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대공황을 겪던 1935년이라는 시기에 루이지애나에 있는 중죄인을 수용하는 감옥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다. 바깥에서 천천히 접근하는 카메라의 시선은 한 장소에 와서 멈춘다. 바로 사형 집행 직전의 시간을 보내게 되는 E지역이다. 톰 행크스가 책임자로 일하고 있는 이 곳에 무척 특이한 죄수 하나가 도착한다. 다른 사람 보다 최소한 머리 하나는 크고 팔뚝의 굵기는 보통 사람의 허벅지만한 그런 대단한 거구의 흑인이다. 이 사람의 죄목은 소녀 둘을 성폭행하고 살해한 것이었다.
여기서 감옥 안의 사람들을 약간 세심하게 보면 한가지 문제점이 눈에 들어온다. 사형수들이 대부분이 미국 사회의 비주류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인디언, 흑인, 프랑스인이 각기 한명씩 이다. 인종의 비율로만 보아도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이탈리아 출신 이민자가 사회적 편견에 의해 억울하게 사형수로 몰렸다가 집행까지 된 적이 있었다. 그 반향으로 사형제도에 대한 폐지운동과 여론이 크게 일어났었다. (실제로 2000년 시점에 나온 신문보도에도 사형수의 3/4이 소수민족 출신이라는 내용이 있다.) 어쨌든 무척 온순하게 죽음까지 맞이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왜 굳이 이 사회는 이런 사람들을 사형수로 만들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들을 가질 수 있다.
시꺼멓고 덩치가 큰 흑인 존 커피를 모두들 다시 보게 되는 계기는 우연치 않게 다가온다.정신병 환자로 가장한 사형수가 방심을 틈타 벌인 난동이 벌어졌는데 커피는 그 사이 요도염으로 고통 받던 톰을 치유해준다.
자신에게 일어난 기적에 어안이 벙벙했던 톰은 정말 이 사람이 범인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며 재판을 담당했던 변호사에게 찾아가본다. 이 변호사가 하는 말을 들어 보면 흑인은 곧 개와 동일시되는 존재다. 항상 경계해야 하고 살펴야 하는 특별한 존재라는 것이다. 물론 그는 커피가 범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조금의 의심이 없다. 여러가지 가능성이 있었을 터인데 말이다. 영화는 굳이 커피가 겪었던 고초에 대해 자세히 다루려 하지는 않는다. 그 보다는 좀 다른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한다.
잠깐 배경 설명을 좀 붙이자면 루이지애나 지역은 전형적인 남부 지방이다. 남북전쟁과 노예해방이 있었지만 백인 농장주의 후예들과 흑인 노예들의 후예들이 화목하게 살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60년대 흑인 민권 운동이 있기 전까지 아니 그 이후에도 대학교육, 군복무 심지어는 버스에 타서 같은 자리에 앉는 것 까지도 흑과 백은 엄격히 구별 될 정도였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보자. 이 영화는 당시의 현실을 무서울 정도로 리얼하게 그려내 간다. 특히 사형수가 감방에서 전기의자까지 앉고 충격으로 사망해 실려나가는 모든 장면을 찬찬히 결코 가감 없이 그려내 간다. 영화에는 모두 3번의 사형집행이 나온다. 처음 그것은 매우 담담하게 진행된다. 사형수에게 최후의 면회가 있고 그 사이를 이용해서 대역을 놓고 예행 연습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다음날은 피해자 가족까지 포함해서 의자를 꽉 채운 참관인들 앞에서 실전이 있게 된다. 당시는 피해자의 가족이 참관하는 것이 하나의 관례였다. 하나가 마무리되면 그 다음이 이어지게 된다. 두 번째 희생자는 프랑스인이었다. 성모상을 벽에 걸어놓은 그는 정말 진실로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고 있다. 커피가 톰을 들어올렸을 때도 그는 밖의 간수들에게 고함을 외칠 정도로 자신의 죄와 그것을 벌하기 위한 집행자들의 공식적인 행위는 구별해낸다. 그에게도 하나의 기적이 있었다. 다름 아닌 작은 쥐였다. 우연히 감방에 찾아온 이 쥐에게 먹이를 주고 재주를 가르키면서 그는 하나의 생명을 사랑하게 되고 분명 각자가 존재해야 할 필요성과 이유에 대해 느꼈을 것이다. 하나의 생명이 죽음의 고통에 놓였을 때 이를 안타까워 하고 되살리기 위해 들이는 정성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그런 사람이 왜 다른 사람의 목숨을 해쳤을까 하는 물음도 가지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영화가 관객을 유도해가는 방법이다. 다른 생명의 가치와 중요성에 공감하는 것이 곧 자신의 존재 의의를 깨닫고 나아가 자연의 질서와 조물주의 섭리에 경외를 표하는 것 까지 이어지게 된다.
