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 있는 젊은 작가와 매춘부의 사랑, 어려울 듯 했지만 만들어지고 시련을 겪고 갈라섰지만 다시 만나고 마지막에는 영원히 헤어지고 마는 그런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19세기 말 프랑스 파리를 배경으로 했는데 이쯤하면 비슷한 고전 하나를 떠올려야 하지 않을까? 뒤마 피스가 쓴 소설로 베르디의 오페라로 만들어졌던 <라트라비아타>가 그런 작품이다. 여주인공이 결핵으로 죽는다는 점, 돈 많은 귀족이 사랑을 잠시 낚아채는 점, 특히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연기력을 발휘하여 속여낸다는 점, 이를 복수하기 위해 남자가 돈다발을 공개적으로 여자에게 던지는 장면 등은 정말 <라트라비아타>의 핵심을 잘 살려냈다.

왜 여주인공들은 폐병으로 죽을까? 아쉽다는 생각을 가지는 사람들은 샤틴이 계속 내뱉는 돈에 대한 집착을 상기해야 한다. 진정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남주인공 크리스챤에게 계속 잘 곳 없어 길거리를 배회해보았냐는 내용의 질문을 한다. 정말 차가운 비오는 밤에 머물 곳 없어 거리에 머물러 본 사람들이라면 그 뼈저린 고통을 반복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지내다보면 정말 가슴 속 깊이 결핵이라는 가난한 자에 대한 저주가 내려오게 된다. 이들의 심정은 괴테의 유명한 문구인 “눈물 젖은 빵을 먹지 않아보고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라는 것과 맥이 통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자본주의 사회는 여러 가지 사물을 팔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 여자로서 가진 것은 빛나는 외모, 벗어나려는 것은 고통 같은 현실이라면 당연스럽게 자신이 가진 유일한 것을 활용하려고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잘난 뭇 귀족 양반들의 마음을 홀리는 밤의 요정이 나오게 된다.
참고로 택시라는 말이 탈것이라는 개념과 함께 여럿이 함께 사용한다는 개념을 합쳐서 매춘부에 대한 속어로 사용된다. 이 당시에는 합승마차라는 말이 같은 용도로 사용되었다.

공작이 던지는 왜 연극의 결말이 비현실적으로 나오게 되냐는 질문도 생각해볼만하다. 현실세계에서 대부분의 선택은 순수한 사랑보다 편하고 실리적인 쪽으로 만들어질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극은 반대의 결말을 담고 있다.
분명 현실은 냉엄하다. 각자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마련이다. 이런 현실의 세태를 잘 조사하고 정리한 잡지들은 <명문가 전담 웨딩플래너 등장>과 같은 제목의 리포트를 만들어내지만 극은 정반대다. 알라딘과 같이 공주의 사랑으로, 신데렐라처럼 왕자의 선택으로 인생을 바꾸듯이 현대적인 드라마에서도 검사의 사랑을 받는 간호사, 사장 후계자(차인표)의 사랑을 받는 여직원(신애라) 등 결혼을 매개로 한 출세에 대한 작품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원래 극이란 현실과 꼭 같을 필요는 없고 현실보다는 이상을 추구하게 된다. 그런 이상이 현실에서 잘 이루어지냐는 것에 대한 탐색은 오히려 많지 않다. 한편으로는 본인 혹은 주변에서 새로운 지위로 올라서고 싶다는 욕망의 대리만족이 그런 유형의 작품들을 많이 만들어낸다고 볼 수 있다.

현실을 지배하고 심지어 극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재정적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공작이라면 도대체 극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신경질이 나서 한번 소리치면 결말이 뒤바뀔 수 있는 하찮은 존재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래서 샤틴의 몸 비트는 연기 한번에 니멋대로 하세요 하고 놔둘 수 있는 관용도 베풀 수 있었다.
하지만 극장의 지배인이나 작가, 모든 배우의 소망대로 극은 위대한 것이다. 잘만들어진 극은 시대를 거울처럼 비추면서 아니 현실의 모습이 아니라 미래의 모습까지 담아서 보는 사람을 인도할 정도로 중요하게 된다. 오늘은 단역으로 무대 구석에서 노래하지만 내일은 당당히 주연으로 서서 영원히 찬란히 밤을 비추는 별의 위치까지 올라설수도 있다. 그 꿈을 안고 있기에 모두들 혼신의 힘을 바쳐서 극을 만들어낸다.
샤틴 또한 바로 그러한 극의 배우가 되고자 나아가서 스토리가 되어 영원히 남는 길을 택한 것 아닐까?

영상과 음악은 꽤 현대적이다. 특히 영상은 미래세계를 대상으로 한 매트릭스 스타일의 느낌을 주었다. 1900년 세기말의 파리의 모습을 다시 만들어내는 것 또한 철저하게 컴퓨터 그래픽에 의존하다 보니 굳이 사실적인 것에 집착하지 않았다. 음악쪽으로는 유명한 노래들을 짜집기해서 여기 저기 집어넣었는데 한편으로는 흥미를 끌어내려는 의도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작비의 절감이라는 경제적 관점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모던하다는 느낌을 주지만 창의적인 노력은 좀 부족하다고 생각되어 아쉬움이 남았다.

