-11 09:07   좋아요 0 | URL
그쵸? 알다가도 모를 마음을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데..
마음이라는 게 참 어렵죠. 말씀처럼 이 소설, 참 예쁘고 반짝이는 싱그러움이었어요^^
 
커피와 담배 말들의 흐름 1
정은 지음 / 시간의흐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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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3학년이었던 작은 언니는 시험기간에 커피를 마셨다. 잠들지 않고 시험공부를 하기 위해서였다. 작은 언니가 밤을 새우며 공부를 했는지 그래서 시험을 잘 보았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그 커피가 마시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커피 본연의 맛보다는 설탕과 프림의 맛이라 할 수 있는 달달한 그것. 커피의 영역은 나의 영역이 아니었고 나보다 겨우 세 살 많은 언니가 커피를 마신다는 것은 거의 어른에 가깝다는 말이었다.


커피는 유일하게 사치를 부릴 수 있는 영역이고 내가 다른 세계로 넘어갈 수 있는 영역이다. 커피는 민주적이다. 커피는 쉽게 손을 내밀어 준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내가 발을 반쯤 걸치고 삶의 여유를 꿈꿔 볼 수 있게 한다. 커피마저 없다면 내 삶은 무미건조하고 비참해질 것이다. 커피는 아무것도 아니므로 거기에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다. (18쪽)


커피를 마시는 일, 술을 마시는 일도 아닌 커피를 마시는 일이 내게는 어른의 증표처럼 여겨졌다. 정확히 언제 커피를 마셨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고교 시절 마셨던 캔커피와 대학에 들어와 이공관 앞의 자판기 커피가 생각날 뿐이다. 그 시절에 커피를 사 먹는다는 것, 그러니까 분위기가 좋은 가게에 들어가 근사한 의자에 앉아 커피를 주문하는 일은 미팅이나 데이트를 할 때 가능했다. 지금처럼 유명한 체인점도 없었고 커피를 골라 마시는 일이 아닌 누군가를 만나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커피를 마시는 일이었다.


커피를 마시는 허상의 이미지에 자신을 담기 위해 커피를 마시기 시작하지만 때때로 커피는 ‘내가 지금 바로 여기에 있다’는 걸 완벽하게 느끼게 한다. 그 순간은 내가 만들어낸 ‘커피를 마시는 나의 이미지’를 넘어서는 것이다. 커피는 내 몸으로 감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58쪽)





정은의 에세이 『커피와 담배』는 그런 아련한 기억과 추억을 불러왔다. 가장 보편적인 기호식품인 커피와 담배에 대한 작가의 사유가 궁금했다기보다는 『산책을 듣는 시간』의 작가 정은의 글이라서 선택한 책이었다. 그 책이 좋아서, 그 안에 담긴 다정한 동그라미 같은 감각이 좋아서였다. 그렇다고 이 책이 아주 나쁘거나 별로였다는 건 안니다. 다만, 내가 기대했던 방향과는 조금 달랐다는 것.


작가가 들려주는 커피와 담배로 시작되는 기억, 느낌, 공간, 사람, 의미는 특별하고 소중하다. 커피믹스가 나오기 전 커피, 프림, 설탕을 담은 단단한 유리병 세 개의 이미지부터 할아버지의 은하수 담배는 내 기억 속 저편에 자리한 검은 물을 마시던 고모와 수정 담배를 피우던 젊은 할머니와 겹쳐졌으니까. 담배의 경우는 비흡연자인 독자에게는 교집합을 찾기가 어려운 부분도 있다.