톰 행크스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성선설을 믿는다. 처음 커피에 의해 치유를 받고 나서 톰은 커피의 전과 기록이 있었는지를 묻는다. 죄를 저지르는 성향은 계속 발전하게 되므로 무슨 전조가 있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또한 성선설이 전제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인으로서의 특색도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결코 악인에게 주었을리는 없다는 소박한 믿음도 보인다.
톰을 따르는 대부분의 간수들도 엇비슷한 생각들이다. 사형수를 보면서 죄의 값을 치루었다면 그도 보통사람과 똑 같이 대우받아야 한다는 자세들 또한 매우 인도적이다. 사실 역사적으로 사형제도는 무수하게 많은 무고한 희생자들을 만들어내었다. 소크라테스(신을 모독했다는 죄명으로 사형), 예수, 잔다르크, 사보나롤라 등 종교재판의 희생자들이 가장 먼저 떠오르고 그 다음에 이어지는 무수한 혁명가와 정치범들을 볼 수 있다. 그렇게 이름을 내지 않았더라도 또 얼마나 많은 억울한 죽음들이 있었는지는 더더욱 모른다.
어쨌든 톰과 같이 선의 입장에 선 사람이 있다면 반대도 있어야 한다. 그런 악역으로 나오는 사람은 교도관으로는 신참이지만 주지사 부인의 가까운 인척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배경을 믿고 설치는 사람만큼 허약한 존재도 없다.
이 친구가 굳이 힘든 사형수 감방의 교도관으로 머물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 직접 사형을 집행해보고 싶다는 욕망이었다. 간수장인 톰과의 타협으로 프랑스인에 대한 사형을 직접 집행하게 된다. 이때 개인적인 보복심에 전기 전달을 빨리하기 위해 머리에 얹는 수건에 물을 적셔야 하는 과정을 빼먹어 버린다. 결과적으로 고압의 전류를 쉬지않고 몸에 흘렸지만 숨이 채 끊어지지 않는 차마 눈으로 지켜보기 어려운 매우 비참한 사태가 발생하였다. 과연 죄를 뉘우친 사람에게 이렇게도 잔혹하게 벌을 더 내려야 하는지에 대해서 감독은 모두에게 물어간다.
그 고통은 고스란히 커피에게 전달이 되었고 남의 고통까지 모두 끌어안아 함께 아픔을 느끼는 커피로서는 정말 참기 힘든 사태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벌을 내리기로 작정하였다. 교도소장의 부인에게서 빼낸 독을 이 악당 친구의 입에 부어넣어 버린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참회를 모르는 인간에게 내리는 벌이었다.