로트렉이라는 이름을 감히 등장시켰기에 많은 역할을 기대했지만 하나의 보조도구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참고로 로트렉은 귀족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 사고로 키가 자라지 않는 불구가 된 화가다. 대단한 천재였지만 당시의 화가라는 직업이 ‘쟁이’ 수준 이상의 대접을 받기 어려웠고 살롱이라는 전통적인 위계질서 보다는 자유롭고 독자적인 세계에 머물렀기에 당대에는 큰 지위를 누리지 못했다. 하지만 고호와는 서로를 인정해주는 사이여서 상대방의 초상화를 그려주었다. 어쨌든 이 영화속에는 로트렉의 그림이 단 한점도 나오지 않아서 아쉬운 점이 있었는데 로트렉의 화풍은 꽤 독특하다. 드가(Degas)가 춤추는 여인을 대상으로 빠른 동작을 묘사했는데 로트렉은 정말 아무도 그림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던 매춘부들을 소재로 많은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들의 화사한 복장과 화장술로 만들어진 얼굴을 화려한 색채로 그려냈다. 내가 본 중에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성병검사를 받기 위해 치마를 들고 아래를 다 드러낸 여인네들을 그린 작품이었다. 이제는 꽤 늙은 하지만 아직도 이 생활을 벗어나지는 못하는 그런 여인네들의 모습이 너무나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어서 보는 이들에게 씁쓸한 느낌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생각을 가득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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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뉴욕의 고급 아파트에서 시작한다. 잭 니콜슨은 작가로서 꽤 많은 독자와 명성을 얻고 있지만 주변 사람에게는 정말 상대하기 힘든 대단한 괴짜다. 같은 아파트의 바로 이웃집에서 키우는 강아지가 꼴보기 싫다고 쓰레기통에 집어 던져 버린다. 만약 현장을 들켰다면 아마 애완동물 학대죄로 고발을 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이런 적대시하는 감정은 굳이 동물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그가 움직이며 부딪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어떡하든 깊은 마음의 상처를 주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한걸음 나아가 문제는 그가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에 대해 전혀 이유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그가 고정적으로 발걸음을 멈추는 곳이 한 곳이 있다. 밥을 먹으러 가기 위해 들르게 되는 작은 식당이다. 이곳을 그가 찾는 이유는 메뉴가 좋아서도 아니고 식당의 분위기가 고급스러워서도 아니다. 딱 하나 우수가 깃든 미모의 헬렌 헌트가 웨이트리스로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그에게 그렇게도 중요한 것은 이 식당의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상대하기를 포기 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녀는 잭이 만났던 모든 웨이트리스 들 중에서 유일하게 그를 상대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또 하나의 주인공인 화가는 모델로 기용했던 길거리의 부랑자에게서 폭행을 당해서 걷기도 힘든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갑자기 강아지가 잭의 집으로 맡겨지게 된다. 처음에는 정말 싫어했지만 점점 이 녀석과 가까워지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보자마자 겁내고 도망다니던 녀석이 진짜 고기로 만들어진 먹이를 주자 점점 따르게 된다.
그러더니 정말 자신의 주인인 화가가 돌아왔는데도 그쪽으로 가지 않고 잭에게 온다. 무척이나 충격을 받았지만 진짜 고기와 유사품을 구별해내는 강아지의 본능을 탓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찬찬히 음미해 보면 잭과 세상과의 고리가 넓혀져 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강아지를 유혹하는 방식은 어떻게 보면 잭도 그런 일에 재미를 느껴간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다 여느 때처럼 식당에 찾아갔지만 헬렌은 없었다. 대신 서빙하는 약간 뚱뚱한 웨이트레스에게 ‘엘레판트 걸(코끼리 같은 여자)’라는 정말 모욕적인 말을 던졌다.
어쨌든 잭은 헬렌을 찾으러 가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가정과 이곳을 누르고 있는 짙은 그림자를 발견하게 된다.

잭 니콜슨이 부를 가졌지만 매우 거북하게 느껴지지만 헬렌은 가난하면서도 무척 친절하다. 그런 헬렌은 아들 하나를 데리고 홀로 살고 있다. 하지만 아들은 꽤 오랫동안 원인을 모르는 병에 걸려 있어서 이를 치료하기 위해 무척이나 고생하고 있었다. 한밤중에도 갑자기 발작을 하게 되어 곧 숨이 넘어갈 듯하니 힘든 것도 힘든 것이지만 도저히 새로운 사랑을 맞아 가정을 꾸릴 엄두가 나지 않는다.