담배에 불을 붙이면 그것들은 안정감 같은 특수한 감정의 형태로 몸에 잠시 내려앉는다. 그것이 담배를 끊지 못하는 이유다. 담배를 피우는 것은 단순히 담배를 피우는 것만이 아니라 어떤 기억들, 감정을 잠시 소환하는 의식에 가깝기 때문이다. (67쪽)


아마도 이 책을 선택하는 이들 중에는 흡연자가 많겠지만 말이다. 담배를 피우는 모습에 반해 그와 함께 담배를 피우려고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는 부분과 나중에 그와 연인이 되면서 그를 따라 금연을 했다는 부분에서 나는 그게 무엇이든 사람을 움직이고 행동하게 만드는 건 결국 사람이라는 걸 확실하게 느꼈다.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그것이 삶에 미치는 의미에 대한 글을 읽다 보면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헤아려보는 시간을 갖게 된다.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면, 커피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욕심내지 않고 사들이지 않았을 나의 잔들. 멋진 레스토랑에서 후식으로 커피를 마시고도 집에 돌아와 친구와 믹스커피를 마시는 일은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


눈과 코로 마시고 온 몸으로 감각할 수 있는 커피. 요즘은 하루에 세 네 잔의 커피를 마시고도 숙면을 했던 과거의 내가 부럽다. 가능한 줄이려고 노력하면서도 커피향의 유혹을 참기란 어렵다. 지금처럼 비가 내리는 날에는 커피 한 잔이 간절하다. 잠들지 못할 거라는 걱정은 잠시 내려두고 커피 한 잔 마셔야 한다. 분위기 좋은 공간이 아니더라도 멋진 음악이 흐르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커피와 나,둘만의 시간이면 족하다. 커피 한 잔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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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3-08-29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커피는 대학가서 먹기 시작한거 같아요 담배 피우는 선배들이 자판기 앞에서 뽑아주던 달달한 커피가 생각나네요^^

자목련 2023-08-31 14:09   좋아요 1 | URL
커피의 처음은 그냥 커피를 마시는 게 좋았던 것 같아요. 자판기 앞에는 늘 선배들이 있었죠. ㅎ

미미 2023-08-29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배나 커피가 주는 위로는 저마다 다를텐데 올려주신 인용문을 보니
그걸 글로 음미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군요.ㅎㅎ

자목련 2023-08-31 14:12   좋아요 0 | URL
저마다 어떤 형태로든 위로를 주는 존재, 그 가운데 커피와 담배가 가장 많지 않을까 싶어요.
직접 마시고 피우지 않아도 글로 전해지는 분위기를 잘 전달한다고 할까요^^

은오 2023-08-29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이거 읽으셨군요! 😆 저는 커피 좋아하긴 하지만 커피 마시는 시간을 즐기고 온전히 음미한다기보다는 그냥 씁쓸한 맛이 좋아서 그리고 카페인 도핑용으로 마시는지라.. 저자가 커피에 대해 쓴 부분 읽고 신기했어요. ㅋㅋㅋㅋ 아 커피 마시는걸 저렇게 좋아하고 저렇게 느낄 수 있구나...
담배에 관해서는 담배 피우는 시간은 고립이 아니라 고독이 된다고 했던가 그부분이랑, 기억이랑 감정 소환하는 의식이다, 그리고 담배로 하루가 분할된다 이런건 엄청 공감했고요. ㅋㅋㅋ 왜 이걸 십대 때부터 피우지 않았나... 후회했다는 말엔 헐 난 아닌데 했습니다 ㅋㅋㅋㅋ

자목련 2023-08-31 14:16   좋아요 0 | URL
담배를 피우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하루에 주어진 담배 개피를 조절하는 이야기는 지인에게 들었기에 흡연자에게는 모두 같은 생각이구나 싶었어요. 역시나 은오 님도 ㅋㅋ
커피 마시는 그 짧은 시간은 온전히 휴식 같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다 마신 잔을 오래 붙잡고 있는지도 모르고요. ㅎ

coolcat329 2023-08-30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7월부터 20년 마시던 커피를 끊었습니다. ㅠㅠ 금단증상으로 엄청난 두통, 변비, 무기력, 심지어 불면증까지 겪고 거의 삼 주만에 회복되었어요.
그동안 내가 카페인의 엄청난 지배를 받았었구나 싶으면서도 ‘온 몸으로 감각할 수 있는 커피‘를 못 마시니 가끔 우울합니다. ㅠㅠ

자목련 2023-08-31 14:20   좋아요 1 | URL
커피를 끊는 일, 아직은 어려운 것 같아요. 금단증상 어마어마하네요. 말씀처럼 그만큼 커피가 몸을 지배하고 있었구나 싶네요. 제 몸도 다르지 않을 것 같고요 ㅋ
커피를 대신 할 음료를 찾지 못하신 걸까요? 저는 요즘 꽃차를 눈여겨 보고 있어요. 시도는 아직이고요.