존 커피의 마지막 말은 “저들이 사랑을 매개로 죽음을 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의 삶과 죽음은 결국 예수의 그것을 고스란히 상징한다. 예수는 땅에 내려와 고통 받는 자들을 위해 사랑이야기를 쉬지 않고 하다가 그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 인간들에 의해 죽음을 맞게 되었다. 그가 정말 신의 아들인가 아닌가의 문제를 잠시 접어둔다고 해도 그는 많은 기적을 행했다. 소경을 눈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어서게 하고 심지어 죽은자를 되살리게 까지 하는 그런 대단한 기적들을 행하였다. 십자가에 못박혀서도 아마 또 다른 이적을 보여서 내려올 수도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죽음을 보다 선선히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의미를 주려고 했다.
존 커피에게도 오랜 삶은 또 하나의 고통이었다. 그런 삶을 보면서도 톰으로서는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고기요리에 집에서 구운 빵 한걸음 나아가 영화를 보여준 것은 재치였고 이 영화의 맨앞과 연결시키는 고리로서의 기능도 나타났다.
영화에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기법으로 반복이 가끔 사용되었다. 전기의자에 앉은 사형수에게 당신은 명망 있는 판사에게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말을 해주는 절차가 있다. 영화에 나오는 세번의 사형 집행 장면 동안 이 말은 세번 반복된다. 처음 이 말은 사형수를 상대로 사회를 대표해서 전달하는 메시지였다. 하지만 마지막에 나오는 이 말은 관객들이 억울한 사람에게 죽음을 집행하도록 만드는 법과 제도의 불공정함을 조롱하도록 사용된다. 명망 있는 판사도 하나의 인간일 뿐이다.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인간이 또 다른 인간을 심판한다는 것에 대한 강한 회의가 영화에는 짙게 깔려있는 것이다.
불의를 보고 가만히 있었다면 그 또한 방관자로서의 죄의식을 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당대의 톰은 선량했지만 한명의 소시민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던지는 후회의 말과 생의 잔잔한 여운은 사실 고스란히 현대인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나처럼 살지는 말아라. 분명히 당신도 주변에서 억울한 사람이 죄를 받는 것을 볼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멈추어 눈을 돌린다면 당신 또한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예수를 죽이는 유태인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사회는 꾸준히 발전한다. 발 맞추어 감옥도 덩달아 발전하게 된다. <양들의 침묵>을 보면 손을 뻗는 일이 없도록 특수유리가 간수와 죄수 사이에 놓여지게 된다. 더 중요한 변화는 법과 제도의 변화다. 무엇보다 배심원의 자리가 모든 인종에게 개방되었고 덕분에 인종에 대한 차별이 많이 개선된 편이다.
아마 지금 같은 유형의 상황에 놓인다면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해결을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사형수의 경우 최종적으로 청원을 주지사에게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억울함에 대해 신문, 방송과 같은 매체를 통해 여론의 반향을 일으킬 수 있도록 만들 수도 있다. <데드 맨 워킹>은 그런 노력의 하나를 그려낸 작품이다.
자 여기서 영화의 의미를 되새겨 보자. 이런 식의 사회 변화가 그냥 아무런 자극과 노력 없이 주어졌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너무 안이한 자세다.
<그린 마일>을 보고 어떤 이는 잔인한 장면들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것을 비난할 수도 있다. 영화가 사회에서 가지는 의미는 결코 보고 웃고 느끼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미국 사회는 법률 자치의 전통이 있어서 아주 기초적인 조건만 된다면 누구도 배심원이 될 수 있다.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은 사람이 좀 더 현명한 판단으로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않으려 노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영화는 먼저 보다 냉정히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어야 한다. 다음으로 가져야 할 이상형의 모습을 영화들에서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충족시키는 최루성 멜로물이야 만들기도 쉽고 돈벌기도 쉬울지도 모른다. 누가 사람이 죽어나가고 주인공도 죽어버리는 그런 찝찝하고 따분한 영화를 보고 기분이 좋을까? 당연히 감독도 헐리우드의 자본시스템도 되도록 피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 <그린 마일>을 비롯해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일급 살인>과 같은 일련의 영화들은 가장 부끄러운 현실에 대해 결코 덮어버리려 하지 않고 도전해나간다. 물론 격렬한 찬반이 있고 심지어 만든 사람에게 죽음의 위협까지 가해지지만 그들도 결코 호락호락 물러서지는 않는다.