얌전한 헬렌이지만 화를 낼 대목에서는 정말 불같이 화를 내었다. 잭이 “모든 인간은 죽는다. 나도 당신도 그리고 당신의 아들도”라고 늘 하던 투로 남의 속을 긁는 말을 했다. 어떻게 보면 모두가 거부할 수 없는 이치라고 생각되지만 그래도 항상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의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헬렌이라면 정말 듣고 싶지 않은 것이다.
정말 드물게도 잭은 자신의 말이 상대방에게 끼친 피해에 대해서 사과를 한다. 그렇다고 잭이이 대목에서 자존심의 굴복을 느낀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여인으로서는 약하고 가난하지만 어머니로서는 정말 용감한 존재 하나를 바로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서 집에 있던 헬렌은 불청객을 하나 맞게 된다. 자신의 아들을 보러 온 소아과 의사였다. 당연하지만 considerable amount라고 아주 정중하게 표현된 엄청난 비용이 발생했을 것이다. 이런 일을 꾸미고 감당해준 사람은 물론 잭이다.
이를 위해서 잭은 처음으로 사적인 부탁을 그의 출판사의 사장에게 하게 된다. 사장은 여자였고 그녀의 남편이 꽤 유명한 소아과 의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감히 개인왕진을 의뢰한 것이다. 유명해지면 모두 그렇지만 찾아가도 만나 뵙기 힘든터에 몸을 움직여달라는 것은 쉽지 않은 부탁이다.

어쨌든 헬렌의 아들의 병의 원인이 밝혀지게 된다. 사실은 죽어야만 하는 불치병이 아니고 그렇다고 찾기가 쉬운 것은 아닌 알레르기였다. 몇가지만 주의하면 정상인과 별다르지 않게 생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 기쁜 것은 계속적인 치료 비용도 그렇게 많이 나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심한 병도 아닌 것을 왜 이렇게 고생하며 살아야 했을까 하는 억울한 마음이 들게 된다.
이런 간단한 것을 왜 그동안 헬렌이 다닌 병원에서는 알지 못했을까 하는 의문이 나온다. 이유는 단 하나 헬렌이 가입했던 의료보험에서 그런 특이한 알레르기에 대한 테스트 비용을 보조해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의사들은 자신들의 방법만 고집했던 것이다.

여기서 정말 미국사회의 병폐를 잘 드러내주는 유명한 장면이 나온다.
“What a fucking shit bastards”
굳이 번역을 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심한 욕이다. 늘 주변에 친절하고 아들을 위해 헌신하는 아름다운 여성의 입에서 나오기는 더더욱 힘든 소리다.
여기에 대해 의사가 답하는 말이 더 걸작이다.
“그게 바로 HMO(미국 의료보험 조합)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참고로 미국의 의료보험 제도에 대해 설명을 하겠다. 미국에서는 유럽과 같은 사회보장제도가 매우 약하게 되어 있다. 아주 저소득층을 위한 부조제도는 있지만 이것의 기능은 극히 미약하고 기본적으로 자신의 책임으로 자신의 안전을 지켜야 한다. 각자가 사는 의료보험 상품에 따라서 받을 수 있는 서비스가 서로 다르게 된다. 결국 돈이 있는 사람이 더 많은 혜택을 받는 것이 당연하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러니 의료비가 마구 올라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결과적으로 돈이 정말로 많은 사람을 위한 아주 좋은 서비스도 발달되어 있지만 일반 대중을 위한 서비스는 지불해야 하는 비용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매우 소홀한 편이다. 이런식으로 상호부조 제도가 약한 이유로는 다민족국가라는 것과 프로테스탄티즘이 상대적으로 다른 종교보다 개인의 책무를 강하게 지운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어쨌든 이제 무척 가까워진 잭과 헤렌은 화가와 함께 셋이 함께 화가의 가족을 찾아 나서는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러면서 서로에 대해서 점점 많은 고백을 하게 된다. 이러한 대화를 통해 알게 된 것은 잭이나 청년 화가 둘 다 사실은 가족으로부터 벗어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화가는 어머니의 목욕 장면을 우연찮게 훔쳐보다가 아버지에게 들켜서 그야말로 늘씬 두들겨 맞고 집을 뛰쳐나왔다. 그리고 더 이상 가족을 찾지 않았다.
잭도 엇비슷한 경험으로 가족과 담을 쌓고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갔다. 그래서 그들은 정말로 정열을 안으로 쏟아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만들어냈지만 사회와는 여전히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 것이다.

이 두 사람 모두에게서 헬렌은 자신들에게 없는 가족에 대한 사랑을 갖고 있다. 없는 것이지만 아쉬워 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결국 영화는 상실한 낙원에 대한 동경과 여기에 이르는 구원의 길을 드러내어 보이게 된다.
두 사람은 모두 자기 극복을 해나가게 된다. 헬렌이라는 매개를 통해 자신들이 놓였던 정말 어려운 환경을 넘어서 이를 이겨내고 과거와 화해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열리는 삶은 또 다른 모습이 될 것이다.
그래서 그 둘은 헬렌을 그렇게 우상시하는 것이다.