책읽는나무 2023-08-30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커피가 맛있는지 모르고 살다가 애 낳고 애들 키우면서 이웃집 언니들에게 맥심 커피를 배웠더랬죠.^^
지금은 그 분들보다 제가 커피를 더 많이 마시고 있구요.
한 25년 카페인 중독이네요ㅋㅋㅋ
커피를 끊어보려 해도 잘 안되더군요.
집에 커피가 떨어져 이참에 끊어볼까? 생각하다 어제 급히 알라딘 커피 주문했어요.
내일 온다는 문자에 손이 덜덜.....ㅋㅋㅋ
몇 번이나 집 앞 카페에 달려가 커피를 마실까? 고민하고 있는데 올려주신 책과 커피 사진에 또 손이 덜덜덜 떨립니다.ㅋㅋㅋ

자목련 2023-08-31 14:23   좋아요 1 | URL
저도 카페인 중독입니다.
커피가 떨어지는 일, 상상하기 어려워요. 그래도 나름 맥심 커피를 줄이는 노력은 하고 있어요. 잔을 사는 일의 가장 좋은 이유 커피가 좋아서고요!
우리 커피로 짠 한 번 할까요?

2023-09-02 1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9-03 1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neosy 2023-09-02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제가 사는 지역에 에스프레소 맛집이 있어서 그 낙으로 6개월째 삽니다. ㅎㅎㅎ

자목련 2023-09-03 13:39   좋아요 0 | URL
낙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지요. 커피처럼 진한 오후 이어가세요^^
 
공룡의 이동 경로
김화진 지음 / 스위밍꿀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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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지내는 이들과 멀어지고 있다는 걸 느끼는 순간이 있다. 직감 같은 건 아니고 연락과 만남의 횟수가 줄어들 때 선뜻 연락하지 않고 주저하고 있다면 거리가 생긴 것이다. 생일이나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도 그냥 문자를 보내고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가까운 사이인데도 뭔가 이상하게 지금이 아닌 나중으로 미루게 되는 순간 말이다. 아주 얇으면서도 단단한 막이 형성된다고 할까. 단숨에 걷어낼 수 있다고 믿으면서도 선뜻 막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것. 그래서 혼자 아파하거나 마음을 조이고 앓게 되는 일,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일이 그렇다. 좋아하는 마음이 분명한데 어째서 그 마음은 이유도 모른 채 허물어지는 것일까.


김화진의 연작소설 『공룡의 이동 경로』는 그런 마음에 대해 말한다.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마음을 어떻게 숨기고 어떻게 표현하는지, 차마 말하지 못하고 보여주지 못한 마음은 무엇인지 말이다. 간절하게 같은 마음이 되기 위해 애쓰던 시간이 점차 다른 마음이 되어도 괜찮다고 여기는 마음, 그 마음을 붙잡고 싶지만 그저 기다리기로 하는 마음. 누군가 그 마음을 사랑이나 우정이라 말해도 상관없다. 그러니 이 소설을 읽고 나면 서툴렀던 마음 혹은 다가가지 못한 마음 덕분에 헤어진 친구나 지인이 생각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공룡의 이동 경로』는 우연한 만남으로 모임을 갖게 된 주희, 솔아, 지원, 현우와 특별한 친구가 자신과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연작소설이다. 주희가 화자인 「사랑의 신」은 사랑에 대한 솔직한 마음이라고 할까. 주희가 바라본 솔아와 지원의 모습, 현우와의 비밀연애를 감각적으로 그려낸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헤어지는 일, 사람을 만나면서 감추었던 마음이 무장 해제되는 평범하면서도 뻔한 일이 얼마나 놀랍고 아름다운 일인지 알려준다. 소설이지만 일기 같고 편지 같은 방식을 택한 김화진의 영리함이 돋보인다고 할까. 거기다 김화진의 문장은 독자의 마음도 열리게 만든다. 아주 편하고 쉽게 읽히지만 무척 공들여 고른 문장이라는 게 느껴진다.


