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 있는 젊은 작가와 매춘부의 사랑, 어려울 듯 했지만 만들어지고 시련을 겪고 갈라섰지만 다시 만나고 마지막에는 영원히 헤어지고 마는 그런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19세기 말 프랑스 파리를 배경으로 했는데 이쯤하면 비슷한 고전 하나를 떠올려야 하지 않을까? 뒤마 피스가 쓴 소설로 베르디의 오페라로 만들어졌던 <라트라비아타>가 그런 작품이다. 여주인공이 결핵으로 죽는다는 점, 돈 많은 귀족이 사랑을 잠시 낚아채는 점, 특히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연기력을 발휘하여 속여낸다는 점, 이를 복수하기 위해 남자가 돈다발을 공개적으로 여자에게 던지는 장면 등은 정말 <라트라비아타>의 핵심을 잘 살려냈다.
왜 여주인공들은 폐병으로 죽을까? 아쉽다는 생각을 가지는 사람들은 샤틴이 계속 내뱉는 돈에 대한 집착을 상기해야 한다. 진정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남주인공 크리스챤에게 계속 잘 곳 없어 길거리를 배회해보았냐는 내용의 질문을 한다. 정말 차가운 비오는 밤에 머물 곳 없어 거리에 머물러 본 사람들이라면 그 뼈저린 고통을 반복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지내다보면 정말 가슴 속 깊이 결핵이라는 가난한 자에 대한 저주가 내려오게 된다. 이들의 심정은 괴테의 유명한 문구인 “눈물 젖은 빵을 먹지 않아보고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라는 것과 맥이 통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자본주의 사회는 여러 가지 사물을 팔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 여자로서 가진 것은 빛나는 외모, 벗어나려는 것은 고통 같은 현실이라면 당연스럽게 자신이 가진 유일한 것을 활용하려고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잘난 뭇 귀족 양반들의 마음을 홀리는 밤의 요정이 나오게 된다.
참고로 택시라는 말이 탈것이라는 개념과 함께 여럿이 함께 사용한다는 개념을 합쳐서 매춘부에 대한 속어로 사용된다. 이 당시에는 합승마차라는 말이 같은 용도로 사용되었다.
공작이 던지는 왜 연극의 결말이 비현실적으로 나오게 되냐는 질문도 생각해볼만하다. 현실세계에서 대부분의 선택은 순수한 사랑보다 편하고 실리적인 쪽으로 만들어질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극은 반대의 결말을 담고 있다.
분명 현실은 냉엄하다. 각자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마련이다. 이런 현실의 세태를 잘 조사하고 정리한 잡지들은 <명문가 전담 웨딩플래너 등장>과 같은 제목의 리포트를 만들어내지만 극은 정반대다. 알라딘과 같이 공주의 사랑으로, 신데렐라처럼 왕자의 선택으로 인생을 바꾸듯이 현대적인 드라마에서도 검사의 사랑을 받는 간호사, 사장 후계자(차인표)의 사랑을 받는 여직원(신애라) 등 결혼을 매개로 한 출세에 대한 작품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원래 극이란 현실과 꼭 같을 필요는 없고 현실보다는 이상을 추구하게 된다. 그런 이상이 현실에서 잘 이루어지냐는 것에 대한 탐색은 오히려 많지 않다. 한편으로는 본인 혹은 주변에서 새로운 지위로 올라서고 싶다는 욕망의 대리만족이 그런 유형의 작품들을 많이 만들어낸다고 볼 수 있다.
현실을 지배하고 심지어 극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재정적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공작이라면 도대체 극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신경질이 나서 한번 소리치면 결말이 뒤바뀔 수 있는 하찮은 존재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래서 샤틴의 몸 비트는 연기 한번에 니멋대로 하세요 하고 놔둘 수 있는 관용도 베풀 수 있었다.
하지만 극장의 지배인이나 작가, 모든 배우의 소망대로 극은 위대한 것이다. 잘만들어진 극은 시대를 거울처럼 비추면서 아니 현실의 모습이 아니라 미래의 모습까지 담아서 보는 사람을 인도할 정도로 중요하게 된다. 오늘은 단역으로 무대 구석에서 노래하지만 내일은 당당히 주연으로 서서 영원히 찬란히 밤을 비추는 별의 위치까지 올라설수도 있다. 그 꿈을 안고 있기에 모두들 혼신의 힘을 바쳐서 극을 만들어낸다.
샤틴 또한 바로 그러한 극의 배우가 되고자 나아가서 스토리가 되어 영원히 남는 길을 택한 것 아닐까?
영상과 음악은 꽤 현대적이다. 특히 영상은 미래세계를 대상으로 한 매트릭스 스타일의 느낌을 주었다. 1900년 세기말의 파리의 모습을 다시 만들어내는 것 또한 철저하게 컴퓨터 그래픽에 의존하다 보니 굳이 사실적인 것에 집착하지 않았다. 음악쪽으로는 유명한 노래들을 짜집기해서 여기 저기 집어넣었는데 한편으로는 흥미를 끌어내려는 의도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작비의 절감이라는 경제적 관점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모던하다는 느낌을 주지만 창의적인 노력은 좀 부족하다고 생각되어 아쉬움이 남았다.
로트렉이라는 이름을 감히 등장시켰기에 많은 역할을 기대했지만 하나의 보조도구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참고로 로트렉은 귀족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 사고로 키가 자라지 않는 불구가 된 화가다. 대단한 천재였지만 당시의 화가라는 직업이 ‘쟁이’ 수준 이상의 대접을 받기 어려웠고 살롱이라는 전통적인 위계질서 보다는 자유롭고 독자적인 세계에 머물렀기에 당대에는 큰 지위를 누리지 못했다. 하지만 고호와는 서로를 인정해주는 사이여서 상대방의 초상화를 그려주었다. 어쨌든 이 영화속에는 로트렉의 그림이 단 한점도 나오지 않아서 아쉬운 점이 있었는데 로트렉의 화풍은 꽤 독특하다. 드가(Degas)가 춤추는 여인을 대상으로 빠른 동작을 묘사했는데 로트렉은 정말 아무도 그림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던 매춘부들을 소재로 많은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들의 화사한 복장과 화장술로 만들어진 얼굴을 화려한 색채로 그려냈다. 내가 본 중에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성병검사를 받기 위해 치마를 들고 아래를 다 드러낸 여인네들을 그린 작품이었다. 이제는 꽤 늙은 하지만 아직도 이 생활을 벗어나지는 못하는 그런 여인네들의 모습이 너무나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어서 보는 이들에게 씁쓸한 느낌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생각을 가득 안겨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