결국 영화의 주제는 가족 사이의 관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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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콜렛 2004-11-18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기억으론 화가가 집을 나온 이유는 엄마의 누드화를 그렸기 때문인 것 같은데... 가물가물해서...

사마천 2004-11-20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초콜렛님 죄송. 기억으로 영화평을 쓰다보니 저에게 오류가 발생했네요. 다시 DVD를 확인하였더니 지적해주신바가 맞네요.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종종 부탁드립니다.
 

여러 문화가 뒤섞여 만들어진 작품이다. 우선 성격부터가 그렇다. 눈앞에서 현란하게 움직이는 칼의 놀림이 보인다는 점에서 무협영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무협영화와는 성격이 많이 다르다. 우선 선과 악이 분명치 않다는 점을 주의 깊게 의식해야 한다. 주인공들을 결코 선인과 악인으로 양단간에 나눌수는 없다. 모든 사람들의 관계는 서로 간에 교묘하게 얽혀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 상당수가 어떤 사람과 애정이라는 관계로 이어져있다.
심지어 어머니, 아버지를 모두 잃은 젊은 여인도 가슴에 담은 연심을 원수를 갚기 위해 준비하는 순간에까지도 표현한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애정이라는 관계로 연결되어 있지만 놀라운 것은 가까이 있던 사람들도 한때 열렬히 사랑했던 사람들도 서로를 잘 모른다는 것이다. 수련은 리무바이가 자신을 정말로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고 호는 용이 마음이 변했다는 것을 모르고 여우는 사랑하는 제자가 자신을 배반한지도 모르고 용은 정말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른다. 결국 확실한 것은 어디에도 없는 혼돈스러운 세계다.

가장 악에 근접한 ‘여우’의 경우부터 살펴보자.
살인을 서슴지 않고 저지른다는 면에서 그녀는 분명 악인이다. 그래서 리무바이가 복수로 갚아야 할 일생의 원수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도 실은 리무바이의 스승과 살을 섞을 정도로 매우 밀접한 사이였다. 욕망으로부터 초월해야 할 도가의 도사께서 여인과 관계를 가지는 것도 우습지만 정작 둘 사이가 잘 되었다면 리무바이가 하늘 같은 사모師母로 모셔야만 했을지도 모른다. 천하제일의 무사 리무바이가 수행하려는 복수의 과제라는 것도 실은 파렴치한 행동을 했던 파계한 도사를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된다면 좀 우습지 않은가?
여우를 위한 변명은 계속 이어질 수 있다. 강호를 누비며 악행을 저질렀던 여우에게도 아끼고 감쌌던 존재가 있다. 바로 그녀의 유일한 제자 용이다. 자신의 무예를 거의 전수했고 후계자로 삼아 노후의 동반자로 삼으려 했지만 어느 순간에 바로 그 제자가 자신을 배신한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의 소망만을 가졌던 사람이라면 바로 그 소망이 무너져내린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무척 어려웠을 것이다.

혼란스럽기는 리무바이 또한 마찬가지다. 무술과 도학에서 가장 완벽해 보이는 그도 실은 솔직하게 사랑 고백 하나 입밖으로 못 내어보낸 정말 ‘난 바보 같이 살았군요’라고 해야 할 사람이다.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서도 진기를 득도라는 고상한 목적에 집중하기 보다는 인간으로서사랑 고백을 하는데 쏟아야만했다.
이런 바보 같은 삶은 상대역인 수련 또한 마찬가지였다고 보여진다.
리무바이 또한 자신의 무술의 계승자로 용을 택하였지만 이루지 못하고 만다. 그가 그녀의 마음을 바로 잡기 위해 쏟아내었던 무수한 말들이 모두 쓸모 없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모두가 효과적이었다고 할 수도 없다. 용을 확실히 붙들 기회를 눈앞에서 놓치고 만 것도 여러 번이고 결국 자신이 바라던 것은 이루지 못한다.

여기에 비해 가장 단순해서 우리가 알기 쉬운 사람은 호다. 비록 마적떼의 두목으로 약탈을 일삼고 있지만 그는 아직도 소년의 순수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서역에서 용을 대하는 행동 하나 하나는 섬세함과 배려가 배어있다. 먼길을 마다않고 물을 길러오는 것이나 그 물에 데운 돌을 넣어 온도를 맞추어 주는 것 노래를 불러 자신의 위치를 드러내는 것 모두 지극한 정성이다.
하지만 그도 완전히 용을 얻지는 못했다. 북경에서 만난 용에게서 거절의 메시지를 받았지만 그의 솔직하고 담백한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왜 용은 호를 돌려보내려 했을까? 여자가 한 남자에게서 마음을 떠나게 되는 가장 쉬운 이유는 다른 남자가 생겼기 때문이다. 용이 결혼을 앞두었기에 마음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좀 상상력을 발휘해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답은 리무바이다.
이미 용은 변한 것이다. 그녀에게는 더 넓은 세계와 더 높은 목표가 아른거리며 나타난 것이다. 그 시작은 검으로부터 였지만 본질은 최고의 무사가 되는 것을 통해 얻어지는 끊임없는 그리고 결코 눌리지 않는 자유에 대한 열망이다.