사람을 상상하는 일. 겉으로 보이는 행동이 전부라고 애써 믿으면서도 그 안을 조금이나마 헤아려보는 일. 나는 그런 걸 그만둘 수 없는 것 같아. 사람은 주머니 같다. 나는 그 안이 궁금해. 이렇게 매번 실패하고 실패하면서도 계속 다른 사람의 주머니를 엿보거나, 내 주머니를 슬쩍 열어 그 속을 보여주고 싶다는 강렬한 마음이 있었다. (「사랑의 신」, 43쪽)


소설에서 주희는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이 시작되는 마음, 그 마음이 단단해지거나 옅어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그 마음은 연인인 현우보다는 지원과 솔아, 두 언니에게 더 크게 작동한다. 그래서 지원과 솔아가 서로를 향한 마음이 무엇인지 주희는 그들보다 빨리 알아차린다. 그러나 타인의 마음을 섣불리 관여할 수 없으니 둘 사이를 그저 지켜볼 뿐이다. 솔아의 마음은 「나의 작은 친구에게」로 이어진다. 타투이스트 지원은 솔아의 팔에 작은 공룡 ‘피망이’을 그려준다. 자신과 다르게 말이 적고 조용한 지원과 솔아는 더 가깝게 지내고 싶었다. 하지만 솔아의 바람과 다르게 지원은 점점 멀어진다. 어느 날 사라진 피망이에 대해서도 무심한 반응을 보인다.


사랑받고 싶었던 사람이 선택하는 차선은 사랑하기이다. 사랑받기 위해서 사랑을 한다. 사람은 대체로 자신에게 호감을 보여주는 사람을 좋아한다. 자신을 좋아하는 이를 밀어내기란 쉽지 않다. (「나의 작은 친구에게」, 62쪽)


솔아는 피망이가 사라진 게 마치 자신의 잘못같이 느껴지고 지원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용기를 내지 못한다. 그러나 지원이 모임을 떠나고 이사를 가면서 지원을 지켜보는 게 아니라 소소한 일상에 대해 묻지 못한 게 속상하고 복잡하다. 주희를 통해 지원의 사정과 상처를 알게 되고 솔아는 서운함이 아닌 자신의 마음이 부족했던 게 아닐까 고민한다. 고민과 걱정을 반복하는 솔아를 향한 지원의 마음을 들려주는 「나 여기 있어」는 가장 아프고 아린 마음이었다.


우울증을 앓는 고향 친구 효진과 다시 연락이 닿으면서 지원의 마음은 중심이 사라졌고 길을 잃었다. 효진이 사고로 죽은 후 지원은 연인과 헤어지고 서울을 떠나 광주로 내려간다. 시간이 지나서야 지원은 자신의 마음을 볼 수 있었고 그제야 솔아의 마음도 볼 수 있었다. 마음이라는 게 다 다르니 그 마음이 움직이는 속도도 다르다는 걸 지원을 통해 확인한다. 간신히 모서리에 있는 지원의 마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거기 있다고 말해주는 지원이 고마운 건 독자인 나뿐은 아닐 것이다.


