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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의 덫
장하준 지음 / 부키 / 2004년 8월
평점 :
어느 기자가 장하준교수에게 당신은 좌파요 우파요 하고 물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거기에는 편을 두쪽으로 갈라서 서로 투쟁하기에 몰두했던 한국 사회의 현실이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당신이 내 적인지 한편인지 그것부터 알고 싶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한국에 최근 고민이 생겼다. 대통령과 집권당은 외형적으로 개혁주의를 표방하지만 실제 임명된 장관들이 펴고 있는 정책은 외교의 숭미주의와 경제의 신자유주의라는 기형적 모순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 삶에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개혁은 대부분 구호에 그치고 피부에 와닿는 것은 냉엄한 신자유주의가 내세우는 자유경쟁의 미덕이다. 더 나아가 자본의 무국적과 지고지선을 주장하는 논리에 별로 맞서는 사람은 없어보인다.
하지만 현실의 민초들은 불황과 청년실업 그리고 불투명해지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양극화는 더욱 진행되어 부동산을 가진자와 그렇지 못한자 사이에 깊은 골이 나온다. 수출은 호황이라고 하는데 내수는 극도로 침체된다. 자 무엇이 문제일까? 여러가지 답을 댈 수 있을 것이다. 기업 경쟁력의 핵을 만드는 기술력의 부족, 기초를 만드는 이공계의 빈약함 다시 이공계가 졸업도 채 안하고 사법고시와 의대편입에 메달리는 현실, 고교 졸업생의 질저하와 로또식 대입에 대한 대학의 불만, 유사 본고사 실시에 대한 비강남 학부형들의 불만.
문제는 계속 꼬리를 물고 나타난다. 하지만 정작 근본 문제는 좌든 우든 논리와 철학이 빈곤하다는 점이다. 집권당의 유력 국회의원인 유시민은 TV토론에 나와서 열린우리당은 좌우에서 동시에 공격받으니까 제대로 가는 것이라고 자기 변호한다. 왜 그러면 좌우에서 동시에 지지받는 정치를 펴지 못할까 고민해봤는지 묻고 싶다. 장교수가 책에 예로 든 스위스,스웨덴 등 여러 나라들이 한때 심각한 대립을 겪었지만 결국 타협으로 끌고갔던 좋은 경험을 놔두고 왜 끝까지 대립해서 싸우다가 외세에게 휘말린 임진왜란과 한일합방의 아픈 경험쪽으로 몰고 가는 것 같다는 느낌을 들게 만들까. 반면 지금 베스트셀러가 된 공병호의 10년후 한국을 보면 진단에 동조할 수 있지만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정책대안들에는 문제가 많다고 여겨진다. 공병호가 프리드먼의 렉서스와 올리브나무라는 신자유주의 전도서를 찬양했듯이 과거의 개발독재를 자유주의라고 표방하는 것은 한참 우습다. 도대체 언론 표현, 선거의 자유가 일체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를 감히 자유라는 가치를 내세워 포장한다는 기괴한 논리가 어떻게 성립될 것인가? 물론 박정희식 독재가 전제조건이 된다면 다시 고성장도 가능할지 모른다. 절대 다수의 국민이 말하고 제값 받고 자신의 노동력을 팔고 머리를 마음대로 기르고 저녁 12시 넘어서도 고성방가 할 수 있는 등 거의 모든 자유를 다 포기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내 눈에는 유시민이나 공병호 둘 다 좌우로 갈라섰지만 말만 잘할 따름이지 내용에서는 깊이와 가치를 보여줄 게 없는 헛똑똑이 들이다. 이런식으로 현재로서는 좌도 우도 제대로 현재 놓인 상황에 대한 해결책을 논리적으로 상대에게 설복시키지 못하고 있다.
반면 장교수의 이 책에서 주장하는 바는 훨씬 깊은 고민과 경험, 학문적 연구를 토대로 한국사회가 앞으로 나가야 할 바에 대한 깊은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예전의 정운영 박사가 보여준 촌철살인의 묘와 깊은 공부가 같이 보이는 책이다. 그의 글에 좌냐 우냐 하며 딱지를 붙이려는 태도는 잠시 접어두자. 어차피 좌든 우든 한국에서 만들어진 사상은 아니다. 멀리 유럽에서 수백년간 피터지게 싸우면서 논리를 다듬어 낸 이론에는 당연히 그들의 삶이 담겨 있을 것이다. 절대 피카소나 고흐의 그림에 한국인의 모습이 없듯이 남의 잘난 모습 아무리 떠받들어 봐야 거기에 우리의 고민을 명쾌하게 해결할 교조님의 말씀은 찾을 수 없다. 결국 문제는 여기 발붙이고 사는 사람들이 창조적 고민으로 해결책을 만들어 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장교수의 이 책은 전작 사다리 걷어차기에서 논리적으로 전개된 그의 선진국의 위선 파헤치기 노력과 병행되는 것이다. 핵심적 논리는 논문형식으로 된 사다리 걷어차기가 짜임새 있으나 실제 삶에서 대중들에게 쉽게 와닿는 것은 이 책에서 나온 기고문이나 대담이 더 좋을 듯 하다. 수년간 지속된 장교수의 비판이 위정자들에게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못했고 결국 문제가 점점 커져 이제 피하기 어려운 수준까지 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더욱 이 책이 오늘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