딸자식을 사람으로도 취급하지 않는 중국적인 전통을 고려한다면 용에게 주어지는 삶은 너무나 뻔한 것이다. 용은 정말로 처절히 주어진 환경에서 일탈하며 알을 깨는 아픔이 어떠하던가 이를 감수할 의지를 갖고 있다.
용은 주인공들 중에서 가장 개성이 강한 사람이다. 빼앗긴 빗 하나를 찾기 위해서 무작정 말을 타고 마적떼의 뒤를 쫓으며 목숨을 걸었다. 우선 부모로부터 주어지는 결혼이라는 속박은 정말로 참지 못했다. 검에 대한 욕심 또한 최고를 위한 열망이다. 리무바이는 그런 소망을 이루게 해줄 수 있는 길이다. 그녀는 또한 리무바이가 자신에게 미묘한 마음이 없지 않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고 있었다.
이런 용의 개성을 안다면 수련과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이유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수련이야 말로 리무바이가 애정을 갖는 여인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그런 용에게 이제 그 목표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용은 무작정 따라가지만은 않는다. 어떨 때는 투정도 부리고 반항도 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향해 움직인다.
대나무밭의 실강이는 그런 심리를 묘하게 나타내는 장면들이다.
결국 리무바이가 던져버린 검을 찾으려다가 물에 빠지고 여우에 의해 건져져서 이야기는 틀어진다. 리무바이가 동굴로 찾으러 왔다가 미향에 중독된 용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진기를 끌어올려 그녀를 치료하려 한다. 이때 용이 던지는 “내가 여자로서 좋은 것인지 제자로서 자질이 좋은 것인지”라는 메시지를 담은 말은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가지는 미묘한 심리를 잘 드러내보인다.
리무바이가 직접 답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혹심이 아주 없다고도 할 수 없는 묘한 관계다. 하지만 이렇게 다정한 공간도 사실은 여우가 최후의 승부를 걸기 위해 만들어 놓은 함정이었다. 본래의 실력대로라면 리무바이를 꺽기 힘들었기에 용의 치료로 힘을 빼도록 유도한 것이다.
하지만 여우는 결국 리무바이의 칼에 거꾸러진다. 하지만 그녀가 마지막으로 쏟아내는 말들은 이루지 못한 소망에 대한 아쉬움과 앞길을 가로막은 스승을 배신하는 제자에 대한 서러움으로 가득차 있다.
이제 단 하나의 독침에 의해 리무바이는 사경에 빠지고 그를 구하기 위해 용도 혼신의 힘을 다해 말을 달리고 약을 만들어 가져온다. 하지만 모든 노력이 헛되게 되고 말았다. 리무바이는 마지막으로 수련을 사랑했다는 말을 남기고 가버리고 만다.

주인공 용에게 놓인 길을 보면 선으로도 악으로도 열려있다. 많은 가능성을 안고 있지만 결국 아무길로도 가지 못했다. 선과 악의 고수 모두에게서 그런 사랑과 기대를 한몸에 받은 용이야말로 가장 행복해야 할 것 같지만 그렇지도 못하다. 모든 것을 가진 듯해도 다시 아무것도 남지 않는 그런 불가사의한 인생의 법칙이 놓인 것이다.
수련의 마지막 충고에 따라 무당산을 방문한 용은 호를 만난다. 이제 호는 용의 육체를 다시 얻었지만 그 때 용의 표정을 보면 결코 마음을 완전히 내어준 것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아침 일찍 옆자리가 허전함을 느끼고 용을 찾아 호가 뛰어나가보니 그녀는 산과 산을 연결하는 높다란 다리에 서 있었다. 용은 호에게 묻는다. 아직도 병든 부모를 위해 산에서 뛰어내린 소년의 전설을 믿느냐고. 호는 순수하기에 그렇다고 답을 하고 서역으로 같이 돌아가자는 소망을 빈다.

용이 끝까지 바라던 것은 무엇일까?
최고가 된다는 것 그리고 완벽한 자기 컨트롤을 가진다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혼란스러운 ‘속세’를 넘어 존재하는 ‘도’라는 세계로 넘어가려 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거기에는 진리만이 가득해 더 이상 번민도 고통도 없는 것인지는 나는 잘 모르겠다.