그래 나 여기 있어. 아직 모서리에. (「나 여기 있어」, 127쪽)


현우가 바라본 주희의 모습과 그런 주희를 사랑하는 현우의 마음을 들려주는 「이무기 애인」은 사랑하는 사람을 이해하는 마음이 사랑과 비례하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마지막 특별한 친구 피망이의 시선인 「공룡의 이동 경로」는 다정하면서도 따뜻하다. 솔아의 팔에서 눈꺼풀로 이동해 솔아가 보는 것들을 바라보며 솔아의 마음을 헤아리며 선캣처로 이동해 솔아의 공간과 솔아를 지켜본다. 마지막으로 솔아에게 연락을 해온 지원이 보낸 부채로 이동하여 솔아 곁에 머문다. 누군가의 마음이 그러한 것처럼. 가까웠던 마음이 조금씩 멀어졌다가 다시 돌아오는 일. 모든 마음이 그럴 수 없겠지만 그런 마음이 있다는 걸 알려준다고 할까.


김화진의 마음을 보는 탁월한 감각이 나쁘지 않다. 예쁘고 잘 생긴 단정한 마음만 골라 보여주지 않고 날이 선 마음, 흐트러진 마음, 못생긴 마음이 모두 우리의 마음이라고 알려준다. 하나의 색으로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이라는걸. 그 마음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어 속상하고 힘들지만 언젠가 돌아오기도 하니 그 자리를 비워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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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트 키딩 마음산책 짧은 소설
정용준 지음, 이영리 그림 / 마음산책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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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잊고 싶을 때 선명한 기억을 지우고 싶을 때 나는 잠으로 도피했다. 자고 자도 또 잘 수 있었다. 머리가 멍해지고 잠에 취에 입맛이 사라질 때까지 잤다. 그러나 잠은 묘약이 아니었다. 무기력하게 그저 시간을 흘려보내는 방법이었다. 효과가 아주 없었던 건 아니다. 잠들어 있는 동안 나는 내가 아닐 수 있었고 깨어나서도 다시 잠으로 도망갈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꿈을 꾸는 일은 좋지 않았다. 악몽이나 흉몽, 길몽을 따지기 전에 나는 꿈을 꾸는 게 싫었다. 끊어진 인연이 등장하는 꿈, 가족이나 지인이 무작위로 등장하는 이상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기분이 별로였다. 혹여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 아닐까, 걱정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정용준의 짧은 소설 『저스트 키딩』은 그런 꿈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건 꿈이니까 괜찮아, 그런 의미가 아니라 현실이라는 걸 알지만 잠시라도 현실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할까. 다른 내가 되어 도달하고 싶은 어떤 상상의 공간 같은 것, 꿈꿀 수 있는 미래, 잔혹하면서도 아름다운 동화, 소설이기에 맘껏 소리 지르고 화를 표출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기고 그 모든 게 허용되어 후련해지는 느낌. 설령 그것이 한낱 망상이나 환상일지라도.


그러나 이야기의 시작이 마냥 허무맹랑한 게 아니라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이라서 마냥 농담이나 잠깐의 소동으로 치부할 수 없다. 세신사로 일하는 신 씨의 일상으로 시작하는 「돌멩이」 속 소년의 일도 그렇다. 평일에 목욕탕 온 소년을 주목하는 신 씨. 학교에 가야야 할 시간에 목욕탕에 온 아이에게 공짜로 때를 밀어주며 몸을 살핀다. 멍이 든 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신 씨의 아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먹고사는 일에 급급해 학교 가기 싫다는 아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학교에 가지 말라고 했다면 좋았을 텐데, 후회가 될 뿐이다. 가방 가득 돌멩이를 채워 학교에 간 마음을, 창문을 깨고 자신을 괴롭혔던 아이의 머리를 내리쳤던 그 분노를 말이다. 아들을 전학시키고 적금을 깨고 이사를 했야 했다. 신 씨가 목욕탕에 온 아이에게 마사지 값에 대한 제안을 한다. 돌멩이를 들고 만 있으라고, 내리치지 말라고 했는데 소년은 유리창을 깼다. 소년의 행동은 옳지 않지만 나는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소설에서라도 그렇게 할 수 있어서 시원했다. 목욕탕을 다시 찾은 아이가 신 씨에게 조폭이냐고 물었을 때 신 씨의 답변은 명확하게 아름답다.


