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천하대란
1.1 농민반란
삼국지의 인물들이 등장하던 시점에서 후한왕조는 이미 천하의 통제권을 거의 잃어가고 있는 상태였다. 중앙에서는 나이 어린 황제가 연이어 등장했다. 최고권력자가 제구실을 못하면 흔히 황후가 나서서 섭정이라는 이름의 신탁통치를 수행한다. 당연히 이를 이용해서 권력에 간섭하는 황후의 친척들이 활개를 치고 여기에 맞서는 환관들이 한무리가 되어 양자간의 권력다툼이 발생한다. 치고 받고 싸우다 보면 제대로 된 정치는 저만치 뒤로 밀리게 된다. 실제 당대의 지방에서는 점점 커져가는 호족들의 압박에 농민들이 몰리면서 집단으로 모여 저항하게 되었다. 이른바 황건적의 난으로 일컬어지는 대규모 민란은 향촌의 질서와 생산기반을 완전히 흔들기 시작했다. 반란은 한번에 끝나지 않았고 변방에서는 위나라의 정권이 안정될 때까지 수십년간 다양한 형태로 지속되었다.
황건적의 수괴라는 장각도 알고보면 상호간의 부조를 강조하는 종교집단을 만들어 귀족 중심의 사회로부터 압박을 받아 몰린 농민들에게 의지할 정신적, 물질적 지주 역할을 하였다. 이론적으로는 도가 등의 영향을 받았고 점차 후대에 보다 고차원적인 불교를 수용해서 정신세계를 안정시키는 중간다리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장각이 앞장서고 농민들이 모여서 규모는 많았지만 제대로 조직화되지 못한 민초들이 많아서 실제 전투력은 생각만큼 강하지 못했다. 덕분에 여러 지역에서 호응을 받았던 대규모의 민란이었지만 대부분 손쉽게 진압되고 만다. 정작 중요한 영향은 반란 그 자체보다는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각지의 호족들이 자발적으로 무기를 들고 사람을 모아 일어났던 점에 있었다.
의병이라면 좋은 뜻으로 붙여준 이름이지만 냉철하게 보면 한번 무기를 들고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으며 자율적으로 움직여 본 이 호족들이야말로 사회가 다시 안정되는데 가장 위험한 존재가 된다. 그래서 큰 전쟁을 치르고 나면 공신들을 숙청하려고 하는 것인데 조선왕조만 보아도 태종이 공신들을 숙청한 점이나 임진란 이후 의병장과 승병들을 홀대한 점이 그런 예다. 명장 이순신 또한 그런 와중에서 자신의 미래를 예견하여 죽음을 선택하였다는 해석이 있을 정도다.
어쨌든 황건의 난에 의해 농민들은 언제든지 도적이 될 수 있고 도적이 다시 농민이 되거나 군인이 될 수 있는 그런 가변적인 상황이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