하늘을 가르며 날라가는 용은 정말 소망을 얻었을까? 도사들이 모여 도를 닦는 무당산이다보니 정말로 신선이 되어 훨훨 날아다니게 된 것일까? 감독은 관객의 상상을 막지 않는 방향으로 화면을 보여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래서 나는 나대로 용이 소망을 얻은 것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어쨌든 이 작품은 어떤 액션 영화보다도 훨씬 관객의 가슴을 후련하게 해준다.
소재로 보검이 등장한다는 점은 주인공의 개성과 솜씨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처음에 전문가인 대장원의 주인들이 모여 들어 검을 보고 가치를 인정한다.

갸녀린 여인에게 떼로 덤비는 강호인들은 하나 같이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지만 그들의 행동은 결코 명예롭지도 못했고 실력 또한 미치지 못했다. 철비완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실은 옷속에 감춘 쇠판에 의지한 것이라면 정말 실소를 참지 못한다.
요즘 세상에도 여전히 나는 대단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실속을 까보면 이렇게 팔 주위에 쇳덩이를 안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속물들을 내힘으로 꺼꾸러트리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용과 같은 강호인이 활약한다면 알아보고 박수를 쳐줄 용기는 가지고 있다. 설혹 그런 용기는 없다고 하더라도 철비완이 팔뚝이 정말로 굵은지 아닌지도 모르며 고개 숙이는 그런 이류인간만 되지 않더라도 행복하겠다.

주변적인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
영화의 앞에 표국이라는 장소가 먼저 등장한다. 이것은 Fedex와 같은 사설 우체국이다. 수호지에 등장하는 것 같은 산적들을 비롯해 많은 위험이 있기에 귀한 물건을 안전하게 운송하려는 사람들이 이용했다. 그만큼 운송을 책임진 사람들은 무술에 능하고 목숨을 걸고 신용을 지킬 수 있는 책임감이 분명해야만 했다.
그리고 배경으로 담은 경관들이 너무 아름다워 넓게 펼쳐진 한폭의 동양화를 보는 느낌이었다. 중국의 산은 잘 보면 한국의 산과 다르게 꽤 높으면서도 봉우리가 완만하게 되어 있다.
구름을 내려보는 무당산의 모습은 정말로 한번 다다르고 싶다는 소망을 갖게 만든다.
서역의 풍경 또한 아름다웠다.
항상 관객의 눈을 위해 아름다운 장소를 탐색하느라 수고하는 제작자들에게 깊은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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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아리 속 이야기 수학 그림동화 4
안노 마사이치로 글, 안노 미츠마사 그림, 박정선 옮김, 김성기 감수 / 비룡소 / 2001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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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자기 속의 돛단배 하나가 출렁이는 이쁜 그림책이다.

곱셈을 주 내용으로 삼고 있다.

수학을 재미없어 하는 이유가 실생활과 연결짓지 못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이 책이 의도하는 바는 1부터 하나씩 커지는 숫자들의 연결이 나중에 얼마나 큰 수로 바뀌어가는지를 보여주려는 것 같다.

처음에는 공이나 다른 보조도구를 가지고 따라가 보았지만 잠시 뒤에 도저히 따라 갈 수 없다는 점을 알게 된다. 그래서 숫자 계산을 해보니 정말 정말 큰 수 까지 늘어가는 것을 보게되었다.

독자들도 직접 곱셈의 개념을 가리치고 계산을 해보면서 내용을 따라갈 수 있다면 한층 인상이 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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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미국에서 있었던 가장 훌륭한 대통령이 누구였나고 묻는 여론조사에서 존 F 케네디가 1위로 나왔다고 한다. 그는 누구보다 젊었고 항상 밝았고 또 용기가 남달랐다고 기억된다. 그 최후가 너무나 참혹했기에 아무도 감히 그를 쉽게 비난하지 못한다. 하지만 실제의 모습은 그 기억과 꼭 같지는 않다. 실제로 그의 건강은 무척 좋지 않아서 2차대전에 참가하려 했지만 신체검사에서 탈락될 정도였다. 그래도 기를 쓰고 빽도 써서 전쟁터로 나가서 꽤 위험한 정찰 함정 지휘 임무를 자원했다. 그 덕분에 배가 일본군함에 받혀버려서 죽을 뻔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그의 야망이 컸기 때문이다. 모두들 목숨 걸고 싸우러가는 마당에 건강을 핑계로 가만히 앉아 있던 사람이 국가의 지도자의 자리에 서겠다고 나서는 것은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케네디의 전쟁 경력이 무모했지 결코 화려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노블리제 오블리제의 정신에 맞는 자세는 분명 높이 사야 할 것이다.
사회적으로 볼 때 아일랜드 출신의 성공한 실업가의 아들로 태어나 카톨릭이라는 소수계의 한계를 고스란히 안아야 했다. 이러한 여러가지 어려움을 장벽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따라서 주저앉지도 않았다.