“세신사. 씻을 세洗. 몸 신身. 몸을 깨끗하게 만들어주는 사람.” (「돌멩이」, 31쪽)


거창하게 정의 구현을 가르치고 그것에 대해 말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어려움과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현실적인 방법도 필요하다. 그저 돌멩이를 들고만 있으라고 알려주는 어른도 있어야 할 세상이다. 더 나쁜 쪽으로 가지 않도록 도움을 주고 손을 내밀어 주는 어른은 「세상의 모든 바다」에서도 등장한다. 세상의 전부였던 엄마와 아빠를 차례로 잃고 혼자 남은 ‘소산’은 엄마와 아빠의 죽음을 인지하지 못한다. 엄마를 찾으러 떠난 아빠를 기다릴 뿐이다. 그런 소산에게 톨게이트 요금소 정산원은 요금소에 앉아 있으면 아빠를 제일 먼저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돌봄과 안정이 필요한 소산을 이용한 것이다. 톨게이트를 지나던 트럭 운전사 여성 주윤만이 소산에게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아빠를 찾으러 가자고, 먼바다로 가자고 말하며 함께 떠난다.


저는 세상의 모든 바다를 갈 수 있어요. 바다로 향하는 모든 톨게이트를 알고 있지요. 이 톨게이트를 지나 저 톨게이트를 통과하면 이 세상은 저 세상으로 변한답니다. (「세상의 모든 바다」, 142쪽)





사회적 약자를 위한 시스템의 부재를 생각한다. 개인과 개인의 연대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 사회적 울타리는 언제쯤 가능할까. 그런 기대를 품지 않는 사회에 익숙해지만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방어하고 보호하는 힘을 키운다. 표제작 「저스트 리딩」속 인물 ‘모자’처럼 말이다. 그는 편의점에 들어가 직원에게 자신이 몇 시간 전에 물건을 훔쳤다고 말한다. 직원은 물건을 돌려주면 되지 않냐고 하지만 모자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점장이 알면 귀찮아질 게 뻔한 직원은 모자와 잘 해결하려 하지만 쉽지 않다. 모자는 편의점에 있는 두 명의 남자가 강도라고 직원에게 알려준다.


모자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직원. 경찰이 출동하지만 강도가 아니라는 사실일 밝혀진다. 모자는 화가 난 직원을 도발하고 직원은 모자를 폭행한다. 합의를 위해 병원에 찾아간 직원은 모자가 자신의 유튜버 콘텐츠로 피해를 입은 사람의 지인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 모든 과정을 모자가 계획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통쾌하면서 마냥 산뜻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피해자의 삶이 회복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그렇다. 그냥 장난이었다는 것으로 무마하는 가해자와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평생 그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를 증명해야 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닿을 수 없는 꿈을 좇는 사람, 그런 사람을 사랑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들려주는 「시간 도둑」, 애잔하고 자신은 과거를 지불해 얻은 영원한 꿈속에서 사는 삶이 행복하기만 한 게 아니라 얼마나 지루한가 보여주는 「너무 아름다운 날」, 유령이 나오는 펜션에서 생을 끝내려고 했다가 죽은 동생을 만나는 「브라운 펜션」 은 인간의 욕망과 죽음을 보여준다. 모든 게 꿈이라면 괜찮을까. 죽음이 있기에 생은 고귀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 속에서도 살아갈 이유를 찾는지 모른다.


한 마디 툭 내던졌을 때 누구 하나 상처받지 않고 모두가 유쾌할 때 농담은 빛이 난다. 정용준은 그걸 아는 작가인 것 같다. 그래서 단지 농담에 불과한 이야기가 아닌 농담에 담긴 의미를 찾아내려 애쓰는 것 같기도 하다. 꿈을 꾸는 것 같기도 하고 꿈속을 헤매는 것 같기도 하지만 결국 꿈에서 깨어 현실을 마주해야 한다는 걸 알려주는 것 같다고 할까. 그래서 조금은 우울하고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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