실제 지금도 미국사회는 끊임없이 사형폐지 운동이 일어나고 있고 특히 인종적으로 차별적인 판결에 대해서 끊임없이 반성하고 도전하려는 노력들이 있다.
문화의 중요한 기능 하나가 바로 이와 같은 반성反省적 태도를 일으키는 것이다. 스티븐 킹의 작품은 다른 베스트 셀러 작가들과 다른 격조가 있는 것은 이런 사회적 교육의 기능을 잘 담고 있기 때문이다. 올리버 스톤의 작품 또한 이런 성찰과 교육의 기능들을 잘 수행한다.
이들을 어떻게 톰 클랜시가 쓰고 해리슨 포드가 출연하는 CIA를 예찬하는 작품들이나 007 시리즈에 비교할 수 있을까?
그냥 지나가는 이야기로 사족을 좀 달아보자. 2000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부시의 경우 텍사스의 주지사였다. 남부에 속하는 주들에서는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데 여기서 사건이 하나 발생했다. 어느 여자 사형수가 감옥에서 정말로 개심을 해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주변 사람들을 무수히 감화시켰다. 그래서 그녀를 감형 시켜 달라는 청원이 빗발쳤지만 부시는 완강히 거부했었다. 심지어 많은 기독교인들이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메시지를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본인은 나도 기도를 통해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마지막을 결정짓는 사인을 했다. 물론 결과는 영화에서 나오는 식의 모습이었지만 그 여자 사형수는 결코 남을 원망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우리는 지금 보다 한걸음을 더 나아가야 한다. 중요한 것은 남을 보고 감탄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되돌아 보고 변화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왜 한국에는 그런 주제들을 다루는 작품이 없을까 하고 물어야 한다. 한가지 이유는 검열이다. 하지만 그와함께 관객의 태도에서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가끔 한국 사람들이 금속 활자를 세계 최초로 발견했다고 자랑하는 것을 보면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기 어렵다. 사건에 있어 중요한 것은 날짜가 아니라 사회적 의미다. 기독교 사회가 활자기술의 개선을 통해 출판된 책들을 가지고 종교혁명을 불러일으켰지만 한국사회에서 그런 변화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의료와 농사에 도움이 되는 책을 찍어내기는 했지만 주자학에서 벗어나 양명학을 배웠다고 대학자 박제가를 감옥에서 죽게 만드는 사회였을 뿐이다.
하지만 아직도 한국사회에서는 사회적 주제에 대해 개인들이 담론을 형성하고 이를 행동을 통해 실현하려는 분위기가 너무 미약하다. 유서대필 사건의 한 주역이었던 검사가 대법원 판사로 선임되는 과정에서 제청하는 대법원장, 임명하는 대통령 다시 이를 추인하는 국회의원들까지 아무도 인권이라는 기준을 엄밀히 놓고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특히 저들 기독교 사회들과 비교해서는 말이다. 이래 놓고도 아시아에서도 민주주의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며 노벨 평화상을 바라는 것은 분명 무리다.
이런 현실에서 한국 영화는 <박하사탕>이 보여주는 은유적인 기법의 묘사도 필요하지만 올리버 스톤의 와 같이 보다 더 직설적으로 도전해가는 작품들이 필요한 시기다.
정상을 향해 돌을 굴려보지만 매번 떨어져버리고 그래도 다시 또 굴리기를 시작하는 시지프스의 의지를 한국의 영화인들과 관객에게 기대해본다. 그리고 그들이 수많은 시련을 겪으면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고향까지 돌아오게 되는 오딧세이처럼 지혜와 행운을 함께 가졌으면 하는 바람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