2000년의 부시와 고어의 대선에서 개표를 가지고 논란이 치열했을 때 공화당이 고어에게 패배를 인정하라며 거론했던 것이 바로 케네디와 닉슨의 선거였다. 그만큼 이 때의 선거전은 극히 미세한 차이로 승부가 갈렸다. 득표수로 보아도 차이가 전국적으로 보아도 1% 이하 였고 특히 승패가 달렸던 일리노이 주에서는 그 차이가 0.1%도 채 되지 않았다. 케네디가 백악관에서 밀려들어오는 격무에 투덜대자 케네디의 아버지는 “불평하려면 지금 그만두어도 된다. 아직도 공화당원들이 시카고에서 표를 세고 있다.”고 했다.
케네디의 매력은 어디 있었을까? 먼저 본인이 젊고 활력이 넘쳤으며 가정적으로 아름다운 아내와 예쁜 자식들에 둘러싸인 어메리칸 드림을 실현한 모습이었다. 밖으로도 항상 사람들을 만나기 좋아했다. 오픈카를 즐겨 타고 거리감 없이 행동한 것도 그런 성격 탓이 컸다. 멋들어진 연설을 했는데 문장뿐이 아니라 실제 행동에서도 많이 반영되었다.

케네디가 남긴 업적은 여럿 있지만 역시 가장 큰 것은 역시 제 3차 세계대전으로 인류를 이끌지 않은 점이었다.
그의 임기 중 대외적으로는 소련과의 대결이 가장 큰 문제였다. 특히 쿠바를 둘러싼 핵대결은 세계를 전쟁 직전으로 몰아넣을 정도로 큰 위기를 불러 일으켰는데 여기에 대한 진실은 <13일>이라는 영화속에서 잘 그려져 있다. 사건의 발발에서 해결까지 딱 13일이 걸렸다고 해서 영화의 제목으로 붙여졌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문제 해결을 위해 미국의 주요 파워엘리트들이 보인 태도는 다양했다. 전쟁을 주장하는 군부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계속 강조하는 케네디를 보고 군 장성들은 뒤에 돌아서서 비겁한 놈이라고 비난한다. 그럼에도 케네디는 문제를 평화적으로 풀어나가려는 입장을 고집한다. 결국 케네디의 친 동생이였던 로버트 케네디가 소련대사와 나눈 협상안은 소련이 쿠바를 미사일 전진기지로 만들지 않는 조건으로 미국은 터키에 배치한 핵무기를 철수하는 것이었다. 공식적인 협상이 아니라 대통령 개인의 약속이었지만 이는 지켜졌다. 케네디가 미국의 일반적인 보수강경 세력과는 다르다는 점을 인정한 소련 지도층의 태도와 케네디의 적극적 협상의지가 만들어낸 작품이다. 하지만 당시 미디어에는 이 조건을 보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외면적으로는 소련이 양보하고 케네디가 배짱 좋게 승리한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는 비밀스러운 거래에 의해 양쪽이 상호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었다.이를 미디어를 교묘하게 활용하면서 해결해낸 것에 케네디의 솜씨가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미사일 기술의 발전에 따라 대륙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대륙간 탄도탄(ICBM)의 개발과 잠수함에서 바로 지상으로 쏘아올리는 기술의 발전으로 기지로서의 쿠바나 터키가 꼭 절대적으로 중요하지는 않게 되어갔다. 그래도 무모한 대결 보다는 대화를 존중한 케네디의 의의는 계속 빛나게 남아있을 것이다.

국내적으로 가장 컸던 문제는 흑백통합이었다. 마르틴 루터 킹의 민권운동은 백인 중심의 사회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었고 여기에 대응하는 방식을 놓고 민주당, 공화당 등 정치권과 사회 세력들 모두가 많은 입장 차이를 보였다. 케네디의 입장은 간명하고 일관성이 있었다. “당신이 아프리칸 어메리칸 형제들을 대우할 때 당신이 대우받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라는 성경에 나오는 예수의 가르침을 인용한 이 메시지야말로 정말로 많은 것을 담고 있다.
알라배마에서는 주지사가 흑백차별 철폐를 끝까지 거부하였고 흑인학생들의 대학 등록도 연방군대의 파견을 통해서만 가능할 따름이었다. 이 장면은 <포레스트 검프>에 잘 묘사되어 있다. 어쨌든 이런 환경에서 아무리 위대한 지도자라고 하더라도 선의 하나만 가지고 일을 이루어낼 수는 없다.

