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유비의 서촉정복
이제 또 하나의 영웅 유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적벽대전 이전으로 보면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유비가 보인 활약은 별로 없다. 대부분 전쟁에서 지고 도망다니는 모양이 별로 아름답지 않았다. 여포에게 서주를 잃을 때도 가족조차 지키지 못했는데 결국 아들을 하나 밖에 얻지 못한 것도 이런 방랑의 결과다. 적어도 군사적으로는 유비가 탁월한 장수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전적을 쭉 살펴보면 유비는 이긴 것보다 진쪽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특히 조조군과의 싸움에서는 거의 대부분 패배를 겪었다. 하지만 유비는 좌절하지 않고 꾸준히 성장해가는 인물이었다. 어려울 때 마다 공손찬, 원소, 여포, 조조에게서 도움을 받았다. 누가 보면 박쥐라고 하겠지만 삼국지 전반부에 활약하는 인물들 중에 유비를 무시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점에서 유비에게서 상당한 잠재력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유비와 한번 인연을 맺은 관우,장비 등 여러 인물들은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조조나 원소의 제의를 뿌리치고 항상 유비에게 돌아갔다. 서주에서도 미축 등이 합류했고 형주에서도 제갈량과 방통이 합류할 정도로 유비는 인복이 많았다. 뜻은 크고 인재도 늘었지만 이루어낸 것은 적어 조조와 싸우는 최전방의 성 하나에 배치되어 있는 신세가 바로 유비의 상태였다. 말을 타려다가 이 말에 살이 너무 붙었구나 바꾸어 말하면 전장을 뛰어다니며 공업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너무 오랫동안 한가하게 머물러 있었구나 하는 탄식을 하게 되었다. 이른바 비육지탄의 고사다.
유비 스스로 나는 열심히 뛰었는데 이정도에 그칠까하는 물음을 가졌을 것이다. 그동안 유비에게 부족했던 점은 전체 대국을 보는 관점과 기존의 호족들을 묶어내는 외교력이었다.
원래 유비는 왕가의 후예라고 자칭하지만 후세의 사학자들은 이런 주장에 아주 비판적일 정도로 출신자체가 아주 한미하였다. 이런 유비로서는 지방에 오랫동안 뿌리 내린 호족들과는 자라온 배경이 달라서 외교적으로 맞대응하기에는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어려움을 메꾸어주는 역할을 위해서 제갈량과 같은 명문 출신의 인재가 절실했던 것으로 보인다.