덕분에 남부에서는 일대 반란이 일어난다. 백악관으로는 수많은 암살위협 편지가 날아들었다. 내용은 왜 우리를 니그로들과 같이 취급하느냐는 것이었다. 특히 케네디가 암살당한 텍사스의 달라스가 속한 이른바 deep south라고 불리우는 남부 지역의 반발은 심했다.
이런 반발로 실제 케네디의 정책은 의회에서 번번히 부결되기 일수였다. 그럼 정말 변화는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가? 결론은 케네디가 죽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더말할나위 없이 비극적으로 죽어서 거대한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이 죽음을 다룬 올리버 스톤의 만큼 논란이 많았던 영화는 별로 없다. 역사학자들은 줄곧 이 영화가 가지는 허구성에 대해서 실랄한 비판을 가했다. 가령 검사 존 게리슨이 영화에서만큼 훌륭한 인물도 아니었고 그가 워싱턴에서 만나서 케네디가 암살되었다는 중요한 정보를 들었다는 정보요원 또한 실존하지 않는다는 점 등등 영화의 논리의 중요 기반이 되는 팩트들의 취약성이 주로 공격받았다. 하지만 이에 대한 스톤의 태도 또한 일관되었다. 허구적인 부분은 영화라는 매체가 다큐멘타리와 같은 기록물이 아니기 때문에 묘사의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해주기를 바랄 따름이고 정작 중요한 메시지에 대해 보다 주목해달라고 한다.
케네디가 계속 남아 있었다면 베트남전쟁에 보다 더 개입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스톤의 주장을 놓고 특히 논란이 치열했다.
그 핵심은 케네디가 베트남 참전을 축소해나가는 법안에 사인하려고 했는데 이것이 냉전세력의 반발을 사서 암살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반면 존슨은 집권하자 바로 전쟁확대 조치에 사인했고 이것이 결국 비극적 결말로 치닫게되었다는 것이다. 우선 스톤은 존슨에대해 닉슨 만큼이나 가혹하게 평가한다. 특히 베트남전과 관련해서 존슨의 역할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았다. 이를 둘러싸고 역사학자들의 엄청난 반박이 있었지만 스톤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스톤의 비판은 계속 이어져서 존슨이 경제를 망치고 평화를 지연시켰는데 잘했다고 인정해줄 수 있는 점은 딱 하나 전임대통령의 유지에 따라 인권법안들을 통과시킨 것 뿐이라고 못박는다. 역사학자들의 반박에도 불구하고 일반 학생들은 스톤의 견해를 믿는다고 한다. 언제쯤 제대로 진실이 밝혀질지는 아직 모른다.

케네디가 살았으면 베트남전쟁이 없었을 것이다? 이런 주장도 무리지만 아주 불가능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어쨌든 케네디가 쿠바 미사일 사태에서 보듯이 보다 평화적인 방법으로 세계를 이끌어갔을 것은 분명하다.
케네디 박물관에서 들었던 케네디의 죽음을 회고하는 어느 역사학자의 멘트가 인상 깊었다. “일찍 죽게 될 운명을 타고난 사람에게 하늘은 소명을 준다는 것이다” 어쩌면 살아서 케네디가 해낼 수 없던 많은 일들이 그가 죽었기에 이루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결과적으로 케네디의 죽음으로 우연찮게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존슨이지만 그의 역할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우선 긍정적인 면은 케네디가 시도했지만 이루어내지는 못했던 수많은 개혁입법들을 케네디의 의도에 맞게 처리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당시 의회가 젊은 대통령의 비극적 죽음에 미안한 느낌을 가지고 있어서 유언으로 생각해서 원뜻을 최대한 존중해주자는 분위기였기에 가능했다. 어쨌든 수많은 법률들이 통과되었고 실현되었다. 존슨 박물관의 한쪽 벽면은 그렇게 통과한 법률들의 동판들로 가득 채워져있다. 정말 벽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의 분량이라면 가히 혁명적인 변화였다. 아마 케네디 본인이 살았다면 절대로 다 이룰 수 없었을 것이 확실하다.
케네디가 죽고 조금 지나 루터 킹도 암살당했는데 이에 반발해 미국 60개 도시에서 흑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영상이 나온다. 법안이 제때 통과되지 못했다면 미국사회는 계속 이어지는 갈등속에 살았을 것이다.

사후에 백인들이 가졌던 거부감이 결코 작지 않았던 것도 한번 더 짚어 보아야 한다. 먼저 미국이라는 사회의 배경을 간략히 살펴 보면서 이해해야 한다. 남북전쟁의 결과는 남부와 북부간의 깊은 골을 만들었는데 남부에서 전쟁 당시 집권당이 민주당이었기에 이들은 계속 지지세력을 바꾸지 않았다. 북부는 공화당 남부 민주당이라는 정치 지도는 수십년간 계속 되었는데 케네디 이후의 민주당의 흑인 포용정책으로 본격적으로 바뀌게 된다. 심지어 2000년 미국 선거에서 고어가 자기 고향 테네시, 클린턴의 고향 아칸소 모두에서 이기지 못했던 것에서도 알 수있다.

케네디의 삶을 다시 되집어 보면 역시 한마디로 소명을 받았고 이를 위해 죽을 때까지 헌신했던 지도자로 감히 정의해본다. 그런 삶이 비록 짧았지만 그 끝이 장대했기에 더욱 잊을 수 없는 강렬한 빛으로 역사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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